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면서
인조반정으로 성립한 인조정권은 사림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권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이래 성장해 온 사람의 정치 이상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그 정책들이 미처 착근되기 전에 병자호란으로 패배했고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뒤이어 유교 문화의 정통이라고 생각했던 명나라가 멸망했다. 200여 년을 지속했던 국제 질서는 17세기 전반에 그렇게 마감되고 있었다. 구 질서가 마감되고 신질서가 성립하는 시기를 살았던 17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마음을 열어볼 수 있는 열쇠를 굳이 하나 들라면 필자는 절박함을 느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사회 질서 재건의 의무감을 꼽겠다. 절박함과 의무감 속에 지식인들은 여유로운 탐구의 길보다는 치열한 논쟁과 검증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국가 존립의 근거, 사회 재건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사대부 개개인의 삶의 의미 등을 '학자가 탐구해야 할 문제를 넘어 실천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로 보았다. 따라서 학문은 학문을 넘어 사회와 개인을 두루 규정하는 지침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 지식인들이 선택한 귀결처는 결과적으로 본다면 주희의 사상, 즉 주자학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국가 재건의 이데올로기로서 확고부동한 권위를 획득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과 논쟁을 거쳐야 했다. 16세기 중후반에 형성되고 세워졌던 학파와 서원은 지식인들의 담론의 원천이자 인적 결합을 배태하는 토양이었다. 그 점에서 학파는 정파의 모태가 되었거나 최소한 정파와 긴밀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는 이념을 매개로 한 정파 즉 '붕당'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주자학 관철의 폭과 깊이를 둘러싸고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상 논쟁이 격화되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과정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지식인들은 미묘한 변화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는 공고해졌고, 양난의 피해를 극복한 조선에선 사회 활력과 문물 흥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기운은 유교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강한 의무감을 완화시켰다. 활력 저편에서 자라나는 서울 중심화라는 흐름은 지방 지식인의 소외와 자괴감을 점점 피어오르게 했다.
산림(山林)의 시대를 열다 - 김장생과 김집 부자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해 새 정권이 들어섰다. 인조가 등극하고, 정부는 서인 위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기한 쉽지 않았다. 그즈음 공신들에게 한 노학자의 편지가 전해졌다. 이 편지는 새 정권의 핵심인 김류.이귀.장유.최명길에게 김장생이 보낸 것이었다. 당시 김장생의 나이 76세. 그는 서인의 대학자 이이.송익필.성혼의 수제자였다. 인조반정의 주류는 서인이었고 공신들은 대개 그의 동학.후배.제작였기에, 비록 재야 선비이지만 새 정권에서 그가 지닌 위상은 막대했다. 그의 편지 한 장이 미친 파장이야말로 선비의 공론이 정국을 움직이는 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산림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산림은 공자의 학문 곧 도통(道統)을 잇고,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를 실현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새 정권의 대표적인 구호가 '산림을 받들어 중용하자'일 정도였다. 산림의 중용은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조선 정치의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산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산림정치의 본격화는 인조대에 이루어졌으며 그 선두에 김장생이 있었다.
노둔한 학인, 3인의 스승에게 배우다
: 신진세력인 사림은 대개 지방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림이 추구했던 성리학의 이상을 중앙의 신진인사들이 앞장서 주장한 경우도 많았다. 곧 훈구 집안 출신 가운데 사림이 된 이들도 많았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에게 배웠다. 김장생이 이이를 찾아 배움을 청했을 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33세 성혼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빼어난 스승들을 두루 섭렵했으니 참 명민했을 법하건만, 김장생은 스스로 '꿈뜨고 미련하다'고 자주 자평할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문장이 졸렬하고 식견이 꽉 막혔다'는 다소 조롱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관계 진출과 사교가 문장으로 결정되었던 시대에 치명적 단점이 아닐 수 없었다. 김장생은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30대에 경학과 예학에 일가를 이루어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천거되어 관직에도 올랐다. 그는 과거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요직과는 거리가 먼 한직을 전전했다. 김장생은 명문 출신의 착실한 학자로 정치가나 산림은 아니었던 셈이다.
율곡학파를 서인에 뿌리내리다
: 착실한 학인 김장생이 서인의 산림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생애 최대의 시련 때문이었다. 1613년(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에 광해군이 김장생의 연루 여부를 탐문했을 정도로 그는 주목 대상이었다. 사건 이후 그는 선대 이래 연고가 있던 충청도 연산(현재 논산군 연산면)에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제자를 교육 했다. 이후 김장생은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몰두했고, 강학을 통해 수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훗날 이곳 양성당을 중심으로 돈암서원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문인 중에 일부는 인조반정을 주도해 국가 지도층이 되었다. 또 다른 일부, 특히 연산 강학 때에 형성한 그룹은 향후 서인의 체질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선조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할 무렵 서인은 동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장층이었고 관료적 성향이 짙었으므로 학문을 매개로 한 결속력은 미약했다. 명실상부한 학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2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인재 양성의 안정성이다. 바로 그 미비점을 김장생의 연산 강학이 보완한 것이다. 학파를 공고히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도통의 정립이다. 교육이 학파 발생의 사회적 자산을 마련하는 일이라면, 도통 정립은 정신적 정체성을 갖추는 일이었다.
예학의 시대를 열다
: 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김장생이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야는 예학이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예학은 치밀한 고증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가를 이루기 힘들었다. 그가 평생 진력한 작업은 예에서 종통(宗統)의 우월성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 논리는 가족질서를 종법(宗法)에 맞춘다는 사고에서 나왔다. 원래 종법이란 중국 주 나라의 왕위 계승과 분봉 논리에서 출발했지만, 성리학에서는 이를 가족질서에까지 확대했다. 곧 혈연에 기초한 인정보다, 의리나 예법이 더 근본적인 자연스러움이고, 집안에서는 이를 종법으로 실현한다는 사고였다. 종법이 바탕을 둔 의리나 예법은 세상 운행과 인간사를 움직이는 형이상의 원리, 곧 천리(天理)의 실현이었다. 역으로 보면, '형이상의 질서(天理)->사회질서(義理/禮法)->가족질서(宗法)'일 터였다. 천리는 인간의 윤리 혹은 자연스러운 정서의 근원이었기에, 혈연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이에 근거해 행해지거나 규제되어야만 했다. 이 논리는 당시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임진왜란 이후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재수립하고, 그 하부 단위인 지역 사회나 집안 질서를 공고히 하는 기준으로 종법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부자의 문묘 종사
: 김장생은 인조와 예론을 두고 갈등하기도 했지만, 원자(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는 왕과 세자의 보위자로 인조 집권 초기에 정국 안정에 기여하다가 1631년(인조 9년)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아들 김집이 그의 역할을 계승했다. 사실 김장생 말년의 제자는 김집이 가르친 경우가 많았다. 김장생 부자의 대를 이은 교육으로 충청도는 이이 학맥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김집이 정계에서 의미 있게 활동한 시기는 효종이 즉위하고부터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산림을 대거 등용하자,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김집은 '대로(大老)'로 불리며 큰 기대 속에 출사했다. 당시 대로로 불린 사람은 김집 말고도 김상헌이 있었다. 김상헌은 인조대 초반 청론(淸論)을 주장하고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영수로 활약했기에 산림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김집과 김상헌은 의기투합해 '산림과 붕당'이라는 산당(山黨)을 이끌었다. 산당의 결성은 그 의미가 매우 컸다.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이 집권 주류가 되었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정에 참가한 서인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 말에는 산림은 소수이고 권신(權臣) 그룹이 여전히 정국을 주도한다는 의미도 깔려 있었다. 그 지형을 갈라놓은 사건이 병자호란이었다. 붕당을 막론하고 척화와 주화로 의견이 갈리면서 기존 구도는 일시에 부정되었으며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대립선이 분명해졌다. 그 원칙을 표방한 본격적인 그룹이 산당이었다. 산당은 형식상으로는 김상헌 중심의 관료와 김집 중심의 산림의 결합이었으며, 내용상으로는 척화의리를 상징하는 절의파의 서인과 도통을 계승한 도학파의 만남이었다. 명실상부한 이념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효종대 이후 그들은 명분에 취약한 공신계를 점차 도태시키며 새로운 주류로 성장해 나갔다. 김장생, 김집 부자는 이이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 예학의 태두로 한 시대와 산림정치를 열었다.
