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 일제 식민지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일제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어는 '근대성'과 '식민주의'라 할 것이다.
1. '사라리맨'의 일상, 반도에 분 '바람'
봉급날이 서러운 사람들 - '사라리맨'의 애환
서양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부촌이 정동과 남촌, 동대문 밖 신시가지 등의 지역이었다면, 제법 돈을 만진다고 소문난 조선인 월급쟁이들은 동소문 밖에 모여 자기들만의 고급주택단지인, 이른바 '문화촌'을 형성했다.
평범한 월급쟁이의 고달픈 출근길
: 1920년 대구에서 처음 운행된 시내버스는 1928년 경성에 도입되었지만 1945년까지 전차의 보조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만 했다. 경성의 대표적인 운송수단이었던 전차는 1899년 5월 미국인 콜브란에 의하여 '청량리-서대문 노선'이 가설됨으로써 그 운행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2월 '종로-남대문-용산 노선', 1901년에는 '남대문-의주통-서대문 노선' 등이 확충되었다. 이들 노선의 운영은 초기에는 콜브란 등이 투자한 한미전기 회사가 맡았으나 1909년부터는 일본인 시부사와 에이치가 대표로 있던 일한가스주식회사에서 '운영권'을 매입해 운영했다. 일한가스주식회사는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그 회사명칭을 개칭했다. 경성전기가 경성 시내의 전차 운영을 도맡게 됨에 따라 전차 운행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고 전차 선로와 전차 수도 조금씩 확충되기 시작했다. 경성 시내에 깔린 전차 선로의 총연장은 처음 20km에서 해방 직전에는 40km까지 늘어났고 전차 수도 79대에서 257대로 증가했다. 늘어난 만큼 교통수단 가운데 전차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늘어나 1945년에는 하루 48만 명에 달하는 승객을 운송하기도 했다. 1920~30년대가 되자 인구의 증가와 함께 회사원 및 일용직 종사자 등 전차 수요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때문에 경성전기는 출근시간의 혼잡함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탑승자가 적은 저유장을 그냥 지나치는 '직행열차'를 운영하기도 했다.
출세를 향한 한길
: 월급쟁이가 자주 모여드는 '빠-'나 '카뻬'로 유명한 곳은 현재의 소공동인 하세가와조의 조선은행 옆에 자리잡은 '뿌라탄', 종로 네거리의 '뽄-아미', 종로 네거리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한 '제비' 등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나 일본유학생 출신의 월급쟁이는 주로 '뿌라탄'을 은행권과 신문기자는 홍차로 유명한 종로의 '뽄-아미'를 돈이 제법 있다고 하는 계층은 '제비'라는 카페를 주로 드나들었다.
정들이고 돈 빼앗은 가짜 경성제대학생 - 식민지 조선의 교육열
선망의 대학생, 심각한 입학난
: 조선에서의 입학난은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에는 보통학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이 때문에 취학 적령기의 아이들은 보통학교 입학부터 시험을 치러야 했다. 입학난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이었던 1910년대, 조선 사람들은 보통학교에 다니면 나중에 "일본 병정으로 뽑혀간다"는 소문 때문에 학교 입학을 대체로 꺼렸다. 배움에 목말라 했던 아이들은 서당을 찾아 전통적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1919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서당에 재학 중인 학생이 27만 5천 명으로 전체 취학아동 39만 명 가운데 70%를 넘는 수치를 보였다. 학교의 수도 많지 않아 1910년대 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국에 있는 보통학교의 수는 대략 500여 개 정도에 불과했고 한 학교당 서너 개의 학급만을 운영하는 실정이었다. 한 학급에 수용된 인원도 40여 명 정도로 1920년대 이후와 비교할 때 학생이 그리 많이 않은 편이었다. 보통학교 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관심은 1920년대 이후 극적으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입학경쟁률이 4대1, 경우에 따라서는 10대1도 훌쩍 넘었던 당시, 입학시험이란 것은 기껏해야 부모님의 성명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입시는 입시인지라 학부모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처럼 입학지원자가 격증하면서 조선인 식자들 가운데에는 의무교육제의 실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일제 당국자도 이러한 요구에 '재정곤한'을 이유로 들며 난색을 표하는 한편 도리어 보통학교 운여에 지출할 재정적 여력이 없으므로 학부모들이 그 운영비 일체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조선통독부는 1920년 제정된 <조선학교비령>에 따라 '학교비'라는 별도의 재정기구를 각 부와 군에 두도록 규정하고 이를 관리하는 조직으로 학교평의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학교비'는 학부모들이 재산 정도에 따라 부담하는 일종의 세금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위한 교육에는 거의 투자를 하지 않은 채 그 비용을 조선 사람에게 모두 전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전체 예산을 살필 때 일본은 전체 세출의 7%가 교육에 투자되고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도서관 유지비용을 모두 합쳐 전체 세출의 1.4%를 차지하는 데에 그쳤다. 만일 일본과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지출 비중을 높인다면 "재학생 전부에게 수업료를 면제하고도 500여 만원이라는 돈이 남아서 보통학교 500여 교를 더 경영할 수 있게'될 정도였다. 조선의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조선총독부는 그 대신 이른바 '3면1교 정책'을 내세워 학교를 증설하겠노라 공언했다. 