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670년(현종 11년)과 1971년(현종 12년) 두 해에 걸쳐 연이어 대기근이 들었는데, 극서을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이 대기근은 조선을 강타해 무려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조선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정부는 여러 시책을 펼치며 위기 탈출을 모색했다. 그 점에서 17세기는 대기근의 시대이자 위기의 시대였다.
프롤로그 - 17세기의 재발견
이상 기후는 예나 지금이나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17세기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기후 변화가 유독 심했던 시기다. 17세기 기후 변화는 조선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17세기는 변화와 역동의 시기였다. 그리고 전란, 북벌론, 반정, 예송, 환국, 대동법, 진휼청, 반란 등 조선의 주요 17세기사가 기후 변화와 밀접한 연관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
: 17세기에 조선은 유난히 자연재해를 자주 입었다. 재해와 기근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반복되었다. 그래도 그것이 유독 심한 때가 있었다. 요컨대 효종(1649~1659), 현종(1659~1674), 숙종(1674~1720) 초년은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아마도 한국사상 가장 심한 기근을 겪었던 시기였다.
대기근은 조선 사회를 바꿔놓았다
: 흉작은 무역과 비축이 미비한 조건에서 결국 기근을 남길 수밖에 없다. 17세기에 한반도에 불어닥친 연이은 대기근도 조선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했다.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닌 초대형 기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기근에 대한 연구는 사회사적 접근에서 출발한 나머지 진휼사의 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기근이 제공한 정치적 스트레스나 산업 구조의 개편 및 생활문화의 변화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신대기근'이라는 현미경
: 조선왕조는 500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는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모두 17세기에 있었다. 첫 번째는 1670년(현종 11년, 경술년)과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에 연이어 든 '경신대기근'이다. 두 번째는 1695년(숙종 21년, 을해년)과 1696년(숙종 22년, 병자년)에 연이어 든 '을병대기근'이다. 조선 정부는 수습책 마련에 100년에 가까운 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경신대기근'은 전개 양상이 특이하고 복잡하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휩쓴 온갖 자연재해, 사상 초유의 식량 위기,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대재앙이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돌도, 죽고, 도둑질을 하고, 살상을 하고, 변란을 꿈꾸었다. 극복 과정에서는 위정자들의 시행착오와 정파 간의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이웃 국가의 불안정한 정정은 재난 극복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정치, 외교, 산업, 재정, 복지, 재해, 문화 등과 관련해서 조선 사회가 대기근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대기근에 처한 국가와 국민, 왕권과 신권, 집권세력과 재야세력,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몇 가지 남은 과제
:
01 17세기 소빙기, 타당한가
인류 역사에서 17세기는 아주 특별한 시기다. 이때 지구 기온이 전반적으로 약간 내려가 추운 날씨가 잦았고, 이에 따라 빙하의 면적과 두께가 넓어지고 두꺼워지는 소빙기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빙기 기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잦은 가뭄과 홍수를 유발하는 일기불순이 장기간 반복하는 현상,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내려가고 서늘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이 잦아 이상 저온이 장기간 지속하는 현상이 지적된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이상 저온이 인간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첫째, 소빙기 기후는 각종 자연재해를 가져와 식물의 성장 시기를 단축하고 경작지를 축소해 농산물의 생산을 감소시켰다. 둘째, 소빙기 기후는 당시 사람들의 경제 활동과 소비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소빙기 기후의 영향은 주로 '위기론'의 증표로만 검토되었다. '위기론'은 현상의 한 단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소빙기 기후의 영향을 여러 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17세기는 위기였는가
: 기후 변화 외에 17세기 위기를 명료하게 입증할 다른 대안은 없었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17세기 위기론'을 입증하기 위해 소빙기 규명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연구를 토래로 17세기 유럽은 위기였고, 그 요인은 소빙기 기후에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조선은 어떠했는가
: 유럽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된 '17세기 위기론'이나 '17세기 소빙기'는 학계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유럽만의 문제로 인식하는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데까지 관심이 확산되었다.
02 대기근, 이전에는 없었는가
자연적 원인에 의한 기아는 기근으로 발생한다. 기근은 흉작으로 식량이 고갈되어 사람들이 굶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단순히 굶주림에 그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굶주려 죽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있다. 편의상 전자를 소기근이라 한다면, 후자를 대기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기근은 사회에 치명적인 충격을 가해 체제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대기근, 조선을 뒤흔들다
: 기근 횟수를 집계한 한 연구를 보자. 이 연구는 각종 편집 자료 외에 방대한 [실록]을 토대로 조선왕조 519년간 총 149회, 즉 1.2년당 한 번꼴로 기근이 발생했다고 한다. [상위고(象衛考)]에 수록된 역대 기근 현황을 보면, 조선왕조 개창부터 1908년가지 기근은 총 104회나 되어 대략 4.9년마다 한 번씩 기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대기근은 총 25회로 20년마다 발생했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휠쓸려 갔다. 기근의 위력은 개인과 가정, 지역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했다. 특히 대기근은 국가 전체를 흔들어놓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녔다.
조선, 대기근을 극복하다
: 임진왜란 후 전라도 진원과 경상도 단성처럼 전란으로 폐읍이 된 사례는 있지만, 대기근으로 폐읍이 된 사례는 전무하다. 이는 조선의 내구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은 어떻게 대기근을 극복했을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천혜의 자연 조건, 상부상조 정신, 극복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양반 지주나 부농들은 기근 시 비축 식량을 혼자만 먹지 않았다. 지방 양반들은 지역 차원의 기근 구제 제도를 두었다. 이러한 '선행'이 있었기 때문에 지주와 빈농의 관계를 신분제와 함께 유지할 수 있었고, 어지간한 기근도 극복할 수 있었다. 종농주의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기근을 중대 문제로 인식하고,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구황 시스템을 구축했다. 구황 시스템은 구휼 기관, 체계적인 행정 좆기망, 신속한 통신.교통망, 막대한 비축곡, 원활한 해상 운송 등의 보조 수간을 통해 작동되었다. 정부는 국초에 중앙에 상평창과 의창이라는 진휼 기관을 두었고 지방에 진휼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미흡하자 1511년(중종 6년)부터 기근 때마다 진휼을 전담하는 진휼청을 설치해 임시 기구로 운영했다. 진휼청은 인조대에 상설 기관으로 운영되고 독자적인 재원도 보유해 기근 극복을 위한 관제탑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또한 기근에 대비해 구황서를 간행하거나 구황 작물을 장려해 가용 식량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비상시에 대비해 3년분의 비축곡을 곳곳에 조성했다. 기근 구제의 제1차적 책임을 지방의 감사와 수령에게 부여했다.