가통보다 소중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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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1. 산림
산림은 '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혹은 '산림독서지인(山林讀書之人)'의 준말이다. 그대로 풀이하면 '재야의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 정도일 것이다. 산림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 천거에 의해 등용된 재야의 학자다. 산림은 인조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산림의 존재와 학계.정계에서 활약은 조선 유교정치의 성숙을 보여준다. 유학은 요.순.삼대의 이상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세습 군주의 등장으로 성왕의 계승은 담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성인과 군주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틈, 곧 도(道)와 정(政)의 분리, 성(聖)과 왕(王)의 분리가 생겼다. 그 틈을 메우는 일이 유학의 큰 숙제였다. 그 방식은 거칠게 보면 3가지였는데 시기와 상황에 따라 간헐적으로 혹은 융합되어 나타났다. 1. 재주와 학덕을 겸비한 군주가 성왕을 표방하는 것이다. 군주성왕론은 역대 국왕의 왕권강화 논리였다. 2. 재상권을 중시하는 견해였다. 국왕의 자질이 중간 정도만 되더라도, 만인 가운데 능력이 뛰어난 현잘르 재상으로 임명한다면 통치 수준은 항상적으로 보장되었다. 이 구상을 선명히 드러낸 인물이 정도전이었는데, 그가 숙청된 이후에 의정부.비변사의 재상 합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3. 산림을 통해 세도를 구현한다는 구상이었다. 산림은 과거 출신의 고위 관료에 비해 폭넓은 자율성을 누리며 사대부의 공론을 대변했다. 이 방식이야말로 야인에 가까웠던 공자 스타일이었고, 사대부 중심 유학인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전형적 모델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붕당정치가 격화하고 그 대안으로 탕평정치가 전개되자 산림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림이 사대부의 공론이 아니라 자기 정차의 여론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이 점차 강화되었다. 또 군사(君師, 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한 영조와 정조가 등장했다. 19세기 전반에는 세도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했다. (* 좋은 내용이다. 눈이 다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2. 예와 예학
유학에서 말하는 예는 서구의 에티켓이나 매너와는 사뭇 범주가 다르다. 유교의 예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 덕성이 외면적 질서로 드러난 것이 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의미에서 매너와 통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질서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 이상적 질서로서 개인 범주에서는 도덕 수양의 외화물이고 국가 차원에서는 덕치의 상징이었다. 유학의 분파인 성리학은 인간의 덕성이 천리에 근원했다는 '성즉리(性卽理)'가 대전제였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예는 덕성의 형상물에서 한걸은 나아가 천리의 형상물로 생각되었다. 천리에 근거해 인간과 세계의 정합성을 추구할수록 예의 응용은 중요해졌고, 예를 탐구하는 이론 또한 정교해졌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깊은 학문적 성취 위에 조선의 현실에 맞는 예를 기획한 예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에는 사상계 전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예학의 성과를 현실에서 강하게 실현해야 한다는 압박이, 예학의 발달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대두되었다.
백성이 편안하면 국가에 근심이 없다 - 김육
김육의 일생은 매우 극적이다. 생애 전반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에 비해 생애 후반부는 득의의 시절이었다. 경세가로, 외교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말년에는 한당(漢黨)이란 정치 그룹의 영수로도 활약했다.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김육은 대동법을 비롯한 수많은 개혁책을 건의하거나 실현했다. 그의 개혁책은 일방의 지지를 받았지만 성리학의 전통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공리(功利) 추구로 비판받았다. 그런데 공리에 기반한 일련의 정책을 홀로 외롭게 추구한 것만은 아니었다. 부분적 각론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정도 개혁책은 당대에 폭넓게 논의, 시행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그와 같은 실용파가 한 흐름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굳이 말하면 경세관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생복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제도개혁파라고 부를 수 있겠다.
애물제인의 마음
: 김육의 고조부는 조광조와 함께 활동했던 김식이었다. 그러나 김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자결한 뒤로 가문의 영달도 다했다. 청년기에 왕성한 언론 활동으로 서인 신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지만, 그는 어릴 적 [소학]을 읽다가 정호가 말한 "처음 관직에 오른 이가 진실로 애물(愛物)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김육의 중요한 사고 방식 3가지를 살펴보면, 1. 애물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져야 할 보편가치이지만, 애물의 구체적 실현, 즉 제인은 관원의 몫이라고 방점 찍은 점이 그 하나다. 2. 제인의 근원으로 의를 강조하는 태도다. 인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에 기반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정신이 그가 생각한 의였다. 정감에서 흘러나와 나와 관계 있는 타자에게 헌신하는 정신, 곧 인에 기초해 직분에 충실하는 의는 원시 유학의 개념이었다. 그에 비해 성리학에서 말하는 의는 좀 다르다. 성리학에서는 본성의 근거를 천리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곧 본성에 기초한 규범으로서의 당위가 강화된 것이다. 3. 김육이 강조한 지 역시 제인에 필요한 방도를 찾거나 실천에서 생기는 의혹을 해소하는 지혜의 의미였다. 그것 역시 성리학에서 지란 인간과 세계에 내재한 질서를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가평 10년, 노동 중에 민생을 체험하다
: 김육은 34세에 가평 잠곡(현재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에 은거했다. 당시는 광해군 말년인지라 서인과 남인에 속한 많은 인물들이 은거했지만 그처럼 작심하고 농사지었던 이는 드물었다.
대동법, 멀고도 어려운 길
: 인조반정을 계기로 김육의 인생은 순탄히 풀려나갔다. 중년에 접어든 김육이 안목을 크게 넓힌 계기는 병자호란 반발 직전에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였다. 당시 나이 57세, 조선이 명에 보낸 마지막 사신이 바로 그였다. 명에 다녀온 이듬해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효종 초반에 대로로 불렸던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하자, 김상헌이 김집을 지지하고 나섰다. 김집은 김육이 변법(變法)에 치중해 공리(功利)만 추구한다고 비판했고, 김육은 김집이 덕망만 높았지 실질에 어두운 것을 우려했다. 학계와 정계에서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수십년간 쌓았던 우정에 금이 갔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정치 그룹마저 생겨나 김육.신면을 중심으로 한 한당과 김집.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산당이 형성되었다. 후에 김집의 뒤를 이어 서인 산림을 대표한 송시열은 대동법을 옹호하며 스승 김집의 오류를 인정했다.
복리와 실용 우선의 개혁책
: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다방면에서 민생의 복리를 위해 노력했다. 김육의 실용적 개혁책은 그 밖에도 광범위했다. 김육이 제시한 시책은 후대에 대부분 실현되었다.
바라는 바는 민생이니 구름 잡는 글을 숭상하고 싶지 않다
: 김육의 민생 중심 논리는 위민을 추구하는 유학의 본령을 실현하는 것이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다만 제도 개선을 통해 물질적 복리를 증대하는 방법을 두고서는 본말을 전도했다는 비판의 소지가 다분했다. 그 비판에 대한 김육의 대응은 정면 돌파였다. 김육은 공리주의자라가보다 유학의 또 하나의 얼굴, 경세제민을 강조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한 노선은 민생을 중시하되 종(從)으로 놓는 성리학자나, 민생을 말하되 부국의 수단으로 여기는 국왕 및 공신과 달랐던 국가 운영의 또 하나의 길이었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3. 조선의 세법과 대동법
조선의 세금은 크게 보아 전세, 공납, 군역이었다. 전세는 논밭에 부과하는 토지세다. 전세의 기본틀은 세종대에 마련했는데, 광범위한 여론 조사와 10여 년간의 검토 끝에 마련한 공법이 그것이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국가 재정이 적자를 면치 못하자 정부는 세금에서 공납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 공납은 호 단위로 현물을 바치는 세금이었기에 대토지 소유가 많은 지배층의 저항이 적었다. 공납의 증액이 일반인에게 부담이 된 것도 문제였지만, 납부를 둘러싼 부정 또한 크나큰 사회 문제였다. 해결책은 먼 데 있지 않았다. 다양한 현물을 쌀과 같은 단일 품목으로 바꾸고, 부과 기준을 토지로 정하면 될 일이었다. 즉 전세와 공납을 토지 기준으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선 전기의 전세.공물.군역의 세금체계는 대동을 포함한 전세 그리고 군역과 한곡의 삼정으로 전환되었다. 16세기에는 공납의 개선이 워낙 시급했기에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 군역의 조정도 시급한 문제였다. 근본적인 개혁은 양인의 군포 부담을 줄이면서도 세액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이에 사족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주장이 대두했는데 그것이 호포법이었다. 영조대 제정한 균역법은 호포의 정신을 살린 것으로, 양인들의 군포를 감해주는 대신 일부 양반에게 군포를 거둔 일종의 절충책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곡은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는 복지정책에서 출발했지만, 이자를 거두어 재정을 충당했기 때문에 16세기 후반부터는 준조세가 되었다. 환곡 운영에서도 수많은 부정과 비리가 자행되었는데, 그 대안이 지방 자율로 환곡을 운영하는 사창이었다. 한곡은 19세기 중반에 전세가 되었다가, 대원군 집권기에 사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비주류의 꿈을 꾼 주류인 - 장유
장유는 젊은 시절에 윤근수.김장생.김상용 등에게 배웠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광해군대 중반에 파직되었다가,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참가해 정사공신 2등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중에는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고, 전란이 끝났을 때 모친의 상중임에도 '삼전도비문'을 작성했다. 이경석이 지은 비문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기에 그의 비문은 선택되지 않았지만, 비문을 작성했단 사실은 강화를 주장한 일과 함께 후세의 비판거리였다. 장유는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에 반발하고 유.불.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상가이자, 양명학의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문학적 성취는 더욱 뛰어났다. 장유는 선조에서 인조대 고문 운동을 주도한 사대가의 일원이었다.
