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의 그림수집가들], 손영옥, 글항아리, 2010, (101003).

바람과 술 2010. 10. 4. 01:29

들어가는 글


제1부 서화 수장에 빠졌던 왕과 왕자들


1장 조선 최고의 훈남 컬렉터 - 안평대군


2장 운명이 등 돌린 불운한 장남 수장가 - 월산대군


3장 왕은 왜 그림을 보았을까 - 성종


왕에게 서화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조선이 신권사회이자 유교사회였기 때문이다. 완물상지(玩物喪志), [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귀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마음이 쏠리면 자신의 뜻을 잃는다'는 의미다. 왕이 예술에 탐닉해 정사를 소홀히 할까 경계한 용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네 글자는 왕이 그림이 좋아서 맘껏 즐겨 볼라치면 신료들이 꺼내드는 전가의 보도가 됐다. 


4장 미술을 사랑한 폭군 - 연산군


연산군 때 채홍사 등을 통해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淸)이라 했는데, 여기서 맘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연산군의 패륜적 행위와 폭정은 마땅히 지탄받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중 미술의 발전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공은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 연산군이 파격적인 스타일의 서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제도적인 벽을 부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왕이라고 해서 도화서 화원들에게 원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화서는 예조 관할이었다. 도화서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임했고 도화서는 궁궐 바깥에 있었다.  


5장 김홍도의 풍속화는 왜 해학적일까 - 정조


풍속화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숙종 때의 선비화가였던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의 속화에서 단초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에 만개했다. 정조연간의 풍속화는 이전 시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풍속화의 해학과 익살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무엇이 그런 공통분모를 만들어냈을까?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1789년 자비대령화원 녹취재 시험에서 '조운 선박의 점검'과 '논밭의 새참'이라는 풍속화 주제를 냈다. 그러면서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조선은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했다. 국왕이라도 사관의 입회 없이는 총애하는 신하를 독대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됐던 나라였다. 17세기 청나라가 문신 관료로 파견하던 사신을 왕족으로 교체하라고 요구했던 것도 관료 중심으로 움직이던 조선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강했다. 신권사회에 살았던 조선의 국왕은 관료의 동의 없이는 좋아하는 그림하나 그릴 수 없는 답답한 처지였다. 왕에게 가해진 이런 속박은 푼 이가 정조였다. 정조는 궁중 안에서 일하며 왕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화원제도를 만든 것이다. 1784년 11월 창덕궁 규장각 안에 설치한 자비대령화원 직제가 그것이다. 할아버지 영조 때 임시로 만들어진 이 조직을 정조는 그전의 두 배인 10명으로 늘려 아예 왕정 핵심 기구인 규장각 산하의 정식 직제로 둔 것이다. 자비대령화원은 고종대인 1881년까지 약 100년간 지속된다. 자비대령화원은 정조가 화단을 장악하게 했던 '제도적 칼'이었다. 즉 그것은 당대 예술을 주도하는 소위 정조의 '미술 친위대'였다. 도화서 소속 화원에 비해서도 녹봉 등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던 자비대령화원 출신에는 18세기 화단을 풍미했던 쟁쟁한 화원이 망라되어 있다. 정조는 '예단의 전사'들이었던 자비대령화원 화가들을 통해 18세기 미술을 이끌었다. 책거리 그림, 채색화 등 민간 미술시장 유행의 진원지가 자비대령화원이었다.  


6장 요절한 비운의 군주 패트론 - 헌종


조선시대는 초·중기까지 서화를 보관하는 별도의 수장처가 없었다. 서적보관소에서 '더불살이'하는 처지였다. 헌종대에 이르러서야 오롯이 서화만 수장한 전문 전각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승화루다. 승화루의 영광은 잠시였다. 헌종의 사망과 함께 그곳에 보관됐던 서화는 다른 곳으로 옮겨졋다. 순종 때는 왕이 여가를 즐기는 탁구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 감찰국으로 쓰이는 비운의 건물이었다. 


