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의 섹슈얼리티], 정성희, 가람기획, 2009, (110921).

바람과 술 2011. 9. 21. 14:19

머리말 


1장 결혼 

남자는 일부다처,여자는 일부일처 

1.결혼제도 

[맹자]에 혼기가 찼는데도 장가가지 못한 총각을 '광부', 시집 못 간 처녀를 '원녀'라고 표현했다. 광부는 집에 들어가봐야 아무도 없으니 정말 공허한 남자라는 뜻이고, 원녀는 시집 못 간 여자야말로 그 원한이 하늘을 찌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사족의 딸로서 서른 살이 넘도록 가난하여 출가하지 못하면 국가에서 혼례비용을 보조해주었다. 또한 집안이 궁핍하지 않으면서도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 보내지 않으면 그 집 가장을 중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특히 정조는 '혼기를 넘긴 미혼자를 조사하여 2년마다 한 번씩 결혼시키도록 하라'고 하여 미혼 남녀들을 구제해주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성종 때에는 전국의 25살이 넘도록 시집 못 간 처려들을 조사하여, 만약 집안이 가난하면 쌀이나 콩을 주어 혼수로 삼아 결혼할 수 있도록 했다. 가난하여 결혼을 못하는 늙은 총각과 처녀가 있을 경우, 해당 지역의 고을 수령은 왕에게 혼수 비용을 요청하기도 했다. [토정비결]을 지은 인물로 유명한 이지함도 수령시절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에 60세가 넘도록 장가들지 못한 불쌍한 노총각이 있다고 왕에게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위정자들은 나이가 찬 총각·처녀가 결혼하지 못하고 있으면 음양의 화기가 상하여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장기간 지속되면 국가는 이른바 원한에 사무친 총각·처녀들을 파악해서 정해진 기한 내에 강제로 결혼하도록 했다. 조선시대 결혼제도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남자는 일부다처제, 여자는 일부일처제가 적용되었다. 처가 될 수 없는 첩, 과부들의 개가 금지, 동성동본혼의 금지와 같은 결혼제도는 이전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결혼제도였다. 


고려의 결혼제도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남녀 모두에게 일부일처제가 적용되었으므로, 남녀 구분 없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이 자유로웠다. 조선초기 강력하게 시행되었던 유처취처의 금지는 한편으로 적처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지위 보장을 위한 일부일처제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었다. 단순히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혼란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2.축첩제도 

유처취처를 엄격하게 금지하다 보니 국가 입장에서는 다처를 포기한 수 많은 남성들에게 이를 대신해줄 반대급부를 제시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축첩제도다. 축첩제도는 고려말의 다처 풍속을 변형된 형태로나마 그대로 지속시켜준 결혼제도로서, 조선사회가 남성 위주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첩이 처음 생긴 것은 조선시대 이전부터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첩제도는 종래 있었던 첩의 존재와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즉, 조선시대의 축첩제도는 첩이 적처가 될 수 없다는 엄격한 규정과 함께 첩의 존재를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부당한 축첩제도에 대한 여성들의 공식적인 반발이 조선왕조가 서서히 침몰해가던 1899년 3월에 있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와 동일 회원으로 조직된 친목단체 '여우회'가 축첩 반대 시위의 주인공들이었다. 


결혼풍속의 변화.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동성동본혼의 금지는 조선시대 유고적 도덕관념과 이를 높이 숭상한 유학자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동성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은 우리 나라 풍속이 아닌 중국 풍속이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동성동본혼의 금지가 시작되었으니까 꽤나 역사가 오래 된 풍속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외종형제와의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종친 및 양반에 국한하여 동성 결혼을 금한 것이 시초였다. 동성혼의 금지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는데, 고려시대에는 문제되지 않았던 동관이성(본관이 같은 각각의 성) 간이나 이관동성(본관이 다른 동성) 간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일반인들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이때 비로소 거주지를 바탕으로 한 본관과 성씨가 파급되기 시작했는데, 거주지를 바탕으로 본관을 정하다 보니 같은 조상이 아니라도 같은 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성씨보다 본관을 더욱 중요시하고 친족으로 여겼다. 성씨가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동족으로 치지 않는 게 우리네 성씨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도 미습했는지 조선중기 이후로 본관이 다른 동성마저도 결혼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가족주의 가치관은 자손 번창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생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동성혼의 금지 외에도 '월삼성'이라고 하여 모계 쪽의 성씨를 3대에 걸쳐 건너뛰어 결혼하기도 했다. 


