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장 르네상스를 최초로 열었던 용기 있는 두 명의 이단자
르네상스 시대를 형성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앞 시대와의 단절 의지였다.
고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최초의 인문주의자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 페트라르카는 모범이 될 만한 행동양식이 좀처럼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도덕교육의 규범은 고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전을 공부하고 그 문체를 모방하며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처럼 될 수 있고 결국 그들이 성취한 덕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의 약 1000여 년 동안의 가르침을 외면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페트라르카는 고대 문화의 부활을 선언했고 고대 이후의 기간, 즉 그 사이에 있었던 단지 두 시기, 곧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만 나누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역사를 3등분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의 길을 열었고 실제로 르네상스의 개념을 정초했다. 고전에서 실마리를 찾은 이와 같은 새로운 도덕적 세계에는 자연에 대한 애착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언제나 정신적인 것에 고착되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으며 신이 창조한 가시적인 것 또한 경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교황과 맞선 시골뜨기 출신 종교개혁가 - 얀 후스
: 혹독한 희생을 대가로 치렀지만 고독한 이단자 후스는 전권을 가진 교회로부터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의 양보를 받아 냈다. 오늘날에는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준 것이었다. 이것은 교황의 견해나 형식에 사로잡힌 전통보다 성서가 우위에 있음을 입증한 것이었고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불평등을 완화시켰다. 후스가 획기적으로 공헌한 바 있는 권력자와 개인 간의 갈등 속에서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되었다.
2장 사회적 엘리트로 우뚝 선 예술가들
장인 신분에서 귀족 지위에까지 오른 베네치아 최고의 초상화가 - 베첼리오 티치아노
: 화가를 새롭게 존경하게 된 연원은 바사리가 천재라고 불렀던 자질에 있었다. 천재(genius)의 어원은 세속적인 일에 끼치는 신성한 영향(divine influence)이라는 뜻의 라틴 어로 창조성이라는 특별한 영감을 의미했다. 이 말은 토스카나 인들과 같은 특정 집단의 특징을 규정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어 경이와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개인을 일컫는 데도 사용되었다. 1500년 무렵 문화적인 인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스트일을 일구어 낸 피렌체파의 영향가 그들이 펼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미학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밖에서 가장 화려한 상찬을 받곤 했던 화가들은 티치아노를 비롯한 베네치아파들이다. 후원자들은 베네치아 출신 화가들의 그림이 이상적인 것보다는 실제에 가까운 사람과 장소를 보여 주기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다. 피렌체와 로마 등지에서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제로파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지만 독일이나 스페인에서는 티치아노가 최고의 미술가였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미술가 - 알브레히트 뒤러
: 뒤러와 아그네스는 후원자의 도움이 없이도 일반 대중만 상대하면서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 주었다. 뒤러가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은 7,000굴덴이었다. 가난한 가족이 1년에 15굴덴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니 엄청난 거금이었다.
3장 인쇄술의 발전으로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가 열리다
16세기 초반까지 지식인층의 생활은 인문주의로 인해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가령 유럽의 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방법봐 목표는 주로 고전 연구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교과 과정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신앙심 깊은 이단자들은 교육을 통해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한 신앙생활의 증진을 위해 학교 내에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더구나 이들 운동은 르네상스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인 인쇄술로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다.
걸인에서 인쇄업자로 성공한 스위스 바젤의 - 토마스 플라터
: 책을 탐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쇄술의 발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전의 교육은 구하기도 힘든 필사본을 교사가 설명하거나 구술하는 것에 주로 의존하면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필사하거나 따라 읽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랬다. 그러나 이제는 표준화된 판형의 교본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러한 책 중에서 일부는 성서처럼 싼값에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책읽기를 몹시 갈망하는 이에게 학문의 세계는 그 문턱이 매우 낮아진 셈이다.
4장 시대에 대한 대응과 응전
르네상스가 초래한 16세기의 급속한 변화는 종교개혁이 가속화되면서 폭면뿐만 아니라 재평가를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개혁을 실행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 아빌라의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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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맞선 반체제 교양인 - 미셀 드 몽테뉴
: 프랑스의 남서부 지역과 스페인 북동부 지역은 문화의 접경지대로, 예로부터 유럽의 국경을 형성한 곳이다. 이곳의 바스크 인들과 가스코뉴 인, 그리고 카탈루냐 인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살고 있으며, 두 면에 접한 바다로 인해 피레네 산맥이라는 거대한 장벽에도 불구하고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사는 것이 가능했다. 오늘날까지 이곳 토착인들의 독립심은 유명하다. 17세기 중반 유럽 전역에서 중앙 정부에 대항한 반란이 분출했을 때 보르도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두 도시가 가장 격렬하고 급진적으로 왕권에 대항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가스코류 인들과 카탈루냐 인들인 언제나 서로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더구나 프랑스의 가스코뉴 지방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은 각각 영국과 이탈리아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같은 켈트 족 출신으로서 바스크 지방이 콘월 및 웨일스 지방과 각별했던 것은 당연하다. 몽테뉴에게 회의주의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도덕적 진리를 발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회의주의는 기존의 모든 정설이나 권위에 대해 심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5장 시대를 앞서가는 통치력으로 폴리티크를 구현하다
더 높은 권위에 대한 충성(믿음)을 주장하는(즉 교황과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권위가 손상된 왕실로부터 어떠한 도피나 완전한 타협도 불가능했다. 이들의 요구는 정치적/사회적
위계질서가 다시 작동할 수 있고 분열과 싸움으로 어지러운 유럽이 안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외형상의 질서라도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왕국을 지켜 낸 메디치 가의 - 카트린 드메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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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지리적 발견과 자연의 탐구
"영국에서 다시 저런 머리가 나올 순 없지." 만능인 -월터 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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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이룬 - 갈리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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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여성이 직업 화가로 탄생하다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르네상스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고대 로마는 정치/교육/문학/예술에서 필수적인 모델이었다.
