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의 하루와 백성의 고단한 일상을 들여다 보다
1장 무인과 백성, 조선을 지키다
천시받은 조선의 무인
무인 이성계 새 왕조를 열다
: 조선을 개국하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분산된 군권의 단일화였다. 이 과정에서 태조 이성꼐는 개국공신들의 사병까지 국가의 공병으로 전환하거나 해산시켜버리는 일을 단행했다. 이후 무인들의 정처 없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최측근의 무인들에게도 가차없이 권력의 칼을 들이댄 태조 이성계를 이어 태종 때에는 무인의 관료화 및 새로운 무인을 선출하기 위해 1408년 과거에 무과 시험을 도입하게 된다.
과거와 무인, 조선의 무인들은 천시받지 않았다
: 500년 조선 역사에서 양반은 늘 권력의 중심이었으며, 그 지위와 권력은 과거를 통해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양반은 동반과 서반, 혹은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말로, 바로 조선이라는 국가권력 체제가 문반과 무반이라는 양대 산맥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뿌리째 흔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무과는 급속도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이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병력을 한꺼번에 뽑게 되면서 발생했다. 무과 응시 자격은 원래 양반에게만 국한된 문과와는 달리 별로 제한이 없이 천인 이외에도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이론 시험인 강서와 실기인 마상무예 등이 있어서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무과 자체를 볼 염두를 못 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는 병력이 부족해 성적이 저조하더라도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군역으로 복무 중인 사람들까지 시험을 보았고 어김없이 그들에게도 과거 합격자의 칭호가 내려졌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전사자가 많이 발생해 시급히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야 할 때는 천인을 비롯한 하층민까지도 무과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문세족의 자제들은 무과를 꺼리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무과 합격자들이 넘쳐나면서 또 다른 사회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보통 무과에 합격하면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중앙이나 지방 무인 관료로 발령을 받았는데, 이처럼 합격자가 많아지자 일종의 대기발령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대기발령 기한이 수십 년을 넘어 합격하고도 평생 발령받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길 정도였다. 영조와 정조를 거치면서 국방이 강화되고 국력이 다시 회복하면서 넘쳐나던 만과의 합격자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여기에 친위 군영의 강화라는 내부 목적 달성을 위해 무과 합격자들은 과감히 새로 조직한 군영에 등용시키면서 무인의 위상은 조심씩 나아졌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무과 합격자들은 그 자격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이나 가문을 내세울 정도는 되었다. 양반은 아무라 망가질리자로 그 이름만으로 충분히 명예로운 시기였다. 더욱이 권력이나 부의 정도에 따라 똑같이 무과 합격자라 할지라도 먼저 관직에 등용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세습적인 문벌 가족이 아닌 무벌 가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무인들은 결코 천시받거나 천대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왜 무인이 천대받았다고 생각할까
: 조선의 국왕들까지 무인이나 무예에 대래 결코 폄하하거나 비천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럼 우리들은 왜 '숭문천무'라고 하며 무를 천시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이라는 국가를 그 뿌리째 파괴하고 싶었던 일제에 의해 기획된 일종의 '만들어진 전통'이 아닌 '만들어진 악습'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문과 무는 공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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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검은 폭풍, 기병
산업혁명 이후 군사 부분에서도 일종의 군사혁명이 일어나 살아 숨 쉬는 말 대신 내연기관을 단 강철로 만들어진 말인 탱크와 장갑차가 전장을 누비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갑부대 전략의 핵심은 수천 년 동안 다듬어진 기병의 전략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전장의 검은 돌풍, 기병의 탄생
: 기병의 역사에도 변화는 있었다. 경장기병을 시작으로 등자가 보급된 뒤부터 철갑을 두른 중장기병이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화약무기가 조금씩 선보이던 14세기 이후부터 다시 경장기병으로 돌아왔다. 전장에서 기병의 파괴력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1. 중장기병은 그 크기와 높이에서 오는 힘으로 적을 밀어붙일 수 있다. 2. 누구나 머릿속에 쉽게 떠올리는 기병의 모습은 빠른 경장기병의 속도전이다. 기병의 활약은 눈부셨지만 군대를 기병만으로 편성할 수는 없었다. 기병만으로는 전술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또 기병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저 놈의 말 때문에 온 백성이 굶고 있소
: 기병의 필수 요건인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장을 누비는 군마로 거듭나기까지 수많은 백성의 고혈을 먹고 성장했다. 군마 한 마리를 유지하려면 일반 병사 네 명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군마의 수를 함부로 늘릴 수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목장을 운영하고 군마를 생산했는데, 이를 담당한 관청이 사복시였다. 사복시는 단순히 말을 사육.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사용할 말의 전체적인 수급, 목장의 신축과 증설 등 마정의 전반적인 부분을 관장하는 군사의 핵심기관이었다. 그러나 사복시에서 수많은 말들을 직접 기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전국의 일반 목장에 일정 수량을 배분해서 키우도록 했다. 그리고 해마다 점마관을 파견해서 말의 상태를 점검하고 그 수를 파악하도록 했다. 어마(임금의 타던 말)을 비롯해 궁중에서 사용하는 말은 사복시에서 직접 키우고 관리했는데 여름에는 270필, 겨울에는 100필 정도를 맡았다.
임진왜란에서 기병의 승리와 패배
: 탐금대에서 조선 기병들이 물에 떠내려가자 조정은 기병의 운용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훈련도감의 삼수병 체제이다. 삼수병이란 포수(포.조총을 다루는 병사). 사수(활을 다루는 병사), 살수(창검을 다루는 병사)를 말한다.
군마가 아프면 어떻게 했을까
: 화약무기가 전장을 휩쓸기 전의 전투에서 기병은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그래서 군마의 관리에도 철저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마조제라는 말과 관련된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말 그대로 기원 의식일 뿐이다. 그래서 기병을 보유한 부대에서는 사람을 치료하난 군의와 더불어 말을 치료하는 마의를 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9품의 마의 10명이 사복시에 소속돼 있었으며, 각 군영에도 2~3명의 마의가 배치되어 군마의 상태를 살폈다. 또한 말의 치료를 위해 전문적인 마의학서인 [신편집성마의방]이 1399년에 최초로 편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마의학서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장에서 사라진 기병
: 기병이 전장에서 사라지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화약무기의 발달이다.
전통시대 최고의 통신망, 봉수
봉수는 산꼭대기에 봉수대 를 두고 밤에는 봉(烽, 햇불)으로 낮에는 수(燧, 연기)로 변방을 비롯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 곳에서 중앙과 각 지방의 군영에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군사통신 체제이다. 물론 봉수 이외에도 말을 이용한 파발이 있었다.
봉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 조선시대의 봉수는 핵심 봉수대인 직봉(직선봉수)과 보조 봉수인 간봉(간선봉수)으로 구성됐으며 전국에 다섯 개의 봉수로를 두었다. 최종 도착지인 남산에서는 봉수가 올라오는 방향과 상태를 분별해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고 임금에게 변방의 상황을 알렸다. 특히 밤중에 봉수가 여러 개 올라오면, 병조에서는 그 즉시 숙직하는 승정원 관리에게 보고 하고 잠든 임금을 깨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의 5대 핵심 봉수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서수라)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남산으로 오는 것이고, 제2로는 경상도 동래(다대포)에서 충청도를 거쳐서, 제3로는 평안도 강계(만포진)에서 황해도를 거쳐서, 제4로는 평안도 의주(고정주)에서 황해안을 거쳐서, 마지막 제5로는 전라도 순천(돌산도)에서 시작해 충청도를 거쳐서 남산으로 올라오는 방식이었다. 전국에 설치된 봉수대는 많은 경우 703개나 되어 웬만큼 높은 산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봉수대 가운데 제주도에만 63개가 배치되었다.