세 개의 면에 평균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이 정책은 1921년 1월 7일에 소집된 임시교육조사회라는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학교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열정은 매우 컸기 때문에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3면1교제도 감지덕지 환영하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각지의 학부모와 지역 유지들은 기성회를 조직하여 보통학교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1930년에는 1,800여 개에 달하는 보통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열을 의식한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기존의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중등학교 수업연한도 4년에서 5년으로 개정하여 그 교육의 수준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내려졌다 하더라도 모든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군에 한두 개 학교만이 6년제로 재편되다보니 6년제 학교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더욱이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6년제 학교를 반드시 졸업해야 했기 때문에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6년제 보통학교에 편입하려는 학생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6년제 학교보다 학부모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4년제 보통학교를 늘리는 데에 주력했다. 1930년대에 일제는 '3면1교 정책'을 대신해 '1면1교 정책'을 표방하여 학교 증설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 교육을 원하는 학생이 늘어나는 속도는 학교 증설보다 더 빨랐다. 이 때문에 학교입학난은 시간이 지낟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2부제 수업이라는 '묘안'이 도출되기에 이르렀다. 2부제 수업을 처음 제안한 것은 경성부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입학난구제회'였다. 경성부가 구상한 2부제 수업이란 정원 외 학생들에게 임시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의 일부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는 셈이었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식 보통학교 졸업장이었지 이러한 임시방편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간혹 각 학교 차원에서 학부모들의 진정으로 2부제 실시안이 논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았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폐기되었던 2부제 수업은 1938년이 되면서 다시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들만의 리그, 중등교육기관 탐방
: 입학열은 보통학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하는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의 입학열도 만만치 않았다. 보통학교 졸업자의 20% 정도만이 입학할 수 있었던 고등보통학교는 1930년 말 기준으로 전국에 불과 마흔두 개밖에 없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특히 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예과 합격률이 높았던 경성의 제1고등보통학교와 제2고등보통학교는 당시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고등보통학교도 따지고 보면 그 교육내용이라는 것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일본의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목언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만 했다.
입학만으로도 영광, 경성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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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드 호-ㅁ, 문화주책 한 채 가져보았으며 - 경성의 문화주택 열풍
보통사람의 꿈, 문화주택
: 조선식 가옥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불결하다는 지적이 있던 당시에 가정박람회 집행부는 이상적인 가옥으로 '문화주택'을 제시하고 그 이미지를 전시물의 형태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두 칸 반 가량 넓이의 부엌과 주부실(주부의 방), 양로실(노부모가 계시는 방), 시비실(하녀들의 숙소)가 모두 갖추어진 집 2.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집 3. 가정 병실을 갖춘 집 4. 정원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집 5. 깨끗한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집
집장사와 투기 그리고 '신당리토지매매사건'
: 문화주택에 대한 조선인 일반의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특히 1930년대가 되면서 문화주택열은 더욱 고조되어 문화주택만을 전문적으로 분양하는 '집장사'도 성행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문화주택열에 편승해 돈을 벌었던 '집장수'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일본 사람 마스다 히사요시였다. 그는 지금의 이화여대, 연세대 근처에 있는 금화산 아래에 '이상향'을 만들 요량으로 문화주택촌을 건립해 분양했다. 식민지 경성에는 크게 세 지역에 문화주택촌이 들어서 있었다. 동부의 신당리/왕십리 일대, 남부의 남산과 용산 일대, 금화장을 비롯하여 연희장 등이 들어선 서부가 그것이다. 이들 문화주택촌에는 대개 일본인 부호들이 들어앉게 마련이었다. 