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한국학연구원,글항아리,2010,(110701).

바람과 술 2011. 7. 1. 11:48

머리글 


1장 군사부일체 사회의 버팀목, 그러나 불우한 삶 
- 조선조 교사와 훈장의 삶·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조선조에서 교직만큼 명복과 실상이 확연하게 차이를 드러낸 직종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교직으로는 관학에 파견되었던 교수관, 훈도, 교도 등의 교관이 있었고, 사학에는 학장이나 훈장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이들이 실제로 행했던 역할은 비록 달랐을지라도 교직이라는 직분은 명분상, 혹은 외견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가도 유능한 교사를 확보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각 항교에 파견된 교수관은 종6품의 문과직으로서, 향촌사회에서는 매우 높은 직급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딴판이었다. 현실 속의 교관은 많은 사람이 기피하는 춥고 배고픈 직임이었다. 특히 마을 단위로 설립되었던 서당의 훈장은 그 운영의 영세성으로 인해 피폐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더욱이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몰락한 양반들이 대거 서당 훈장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설경'이라고 자조하였다. '설경'이란 곧 '혀로 밭갈이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조선조에서 시행한 수많은 교육정책은 대부분 이 양자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관학을 중심으로 한 이런 육성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선 관료로서의 교관직은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이 아닌 누구나 기피하는 한직이며, 소외된 직임이었다. 나중에는 생원, 진사들마저 이를 꺼려 전국의 향교 교관직이 공동화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교관직은 천한 직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교육은 그나마 훌륭한 학장과 훈장들이 있었던 서원과 서당 같은 사학 기관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여싸. 


스승을 책무를 거론할 때에는 당나라 한유의 사설이 인용된다. 그에 의하면 스승은 도를 전하고, 업을 전하며,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유학에서 유는 본시 교육의 의미를 갖는다. '유'는 물이 차츰차츰 스며든다는 뜻의 윤과 동의어로서, 점진적으로 지속적인 교육의 효과를 상징한다. 최상의 교사는 작위적인 가르침 없이 물 스며들 듯이 인격적인 감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조선 초 조정에서 구상한 가장 중요한 교육정책은 '일읍일교'의 원칙에 의해 외방 각지에 항교를 시급하게 완비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성균관에서는 국자좨수로 학사를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고, 성균관의 분교 학당은 오로지 가르치고 훈육하는 것만을 위임하여 다른 사무는 겸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관학의 교육 여건이 너무나 열악했다는 점이다. 특히 성균관이나 오부 학당에 근무하는 훈장이나 사장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너무 뒤떨어졌다. 조선조에서 교관직이 매력적이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직책이 관료로서의 출세를 보장해주는 청요직이 되지 못하는 한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교 교수관은 문신 좌천자의 유배직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했고, 임명되어도 사퇴하는 것이 당대의 풍조였다. 이에 따라 교관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위치도 점차 하락해갔다. 이에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향교의 교관직은 빈천하고 무식한 인물들로 충당되는 실정이었다. 이제 교관직은 오히려 수치스러 직책으로 변하였다.


관학의 부진과 교관직의 천역화가 조선전기에서부터 진행된 것에 비한다면, 사학 학장의 능력과 권위는 비교적 꾸준히 존중되었다. 교관의 문제로 인해 향촌사회에서는 '사학'의 현실적 필요성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관학의 교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16세기에 본격적으로 향촌사횡 출현하기 시작한 서당은 높은 수준의 학문을 강론하는 다분히 폐쇄적인 형태의 강학 공간으로, 일종의 도학적 서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장하는 사족들의 이념적 결집체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서원의 초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당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고, 당헌을 정하고 별도로 사장을 두어 교육의 질을 높였으며, 성당답을 두어서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임진·병자 양난 후의 사학은 중앙 정계의 정치적 기류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서당은 향촌민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로부터도 훌륭한 교화 기구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훈장을 향촌 통제의 한 수단으로 운용하고자 한 것이다. 사학의 훈장도 국가 단위에서 관리하고 운영한 것이다. 심지어는 각 면에 할당되는 훈장의 인원 규정, 훈장의 선출 방법, 가르치는 훈회법, 시험 규칙 및 그 결과에 대한 상벌 규정, 훈장에 대한 상벌규정 등을 수록하여 사실상 훈장에 대한 감독 기능을 수령권 아래에 두었다. 이처럼 수령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수령들은 면 단위로 면 훈장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한 향촌 교화는 이미 임란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실시되었지만, 17세기 '향학사목'의 반포에 힘입어 촉진되었다. 조선말기에 오면 서원과 사족은 면 훈장에 대한 그 운영 주체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수려원 아래에 예속된 향임의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면 훈장의 가장 고유한 가능이었던 교화 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부세 운영을 보조하는 면임적 성격만을 띠게 된다. 