03 현종 즉위와 어수선한 정국
현종대는 대기근이 연구되어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현종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이 들어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인의 주장은 신권을 강화하는 데, 남인의 주장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특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부왕과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세자 관례와 남인의 부상
: 남인이 허적을 중심으로 다시 부상하자, 서인은 남인 견제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서인과 남인의 충돌 가능성은 점점 놓아 갔고, 세제의 관례(성인식)는 그 도화선이 되었다. 관례일을 잡자 서인 출신 이조 판서 조복양이, 세자 관례는 나라의 중요한 일이니 초야에 있는 훌륭한 학자, 즉 고향에 내려가 머물고 있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를 불러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송준길과 이유태는 올라왔지만, 송시열은 질병을 이유로 올라오지 않았다. 임금은 송시열에게 빨리 올라올 것을 수차례 당부했지만 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허적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자 관례에 대하여 송시열계 서인은 꽤 불만이었던 것 같다. 서인과 남인의 세력 경쟁은 세자 가례 때 또 찾아왔다. 세자빈 간택령을 내리자 서인 출신 홍문관 부제학 이민적이 열 살 결혼은 시기상조라며 세자 혼례 논의를 중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서인은 국혼이 정파의 진로와 직결되어 있고, 만에 하나 남인과 왕실이 혼인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진로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추진력이 뛰어난 허적을 배제하고 건강이 여의치 않은 영의정 정태화를 총괄자로 삼은 것은 서인의 반발을 감안한 조치였던 것 같다. 금혼령이 내린 가운데 전국에서 간택 단자를 올렸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서인 출신이다. 인조반정 이후 국혼을 고수한 서인의 원칙이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김징 탄핵과 서인의 수세
: 서인의 세자 관례와 가례를 부정적으로 보며 남인을 공략하고 있을 때, 서인 출신 김징을 탄핵한 사건이 친남인 쪽에서 터져 나와 정국을 크게 긴장시켰다. 정국은 계속 꼬여만 갔다. 세자 관례일이 예정되어 있는 가운데, 송시열.송준길. 양송의 전위 역할을 하던 김징이 김석주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심문받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송시열계 서인은 힘겨운 공방을 진행했다. 송준길이 김징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서인들이 대거 발 벗고 나섰다. 김징은 혐의가 사실로 밝혀져서 황해도로 유배되고, 그에게 선물을 바친 관리들과 그를 옹호한 서인 출신 관리들은 모두 줄줄이 크고 작은 처벌을 받았다. 이 일로 서인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궁지에 몰린 임금
: 김징 탄핵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서인은 언관직에 포진한 자파 인사들을 동원해 임금 누이의 저택 공사를 문제 삼아 임금을 물론이고 남인과 척신에 대한 대 반격에 나섰다.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공주 저택을 신축하려던 임금의 의도가 서인들의 집요한 공세와 여론의 질타로 무산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임금이 받은 정치적 타격은 컸을 것이다.
04 요동치는 동아시아 정세
세자 관례와 가례, 김징 탄핵, 공주 저택 공사 등으로 경색 정국이 이어질 때 외교 갈등까지 겹쳐 국내 정정은 더욱 불안해졌다. 대청 외교 갈등은 칙사 접대 때문에 발생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온 청나라 사신 때문에 국가는 국가대로, 임금은 임금대로, 대신은 대신대로 체면을 구기고 곤혼을 치르고 있었다.
대륙의 변란 소문
: 평온할 것 같던 중국 정세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명나라 부흥 운동으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정세는 곧바로 국내 정정으로까지 이어졌다.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민정중의 말에 임금은 매우 놀랐다. 대륙 정세 변화에 대한 현종의 우려는 나중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조정 신료들 가운데에서 정경과 합세해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이 제기되어 정국을 발칵 되집어놓았다. 조선 혼자서 청나라를 치자는 이전 효종대의 북벌론과는 양상이 달랐다. 이 북벌론은 북경까지 알려져, 조선이 정경과 손잡고 쳐들어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북경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다. 이 유언비어를 해명하느라 조선 정부는 진땀을 뺐다. 그러나 오삼계와 정경이 소탕되면서 소용돌이는 가라앉게 되었다.
일본의 왜관 이전 요구
: 대일 외교 갈등은 왜관 이전 문제로 발생했다. 30년간 끌어온 왜관 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를 때 자행한 일본인들의 무단 행동은 국내 민심을 동요시켰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조선 정부는 초량을 후보지로 지목했다. 일본인 기술자 150명과 조선인 기술자가 공동으로 작업한 이설 공사가 착공된 지 3년 후인 1678년(숙종 4년)에 완성되었다. 신왜관은 구왜관의 10배가 넓은 10만 평 규모로 조성되어 이후 200년 가까이 조선과 일본 외교의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설 공사를 단행한 정치 세력이 바로 남인이다.
05 하늘과 땅의 불길한 징조들
1670년(현종 11년) 윤 2월, 동지사 일행이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민정중은 청나라 사람들이 서쪽에서 나타난 혜성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중국에서 혜성이 출현한 소식은 조선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혜성 출현은 괴변이었다. 현종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신하의 조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임금의 하교가 떨어지기 무섭게 3정승이 차례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임금은 모두 물리쳤다. 서양의 천문학이 종교와의 타협물이라고 한다면, 동양의 천문학은 정치와의 타협물이다. 따라서 권력을 잡고 있는 편을 무너뜨리거나 폄하하기 위해 자연의 이상 현상을 과장 해석하는 일이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인 측에서는 그러한 시도를 감행했다. 남인에게 하늘의 변고는 숨통을 틀 기회임이 분명했다.
유성, 하늘을 가리다
: 하늘에거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1670년 새해 시작과 함께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의 움직임은 농사, 민심, 왕권, 국운과 관련한 중대사였다.
지진, 전국을 강타하다
: 하늘의 이변에 이어 땅의 이변도 함께 나타났다. 이 무렵 지진이 남쪽의 경상도와 북쪽의 함경도에서도 일어났다. 이로 보아 지진이 전국적으로 발생한 것 같다. 지진이 일어나면, 정부에서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 도내 중앙에서 해괴제를 지내게 했다. 예로부터 지진을 하늘의 경고라거나 병란의 징조로 여겼기 때문에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해괴제라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지진은 당시 사람들에게 몹시 두려운 재앙이었다.