삼교(三敎)를 넘나드는 꿈을 꾸다
: 다양한 사상을 편력한 장유였지만, 타고난 기질은 도가와 가장 가까웠던 듯하다. 그는 본디 노자와 장자의 '오묘하고 그윽함'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주자학 일변도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
: 주자학이 수많은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끝내 국가 운영의 이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앞선 진보성과 논리의 완결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 왕좌에 오르고 직간접적인 이익을 곁들어 따라오고, 애초의 고민과 발랄함을 잃어버리기 쉽다. 주자학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다른 사상과의 진지한 씨름을 통해 내성을 기를 일이었다. 학문 외적인 권위는 학문을 내부에서 좀먹는 부메랑이 될 터이니, 여러 사상 사이의 출발선은 여전히 동일해야 했다.
장유는 일탈자인가?
: 장유는 이항복.김장생.김상용.이수광.윤근수 등의 제자였다. 개성이 강한 여러 스승에게서 다양하게 영향받았음은 불문가지다. 특히 김장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위 관료를 역임했으니 관인의 학문 경향을 지녔다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다. 학문은 자연스럽게 실용적 경향을 띠게 되므로 이념적으로 유연해진다. 하지만 이런 지적도 가능하다. 스승이 많다는 것은 절대적인 스승이 없고 특정한 학파에 귀속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장유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같은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 말하자면 정파와 학파 사이의 연계가 아직 미약했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큰 고민은 다양한 지적 편력을 통해 제반 흐름을 주자학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가가 큰 고민이었다. 16세기 후반 일부 학자들의 양명학에 대한 관심은, 양명학이 제기했던 문제제기에 공감해 그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통해 주자학과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목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문학, 생동하는 자연.감성을 담는 그릇
: 장유는 조선 후기 고문 부흥의 일원으로서도 주목받았다. 고문운동은 간단히 설명하면, 학문학의 전범이 되는 텍스트 예컨대 사서오경, [사기]와 같은 한대의 역사서, 당시 등의 창작 정신을 살려 기성 문학의 형식주의를 타파하는 운동이다. 장유는 허균처럼 인간의 진솔한 감정 표현을 강조하면서도, '도덕적 정서'와 수양 또한 강조했다. 성리학의 전통적 문학관은 이른바 '문이재도(文以載道)'다. 문학은 도를 싣는 그릇이니, 성정을 바르게 교화하는 도구였고 도리가 세속에서 실현되었느지를 판단하는 지표였다. 따라서 문풍의 흥성과 타락은 시세 풍속의 흥성과 타락을 의미했다. 문학은 지금보다 휠씬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위는 곧 속받이기도 했다. 문학이 교화의 도구인 한, 엄숙한 도덕주의에 의해 자율성이 침해당할 소지가 상존했기 때문이었다. 사상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차별성 없이 넘나든 것처럼, 장유는 교화적 문학과 새로운 문학정신 사이에서 여러 가능성을 열었다. 기성의 흐름을 비판하며 비주류의 꿈을 꾸었으나, 흐름을 해체하지 않았다는 데서 주류인이었다.
밝은 지혜, 그 자유로움
: 장유는 경직화된 학계의 풍토에 저항했고, 형식화한 문학 풍조에 반발했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4. 사대주의
유학에서 '사대'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한 이는 맹자였다('오직 인자만이 대국으로 소국을 섬길 수 있고, 오직 지자만이 소국으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대혼란기인 중국의 전국시대에 태어나 왕도정치를 염원했던 맹자가 천자와 제후 사이의 예에 기반한 이상적 외교질서로 생각한 것이 '사대'와 '사소(事小)'였다. 곧 예에 기반한 쌍무적 책임을 동등하게 가지는 질서였다. 한 제국 이래 유교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대주의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고려 후반 성리학의 도입과 더불어 사대외교는 확실한 주류 외교노선이 되었다. 임진왜란에서의 승리는 사대질서와 그것을 낳게 한 유교문화에 대한 긍지, 그것을 수립한 사대부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그 의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사건이었다. 병자호란을 경험한 지식인들은 청에게 힘이 달려 항복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우위라는 사고를 갖게 되었다. 조선은 사대외교를 통해 전.후 각각 200년간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구현했다. 사대에 대한 부정적 어감을 지금 바꿀 수는 없겠지만, 평화 전략으로서의 엄청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이상 실현과 이상의 억압 사이에서 - 송시열
송시열의 삶에 관해선 방대하고 길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송시열은 다양한 전장에 무너진 세도를 지킨다는 책임감으로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대로'가 지닌 일방 편향과 독점이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시비 판정 이전에 송시열이 한 고민의 핵심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논쟁의 중심에 선 정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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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주자 그리고 송자
: 송시열의 행적과 공과에 대한 논쟁은 사후에도 생전처럼 뜨거웠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정조대가 절정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송시열이 공자, 주자의 의리 정신을 계승했다고 평가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추승사업을 펼쳤다. 송시열이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근거는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였다. 그렇다면 전도된 현실이 무엇이고 그곳에서 유학자가 의리와 세도를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공자가 시공간을 넘어 만인의 추앙을 받는 것은 인간의 보편 덕성인 인(仁)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정신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일 때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보편 정신을 '현재에 어떻게' 구현해 삶의 규범으로 삼을지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주자는 금에 의해 송이 남쪽으로 밀린 시대에 살았다. 정통인 송은 쇠퇴하고, 오랑캐인 금이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주자는 희망을 가졌다. 가치가 전복된 세상에서는 공자처럼 도리를 보전해야 한다. 공자, 주자는 어지러운 시대에 유교문화의 정수를 창달하거나 계승했다. 정통이 뒤바뀌거나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밝힌 문화와 이념이 있는 한 세상은 다시 밝혀진다. 그것이 유학자들의 세도관이었으니, 막대한 책임감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은 조선이 청에게 무릎 꿇고 명이 망해버린 시대를 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교 국가인 조선은 유교문화의 명맥을 간직하고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송시열이 주자와 책임감을 동일하게 느끼고, 주자의 말 하나하나를 실천하려 한 데는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19세기 위정착서는 그 점에서 송시열이 생각한 논리 구조와 동일했다. 위정척사 운동을 대표적으로 이끌었던 화서학파는 공자-주자-송자 그리고 이항오로 도통의 흐름을 정리했다.
