역사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전], 이수광, 다산초당, 2006, (090527).

바람과 술 2009. 5. 27. 01:50

추천의 글 - 조금은 낯선 조선시대의 살인사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 이윤성)

 

조선시대에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비롯한 주검을 검사하는 방법은 [무원록(無寃錄)]에 따랐다. [무원록]은 본디 원나라 왕여가 14세기 초에 기존의 [세원록]과 [평원록] 등을 참조하여 편찬한 것으로 검시하는 규정과 방법을 서술한 책이다. '무원록'이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할 목적으로 펴냈다. [무원록]을 따른 검시 방법과 행정 규칙은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사용된다. 당시에 검시하는 주요한 방법은 주검의 안색과 상처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검시에 사용하는 도구, 즉 법물(法物)에 대해서도 규정하였다. [무원록]의 내용은 검시하는 방법에만 국한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검시할 때에 주의할 점에 대해서 기준을 마련하여, 정확성과 엄격함을 도모하였다. 검시는 필요에 따라 초검, 복검, 삼검으로 나누어 시행하게 하였다. 즉 검시를 두 번 이상, 필요하면 세 번이나 네 번까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저자의 말 -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살인사건

 

조선 시대의 법은 살인사건에 대하여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편이어서 부모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현장에서 흥분하여 복수를 하는 경우나 부부, 가족의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서 복수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사로운 복수를 금하고 법에 의해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부모를 죽이고 원수를 현장에서 살해하면 무죄가 되지만 하루가 지나서 앙심을 품고 죽이면 사형에 처해졌다.

 

제1부 감추어진 역사, 조선시대 양반들의 살인

 

조선 최대 권력 스캔들 - 부총리 유희서 살인사건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 스캔들은 선조 36년 8월 21일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특진관(현 부총리) 유희서가 휴가 중인 포천에서 살해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범인으로 의심되어 조사를 받던 네 명의 하수인이 포도청에서 감쪽같이 살해된 사건이다. 사건에 임금의 큰아들 임해군이 연루되면서 조정과 임금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두 달 동안 조정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포도대장 변양걸은 귀양가고, 오히려 피해자의 아들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지만 명재상 이덕형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임금의 아들을 탄핵한 대신들은 줄줄리 파직을 당한다.

 

문중의 이름으로 죽다 - 안협 구 소사 살인사건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여인이라고 해도 질곡의 삶을 살았다. 남편이 첩을 두어도 드러내놓고 질투를 할 수 없었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따라 죽어야 열녀나 절부가 되고 수절을 해야 문중의 영광이 되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은 물론이고 남편이 없는 과부라도 간음을 하면 자녀안(조선시대에 양반가 여자로서 품행이 나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이의 소행을 기록한 문서)에 올라 후손이 출세룰 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이 때문에 사대부가의 유자들은 집안의 여자들이 음란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정조 11년 강원도 안협에 사는 이언이라는 양반이 문중 사람들과 함께 조카며느리 구 소사를 강제로 자루에 넣어 강에 던진 후 돌덩이를 얹어 살해한 잔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야가 들끊었다. 문중의 명예를 위해 일가들이 모여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을 조명한다.

 

집현전 학사 권채의 이중성 - 노비 덕금 살인사건

 

세종 9년 8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쟁쟁한 사대부가 여종을 학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형조판서 노한이 경악하여 사건을 자세하게 수사하자 범인은 뜻밖에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출중하여 일가를 이룬 집현전 응교 권채였다. 세종은 보고를 받고 "참혹하도다, 정녕 참혹하도다!"를 연발하며 개탄했다. 더욱 경악할 일은 이를 죄라 여기지 않는 권채 부인의 태도였다. 노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이 이를 매로 다스리는 것은 그 시대에 항용 있는 일이었으나 권채 일가의 포악하고 잔인한 행위는 실로 주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빚을 갚지 못해 목숨을 잃다 - 조선시대 사채사건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사채업인 대금업이 성행했다. 재상의 벼슬에 있는 사람이 사채놀이를 하다가 탄핵을 받는가 하면, 채무자가 도망을 가자 그 아내를 잡아다가 사사로이 옥에 가두어 놓고 한 달 반이나 채찍질을 해 죽인 사건도 있다. 숙종 3년 12월, 한양 성 밖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포도청에서 조사를 해보니 사채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채는 양반들이 터무니 없는 조건을 내세워 탐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여러 가지 병폐를 낳았다. 돈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거나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므로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특히 이러한 사채제도는 조선 말에 이르면 소작 문제와 함게 백성들을 유민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영의정 아들의 파렴치한 범죄 - 부녀자 납치사건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허적에게는 허견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허견은 아버지 허적의 위세를 믿고 여러 가지 패악을 저질렀는데, 그중 하나가 부녀자를 납치하여 희롱한 사건이다. 그 여인은 이동귀의 딸 이차옥으로, 서억만의 아내였다. 때마침 그 시기에는 남인과 서인의 칼날처럼 대립하고 있을 때여서 서인은 남인을 탄핵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그러나 숙종이 남인의 중추인 허적을 깊이 신임하던 터라 격렬한 탄핵을 받았음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조선시대 권력자들이 부녀자를 납치하는 행위는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권력에 맞서 살인사건을 수사하다 - 종친 이석산 살인사건

