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극장의 역사], 임종엽, 살림, 2005, (110502).

바람과 술 2011. 5. 2. 20:09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드라마(drama)는 그리스어로 '행동한다'의 뜻이며 씨어터(theater)는 '본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극장으로 움직이는 것은 이미 우리의 현실 세계로부터 일탈을 시도하는 것이자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위치이동을 하는 것이다. 


공연되는 극장에 가는 이유로 사뮤엘 셀던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기분전환을 위해 둘째, 자극을 얻기 위해, 그리고 셋째로는 반드시 공통적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더 알고자 하는 마음, 즉 교육을 받고자 하는 의도에서 사람들은 극장에 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극장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인물, 스토리, 논평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묘한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물, 스토리, 논평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이 그것으로, 이는 곧 '무대 수단과 건축으로서의 극장 형식'이다. 바구너 극장이 등장하기 이전, 즉 바로크 극장의 형식에서는 극장 건축이 지니는 도시적, 물리적 구성에 그 사회적 성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관람자들은 극을 보는 것만큼이나 극을 보러 온 다른 사람을 구경하고자 하였으며 그들과 관계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적으로 작용하였다. 지금까지도 오페라나 대형 공연장소 혹은 로비 공간과 팔키의 공간적 배분이 이런 목적을 강하게 반영하였다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극장 건축은 희곡, 연출, 연기술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극장 공간에서 어떤 면은 장려하고 또 다른 면은 북돋지 않는 경향이 있다. 

 

광기를 불어넣는 곳, 극장의 탄생 - 그리스 극장


비극을 주로 하였던 연극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격정과 광기를 발산하며 곧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고 이에 대해 앞서 논한 경쟁자 아폴론의 예술적 다스림과 합의점을 찾아 극장이 만들어진다. 즉, 건축으로서의 공간이 갖는 조형적 형식의 이성적 구도를 아폴론이 구축하였다면 그것에 내요을 담는 작업은 디오니소스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축제로부터 비롯된 의식을 흉내(imitatio)와 이야기(narratio)로 전환시킨 것이 극(drama)이 된다.


그리스 무대의 형태는 그 자체로서 연극적 사건의 구조를 제시하는 일종의 표의문자가 된다. 더하여 이 접점 바로 위에 배치된 중앙문과 그 양쪽에 배치된 문은 모두 3개로 원초적 시간이 이 세상에 유입되는 입구의 성격을 갖는다. 신화적 '그 때'를 주기적으로 재현시키는 제의와 마찬가지로, 극은 극본 속의 세계와 이미지를 무대상에 현현시키는 것이다. 그 상상적 진리를 현재적 진리로 만들어주는 접점에서 우리는 그 무한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전반기까지는 테스피스처럼 1인극인 판토마임이 그리스 드라마의 주를 이루었으나 그보다 1세기 후에는 2~3인의 대화극인 트라지코스가 주류를 이루고 아이스킬로스 등이 비극전문작가로 출현한다. 그리고 그 후로도 1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등장한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기호에 맞추어 사티리코스(희곡)와 코리코스(해학극)로 전환되어 디시람비코스(주신찬가)의 합창과 무용이 병행되기에 이른다. 당시에도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이 필요했다. 물론 입장은 노예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롭게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극장 출입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이는 곧 정치 인사급과 영웅들 그리고 국가 공훈자, 올림픽의 우승자 등과 함께 그리스 시민으로의 자격을 부여받음을 말해주는 매우 영예스로운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도시로 간 극장 - 로마 극장


그리스의 극장이 비극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성을 갖고 있음을, 그리고 그리스가 몰락하는 과정에서야 희극이 출현하는 것을 우리는 전술에서 보았다. 이러한 비극과 희극의 배경을 보면 삶의 관심이 정신적 세계관에서 물질적 세계관으로 옮겨졌음을 볼 수 있다. 


