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 이민희, 글항아리, 2008, (100525).

바람과 술 2010. 5. 25. 23:53

머리말


이야기 하나. 사림의 훈구파 사냥 - [설공찬전] 필화 사건


[설공찬전] 사태는 조선왕조에서 소설에 대한 관념이 이념적 탄력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를 긋는 사건이었다. [설공찬전]이 큰 물의를 일으키고 나자 소설의 기능은 백성을 교화하는데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먹어야 잘 자라나는게 문학의 생리인데, 그것을 지배 이념을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의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소설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인들은 상상력을 억압당했고 스스로 내부 검열을 거쳤다. 


이야기 둘. 조선은 왜 책을 팔지 못하게 막았는가 - 조선중기 서사 설치 논란과 어득강


옛 기록에 서사(書肆)·책사(冊肆)라는 던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오늘날의 서점과 같은 말이다. 중국에서는 서점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명·청대에 이르면 '췌고재'나 '오류거' 등의 중국 서점의 대명사로 부각된다. 특히나 중국 전역에서 출간된 책들이 운집하던 북경의 서점가 유리창(琉璃窓)의 유명세는 하늘을 찔렀다.그 지역 전체가 하난의 거대한 서점이라는 의미에서 '창사(廠肆)'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의 관료 세력은 백성들이 책을 다양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고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울 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현방(懸房, 푸줏간), 약국(藥局), 서화사(書畵肆, 그림 판매점), 금교세가(金僑貰家, 종친이나 공주, 옹주의 옛 저택을 혼인을 앞둔 신부 집에 빌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가게) 등과 더불어 서점을 독립 항목으로 설정해 기술한 부분이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사는 정릉동 병문과 지금의 세종로 및 그 일대에 해당하는 육조 앞거리, 이렇게 두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서점에서 판매하던 책들이란 주로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서였다. 19세기 후반에 숫자는 많이 않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판해하던 서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초기 민간 서점 중에는 자체적으로 출판업을 겸한 곳도 있었다. 그 필요한 서적을 확보하거나 팔기 위해 방각본·필사본 서책, 신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책장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세워진 영창서관·박문서관·신구서림·회동서관 등 여러 서점은 언문 소설을 발행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꾼들이 여기서 소설책을 받아다가 장날이던 봇짐을 풀어놓고 팔았다. 일부 서적중개상은 세력을 키우고 자본을 축적해 직접 서점을 내고 책의 유통과 판매에도 나섰다.   


조선의 책 이야기. 맞난 음식과 낮잠만으로 세월 보내기는 괴로운 일 - 세책점의 등장과 대중 독서시대의 개막


세책점의 융성은 곧 소설의 인기와 번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독자의 확대를 뜻한다. 도한 상업 출판을 목적으로 간행한 방각본 소설의 발달과도 연결된다. 방각본 소설은 서울·안성·전주 등 일부 도시에서 출판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서민들에게도 세책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야기 셋. 실패한 저격수들, 논잰의 불씨 키우다 - [곤지기], [이단변정], [학부통변]


왕양명 이전의 주작학은 마음은 기(氣)이고,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말했다. 기와 이를 구분한 것이다. 양명학은 이런 이분법에 반대해 만물일체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자학에서는 사물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고 했지만, 양명학에서는 먼저 마음의 눈을 열어야 그 다음에 사물의 문도 열린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주자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앎에 이른다고 하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했다면,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해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했다. 전자는 지식을 강조했다고 해서 이학(理學)이라 불렀고, 후자는 마음을 강조했다고 해서 심학(心學)이라 불렀다. 


조선의 책 이야기. 조선 시대의 추천 도서 목록은 어땠을까 - 홍석주와 이율곡의 권서 논리 비교


이야기 넷. 유학자들은 왜 '귀신'을 연구했나 - 성리학의 귀신 논의를 해체시킨 정약용의 [중용강의]