06 유례없는 자연재해
이변이 하늘과 땅에서 나타나면서 불길한 징조가 고조되었다. 결국 그것은 온갖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자연재해는 냉해로 시작되었다. 냉해는 이전에 보지 못한 피해를 남겼다. 여름이 시작되는 4월이 접어들자, 상황은 더욱 나빠져 냉해가 들불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5월에 들어서도 우박은 계속 전국을 강타했다. 여름의 마지막 자락 6월에도 쉬지 않고 우박이 내렸다. 냉해가 기승을 부리던 이때에 수해와 풍해까지 겹쳐 평안도 전역은 총체적 재해권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8월이 되면서 냉우까지 겹쳐 냉해가 가중되었다. 함경도의 혹심한 피해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냉우는 수확을 앞두거나 갓 씨앗을 뿌린 작물 모두에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이 냉우 피해는 전라도에서도 대량 발생했다. 냉우가 내리더니 급기야 겨울이 되기 전에 폭설이 전국에 쏟아지기 시작해 설재까지 냈다. 가을에 뜻하지 않은 폭설이 내린 것이다. 기온 하강 현상은 혹심한 겨울 추위로 이어졌다. 해를 이어 찾아온 우박, 서리, 눈, 찬비에 대한 공포는 그해 곡물 생산에 먹구름을 예고했다. 불안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싹도 못 나게 하는 봄가뭄
: 새해 벽두부터 눈, 서리, 우박이 온 천지를 꽁꽁 얼어붙게 하더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대지를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연재해는 가뭉이다. 전국 각도에서 기우제를 올리기 시작했지만, 4월에 접어들어도 가뭄은 여전했다. 송준길은 현종에게 하늘의 재앙이 극심하고 또 이토록 가뭄이 들었으니, 나랏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대신에게 물어보고, 임금 자신도 잘잘못을 헤아려보라고 진언했다. 직격탄을 얻어맞은 임금은 눈앞이 캄캄했다. 논에 모내기를 할 5월이 되어도 가뭄이 해갈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농사에도 가장 중요한 적기 영농을 놓치면 1년 농사는 끝장이나 다름없다. 1년 농사의 생명이 달려 있는 4월과 5월이 가뭄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1670년 가뭄은 참으로 심각했다. 사상 최대의 가뭄에 신음하는 조선땅에서 천변재이에 대한 해석이 최대 쟁점이 된 순간이었다.
연일 올리는 기우제
: 조선 정부는 가뭄에 대비해 제언사라는 관청을 두고 수리 시설을 관장하게 하고, 저수지를 축조해 물을 가도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만들었다. 비를 내려주라고 하늘에 청하기 시작했다. 오방색의 용을 그려 오방위에 걸게 했다. 부채나 가죽북 등의 사용을 금하고,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게 했다. 부채질은 비구름을 날려버리고 양이 성하면 음, 즉 비가 차단되는데, 가죽이나 남쪽은 양이기 때문이다. 관례를 치르고 한숨을 돌린 예조는 3월 20일에 가뭄의 실상을 임금에게 아뢰면서 기우제의 거행을 건의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무려 2개월 이상 계속된 기우제였다. 비를 오게 하려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 외에, 사람들의 원망하는 기운을 잠재워야 했다. 먼저 산 자의 원망을 덜어줘야 했다. 이를 위해 죄수들의 죄를 너그럽게 처결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걷잡을 수 없는 여름 물난리
: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왔다. 그런데 해갈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수해가 발생했다. 큰 가뭄 끝에 장마가 끊이지 않았고 초대형 물난리가 이어졌다. 가을 추수와 씨앗 뿌리기 절기가 임박하는데 날이 갤 가망마저 없었다. 76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문을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하기를 청하고, 죄수들을 풀어줄 것도 건의했다. 이에 임금은 소결(疏決)은 차차 하겠지만, 기청제는 즉각 거행하라고 예조에 명했다. 예조는 도성 사대문에서 영제를 지냈다. 영제란 오래도록 장마가 있을 때 서울의 사대문 다락 위에서 날이 개기를 비는 제사다. 누가 겨울에 이처럼 많은 비가 내리리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중국에서도 지난해에 기록적인 홍수가 있었고, 그 다음해에논 홍수가 이어졌다. 수해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주도를 강타한 초대형 태풍
: 태평양에서 북상하는 태풍을 처음 맞는 곳은 제주도다. 큰 파도를 뿜어내자 해일이 밀고 들어와 산과 들을 뒤덮었다. 온갖 초목이 짠 바닷물에 절어 죽어갔다. 폭탄을 맞은 것처럼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다.초대형 태풍이 휩쓸고 갔으니, 사상 유례 없는 대기근이 제주도에 찾아온 것이다. 해가 바뀌어도 제주도의 사정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전체 도민의 20~30%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닥치는 대로 갉아 먹는 병충
: 병충을 당시 사람들은 황충(蝗蟲)이라고 했다. 자연재해가 냉해와 가뭄에 그치지 않고 병충해로 이어지자, 영의정 정태화는 현재 겪고 있는 재난은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황충은 황(누리=메뚜기)과 충(벌레)을 말한다. 이듬해에도 황충 피해는 여전했다. 누리(메뚜기0 피해가 여기까지 이르자, 평안 감사는 도내 중앙에서 포제를 거행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예부터 홍수, 역병, 우역, 황충, 폭설 등의 재해가 있으면 의례히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를 올렸는데, 이 가운데 포제는 황충의 재해를 물리치기 위해 올리는 제사로 여제, 영제 등과 함께 대사, 중사, 소사 가운데 소사로 분류되어 있다.
07 창궐하는 전염병과 가축병
1670~71년 재해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충해 등 5대 재해가 겹친 전례가 없는 대재해였다. 여기에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치면서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재앙으로 인식되었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방역 시스템을 즉가 가동해 확산을 차단하는 작업이 급선무다. 이때 감염된 집이나 마을의 입구를 소나무 가지로 막아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지붕에 가시나무를 올려 모든 사람이 전염병 환자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다. 또 병에 걸려 죽은 자를 바로 땅에 묻어 병균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병막, 피막, 산막이라고 하는 오두막을 지어 환자를 격리, 수용했다. 감염자의 옷가지 등을 태우는 일도 해야 했다. 또한 하루라도 빨리 환자를 치유하고 소생시키기 위해 서둘러 치료해야 했다.
활인서에 수용하라
: 지방에서는 수령과 향리들이 나서서 구호 활동을 펼쳤지만 전문 시설이 부족해 전염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은 사정이 달랐다. 서울에서 발생한 전염병 환자는 이 활인서에 수용되어 구호를 받았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용햇다. 어쨌든 서울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 후 전국에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먹을 것을 찾아 꼬리를 물고 서울로 모여들었다. 1671년 1월에 도성 내외에 진휼소를 개설해 무료 급식을 시행하자, 기아자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 때문에 서울의 전염병은 들불처럼 번져 병자가 거의 수천에 이르렀다. 궁궐까지 엄습한 전염병 때문에 임금이 파천을 하려 한다거나, 궁중 행사를 연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로 나돌았다. 한성부의 최고 관리들도 줄줄이 전염되어 죽음에 이르는 등 행정 공백을 초래했다. 이런 가운데 진휼소의 구휼이 끝나면서 활인서와 사막에 몰려드는 환자는 눈덩이처럼 불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처럼 수많은 병자가 활인서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적지 않은 병사자가 이곳 활인서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대재앙을 차단하지 못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병을 피해 떠나는 사람들
: 병을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태산 같이 쌓인 방역, 치료와 사망자 처리 그리고 진휼을 할 지방관청의 수령과 향리들이 병으로 죽거나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청사가 텅 빈 지방관청이 한둘이 아니었다. 행정 공백이 발생해 전염병과 대기근 피해 상황이 제대로 파악될 리 없었다. 전염병은 국가의 교통.통신망을 마비시켰다. 서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관리들이 감염되어 장기간 결근을 하거나 사직을 청햤다. 그렇지 않아도 사망자가 있어 행정 공백을 우려하는 상황인데, 사직하는 신하들마처 한둘이 아니니 임금은 입궐울 독려하고 사직서를 물리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많은 중견 관리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성을 떠났다. 사실 그들의 속셈은, 전염병이 두려워 서울을 벗어나 감염되지 않은 곳으로 옮기기 위한 데 있었다.