 

세조 1년 12월, 한양에 있는 반송정 아래에서 칼로 난자당하고, 눈이 도려지고, 음경이 베어져 참혹하게 살해된 남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이석산으로 왕실의 종친이어서 권세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거사 동지인 재상 민발의 첩과 간음을 하는 등 사생활이 문란했다. 피해자는 왕실의 종친이고 가해자는 공신이었다. 권력의 최고 정점인 임금과 맞서서 진실을 밝히려 한 동부승지 이휘는 결국 파직을 당하고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제2부 은밀한 목소리, 조선시대 여성들의 살인

 

죽은 자를 말하게 하라 - 평산 박 소사 살인사건

 

정조 때 황해도 평산에서 18세 정도로 추정되는 박 소사라는 젊은 여인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흠흠신서]에 인륜을 파괴한 다섯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살해한 경우로, 입을 막기 위한 사건이다. 사건이 벌어진 원인은 간음이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칼에 찔린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협박하여 자살하게 만든 위핍치사율로, [속대전](조선시대 법전)에 의하면 장 1백대에 속전을 바치면 풀려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3년간의 철저한 수사와 조사로도 진범이 밝혀지지 않자 정조가 암행어사까지 파견하여 진실을 밝힌 사건이기도 하다. 여러 차계 조사와 검험 끝에 엄청난 진실이 밝혀져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열혈 김은애의 지독한 복수극 - 강진 안 소사 살인사건

 

정조 14년(1790년) 전라도 강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한 양갓집 젊은 부인이 안 소사라는 여인을 살해한 뒤에 현청에 와서 자수하고 자신의 원수 최정련을 죽여달라고 고발했다. 강진현감 박재순은 대경실색하여 여인을 동헌 마당에 꾾어앉히고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18세고 성은 김씨요, 이름은 은애라고 했다. 사악하고 간교하여 남을 모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안 소사는 은애를 시누이의 아들인 최정련과 맺어주고 싶어 은애와 최정련이 사통하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퍼트렸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안 소사의 거짓말에 정절을 훼손당했다고 생각한 은애는 마침내 안 소사에게 처절한 복수의 칼을 뽑아 든다.

 

주인을 죽인 죄는 십악의 죄 - 노비 연향의 살인사건

 

조선시대에 노비는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지 못하고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지 못한다는 법률을 정해놓고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가혹하게 다루었다. 주인이 노비를 살해하면 장 90대의 가벼운 처벌을 받지만 반대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면 아무리 정당방위라고 해도 능지처사에 처해진다. 효종 8년 9월, 노비 연향과 그 남편 돌무적이 주인 홍준래를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실이 발각되어 삼성추국을 당하고 능지처사에 처해져 우리의 가슴을 애통하게 만든다. [추관지]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다.

 

질투심에 두 눈이 멀다 - 노비 도리 살인사건

 

성종 5년 10월 흥인문 밖 야산에서 젊은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너무나 참혹하여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성부 동부에서 탐문 수사를 벌여, 살해된 여인이 북부에 사는 참봉 신자치의 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의 진상은 신자치의 아내 이씨가 남편과 간통한 계집종 도리를 시샘하여 어미 이씨와 함께 그녀의 머리를 깎고 때리고 할퀴고, 또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을 지져 사망하자 흥인문 밖 산골짜기에 버린 것이다.