남부 일대는 원래 일본인 상권이 막강하게 자리 잡은 남촌과 가까웠고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몰려 살던 곳이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이 이 곳에다가 문화주택을 짓고 살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동부와 서부 역시 그러했다. 서부에 비해 대단지였던 동부문화주택촌은 1930년대가 되면서 새로 개발된 신흥부촌이었다. 이 동부는 신흥주택단지로 주변의 교육시설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곳이었고 경성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대거 몰려 살았다. 하지만 조선인들만의 문화주택지라고 할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조선 사람으로서 그나마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문화촌을 꼽으라면 동소문 근방을 들 수 있었다. 문화주택열이 더해갈수록 '신당리토지매매사건'과 같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도 일어났다. 이 사건은 문화주택열에 편승한 토지 매매를 통해 폭리를 취하려 한 부도덕한 지주의 형태를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치솟는 집값과 주택자금 확보 비법
: 투기꾼과 문화주택 분양업자는 1930년대 경성의 집값을 일시에 올려놓았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른 평짜리 집 한채의 가격이 비싸야 평당 30원에 그쳤고 전체 집값은 평균 900원 정도였다. 그러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문화주택 서른 평짜리 한 채의 가격이 6,000원에 이를 정도로 폭등했다. 30년대 후반이 되자 최고급 문화주택은 평당 400~500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분양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지만 수요는 여전했다. 돈 꽤나 있다는 지방의 지주들은 경성으로 몰려와 복덕방을 돌아다니며 어디 집값이 오를지 눈에 불을 켜고 탐색한 후 목 좋은 곳에 부동산을 사두곤 했다. 지주들은 대개 봄에 농지를 매매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그 땅 판 돈을 들고 경성으로 와 집을 사는 바람에 봄이 되면 경성의 땅이나 집이나 모두 폭등세를 보였다.
2. 근대 소비문화의 풍경
좃코 낫분 것은 별 문제로 하고 어떠튼지 대세 - 백화점의 약진
소비공간의 패자로 등장한 백화점
: 일본인, 조선인을 망라하여 상류층은 미쓰코시를, 일본인 중류층은 미나카이를 이용했고 조선인 중 중류층은 조지아를 이용했다. 하라다와 1931년에 개업한 화신과 동아백화점은 가장 염가의 제품을 판매한 이유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화신의 경우 이용객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경성에 몰아닥친 '백화점 열풍'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경성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백화점들은 지방 도시 진출 계획을 속속 입안했다. 하지만 경성과 지방을 막론하고 백화점 간의 경쟁 때문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조선인 상꼐에는 막대한 타격이 예상되었다.
러일전쟁에 버금간 동아와 화신의 상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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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흠'에 터지는 새우등, 고급 상점에 밀려나는 소상인들
: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에서 있는 백화점의 성장은 지역 소상인들의 몰락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일본의 백화점 붐이 조선에까지 밀려오면서 백화점이 기존의 상권을 흡수하는 제로섬 게임을 벌이며 성장한 것이었다.
문화주택 한 채가 경품, 백화점의 고객몰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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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친절한 '쇼프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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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오락과 문화의 전당으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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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의 새 시대를 열다 - '모던' 그리고 유행
시대에 도전한 단발랑, 강향란
: 1922년 강향란이라는 기생이 한국복식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그녀는 조선 최초의 '단발'을 감행했다. 재미있는 것은 강향란이 처음 단발을 '단행'한 지 5년이 지난 1927년 무렵, 경성에는 단지 약 스무 명 내외의 단발랑이 있었다고 한다.
유행의 진원지는 '뎐차' 안
: 조선 제일의 도시, 경성의 유행은 어디서 어떻게 퍼져나갔을까?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을 주도했고 남산 아래 진고개에는 영화관, 카페, 대행상점이 넘쳐났다고 평가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대단한 기세를 띤 유행이 범람했을 것 같다. 유행이 퍼져나가는 곳도 영화나 사교 기관 등이 아닌 전차 안이었다. 유행의 진원지가 하필이면 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땀 냄새와 분 냄새가 뒤범벅이 된 전차였을까? 전차는 경성 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교통수단이었다. 전차는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모던 걸', 패션을 선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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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의 화려함, 종로 야시의 수수함
: 1930년대 경성 주변 인구 폭증과 1936년 경성부 구역 확장으로 경성부의 인구가 40만에서 70만 가깝게 변했지만 태반이 절대빈곤의 상태였다.