효종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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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과 사문시비
: 두 차례 예송은 놀랄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지만 의리로 따지면 차자였음을 강조했던 반면, 윤휴와 허목을 비롯한 남인은 효종의 왕통을 계승한 만큼 왕실의 특수성을 강조해 장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송시열의 견해는 왕실의 특수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로 비약될 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견해를 굽히지 않았던 것은 가와 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예법의 보편성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평생 주자와 직(直)을 추구했노라
: 숙종 초반의 남인정권은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으로 다시 뒤집어졌다. 이른바 환국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정권은 상대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송시열이 남긴 숙제들
: 송시열의 후인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붕당은 18세기에 접어들며 집권 주류로 부상했고, 그의 행적은 국가를 지탱한 일로 칭송받았다. 영조대의 문묘 배향과 그를 주자의 후인으로 인정한 정조대의 평가가 그 절정이었다. 시비를 가르는 태도가 가치론상 올바를 수 있지만 문제는 가치가 다양하다는 데 있으니,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독선과 편협을 부른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5. 북벌과 북학
북벌은 조선의 영토 확장이나 민족정신의 발로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북벌 추진자들은 근대 민족주의에서 그리는 영도자가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궁극적 목표는 명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북벌을 둘러싼 각론은 달랐다. 효종이나 병자호란 직후에 북벌을 강조한 인사들은 북벌을 성리학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력 정벌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한 무제가 복수를 명분으로 백성을 전쟁으로 내몰았다고 주자가 비판했듯이,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방식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 방식대로 북벌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한 이가 송시열이었다. 그는 정벌에 앞서 그 전제로 대의를 높이는 것과 왕도 정치를 행해 안민에 주력할 것을 강조했다. 효종대에는 그래도 남명이 잔존했으나, 1662년(현종 3년)에 남명마저 없어졌으므로 북벌의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송시열은 이 시기를 진정한 난세로 파악하고 유학의 정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청의 중국 지배는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어서, 조선 현종대에 정성공의 저항, 숙종 초반에 '삼번의 난' 등이 발발했다. 속종 초 윤휴는 과감하게 '북벌'이란 용어를 쓰며 실질적 군비 증강을 구상, 일부 실천했다. 그러나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이 실각하자 북벌은 더 이상 실천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북벌에 대한 입장은 더욱 복잡해졌다. 북벌이란 용어는 이제 공공연하게 쓰였다. 복벌을 말해도 청과의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청 중심의 지배가 안정되었기에 북벌은 이미 '현실적 문제'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당시의 북벌 논의는 17세기에 굳어진 의리에 대한 확인 혹은 긴장이 이완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의미였다. 박지원에게 북벌은 신념이었다. 박지원의 논리는 북벌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대부가 철저히 개혁해야 하며, 그러러면 청을 무조건 배타시하는 태도야말로 북벌의 허명에 안주하는 것이므로 또한 버릴 수 있는 바, 발전한 청 문화의 실체를 인정하고 배워서 궁극적으로 청을 극복하자고 주장했다. 명분으로만 굳어진 북벌론을 배격한 반성적 북벌 그리고 대안으로서 북학의 제기였다. 거칠게 말하면 적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적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 - 윤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윤휴가 고학, 고법, 고제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평가한다. 고학은 정도 차는 있지만, 삼대, 공자.순자.맹자가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한의 유학 사상을 주로 말한다. 고법과 고제는 고학의 이상이 법제와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윤휴의 사상은 당시 주류 학문으로 자리잡아가던 성리학 혹은 성리학적 사회 제도와는 일정정도 거리가 있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그는 주자를 조금 혹은 많이 이탈해 고대의 이상 사회를 바랐던 사상가란 뜻이며, 17세기 조선에서는 고대 유학에 입각해 국가 재건을 구상한 인물이라는 의미도 된다. 주자를 이탈 혹은 상대화하며 고법의 실현을 꿈꾼 이들, 그런 이들을 필자는 근본주의자라 부르고 싶다. 뿌리로 회귀하기에 근원적이며, 고대의 이상을 현실에서 기획했기에 급진적이다.
패기만만한 재사
: 송시열과 윤휴의 교류는 참으로 극적이다. 30세의 송시열은 20세의 윤휴를 찾아와, 3일 동안 토론한 끝에 "30년간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했다. 이듬해인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에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두 사람은 속리산 복천사에서 만나 서로 손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윤휴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열중했는데, 송시열은 그의 절개를 백이에 비유했다. 20대 윤휴는 그야말로 촉망받는 재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학문하는 태도는 달랐다.
예송, 바람을 예고하는 미풍
: 젊은 시절 북벌의 포부를 나누며 서로를 인정했던 윤휴와 송시열 사이의 미묘한 균열은, 학문과 정계의 위상이 높아갈수록 벌어졌다. 그들은 어느새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산림이 되어 있었다. '기해예송'에서 윤휴는 종법에서 제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했고, 송시열은 종법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예에 대한 견해는 다양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윤휴의 예설이 바탕을 둔 사고였다. 윤휴의 사고는 '하늘을 대표하는 국왕의 절대성', '군신 부자 관계', '왕권의 절대적 우위'로 발절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그 점을 감지했다. 송시열은 '천하에 보편적인 것은 오직 예법이다'라는 사고와 '국왕은 사대부의 대표자', '군신은 의리로 맺어진 관계', '신권의 자율성 강조'로 발전할 수 있었다. 자의대비 상복은, 윤휴도 송시열고 아닌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1년)으로 결정되었다. 이듬해 허목은 효종이 '차자로서 장자'가 되었기에 '종통을 계송한 장자이자 적통'이므로 자의대비 복제는 자최(3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해 논쟁이 복잡해졌다. 허목의 주장은 '차자가 장자가 될 경우'를 고증한 것으로, 국왕의 특수성을 강조한 윤휴와는 다른 논리였다. 그렇게 보면 기해예송의 초기 단계에는, 1년설 주장자 중에도 국제 지지자와 송시열 지지자가 있었고, 3년설 주장자 중에도 윤휴 지지자와 허목 지지자가 있던 셈이었다.
관계에 진출해 북벌을 꿈꾸다
: 기해예송을 거치며 윤휴는 송시열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숙종 초에 성립된 남인정권에서 재야 유생을 대표하는 산림이 윤휴와 허목이었다. 숙종 초반 그는 과감한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는데, 큰 것만 간추리면 호포와 자패 실시, 오가작통법의 실시, 병거(전차) 제작, 도체찰사 설치 등이었다. 윤휴가 주장한 개별 정책을 하나로 꿸 수 있는 끈은 북벌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의 정신으로 내수(內修)하자 했으나 이념적 측면에 주목한 셈이었다. 반면 윤휴는 실제 북벌을 구상하고 그에 준하는 국가 운영을 계획했다. 현종 초반 남명마저 망했기에 군사적 북벌은 의미가 사라졌으며, 단지 그 마음만을 새기자는 것이 당시 조정 분위기였다. 그러나 윤휴는 오삼계의 반란과 정성공 등의 복명 운동을 들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과의 연합을 주장했다. 윤휴의 관직 생활은 겉으론 화려해 보였지만, 속종 초반 반짝였을 뿐이며 이후에는 진퇴를 거즙했다. 이상적인 그러나 비현실적인 계책을 줄곧 건의했던 그는 노련한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고, 남인 내에서조차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삼대는 이상이지만 실현 가능한가
: 북벌을 정점으로 한 윤휴의 군사.외교적 구상은 노련한 처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민안정을 목표로 한 윤휴의 내정 개혁안은 상당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호포제 실시는 단연 돋보이는 주장이었다. 호포제는 특권층이 되어버린 양반을 구조조정하자는 정책이었다. 양반에 대한 구조조정, 극서은 윤휴가 삼대에 실현되었다는 고대의 전제적 국가 통치를 이상적으로 보았기에 나올수 있었다. 그 모델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국각가 백성 읿나에 대한 일원적 통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국왕과 일반민을 매개하는 사족을 비롯한 특수한 신분층의 자율성은 협소해진다. 통제 위주의 개혁은 지배층의 근간인 사대부와, 일반민 모두가 반발을 야기했다. 일련의 개혁책이 책상 위에서 끝났던 데는 윤휴의 경험 부족도 컸지만, 국가주의적 정책이 시대와 불화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숙종 초 집권한 남인은 허적을 중심으로 한 관료군과 윤휴.허목을 중심으로 한 산림세력으로 분열해 이른바 탁남과 청남이 형성되었다. 남인 위주의 정권이었지만, 서인 출신으로 건재했던 척신들은 더욱 조심해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척신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김육의 손녀) 집안이었다. 1680년(숙종 6년) 숙종은 비대해진 남인의 군권을 서인 척신계로 바꾸는 비상한 조처를 단행했고, 곧이어 복창군 형제와 허견(허적의 서자)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남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도태시켰다. 경신환국으로 윤휴 또한 사사되었다.
내 방식대로 주자를 해석하리?