여자들의 시집살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2백 년도 채 안되는 결혼풍속도다. 그 이전에는 처가살이였지, 시집살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 결혼생활은 남자와 여자간의 일 대 일 결합이 아니라, 한 집안 대 한 여성 혹은 한 남성이라는 복수 결합이었다. 그런데 시집가는 혼인풍속은 우리 나라 고유의 풍속이 아니라 유교식 중국 혼례인 '친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친영이란 '친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온 후,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폐백례와 혼례 이후 신부가 신랑집에 머물러 사는 것까지도 친영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남자집 중심의 결혼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결혼풍속은 '남귀여가' 혼속이었다. 남귀여가의 혼속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같이 신랑이 일정기간 신부의 집에 가서 거주하는 형태의 결혼풍속을 말한다. 전통혼속에는 신부가 신랑집에 처음부터 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신부는 혼수나 상속재산을 혼례 이후에 천천히 준비해도 되었다. 그러나 친영제에서는 결혼식과 동시에 신부가 신랑집에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혼수나 재산 상속을 급하게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그 동안 남자집에서 부담했던 혼수를 반대로 여자집에서 부담해야 했고, 전통적으로 밀접했던 외가도 출가와 동시에 완전히 단절해야만 했다. 


혼례없이 사는 것은 금수 


1.중매결혼과 선보기 

조선시대에는 혼담이 오고가면 '간선'이라 하여 신부감을 선보는 풍속이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가문이나 신분에 따른 결혼을 하다 보니 남녀의 운명을 점쳐보거나 궁합을 맞춰보는 풍속이 더욱 성행했다. '궁합'에서 궁이란 명궁으로 남녀의 명궁이 서로 맞아 흉살이나 상충, 상극이 없어야 좋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궁합에서 일차적으로 중요시한 것이 바로 원진살이었다. '원진'은 부부간에 까닭 없이 미워하게 된다는 액운을 말한다. 이 원진살이 끼면 평생 불화하거나 생이별하게 된다고 믿었다. 


2.혼례 절차 

조선시대의 혼례는 중국의 유고식 혼례 절치를 본따 '육례'를 바탕으로 했다. 육례란 결혼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준행해야 할 여섯 가지 의식과 절차를 말한다. 여섯 가지란 납채·문명·납길·납징·청기·친영이다.


조선시대 미혼 남녀들의 결혼 적령기는 몇 살이었을까? 법적으로 대략 남자는 15세부터 30세, 여자는 14세부터 20세까지가 결혼 적령기였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혼식이란 것을 치러야 했는데, 그 첫 단계가 '의혼'이다. 의혼은 혼례를 하기 이전에 반드시 중매인으로 하여금 양가를 왕래하면서 의견을 알아보고 합의하도록 하는 절차를 말한다.  


의혼과 선보기가 끝나면 그 다음 단계로는 '납채'를 한다. 납채란 약속한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랑측에서 신부집에 결혼을 청하는 사주단자를 보내는 절차를 말한다. 일종의 정혼한다는 의사표시이며, 지금의 약혼식과 같다. 따라서 납채가 이루어지면 이미 결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납채가 끝나면 다음으로 '납폐'를 하는데, 납폐란 요즘의 함 보내는 절차를 말한다. 함은 혼례 전날 저녁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낸다. 이때 보내는 혼서와 폐물은 정혼의 징표로서 결혼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약속이다. 


납채와 납폐가 끝나면 '초례'를 치르는데, 사실상의 혼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례란 원래 혼례를 하러 가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가서 신부를 맞으라고 명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점차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와 처음으로 대면을 하고 서로 절을 하는 혼례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초례가 끝나고 나면 신랑은 신부집에 그대로 머루르면서 신방을 치른다. '남귀여가'의 전통 혼속에서는 여러 해 계속해서 머물렀지만, 중국식 친영제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1년 또는 3일로 머무르는 시간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혼례식을 치르고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고 한다. 신행의  목적은 시집으로 들어가 아주 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친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부가 시집에 도착하면 신부는 시부모를 처음으로 뵙는 예, 즉 '현구고례'를 하게 된다. 조선시대 친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예절 때문이다. 현구고례란 말하자면 시부모를 찾아뵙고 그대로 시집에 눌러앉아 사는 결혼 형태의 출발을 알리는 예식이었다. 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하면 대청 폐백상 앞에 앉아 시부모 및 일가친지를 뵙고 인사를 드린다. 