봉수군으로 끌려가면 얼어 죽는다
: 봉수대에는 봉수군과 오장이 배치되었다. 봉수군은 밤낮으로 망을 보고 봉수대에 불을 올리는 일을 직접 담당했고, 오장은 봉수군과 함께 지내면서 봉수군을 감시하며 해당 고을 수령에게 이를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들 중 봉수군은 비록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천인이 하는 일을 해 사회적으로 천시받던 신량역천이 대부분이었다.
봉수 때문에 실패한 이괄의 쿠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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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군들은 죽지 않기 위해 뛰었다
: 중요한 군사신호 체제였던 봉수도 분명히 한계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와 안개였다. 보통 봉수대의 불은 화력이 좋은 이리 똥이 최고이나 구하기 어려워 쇠똥이나 말똥을 이용했다. 그러나 악천후가 계속되면 봉수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었다. 봉수가 무용지물이 되면, 그 임무를 봉수군이 직접 했다. 이것을 치고(馳告)라고 하는데, 요즘의 산악 마라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두 봉수대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구름이 조금 끼었을 때는 포를 쏘아 신호를 알리는 신포 또는 나팔을 부는 천아성(天鵝聲)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봉수군에게는 강력한 처벌 규정이 따라다녔는데, 1. 만약 거짓된 내용을 봉화로 올린 자는 즉각 사형에 처하고, 2. 평온무사할 때에도 점호에 결근한 자는 군관이든 봉수군이든 가리지 않고 곤장형에 처하고, 3. 봉수대 근처에 의도적으로 불을 낸 자는 목을 베어 죄를 물었다.
계곡 선생, 봉수대에 피어오른 봉화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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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은 성곽
내 죄는 오직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난 것뿐이오
: 조선시대의 세금은 대표적으로 조용조라는 수취 체계를 바탕으로 징수되었다. 먼저 조(組)는 토지에 대한 일종의 토지세에 해당하고, 용(庸)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인세이며, 마지막으로 조(調)는 집에 부과하는 거주세와 같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 용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이었기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이었다. 이러한 용에 해당하는 것을 보통은 요역이라고도 했는데, 요역 중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성을 쌓는 축성역이었다. 물론 지금의 군대에 있는 공병대처럼 당시에도 전문적으로 성을 쌓는 축성군이라는 존재가 있었지만, 이들 또한 변방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성을 직접 쌓으면서 만들어진 부대일 뿐 대부분의 고된 노동은 백성의 몫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전투에서 패한 장수나 그의 부하들은 변방의 성을 쌓는 일꾼이나 배에서 노를 젓는 격군으로 보내져 일종의 귀양살이를 했는데, 이를 보면 성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을 완성하고 5년 동안 경과를 봐서 만약 무너지면 그 작업에 참여했던 책임자에게 죄를 물었다. 보리이삭이 나오기 전인 춘궁기에는 가끔 축성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나라에서 진휼(백성들을 도와줌)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해의 토지세를 면제해주거나, 사는 곳을 떠라 멀리 축성에 동원된 사람들일 경우는 쌀과 옷을 만들 수 있는 삼승포를 내려줬고, 약간의 돈과 포를 나눠주기도 했다.
화성, 백성들의 땀에 대한 보상을 바탕으로 건설되다
: 조선 후기 찬란한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 시대에 만들어진 수원 화성은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축성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화성은 둘레가 5744미터, 면적은 18만8048제곱미터로 당시로는 국가의 재정이 흔들거릴 정도의 큰 토목사업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노여움을 사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이뤄낸 대역사였기에 백성들의 고통 대신 왕실 재정이 바닥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품삯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공사에는 약 70여만 명의 인력이 투입됐는데 모두 품삯을 주고 성을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 10년을 예상했던 축성 기간을 2년 6개월로 단축시키는 성곽 건축의 신기원을 이루기도 했다. 일정한 보상을 통해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것도 힘이 되었지만 거중기를 비롯한 새로운 축성 기구도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데 한몫 했다. 화성을 쌓는 일에 동원된 장인들은 전체 1821명이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전체 인원에게 지급된 품값이 총 30만 4817냥 8전 4푼에 달했다. 여기에 성을 쌓는 돌이나 나무에도 어김없이 비용을 지출했는데, 재료비로 총 39만 201냥 1전 1푼이 지급되었다. 결국 화성 축성 비용은 여타 비용을 포함한 전체 86만 698냔 2푼이 들었다. 당시 국가의 총 재정이 약 790만 냥이었으니 조선 후기 최대의 토목공사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역사는 늘 위대하고 용맹한 자만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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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조선의 병사들
조선 병사의 하루
기상나팔 소리에 잠을 깨다
: 조선시대 군사용어로 두호라고 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가 진영에 길게 울리면 병사들은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무기와 보급품 등을 챙겨 곧바로 밥 지을 준비를 했다. 이때 보통 화병이라는 요즘의 취사병과 비슷한 병사가 밥을 지었다. 그러나 밥 지을 물을 길어 오고 땔감을 하는 것은 모든 병사가 함께 했다. 물론 이때에도 당연히 군대이기에 일정한 체계에 따라 물을 긷고 땔감을 했다. 이때 수병이라는 숫자는 세는 병사가 인원을 확인했다. 물이나 땔감뿐만 아니라 군마를 먹이기 위한 풀 구하기도 하나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 또한 엄격한 규율 속에서 진행됐다. 이후 두 번째 나팔 소리인 이호가 울리면 병사들은 밥을 먹고 무기를 비롯한 장비를 챙겨 막사를 나섰다. 자신이 진형에서 책임진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조선시대에도 요즘 군대처럼 일정한 순서에 따라 조총 사격 훈련을 했다. 이런 훈련은 조선시대나 요즘이나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행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유별난 훈련도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비상식량 만들기이다.
비상식량 만들기도 훈련이다
: 대량으로 군량미를 수송해서 보급할 때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고, 전투가 시작되고 보급이 끊어질 때를 대비해서 병사들은 각자 며칠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을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특히 적에게 포위되거나 부대와 격리되는 상황이 전쟁 때에는 자주 발생해서 비상식량 만들기는 하나의 훈련 형태로 진행했다. 이렇게 일반 식량보다 갑절은 힘들게 만든 비상식량은 그 사용에도 철저한 규율이 있었는데, 적에게 포위되는 등 매우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먹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비상식량을 비롯한 필수품은 병사들의 겉옷을 여미는 전대에 주로 넣고 다녔기에 조선시대를 비롯한 전통시대 병사들의 기본 무장모습은 배와 옆구리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군장이 무거워졌다
: 점심을 먹고 나서는 고달픈 병사의 하루는 여전하다. 오후 훈련은 갑주(갑옷과 투구)를 입고 무기를 사용하는 훈련으로 일종의 완전군장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훈련장에서는 의도적으로 군장을 비롯한 무기를 더 무거운 것을 사용해 병사들의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각자의 주특기 혹은 병과에 따라 특징적인 갑옷을 입게 되는데, 가끔은 갑주를 바꿔 입고 훈련하기도 했다.