 

제3부 기나긴 전쟁, 조선시대 반군 소탕 작전

 

누가 진짜 도적이란 말인가 - 대도 임꺽정 체포 작전

 

[명종실록]에는 관군이 임꺽정을 잡기 위해 무려 3년에 걸쳐 전면전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정은 양반들이 사재를 털어 간척지를 개발하면 그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토지제도를 허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권문세가들 사이에서는 간척지 개발 붐이 일었고, 백성들은 아렵사리 삶을 이어주던 터전마저 간척 대상이 되어 강제로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임꺽정이 활동했던 황해도 봉산은 갯벌로 갈대밭이 무성했던 지역, 이곳의 간척을 주도한 사람은 당대 최고 권력가인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었다. 임꺽정은 양주 출신의 백정이었으나 황해도로 들어가 간척지에서 수탈당하던 천민들을 이끌고 조정에 대항한다. 도적이 들끊었던 16세기 명종 때, 조정은 임꺽정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결국 임꺽정은 토포사 남치근의 집요한 추격을 받다가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당해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처럼 살 떨리는 전쟁이 있었을까 - 조선시대 검계 소탕 작전

 

폭력배는 폭력을 사용하여 이로움을 쫓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남들이 애써 일해 모은 재물을 빼앗아 생활하여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라는 뜻으로 불한당이라고도 하고 신선같이 산다고 하여 건달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검계는 무뢰배와 살인계에서 비롯된다. 공식적으로 검계, 혹은 살락계라는 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조직 범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더욱 활개를 쳐 마침내 조정에서 검계 소탕 작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검계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력이자 불만 세력이다. 제도권에 영입되지 못한 서자, 천민, 유민, 노비들이 결당하여 도박장과 창가를 돌아다니면서 재물을 갈취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이들은 사회 지배층인 양반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을 살육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것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포도대장으로 명성을 떨친 장붕익은 영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포도대장을 역임하면서 소위 당시의 조직 폭력배인 검계 소탕 작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칡넝쿨로 양팔을 묶고 눈을 빼다 - 해적 김수온의 14인 살인사건

 

순조 29년 10월, 경기도 강화군 통진에서 여러 구의 참혹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경기도 관찰사 김렴의 장계는 조정을 경악시켰다. 해안에 떠밀려온 시체들은 칡넝쿨로 결박된 채 눈알은 빠져 없고, 입은 찢어지고, 얼굴은 일그러진 상태였다. 경기도 관찰사 김렴은 각 진영 및 연해의 각 고을에 관문을 발송하여 범인 검거에 나섰다. 그 결과 해적들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희생자가 14명이나 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해 11월 9일, 강화유수 신위는 14명의 인명을 바다 가운데서 결박해 수장하고 1만여 냥의 전재를 탈취한 해적 김수온을 검거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조선시대에 파주 문산포, 강화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흉악한 해적 김수온을 비롯한 10명의 해적은 모조리 참형을 당한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다 - 사이비 교주의 사기사건

 

조선 숙종 때 손처경이라는 사람이 신승으로 위장하여 수많은 부녀자를 농락하고, 자신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임금에게까지 사기를 치려다가 들통이 나서 처형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종교는 때때로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혹세무민한다. 흉년이 들고 관리들이 수탈을 일삼아 백성들이 굶주리다 보면 도적이 되거나 자신을 구원해줄 진인을 기다리게 된다.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여린 마음을 파고든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백성이 사이비 종교나 요승에 현혹되어 재산을 탕진하고, 부녀자들은 몸이나 재산을 바쳐 불로장생과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수십 명의 부녀자를 농락한 손처경의 기발한 엽색 행각은 이러한 백성들의 심리를 이용한 사건이었다.

 

제4부 짓밟힌 인생, 조선시대 강압수사

 

10년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 - 약노의 반옥사건

 

살인사건에는 종종 억울한 일이 발생한다. 조선시대에 검안 기록을 바탕으로 치밀한 과학수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반옥도 적지 않다. 또 권력가나 임금의 친척들은 죄가 드러나도 가벼운 처벌을 받고, 왕자들은 살인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 일이 잦았다. 지방에서도 양반, 토호는 살인을 해도 신문을 받을 때 곤장을 맞지 않아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여인이 삼복으로 석방된 일도 있다. 세종 때 곡산에 사는 약노라는 여인도 주술을 부려 살인을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0년 동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삼복으로 석방되었다.

 

14년간 범인을 추적하다 - 김봉생 사건

 

현종 11년 12월 14일 희정당에서 임금이 사형수를 삼복했다. 임금이 사형수를 심리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임금이 죄수를 심리할 때는 대신을 비롯하여 30여 명이 입시한다. 이날 현종이 심리한 사건은 수안의 죄수 이지률 사건이었다. 김애격의 처 봉생이 14년 전에 죽었다는 이지휼을 찾아 포도청에 고발하면서 오래전에 종결되었던 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지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  

 

   부록 - 조선의 수사 지침서 [무원록]과 [심리록]

 

부록 - 조선시대 포도대장 이야기 [장대장전]

 

부록 - 조선시대 여형사 다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