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럽왕실의 탄생], 김현수, 살림, 2004, (111020).

바람과 술 2011. 10. 20. 08:33

영국왕실의 뿌리 찾기 


영국왕실의 탄생과 정통성에 관한 학계의 보편적인 주장은 노르망디 월리엄이 잉글랜드 지역을 1066년 정복한 후 세운 잉글랜드 왕국이 시작점이라 보고 있다. 


유럽왕실 탄생의 개괄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의 족장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로마 시가 점령당한 476년을 기점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로부터 2~3세기 동안 서유럽 전 지역은 어느 곳에서도 안정된 국가가 성립되지 못했고, 유럽 중북부에 걸쳐 부족단위로 생활하던 야만종족들의 선진문화권을 향한 대대적 이동만 있었을 뿐이었다. 로마문화를 가장 많이 흡수하면서 로마 본토와 가까이에 있는 종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켈트족의 일파로서 프랑스 땅 골에 정착한 탓에 '골'족이라 부르며, 골의 라틴어 표기인 '갈리아'를 사용하여 '갈리아'족으로 부르기도 한다. 갈리아족들에 의해 '게르만'으로 이름 붙여진 종족이 있다. 여기에는 고트족, 부르고뉴족,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이 속한다. 그들보다 더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북 게르만' 또는 '바이킹', '노르만'이라 불린 게르만 일족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야만종족들의 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선진 로마문화를 흡수하여 자연적으로 국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국가가 형성되던 초기 역사에서 '통치조직'의 의미가 왕과 그 집안인 왕실의 존재 여부와 밀접하다보니 '국가'를 '왕국'이라 부른다. 그러나 왕국이 형성되었다고 왕실의 통치방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초기 유럽왕실들은 당시 상황에 적합한 통치방식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봉토를 세운다는 뜻의 봉건제이다. 


왕실 성립의 조건들을 가장 먼저 수용하면서 첫 왕국의 모습을 드러낸 부족은 게르만의 한 종족인 프랑크족이었다. '프랑크'란 말의 뜻은 원래 '강인한 자', '용감한 자'를 의미했는데, 나중에는 '자유민'이란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종파로 판정받고 추방당한 아리우스파를 믿고 있었지만 프랑크족은 그때까지 다신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크족은 로마제국이 인정했던 아타나시우스파 교리를 먼저 받아들인 점에서 아리우스파를 받아 들였던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확실히 구별되었고, 동시에 랭스 주교는 물론 여타 가톨릭 성직자들과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인들의 지원도 전폭적으로 얻게 되었다. 프랑크의 클로비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혈통이 세습될 수 있는 왕실을 세우고, 그의 할아버지 이름인 '메로비치'를 따서 메로빙거 왕조를 열게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게르만 종족은 전통적으로 자녀들에게 소유한 땅을 분배해주는 '분할 상속제'가 있다. 그러나 왕국이 성립된 시점에 이 제도를 시행한다면 왕국이 분할되고 동시에 왕권 약화가 초래되는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분할상속제'가 클로비스 사후 네 명의 아들에 의해 시작되면서 왕국 내에서 여러 분국이 생기고, 분국의 왕들은 서로 잦은 싸움을 벌였기에 상대적으로 각 분국 내 호족들의 세력은 현저하게 강해졌다. 그 중 카롤링거가의 궁재인 카를 마르텔이 가장 눈에 띄었다. 마르텔은 732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격퇴하여 유럽가톨릭교 세계를 보호하였다. 이슬람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토지를 봉토로 주는 대신 병역의 의무를 요구했던 마르텔의 프랑크 군제개혁은 '봉건제도의 기원'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중부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던 로타링겐이 동·서 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었으며, 이로써 후일의 프랑크와 독일 양국의 영토적 기초가 거의 이루어졌다.


1066년 잉글랜드와 노르만 충돌위기의 배경 

데인계 왕인 크누트의 혈통이 단절된 1042년, 왕의 선출권을 갖고 있던 위테나게모트가 급히 소집되었다. 그곳에 나온 앵글로-색슨계 귀족들은 이전 7왕국의 수장들로서 모두가 왕으로 선출될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칫 서로 간의 알력으로 인해 단일국가의 모습이 와해될 것을 이구동성으로 우려하면서, 앨프레드 혈통을 왕위에 올리는 것이 최선이란 쪽으로 뜻을 모았다. 위테나게모트의 이런 결정으로 물망에 오른 인물은 노르망디에 머물고 잇던 에셀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였다. 당시 프랑스 왕과 노르망디 대공은 토지를 중심으로 한 주중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노르망디의 공국인들은 선진화된 프랑스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여 안정된 왕국을 만들었다. 바로 이곳에 머물면서 성장한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보고 배운 것은 좁게는 노르만사회와 그 문화였다. 그러나 넓게 보면, 프랑스문화, 더 넓게는 당시대의 보편적 유럽대륙의 문화를 제대로 보고 배웠던 것이다. 그런 에드워드가 유럽의 문화와 동떨어져 있던 섬나라 잉글랜드의 통치자로 그 땅을 밟을 때는 대륙문화 역시 자연스레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위테나게모트를 통해 에드워드를 선출한 앵글로-색슨계 귀족들의 속뜻은 (정치적으로) 분열볻 안정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가지고 온 노르만문화의 모습은 그들의 기존 세력에 큰 '변화와 도전'이 되었다. 


적대적 관계의 양국 지휘관 

양국의 군사력 비교 

원래 봉신 기사들의 복무 기간은 일 년에 40여 일 정도였으며, 주로 주군이 있는 성에 함께 머물렸다. 이런 체제는 당시 유럽대륙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셀프보우'란 활의 길이는 5.5피트(1m68cm)에서 6피트(1m82cm) 정도였다. 셀프보우가 적이 입고 있는 쇠미늘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유효거리는 100야드(91m) 정도이다. 석궁으로 쏜 화살이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리는 30야드(27m) 정도로서 셀프보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정확도는 오히려 반대이다. 


양국의 전쟁 준비와 진행 과정 

헤이스팅스 전투 

잉글랜드 왕실의 탄생


만약에 월리엄에 의해 유럽의 왕실 정통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섬나라 잉글랜드 왕실이 과연 유럽왕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잉글랜드 왕실의 정통성 성립에는 바로 월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이 주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며, 동시에 헤이스팅스 전투도 그런 맥락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로 들어온 '봉건제도'와 '기독교 중심' 정책이 앵글로-색슨왕국의 입장에서는 수동적이며 강제된 것인데 과연 그것들을 쉽게 받아들여 월리엄 당대에 왕실의 탄생을 알릴 수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사실 앵글로-색슨과 노르만 집안이 결합하여 진정한 잉글랜드 왕실이 탄생하기까지는 월리엄 정복왕의 증손자인 헨리 2세가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 즈음까지 100여년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다음은 비록 헤이승팅스 전투 이후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이 마련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지만 자칫 유럽왕실의 정통성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영국다움'은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실 노르망디 공국은 프랑스의 문화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그들은 원래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노르만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잉글랜드에 프랑스 문화를 끌어들여 발전시킬망정, 프랑스문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잉글랜드 내의 앵글로-색슨, 데인계의 문화적 뿌리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잉글랜드 왕실이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으로 고유한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됨을 알 수가 있다. 월리엄 정복으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227년 에드워드 1세의 잉글랜드 왕실에서는 프랑스어가 사라지고 영어가 주된 언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때야말로 잉글랜드 왕실이 유럽왕실의 일부이자, 명실상부한 독자적인 왕실 정통성을 유럽 사회에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