행군,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 행군 훈련은 인시(새벽 3시)에 아침밥을 먹고 묘시(새벽 5시)에 출발해, 오시(맞 12시)에 점심밥을 먹고 미시(오후 2시)에 마치며, 하루에 30리(약 12km)를 행군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미시에 행군을 마치는 것이 천시(天時)를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해 장수들은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훈련을 서둘러 마쳤다. 만약 하루 30리가 넘는 거리를 행군하면 병법서에는 병사들의 근력이 쇠약해지고, 전투마가 지쳐 갑자기 적이 공격해오면 아군 10명이 적 1명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행군 거리만큼은 거의 절대적으로 지켰다. 야간 행군을 진행할 때에는 보통 밀행이라고 해 병사들의 입에 모두 재갈을 물리고 전마의 목에 건 방울을 떼어 형체를 숨기고 흔적을 감추고 행군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또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밀밀이라고 하여 불빛도 감추고 북소리도 울리지 아니하여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동정을 모르게 했다. 또한 암령이란 해 아예 소리가 나는 징이나 북은 물론이고 깃발마저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물건을 전달해 명령을 주고 받으며 행군하는 방식도 함께 훈련했다. 이런 암령 훈련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에 특별한 경우에만 훈련했고, 일반적으로는 깃발을 비롯한 신호용 두고를 이용해 전군이 모두 인지할 수 있게 훈련했다. 또한 조적등이라는 일종의 특수 휴대용 등불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발밑을 비추는 등으로 지금의 랜턴과 비슷한 기능을 한 등불을 사용하기도 했다. 행군하는 도중 전면에 수목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에는 청기를 펼쳐 적의 매복에 준비하거나 돌아가는 길을 찬는 신호를 내려야 했고, 물이나 늪이 가로막고 있을 때에는 흑기를 펼쳐 일종의 도하훈련을 비롯한 수중전에 염두에 두는 신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앞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병마가 나타나면 백기를 펼쳤고, 연기나 불이 가로막고 있을 때에는 홍기를 펼쳐 주변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다. 이런 다양한 훈련 중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강이나 늪지대를 통과하는 도수 훈련이었다. 행군 도중 목이 마른 병사들은 개인 물통의 물을 마셨는데, 만약 이 물이 떨어질 때 즈음이면 물을 담당하는 군관과 병사가 길을 가다가 먹을 수 있는 물을 지정하고 그 자리를 지키면서 이동 중의 병사들이 직접 와서 떠먹게 하고 행렬이 모두 지나가면 원대로 복귀하는 등 물 통제병을 따로 두기도 했다. 이후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화병들이 밥 짓을 준비를 하는데, 행군 중에는 적이 물에 독을 풀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대비했다. 이렇게 화병들이 밥을 지으면 나머지 병사들은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임시 거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발이 빠른 병사들은 매복훈련을 따로 받기도 했는데, 적의 매복을 고려해 아군에게도 풀숲이나 골짜기에 미리 매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매복한 병사들이 정병인지 아니면 게리라식 특수병인지를 적이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는 훈련을 함께 진행했다.
잠도 아무 곳에서나 잘 수 없었다
: 조선시대 일반 병사의 막사는 요즘도 사용하는 A형 텐트 같은 일종의 'A'자 천막에서 잠을 청하는 방식이었다. 숙영지를 정하는 것도 신중한 판단 아래 진행되었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주변에 산과 물이 있는 지역을 찾는 것이었다. 만약 주변에 이러한 산이나 물이 없으면 평야에 진영을 설치하는데, 그곳에서도 이러한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고 거마목이나 질려를 주변에 깔아 놓아 적의 접근을 원척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을 썼다. 특히 귀전(鬼箭)이라 하여 대나무 통에 질려를 넣고 똥물과 독약을 섞어 지뢰처럼 길에 깔아 놓기도 했는데, 만약 적이 이를 밝으면 그 소리로 습격에 대비함은 물론이고 즉시 소독하지 않으면 발이 썩게 되어 효과적으로 적을 막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또한 진영 밖 30보 떨어진 곳에 불에 잘 타는 마른 나무들을 쌓아 놓기도 했는데, 만약 적이 야간에 공격해오면 여기에 불을 질러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만약 숙영해야 할 곳 근처에 마을이 있으면 마을 안 공터에 각 진영마다 한 길로 일자진을 치고 병사들을 배치한 다음 쉬게 했다. 가능하면 한 대(약 12명)의 병력이 한집에 있게 하고 서로 분산시키지 않게 했다. 이는 만약에 있을 적의 기습을 비롯한 전투에 대비해 그 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것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병사의 하루는 역사의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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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너머로 보는 전투
병자호란 중 일어난 쌍령 전투는 지금까지 우리 전쟁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군 기병 300명에게 조선군 4만 명이 전멸당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쌍령 전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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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조선군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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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하지 않은 병사 선발
: 조선시대에는 향교의 학생과 현직 관리를 제외한 16세부터 60세 이하의 남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전부 군인으로 근무해야 한다면 사회는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 명 중 한명만 실제 군역을 하도록 하고 나머지 두 명은 '포(布)'라는 세금을 내서 군대에 간 사람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군역에 종사하게 했다.
밥 먹는 것도 훈련받았다
: 병사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되는 훈련은 다름 아닌 모래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하는 달리기였다. 병사들의 달리기 실력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였기 때문에 중요한 훈련과목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기본 체력이 완성되면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아울러 진을 이룬 상태에서 움직이고 생활하며 전투하는 방식을 훈련했다. 많은 병사가 동시에 밥을 먹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심지어는 단체로 밥 먹는 것 또한 일정한 훈련을 받았다.
텔레비전 사극의 역사 왜곡
: 당파라는 무기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명군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당파는 전체 길이가 7척 6촌(당시 영조 척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2.3미터)에 무게는 5근(약 3킬로그램)에 이르는 무거운 병기였다. 양쪽 곁가지가 평평한 것은 중간에 화전을 올려놓고 쏘는 화약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병사가 당파로 상대의 창이나 칼을 찍어 누르면 옆에 있던 환도수(검수)들이 적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던 일종의 특수 병기인 것이다. 조선시대 때 사용한 각궁으로 화살을 날리면 그 속도는 초속 약 65미터에 이른다. 실로 엄청난 속도이다. 그런데 화살촉 부분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과연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감당하지 못한다. 화약이 발명되고 조선시대의 화전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달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화살 끝 부분에 화약을 넣은 작약통을 달아, 이 작약통과 연결된 심지에 작은 불씨가 타들어가는 상태에서 화전은 날아갔다. 그래서 이 화살이 목표물에 박히고 불씨가 작약통에 도달하면 화약이 폭발해 불길이 번지도록 한 것이다.
역사 바로잡기는 사극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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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눈물이 담긴 갑옷
전쟁의 역사는 보통 무기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이런 무기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갑옷으로 대표되는 방어 수단이다. 특히 군사조직이라는 특수성으로 갑옷은 전투 상황에서 계급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낼 수 있었기에 방어적 속성뿐만 아니라 신분을 상징하는 의물로도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전장에 화약무기가 발전하면서 갑옷은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비록 화약무기에는 소용이 없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는 아직 분당 수백 발이 발사되는 다연발 총이 등장하지 않았고, 전쟁의 승패도 보병의 단병접전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갑옷은 조선 말기까지 꾸준히 착용됐다.
조선 시대의 다양한 갑옷들
: 갑옷의 색상을 보면 주로 다홍색, 흑색, 감색, 백색 등이 쓰였는데, 이외에도 아주 다양한 색상의 갑옷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오위제를 바탕으로 군영이 운영되었는데, 조선 후기 또한 오군영 체제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갑옷의 색깔도 음양오행설에 근거해 방위를 표시했다. 방위별 색깔을 보면 동쪽을 지키는 군사들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 마지막으로 중앙을 지키는 병사들은 황색의 갑옷을 입어 부대의 이동이 한눈에 들어오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수십 종이 넘는 갑옷이 사용되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철갑이다. 철갑은 작은 쇳조각, 이른바 철찰을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가장 방호력이 뛰어난 갑옷으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철갑은 철찰을 이어주는 가죽끈이 쉽게 마모되면서 잘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철갑의 종류에는 대표적으로 수은갑, 유엽갑, 엽아갑(작은 무쇠 미늘로 만든 철갑옷), 별철갑(금위영에 지급됐던 철갑옷) 등이 있다. 철갑 다음으로 많이 입었던 갑옷은 피갑인데, 이는 짐슴의 가죽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피갑은 철갑보다 방호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무게가 휠씬 가벼워 활동하기에 편해서 보병들이 즐겨 입었다. 철갑, 피갑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갑옷으로는 종이로 만든 지갑이 있다. 결정적으로 지갑은 철갑이나 피갑에 피해 방호력이 현격하게 떨어져 실전보다 훈련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비단으로 만든 단갑을 비롯해 무명으로 만든 삼승갑, 목면갑 등 다양한 재료로 갑옷이 만들어 졌다.