여제를 올려라
: 기우제와 기청제를 올리느나 겨를이 없던 각 고을의 수령들이 여단으로 나가서 여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여제란 전염병을 몰고 온 나쁜 귀신을 몰러나게 하기 위해 하늘에 올리는 제사이고, 그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여단이다. 각 고을마다 읍내에 나라와 고을의 안녕을 비는 문묘, 여단, 성황단, 사직단 등 1묘 3단의 제단이 있다. 이 가운데 여단은 대부분 읍내 북쪽에 있는데, 북쪽은 음양에서 음, 즉 귀신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여단을 설치했다. 난리에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원기가 뭉치면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법이다. 원기가 드세면 천지자연이 균형을 잃고 재앙을 불러오는 것도 우주의 섭리다.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마음을 경건하게 하면 그 어떤 재해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의 재이관(災異觀)이었다.
소를 죽이는 우역
: 전염병이 한창일 때 우역이라는 가축병마저 겹쳐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높아졌다. 소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데, 소가 죽어가니 눈앞에 닥친 가을갈이 농사가 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1671년 새해가 접어들어도 우역은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69년에 함경도에서 우역으로 한 차례에 1만 8천 마리가 폐사했다. 이는 조선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소 폐사 사건이다. 이처럼 우역이 번져 소가 죽으면 전염을 막기 위해 죽은 소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마단에 마제를 올려 우역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사람들은 역병과 우역이 그것도 온갖 자연재해와 함께 동시에 일어난 것을 가장 불안하게 생각했다.
도살 금지령
: 1670~71년 2년간 우역으로 죽은 소가 4만여 두에 이른다. 보고된 숫자지만, 염병으로 죽은 사람 수의 배 가까이 된다. 대기근 직전 전국 호수 134만 호 가운데 농가 호수를 100만으로 추정하면, 전체 농가의 4%가 소를 읽은 셈이다. 모든 농가가 소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를 보유하고 있는 농가가 소를 잃은 실제 비율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이러한 소의 대량 폐사는 엄청난 재산 손실이었다. 잇따른 소의 폐사는 농사에도 치명타를 날렸다. 소가 없으면, 농사와 교통의 수단이 막히게 된다.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송금, 주금, 우금 등 3금이라하여 소나무를 베고, 술을 담는 것과 함께 소를 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3금 가운데 우금을 특히 강조했다. 농본 정책을 표방한 조선 정부에서 농우를 확보하기 위해 우금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다.
08 사상 최악의 '경신대기근'
기후 변화가 장기화되면서 대재해는 조선을 위협했다. 여기에 왜란, 여진 방어, 나선 정벌, 호란, 북벌 계획 등으로 재정은 악화되었다. 잇단 재해와 재정난은 17세기 조선이 직면한 대기근의 주요 원인이었다. 1670년 한 해 동안 자연재래로 농사를 망친 곳은 전국 360개 고을 전부였다. 이 가운데 매우 심하게 흉작을 입은 곳이 103개 고을, 그 다음이 156개 고을이고, 나머지 100개 고을은 보통 해의 대흉작 수준이었다. 이런 대흉작은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1670년은 대기근의 해다. 이 대기근은 또 재해를 만나 1671년까지 이어졌다. 1670~71년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대기근으로 최대 규모의 식량 고갈 상태를 가져왔다. 민간에서 보유한 재고 곡물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관아에서 환곡을 대출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 다음으로 기댈 곳은 양반 지주나 부자 농민 등 재력가들이다. 경신대기근 후 지방 양반들은 교훈삼아 지역 사창 설치에 박차를 가해 17세기 말이나 18세가 초기에 도처에 사창이 설치된다.
뛰는 곡물가
: 쌀뒤주는 바닥을 드러냈는데 관아의 대출곡과 부자들의 기부곡마저 기대할 수 없으니 다음으로 기댈 곳은 시장이었다. 곡물이 시장에 나오지 않자 곡물 값이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해 마치 금값 같았다. 굶주림을 이겨내는 데에 곡식과 함께 소금만 한 것이 없다. 바닥난 곡식을 대신해 초근목피를 먹을 때 소금을 넣어야 먹을 수 있다. 기근시 소금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 곡물과 소금 값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기승을 부리는 사재기
; 곡식이건 소금이건 값이 올라도 시장에 나오는 물량이 없었다. 대기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까지 상륙하고 말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남의 집에 기숙하며 도성을 지키던 군인들이 식량이 바닥나자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휴대한 조총이나 군장비가 유출되면 더 큰 사태를 초래할 것 같아 수습하여 무기고에 보관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초근목피와 인육을 먹다
: 곡물 가격 폭등과 사재기는 식량난을 가속화했다. 쌀, 보리, 조, 콩, 기장 등 오곡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을 때믄 솔잎가 도토리가 최고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구황서를 전국에 내래 보내 솔잎과 도토리의 먹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 주고 널리 복용하게 했다.
길거리를 메운 기아자
: 곡식이건 초근목피건 먹을 것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일제히 먹을 것을 찾아 집을 나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유민은 여름 양곡이 되는 밀과 보리가 흉작이 되자 발생하기 시작해 가을에 접어들자 본격화되었다. 심지어 왕실 친척 중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 유리걸식하며 연명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1671년 새봄이 오자, 혹한을 가까스로 넘긴 기아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세월이 다가왔다. 가을에 수확해 저장한 곡식을 겨울에 모두 소비해 남은 곡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1670~71년 2년 동안에 전국에서 굶주림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500만 명 가운데 얼마나 될까?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아를 체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09 2년간 1백만의 죽음들
기아자는 보통 10일을 못 넘기고 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사자가 속출하면서 사망 보고가 연이어 중앙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좀체 공개하지 않았다. 지방관들이 사실 공개를 꺼리고 있었다. 석불리 공개하면 진휼에 나태했다고 문책만 당할 분위기이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 이르자 날이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겨울철 석 달 동안 굶주린 백성 가운데 얼어 죽는 자가 눈깜작할 사이에 증가했다. 봄을 보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여름이 되어도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밀과 보리가 온갖 자연재해로 말라 죽었고, 국가 재정이 바닥나 더는 진휼소를 운영하기가 어려워 철수했기 때문이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아사자는 많이 줄어들었다. 가을 농사가 지역에 따라 그런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듬해까지 대기근의 여파는 이어져 아사자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수없이 늘어나는 병사자
: 1670년에서 1671년 사이 수도 서울과 전국 팔도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보고된 수는 무려 5만 2천 명에 이른다. 그리고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된 수는 무려 2만 3천 명 이상이나 된다. 그런데 이러한 숫자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제대로 보고될 리가 없는 행정 체제와 보고할 수도 없는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시긴이 가득한 금수강산
: 아사자와 병사자가 동시에 대량 발생해 조선 천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1671년이 저물어가는 12월 5일에 송시열계 서인인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장문의 상소문에서 구체적인 사망자 수를 들먹였다. 기근과 여역으로 떠돌다 죽은 사람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치면 그 수가 거의 1백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윤경교의 1백만 명 사망설은 당시 정국을 몰아 남인과 척신을 몰아내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렸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계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이 문제를 놓고 정쟁이 일어났다.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측근 신하를 서율의 동교, 남교, 서교 세 곳에 보내어 '경신대기근' 때 죽은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시신을 도성 밖으로
: 특히 도성의 시신 처리로 심한 골머리를 앓았다. 도성 주민들은 본인들의 생활이 어렵고 감염될 것을 두려워해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기피했다. 5부의 관리들도 시신 수습에 적극 나서지 않아서 잇달아 문책을 받았다. 그런데 도성 성문 밖 10리 안에 시신을 묻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 많은 시신을 먼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모두 기피하고 형편이 못 미처 이 일을 담당할 일군이 없었다. 경기도 승려 200명을 선발해, 삯을 주고 주검을 묻도록 했다. 성문 10리 밖 외남산과 모화관 뒤 여러 곳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검들이 이장되었다. 다 묻었다고 보고하자, 현종은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측근을 보내어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고, 이 일을 담당한 승려들에게는 노고를 높이 사 공명첩과 재물을 내려주었다.
