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변동
최종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성공 여부는 개발독재의 효율성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서 민주주의야말로 균형발전과 복지실현을 가져다 줄 정치적 정당성의 최적 기제라는 국민들의 인식에 달려있다.
변혁지향 : 1945년 해방, 1960년 4·1 그리고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1945년 변혁지향은 민족·근대·민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의 현대사가 1950년대의 민족 중심에서 1960~70년대의 근대 중심으로 그리고 이어서 1980~1990년대의 민주 중심으로 그 일차적인 강조점이 각각 다르게 제기되면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민족해방의 이념을 둘러싼 사회주의와 문화민족주의 그리고 윌슨식 이상주의 간의 대치, 직접적인 무장투쟁과 간접적인 문화교육 계몽운동 그리고 외교적 접근으로 구분되는 항일독립운동 방식 간의 대립, 지역적으로도 국내와 국외 그리고 국외인 경우에는 미국, 상해, 만주, 연해주 등 독립운동 지역거점 간의 파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방이념, 투쟁방식, 지역거점화 등을 둘러싸고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의 각개약진은 해방 이후 미·소 간의 대립구도에 의해 양극화된 파당화로 심화되어 나가면서 자율적 변혁지향을 위한 통합적 리더십의 출현을 제약했다.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남북한 및 동아시아 강대국들 간의 무력대치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동아시아 국제냉전이라 일컬어지는 대립구도를 한반도에 부과함으로써 남과 북의 대치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을 목표로 시작된 전쟁이 오히려 통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역설은 미·소 간 냉전구도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한반도의 안정에 기여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역설적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 무력을 동원한 한반도 통일 시도를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고 그만큼 한반도의 안정화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한반도에 부과된 국제적 냉전구도의 고착은 민족통일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국제적 후원구도가 지속되는 한 남과 북 모두의 생존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쿠테타 :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은 한국의 헌정사에서 집권자가 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연장을 도모해나간 최초의 사례로 이후 반복되는 무분별한 헌법개정의 시초가 된다. 부산정치파동은 그 이후 한국정치에서 왜곡과 파행, 독재로의 이행의 시작인 동시에 정치변도에서 미국과 군부의 개입 가능성을 상수로 설정해나가는 대표적인 정치적 일탈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군부가 처음으로 국내정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개입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부산정치파동 이후 4·19나 광주민주항쟁에서 보듯이 항상 한국군의 정치개입 내지는 불개입의 배후에는 암묵적으로 미국의 의사가 연계되어 작용했다. 이는 한국정치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장면정부가 4·19를 통해 표출된 민족·민주· 민생적 차원의 대중적 열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약체정부로 남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주·자본가의 이해를 반영하는 민주당의 계급적 성격상 장면정부는 처음부터 일반 민중의 이해관계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둘째, 의미 있는 야당의 부재는 권력 배분을 둘러싸고 민주당 내에서 신·구파의 분열을 불러오게 됨에 따라 신파인 장면정부는 안정된 원내의석을 보유하지 못해 지도력의 불안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셋째, 장면정부는 현실적으로 미국의 내정간섭과 임의적 원조중단 조항을 담은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면정부는 한미경제협정을 둘러싼 일반 국민들의 자존심을 어떤 형태로든 적절히 무마시키고 설득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4·19의 변혁지향의 하나인 민족자주화 운동으로부터 강력한 반발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넷째,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60만 대군으로 비대해진 과잉군대의 문제는 4·19의 민주변혁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정치적 과제였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제시된 10만 감군을 둘러싸고 장면정부에 대한 군부의 이해관계가 대치를 이루는 가운데 군부 내 소장파의 군대정화 요구를 둘러싸고 장면정부의 동조와 이 보다는 군대 내의 하극상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미국의 우려 간의 견해 차이가 노정되면서 장면정부의 취약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게 된다. 고려시대의 무신난 이후 한국정치사에 있어 군부가 물리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5·16은 한국정치의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탈이었다. 한국의 군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미국의 군사원조와 훈련·지도를 통해 질적으로도 근대화된 집단으로 성장하여 나감에 따라 군 장교의 지위는 사회적 신분상승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
근대에서 지구로
동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서 21세기적 의미의 속도·압축·확대를 추구함에 있어 한국에게 새로이 부가되는 가치로 민족-근대-민주를 대신하여 민족-지구-민주로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여기서 지구화란 자율성-참여-정체성을 토대로 하여 지방-지역-세계 간의 유기적 연관과 포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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