갑옷의 핵심은 투구이다
: 갑옷은 보통 몸통을 보호하는 갑(상갑)과 허리 아래를 보호하는 갑상(하갑), 그리고 머리를 보호하는 주(투구)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갑옷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갑주라고 해야 올바르다. 보통은 몸에 걸치는 갑과 갑상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외로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인 주를 소홀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투구를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머리가 들어가는 부분을 감투, 귀를 덮고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부분을 옆드림, 뒷목을 덮어 등까지 내려가는 부분을 뒷드림이라고 했다. 투구의 핵심은 감투인데, 조선시대에는 철.가죽,종이.청동.놋쇠 등 다양한 재료를 크게 네 조각으로 나눠 이것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그러나 네 조각을 이어 붙이다 보니 정수리 부분은 조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음매 끝에 둥근 판을 덧씌우고 그 위에 간주를 달아 장식성을 더하기도 했다. 드림은 주로 앞뒤, 좌우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투구에 부착하는 것인데, 정면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목가리개인 호항을 따로 목에 감기도 했다.
갑옷에는 백성의 눈물이 담겨 있다
: 일부 유급 병사는 국가에서 지급한 갑옷을 입었지만, 군역으로 온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사야 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무기를 사느라 집안이 망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난한 백성들은 대충 갑옷의 모양만 만들어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궁궐이나 북쪽 변방을 지키는 병사까지 튼튼한 철갑 대신 피갑이나 지갑을 입는 일이 많았다.
흥선대원군의 헛된 야심에 조선 병사들은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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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 진법, 그 비밀을 풀다
전쟁의 승패요인으로, 병력 동원 능력, 동원된 병사 개개인의 전투 능력, 전투에서 부대의 기동 방법 등 크게 세 가지를 든다. 이중 병력 동원 능력과 전투 기술은 전투가 있기 전 이미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전투 현장에서의 움직임인 부대의 기동 방법이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전장에서는 부대 움직임, 이것을 진법이라고 한다. 진법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들은 반드시 진법에 능통해야 했으며, 그 진법을 잘 운용하기 위해 병사들 또한 쉼 없이 훈련을 받아야 했다.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
: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지만, 조선 전기 국가의 핵심적인 틀 대부분은 고려의 것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모든 진법을 집대성해 구체적인 병법서로 완성한 것이 문종때 만들어진 [오위진법]이다. 오행의 개념이 조선시대 중앙 군사조직의 편재 단위인 위(衛)와 결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오위진법이다. 오위진법의 움직임을 보면, 부대는 크게 다섯 개의 위로 나눠 보병과 기병을 배치했다. 조선 전기의 북방의 야인이 주된 것이었기에 기병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방식으로 부대가 구성되었다.
신호체계는 진법의 생명
: 진법을 짜려면 수많은 병사들을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수천 명의 병사를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진법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신호체계의 숙달이다. 장수들은 현장의 상황을 직접 보며 휘하 부장 등을 통해 깃발을 사용하거나 몇 가지 악기를 이용해 명령을 전달했다. 먼저 군기라 해 각 부대장의 소속과 지위를 구분하는 깃발이 있는데, 군기는 휘하 장수들에게 명령하고 혹은 상부의 지시에 복명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직접적인 공격이나 후퇴 명령을 뜻하는 영하기는 휘라고도 불렸는데, 가장 튼 대장용 휘와 크기가 작은 위장용 소휘가 있다. 군사 지휘용 악기로는 나발.북.징.방울.비(기병이 쓰는 작은 북).도(아기 장난감인 딸랑이 방울처럼 생긴 북) 등이 있는데, 앞서 설명한 군사용 깃발과 같이 사용했다. 모든 신호는 대장의 지시에 따라 큰 나발 소리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이후 명령기를 이용해 내려졌다. 전투에 나가려는 병사들은 이처럼 다양한 신호체계를 익혀야만 했다. 결국 병사들의 쉼 없는 진법 훈련은 신호체계의 정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진, 온종일 병사들은 뛰어다닌다
: 실제 전투에서 진법이 변하면 병사들은 하루 종일 이리저리 오가는 식의 움직임을 반복해야 했다. 비상시에는 소속이 다른 많은 병사들이 한꺼번에 움직였을 텐데, 각 부대의 병사는 어떻게 식별했을까? 지금의 군인들이 군복에 부대의 상징마크와 소속 부대명을 달듯이 당시의 병사들도 군복에 소속 부대를 밝혔다. 중군은 황색 원형 휘장을 옷깃 앞에, 전군은 붉은 정삼각형 휘장을 배에, 좌군은 푸른색 직사각형 휘장을 왼쪽 어깨에, 우군은 백색 정사각형 휘장을 오른쪽 어깨에, 후군은 등에 구부러진 모양의 휘장을 붙였다. 그 각각의 휘장에는 소속 군의 명칭과 방위에 해당하는 짐승을 하나씩 그려 넣어 구별하기 쉽게 했다. 그래서 만약 진을 만들 때 엉거주춤하거나 진을 이탈하면 해당 병사가 어디 소속인지를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군법,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법
: 진법은 수많은 병사들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그에 해당하는 상과 벌이 명확해야만 했다. 먼저 휘장과 부대 표시가 떨어진 병사는 바로 목이 잘렸다. 또 행렬이 고르지 않거나 깃대와 깃발이 바르지 않을 때, 징과 북을 울리지 않을 때는 신호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서 바로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자신의 주장을 잃은 부대는 전원 목을 베고, 기와 북을 빼앗겨도 해당 부대원 전부가 목 없는 귀신이 되어야 했다. 소속 부대원들을 잃었을 때도 살아남은 병사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비록 소속 부대원들을 잃거나 장수를 잃었더라도 적군의 장수를 잡으면 각각의 상벌을 상쇄해 죄를 묻지 않았다. 군법은 상보다는 벌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군법의 핵심 목표가 전체 병사들의 경각심을 고취해 결사항전의 전투대세를 갖추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에서도 엄격하게 다스려졌다.
개미도 진을 치고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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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 진법, 그 비밀을 풀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큰 충격이라면 단연 임진왜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7년 동안 처절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은 크나큰 변화를 겪는데, 군사체제는 그중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왜 패배했을까
: 왜군은 조선군을 만나면 맨 앞 열이 작은 깃발을 이용해 시선을 빼앗고서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진이 허물어지면 창검을 가진 살수들이 돌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왜군 조총수들은 3열 횡대로 대열을 갖추고 차례로 조총을 사격해 재장전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완했다. 당시의 전투에서는 정면 격돌이 일어나서 죽는 수보다 한쪽 진영이 무너지고 추격해오는 적으로부터 배후를 공격당해 발생하는 사상자가 휠씬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제승방략이라는 방어체제로 왜군을 상대했다. 제승방략의 핵심은 소규모 지역 전투보다는 대규모 병력을 한데 모아 일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장의 지휘관이 아닌 서울에서 파견된 지휘관이 전체 병력을 통솔해야 하는 데 있었다. 지휘관이 파견되어 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 파견된 지휘관과 현장 장교들과의 이질감이 크며 지휘체계 문제 때문에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모을 수 없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 없었다. 이런 두 가지 문제가 노출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모습이었다. 병사 개개인의 전투 방십뿐만 아니라 국가 단위의 방어 전략까지 한꺼번에 결정적인 약점을 노출하면서 조선군은 말 그대로 초전박살 나게 된 것이다.