: 윤휴는 정치 투쟁에서 밀려 사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반대파에게 유학을 어지럽히는 무리라는 의미의 사문난적으로 몰렸기에, 그의 사상은 20세기 초까지 금기시되었다. 윤휴의 경전 해석은 20대부터 시작해 만년까지 이어졌고, 주요 경전 대부분을 망라했다. 윤휴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효경]의 사친(事親) 정신을 [중용], [대학]의 사천(事天) 정신과 동일하게 파악했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천은 만물의 어버이로서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기에, 인간의 입장에서 효의 대상은 어버이, 군주, 하늘로 확대된다. 천은 주자가 강조하는 천리 곧 형이상의 질서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고 국왕은 천을 인간 세상에서 대신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따라서 사회 정책 또한 국왕 혹은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견을 수용하는 넉넉함에 대한 아쉬움
: 모든 사상은 그 사상이 발원한 기본 정신을 가지고 있다. 개조의 정신은 곧이어 문자로 정착되어 고정된다. 그중 일부는 정경의 지위를 획득하고, 부동의 권위를 지닌 교리로 굳어진다. 윤휴 본인은 주자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신념을 가졌다. 하지만 송시열 등은 주자를 따르는 또 다른 길, 해석의 가능성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윤휴가 제기한 대안은 정치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범위에서 유형원.정약용 등을 통해 이어졌고, 국가주의적 기획은 영조.정조의 정국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6. 이단관과 사문시비
유학에서 '이단(異端)'이란 말은 공자가 "이단을 공부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논어]에서 유래한다. 공자가 지칭한 이단은 그 대상이 명확치 않다. 이단 배척의 논리, 이른바 '벽이단(闢異端)' 논리를 체계화한 이는 맹자이다. 제자백가가 횡행한 전국시대에 유학의 벽이단 논리가 강화되었다는 가실은, 다양한 사상이 사회 운영의 방향을 놓고 각축할 때 이단 논쟁이 증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논쟁을 통해 자파의 학설은 정밀한 논리를 가다듬고 정통의 권위를 획득하며 정체성을 강화해나간다. 맹자의 이단 비판 논리는 더욱 흥미롭다. 이단은 미묘한 차이에서 기인하지만 사회적으로 거대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동기론적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이단이라 지칭된 이들의 동기와 사업을 일상에서 쉬이 검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단 규정은 종종 학문하는 자세, 동기, 태도를 문제 삼아 거기서 발생하는 결과를 유추하고 부정하는 노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중국의 송 이후 등장한 성리학자들은 도교와 불교를 대표적 이단으로 논박했다. 조선에서도 그 기조는 내내 유지되었다. 거기에 더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양명학 비판, 17세기에는 성리학 내부의 사문시비 논쟁, 18세가 후반 이후에는 서학 배척 등이 전개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학파아 정파가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이단 논쟁은 성리학의 정통성 및 정치적 이해와 관련해 일어났다. 사문시비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7세기였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해 서인의 학문적 정통성을 세웠다. 논쟁의 주원인은 주자 해석의 시비라기보다는 주자학을 대하는 태도 곧 '수용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주자 또한 학인으로 인정해 그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주자 언술의 불일치를 봉합할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서인은 이 시기에 송시열을 중심으로 이념 정체성을 강화했고, 노론으로 굳어졌다. 그들이 이단시비의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수정, 상대주의적 경향은 설땅을 잃었다. 이후 이단설은 심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정치 결과를 낳았다는 논리로까지 나아갔다. 그런 사고는 숙종 후반에서부터 영조 초반에까지 가장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논리가 영조가 사문시비와 정치의 연계를 부정하고 탕평정책을 지속하자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조선의 새로운 길 삼대(三代)의 이상 - 유형원
후대에 쓰여진 몇몇 전기에서 유형원을 대명의리에 충실하고 중국 문화에 심취한 선비로 그린 것은, 그 정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향을 진솔하게 전하고 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염원과 대명의리, 중국 문물에 대한 갈구는 애초에 같은 것이었다.
부안군 운반동에 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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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수록], 새로운 국가 구상
: [반계수록]은 총 26권으로 '전제(田制) 개혁'을 논한 것이 여덟 권, '교육과 인재 선발'을 논한 것이 네 권, '관직 임용.운용.녹봉'을 논한 것이 여덟 권, '군대 제조'를 논한 것이 네 권, 그리고 기타 주제를 논한 속편이 두 권이다. 각 주제에서는 먼저 자신의 개혁책을 말하고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머리 [전제] 편은 개혁의 근본을 논한 것으로 책 전체의 핵심이다. 유형원이 생각한 대안은 공전제였다. 국가에서 백성에게 공전을 지급해 생활을 보장하는 대신, 농민은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진다. 조세와 군역의 의무는 지급흔 토지를 기준으로 공평하게 부담한다. 나머지 경제 영역, 즉 운송.회계.상공업.화폐.시장 등은 공전제를 보조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반계수록]은 '거시 국가 개조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육에서는 향약을 강화하고, 공교육 체계를 확립하자는 주장이 골자였다. 향약의 강화는 일반민에 대한 도덕교육 때문에 중시되었다. 인재 등용에서는 과거를 폐지하고 공거제를 사용하자고 했다. 시험 위주였던 과거에 비해, 공거제는 학교의 추천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관직의 임용과 운용, 관리의 녹봉은 임기 조정, 행정기관 통폐합, 재정 일원화, 지방 행정 체계화, 봉급 증액과 서리에게 녹봉 지급 등이 뼈대였다. 간단히 말해 구조조정을 통해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관료의 생활을 보장해 부정의 근원을 차단하자는 주장이었다. 병제에서는 개병에서 이탈해 모병으로 운영되는 군제를 비판하고, 병농일치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속편에서는 각종 의절, 의관, 언어, 도량형, 주택, 도로, 수레 사용 등 다양한 분야를 논했다. 그중 노비세습제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일단 종모법을 시행한 후에 궁극적으로 노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삼대의 이상은 뜨거운 감자였다.
: 학계에서는 대체로 유형원의 구상에 [주례(周禮)]가 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례]는 전국시대에서 전한에 이르는 시기의 이상적 국가관을 반영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는 국가-민의 소박한 일체성과 거기서 파생하는 효율성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전국-전한 시기에 국가의 전제권이 확립되었지만, 이후 중국은 귀족 사회를 거쳐 사대부 사회로 진입했다. 따라서 중세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사대부가 볼 때, 고대 국가의 이상이 반영된 [주례]는 그 권위에도 불구하고, 전제적이고 복고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례] 정신의 재해석은 사대부의 특권을 부정하는 원천이 된다는 점이었다. 그 방향은 사대부를 포함한 민 전체에 대한 국가의 주도권 확보였는데, 그 뿌리에 토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사유에 기반해 지주로 존재했던 사대부들의 존립 근거를 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18세기 개혁의 나침반
: [븐계수록]은 당시 몇몇 인사들에게 읽혀졌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유형원과 [반계수록]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가 저물고 국가 갱신의 방향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영조대 이후였다. 이익은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해 학파를 일구었고 그 학풍은 정약용으로 이어졌다. 유형원이 제시한 여러 개혁책은 영.정조대에 매우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일부 제도에 녹아들었다. 정조 또한 유형원의 애독자였다.
성리학자 유형원, 실학자 유형원
: 19세기 위정척사를 외쳤던 유학자는 서양의 보통교육론에 대응해 아동 교육의 체계화를 주장하고 일반민을 대상으로 한 [소학]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유형원의 구상을 성리학의 대안으로 볼 수도 있고 그렇게 평가하는 학자도 많으나, 최근 그의 본의는 성리학을 보완하는 데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그 방향으로 그의 구상은 수용되었다. 영.정조대에 국가의 공공성 확대를 통해 조선왕조를 유지하자는 보수적 개혁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성리학자 유형원과 실학자 유형원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점이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7. 실학
현대인에게 실학은 크게 2가지 의미다. '조선 후기의 일련의 개혁 사상'이란 고유명사이며, 그 정신을 계승해 '현실에서 공허한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심.실용.실질을 추구하는 사상'이란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실학은 진실한 학문이란 의미에서 보통명사였다. 불교에 대해 유학이 실학이었으며, 과거 준비하는 출세 학문에 대해 성리학 등을 탐구하는 순수 학문이 실학이었고, 이론만 캐는 공허한 학문에 대해 일상.현실의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 실학이었다. 이 흐름 중 현재 말하는 실학은 세 번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 다양하게 쓰였던 실학은 고유명사 실학으로 정립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1930년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핵심은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규명해 조선 근대 사상을 정립하려는 것이었다. 그 흐름은 196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사학을 체계적으로 극복하면서 확고해졌다. 그러나 현재에는 실학과 실학자의 정체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도 차는 있지만, 그들은 대게 성리학을 보완하는 이론, 성리학적 질서를 보완하는 사회 개혁을 주장했음이 실증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를 찾으려 했던 '20세기적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점도 숙고해야 한다. 부정과 타기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장기지속성, 지속을 가능케 한 정신문화와 사회 양식은 근대 이후의 가치를 정립하는 지혜의 보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실학자에게서 '실학'이란 수식을 거둬내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실학과 실학자들은 지식인의 지식이 어떤 마음에 기반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유학자의 본고장이 가졌던 긍지와 한계 - 이현일
19대 국왕 숙종의 1674년에 등극해 1720년까지 46년간 보위에 있었다. 당시는 양나의 피해가 거의 극복되어 사회가 안정과 활력을 갖추어갔고 그 이면에서 새로운 갈등과 각성이 싹트기도 했다. 갈등의 씨앗 가운데는 서울.경기의 활력과 지방의 침체, 서울의 정치 독점과 지방의 정치 소외가 있었다.