17세기 말부터 일정한 생활 방도가 없는 몰락 지식인이 증가하고 이들이 직업적인 고용 훈장으로 탈바꿈하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일정한 수준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몰락 양반이거나 중인 신부닌 훈장들은 대부분 당대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저항감을 품고 있었다. 그 결과가 훈장들의 민란 참여와 모역사전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 들어 중인층 출신의 지식인들은 직업적인 훈장으로 생계를 영위하면서 새로운 교육 형태를 만들어냈다. 우선 이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전문적인 학관 경영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도시 상공인을 포함한 하층민들이 이룬 경제적인 성장은 그들 스스로 교육 시설을 확보하고 교육 기회의 획득을 요구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운영되는 서당의 경우 대개 훈당의 보수는 지방 유지가 단독으로 지불하기도 하고 문중이나 혹은 서당의 학전에서 해결했다. 또한 현금 지불보다는 훈장의 양식이나 의복 등을 계절맏 제공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러한 비영리적 형태의 서당 경영으로부터 차츰 영리 위주의 학관 경영이 나타나고 직업적 고용 훈장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전통적인 교사관의 변질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한말 개화의 물결은 교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이 시기의 교사에게는 구시대의 지적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서구적인 신사조를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갑오경장 이후 교육제도의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나타난다. 특히 교사양성 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부가 '교육조서'에 나타난 국민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사양성 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를 1895년에 공포하고 교동에 신학교를 설립했다는 점이다. 또한 새로운 형식의 사범학교의 교육 요지를 밝히면서 기존의 유학 이념을 쓸어내고, '교육입국조서'에서 설정한 덕육·체육·지육의 계발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정한다. 사범학교 교과목의 변화는 교사 양성의 전면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1906년에는 사범학교령 시행규칙을 발표하면서 졸업생의 의무적인 복무 기간을 산정하고 있어 교직이 이제 완전한 하나의 계약관계로 정착된다. 이제 차츰 교사는 학생과 삶의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인사로서의 구도자가 아니라, 법적 체계 속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해주는 경사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근대적 교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2장 왕의 허락을 얻어 하늘을 관찰하다 

- 조선의 천문 역산가·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천문학은 관상감이라는 기관의 세 부서 중 하나를 이르는 말이었다. 천문학은 천문과 역을, 지리학은 풍수를, 그리고 명과학은 정부 내 각종 행사 및 의례를 집행할 길한 날짜를 잡는 일을 담당하는 전문 부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천문학은 관상감 천문학 부서에서 행하던 하늘에 대한 전문 지식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크게 '천문'과 '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문과 역(역법 또는 역산)은 둘 다 하늘에 대한 지식이었지만 그 성격은 많이 달랐다. 요즘 말로 억지 풀이하면 천문은 점성술에 가깝고, 역은 수리천문학에 가깝다. 천문을 읽는 매뉴얼은 [천문지]이다. 가장 오래된 천문지는 기원전 100년 무렵 사마천이 쓴 [사기]의 [천관서]이다. [천관서]의 오관 체제는 [한서][천문지]와 [진서][천문지]를 거쳐 수나라 때 [보천가]에서 238좌1464개의 별이 '3원28수'체제로 체계화 되어 이후 동아시아 천문 체제의 전형이 되었다. 해독하는 능력보다는 해독할 수 있는 권한이 중요했다. 해독할 능력이 있다고 아무나 하늘의 메시지를 읽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문은 철저하게 왕을 위해, 왕에 의해 독점되었다. 조선시대 천문학을 왕의 학문, 즉 제왕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자리를 개인의 운세와 연결해 점을 치는 서양의 점성술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천문지]와 함께 정통 역사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으로 [역지]가 있다. 당대의 역법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일월오성의 운행과 궤도 등에 대한 천문학 상수와 계산치들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천문이 지극히 정성적인 해석에 의존하는데 비해 역은 철저하게 산술적인 계산에 기반했다. 이러한 역법은 천문화 함께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하느릐 메시지를 읽는 천문이 왕에 의해 철저하게 독점된 제왕학이듯이, 하늘의 운행을 보고 정확한 때를 알려주는 역법 역시 천명을 받은 제왕 된 자의 독점적 권한이지 의무였다. 천문역산가란 이처럼 왕의 명을 받아 그를 대신해서 천문을 읽고, 일월오성의 운행을 계산해 역서를 간행
·반포하는 일을 전담하는 정부 내 전문가였다. 왕으로부터 위임을 받지 않은 자가 천문을 공부하고 읽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조선의 관상감은 고려의 서운관이 세조 12년(1466)에 관상감으로 확대·개편되어 1894년 근대적인 기상 관측소인 '관상소' 설치로 폐지될 때까지 줄곧 조선 천문역산가들의 중심 활동 무대였다. 관상감은 의례와 제도를 주관하는 예조 소속이었고, 천문학·지리학·명과학의 세 부서와 부속 기관인 금루청으로 구성되었다. 금루청이란 물시계를 관리하고 시각을 알려주는 업무를 마튼 실무 기관이었다. 관상감 직제를 보면 소속 관원이 30여 명에 불과한 듯하다. 그러나 이 직제는 녹봉을 받으면서 관상감을 대표하는 법적 관직만을 나열한 것일 뿐 실제 관상감에는 지위에 따라 부여받는, 업무가 다른 여러 위계적 관원 집단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천문학 부서에만 가장 상위의 삼력관부터 수술관, 추보관, 별선관, 총민 그리고 제일 하위의 전함 집단까지 130여 명이 있었다. 