손님의 마음을 '꼬여내는' 장사법 - 조선 상인의 마케팅
간판과 쇼윈도 치장부터
: 상호와 간판 등을 이용한 홍보가 필요 없던 조선 상업계에 간판이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조선 후기부터 서서히 해체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건하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관허 상업 체제'가 무너지고 상계에 경쟁이 도입되면서 드디어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점의 간판 부착은 1910년대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가 되면서 언래의 광고 기능에서 장식, 주변 경관과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과 모양에 대한 사람들의 관삼과 욕구가 증대되었다. 간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상품의 진열법과 쇼윈도의 장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디엠' 발송부터 경품전까지, 고객 유치를 위한 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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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송의 필수조건, 조선스러운 맛 - 대중가요로 본 일제강점기
골치 아픈 이웃집 유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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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레코드 회사의 레코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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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대박의 비결, '조선스러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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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누이 부대를 몰고 다닌 가수들과 극성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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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가 되고 싶었던 식민지 조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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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난의 시대, 소외의 시대
집 갖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네 - 토막촌 심방기
서민을 울리는 주택난
: 1920년대 이후 경성은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시기 이토록 전/월세 집을 얻기가 어려웠던 것은 지방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1년에 경성부가 행한 가옥조사의 결과, 경성에 있는 가옥은 3만9천 호이고 한 호에 월세, 전세의 형태로 거주하는 가구수는 모두 합해 5만4천 호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가구 수에 비할 때 1만5천 호 정도의 집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집 부족 현상은 결국 집세의 앙등을 초래했다. 집값 폭등의 원인으로 당시 조선인들은 '가봉(加俸)제도'라는 것을 꼽기도 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으로 건너와 회사 혹은 관청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멀리 떠나 낯선 곳에서 근무하는 '고달픔'을 '위로'한다는 차원에서 원래의 급여에 더하여 가봉 즉 보너스를 매달 덧붙여 주는 것이 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은 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월급이 넉넉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치들도 물건값을 높게 부르는 것이 상례였다. 일본인들의 소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다보니 이들이 주로 소비하는 소위 '문화생활'과 관련된 품목들, 예를 들면 라디오나 자전거, 문화주택 같은 상품들의 가격도 덩달아 올랐다. '문화생활'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조선인들도 이들 일본인의 소비 수준에 맞추어야 했다. 강남 등의 집값이 오르면 다른 곳의 주택가격도 곧이어 같이 따라 오르듯이 당시에도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의 집값이 오르자 순식간에 전체 경성의 집값도 따라 올랐다. 이런 이유로 집주인들은 전세나 월세가 더 올를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집 내놓기를 꺼려했다.
철거와 이루, 도시 빈민의 서러운 삶
: '토막(土幕)'이란 집 없는 빈민들이 공터에 만들어 사는 움막이나 움집을 이르는 말이다. 일제시대 경성 주변에는 이러한 토막이 곳곳에 들어서 토막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명한 토막촌을 꼽으라면 동부의 숭인동, 창신동, 신당리 일대와 마포의 도화동과 지금의 용산 청파동인 청엽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의 토막민들은 행상, 인력거꾼, 공사장 인부, 지게꾼 등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편이었는데 동부 신당리 일대에는 특히나 넝마주이와 '무직'이 직업인 걸인도 많았다고 한다. 마포와 가까운 도화동에는 생선 장수나 어부가 많이 살았고 인근의 청엽정에는 채소장소가 상당수 살았다. 이들 토막민들은 식민지 시기 경성부민들 사이에 불어닥친 문화주택열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문화주택열은 대공황 이후, 1930년대 만주사변,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 등으로 전쟁 특수 경기가 출현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경기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이 틈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골몰했다. 개발 바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소외된 자들의 슬픔, 토막민 정리 방안
: 1925년 7월 9일부터 무려 10여 일 동안 퍼부은 강우로 부천, 용산, 뚝섬, 영등포 등의 한강 일대 상당 부분이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발생했는데, 이를 '을축년 대홍수'라고 한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대홍수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가 지금의 용산구 이촌동 일대였다. 대홍수 이후, 새집을 짓거나 새로 집을 구해 이사를 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이촌동 이재민들은 원래의 동리 근처에 지은 토막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촌동 이재민들은 홍수가 난 그해에 총독부가 마련한 집단 이주지로 이주하게 되어 있었으나 당국이 손을 놓고 있는 바람에 홍수가 쓸고 간 자리에 임시로 지은 초막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만했다. 한편 경성부는 1935년에 이르러 도화동, 신당리 일대의 토막민들을 홍제동과 정릉 일대로 또다시 집단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그 당시 경성부는 최후의 대대적인 토막민 대책을 세운다는 단호한 입장을 가졌던 것 같다. 경성의 도시 확장 과정에서 토막촌이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예상한 당국자들은 아예 이들을 심산유곡에 몰아넣자는 생각으로 당시로서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궁벽지'였던 정릉과 홍제리를 이주지로 결정한 뒤 강제 이주 조치를 단행했다.