퇴계학맥의 결절점
: 조부와 부친 세대에 이르러 이현일 집안은 퇴계학파 주요 인물들과 학문, 혼인으로 인연을 맺었다. 퇴계 학파는 퇴계 사후 개개 정구.유성룡.김성일 계열로 나뉘고 있었다. 김성일은 장흥효가, 유성룡은 정경세가 학통을 이어받았는데 두 계열 모두 영남에 기반을 두었으므로 이른바 '영남 남인'을 형성했고, 정구는 장현광.허목이 학통을 이어받았는데 허목 계열은 서울과 경기에 기반을 두었으므로 이른바 '기호 남인'을 형성했다. 영남과 서울의 퇴계학맥과 두루 교류한 이현일의 학문은 아들 이재를 거쳐. 이상정.이진상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의 최대학맥을 형성했다. 학맥으로만 보아도 그는 기존의 퇴계학맥을 두루 관통하고 후대 영남학맥을 형성한 큰 결절점이었다.
영남학파 공고화의 득과 실
: 이현일은 경기.충청 지역에서 주류가 된 율곡학파는 비판하면서, 영남에서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까지 외연을 확대하려 했다. 그의 학맥은 영남학계의 주류가 되었으며 어느 지역보다 강고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하지만 잃은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현일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퇴계 학문의 확장.분화를 막아버린 셈이 되었다. 퇴계의 권위가 영남으로 국한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서인들은 '조광조-이황-이이-성흔'으로 이어지는 도통의식을 가졌었다. 그러나 영남의 학통이 퇴계를 중심으로 공고화하자, 서인은 퇴계를 빼고 '조광조-이이-성흔'으로 바로 연결해 버렸다. 한편 서울 남인은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독자적 학통을 수립해 나갔다.
남인 최후의 거대 산림
: 숙종 초, 남인 주도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50세 이현일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상경했다. 그 또한 기대에 부풀어 숙종을 계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청남.탁남으로 분열하는 행태에 실망해 이내 내려왔다. 1689(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치 집권하자, 권대운.목내선 등 당국자들은 한결같이 이현일을 경연의 적임자로 천거했다. 하지만 이현일은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다시 맛보아야 했다. 누구도, 국왕 숙종을 비롯해 심지어는 그를 추천한 남인 관료들 조자도 그가 정계를 누비길 원치 않았다. 이현일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던 데는 집권한 남인 자체의 문제도 있었다. 아쉬운 것은 정말 원했던 경세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현일은 척신의 발호와 권력의 사유화, 그레서 파생하는 각종 부정 비리와 지방관의 탐학을 근절하자고 내내 주장했다. 대응책은 왕권의 공공성 회복, 과거제 폐지와 천거제 정착, 학교 교육 강화, 감세와 토지 상한제 도입, 병농일치의 복구 등이었다. 대체로 국가(국왕)와 공권 중심의 개혁 사상으로, 치밀함에서는 떨어지지만 대강은 유형원 등 남인 경세가와 일치했다.
명의죄인, 아득한 신원의 길
: 이현일이 낙향한 이후 바로 갑술환국이 발생했다. 그 또한 이조판서에서 갈렸고, 유배.국문.유배를 되풀이했다. 문제는 죽음 이후였다. 영조대에 접어들자 이현일의 신원은 노론과 영남 남인 사이에 벌어진 기싸움의 전초전처럼 되었다. 집권 주류로 성장하는 노론은 영남인들을 공격할 때, 인목대비를 폐서인했던 정인홍.이이첨에 이현일을 자주 비유했다. 당하는 억울함이 크면 클수록 후손과 문인들의 복권 노력고 끈질겼다.
추로지향의 빛과 어둠
: 조선시대 영남을 영예롭게 일컫는 말이 '추로지향(鄒魯之鄕)' 혹은 '인재의 부고(府庫)'였다. '추(鄒)'는 맹자의 고향, '노(魯)'는 공자의 고향이니 말하자면 '유학의 본고장'이란 뜻이고, '부고'는 창고이니 빼어난 인재가 많다는 의미였다. 영남이 추로지향이 된 것은 조선 초에 길재(1353~1419년)가 그곳에 내려가 학맥을 뿌리내리고, 그 학맹에서 성종대 사림의 영수 김종직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영예를 결정적으로 굳힌 인물이 퇴계 이황을 비롯한 16세기 중반의 학자들이었다. 영남도학의 또 다른 봉우리로는 남명 조식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은 광해군대 북인정권을 구성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몰락했고 남명의 학맥은 미미해졌다. 그나마 중앙에서 자신들과 정치적 부침을 같이 하던 기호 남인조차 숙종 20년 이후 정계에서 몰락했고, 집권 주류가 된 서울의 노론은 반대 정파(남인)의 마지막 지역 근거지(영남)를 압박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남 사림은 문중으로, 퇴계학파로, 남인으로 결집했다. 영남 사림의 강고한 결집력과 변함없는 향촌 장악력은 다른 지방 학인에겐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중앙의 지방 차별의 희생자인 영남 사림들은, 다른 계층 혹은 유학 전통이 약한 다른 지방에 특권 의식을 가지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방의 지존이었으되 지방에 갇혀버렸다. 서울과 지방의 분기는 지방 유림을 대표하는 산림의 영향력이 서서히 식어가는 일이기도 했으니, 이현일이 단적인 일례였다. 달리 보면 그것은 사회가 이념 중심에서 실용 중심으로 변홯고 있다는 단초였다. 학계와 정꼐를 누비는 산림이 활약했던 17세기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8. 경향분기(京鄕分岐)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현재도 문제지만, 조선 후기에는 심각했다. 당시는 학문.정치.경제 등의 문제가 심했는데 특히 정치 소외가 가장 심각했다. 그 경향은 18세기에 강화되었고 19세기에는 더욱 심해져, 서울 그중에서도 세가(世家) 출신 인재로만 좁혀졌다. 학계에선 종종 조선 후기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말해주는 '경향분기'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원래 17세기 이래 서울.경기학계와 지방학계가 분화하는 현상을 지칭했으나, 최근에는 서울의 사회.경제.문화 변화와 지방의 침체를 일컫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17세기 초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과 남인이 사림의 주류가 되었다. 서인과 남인의 유력 가문은 이후 서울에 대대로 살면서 유력한 사족, 즉 경화사족이 되었으며 붕당을 막론하고 각기 지방학계와 분화하기 시작했다. 서인은 17세기 후반 소론과 노론으로 분화했다. 소론은 지방 사족과의 유대가 비교적 약했다. 노론 최대의 학맥은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호서의 학파였다. 호서와 서울의 노론학파는 18세기 이후 '호락논쟁(湖洛論爭)'이란 논쟁을 크게 벌이며 분화했다. 남인은 퇴계학파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17세기 초부터 서울에 세거하기 시작한 남인, 즉 기호 남인은, 학맥은 퇴계에 돌리면서도 학문 내용을 고학.경세학 등으로 채워나갔다. 그에 비해 영남에 세거하는 남인은 퇴계의 학문을 그대로 고수했다. 기호와 영남 남인은 퇴계의 학맥을 이었다는 도통 의식과 정치적 유대를 공유했지만, 학문의 유사성은 17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점차 사라졌다. 사실 학계의 분화를 재촉한 큰 원인은 서울과 지방의 격차 발생과 지방에 대한 차별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말 큰 문제였다. 격차 발생의 일차 원인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서울의 팽창이었다. 서울의 인구, 공간, 행정 등 거시 지표가 성장.복잡화했고 그에 따라 문화와 생활양식이 바뀌었다. 가장 고약한 것 중의 하나는 관직 등용에서 개인 능력보다 그 사람의 가문.지리.혈연 등 배경을 중시하는 관행이었다. 그것은 든든한 배경을 갖지 못한 지방 인재에 대한 공공연한 배제를 의미했다. 인적 연결망의 구조화는 그 과정과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서운 현상이다. 유력 가문끼리의 혼인, 유력 가문과 상업 자본과의 결탁, 서울 중인층의 성장, 왕실.유력 가문과 서울 관청과의 결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공생 구조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었다. 그 이면에 지방 사족과 지방민의 한찬과 분노가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공존(共存)의 묘리(妙理)를 추구한 재상 - 남구만
남구만은 붕당들의 공존이 불가능해진 숙종대에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냈던 정계의 조타수였고 대제학을 지냈던 문장가였으며, 역사지리학의 선구자였고 제도 개선과 적극적인 북방 경영을 역설한 당대의 실무가였다.