10 동요하는 민심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보통 고향을 떠나거나 살인과 도둑질 등 범죄의 유혹에 빨지기 쉽다. 먹을 것이 부족한 흉년에 산 사람이라도 살려면 입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전부터 사람들은 기근이 들면 입을 줄이기 위해 자녀를 팔거나 죽이고 거리에 버리곤 했다. 이번에도 어린 아이들을 거리에 버리는 사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 바람에 많은 어린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유기아라고 한다. 대량으로 발생한 '대기근 고아'는 사회적 문제였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분부하면서, 공노비건 사노비건 간에 관청이나 주인이 돌려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길거리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거두어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떠돌며 도둑질하는 사람들
: 도둑질이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밝생하자 기아자들에 대한 구제책과 도둑질에 대한 처벌책을 거론했다. 목화 농사가 흉작인데다 유독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이제 입고 있는 옷을 강탈당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그것도 죽은 시신의 수의를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조정 신료들은 조적들이 점점 많아져 결국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둑을 잡은 수령에게 포상을 하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목민관으로서 자상한 훈계와 시급한 진휼로 다스리기는커녕 포상을 노린 나머지 진상을 조작해 강도로 둔갑시켰다. 지방관들의 직권 남용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경미한 처벌이 가능한데도, 경각심을 심어즈기 위해 시범 사례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조되는 변란의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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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흉한 도성 민심
: 상인.군인.품팔이가 대부분인 서울 백성들은 기근이 들어 곡물 값이 치솟으면 그만큼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670년 초부터 서울에서 크고 작은 도죽질이 끊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도적이 도성 안에서 빈번하게 활약하는데 포도군이 붙잡이 못하기 때문에 군인이 순찰하지만 정예군을 투입해도 도성의 치안 상황은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71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1 진휼을 서둘러라
[경국대전]에 따르면, 진대(賑貸)는 호조가 소관하는 업무다. 호조에 속한 3사 가운데 판적사가 사무를 관장하고, 3창 가운데 군자감이 곡물을 방출했다. 그런데 16세기 중종 대부터 대기근이 들면 정부는 진휼청을 설치해 운영했다. 따라서 대기근을 극복하는 길은 진휼청을 조기에 정상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조선 정부는 기근이 들 때마다 진휼청을 설치하다가 인조 때부터 상설화했다. 진휼청은 기근 시 비축곡을 풀어 곡물을 대여하거나 판매할 뿐만 아니라 양곡과 죽을 제공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방도는 진휼 정책의 관제탑이라 할 진휼청을 조기에 정상 가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진휼청은 그동안 잦은 대소 기근에 대처하면서 자체 비축곡을 거의 소모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진휼을 실시할 때마다 다른 기관의 곡물을 끌어올 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헌납을 받아 사용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국가 재정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와 정비를 병행했다.
끊임없이 방출되는 비축곡
: 강화도, 남한산성, 평안도의 비축곡을 집중적으로 진휼에 투입했다. 호란 이후 국가 비상 시 임시 수도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튼튼한 방어 기지를 조성하고 방대한 비축곡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방의 요지이자 대청 외교를 담당하는 평안도에도 관향(管餉)이라는 비축재를 막대하게 조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 비상용 비축 물자를 조운선으로 실어와 진휼뿐만 아니라 국가 재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발 디딜 틈 없는 진휼소
: 무한정 비축곡을 방출할 수만은 없었다. 적은 곡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진휼 방법이 필요했다. 굶주린 자들에게 쑤어 먹이는 설죽은 적은 재료로 많은 사람에게 급식할 수 있어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실시해 온 기민 구제책이다. 보통 밥 한 그릇으로 죽 네다섯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진휼소는 아무 때나 설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진휼소의 개폐는 "1월 보름에 시작하여 보리 추수까지 기한한다. 만일 재해가 심한 지역으로 아사 처지에 놓여 있으면 급히 구제하여 이 기한에 구애하지 말 것"을 원칙으로 했다. 진휼소를 개설하면 이재민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임시 막사, 취사와 급식을 하는 죽고 등 부대 시설을 갖춰야 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아자에게 반드시 간장을 물에 타서 먹인 다음 식은 죽을 먹여서 소생하기를 기다린 후 점점 죽이나 밥을 먹여야 한다. 서울은 다른 지역보다 수준 높은 구휼과 방역을 조기에 실시해 수도로서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도 일제히 수령이 주재하는 진휼소를 읍내에 개설했다.
국물도 없어
: 개설 기간 동안 몇 명이 진휼소에서 죽을 먹었을까? 보고된 숫자만 보아도 월 평균 전체 조선 인구의 20~30%, 100~150만 명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러면 4개월 동안 500만 명 이상인 된 셈이다. 평균적으로 조선 사람 전체가 진휼소에서 죽을 얻어 먹은 꼴이다. 진휼소에 가기만 하면 누구나 죽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통제했을까? 첫째, 죽을 줄 때 필히 호주가 누구인지를 물어 함부로 취식하는 자를 막았다. 둘째,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면 죽을 줄 수가 없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 입적인과 무적인으로 구별하는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진휼소에 오면 대부분 죽을 먹을 수 있었다. 진휼소가 죽을 제공하는 것은 기근 극복의 근원적인 대책이 아닌 응급처방일 뿐이었지만 적은 양곡으로 많은 기아자를 구제해 다급한 불을 끄는 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러면 어떤 문제점이 있었을까? 첫째, 기아자가 먼 거리를 이동한 점이다. 둘째, 진휼소의 환경이 열악하고 집단수용을 한 점이다. 셋째, 곡물이 부족해 충분하게 죽을 공급하지 못한 점이다. 넷째, 관리들의 부정을 들 수 있다.