귀신은 조선 사람들과 한 몸으로 살고 있는 존재였다. 무속이 번성하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 이유는 귀신의 존재감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예교의 으뜸으로 자리한 것도 귀신에 대한 확고한 사회적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은 귀신의 존재를 종교가 껴안고 유일신으로 수렴해나갔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불교가 배척되고 현세적인 성리학이 삶과 죽음을 모두 관장하고 있었다. 특히 유령에게 음식을 올리는 제사 문화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령과 사람이 어떻게 교감하고 영향을 주고받는지의 문제를 설명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성리학은 '이(理)'를 숭배하는 종교다. 허나 귀신은 공자나 주자, [주역]이나 [중용] 등에서 기(氣)에 속하는 움직임으로 풀이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추구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애기다. 유령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삶 속에 깊속이 끌어들이지 않는 것, 그저 애매모호한 기의 움직임의 상태로 놓아두는 것, 이것이 귀신에 대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이론에서는 성리학 우위였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유불선이 회통하던 것이 조선의 실상이었다. 조선사회가 겪었던 '귀신의 딜레마'는 귀신이라는 존재가 화담 서경덕의 경우에서 보듯 너무 강조되면 자칫 불교의 윤회설로 흐를 수 있고, 그렇다고 단순히 소멸되는 기운으로만 치부하면 매일 제사 지내는 조상님들이나 천지신명님들의 지위가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 엄연한 논리적인 허점을 방어하기 위해서 '귀신의 기는 본질적으로 흩어지는 게 맞지만 제사 지낼 때는 후손들의 성심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가 다시 모인다"는 식으로 설명해봤자 더 궁색해질 따름이다. 그렇다고 제사를 작파할 수도 없으니 이황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이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귀신에게는 기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이의 측면도 함께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임성주는 귀신은 변하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형이하학적 존재이고 기에 속하지만, 그러한 물질적 활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적 원리를 배후에 지니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는 그릇이고 이는 내용이라는 결론인 셈이다. 이 와중에 모든 논의의 틀을 깨고 가장 독자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귀신론을 펼친 사람이 있었으니,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다산 정약용이다. 유학은 크게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와 만물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는 본체론(本體論)과 인간의 심성과 정신 작용, 도덕적 실천 문제를 다루는 인성론(人性論)으로 구분된다. 반면 귀신론이란 이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에 관한 논의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삶과 죽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놓이는 것을 탐구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귀신론은 사람과 귀신, 현세와 내세에 놓인 침묵을 깨우고 없애는 가교적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귀신 개념을 본체(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실)와 현상(사람이 죽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로 썼던 것이다. 정약용의 비판하고 부정한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사유하는 방법 그 자체였다. 정약용은 귀신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이것을 인간의 도덕성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로 선택했다. 19세기 초잔 조선의 선비들은 끝도 없이 타락해갔다. 성리학에서는 인간 내면에 본래부터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 원리가 있어서 그것의 자발적인 발현으로 도덕이 실현된다고 했지만, 정약용은 이를 밎지 않았다. 다산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수용해 인간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려는 본능과 함게 아무 곳에서나 누워서 자고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어하는 생리적인 특성을 함께 가지고 태어났다고 여겼다. 바르게 살려면 이 생리 특성을 절제하고 도덕적 성향을 잘 계발해야 하는데 법과 윤리로는 한계가 있다고 게 다산의 생각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나쁜 생각과 행동들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다산은 항상 인간의 옆에 붙어서 '도덕의 감시자'역할을 해줄 무엇가를 찾게 되었고, 그 존재를 바로 귀신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바로 다산의 유명한 '상제(上帝)' 이론이다. 인간 도덕의 근원은 원래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제가 끊임없이 감시하고 다그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는 독특한 수양론인 것이다. 일찍이 천주교의 세례를 받은 바 있었던 정약용은 표면적으로는 그 영향을 감추고 있었지만 신과 한시적인 인간이라는 구도를 변형시켜서 성리학 체계 내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해결해줘야 철학이 스스로 할 수 있고 현실에도 도움이 될 만한 주제들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생각을 정약용은 분명 가졌을 것이다.


이야기 다섯. 사무라이에 대한 공포가 탄생시킨 병법서들 - [무예제보]에서 [연병지남]까지


조선의 책 이야기. 허균의 애장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 삼치설의 유행과 조선의 책 인심


이야기 여섯. 한 영명한 왕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 - 위험한 변화를 기록한 [심양장계]


이야기 일곱. 동방의 보물 같은 책은 왜 백성을 구하지 못했는가 - [동의보감]에서 [마과회통]까지


조선의 책 이야기. 독서당 선비 신종호를 기생으로 꾀어내다 - 사가 독서제가 탄생시킨 독서의 괴물들


이야기 여덟. 양반이상주의자들을 향한 일침 - 서계 박세당의 [사변론]과 [색경]