법치와 묘리
: 남구만은 1629년(인조 7년)에 태어났고 1711년(숙종 37년)에 83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1656년(효종 7년)에 문과에 급제해 효종.현종.숙종 3대에 걸쳐 반세기를 넘기며 재직했다. 재직할 당시에는 정치, 경제, 형벌, 군제,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선 방책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정치에서는 지방 인재를 배려한 균형 있는 인사 정책과 과거제의 엄격한 운영을, 경제에서는 돈의 유통 확대와 궁방을 비롯한 상류층의 특권 축소를, 국방에서는 자강의 강조와 국경선 확정 및 엄정한 군정 등을 강조했다. 남구만은 거시적 차원에서 구조 개혁을 논한 게 아니었다. 대체로 법 정신을 살려 그 적용을 때론 엄격하게, 때론 탄력적으로 하자는 입장이 주조였다. 법 운용의 묘(妙)를 강조한 실무형 인사에 가까웠다. 유교에선 '형벌'에 상서로운 형벌'([서경])이란 모순된 이름을 붙였다. 벌은 서민에겐 관대하고 부귀한 이에겐 엄격하며 사람을 낚는 그물이 아니라 피하기를 바라는 경고일 따름이니, 궁극적으로 모든 이가 저톡되지 않는 경지에 다다르면 상서롭다는 의미였다. 즉, 법은 교화의 보조 수단이자, 없어지기를 기약하는 '필요악'인 셈이다.
적극적인 북방 경영
: 남구만은 1671년(현종 12년) 43세에 함경도 관찰사에 부임해 3년을 재직했다. 당시는 청이 중국을 차지했고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도 따라 이주했기에, 그 일대에 힘의 공백이 생겼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적극 개척할 것을 주장했다. 대강의 구상은 압록강 중류에 있던 폐사군을 회복하고, 함경도 내륙의 갑산과 동해 쪽에 연해 있는 길주 사이에 도로를 개통해 물자를 유통하고, 후주진 등 군진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남구만의 구상은 이후 북방 정책의 밑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남안을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무산부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조선 정부는 폐사군 지역에 주민 거주를 점차 허용했으며, 장진부.후주부 등을 새로 설치했다.
지고 제작과 역사지리학의 개척
: 함경도 관찰사의 경험과 연행을 통해 남구만은 국제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이후 일본과의 울릉도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남구만의 적극적인 국토 인식은 다시 빛을 발했다. 남구만이 국방과 국경 전반에 걸쳐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과 정보를 정연하게 체계화했던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각론에 약했던 산림이나 다른 관료나 달리 지도 제작을 지휘하고 역사 고증에 치밀한 학자이자 전략가였다. 이론의 또 한 축은 역사 사실에 대한 고증이었다.
환국을 진정하는 은전론
: 권도(權道)는 불변의 원칙인 경도(經道)에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경도를 쓸 것인지 권도를 쓸 것인지는 원칙과 타협, 명분과 실리 등 다양한 변수와 관련되었고, 일이 있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해묵은 논쟁이었다. 현실에서는 권도에 입각한 주장이 채택되는 편이나, 후대에서는 원칙을 견결히 고수한 이들이 더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대에 접어들자 붕당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자 정당한 정책 대결은 실종되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정쟁이 전개되었다. 이제 남는 것은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이며, 그 와중에 실종된 것은 법(처분)의 공정성이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상대를 부정해 버리는 상황에서, 시비를 가리자는 공론은 오히려 사람의 입을 막는 구실로 전락했다. 남구만은 그 같은 상황에서 온건한 조정책이야말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보았다. 그것은 불신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였으며, 신뢰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공론 정치의 기능을 되살리는 발판이었다. 그렇지만 그 효능은 붕당정치의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대안 구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사로움의 개입을 억제한다는 것은 일단 변질해버린 당론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겠지만, 장차 법 또는 국왕권의 공평을 담보하는 기준이 되리라는 의미를 내포했기 때문이다.
탕평의 규모를 열다
: 남구만이 직면한 붕당정치의 격화는 몇몇 사람들의 음험함에서 비롯한 일만은 아니었다. 붕당정치가 전개되는 데 따른 피할 수 없는 수순이기도 했던 것이다. 붕당정치가 전개되자 붕당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갖춰나갔다. 각 붕당에는 이념의 대표자인 산림이 존재하고 산림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어 광범위한 지식인이 결집했다. 이제 붕당은 관료, 산림, 이름없는 유생까지를 아우른 거대 집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발생 과정은 서인도, 남인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사대부에 국한되긴 했지만, 그들은 일종의 여론정치를 수행했다. 인조대에서 현종대에 붕당이 공존하고 연합했던 것은 붕당이 난숙해질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숙종대에 접어들어 공존이 깨진 것은 완결적 구조를 가진 붕당끼리의 본격적인 경쟁이기도 했다. 붕당 사이에 경쟁이 과열되면서 비정치적 영역이 정치적 판단 대상이 되거나, 사사로운 혐의가 공론의 이름을 빌려 상대방을 단죄하는 행태로까지 번지는 현상은 분명 부정적이었다. 그 불을 끄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의 잘잘못을 인정하고, 인재를 적절히 등용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선발과 조정의 권한이 커지니 그것은 곧 탕평론으로의 발전이었다. 숙종대 그 주장을 대표하는 이가 박세채와 남구만이었다. 박세채는 조정을 통한 탕평을 강조했으나, 서.남인의 대립이 깊어진 갑술환국 이후에는 엄격한 분별을 강조했다. 대립이 심해지자 시비를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구만은 그럴수록 조정을 중시했으며, 비판이 법을 넘어서는 현상에 단호하게 대응했다. 비록 화려한 재평가는 없었지만, 남구만의 모색은 노론과 소론의 온건론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탕평 속에 실질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소박한 서민풍 재상
: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9. 붕당과 붕당정치
'붕당'은 뜻을 같이하는 무리로도, 사리를 추구하는 무리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군자는 당(黨, 서로 도와 죄를 숨겨줌)하지 않는다'([논어])는 말이 공자 시대에 쓰였을 정도로 당의 의미는 특히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붕당의 결성은 국왕 앞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뭉친다는 오용의 소지가 많았다. 그러나 성리학이 발흥한 중국 송대에는 붕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구양수와 주자였다. 구양수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이니, 바른 정책을 추구하는 군자 집단을 변별하라는 의미였다. 주자의 의도는 군자.소인을 분별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군주도 붕당을 들어야 한다는, 곧 군자당의 절대적 권위를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도 붕당 결성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사림이 정계의 주류가 되면서 붕당에 대한 인식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이였다. 정계의 주류가 된 사림 또한 현실 정치를 피해갈 수는 없었으니, 군자당을 표방했던 사림은 이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해 나갔다. 사림의 분열을 목도한 이이는 양측 모두에 시비 곧 군자.소인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고, 나아가 조정과 보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인 조제론(調齊論)이다. 이이가 전후에 내세웠던 주장은 붕당정치가 본격화한 17세기에 군자소인의 분별을 강조하며 군자당의 석권을 강조하는 견해와, 붕당 사이의 공존을 인정하며 조정과 조제를 강조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광해군대의 북인정권은 애초 서.남인까지 포괄하는 연합정권이었다. 하지만 정권 말기에 대북의 독주가 두드러지자 그 구도는 깨졌고, 인조반정으로 서.남인이 연합한 정권이 탄생했다. 인조대 서.남인의 연합정권은, 정도차는 있지만, 효종.현종대까지 대체적인 윤곽을 유지했다. 광해군대와 마찬가지로, '공존과 견제'를 통한 안정적인 정국 운영은 전후 복구와 사회질서 구축을 위해 필연적 선택이었다. 공존과 견제 구도는 현종 말에서 숙종 초를 지나며 사라졌다. 양난의 피해가 거의 복구된 것이 일차적 원인이겠으나, 붕당이 성장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붕당이 자기 완결적 구조를 형성하자 한 붕당이 정권을 온전히 담당하는 일당전제, 즉 붕당의 진퇴가 확연히 구분되는 일진일퇴라는 정국이 전개됨은 필연이었다. 이러한 정권의 급격한 변동을 '환국'이라 했다. 환국은 영조가 1729년(영조 5년)에 기유처분으로 탕평정치를 선포하면서 막을 내렸다. 환국기에는 붕당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비판하며 훗날 탕평론으로 발전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대개 이이의 조제 정신을 이어받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붕당의 등장, 공존과 연립, 환국과 일당 전제로 이어지는 붕당정치는 17세기 조선 정치를 설명하는 코드다. 명분과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당시의 정치 운영에 대한 이해와 비판, 이념과 구조 속에서 고민했던 여러 인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며 그 한계를 담담히 유추해 보는 일은 언제든 중요할 듯하다.