관상감 천문학 부서 관원들이 일상적으로 맡았던 업무 중 중요한 일은 역서 편찬과 간행, 천변재이의 관측과 보고, 그 외 일월식의 예보와 구식례 등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매년 정기적으로 수행했던 역서 편찬과 간행일 것이다.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편찬·간행하는 역서는 크게 나누어 일과력과 칠정력이 있었다. 인쇄된 역서는 왕과 세자에게 먼저 바치고, 그 후 궁내 부서들과 고위층 관료들 그리고 전국의 각 관아에 골고루 배포했으며, 관상감에 보관용으로도 두었다. 조선초기에는 5000여 부를 간행한 것이 전부로 일반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간행 부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관원들 중에는 사적으로 역서를 인쇄·판매해 이득을 챙기는 이들도 꽤 있었던 듯하다. 그로 인해 역서 값이 폭락해 문제가 생긴 것으로 미루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전기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서의 편찬과 간행·배포는 왕의 독점적 권한으로서 모든 역서는 왕의 하사품이어야 했다. 사적인 간행은 왕의 절대적 권한을 침해하는 역모나 다름없었다. 하늘 아래 지존인 왕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여겨지던 역서가 관상감 관원이 자의로 인쇄해 공공연하게 거래하고, 그 이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다니! 세상이 달라져도 엄청 달라졌다. 이제 천문과 역은 왕으 ㅣ독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듯 보인다. 


조선전기의 천문관원들은 고려시대 잡학인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전문가로서의 능력도 모자랄 뿐 아니라 사회적 대우 역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조선 초 기피 직업이었던 천문역산가를 후기를 가면서 전문가 집단으로 성장했다. 전문가로서의 조선후기 천문역산가들은 천문학의 발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달라진 모습은 중인층 천문역산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대부들에게도 달라진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전기에도 적지 않은 사대부 천문역산가들이 있었다. 당시 중인층 천문 관원들은 잡학인으로서 어려운 프로젝트를 수행할 지적인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문인 관료들을 훈련시켜 천문역산가로 키웠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잡학겸수관' 제도이다. 물론 대부분의 문인 관료들은 이를 기피했고, 그러한 현실을 감안해 잡학겸수관 훈련을 마친 문인 관료는 그에 상응하는 특혜를 주었다. 이러한 잡학겸수관 제도는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라진다. 사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상감의 중인층 천문역산가들은 이제 더 이상 지적으로 무능한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인 사대부들도 달라졌다. 천문역산이 재미있어서, 또 가치 있는 지식이라고 믿어서 천문역산을 공부하는 사대부들이 대거 출현했다. 경전 공부 외의 잡학 지식이 사대부로서 공부할 가치가 있다는 학풍이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 학계에서 싹튼 것이다. 조선후기 사대부 천문역산 전문가들은 정부 안팎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관료로서 정부 내 천문 사업을 맡아 하지도 못했지만 관료계 바깥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사대부도 적지 않았다. 


3장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험난한 길 
- 명의와 속의俗醫의 경계에 선 조선의 의원들·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조선중기 관료사회에서 의관을 비롯한 잡관의 위치는 조선 초에 확립된 큰 원칙, 곧 "문
·문관보다 하등"이라는 틀에 벗어나지 못했다. 요직을 차지하는 못하고 최고 관직이 제한되어 있었던 까닭에 과거 지방생이 의학에 종사하는 것을 꺼리는 현상이 종종 일어났고, 16세기 후반부터는 양반 출신인 서얼들의 직업으로 전락했다. 의관은 문관이나 무관보다 낮은 잡관에 속했지만, 잡관 중에서는 통역 일을 맡아본 역관이나 풍수지리와 점복을 치는 직책, 법률을 맡은 율과 출신들보다는 높은 위치에 높였다. 의술은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의학생도가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길은 험난했다. 의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경전과 역사서는 필수로 습득해야 했고, 공부를 시작하면 진맥학과 침구학은 기본이고 의학 기초이론, 내과학, 본초학, 방제학 등을 배웠다. 의관이 되는 시험으로는 일종의 승진 고과시험인 취재와 정식 시험인 과거, 즉 의과가 있었다. 취재는 혜민서와 전의감에 소속된 의학 생도를 대상으로 했다. 의과는 전의감에서 치렀는데 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식년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베풀어지는 증광시, 경사가 겹쳤을 때 베풀어지는 대증광시가 있었으며, 모두 초시와 복시 두 차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의과시험은 취재와 달리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전의감이나 혜민서의 생도와 의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의학을 공부한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여성 전문직으로는 의녀제도가 유일했다. 이 제도는 유고 국가를 표방한 조선의 기틀이 닦이던 때인 태종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조선처럼 높은 신분계급의 여성 환자의 진료를 위해 의녀와 같은 제도를 두어 500년가량 지속적으로 운영한 사례는 없다.