왜군을 제압하기 위해 도입한 명나라 전술체계
: 임진왜란이 터지고 패배를 연속했던 조선군들에게 이상하게 생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명나라 남병의 전투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연이은 패배에 선조 또한 위기감을 느끼고, 남병의 전투훈련 서적인 [기효신서]를 비밀리에 구해 병사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과 총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개인 단병무예인 살수는 좀처럼 훈련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조선군은 왜군 가운데 조선에 투항한 항왜병을 검술 교관으로 삼아 훈련시키기도 하고, 나이가 어린 15세 정도의 아동들을 모아 검술만을 특별히 훈련시키는 아동대를 만드는 등 단병접전 능력을 키우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병사들을 훈련시켜야만 했다. 이렇게 보급된 명나라의 진법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원앙진이다. 이 진법은 대장 1명에 등패수.낭선수.당파수 2 각 2명, 장창수 4명, 화병(보조병) 1명으로 총 12명이 한 부대로 움직이며 각개 전투를 치렀다. 이 대형을 기본으로 몇 개의 원앙대가 함께 모여 큰 규모의 방진(사각형)을 이루는 등 다양한 단병접전 전술을 구사했다. 원앙진과 그 변형 진법은 전장에서 소수의 인원으로도 전투를 펼칠 수 있어 왜군의 날카로운 창검수들을 제압했다. 원앙진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선두의 등패수를 따라 앞뒤에서 서로 보호하고 방어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교전 시에는 낭선은 등패를 구원하고, 장창으로 낭선을 구원하며, 단병으로 장창을 구하는 방식이었다.
급변하는 정세에 맞춘 전술체제의 변화
: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은 단병 무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창검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여진속은 기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격 전략을 취했기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보급된 [기효신서]의 보병 체제만을 가지고 전투를 펼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런데 부족 단위인 여진족의 위협도 잠시일 뿐이었다. 보통 여진족은 100명이 안 되는 소수의 기병부대로 편성돼 있었지만, 후금은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만의 기병이 한꺼번에 공격해올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이 변하게 되자 조선은 야전을 치르는 방식 대신 성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수성전술로 급선회하게 된다. 군사체제는 조화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대외정세에 따라 조선의 장점이었던 기병과 임진왜란을 통해 얻은 살수들까지도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결국 조선은 다시 살수와 기병을 훈련시키고 화포를 개량 발전시키는 등 다양한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이후 숙종에 이르러서는 앞선 화약 제조기술이 보급되고, 조선 또한 초기 직접 불을 붙여 쏘는 화승총에서 불은 붙이지만 방아쇠로 작동하는 조총이 만들어지는 등 다양한 군사 과학기굴이 발전하면서 전장은 또다시 소용돌이치게 된다. 이때 또다시 전장의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돌격 기병이다.
정조, 진법서와 무예서를 만들다
: 그동안 급변하는 군사적 상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진법을 비롯한 군사훈련 체계는 정조에 이르러 비로소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정조는 먼저, 병력이 대규모로 움직이는 진법을 정리해 1785년(정조 9년) [병학통]을 간행토록 했다. [병학통]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시급하게 조선에 보급된 [기효신서]의 보병 운용체계는 물론, 이후 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다시금 인정받은 기병 운용기법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욱 강력해지고 이동하기 쉬워진 화포 등 세 가지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조선만의 진법을 구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개인 무예에 있어서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바탕으로 만든 단병무예서인 [무예제보]의 여섯 가지 기예에 세손 시절 열두 가지를 더 보태어 만들어진 [무예신보]를 더하고 당시 전장에서 개롭게 부각된 기병의 전투무예 훈련을 위해 여섯 가지의 마상무예를 추가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24기를 완성한다.
다산, 탄금대 전투 신립 장군의 마음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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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조선의 특수부대와 비밀병기
조선 최고의 특수부대 장용영
장용영의 탄생과 정조의 삶
: 조선 후기 중앙 군영인 오군영의 대장들은 이미 척신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한 채 병조판서를 무시하고 정조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정조와 척신들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직접적인 선제공격은 척신들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은 임금의 처소까지 자객을 잠입시키는 '존현각 침입 시간'을 벌였다. 그리고 정조는 썩어버린 오군영을 버리고 진정 자신만의 군대, 참세상을 열 수 있는 정예 군사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785년 7월, 정조는 드디어 훈련도감의 최정예 무사들을 뽑아 자용위라는 국왕 경호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2년 뒤엔 약 200명으로 확대하고 부대 이름도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청으로 바꾸었다. 1788년 정조는 기존의 오군영을 감싸던 척신들의 불만을 뒤로하고 장용청을 확대 개편해 드디어 한 개의 단독 군영인 장용영을 탄생시켰다.
끊임없는 훈련, 오직 실력으로 승부한다
: 장용영의 병사들은 기존의 오군영 병사들이 받았던 것보다 몇 배나 더 혹독한 훈련을 받음 특수부대의 위용을 갖춰나갔다. 보군은 능기군과 십팔기군으로 구분했는데, 일 년에 네 번 시험을 봐서 실력이 떨어지고 게으른 병사들은 십팔기군으로 강등시키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능기군으로 뽑았다. 그리고 선발된 능기군 중에서도 무예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에게는 특별히 번직을 줄여주고, 급료를 높여주며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 장용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정조의 죽음 그리고 장용영의 해체
: 열한 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순조에게 장용영은 어린 왕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 장용영은 이제 더는 존재해서는 안될 군사조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이때만 해도 장용영은 화성에 둔전을 경영해서 상당한 자체 재력이 있었고, 다른 어느 군영 못지않게 조직적인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먼저 재정 붕괴 작전을 펼쳤다. 다시 말해 유급 병사들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군영의 재정에 압박을 가했다. 이렇게 재정력을 상실한 장용영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고, 급기야 영의정 심환지의 '장용영 혁파 상소'라는 결정타를 맞으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호랑이 잡고 사람도 잡은 착호군
과거에는 깊은 산중뿐만 아니라 번화한 도성에서도 때때로 호랑이와 마주치곤 했다. 이런 호랑이부터의 피해를 줄이고자 조선시대에는 착호갑사를 비롯한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군사들이 있었다. 귿르이 바로 착호군이다. 착호군은 무사들 중에서도 무예 실력이 뛰어나고 용맹한 사람들로 구성된 일종의 특수부대였다. 착호군은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5분 대기조'처럼 바로 출동해, 호랑이의 발자국을 추적하며 끝까지 몰아붙여 사낭햐고 나서 위세를 부리며 도성에 입성하곤 했다. 착호군의 이런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그저 고마운 존재만은 아니었다. 고맙기는커녕 힘든 고통을 안겨줄 때가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착호군은 호랑이 잡는 군사가 아니라 백성 잡는 군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착호군, 그들은 누구인가
: 조선 전기 군역자들 중 가장 높은 십분은 갑사(甲士)였다. 당시에는 똑같은 병사들일지라도 갑사, 정병, 대졸, 팽배의 순으로 신분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그중 의홍위에 소속된 군인인 갑사는 국토방위의 핵심을 맡았다. 갑사는 궁궐을 수비하는 내갑사와 궁궐 밖을 지키는 외갑사, 평안도.함경도에서 변경 수비를 담당하는 양계갑사, 그리고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로 구성되었다. 호랑이의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자 지방에서도 착호갑사를 뽑으며 이때부터 착호갑사는 착호장이 이끄는 착호군으로 불렸다.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사냥한 착호군들은 호랑이도 잡고, 포상도 받는 일석이조의 혜택을 누렸다. 조선 후기 들어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호랑이를 잡은 노비는 천역을 면제해주고, 병사는 신역을 면제해줄 정도로 포상이 후해서 너도나도 호랑이를 잡으러 산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호랑이 사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잡으라는 호랑이는 안 잡고 백성을 잡다
: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었던 것은 역시 삼정의 문란이었다. 여기에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의 백성들은 착호군관의 관보라는 명목으로 특수한 의무가 더해졌다. 다른 세금을 내기에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호랑이를 잡는다고 특별한 보를 만들면서 역이 동시에 겹치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에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호랑이 사냥으로 시작한 인조반정
: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광해군과 대북파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이 찌든 조선에 작은 평화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목대비 유폐 사건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반대파 서인들에게 반란의 명분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서인들 중 직접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이괄, 김자점, 김류, 이귀, 최명길 등은 반정의 기치를 들고 1622년(광해군 14년)부터 서서히 움직였다. 이귀가 부임하는 평산과 송경 사이에는 산이 깊어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는데, 급한 전령을 전달하는 파발마까지도 호랑이의 습격을 받곤 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에게 부임하는 즉시 호랑이를 사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호랑이 섬멸을 내세우며 먼저 특별 군사 작전권을 허가받은 것이다. 1622년 12월 이귀는 드디어 자신 병력과 장단방어사 이서와 함게 호랑이 연합 섬멸 작전을 펼친다는 구실로 담당 구역을 넘어 도성 쪽으로 진군하려 했다. 그러나 이귀의 첫 번째 반란 계획은 유천기의 고변으로 무산되었고, 이귀는 파직을 당했다. 비록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1623년 3월 13일 반란군들은 도성을 함락시키고 광해군을 권좌에서 밀어냈다. 호랑이 사냥에서 시작한 인조반정은 결국 광해군 사냥으로 끝난 셈이다.