제2부 탐욕과 자족의 기로에 선 양반 컬렉터들


7장 과시적 컬렉션 문화를 꾸짖다 - 박지원


8장 벼슬 대신 예술품을 택했던 선비 - 김광수


김광수는 18세기 후반, 식자층을 휩쓸엇떤 고동서화 수집 열기의 아이콘이었다. 


9장 그림에 빠져 거지 신세가 된 양반 - 이조묵


육교 이조묵. 그는 18~19세기 조선 양반사회에 광풍처럼 휘몰아쳤던 고동서화 완상 취미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새로운 기운이 흘렀다. 박제가가 "벽(癖)이 없는 인간은 쓸몽벗는 인간"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지식인들이 뭔가에 미쳐 있던 시기였다. 수집벽과 정리벽은 당대 지식인의 특징이었다.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구의 과학문명과 정보의 홍수는 조선 지식인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양반 지식인들의 삶의 목표조차 달라지게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불던 금석문과 청나라 서화골동 열풍의 중심에는 청나라 학자 옹방강과 그의 아들 옹수곤이 있었다. 금석문을 연구해 추사체를 탄생시킨 김정희는 중국 사행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매제 된 옹방강 부자를 조선의 학자들에게 소개했다. 


10장 그림의 투자가치를 알았던 시인 컬렉터 - 이병연


11장 조선의 메디치가 - 안동 김씨


벌열 가문들의 예술후원 활동은 한양의 급속한 도시화와 관련 있다. 한양은 17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하루하루 세련되어지고 번창했다. 서울과 그 근교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던 이들 벌열 가문, 즉 경화사족의 자제들은 한양의 도시 문화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미술과 문학도 그렇게 그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런데 이 당시 경화사족들의 귀족 문화가 흥미롭다. 세속의 성공에서도 정점에 서 있던 그들은 은일자적한 삶까지 추구했던 것이다. "도시 속의 은거", 이 모순된 조합의 삶은 명나라로부터 건너온 수입 문화였다. 조선후기, 탈속적인 문인 문화의 파급과 함께 퍼진 서화 애호와 완상 풍조의 초기 중심지는 인왕산 아래 북리 일대에 세거해 살던 집권층 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여기서 오랫동안 세거했던 김상용과 김상헌, 김수증·수항 형제를 거쳐 김창집 형제들, 김조순 등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집안이 그 핵이었다 안동 김씨는 점점 그 세를 더하며 19세기 무렵에는 중인 말단 관리층에까지 확산된 서화 완상 문화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18세기를 풍미한 시단의 진경시 운동과 화단의 진경산수 등 새로운 문인 문화를 일으키면서 최대의 예술 후원 가문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조선후기 우리 회화에 나타나 새로운 현상은 겸재 저언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다. 조선은 중기까지만 해도 중국화의 영향을 깉이 받아 산수를 그려도 이 땅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수화를 모사한 관념산수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뒤엎고 우리나라 산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자며 등장한 전위 미술이 진경산수(혹은 실경산수)였다. 그 진경산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서막을 연 것이 안동 김씨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 그는 서예에 두각을 나타냈고 지식인 사회에서 대유행했던 금석문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동생 수항이 스승 송시열과 함께 유배에 처해지자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화천에 들어간 것이다. 은둔의 삶 속에서 멋을 추구했던 그는 주자의 행적을 모방한다. 그곳을 곡운이라 부르고 경치 좋은 아홉 곳을 평양 출신 문인화가 조세걸에게 그리게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곡운구곡도]이다.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중은 화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 지도했다. 거울에 반사되듯 사실적으로 그리게 했던 것이다.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 이것이야말로 진경산수가 갖는 사실정신의 핵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진경산수의 뿌리는 노론이라는 일부 시각이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제3부 조선후기를 뒤흔든 중인 컬렉터들


12장 중인 컬렉터 시대를 열다 - 김광국


김광국의 부의 원천은 의관을 하면서 쌓은 재물이었다. 당시 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등 인기 화가의 작품은 300냥까지 매겨졌다. 남산 기슭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도 웬만큼 재력이 받쳐주지 않고서는 서화 컬렉션은 엄두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13장 건륭 황제와 나란히 수장인을 찍다  - 안기