조선후기에 병을 고치는 활동을 했던 전문가 집단으로는 세 부류가 확인된다. 첫째는 의학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의원 집단이고, 둘째는 점을 쳐서 병을 알아내고 독경으로 병을 치료하는 판수 집단이며, 셋째는 굿을 위주로 하는 무당 집단이다. 그러므로 의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들의 경쟁자는 판수 집단과 무당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무당의 점복과 치병 행위는 판수의 그것과 구별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들도 무슨 병인가를 점치고 독경이나 푸닥거리를 통해 치병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 가지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무당이 두창이나 역병 등 불치·난치병을 위한 굿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런 굿에는 왕실이나 고관대작도 별 예외가 아니없다는 점이며, 셋째는 그런 굿은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맹인 판수의 점이 값싼 경채를 들여 단지 무슨 병인가를 파악하여 대처법을 찾는 차원의 것이었다면, 무당의 굿은 이미 알고 있는 두신 같은 역귀를 쫓는 강력한 치병 행위였다.


조선후기 의원의 경쟁을 살필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의원이 어떻게 의관이 되며, 또 의관이 되어서는 어떻게 관직이 높아져가는가 하는 점이다. 의관이 관에서 받는 보수는 높은 편이 아니었을뿐더러 불안정하기까지 했다. 의관은 정직이 아닌 체아직이었기에 직전을 받지 못했고 재직 기간에 한해서만 녹봉을 받을 뿐이었다. 또한 자신의 품계보다 낮은 직품의 녹봉을 받았다. 나아가 체아직이었던 까닭에 포폄 때 성적이 계속 상을 받지 못하면 관직에서 물러나 3~6개월 이상을 건너뛰어야 다시 취재에 응할 수 있었으며, 쉬는 기간에는 녹봉을 받지 못했다. 이런 형편 때문에 대다수의 의관은 관에서 주는 녹봉으로만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사실 의관은 의술의 유능함을 보일 수 있는 일종의 국가 자격 같은 것이었고, 모든 의관은 자신이 맡은 공적인 일 외에 사적진료를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의관은 지방의 약재를 중앙에 올리는 일, 중국에서 약재를 사가지고 오는 일 등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길 여지가 많았다.


17~19세기의 기록을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의원의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가 여러 편 눈에 띈다. 뜻있는 의학자들은 이런 비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바람직한 의원 윤리를 제시해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후기의 의학자 황도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도연은 "의술은 인술"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황도연의 이 같은 인술 윤리가 19세기 후반 의원의 윤리로 잘 정착되어나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의원은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의술을 방임적으로 파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것을 제어할 국가적, 사회적 장치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18~19세기를 거치면서 의원 수가 증가했고, 지방에까지 의료가 확장되었으며, 약물 매매가 증가했다. 그런 가운데 의약인의 경쟁이 격화되었고 이익 추구는 노골화되었다. 아울러 수준 낮은 의약인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의료와 약 부분은 완전히 방임 상태였으며, 그 질을 관리할 아무런 제도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20년이 흐른 1896년 이후에야 당시 의료 분야에 산적해 있던 문제들에 대한 공론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1899년의 의학교 설립은교육과정을 국가에서 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900년의 [의사규칙]과 [약종상규칙], [약품순시규칙]은 의원과 약종상, 약품의 질을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었다. 대한제국기에 오늘날의 의료인 자격 제도의 근대적인 효시가 된다. 대한제국에서는 전 의약인을 의사, 약제사, 약종상 세 부류로 구분했다. 이는 진료, 처방 행위인 의술과 처방에 따른 조제, 투약 행위인 약무를 서로 구별한 것이며, 이들 의약 행위를 단순한 약상행위와 구별한 것이었다. 즉 의약의 분업을 현실화하고 의약이 상행위와 차별되는 활동임을 전제했던 것이다.   