그 많던 조선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조선 전기만 해도 일정한 개체수를 유지하던 호랑이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수만 마리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전쟁과 서식지 이동 및 군기 감소였다. 17세기 말에는 북방의 만주 지역에서 호랑이 사냥이 극심해지자 조선으로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세 포수들이 사용하던 조총을 국가에서 전부 회수해 군기고에 봉인해버리자 더는 호랑이 사냥을 할 수도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호랑이 사냥이 뜸했으니 호랑이들은 말 그대로 제철을 만난 듯 백두대간을 호령하며 살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비극인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호랑이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일제는 군인과 경찰, 전문 포수를 동원해서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렸다. 나아가 일제는 '야마모토세이코군'이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해 사냥에 나섰다. 일제는 이 부대를 '제국 청년들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하여'구성했다고 밝혀지만, 실상은 피폐해진 시대 상황과 일본의 경제 침체라는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사기 진작용으로 만든 포수부대였다.
다산 정약용, 호랑이 사냥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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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경호부대, 겸사복
현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최측근에서 왕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겸사복이다. 물론겸사복 이외에도 내금위나 서얼이 중심이 된 우림위가 있었다. 겸사복과 내금위, 우림위는 1651년(효종 3년)에 금군영으로 통합 관리되어 금군 전체를 아우르는 내삼청으로 불리기도 했다. 겸사복, 내금위, 우림위 외에 왕을 보위한 직책으로 운겸이 있었다. 운검은 큰 칼을 차고 금군들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왕을 경호했다. 그러나 운검의 역할은 경호 임무보다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겸사복, 그들은 누구인가?
: 겸사복은 조선 개국과 동시에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를 훈련시키고 관리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상승국의 일부를 변행해 탄생했다. 상승국에는 말과 관련해 내승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이들은 임금이 타는 말을 관리하면서 궁궐을 지키는 금군의 역할을 수행했다. 내승은 왕조가 바뀌고서도 계속 그 일을 담당했는데, 조선 태종 때에 말을 관리하던 사복의 역할에 뛰어난 무예 실력을 겸비하면서 겸사복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겸사복은 세종 때에 이르러 단순히 어마를 관리하는 내사복시의 직책 이외에 겸윤과 겸소윤이라는 독자적 조직을 만들어 국왕 친위병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임금을 호위하는 일의 핵심은 숙위였는데. 이는 궁궐 경비를 위해 궁궐 내에서 숙직하는 일을 말한다. 태종 때에는 내금위와 겸사복은 여기에다 말을 잘 부리는 재주가 있는 특수부대였깅 왕이 타는 말을 직접 길들이고 사육하는 것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그래서 왕이 멀리 능행차를 갈 때면 그들은 어마와 함께 왕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의 겸사복은 내금위와는 달리 무예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반상의 구별 없이 뽑았다. 또 북방 지역인 양계 사람들과 북방 오랑캐지만 조선으로 귀화한 향화인들까지 의무적으로 뽑도록 법제화해 그들의 특수성을 높여갔다. 겸사복이 권력의 핵심에 있게 되면서, 이들은 이른바 청반이라 하여 지위와 봉록은 높지 않으나 뒷날 높이 될 자리로 양반 관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얼 중심의 우림위가 새롭게 탄생했고, 무예가 뛰어난 서얼들이 우림위를 거쳐 겸사복으로 승진하는 것이 잠시 법문화되기도 했다. 권력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우림위와는 달리 겸사복은 권력관계 속에서도 임금 곁을 지키는 권력의 핵심으로, 엘리트 청반부태로 거듭나게 되었다.
권력의 중심에 다가설수록 썩는다
: 겸사복은 적은 인원에 늘 임금 곁을 지키는 특수 임무를 담담했기에, 직권을 남용하거나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임금의 어마를 관리하는 겸사복의 위치 탓에 말과 관련된 사건의 핵심에는 꼭 그들이 있었다. 백성들도 점마관이라는 직책으로 전국의 목장을 돌며 말을 고른다는 핑계로 온갖 노역을 강제 징집하는 겸사복을 결코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시애 반란을 선봉에서 막아내다
: 겸사복의 주된 임무는 수위와 어마를 길들이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이 발생할 때는 겸사복이 전투에 파견 나가는 일도 있었다. 특히 양계 지방에 고향을 둔 겸사복들은 임금의 특명을 받고 국경 지역까지 파견 나가기도 했다. 또 내란을 비롯해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그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토착 세력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양계 지역 겸사복들이 선봉에 서서 전투를 이끌기도 했다.
휜칠한 외모에 탁월한 무예 실력
: 조선 초기의 겸사복은 무예 실력이 출중하면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어 특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조직이 갖춰지고 청반직으로 인식이 변화되면서 중종 때 이후부터는 사족 출신의 8척 (1척은 약 23cm, 1902년 일제에 의해 척도가 바뀐 뒤부터는 30.3cm) 이상 되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수려한 사람을 가려서 뽑았다. 또한 기본적인 학식과 품성을 갖추고 4대조의 내력을 훑어봤을 때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선정했다. 힌반 겸사복에 합격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를 지키려면 쉼 없이 훈련하고, 매년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이름의 무예 시럼을 봐야 했다. 만약 이 연재에서 떨어지면 자리를 내놓고 가차없이 궁궐을 떠나야만 했다. 최고의 실력을 감춘 겸사복이었기에 국왕도 그에 맞는 많은 헤택을 주었다. 특히 신분이 낮은 천민은 오랫동안 겸사복에 근무하면 특별히 면천을 시켜주기도 해서 겸사복은 천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겸사복 박효공 신부가 바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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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비밀병기, 편전
조선의 힘을 보여준 편전
: 조선시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아낌없이 조선의 힘을 보여줬던 병기는 다름 아닌 편전이었다. 쉽게 말해 편전은 일반 화살을 몇 개로 나눠서 쏘았던 화살인데, 화살의 크기가 하도 작아서 속칭 '애기살'이라고도 불렀다. 문제는 화살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 보통 활처럼 활줄에 걸어서 시위를 잡아당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편전의 강력한 파괴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통아'라는 일종의 화살 받침을 만들어 쏘았다. 편전은 동양 삼국 중 오직 조선만이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투마다 편전을 쏘는 궁시병은 조선의 최정예 부대로 인정받았다. 편전의 특징은 일반 화살에 비해 최대 사거리가 2~3배에 달하는 1,000보에 육박했고, 길이가 짧고 작아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적에게 치명적인 무기로 인식되었다.