진휼소를 닫지 마시오
: 진휼소가 실효성을 거두는 데 한계가 있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 외에는 기아자를 구제할 다른 방도가 없어 계속 운영했다. 그렇다고 무한정 진휼소를 운영할 수만은 없었다. 법적 기한이 봄보리 수확 때까지이기 때문이다. 날짜는 유동적이지만 언젠가는 진휼소를 철수할 것이기 때문에, 만약 진휼소를 파하는 기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면 굶주린 백성들이 근때에 가서 낭패를 보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진휼소 철폐는 기근이 해소되지 않아 기아자가 다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큰 논란을 불러왔다. 국정 실무를 이끌어가고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진휼소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자, 언관들은 진휼소를 철수하면 쪽박을 들고 구걸하며 그나마 진휼소에 의지해 생명을 부지하는 무리들이 남김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연일 목청을 높였다. 진휼소 철수 후 정유악의 예상처럼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다. 무한정 진휼소를 열 수도, 그렇다고 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무작정 내쫓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일부 신료들은 그 사이에 가을 추수철까지 진휼소를 연장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현종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임금의 생각과는 달리 진휼소를 당장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재촉하자, 허적이 젊은 사람은 본고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고 노약자와 병자들은 그대로 두어 끼니를 대주어야 한다고 하니, 임금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12 쏟아지는 민생 정책
지방 관리들 가운데 진휼곡을 빼돌리거나 진휼에 소극적인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부는 관리들의 복무 기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1671년 1월에 전국에 진휼소를 개설한 후 진휼소를 성심껏 운영하지 않거나 진휼곡을 빼돌리는 관리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온 나라의 관리들이 진휼을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지가 주요 국정 사안으로 떠올랐다. 다시금 암행어사 파견론이 대두될 시점이었다. 우세를 보이던 신중론은 진휼 정책 전반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사간 남용익의 상소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남용익의 정곡을 찌르는 장문의 상소가 들어온 이후, 조정은 어사를 파견하자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여기에는 진휼소를 철수한 이후 각지의 기근이 악화 일로에 있던 점도 작용했다. 암행어사가 감찰 결과를 보고하고 그에 따라 임금이 처분하자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어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임금의 처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어 정국이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암행어사를 파견한 당초 의도는 수령의 부정행위를 규찰해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대기근이 누그러지고 있던 1671년 말에 이르러 감찰 과정과 결과의 신빙성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또 다른 정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다.
군포를 면제하라
: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이들을 살리는 길은 시급히 식량을 제공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세금을 경감해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 주어야 한다. 세금을 못 내겠다는 저항과 깎아 주자는 건의가 빗발칠 수밖에 없었다. 정부 관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경험적으로 모를 리 없지만, 어느 누구 섣불리 거론하려 하지 않았다. 현종 즉위 이후 연이은 크고 작은 기근으로 세금 체잡과 진휼비 지출이 증가해 국가 재정이 적자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대기근이 본격화된 7, 8월에 이르자 사정은 급변했다. 세금 각운데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이 군역이었다. 군역 대상자 가운데 일부는 번상군이라하여 현역으로 입영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군보라 하여 군포 두 필만 납부하면 된다. 한 가정에 보통 군역 대상자가 두 명에서 네 명 정도 되기 때문에, 군포는 무거운 부담이다. 군보가 내는 군포는 각급 관아의 큰 재정 수입이 되었다. 봄철 냉해와 가뭄 그리고 여름철 폭우와 강풍으로 목화와 삼농사가 흉작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군포로 면포와 마포를 징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문제투성이에 생산마저 불가능한 군포를 대기근이 만연한 상황에서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드디어 정치화가 군포 감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다. 큰 공방은 없었지만, 전면 감면론과 부분 감면론으로 갈리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해 결판나지 않을 것 같자. 임금이 나서서 결론을 내렸다. 일괄 감면을 단행할 수 없고 재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감면해 주라는 것이다. 각 부처는 일제히 군포 경감에 나섰다. 군폴르 경감하면 각 부처의 수입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군역 자체에 대한 개혁론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서인과 남인의 입장 차이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토지세를 감면하라
: 군포 감면 문제를 막 타결하고 나자, 바로 이어 토지세 감면론이 제기되었다. 토지세는 대동미, 전세, 삼수미 등 3세가 있다. 대동미는 선혜처에서 봄과 가을에 1결당 각각 쌀 6두씩 모두 12두를 거두어 각 사의 공물가로 사용하는 것이다. 대동미란 본래 가호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공물을 전세화한 것이기 때문에 대기근으로 가호가 몰락하면 당연히 감면 대상이 된다. 사람에게 부과하는 군포를 가장 먼저 논의해 감면한 것도 이 논리에 입각했다. 이것이 조선의 조세 이론이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전세(田稅)였다. 모든 토지는 이념적으로 '왕토사상'에 입각해 국가 소유라서,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지대, 즉 전세를 납부해야 하고, 전세가 들어와야만 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세 이론 때문에 전세를 감면하는 일은 쉽게 처리할 사안이 아니었다. 겨울이 깊어가자 토제세 감면 정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1670년분 전세는 전액 진휼에 투입되었다. 그러면 1671년분 전세도 지난해처럼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상납하도록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이것은 바닥난 국가 재정과 굶주리는 민생 사이의 딜레마였다. 이때 정부는 양자를 절충한 방법을 선택해 절반은 무기 연장하고 절반은 징수토록 했다. 이리하여 2년 연속 토지세 경감 조치를 내렸다.
부채를 탕감하라
: 농가 부채란 농민들이 종자와 식량 용도로 관아에서 빌린 환곡을 말한다. 환곡을 회수해야 군량을 채울 수 있고 기근에 대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기근 속에서 환곡 이자를 면제할 것인지, 유예할 것인지, 환수할 것인지가 큰 문제였다. 가울 추수철이 끝나자, 일부 수령들은 관아에서 빌려준 환곡 이자를 걷기 시작했다. 뒤늦었지만, 비변사의 하달로 환곡 이자를 회수하는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이어 이자 회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부분 감면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다. 새봄 보릿고개를 만나 당장 먹을 것이 없자 기아자들은 신규 대출을 목이 빠지라고 기다렸다. 당연히 대출곡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빌려준 것도 회술르 못하는 상황에서 막대한 신규 대출까지 겹쳤다. 이자 회수가 난감한 일이 었다. 언관들은 흉년을 구제하는 정치를 논할 때마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대동미, 환곡, 노비 신공, 군포, 장인세 등을 전면 탕감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실무 행정을 맡고 있는 관료들은 국가의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으니 전부 감하기는 어렵다고 대응했다. 행정부는 나국을 타개하고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 책임 정치를 폈고, 언관은 언뜻 부책임하게 보이지만 행정부를 견제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이 조선의 국정 스타일이었다.