14장 중인은 중인 그림이 좋다네 - 라기


상업과 더불어 경제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미술 향유 계층이 부상했다. 바로 중인 계층이다. 그들은 잡과시험을 거쳐 의관(의사), 역관(통역관), 산시(회계사), 천문관, 율사(법무사) 등의 전문기술직에 종사하거나 경아전 서리 등 문인 관료체제의 말단직에서 일하는 비양반 계층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습화의 길을 걸으며 하나의 계층으로 부상한 이들은 문필을 다루는 직업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재력까지 갖추면서 조선후기가 되면 양반들이 누리던 세계로 문을 밀고 성큼 들어선다. '지식'을 갖추고 '부자'가 된 그들은 사대부처럼 살고 싶어했다. 자신들을 '여항지사(呂巷之士)', 소유(小儒)'라고 불렀다. 사대부를 뜻하는 사()자와 유(儒)자를 붙여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애썼던 이들의 몸부림은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기도 했다. 서울에 사는 양반 가문인 경화사족들이 누리던 도시 문화는 중인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15장 그는 왜 [세한도]의 주인공이 되었나 - 이상적


16장 부친의 방에서 탄생한 서화의 기억 - 오세창


제4부 조선시대 그림 문화 속으로


17장 그림만 보면 50점, 제발도 같이 봐야


제발은 동양의 회화가 갖는 독특한 특성이다. 문인화에서 제발(題跋) 문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시서화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문인화는 무엇보다 시의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제발은 서화 등에 쓰는 제사와 발문을 가리킨다. 엄격히 화폭의 앞쪽에 쓰는 글을 제, 제사라고 하고 뒤에 쓰는 글을 발, 또는 발문으로 구분하지만, 통칭 제발이라고 한다 제발은 화가가 제목 정도만 간단히 쓰기도 하고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설명이나 당시의 기분 등을 적는 것이다. 혹은 감상자가 그림에 대한 감상과 평을 쓰기도 한다. 즉 제발을 쓰는 사람은 크게 화가와 감상자로 나눌 수 있다. 제발 문화가 생긴 것은 중국의 원나라 이후다. 제발 문화가 원나라 시기부터 본격화된 것은 문인화가 이때부터 태동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제발은 갈수록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고, 명·청대에는 제발이 1000자 이상 되는 긴 작품도 생겨나는 등 화면 안에서도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다. 또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이 제발을 써서 소장가가 바뀔 때마다 제발이 더해졌다. 문인화가 여백의 미를 중시한 것도 제발 문화 활성화에 일조했다. 이 때문에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글씨부터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제발을 두는 위치와 구성도 중요하다. 어디에 놓는가에 따라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그림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발의 맛은 그림에 시적인 맛, 즉 시의를 더한다는 데에 있다. 화가가 그림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화의를 글로 추가 설명하거나 시적 감흥을 표현할 수 있다. 혹은 그림을 감상하는 자들이 그 느낌을 휘갈기기도 한다. 때로는 그림을 그린 배경을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18장 그림 속 그 많은 인장은 누구의 것일까


서양화와 동양화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제발이 있다. 그리고 인장을 꼽을 수 있다. 서양화에서 작가가 이니셜 등을 붓으로 썼던 서명이 있다면, 동양화에서는 그림을 그린 날짜와 이름 등을 쓴 관서와 함께 인장이 하나 더 있다. 인장은 전간이라고도 부른다. 동양화의 인장은 서양화의 서명처럼 작품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기도 하다. 동양화에는 서양화에 없는 또다른 풍속이 있다. 서양화에서 컬렉터가 자신의 표식을 그림 위에 남긴 것을 본 일은 드물 것이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작가뿐만 아니라 수장가나 감상자들도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인장은 새기는 방식에 따라 '백문인(글씨가 희게 나타나는 음각)과 '주문인(글씨가 붉게 나타나는 양각)'으로 나뉜다. 이 둘을 합친 것은 '주백상간인(음각과 양각의 혼합)이라 불렀다. 주로 성과 이름(성명인)은 글씨가 희게 보이는 백문으로, 아호(아호인) 등은 글씨가 붉게 나오는 주문으로 새겼다. 성명인과 아호인 외에 '유인'이 있다. 인장이 지닌 멋의 극치는 바로 이 유인에 있다. 유인은 평소 좋아하는 짧은 글귀나 그림에 어울리는 글귀 혹은 좌우명을 새긴 것이다. 