편전은 당할 수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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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유출을 막아라!
: 조선의 편전 위력이 주변국들에게 치명적인 무기로 인식되었기에 국가적으로 편전 쏘는 기술과 장비에 대한 보안의식도 철저했다. 편전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다 보니 청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선의 편전을 수입하려고 했다. 현종 때에 파견 나온 청나라 사신이 요구한 군수품을 살펴보면, 왜의 조총 2자루, 조선의 각궁 2장, 통아 2개, 편전 10부를 요구했는데,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이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숙종 때에는 북경에 사신으로 간 조선 무인들에게 청의 황제가 직접 편전 쏘는 것을 보여달라고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4장 조선을 지킨 무기와 성곽 그리고 전함
활쏘기, 상상을 초월하다
활쏘기 실력에 혼쭐난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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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방패 사이로 엿보다 화살을 맞다
: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활쏘기는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배울 수 있었던 무예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사법은 엄지손가락에 깍지라는 보조기구를 기워 시위를 당기는 방식이다.
성곽, 한반도의 숨결을 지켜주다
전체 국토 면적에서 산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70%에 육박하는 한반도에서, 산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안심을 주고,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줬음이 틀림없다.
고구려를 보면 우리나라 산성이 보인다
: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경영했던 고구려의 힘은 바로 산성에서 시작한다. 산성의 장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 방어할 면적이 좁아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기 쉽다. 2. 단독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원거리 이동으로 피로가 쌓이고 보급이 원활치 않은 적들에게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다. 3. 산성 하나를 빼앗긴다고 해도 주변에 또 다른 산성이 있기 때문에 적들이 쉽게 주변을 장악.통제하기가 어렵다. 4. 산성 방어 작전은 청야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는데, 이는 인근의 모든 곡식과 가축들을 성안으로 이동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불을 질러 적의 현지 물자조달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성의 장점 때문에 고구려는 약 200여 개의 산성을 중국과의 접경 지대는 물론 전국에 분산 배치하여 국토 전체를 요새화해 강력한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지방 행정체제가 산성을 중심으로 마련되고, 장기간의 전쟁에 대비한 식량 및 군수물자가 산성에 비축되면서, 산성은 전시에는 단독 작전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치 방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산성 전투, 그 역사의 현장을 보다
: 성곽 전투의 기본은 파성추(성을 깨뜨리기 위한 무기)와 충거(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공성 기구를 이용해 성벽과 성문을 공격하거나 성벽에 사다리를 놓고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또 성의 지반이 약하면 땅굴을 파서 여기에 물을 대어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산성은 지형으로 접근이 쉽지 않아 아무리 많은 수의 적이 오더라도 성을 공격하는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절벽이나 암벽 등을 이용해 세워진 산성은 땅굴을 팔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였다.
남한산성, 그 처절한 역사의 현장
: 산성 방어 천략이 꼭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산성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물'이었다. 산성은 방어하기에 더없이 효과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외부의 압력에 스스로 견딜 수 있는 자생력이 없으면 적의 고사 작전에 휘말려 성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산성의 진화, 수원 화성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화약무기의 위력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기존의 산성 방어 전략 또한 많은 수정을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산성 방어 병력은 성의 담장, 즉 여장(타)을 빠라 배치되는데 1타(타구와 타구 사이)당 8명의 병사가 방어했다. 1타에는 보통 3개의 총안(총을 쏘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조총수, 궁수, 장창수 및 도검수들이 섞여 배치되었다. 그리고 총통과 불랑기(대포)를 비롯한 대구경 화포는 5타당 1기가 배치되어 화력을 높였다. 조선 후기 최고의 성곽 수원 화성은 산성과 읍성이 혼합된 성곽으로 전체 길이 5,743m(4,600보), 총 913개의 타로 외곽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수원 화성을 지키려면 약 7,300여 명의 병사가 있어야만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한산성 전투에서 적이 구릉에 올라가 화포를 쏘아 타격이 컸던 점을 고려해 성곽 주위에 높은 구릉이나 산이 있으면 공심돈(내벽과 외벽을 원형 또는 방형으로 2~3층 쌓아 올리기 위에는 누정을 세워, 벽에 총구를 내어 내.외벽을 돌면서 적을 사격할 수 있게 만든 건축물)이라는 특수한 방어 시설물을 세워 방어력을 보강했다. 그리고 성벽 전체를 포격에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기존 산성은 10m 이상의 높은 성벽이지만 화성은 전체 높이를 약 5m 정도로 낮게 쌓고 직사각형의 긴 성돌을 성벽 안 흙 언덕에 기대 세워 포격의 충격파로부터 성벽을 보호했다. 또한 적의 포격으로부터 집중적으로 공격받을 만한 곳은 일반 돌이 아닌 구운 벽돌을 이용해 적의 포격에 일순간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다. 여기에 포루와 치성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교차 지원 사격을 가능케 했고, 성문 주변에는 옹성을 쌓아 이중 방어벽을 설치했다. 또 중심 성문에는 적대를 쌓아 홍이포를 비롯한 대구경 화포로 원거리의 적을 포격할 수 있도록 했다.
반만년의 역사와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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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기들-단병무기
칼이라고 다 같은 칼이 아니다
: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으로 환도, 쌍수도, 언월도, 협도 등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칼이 사용되었다. 그중 환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칼 모양의 모든 것을 한도라 통칭해서 부를 만큼 널리 알려졌다. 환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2가지의 유래가 있다. 1. 고려 중기 이후부터 사용된던 것으로 칼의 손잡이 부분을 방어하는 칼방패(검막)가 둥근 형태라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2. 칼을 몸에 휴대할 대 칼집에 빙글빙글 도는 고리가 달려 있어 환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환도는 몸에 늘 차고 다녀야 했기에 왜검(일본도)에 비해 그 길이가 상당히 짧았다. 환도의 길이 짧아지다 보니 환도는 적을 살상하는 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호신용 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조선군은 1m가 넘는 왜검을 휘두르며 돌격해오는 왜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환도의 길이가 짧아지다 보니 그 사용법 또한 길이가 긴 왜검과는 상당히 달랐다. 왜검은 크게 한 번 내려 베어 상대를 단칼에 제압하는 방식의 수련이 주를 이루는 데 반해, 환도는 섬세하게 적을 파고들어 찌르거나 신체의 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베는 기법이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전투에서 환도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야 했다. 환도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의장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심지어 전장 길이가 30~40cm 정도로 짧게 줄어들어 그 효용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짧은 환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언월도(초승달 모양의 칼)와 협도(칼날 폭이 좁고 긴 칼) 등 자루가 긴 칼이다. 언월도는 주로 찍어 베는 기법이 주를 이루지만, 협도는 협도곤이라는 긴 봉에 짧은 칼날을 붙인 형태에서 출발했기에 그 쓰임새가 주로 찌르기가 중심이 되고 이후 짧게 베는 기법이 추가되었다.
쓰임새에 따라 다른 창의 길이
: 고대부터 사용한 무기 중 칼보다 먼저 전투 현장에 등장한 것은 바로 창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그 형태와 길이에 따라 장창, 죽장창, 기창, 표창 등 다양한 형태의 창이 사용되었다. 이 중 장창과 죽장창은 주로 여러 겹으로 층을 이룬 밀집대형을 짜서 적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기창은 깃발이 달린 짧은 창을 말하며 단창이라고도 했다. 표창은 방패를 든 팽배수가 보조 무기로 사용하던 것으로, 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표창을 던져 적을 살상하는 무기였다. 전투에서 사용하는 표창은 길이 1.5m 내외의 투장이었다.