3.서민들의 결혼 

한국의 매매혼은 '결납'이라 하여, 보통 소 한 마리 값에 해당하는 돈을 혼례 전에 신부집에 보냄으로써 혼약이 이루어졌다. 


매매혼 외에도 봉사혼이라는 것이 있었다. 봉사혼리안 신부로 데려올 조건으로 신부집에 가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재물 대신 노동으로 신부를 사는 '머슴서방' 제도다. 


4.조혼의 폐단 

우리 나라 조혼풍속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와 민며느리라는 결혼풍속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이와 같이 조혼하는 풍습은 일찌감치 있었지만, 더욱 부채질한 것은 고려 때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때와 같은 공녀 선출은 없었지만, 왕비 간택으로 조혼의 풍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간택령과 동시에 민간에서는 금혼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혼기를 놓치면 결혼하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왕비 간택령은 딸 가진 부모들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 

1.남녀구별과 내외법 

유교적 성 모럴의 산물인 '내외구별'은 본래 남녀 관계에 관한 예절법이었다. 본래 의미에서 내외란 남녀간에 지키는 예의이며, 상호 역할을 분담하고 그것에 따라 공간을 분리하는 예의 기준이었다. 문제는 단순한 예절상의 남녀구분인 내외사상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내외법'이라는 이름으로 법률화되고 강제화되었다는 점이다. 내외법은 풍속의 순화라는 거창한 명분에서 시행되었지만, 출발이 그렇다 보니 법적용에 있어서 남녀간의 형평이 무시되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유고적 구별의식은 이제 내외법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규제법으로 둔갑했다. 


[예기]의 구절처럼 남녀구별의 첫 단추는 공간의 분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내외법은 부부가 기거하는 가옥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2장 임신과 기자습속 

홀수날은 아들,짝수날은 딸 

1.성교육 

2.성생활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라 

1.임신과 가계계승 


유교와 달리 윤회를 강조한 불교에서는 자식의 의미란 윤회의 사슬 그 이상이 아니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인들은 윤회관을 바탕으로 한 인생관을 가졌기 때문에 가계계승에 대한 집착이 적었다. 그러나 종통과 명분의식이 유난히 강조된 조선사회에서 아들은 조상의 대를 잇는 희망의 존재였다. 더욱이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들은 노후의 의존과 제사의 책임자가 되기 때문에 더욱더 필요한 존재였다. 아들에 대한 중요성과 그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서 사회적인 대우도 점차 달라졌다. 그러나 아들을 선호했다고 해서 딸을 천시한 것은 아니었다. 대를 잇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들을 선호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딸도 중시했다. 


2.가계계승의 편법들 

가계계승을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은 조선시대에만 볼 수 있는 풍속도이지만, 이 풍속도 유교적 가계계승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조선중기 이후에 와서야 거부감 없이 이루어졌다. 


3.기자습속 

3장 이혼과 수절 

이혼을 하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라 

1.양반의 이혼 

지금은 이혼이라는 용어로 통일되게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이·출처·휴기·종부가매 등 이혼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이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성을 띤 이혼의 형태라면, 출처나 휴기는 칠거 등의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내친 경우를 말한다. 조선시대 이혼리나는 말을 '처를 내쫓는다'라는 의미의 출처라고 표현하거나, 버린다는 의미의 휴기라고 표현한 것은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여자를 내쫓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외 이혼은 아니지만, 소박이라 하여 집안에서 별거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소박에는 남편이 부인을 내쫓는 외소박과, 반대로 처가 남편을 내쫓는 내소박이 있는데,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에는 주로 남편에 의해 여자가 소박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칠거지악이야말로 악법 중의 악법이었지만, 이 악법에도 구제망이 있었다. 칠거의 사유로 남편은 아내를 소박할 수는 있었지만, 이혼이라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삼불거'에 해당하는 여자라면 비록 칠거에 드는 여자라 해도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교윤리의 정서였다. 