이야기 아홉. 유교사회의 희생양, 불살라진 소설들 - 조선의 여인들, 비밀결사처럼 숨죽이고 소설을 읽다


소설에 대한 독서열은 19세기 중반 최고조에 달했다. 남녀의 애절한 연애 라인이나 시부모와의 갈등과 대결을 다룬, 여성 독자들을 겨냥한 소설이 집중적으로 건너오고 창작되었다. 가정의 질서와 일부종사를 강조해왔던 사대부들은 소설의 역효과를 대대적으로 우려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책 이야기. 명나라에는 없어도 조선에는 있다 - 소설과 희귀서에 매료된 관료들


이야기 열.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킨 영조대왕의 분노 - 책쾌들의 씨를 말린 [명기집략] 사건


조선의 책 이야기. 강을 건너면 이리로 변하는 사람들 - 명청대 도서의 수입과 역관


이야기 열하나. 조선의 사장 또똑했던 왕이 가장 싫어했던 책 - [원중량집] 등 노론청류의 양명좌파 수입과 그 좌절


16세기 말엽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둘로 갈라졌다. 이 중 다소 급진적인 사상가들이 태주학파를 형성했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이단적인 사상가로 손꼽히는 이탁오가 이 시기 태주학파의 선두 주자로 활동했다. 그는 금욕주의·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를 부정하고 인간의 본능을 자유롭게 추구했다. 이탁오는 남녀 평등론까지 제창하다 결국 투옥되어 옥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이탁오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중국 명나라 때의 문학 집단이 바로 공안파다. 공안파의 대표 기수였던 원종도·굉도·중도 3형제의 출신지가 호북성 공안현인 데서 생긴 이름이다. 이들은 당시의 복고파 문학이 케케묵어 냄새가 지독하다며 비판하고 이탁오의 자유인적 기질을 문학에 본격 도입했다. 그건 한마디로 전거가 없는, 평지돌출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낭만주의적 문학론을 밑바닥에 깔고,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명석하며 청순한 필치로 개성적인 자아 표현을 해 보이려고 힘썼다. 중국에서는 태주학파의 이탁오에게 공안파로 이어지는 '양명좌파'가 명말청초의 사상계와 문단을 뒤흔들었다. 중국의 양명학에서 양명좌파가 분리될 때, 조선에서는 노론에서 노론좌파가 문리되고 있었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을 직통으로 잇는 한원진 등이 "주자학을 사수하라"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다면, 이 흐름에서 떨어져 탈주자학적 견해를 표출하는 선비들이 나타났는데 김창협·김창흡 등에서 시작된 낙론계 지식인들이 그들이다. 이들 낙론계는 영조대 후반에 '노론청류'로 결집했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 그 측신으로 대거 정꼐에 진출한다. 노론좌파라 함은 바로 낙론계에서 노론청류로 이어지는 이들의 후손으로 서울지역에 살았던 지식인들 즉, 김조순, 박지원, 권상신, 이서구, 유만주,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일컫는다. 또한 당시 지성계의 핵심에는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세력을 잃었다가 영조대부터 조금씩 복권돼 정조 재위 시절 중심 권력층으로 등장한 남인 지식인들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채제공을 정점으로 한 남공철, 이가환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중국의 양명좌파와 조선의 노론좌파 및 남인계 신지식인들을 만나게 해준 것이 바로 [원중랑집]이다. 조선후기에 개인 심경을 짧은 문장에 표현하는 척독(尺牘)이라는 장르가 유행한 것도 원굉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굉도의 척독이 매우 짧기 때문에 바르고 큰 문학을 원하는 당대 주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비교적 자유럽게 개인의 심회를 나타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전을 인용하고 성인의 말씀을 박아넣어야 작품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긴 글을 쓰는 것은 고달픈 형식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반면, 짧은 글에서는 비록 단발마 같은 비명이나마 '생짜'로 나의 음성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고증학이 경전의 핵심 전언을 다루지 않고, 오탈자나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에 집착해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인 양 으쓱한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작업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고증학의 본령이다. 미세한 증거에 근거해 텍스트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확고부동한 것이 된다. 또 하나 정조가 고등학을 미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꼬투리 잡기에 의해 경학의 주류 학설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나라 염약거가 [고증상서소증]에서 128조목을 근거로 한 무제 때 공안국이 정리한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히자, 주희가 [중용]의 서문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전했다고 주장한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 允執厥中)'은 성인의 심법이 아닌 그저 농담이 되고 말았다. 이 말은 [상서고증]에서 따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호위의 [역도명변]이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도교에서 유래했음을 논증하자, 거기에 기댄 성리학적 우주발생론은 치명상을 입었다. 마치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 고전을 재해석함으로써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것은 중동과 이집트 등지에서 고도로 발달된 의학과 문헌학이 그 시기에 서구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유럽 중심주의가 받았던 충격과도 같다. 명나라 말기의 양명좌파의 문학과 청나라 초기의 실증주의 학풍은 17~18세기의 조선으로 넘어와 서로 뒤섞이며 막 새로운 모습으로 발아하고 있었다. 그들이 염두에 두고 추구했던 것은 고전의 권위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고전의 제대로 된 쓰임새였고, 삶의 여러 문맥에서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 고문의 진정한 가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식인사회의 자유 담론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 현실주의 실학으로 막 옮겨가려는 찰나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당론에 좌우된 내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은 18세기 이후 북경의 유리창에서 수입된 서적으로 인한 이단적 사유의 틈입을 봉쇄하기 위한 사상 탄압"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중국문학에 빠진 자신의 최측근 남인 세력을 노론의 공격에서 구해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철인 군주인 정조가 역설적으로 조선의 사상적 발전을 꺾어 분지른 최악의 탄압자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야기 열둘. 18세기 백과사전의 시대가 열리다 - 박학다식한 선비들의 총서 열풍


