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김기봉, 프로네시스, 2006, (111030).

바람과 술 2011. 10. 30. 22:41

우리 시대 소통 언어로서의 영화


정신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모든 환자는 옳다.'라는 전제에 입각할 때야만 환자의 병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역사학이 인간 드라마로서의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이야기로 만든 '국사' 패러다임의 해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 매트릭스로서의 역사 

역사란 교육으로 주입된 사회적 기억이다 

역사란 유전자처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억장치이다. 기억이란 유전자 정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잔상들이거나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란 나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누가 우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다. 우리의 기억이 역사가 되면서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역사가 정의한다는 것은 순환논법이다. 역사라는 코드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적 유전자가 아니라 교육에 의해 주입된 '문화적 유전자'이다. 한 사회 내에서 또는 국제관계에서 어느 한 집단이거나 특정 국가가 현재와 미래의 지배자가 되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날조하는 것이 역사라는 내러티브다. 역사에 따라 우리 정체성이 규정되고 우리 삶의 방향이 결정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매트릭스가 된다. 


국사(國史)라는 매트릭스 

'국사'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한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국사의 지평을 동아시아와 세게로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역사가 인간을 지배하는 매트릭스로 작동한다면 '인간을 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태초에 매트릭스가 있었다"


우연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선택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엉뚱한 선택을 하며,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인과관계가 형성된다.  


인류 역사는 매트릭스의 역사다


현실세계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모순을 사마천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역사서술을 통해 해명하고자 했다. 사마천은 인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현실이 아니라 역사의 메트릭스 속에 살아있음으로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복하고 하늘의 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동아시아 역사신학을 정립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가 매트릭스였다면, 서양 중세에서는 기독교가 그 역할을 했다. 중세 기독교 그 역할을 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매트릭스에 살게 될 때, 교회가 권력을 잡는다. 하지만 더 이상 신앙이 아닌 이성의 빛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근대인이라는 변동이 나타나면서 기독교 매트릭스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성찰을 위하여


역사가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에는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해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으로 작동하는 코드가 내재해 있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은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코드를 메타역사라고 부른다. 무엇을 코드로 하느냐에 따라 사물의 질서가 성립되듯이, 메타역사란 역사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매트릭스다. 매트릭스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진리의 존재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며, 이에 따라 과거가 역사로 구성됐다. 첫째는 진리란 신과 같은 초월적인 것에서 유래한다는 종교의 매트릭스다. 둘째는 원리로서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한다고 믿는 과학의 매트릭스다. 셋째는 진리란 영구불변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변한다는 역사주의 매트릭스다.  

 

II. 시뮬라크르 시대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사극 열풍과 역사학의 위기


역사가는 사료라는 과거의 증가자료를 매개로 해서 과거의 사실을 추론하는 한편, 사료가 없어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서 보완한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만큼의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연구와 서술에서 '과거라는 원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가 사실을 추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허구를 창작하는 문학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결과는 초래한다. 과거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과거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의 시뮬라시옹으로서 역사


과거는 실재이고 역사는 그 실재에 대한 모사로서의 재현이다. 재현은 문자 그대로 지금 이 자리에는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시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역사가는 과거 그대로의 실재를 모사할 수 없다. 첫째는 이미 사라진 실재이기 때문에 현재의 역사가는 과거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둘째로 역사가는 자신이 주관적 관점을 배제하고 과거를 역사로 구성할 수 없다. 실증사학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역사로 재현할 수 있디고 믿었다. 실증사학자는 과거와 역사를 일치시키는 진리 대응설을 신봉했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던 변경 불가능한 실재이지만,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계속해서 다시 씌어지는 텍스트다. 따라서 다시 씌어진 역사란 재현의 재현이고, 그래서 역사란 궁극적으로 역사서술의 역사, 곧 사학사의 형태로 존재한다. 실증사학은 과거와 역사는 일치한다고 믿지만, 역사란 언제나 현재에서 기억되는 과거이기 때문에 과거와 역사는 영원히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지만, 그것이 역사가에 의해 문자로서 기록될 때 비로소 역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란 과거라는 실재가 아니 언어로 존재한다. 언어를 매개로 해서 과거를 표상하도록 촉발하는 것은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그 언어화된 역사가 만들어 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동시에 역사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기억된 과거는 역사가 되고 망각된 과거는 역사가 되지 못한다면, 역사란 궁극적으로 기억과 망각의 시뮬라시옹으로 존재한다. 역사가 기억과 망각의 시뮬라시옹이라면, 문제는 기억된 역사가 아니라 망각된 과거이다. 


유사성에서 상사성으로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모방물이 아니라 원본의 부재를 대신하는 자립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초실재의 효과를 발휘한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는 과거라는 원본의 현재적 부재를 역사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종래의 역사학은 과거에 대해 '유사성'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러한 '유사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 미술사를 지배해 온 모방 이론에 기초해 있다. 역사가의 역사연구와 서술은 실제에서는 과거와 역사의 모사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역사가에 의해 씌어진 역사와 자기가 새로 쓰고자 하는 역사 사이의 차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푸코는 모사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를 추구하는 '상사성'을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말했다. '유사성'은 원본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그것의 재현에 충실한 것을 목표로 하지만, '상사성'은 굳이 원본의 존재에 얽매이지 않고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과 차이"에 주목한다. 원본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유사성'의 미학에서 원본과 모사품은 종적인 관계를 갖지만, 일치가 아닌 차이를 중시하는 '상사성'의 미학은 원본과 모사품 사이의 종적인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모사품과 모사품 사이의 횡적인 평등 관계를 설정한다.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정의할 때, 역사가 다시 씌어지는 이유는 현재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거시기'로서의 역사

 
열린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


과거라는 원본이 없다면, 우리가 구성한 역사는 과거에 대한'초실재'다. '초실재'란 시뮬라시옹으로 만들어진 실재로서 전통적인 실재와 다른 실재다.  

III. 영화를 통한 '탈국사적' 역사교육 

영상 시대 역사교육

 
태극기 휘날리며, 국가의 해체 


웰컴 투 동막골, 국가를 넘어서 인간애로 

이재수의 난, 중앙의 해체 

꿈의 역사로서 영상역사 

인생을 영화처럼, 영화를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