2.강제이혼과 합의이혼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강제이혼이라는 것이 있었다. 의절이혼과 역가이혼이라고 불리는, 본인의 의시와 무관한 타율적인 강제이혼이 그것이다. 의절이혼이라 의절의 사유가 발생했을 대 행해지는 강제이혼이다. 역가이혼은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역모와 관련되었을 때에 하는 강제이혼을 말한다. 강제적이었던만큼 하기도 쉬웠던 이혼이었다. 의절이혼의 사유는 남편이 부인의 조부모·부모 등을 구타 및 살해하는 경우, 그리고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다. 반면, 부인은 남편의 조부모·부모를 살해 및 구타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욕설하는 경우에도 이혼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친족 누구와도 간통하면 이혼이었다. 또한 처가 남편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도 물론 모두 의절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었다. 의절이혼이라는 강제이혼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휠씬 불평등한 법적용을 받았다. 의절이혼 가운데에서 가장 남녀차별이 심한 것이 부부간의 구타였다. 처가 집안이 반역죄를 범했을 때, 남편이 자기와 자기 집안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처와 이혼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을 역가이혼이라 하며, 이 이혼은 매우 쉽게 이루어졌다. 


서민층에서도 이혼 사유는 대개 칠거지악이었는데, 절차상 '사정파의'라는 부부간의 합의이혼을 거쳐 헤어졌다. 이때 남편이 부인에게 이혼 중서로서 '할급휴서'라는 것을 주기도 했는데, 말하자면 재혼허가증이었다. 사정파의는 이혼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였을 때,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애기하고 서로 승낙하는 합의이혼을 말한다. 사정파의는 표면적으로는 합의이혼을 뜻했다고는 하지만, 사정파의를 종용해오는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동적으로 버림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처를 버리는 기처행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죽어서도 청상은 되지마라 

1.재가의 금지 

수절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유고가 통치 이념으로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고려말부터다. 공양와 원년(1389년)에 '6품 이상의 처첩은 남편 사후 3년간 재가할 수 없으며, 수절하는 경우에는 그 정절을 포상한다'는 것이 재가 문제에 대한 최초의 규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정은 한편으로 과부 수절자가 매우 희귀하다는 실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여성의 개가가 금지된 것은 이른바 가계계승의 질서가 문란해진다는 가붕장적 발상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재가 금지는 가계계승에 있어서 순수 혈통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여성의 정절은 단지 구실일 뿐이었다. 재가금지법은 이후 4백 여 년간 금과옥조와 같이 준수되어 서민들까지도 과부의 수절을 찬양하고 실천하도록 만들다가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여성들의 개가는 이렇듯 힘들었지만, 남성들의 재혼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부마의 경우는 배우자인 왕녀가 죽은 뒤에 다시는 정처를 맞아들일 수 없었는데, 홀아비로 평생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후실을 얻되 정처로 삼을 수 없다는 명분상의 제약이었다. 


과부 업어가기 풍속이란, 과부된 여자가 스스로 개가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부터 약탈되어가는 형식의 혼속을 말한다. 보쌈은 주로 중류 이하, 특히 하류사회에서 성행한 풍속이었다. 


2.과부에 얽힌 이야기 

4장 성범죄 

남녀와 신분에 따라 처벌이 다른 간통죄 

1.간통죄의 개념과 처벌 

조선시대 간통의 개념은 지금과는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모두 기혼 유무를 막론하고 혼외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모두 간통으로 취급했다. 미혼 남녀간의 성관계도 문제가 되었다는 말인데, 미혼 남녀의 경우는 기혼 남녀의 간통에 비해 가볍게 처벌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간통으로 인정되었다. 간통죄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에 상관 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간통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까지 국가가 개입하여 처벌할 정도로 성적 문란함을 엄격히 단속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성 모럴에서는 현장에서 간통하는 남녀를 처벌하지 않는 배우자 또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또한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간통한 것으로 의심만 받아도 그에 따른 불이익이 주어졌다.


조선시대 간통의 종류에는 그 성격에 따라 화간·조간·강간의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그에 따라 각각 처벌이 달랐다. 화간이란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간통으로서, 두 남녀가 서로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조간은 상대방을 유혹하여 집으로 유인해 공공연한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조간과 화간의 차이를 간통의 공공연성 여부에 두었다. 화간이 은밀한 간통행위라면, 조간은 간통한 여자를 다른 장소로 데려갈 만큼 드러내놓고 행한 간통행위인 것이다. 이는 노골적인 간통행위이기 때문에 화간에 비해 처벌도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강간도 넓은 의미에서는 간통에 해당하나, 상대방의 의사가 무시된 강제적인 간통이기 때문에 가장 처벌이 무거웠다. 