하느님이여! 이 불쌍한 인생을 굽어보소서 - 가난과 싸우는 기술, 투빈기
상류계층의 흐뭇한 살림과 '빈민 전용' 장옥 생활
: 식민지 시기의 사람들은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스스로를 유산자, 중산층, 무산자로 계층화하곤 했다.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일대의 훈련원과 서울역 근처 봉래정에 몰려 있던 '장옥(長屋)'이라 불리는 주택들(경성부에서 지어 '부영장옥'이라고도 한다)에는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쉽지 않은 빈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925년 무렵 경성 인구 28만 명 가운데 다소 과장하여 20만 명이 실업자였다.
도회생활 5계명과 투빈술 익히기
: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극동의 작은 식민지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대공황은 고스란히 식민지 조선의 경제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취직운동'에 뛰어드는 형편이었으니 교육도 받지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이 상경한 그들에게 돌아갈 일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하여 지배하고 있다고 선전하곤 했다. 근대화와 경제성장이 이 땅의 모든 조선인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 한 '개발'이라는 구호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졸업을 했으나 할 일이 있어야지 - 식민지를 울린 청년 실업
조선 청년들의 '취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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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의 왕자, 실업학교
: 취직이 쉽지 않기로는 경성제국대학이라는 당시 최고 교육기관을 졸업한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실업문제가 날로 심해짐에 따라 졸업 시즌이 다가오면 학교 선생님들은 '총출동'하여 '맹렬한 활동'으로 자기 학교 졸업생들의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다니는 것이 일종의 풍속도가 되었다. 사범학교 졸업생의 경우에는 학교 교사로 취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아무리 늦어도 졸업 후 두세 달만 지만면 무리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실업학교 졸업생도 취업에는 유리했다. 공립공업/농잠/농림 전문학교의 조선인 졸업생들 중 70%는 어려움 없이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30년대, 각종 학교의 졸업생 취직률로 보았을 때 사범학교를 제외하고 전 조선에 그 명성을 떨치던 학교가 있었으니 바로 원산상업학교였따. 그런데 식민지 시대에는 실업계 학교도 드물었으며 이에 진학하는 것 역시 어려웠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 모두가 실업학교 졸업생이 되어 취직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입생을 서룬여 명 정도 밖에 선발하지 않는 실업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험난한 입시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인은 종로에서, 일본인은 본정에서 - 경성의 분할
조선의 황성에서 식민도시 경성으로
: 일제시기 초반만 해도 일본인들은 기존의 세력이 아직까지 공고하게 버티고 있는 경성의 북촌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개항 이래 일본인들의 중심지였던 청계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권을 만들기 시작했고 배후의 용산에는 군대를 주둔시켰다. 전차 노선 확대, 도로의 개설과 증설은 일본인 거주 지역을 따라 그리고 일본인 지역의 확대 방향에 따라 이루어졌고 상하수도 시설이나 각종 제방시설 등고 일본인 지역을 최우선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경성은 문명의 남촌과 전근대, '원시'의 북촌으로 명확히 대비되는 이중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나마 북촌에 문명 시설이 들어선 것은 1925년 조선총독부 경북궁 신청사를 준공하면서 였다. 총독부의 경복궁 이전은 북촌으로의 일본 세력 확대라는 야심찬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나 잘못하면 북촌의 중심성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총독부로서 종로 거리를 꽃단장하는 것은 딜레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 이전과 더불어 일본 상점들도 종로로 북진을 감행했고 그 결과 종로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1920년대 후반 이래로 남촌과 북촌을 망라하여 건물들은 날로 고층화되고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민간 자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자화상, 북촌