'총서()'라는 말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일정한 주제에 관하여, 그 각도나 처지가 다른 저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한데 모은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총서는 오늘날 비슷한 테마나 지향점을 지닌 저술들을 차례대로 펴내는 연작 형태의 출판물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총서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는 '모은다'는 말이 중요하다. 전통 시대의 총서는 흩어진 지식을 넓게 수집하여 한곳에 모으고 일정한 범례로 나눠 질서 있고 규모 있게 특정 테마를 이해하려던 것을 지칭했다. 이들 총서는 유서(類書)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모은다는 것이 지식의 주류적 개념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바로 영·정조대인 18~19세기다. 그전까지 지식인들에게 지식은곧 역사와 철학, 윤리의 규범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오면 이러한 지식 개념에 균열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지만 청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서책들을 총해 앎의 욕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것이 가장큰 이유였다. 그중에서 인기가 높은 책은 소설과 백과사전이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박학다식한 교양은 하나의 멋을 넘어 삶의 실천적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오류가 없으려면 다양한 역사적·지역적 사례들을 전부 검토해서 '현실'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했다. 그런데앞 시대의 선배들은 그런 식의 작업을 해놓은 것이 별로 없거나 있어도 전해지지 않았다. 경전을 읽고 도를 닦거나 기껏 산수유기를 쓰는 것이 대다수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제대로 된 백과사전 하나 없다는걸 알게 되었을 때 조선의 젊은 학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성리학의 예치(禮治) 시스템에 갇혀 갑론을박의 순환에 빠져서는 앞으로 다가올 지식경쟁의 시대를 제대로 헤쳐나갈수 없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넓게 두루 모르는 것이 없이 알아야 했고 그래야 현실에 제대로 대처할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시기였다. 조선의 18~19세기는 바벨탑처럼 지식을 쌓아올리려는 열정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었다. 서구 계몽주의의 산물인 백과전서가 식민지 개척의 경제적 동기를 내장한채 과학주의로 무장하고 있다면, 고요한 동양의 나라 조선의 백과사전들은 동시대를 향한 정치 칼럼과 생활 에세이를 방대한 역사 지식 속에 버무려 역류해나가면서 기존의 권위와 불필요한 제도를 혁파하는 지식 게릴라들의 집결지 같은 공간이었다. 


조선의 책 이야기. 아버지 무덤에 천여 권의 책을 순장하다 - 책에 미친 사람들


이야기 열셋. 조선의 종말, 그 시초를 알린 책 - [조선책략]을 둘러싼 모험


[조선책략] 파동은 우리에게 사상을 억압하고 통제한 조선 왕실의 정책이 다양한 정보의 유통, 정치 담론의 형성과 전개를 막아 조선을 더욱 고립시켰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전국의 보수 세력을 집결시켜 한목소리로 척화를 외치고 개항 정국을 개화와 척화의 사단을 건 대결로 양분하는 분수령을 이루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조선책략]이 이후 한국사회에 형성된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의 첫 페이지를 ㅈ아식한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신문물의 대표적 서양서에 적힌 내용은 의심보다는 동의의 대상이었을까, 아무튼 이러한 미국의 이미지는 조선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가게 되는데, 그런 불확실한 이미지가 점차 확실한 윤곽을 가진 실체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조선책략]이 널리 유포된 이후 휠씬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