2.근친상간과 신분간의 간통 

3.조선시대 자유부인들 

세상에 강간은 없다? 

1.강간의 개념 

2.강간죄와 처벌 

치정살인과 학대살인 

1.치정살인 

2.학대살인 

성범죄의 처벌은 어떠했을까? 

각종 성범죄가 발생하면 중국의 [대명률]에 의거하여 처벌했는데, 대명률은 우리 나라 형률이 아닌 명나라의 형률이지만, 형사 법규의 기준으로서 조선시대 때 활용되었다. 대명률에 나오지 않는 우리 나라 풍속상에서 빚어진 성범죄인 경우에도 부례 조항을 두어 사건을 판결했다. 조선시대에는 법이 정식으로 인정하는 5형이란 것이 있었다. 5형은 태형
·장형·도형·유형 및 사형으로서 교수형과 참수형을 말한다. 


5장 매춘과 섹슈얼리티 

기녀와 양반사대부 

1.기녀의 발생과 변화 

고려의 관기제도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졌다. 유교 윤리를 내세운 조선왕조였건만 아이로니컬하게 기녀를 없애기보다는 더욱 세분화하고 조직화했다. 


2.기녀의 신분과 지위 

조선시대 기녀들은 중앙의 경기와지방기 형태로 구분되어 국가에 소속되었는데, 소속에 따라 역할이 달랐다. 즉, 서울 관기들은 모두 장악원 소속으로, 정원이 1백 명이었는데, 지방 기녀들에 비해 우수한 기녀들이었다. 장악원 기녀들은 관리와의 동침보다 궁중 연회의 가무가 주업이었다. 서울 관기들이 각종 기예를 닦았던 반면, 지방 기녀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3.양반과 기녀와 스캔들 

허락된 매춘과 금지된 매춘 

1.매춘의 발생 

2.매춘과 매춘부 

조선후기 섹슈얼리티 

1.여성복의 변화 

저고리의 길이가 줄어들고 치마가 풍성해지는 여성복의 형태는 조선시대 기녀의 옷차림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남성들에게 어필하다 보니 세속의 남자들이 처첩에게 권하고 서로 전해져서 유행으로 번진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복의 변화에는 남성의 시선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춘화의 등장 

6장 조선시대의 성 모럴 

신랑없는 결혼식을 한 궁녀들의 일생 

궁녀로 선출되어 입궁하면 우선 왕이 새로 이름을 지어준다. 왕이 궁녀에게 이름을 내려주는 이른바 '사명'은 들어오자마자는 아니고 수련이 끝난 후, 관례를 치를 때 받는다. 궁궐에 들어온 여성들은 일단 견습내인을 겪고, 15년이 지난 후에야 관례를 치를 수 있었다. 궁여들의 관례는 사실상 내인으로 승격되는 의식이다. 일종의 성년식과도 비슷한데, 일반 여성들과 달리 궁여들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궁녀들의 관례식은 사실상의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비록 신랑은 없다 하더라도 관례식이자 혼례식이 치러지는 날은 궁녀가 일생에 단 한 번 호사를 하는 날이었다. 이날 상전은 축하하는 뜻으로 명주·모시·무명·베 한 필씩을 하사한다. 


상궁은 모두 정5품의 품계를 받았지만 맡은 직책에 따라 서열은 달라졌다. 상궁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급은 제조상궁이었다. 제조상궁 외에 잠시도 왕을 떠나지 않고 항상 어명을 받들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대령상궁도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들 상궁들은 일명 지밀상궁이라고도 하였다. 지밀상궁은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존재였으므로 누구보다 까다롭게 선발했고, 이들 중 왕의 침실을 담당하는 침실상궁은 왕과 잠자리를 같이할 상황도 많았다. 


외로운 여인들의 불우한 연애,'동성애' 

남편인가?간부인가?-성종대의 간통살인 논쟁 

조선시대 성 모럴과 간통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성병이 있었을까? 

7장 야담집에 전하는 남녀상열지사 

1.간통에 관한 이야기 

2.혼인에 관한 이야기 

3.첩에 관한 이야기 

4.개가에 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