4장 팔도를 뒤흔든 대중 스타, 달문의 삶 
- 광막한 천지를 떠돌던 조선의 광대·사진실 중앙대 음악극과 교수 

5장 배척과 존중의 위태로운 경계에 서다 
- 조선의 승려, 허응당 보우·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조선 왕조는 500년 동안 '유교는 숭상하고 불교는 억압한다'는 이념과 정책을 끝까지 견지한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불교 승려는 지배층으로부터 배척받는 국외자였다. 그러나 때로 유식한 승려는 유자와 더불어 한국의 중세 문화를 주도한 양대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존중받기도 했다. 즉 조선시대의 승려는 배척과 존중의 기로 위에 섰는데, 그것은 역사적 평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억불숭유책에도 불구하고 천 년 가까이 지배적인 문화로서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린 불교를 단시일에 제거할 수는 없었다. 유교는 지배적인 이념이었지만 종교로서는 한계가 있었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불교에서 종교적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유교 관료조차도 조정에서 불교억압책을 논의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불교 사찰을 찾는 현상이 빚어지곤 했다. 특히 궁중 여인들의 중심이 된 왕실 불교는 이 시기 불교 교단으로서는 생명의 끈이었다. 


6장 먹고사는 업으로 택하거나, 인격 수양의 방편으로 삼거나 
- 조선의 음악가들·송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조선의 음악가들은 그것을 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전문 직업인들과, 그에 준하는 실력과 자질을 갖췄지만 직업으로 삼지는 않은 음악가로 나뉜다. 전문 음악가들은 또다시 국가기관에 소속된 이들과 민간에서 활동하는 이들로 분류되었다. 전자에는 장악원 소속 전악 이하 악공, 악생, 관현맹인, 무동, 가동, 기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 군영 소속 취고수, 세악수 등이 있으며, 후자로는 광대, 풍류객, 율객, 가객 등(중간 단계)이 있었다. 


조선 왕실의 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음악인으로서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품계는 정6품인 전악이었다. 요즘의 음악감독에 비견할 만하다. 이들은 궁중 의례에서 연행되는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도록 악공과 악생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키여 할 의무를 졌다. 때론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기도 했다. 전악은 해외 출장도 갔다. 또 중국에서 가져온 악기를 연주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면 직접 출장을 가 연주 기법을 배워 돌아오기도 했고, 악기를 구입해오기도 했다. 악기를 만드는 데 적당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탐색하며 다니기도 했다. 전악에게 부과된 이 모든 일은 국가 음악을 총괄적으로 이끄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실력자만이 전악의 자리를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왕실에서 '악'이 '예'와 함께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려주는 지표이기 하다. 왕실의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한 실질적인 전문 음악인은 악공과 악생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전공으로 하는 악기와 더불어 몇 개의 악기를 더 연주했다. 부전공으로 노래나 춤을 담당하기로 했다. 궁중의 각종 행사에서 정재를 추는 남자 어린아이를 무동이라 하고, 정재는 추는 여성은 여기라 한다. 관현맹인은 왕실의 여러 행사에서 주로 악기 반주를 맡았다. 


조선시대 군영 악대 제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성립되어 취고수, 세악수, 내취의 취타악이 형성되었다. 왕실 음악을 관장한 장악원은 예조 소속이었던 반면, 왕실 밖의 군사 관련 음악을 주로 관장한 군영 악대는 병조에 소속되었다. 그 소속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장악원 소속과 군영 소속의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는 차이가 있었다. 군영 소속의 음악인들은 기본적인 군사 훈련에 참가하는 한편 군영, 관아의 행사, 또 민간의 각종 음악 수요에 부응하여 조선후기 음악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7장 조선시대 궁녀의 계보학 