특별하고 위력적인 단병무기
: 조선시대 단병무기 중 가장 특이하게 생긴 무기는 바로 낭선이다. 제거하지 않은 긴 대나무의 수많은 가지 끝에 뾰족한 철 조각을 단 낭선은, 전체 길이가 약 3m가 넘었고, 무게는 약 4.5kg에 육박하는 대형 무기였다. 특히 가지 끝에 달린 철 조각에는 독약을 발라 조금 스치기만 해도 죽을 수 있었기에 적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낭선의 핵심적인 공격 흐름은 큰 낭선을 빠르게 시계방향으로 돌렸다가 반시계방향으로 연이어 돌리는 압하.가상의 자세가 있고, 구개세라 하여 낭선을 좌우로 크게 흔들어 적을 쓸어버리고 그 사이로 등패수들이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낭선도 장창의 전술과 같이 밀집대형을 취하기도 하였는데, 열을 지어 서 있는 낭선은 현대 참호전의 주력 방호물인 철조망과 같은 역할을 해 돌격하는 적들을 저지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사용된 방어형 무기였다. 낭선을 방어형 무기로 본다면 공격형 무기 중 가장 특이하게 생긴 것은 편곤이다. 편곤은 그 모양이 벼나 보리를 타작할 때 쓰는 도리깨와 형태가 유사한데, 긴 봉에 짧은 봉을 이어 붙여 마치 쌍절곤의 한쪽 봉이 아주 긴 형태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낭선과 마찬가지로 편곤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입했다. 편곤은 무조건 때려 부수는 방식의 타격 무기여서 적이 갑옷을 입었든 벗고 있든 상관없이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특이하게 생긴 단병무기로는 갈고리 모양의 구창이 있다. 이 무기는 창날의 좌우에 사선으로 갈고리를 이어 붙여 만든 무기로 주로 말 위에 탄 기병을 갈고리로 걸어서 끌어내리고 찔러 죽일 때 사용한 무기였다. 이 갈고리의 역할을 확대하여 만들어진 무기로 겸창이 있는데, 이는 봉 끝에 낫의 형태를 단 모습을 하고 있다. 쇳덩이에 줄을 달아 휘돌리며 사용했던 유성추 등 독특한 형태의 단병무기들이 전투에 사용되었다.
전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 실제 전투에서는 여러 가지 무기들이 적절히 조합돼 사용되었다. 무기들의 효과적인 배치는 전략과 전술, 나아가 진법이라는 대규모 전투방식을 구현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진법은 예상되는 적 병력의 규모와 주된 병종의 특징에 따라 아군의 선봉에 어떤 부대를 배치하고 좌우의 날개에 어떤 무기를 든 병사를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무기들-화약무기
화약무기, 즉 온병기의 탄생은 바로 대량살상 무기의 탄생을 뜻한다. 화약무기 이전의 차가운 금속성 무기들은 오랫동안 일대일 또는 다대다 전투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화약무기가 등장하면서 전쟁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동시에 앗아가는 대량살상의 양상으로 변해갔다.
조선시대 화약 만들기
: 조선시대의 화약 만드는 방법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1.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질산칼륨)을 추출할 원재료를 구하는 단계 2. 원재료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단계 3. 뽑아낸 초석에 유황과 목탄을 비율에 맞게 섞는 단계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1단계인 원재료를 구하는 것으로 이것을 취토법이라고 한다. 화약 제조의 2단계는 구해온 흙과 곱게 태운 재를 섞어서 물에 녹이는 과정으로 이것을 '사수'라고 부른다. 화약 제조의 마지막 단계는 순수한 초석인 정초를 터지는 성질로 전환하기 위해 유황과 재를 석어 화약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것을 '도침'이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비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화약의 성능이 좌우되었다. 화약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일이므로 사사로이 화약을 제조하고 사용하는 것은 사주전예(위조화폐범을 철벌하는 예)와 똑같은 벌로 다스렸다.
대량살상 전쟁의 시작, 조총
: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에 보급된 조총은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여 마침내 화승(불을 붙게 하는 데 쓰는 노끈)에 불을 직접 붙이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까지 진화했다. 화승총의 결정적인 한계는 비가 오는 날이면 불씨를 간직하기 어렵다는 것과 관련 부속품을 모두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차륜식 방아틀총인데, 이것은 요즘 1회용 라이터가 불꽃을 튀기는 것처럼 방아쇠를 당기면 회전력으로 불씨가 화약에 점화되었다. 그 이후 17세기 초에 등장한 것이 수석총인데, 이는 두 개의 부싯돌을 장착해 충격 마찰로 생기는 불꽃을 점화에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사용하는 충격식 총을 보면, 총신과 화구 사이에 화약을 넣고 이것을 노리쇠로 때려 발화시켰다. 이후 총알이 발사도리 때의 반탄력을 이용해 빈 탄피가 자동으로 빠져나오는 방식이 가미되어 분당 발사 속도가 수백 발이 넘는 다연발총이 탄생했고, 이로써 전장은 대량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총통, 그 크기만큼 위력적이었을까
: 고려 말에 시작된 화약무기 개발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대형 총통(화약무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화약의 폭발력을 쉽게 제어할 수 없었기에 작은 총통보다는 두껍고 덩치가 큰 총통이 안정적이고 사용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정말 이런 무기가 있었을까
: 조선시대에는 창조적인 생각이 담긴 신무기들이 두루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비진천뢰이다. 비진천뢰라는 이름은, 발사할 때 연기가 자욱하고 불이 날며 소리가 우레 같아서 숲의 나무가 모두 진동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이 무기는 원형의 철통 안에 날카로운 쇳조각을 넣어 발사하는 것이 특징인데, 적진에 떨어진 포탄이 일정 시간 후 폭발해 포탄안의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적을 살상했다. 비진천뢰는 빨리 폭파시키려면 포탄 안의 대나무 통 속 나선형 부속에 10줄을 파고, 조금 느리게 폭파시키려면 15줄을 파는 식으로 폭발 시간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그다음 비몽포가 있는데, 이 무기는 요즘의 생화학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비몽포는 긴 자루 끝에 항아리 모양의 모포를 달고 그 안에 화약을 채우고 독약과 화약을 가즉 채운 자포를 넣은 형태였다. 비봉포를 발사하면 자포가 적에게 날아가다 공중에서 자체 폭발하여 맹독들이 분산되어 적의 호흡기나 눈을 공격했다. 근거리는 찬혈비사신무통이라는 무기를 사용했는데, 이 무기는 주로 석회가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독을 불에 붙여 적의 호흡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바람이 불어 확산이 빠를 때는 멀게는 10리(약 4km)까지 냄새가 미쳐 적의 사기를 꺾어놓는 데 효과적이었다. 목통은 수십 개의 나무로 만든 폭탄을 연결해 거대한 진법을 그리듯이 설치할 수 있어서 방어작전에 효과적이었다. 목통의 설치 방법은 특별히 매화법이라 부른다. 매화법을 보면, 먼저 구리선 두 가닥을 장대에 묶고서 한쪽은 장대 끝에 묶우며, 나머지 한쪽은 기둥 중간에 묶고 기둥 옆은 흙을 쌓아 놓게 하고 그 위에 화약통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계속 연결하면 수십 개의 목통이 연결된 거대한 지뢰 지대가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무기는 공선수뢰이다. 공선수뢰는 폭탄을 바다 위헤 띄워 놓는 것이 아니라 잠수병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적의 배 아래에 장착해야만 쓸 수 있었으며, 게다가 이 무기는 위의 뚜껑에 물이 가득 차야 터지는 것이라, 잠수병이 직접 뚜껑을 여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수뢰는 철로 만든 서양의 이양선도 치몰시킬 만큼 위력이 대단해서, 강화도에 실전배치 되기도 했다.
조선 바다는 조선의 배로 지킨다-전함
조선의 무적 전함, 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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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해골선, 조선의 전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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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에서 승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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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바다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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