13 바닥난 국고를 채워라
경신대기근은 국가 재정 상태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현종이 즉위한 후 기근이 이어지자 수없이 비축곡을 방출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감면하고 부채를 탕감했다. 기근이 깊어 갈수록 국가 재정을 걱정하는 한숨은 커져만 갔다. 국가에 전란이나 변란이라도 발생하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지 걱정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려고 여기저기서 끌어다 지원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3년분은 비축하고 있어야 하는데, 3년분은 고사하고 한 달분도 없는 형편이었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김좌명이 국가 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다각도록 제시했다. 동전 주조를 주장한 의도는 상업 진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수입 확보에 있었다. 1671년 봄에 접어들자 국가 재정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병조의 재정도 전란으로 국왕이 피신하는 등 국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평시에 쓸 수 없도록 창고를 봉해놓은 봉부동(封不動)까지 쓸 정도로 바닥을 드러냈다.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군사비의 감축
: 임금, 서인, 남인의 생각이 각각 달라 군사비 감축 문제는 쉽게 해결 방안에 접근하지 못 했다. 인조 이후 서인과 남인이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자파의 세력 기반으로 삼기 위해 새로운 군부대를 각기 창설했다. 당시 군사비 감축의 주 대상은 김수항의 지적처럼 현종이 설치한 훈련별대와 정초청이었다. 사실 임금이나 허적 모두 훈련별대를 혁파할 의사가 없었다. 지난해(1669년)에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서인의 견제를 물리치고 창설했기 때문이다. 1668년에 설치된 정초청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남용익은 도성의 친위병도 많은데 또 정초청을 설치해 기병 4천 명을 더 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때 허적은 남용익의 제안대로 하자고 임금에게 재촉했다. 사실 허적은 서인의 군사적 기반이 되는 정초청을 이 기회에 없애면 좋았겠지만, 본심을 내비쳐 서인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임금과 허적은 훈련별대나 정초청을 모두 존치한 채 군포 징수와 상번군 입영을 연기하는 선에서 군대 혁파론을 잠재우려 했다. 임금은 자신을 호위해 줄 것은 오직 군대뿐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이러한 의중을 간파한 허적은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하며 우회적 표현으로 혁파 문제를 거론할 뿐이었다. 임금은 대신 훈련도감을 감축해 쌀 1만 석과 무명 200동을 절감하고, 휘하 군졸 없이 놀고 먹기만 하는 어영청의 장교도 감축했다. 그러나 끝내 임금은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혁파하지 않고 재임 내내 자신을 지키는 군대로 두었다. 훈련별대와 정초청은 숙종 때 합쳐져서 금위영으로 탄생해 궁궐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왕실비의 삭감
: 왕실비는 임금과 그 가족의 사생활을 위한 제반 경비를 말한다. 조선의 재정 지출에서 왕실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따라서 왕실비를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국정의 비판자답게 삼사 관원들이 일제히 왕실을 향해 경비 절감을 하라고 퍼붓자, 임금도 왕실비 삭감에 나섰다. 마침내 임금은 줄일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줄이도록 지시했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논의해 선혜청, 상의원, 재용감, 내수사, 군기시, 공조 등 중앙 부처에서 두 대비전 이외의 왕실에 납부하는 각종 물건을 전량 혹은 절반 감하게 했다. 이어 각 도에서 진상하는 것도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두 대비전 이외의 각처에 바치는 것은 모두 이듬해 가을까지 멈추게 했다.
신분과 관직의 매매
: 진휼에 쏟아 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만한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세원을 개발해 재정 수입을 늘리는 길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재물을 받고 신분과 관직을 파는납속이 활용되었다. 왜란과 호란 때 군량미와 복구비 조달을 위해 시행했던 납속은 인조와 효종 때부터 진휼비 확보를 위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버티기 어려워 자가 노비들마저 모른 체하며 진휼소로 내몰고 있는 양반이나 부민들이 많은 실정에서, 납속자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았다. 각도 감사들은 공명첩 외에 면천 종량도 요청했다. 면천 종량이란 노비에게서 재물을 받아 천민 신분을 면해주고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허적이 오시수의 장계를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노비 면천에 관한 내용을 아뢰었다. 임금의 일의 합당 여부를 여러 신료들에게 묻자, 일제히 허적의 의도와는 달리 반대 의견을 쏟아냈다. 납속으로 얻어지는 곡식보다 면천으로 발생할 문제가 더 클 것을 우려한 것이다. 노비 면천 주장차들의 본심은 대기근으로 군역을 담당할 양인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호.탈적 양인을 색출함과 동시에 노비를 양인으로 승격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납속에 응한 자들의 목적은 신분에 따라 각각이었다. 양반은 품계와 관직을, 서얼은 허통을, 액외 교생은 면강을, 양인은 면역을, 노비는 면천 종량을 얻는 데 있었다. 즉, 납속을 통해 자신의 현재 신분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게 그들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청나라 쌀 수입론
: 불티나게 팔릴 것 같던 첩문은 단가를 낮추어도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대기근이 납속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아 국내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때 청나라에서 곡물을 수입하자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식량만큼은 자급자족하며 이웃 여진족이나 일본에게 지원하난 나라라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건국 이후 딱 한번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군량미를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이외에는 한 번도 식량을 남의 나라에 요펑한 적이 없는데, 그것도 국토를 유린한 적이 있는 야만족 여진이 세운 청나라에 곡식을 요청하자는 것이다. 허적은 운송난과 후환을 이유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서필원의 주장은 정책으로 채택되지 않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기아자 발생은 누그러들기 시작했지만, 나라 창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바로 이때 임금이 청나라 양곡을 도입하는 문제를 다시 꺼냈다. 어전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 모두 반대 의견을 내놓았지만, 임금은 단념하지 않았다. 나머지 신료들은 임금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임금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해 1년여 지난 1675년 7월에 청의 미곡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다시 일었다. 이때 여러 신료들이 반대해 중단되었다. 그 후 1695년부터 내리 3년간 '을병대기근'이 찾아왔다. 이때도 아사자가 1백만 명 가까이 되었다. 마침내 조선 정부는 1697년에 청나라에 양곡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 논의된 지 30년 가까이 지나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청나라는 다음해에 압록강변 중강에 쌀 3만 석을 실아와, 1만 석은 무상으로 제공하고, 2만 석은 유상으로 판매했다.