- 궁궐 살림을 책임진 여성 일꾼들·홍순민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내명부란 첫째로는 남성 관료들에 대해 왕명을 받은 여성들이라는 뜻, 둘째로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궁궐 밖에 살면서 궐내에 들어와 왕비를 만나는 여성들인 외명부에 대해 궁궐 안에서 기거하며 활동하는 여성들이라는 뜻, 셋째로는 허드렛일을 한 신분이 낮은 여성들 가운데 왕명을 받아 일정한 등급에 오른 여성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내명부의 등급 체계는 각 품이 다시 정과 종으로 나뉘어 18계로 되어 있다. 품계의 구성으로만 보자면 일반 관원들과 같다. 하지만 일반 관원의 품계 체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고 별도의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 가장 상위의 빈 가운데 교명, 곧 임금의 명을 받은 이는 품계가 없다. 품계가 없다는 말은 임금이나 왕비처럼 품계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정 5품의상궁 이하의 궁인직에 해당된다. 이 말 속에는 그 이상은 후궁, 즉 정비는 아니지만 임금의 부인라는 듯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종4품까지는 임금의 부인으로서 시중을 받는 후궁들이요, 정5품 이하는 시중을 드는 궁인이라는 뜻이다.(세자궁 쪽으로 가면 종6품의 수규 이하가 궁인직이다.) 내명부는 얼핏 보기에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 하나의 체계로 통일되어 있는 듯하지만, 종4품과 정5품 사이에는 이처럼 함부로 넘기 어려운 경계선이 숨어 있다. 궁인은 일반적으로 궁녀라고 불렀다. 궁녀는 하나의 개념처럼 들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상궁과 시녀를 합쳐 부르는 것이다. 또 내인이란 말도 많이 쓰였는데, 이 말은 굳이 비교하자면 외인의 대칭으로 궁궐 안에서 기거하며 활동하는 여자라는 뜻이기에 그 가리키는 범위가 엄밀하지 않다. 내명부는 국가의 공식 영역인 부중에서 비껴나 국왕과 왕실의 궁중에 소속되어 있었다. 궁중의 주인 격인 왕실 가문은 하나의 가문이라는 점에서 여느 가문처럼 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만, 국가에서 재정적인 면을 비롯한 여러 지원과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공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말하자면 반공반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기관의 주요 구성원들, 곧 폼계를 갖고 있으면서 관료기구에 소속되어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문반과 무반의 정규 관원들은 국가에서 녹을 받았다. 국가를 위해 공적 임무를 수행하지만 정규 관원좁다 낮은 체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녹이 아닌 요를  받았다. 궁여는 녹과 요를 받는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궁궐에 기거하며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반대급부는 대부분 현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현물은 녹도 아니고 요도 아닌, 그들이 모시는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에 대한 진공에 부수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은 국가 관료기구의 공식 구성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실 구성원에게 사적이자 개인적으로 에속된 노비로서 그들의 공급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실에 물품을 조달·공급하는 여러 관서로부터 물품을 공급받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적 위상도 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반공반사의 불안정하고 모호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궁녀가 되는 각사의 하전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하전은 여러 관서에 소속된 하급 실무자이다. 국가 공공기관에 예속된 노비 가운데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전문적인 일을 맡아 수행하는 일꾼을 하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하전으로만 궁녀를 뽑아들인다는 것은 민간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일단 공공 영역에서 충원한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시비는 궁중과는 구별되는 공공의 영역, 부중에 소속된 존재이므로 이를 궁중으로 옮길 때는 국왕의 특별한 재가를 받도록 제한한 것이다. '양인의 딸'은 궁중도 부중도 아닌 사적인 민간 영역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이를 침범하지 못하게 각별히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법전에 강력히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갔다는 것은 역으로 이러한 현상이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장 목장木匠의 종류만 스물둘 
- 조선의 집 짓는 사람들·김왕직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 

설계도는 조선시대 관영 공사에서는 도화서에 소소되어 있는 화원이 그렸으며, 민간에서는 도편수가 그 역할을 맡았다. 주로 왕릉의 재실을 그릴 때는 평면도를 배치도에 사용했지만 일반 건물은 입면도를 써서 배치도를 그렸다. 입변배치도를 사용하는 서양 도면과는 구별되는 점이며, 목구조인 한
·중·일에서는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입면도를 사용하는 건물의 위계뿐 아니라 방향성이 있는 까닭에 외부 공간의 중심이 어디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 들어 나타났던 새로운 형태의 고용 인부인 모군은 각종 건축 일에서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비숙련 잡역부였다. 모군은 도성 주변에서 모집되면 경모군, 지방 군현에서 모집되면 향모군이라 불렀다. 경모군은 도심지에 사는 전문 노동자층이 주류를 이뤘던 반면, 향모군은 지방의 농부들이 농한기에 부업을 맡았던 까닭에 노동력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였다. 모군은 도감에서 한성부에 요청하여 모집했다. 모군을 모집할 때는 작업의 종류, 작업장의 위치, 품삯의 액수, 지급 방식 등을 미리 제시해 자유의지에 따라 지원하도록 했다. 모군들은 해가 져서야 작업을 파했기에 하절기와 동절기의 작업 시간의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동절기에는 작업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품삯이 깎이기도 했다. 장인과 고용 인부들의 관리는 18세기 말까지 영역부장이 맡았지만 정조연간의 문희묘 영건 공역부터는 패장이라는 직급을 새로 만들어 이들을 담당했다. 패장은 5일 간격으로 도총에게 인부들의 출결 상황을 보고해 인건비 지급의 기준이 되도록 했으며, 이들의 작업 진행을 살피는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했다. 또 패장들은 인부들의 근무 상태를 파악해 태만한 자는 곤장을 치거나 쫓아버릴 수 있었다. 이들은 현장의 최일선에서 직접 장인들을 부리는 말단 관리자이긴 해도 기술자였던 까닭에 시공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햇다. 장인들과 잡역직인 모군들은 품삯은 시대마다 달랐다. 17세기까지는 그 둘이 같았으나, 18세기부터는 모군의 봉급이 더 많았다. 기술을 겸비한 장인이 모군보다 적은 월급을 받았던 이유는 아직 장인들에 관에 예속되어 있었던 반면 모군들은 일찍 부역에서 벗어나 자유 고용 형태로 일했기 때문이다. 18세기 경모궁 개건 때부터는 쌀 대신 돈으로 월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화폐 경제의 활성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1789년 문희묘 영건 공사부터는 장인의 종류와 일의 경중에 따라 품삯을 달리 지급했으며, 이로써 모군에 비해 장인이 더 높은 삯을 받게 되었다. 또 지급 방식도 월급제에서 일한 날수에 따라 받는 일당제로 바뀌었고 모두 현금으로 지급되엇다. 즉 18세기 말부터는 장인도 관의 예속에서 벗어나 기술과 능력에 따라 일당을 받았으며 자유롭게 해촉이 가능한 임노동자층이 형성되었다. 이는 노동시장의 융통성과 시장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노동시장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다. 