19장 그림 완상, 벗과 함께하는 집단 문화


조선시대, 완상은 집단 행위였다. 산수화 한 점을 매개로 너와 내가 만나고, 생각을 나누고, 그림의 진위를 논하는 가운데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일이었다. 


20장 조선시대, 그림 값은 얼마였을까


서화 수장 문화가 분격화되지 않았던 조선초기, 화공들에 대한 사례는 크지 않았던 듯하다. 회화 제작을 예술이 아니라 기술로 보고 천시했던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16세기 초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경상도 성주 지방의 양반 이문건이 지방 관청에 소속된 화원들에게 주문했던 그림 내역을 적은 기록을 보면 화가들에게 지불했던 사례는 형편없었다. 족자, 병풍, 매 그림 등을 주문하면서 그가 화공들에게 준 건 쌀, 소금, 휴지, 간장 등 생필품 약간이었다. 지방 관청 소속의 이름 없는 화가들이기는 하지만 심부름 값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수준이다. 양반에게는 또다른 방식으로 사례했다. 당시 초서로 유명했던 황기로의 경우 그의 초서작품 몇 점을 얻기 위해서는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글씨를 부탁하는 방법을 썼다. 물질적인 거래를 부끄럽게 여긴 유교 문화 탓이다. 함께 장기를 두면서 식사를 대접하는, 이를테면 인적 네트워크의 제공이 그림 값에 대한 사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8ㅔ기 이후 확 달라진다. 상공업가 함께 화폐경제가 발달하는 한편, 서울의 명문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화 완상 풍조가 신흥 부자로 부상한 중인층으로까지 확산되면서 금전으로 값을 지불하는 문화가 정착되어갔던 것이다. 또 그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집단 주문 제작 시스템까지 구축되기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림의 상거래는 활기 있게 이뤄졌던 듯하다. 조선후기 여항 문인화가 조희룡이 쓴 [호산외기]에는 누군가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주문하면서 3000전을 제시하자 이에 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상평통보 1개는 1푼,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다. 따라서 3000전은 300냥이다. 18세기 쌀 1섬의 평균 시세가 5냔이었으니 300냥은 쌀 60섬에 해당한다. 요즘은 쌀값으로 단순 비교하면 300냥은 약 2.600만 원이다. 1섬은 144kg이다. 이를 20kg짜리 쌀1포 값을 6만원 정도로 계산한 것이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와 같은 동네인 북리에 살아 겸재의 그림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가 정선이 그린 [금강첩]을 어느 집에 팔았는데, 은화 30냥을 받았다고 한다. 또 관아재 조영석은 정선이 1733년 8월 하양현감으로 부임해가던 해 남긴 기록에서 겸재의 그림 값으로 3000전을 언급하고 있다. 문생이라는 사람이 3000전으로 정선의 화권을 샀다는 것이다. 그 3000전은 논밭 몇 마지기를 사들일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10여 년 뒤인 1742년, 송문흠과 신소가 화가 이인상을 위해 남산 기슭에 작은 집을 마련해주면서 치렀던 돈이 3000전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림 소장은 웬만한 양반들도 엄두를 내기 힘들었떤 부자들의 취미였음을 알 수 있다. 서화 완상 문화가 대유행을 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에도 경화세족들이나 누릴 수 있는 고급한 문화였다. 서화 완상 유행이 중인층으로 퍼져갔을 때에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역관, 의관 등 아주 부유한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명문가마저도 서화에 빠지면 가산을 탕진하기 일쑤였다. 부자의 문화는 닮고 싶은 법이다. 19세기로 가면 경아전 서리의 집까지 그림으로 채워졋다면 조선후기인 문신인 신위는 개탄했지만 서민들의 수장 욕구를 맏을 수는 없었다.  


21장 조선시대에도 위작이 판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