철학과 시문(詩文)을 넘나들며 이념의 지표를 새로 세우다 - 김창협/김창흡 형제
17세기 후반부에 목도한 것은 청이 명을 넘어서는 영토와 문물을 자랑하며 전성기에 진입했다는 사실이었다. 양란으로 흐트러졌던 조선 사회의 경제력은 회복되었고 전후의 긴장은 이완되었다. 그에 따라 정치 지형도 변했다. 국가 재건을 위해 연합했던 서인과 남인은 정책 노선의 차이를 보이며 대립했고 그 와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했다. '주자의 이상대로'를 외쳤던 서인은 변화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기존의 이론을 고수할 것인가?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형제는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이들 형제가 다소 생소한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19세기 세도정권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동 김씨가 아무런 노력 없이 왕실과의 혼인이라는 행운만으로 세도가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연 사상의 세 원천
: 다양한 분야를 살피기 전에 이들 형제의 다채로운 이력을 가능케 했던 요인부터 캐보는 일이 순서일 것이다. 1. 가문의 전통이었다. 척화의리의 가문, 서인-노론이 주장한 의리의 실현자, 그것이 형제가 가문에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2. 물려받은 학통이었다. 서인을 대표하는 율곡학맥의 주류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졌다. 송시열의 학문은 권상하 중심의 그룹과 농연 중심의 그룹에게 계승되었다. 훗날 권상하 문하의 인사들은 충청도의 노론학맥, 즉 호론(湖論)을 형성하고 김창협.깁창흡을 이은 그룹은 서울의 노론학맥, 즉 낙론(洛論)울 형성했다. 3. 서울의 지적 분위기이다. 서울의 학인들은 정파와 상관없이 교류하며 지방과는 다른 학문 내용을 갖춰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문에서 서울은 서울대로, 지방은 지방대로의 구도가 강화되었다. 훗날 권상하의 문인과 농연의 문인 사이에 미증유의 철학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한국 철학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이른바 호락논쟁이었다.
정쟁 속에 택한 처사(處士)의 삶
: 김창협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1689년(숙종 15년)의 기사환국이었다. 그는 부친의 유언을 따라 다시는 관직에 발을 딛지 않았다. 부친의 죽음을 절절히 자책하며 영원히 농부가 되겠다고 다짐한 상소대로, 김창협은 경기도 영평에서 '농암'으로 자호하며 은거했다. 김창흡은 단아한 학자라기보단 시인, 지식의 편력자, 방랑자였다. 김창흡이 평생토록 정력을 쏟고 또 스스로 자부한 분야는 시였다.
탈속과 정치 참여의 이중주
: 김창협은 관료에서 은사가 되었고, 김창흡은 일생을 처사로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과의 완전한 절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은거는, 자신이 보기에 잘 못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완곡한 저항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소론 중심의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김창협 형제에 대한 조정의 출사 요구는 매우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형제는 소소한 일상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나, '의리의 대강(大鋼)'에 관한 문제만은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상세히 토의해 결정했다. 농연은 노론과 소론의 사상 시비가 격렬해질 무렵, 때론 논쟁을 촉발하거나 때론 노론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당시의 그들은 노론 산림과 다름없었다. 사사로운 언급이나 편지를 통해 의견을 개진했다지만, 결국 사문시비를 야기한 장본인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유학에서 도가 실현될 만하면 세상에 나아가고, 어지러우면 물러나 도를 간직한다. 관인이 되어 치국평천하하거나 도를 품고 숨어버리는 은사의 자정은 삶의 형식에 불과했다. 탈속과 세도 실현이 융합하는 듯 갈등하는 듯한 그러한 관계, 농연의 삶이 그 사이에 있었다.
주자주의의 변화 가능성
: 농연이 산림 역할을 수행하자 노론 내부에 미묘한 파장이 생겨났다. 농연을 중심으로 낙론이 결집하여 노론의 학맥은 크게 충청도의 호론과 서울의 낙론으로 나뉘었다. 그 과정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서울 남산에 살았던 처사 졸수재 조성기였다. 그는 약관의 젊은 나의에 퇴계와 율곡을 비판하고 상호보완을 주장한 수재였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통합, 절출하려 했던 그의 구상은 청년기의 농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철학계에서는 조성기와 농연 현제 등을 퇴.율절충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들이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학문을 대하는 원칙으로 스스로의 깨달음. 즉 자득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이라는 것이었다. 그 정신 곧 선을 향한 마음의 보편성, 인간의 개조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것이 농연에서 수립되어 낙론으로 이어진 종지(宗旨)였다. 농연희 학풍은 기존의 서인 학풍에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이들은 주자의 이념과 사회 사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내걸었다. 재건 시기의 교조주의는 전체를 통솔하는 나름의 효과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교조주의는 사실 피해도 좋고, 택한다면 단기간일수록 좋다. 농연이 자득을 강조한 것은 그 딜레마를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하지만 농연이 지닌 결정적 한계 또한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정치 영역에서 결코 의리적 관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사문시비에 엄격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득을 강조했던 그들이 남인이나 소론의 학풍에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모순이었다. 그들이 내건 자득은 주자의 종지를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라 풍부하게 완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식화된 노론 학술계의 내용을 상황에 맞게 변통하자는 것이었다. 자득의 종점은 여전히 성리학적 가치로 귀착되었다.
'중화 조선'과 '조선 중화'릐 갈림길에서
: 중화의 정통을 이었던 명이 망하고 유교 국가가 조선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가 제시한 문화적 중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주자의 이상대로'는 곧 '중화를 조선에'라는 의미였다. 그러한 상황은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재건을 본 후배들은 자신감을 회복하며 긴장을 이완했다. 이제 '중화를 조선에'라는 절박함보다는 '조선이 곧 중화'라는 사고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문화 바람의 발판
: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철학과 문예를 아우르는 농연의 포괄적 기획이 지닌 한계 혹은 변화 가능성이다. 그 장점은 두루 포용한다는 데 있었다. 철학에서는 김창협을 조술하는 우파적 경향이 있었는가 하면, 들이 제시했던 변화 가능성을 더욱 강조하는 그룹도 나오게 되었다. 농연의 학문은 이재를 거쳐 농연의 손자인 김원행에게 흘러갔고 그들은 의리 전통을 더욱 강조했다. 그에 반해 김원행의 제자인 홍대용은 만물의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혁신적인 사고를 전개했고, 청 문물의 수용을 주장해 북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그들이 제시한 자득과 창신(創新)의 논리 밑에서 서울 지역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논거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 북학파, 중인문학, 진경 문화의 바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농연 형제의 자손인 안동 김씨는 기존 의미를 더욱 고수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것은 척화의리로 성장한 가문이 가진 한계였다.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 10. 중화의식
화이론(華夷論)은 세계를 문명이 중화와 야만인 이적으로 나누어보는 세계관이다. 화이론은 중국에 한족 중심 국가가 건설되면서 생겨났으나, 주변과의 교류를 확대되고 사고가 발달하면서 개념이 복잡해졌다. 그중 문화 중심 논리는 유교의 발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것은 예악을 갖춘다면 이적도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논리는 다시 혈연상.지리상 중화가 될 수 없는 주변 민족이 유교문화 혹은 스스로의 문화를 자부할 수 있는 논리로 발전해 나갔다. 중화를 표방함은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이 유구했다. 고려 이래 '소중화'를 칭하며 우리의 문화가 중국에 버금간다고 자부했다. 소중화 의식이 질적으로 비약한 계기는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이었다. 그것은 춘추라는 난세에 태어난 유고를 창시해 바른 도리를 세웠던 공자. 금나라에 중원을 빼앗긴 남송에 태어나 유학 정신을 다시 밝힌 주자의 실천을 계승하는 일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같은 사고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이 중화문화를 실현했다는 자신감이 생긴 일이었다. 그 입장은 조금 더 나아가면 조선의 문화가 유교문화의 정수라는 자부로 발전했다. 조선의 국토, 역사, 어문, 풍속, 예술 등이 독자적 독자적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사고했고 조선의 고유함을 찾는 학풍, 문풍, 예술이 일세를 풍미했다. 이러한 사고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17세기적 전통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긴장의 이완이 가져온 기강의 해이를 우려했다. 그 입장을 한걸음 더 발전시킨 인물이 박지원이다. 한편 그는 청의 발전상을 애써 도외시하는 위선 또한 비판하여 북벌에서 북학으로 전환하는 논리를 마련했다.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는 진지한 비판도 있었다. 일부 유자들은 조선에 문화 기준을 적용해 중화가 될 수 있다면 청에겐 어찌 그 가능성이 없겠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견해를 심하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한 이는 홍대용이었다. 그것은 '중화'조차도 상대적인 기준의 적용이며, 나아가 모든 사물, 문화는 나름의 가치를 지녔음을 강조하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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