9장 붓끝에서 탄생한 무명의 예술혼 
- 조선의 화원·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우리가 흔히 쓰는 화가라는 용어는 근세의 것이고, 옛날에는 화사, 화공 등으로 칭했으며 도화서에 소속된 화가는 '화원'으로 통일해서 불러싸. 도화서는 궁주에서 그림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는 관청이었으나 궐내에 있지 않고 오늘날의 청계천 일대인 한성의 중부 태평방 광통교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화원들은 평소에는 도화서로 출퇴근하고 왕실의 부름이 있거나 유사시 궁을 방문하였다. 


화원의 사회적 신분은 실질적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 더욱이 그림을 천기로 여긴 사회 분위기에서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 이들의 삶이란 그리 풍요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특정 기술을 연마해 생업에 전념하는 중인층이 성장하면서 예술가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고, 양반 사대부가 특정 화가에 대해 또는 중인 스스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예술가에 대한 촌평이나 활동상을 소개한 '전'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일면에는 양반과 화원들의 예술적 교류가 증대되고 18~19세기 들어 중인층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계층 내에서도 자존감이 높아졌던 것이 한몫을 했다. 즉 기예를 중시한 장인에게 '예술가'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왕실 행사에 추입되는 화가에 대한 천거는 법전의 절차보다는 조정에서 논의해 추천과 시험을 거쳐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화원은 국가의 실용적인 도화 업무를 위해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고 정교한 필치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았다. 화원들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왕실의 공식 행사 기록인 의궤에 수록된 도설이나 반차도를 그리는 것이었다. 각종 의례 행사에서 쓰이는 기물이나 장대한 행렬도를 화원들이 각자 분업하여 그린 것이다. 화원의 직분 중 가장 특별한 것은 바로 왕의 초상인 어진을 그리는 일이었다. 18세기 영·정조연간 이후로 왕실 행사에 동원된 화원에게 상전을 하사하고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직책을 부여함으로써 화원들의 생계와 지위는 이전에 비해 점점 여건이 나아져갔다.


17세기가 지나면서 조선에는 한 가문 내에서 특정 직업을 세습함으로써 독점적인 우위를 차지한 중인 가문들이 등장했는데, 화원 집단에서도 이와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정 가문이 화원직을 대대로 세습했다는 것은 가내 화업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를 통해 회화 양식이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신분사적으로는 중인층 형성에 일조했다는 데도 의의가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몇몇 화원 가문은 수백 년간 이어온 명맥을 바탕으로 계보를 형성하였다. 각종 기록을 통해 보면 조선초기에 화원인 천민츠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이와 유사하세 여겨졌을 정도로 매우 낮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 구조 속에서 화업을 천시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상 화원의 신분을 변화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는 불가능했지만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여 인정을 받으면 화원 집단에서 어느 정도 우위를 차지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화원은 17세기 이후 중인 계층의 형성과 더불어 기타 잡직의 중인 가문과 통혼을 통해 서서히 중인층으로 계층이 고착화되는 단계를 밟아갔다. 또한 의관이나 역관 집안이 그러하듯, 화원들 역시 세대를 거듭하여 직업을 세습함에 따라 조선후기에 이르면 40여 개의 화원으로 거듭하며 직업을 세습함에 따라 조선후기에 이르면 40여 개 화원 가문이 등장했을 정도로 이들의 활동층이 매우 두터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장 작은 기예를 부리던 자에서 문화 선봉장이 되기까지 
- 조선의 역관은 어떻게 탄생했나·백옥경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역관들은 대개 한어, 몽고어, 일본어 여진어 등 4개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했지만, 시기에 따라서는 유구어와 위구르어 등을 익히기도 하였다. 이들은 외국 사신이 오거나 또는 외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통역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국제 정보를 탐지하고 국제무역을 펼치며 외국 문물을 도입하는 등 조선의 외교관계가 그 틀을 닦고 앞으로 뻗어나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였다. 