14 꺼지지 않은 잔불
대기근이 진정 국면에 접어든 1671년 9월부터 전란이나 변란 또는 변고 등 근거 없는 온갖 괴담이 급속히 유포되면서 사회 불안을 증폭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괴담이 나돌았다. 그리고 지방의 도적떼가 서울로 침범해 올 것이라는 괴담도 나돌았다. 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온갖 자연현상이 괴담으로 둔갑해 하루가 다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므로 천변재이가 정치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괴담은 대기근으로 신음하는 일반 백성들의 불안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괴담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해명하거나 들끊는 괴담 여론을 잠재우려 나선 사람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남인이나 서인 모두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괴담은 날이 갈수록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꿈틀대는 정쟁
: 괴담을 악이용해 부추긴 측면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특히 서인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정국 반전을 꾀하기 위해 괴담을 적극 활용했다. 이 때문에 한번 생긴 괴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파되었다. 서인의 정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경신대기근은 남인과 척신을 앞세워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려던 현종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사실 현종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도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 대기근 극복 과정을 통해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 왔다. 결과적으로 대기근은 현종에게 또 다른 돌파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서인은 즉각 반격에 나서며 허적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말에 들어서자 서인의 공세는 본격화되었다. 정국은 들끊기 시작했다. 서인이 이렇게 나올수록 현종은 서인에 대한 반감을 높였다. 현종의 반감은 대기근 극복 과정에서 본격화되었다.
제2차 예송과 현종 사망
: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복상이 문제가 되어 다시 예송이 발생했다. 이를 제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이라고 한다. 이번 역시 효종의 지위를 장자로 불 것인지 아니면 차자로 볼 것인지가 최대 쟁점이었다. 제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서인은 9개월상을, 남인은 1년상을 주장했다. 결과는 지난번과 달랐다. 그렇다면 제1차 예송 때 서인의 예론은 잘못된 것이다. 서인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인이 약진할 기반이 마련된 반면에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간 집권해 온 서인 정권이 붕괴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7월 말경에 임금이 갑자기 목통을 일으켜 침을 맞고 뜸 치료를 받았다. 8월에 접어들자 그 증세가 더했다. 18대 임금 현종은 재위 15년 만에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렇게 하여 현종 시대는 예송으로 시작해 예송으로 끝나고, 대기근으로 시작해 대기근으로 끝났다. 현종 시대는 예송과 대기근의 시대였다. 열네 살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 남인은 잘못된 예론에 대한 책임을 송시열에게 묻기로 했다. 효종이 적통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숙종과 연관한 것이었다. 숙종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송시열을 파직하고 귀양 보낸 후 서인 인사들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서인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소수파인 남인이 예송과 대기근을 통해 다수파인 서인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현종실록] 편찬은 현종이 승하한 다음해인 1675년(숙종 1년) 5월에 남인 주도로 시작해 약 2년 3개월에 걸친 작업을 통해 1677년(숙종 3년) 9월에 완료했다. 그런데 1680년(숙종 6년)에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서인이 집권을 하고 남인은 실각했다. 서인은 왕이 독촉해 급하게 만들었고, 편파적으로 기술했다는 이유로 김수항을 대표로 삼아 [현종실록] 개수 작업에 들어가 [현종개수실록]을 1683년에 완성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대기근에 관한 기사가 양 실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에필로그 - 대기근과 함께 한 17세기사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 조선 사회는 17세기 대기근으로 받은 충격을 18세기를 거치며 거의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9세기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흉작과 전염병, 설상가상으로 취약 지역과 취약 계층은 대재앙에 쉽게 노출되고 말았다. 유민 가운데 상당수는 진휼과 방역 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진 서울로 몰렸다. 그 결과 서울은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인구 증가율이 높게 나타났고, 그것이 서울의 공간 구성과 산업 구조의 변화에 일조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연구 결과다. 유민을 심산유곡에 규합해 세력화하고 전통적 가치를 공허한 이념으로 돌리는 토착 농민과 재야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다. 기후의 심각한 변화가 생겨 삶의 터전이 붕괴되면 주민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는 경향이 있다. 인구수가 15세기에 경상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순서이던 것이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순서로 바뀌었다. 양대 대기근을 겪은 후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실상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정부는 기근을 겪을 때마다 호구를 파악해 인구수를 늘리는 데 부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군역 자원의 확보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또한 효종 때 양역변통론이 처음 거론되더니, 현종 때 경신대기근을 겪은 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숙종 때를 거쳐 영조 대에 균역법으로 일단락되었다. 대기근은 신분별 인구 점유율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바로 양반층 인구의 점유율 증가, 평민.노비층 인구의 점유율 격감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 안전망의 구축
: 연이은 기근을 겪으면서 진휼청을 상설 기구화하고 재정 기관으로 개편해, 진휼청이 전국의 진휼 업무를 진두지휘하게 했다. 이 체제는 현종.숙종 대에 완전 정착되었다. 진휼 업무의 관제탑인 진휼청이 임시 체제에서 상시 체제로 전환되고 그 위상이 한층 높아진 셈인데, 이 점은 그만큼 기근이 연례화되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재정난은 국가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병조의 봉부동을 진휼에 투입한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재원 조달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곡물 조달 방법과 관련해 납속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행했던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납속과 공명첩은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를 했다. 따라서 17세기의 대기근은 조선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충격파였음이 분명하다. 대기근은 재력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제공한 셈이다. 비축곡 이동 방법을 원격지 이동 시스템에서 근접 거리의 국지적 이동 시스템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문제점은 비축곡은 본래 국방이나 외교 등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조성된 것인데, 이를 진휼곡으로 전용한다는 것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에 횝쓸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진휼을 목적으로 하는 비축곡을 조성할 필요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각지의 바닷가에 창고를 설치하고 곡물을 비축해 인근 지역에서 기근을 만나면 운송해 구제하게 했다. 정부는 가급적이면 고을 자체에서 기근을 해결할 수 있도록 17세기 후반부터 자비곡이라는 진휼용 환곡을 각 고을에서 운영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지방관청에 진휼고와 민고 등 재정 기관이 대거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병행해 기본 재원이 없던 중앙의 진휼청도 독자적인 환곡을 갖고 진휼에 나섰다. 이로 인해 환곡이 늘어나 기아자 구제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19세기에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농민항쟁의 주요 쟁점이 되고 말았다.
주목받는 월동영 상품
: 연이은 흉작과 기근은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대대적인 세제 개편을 단행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공납을 현물 대신 전세화한 대동법이다. 대동법 실시와 함께 주목된 것이 토지 문제였다. 개간 권장과 양전 사업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전반까지 토지 면적이 임진왜란 이전 상태로 회복되지 못한 것은 연이은 기근과 유망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잦은 가뭄과 수차 보급과 제언사 설치를 불러왔다. 국가 재정이 적자를 모면하지 못하자, 조선 정부는 재원 확보를 위해 동전을 주조했다. 비록 기근 구제를 위해 동전을 발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상품 화폐 경제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기근을 야기한 한랭기후는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경제 환경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한랭기후는 방한복 산업을 진흥시켰다. 이상 저온기후로 인한 혹한의 날씨는 서울에서 월동용 상품을 불티나게 했다. 혹한 때문에 면포와 함께 수요가 증가한 가죽은 새로운 대안시장 상품이었다.
정치적 스트레스 증가
: 기근과 정국의 함수 관계도 주목된다. 한랭화에 따른 기후 변화는 정치적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기근이 하늘의 경고라는 유교적 자연관 때문에, 정부 신료와 재야 선비들은 기근이 들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책을 임금에게 제시하며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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