기원전 346년 로마에 최초의 극자잉 건설된다. 비록 로마의 극장은 그리스의 그것을 모델로 한 것이기는 하나, 그리스 극장과는 달리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 한가운데에 건설되었다. 즉, 극장은 이제 언덕 위에서 신과의 접점을 만들어주거나 생활로부터 떨어져 해탈의 경지를 통한 자아확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보다 빌접하게 시민들의 삶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삶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극장이 이전처럼 지역적 자연 경관을 보다 중시하고 신과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서 신전들과 가까이 배치되기보다는 편평한 지면 위에서 도시적 구조에 적응하며 건설되기를 의도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인간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지 않고,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극장에서는 관객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공연을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을 동시에 경험했고 인간과 자연의 가시적인 전체 우주는 하나의 조용한 질서로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의 극에서 연기자들은 적극적이고 조형적인 모습들이었음에 비해 배경의 역할을 한 비교적 소극적인 무대 공간은 그 높이를 의도적으로라도 낮추어야만 했다. 반면 로마 극장은 무대 공간 자체만으로도 매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척박한 돌산에서 비옥한 평지로의 도시로 내려온 극장은 자연의 경사지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편평한 바닥에 인공의 급경사를 이룬 것으로, 좌석의 열과 높은 쉐나 프론테는 강한 내부 공간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무대 공간과 객석 공간이 만드는 선형적 중심축선은 연기자의 연기가 포괄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고, 극장 건축은 이러한 체계를 구현하는 실제 행위들의 표현 도구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로마에서 극은 하나의 오락이자 구경거리였다. 이는 그리스의 무대에는 '신에 대한 경건한 의식'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출연과 출장이 명예롭게 여겨졌으나, 로마에서는 황제 네로가 무대에 섰다가 비난을 받은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성을 배경으로 태어난 로마의 극장은 그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인간의 본성과 도시적 질서의 원리를 담아내며 발전하였다. 

 

묘지와 극장 그리고 광장 - 중세 극장


정확히 476년 로마의 멸망을 계기로 모든 사회는 교회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당연히 그 이전의 문화 및 예술은 오로지 비판의 대상만이 되었다.


중세 묘지의 조각들은 통상적으로 죽은 이가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부활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연극의 공연도 꼭 이와 마찬가지여서 오랫동안 잠재해온 삶, 즉 이미지의 삶이 갑자기 부활하며, 배우의 육체 안에서 현존성이 성취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콜은 연극의 핵심을 연기에 두며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연극의 인식에 관한 문제로 상상적 진리와 현재적 진리의 체험이고, 둘째는 모방이 연극의 핵심이라는 인식에 대한 거부로 그는 오히려 대상의 결과가 분열되어 부재함을 지시한다. 셋째로는극본 내의 원초적인 시간과 이미지를 현존하는 주체인 배우의 작업에 관한 통찰로, 이는 배우가 극본 속의 이미지를 현시하기 위해 신들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샤먼과 훈간(Hungan)의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중략하고 여섯째로는 무대수단들의 신성현현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자연주의 무대기법의 발생과 관련한 역설의 논리가 있다.  

 
다시 표를 팔기 시작한 극장 - 엘리자베스 왕조시대 극장


신 중심의 봉건주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자리 잡으면서 인간에 대한 낙관론과 개인주의적 성향의 대두는 상대적으로 경험론적인 인간운명에 대한 회의론과 비관론 또한 동시에 짊어져야 했다. 이는 그 동안 숨겨져 왔던 자유의지가 인간의 불가분적 속성이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희극은 생각하는 자를 위한 것이고 비극은 느끼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처럼 비극은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정서를 유발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희랍의 비극이 '플롯(Plot)' 중심의 형식미학적 구조인 데 비해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극은 그 시대적 배경의 영향으로 인물 및 성격의 묘사가 사실적이고, 심리적인 미학 구조, 즉 '주인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극장, 그 내향적 순수와 외향적인 유기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