: 모든 식민도시가 그러했듯 경성도 공간적 격리와 이중 도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서울은 전근대적 북촌과 근대 문명의 남촌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전근대적 북촌을 향한 '문명'한 일본인들의 야유와 차별은 조선인들에게 자기모멸과 문명한 일본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을 낳게 했다. 북촌의 맹주였고 조선의 주요 세력이었던 기존 관료 집단의 경우 왕조 권력이 사라지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관허 상업 체계 하에서 존재했던 종로통의 상인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왕조라는 '환경'이 사라지고 권력의 '중심'이 진고개 너머 일본 상인들로 넘어가면서 종로 상인들의 세대 교체와 더불어 서러운 쇠락이 시작되었다. 합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0년대에 경성의 인구는 오히려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인이 경성을 떠나게 된 주요한 이유는 생활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성의 인구는 1920년대가 되면서 차츰 회복되었으며 그 후는 점진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인보다 일본인의 증가 비율이 높았다. 전문학교 등 고등교육 시설이 경성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성으로 올라온 학생들 역시 꽤 비중을 차지했다. 학생들은 북부 경성의 주택 중심지대인 안국동, 송현동, 사간동에 많이 살았다. 그래서 이 동네는 지방 학생들의 하숙촌으로 유명했다. 조선의 최상류층은 가회동, 계동, 재동에서 살았으며 혜화동, 명륜동, 성북동에도 터를 넓혀 살았다. 성북동은 풍광이 좋아 양반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주택지로 개발되었다. 월급쟁이들은 이보다 남쪽인 그러니까 지금의 청와대 서쪽 동네인 옥인동, 통인동, 시작동, 필운동에 주로 살았다. 안국동 근처의 관훈동, 인사동, 견지동, 공평동 지역에는 의사, 변호사, 건축사,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지역은 상업 중심지인 종로와 주거지역의 점이지대적 성격이 강했다. 연건동, 이화동, 동숭동, 충신동, 효제동 즉 지금의 대학로 근처 지역에는 소상인들과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섞여 살았다. 특히 부유한 상인들은 종로와 무교동, 서린동 등에 많이 거주했다. 기존의 도성 안쪽의 청계천 기준 북쪽 지역의 주거지에는 부유한 조선인들부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쟁이까지, 여유 있는 자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일본, 남촌과 본정
: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일본인들이 오글오글 모여 살았던 곳이 바로 지금의 충무로, 명동 이남 지역인 남촌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는 상당히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일확천금에 들떠 조선에 몰려온 일본인은 패망 때까지 전 인구의 2% 정도를 차지했다. 그리고 경성에는 일본인들이 '굉장히' 많이 살았다. 식민지 시기 내내 적게는 16% 많게는 30%를 육박할 정도의 규모였다. 총독부의 열띤 투자 덕에 한탕으로 일확천금을 벌고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던 일본인들은 슬슬 조선 땅에 발을 붙이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남촌 지역의 고급주택들은 대부분 경성에서 생활하는 일본인들의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제적 격차는 점점 벌어져만 갔다.
남부 상계는 호황, 북부 상계는 한산 막심
: 1920년대 중반까지 경성의 상계는 상대는 안 되지만 민족적 분할을 경계로 조선의 종로 대 일본의 본정이 '대립과 경쟁'을 지속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은 좀 색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소비자본주의 문화상품에 현혹된 부유한 조선인들의 본정 출입이었따. 또 하나의 달라진 상황은 종로 상가를 넘어 전국적 규모로 등장한 조선인 대자본과 소상인 간의 갈등이었다. 그리고 본정 상인들의 북진 역시 종로 상인들의 목줄을 죄는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192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가 청사를 경북궁으로 옮기면서 남촌 중심의 일본인 세력이 경성 전력으로 확장되자 전 경성의 식민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더불어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 역시 본격화되었다. 1930년대 본정 거리에 대형백화점이 만들어지면서 경성의 상점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32년에는 종로 거리에도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이 증축을 거듭하며 점포의 대형화를 선도했다. 그리고 유흥업종이 대대적으로 확산되어 종로 거리에도 카페가 등장했다. '민족' 자본 행세를 한 화신에 대해 조선인들은 일본 백화점에 대항하는 민족 유일의 백화점이라는데 의의를 두고 응원을 마지않았다. 하지만 조선인이 경영하는 근사한 백화점이 있다는 자긍심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화신은 종로의 조선인 소상인들의 목줄을 죄는 존재였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종로 상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나날이 기울어져만 가는 조선인들의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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