언어가 다른 국가와 원활하게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는 무엇보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역관이 필요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국가가 역관 양성 교육을 담당하면서 시취제도와 연계시켜 운영하였다. 역관이 되려면 국가기관인 사역원에 생도로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역과에 합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사역원은 1393년(태조 2년)에 설립된 통역 담당 관서이자 교육기관으로서, 그 산하에 교육시설인 생도방을 두고 언어 영역별로 생도를 모집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자원자 우선으로 생도를 선발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그 조건이 휠씬 엄격해져 지원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현직 역관의 추천과 심사, 시험을 거치도록 하였다. 그중 '완천'이라 불렸던 심사과정에서는 현직 역관의 추천을 받은 입학 희망자들에 대해 부·모·처의 4조(부·조·증조·외조) 등 가문뿐만 아니라 추천자까지 심사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심사위원은 현직 역관 15인으로 구성되었는데, 13인 이상의 찬성을 얻는 지원자에게만 입학이 허락되었다. 합격자들은 그후 시강에 응시하여 성적에 따라 생도방에 결원이 생기는 대로 충원되었다. 사역원 생도들의 입학은 대개 10대나 혹은 그전에 이루어졌다. 이는 언어 습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나이 어린 생도들을 선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조선초기에는 15세 이하라는 입학 연령 상한선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연령은 휠씬 낮아져서, 18세기에 활동한 역관 현계근은 5세에 입학한 것으로 확인된다. 


역관의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외국 사신의 영접, 외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수행과 통역이었다. 


외교관계 유지나 무역활동에서 역관의 업무는 중요했지만, 유학 제일의 원칙이 표방된 조선사회에서는 어쨌든 부차적이거나 부조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통역은 외교관계에서 쌍방의 의사소통에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서, '작은 기예', '작은 임무', '잡기', '가벼운 임무' 등으로 폄하되었다. 역관 역시 장래의 관리자가 아닌 유교적 소양을 갖춘 양반 중심의 국가 운영에서 보조적 역할자로 인식되었다. 역관에 대한 구별된 인식과 제도적 차별이 가해질 때, 역관들은 여러 방식으로 이에 대응해나갔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고위직으로 진출하려고 애쓰거나, 집단적으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현실적인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면서 역관들은 오히려 제한된 특권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역관의 업무는 일반인이 대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지식과 기능의 숙달을 요하는 만큼, 전문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전수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직결된 문제였다. 따라서 이들은 세습과 통혼을 통한 가문의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역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사회적인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켜나갔다. 그것은 조선후기 사대부 문화에 필적한 만한 문화운동을 전개하거나, 새로운 사상 및 체제 수용에 앞장서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주도해나가는 것이었다. 역관들은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시·서·회 등 문예적인 소양을 발휘하면서 조선후기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괄목한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역관들은 서학과 천주교, 개화사상등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역관은 개항 이후의 격변하는 시대 변화에도 빠르게 적응하였다. 역관들은 대한제국 시기에 신학문과 신기술을 습득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어서, 신관료도 급성장하거나 법관, 무관, 경찰 등 새롭게 부상하는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역관들은 개화기에서 한말까지 중인 집단 가운데 가장 많은 관료를 배출한 것으로 나타난다. 


11장 조선시대엔 왜 서점이 없었을까 
- 책 파는 사람, 책 읽어주는 사람·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조선에서 활동한 서적중개상을 흔히 '서쾌'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문헌들을 살펴보면 '책쾌'로 되어 있는 예가 더 많다. 유의할 것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서적중개상을 '서쾌'라고 불러 삼국 공통어로 쓰였다면, '책쾌'는 조선 고유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서적중개상이 활발히 활동하게 된 요인은 조선 사회가 지닌 특수성, 즉 문의 숭상과 지식욕, 책의 상업적 유통, 서점의 부재 등이 종합적으로 맞물려 나타난 결과였다. 


서적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서책에 관한 서지사항은 물론 책의 내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며, 최소한의 문자 독해능력과 상거래 영업 방식, 거기에다 원만한 대인관계 능력도 갖춰야 했다. 17세기 들어 상업경제가 일어나고 화폐의 통용이 활바래지자 책의 상업적 유통도 가속화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인기 있는 국문소설을 길거리에서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낭독자를 '전기수'라고 불렀다. 


12장 100년 전 서울의 일수장부를 엿보다 
- 조선의 금융업자·조영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