8장 화약과 무기의 발명으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다
화약이 발명되어 전쟁의 비용이나 파괴력이 증가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특성의 하나다. 화약은 그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제기하여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제 보잘것없는 권총 하나로 간단하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예전에 전쟁터에서의 용맹으로 인해서 지위가 격상된 귀족들은 전쟁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 성공적인 군사 전략가 -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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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을 예고하다
유럽의 경제적 혁명을 주도한 신흥 자본가 - 하멜른의 글뤼켈
: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도처에 흩어져 사는 방랑자들의 한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유대 인이었다. 1400년대에 유대 인들은 스페인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다른 유럽 지역의 유대 인들은 격리된 장소에서 집단적인 형태로 간헐적으로 눈에 띄었으나(예를 들면 프라하) 유독 이탈리아에는 상당수의 유대 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00년경에는 그 양상이 매우 달랐다. 이제 그들이 최대로 무리를 형성한 곳은 폴란드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페일(Pale)이라는 독특한 장소에 거주했는데, 이곳에는 이방인들, 즉 기독교도와의 접촉이 제한되었다. 이탈리아의 공동체는 주목할 만 했지만 그 구성원들은 이제 게토에서 생활했다. 한편 스페인에서 유대교는 콘베르소스(conversos : 그 땅에 머무르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해야 했던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서만 떠올릴 수 있는 추억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자신들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두 나라, 즉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새롭게 정착하게 된 유대 인들은 상대적으로 열린 사회 속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독일어원 지역 곳곳에서 유대 인 지역이 생격난 것은 르네상스 직전에 대대적으로 강제 이주가 실시된 다음이었다. 실제로 유대 인 지역이 크게 증가한 것은 17세기 중반의 인구 성장에 따른 일반적인 결과였다. 가른 곳에서는 박해에 시달렸다. 폴란드 왕국의 광활한 땅인 우크라이나에서의 추방과 잇따른 내전의 원인이 된 끔찍한 학살은 수천 명의 유대 인들을 서부로 향하도록 내몰았다. 계속적인 이동만이 그들의 운명이었는데, 1700년에도 그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 여건이 좋아도 유대인들은 심각한 제약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유대 인에게는 가장 미천한 신분을 가진 기독교도조차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르 ㄹ지켜 줄 수 있는 보호 체제가 없었다. 가령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대 인은 땅을 소유할 수 없었고 기본적인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10장 영국의 혁명 시대, 르네상스 마지막 드라마의 주인공들
1640년대와 1650년대 영국을 휩쓸었던 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르네상스라는 드라마가 보여 준 마지막 주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으로 인해 과거와 현재가 서로 경합을 벌였고 변화의 담지자들은 정부와 교회 및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와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도 몇몇 중요한 논쟁, 즉 세계가 개혁될 필요가 있는가 또는 종교적 권위가 도전받아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여전히 페트라카와 후스 시대의 이념을 희미하게나마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모호해졌다. 르네상스와 관련된 일련의 변화들은 사회 속으로 통합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혼란의 시대, 신의 섭리를 따른 성직자 - 랠프 조셀린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 이전의 수세기 동안에도 그러했듯이 성직자가 없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직자는 교구민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일반 민중처럼 가난했고 그들보다 교양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세상데 대해 두려움이 없거나 학식이 높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극소수라 하더라도, 성직자는 교육을 통해서 보다 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성직자로서 품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성직자를 특별하게 여길 이유는 있었으니, 즉 마을의 한 사람으로서 힘들 때 위안을 주는 존재이자 인간을 통제하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힘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이며, 누구에세나 조언을 주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의식을 맡아 거행하는 자였다. 르네상스는 중요한 변화의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분쟁의 압박 속에서 서로 상반된 교리는 교육과 영적인 필요성에 대한 자의식적 이해를 새롭게 강조하여 성직자들은 진정한 종교적 헌신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사제를 비롯한 목사와 전도사는 예전보다 교리와 신조를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러한 과정을 신앙이 그리 독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진정한 기독교 신봉자로 최초로 전환시킨 유럽의 기독료화라고 설명했다. 랠프 조셀린이 살았던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놓고 본다면 랠프 조셀린은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모든 은혜를 신에게 돌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경제적인 이득과 손해를 지속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랠프 조셀린은 앞선 시대의 여느 성직자나 대부분의 지주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신의 섭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식했던 성직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기장은 그의 일생 동안의 일이었던 세례와 설교, 결혼과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자신의 직무였던 소소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랠프 조셀린은 신의 은총과 자비로움(충실한 신도라면 보살핌을 받을수 있으리라는것)에 대한 확신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에 대해서 해박했던 것만큼 당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면밀하게 관찰했다.
개인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추구한 선동가 - 존 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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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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