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의 9급 관원들], 김인호, 너머북스, 2011년, (120207).

바람과 술 2012. 2. 7. 14:26

머리말 “하찮으나 존엄한”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조선시대 사람들 


1부 조선 관료제의 손과 발 

사재감은 궁궐에 필요한 각종 먹거리와 진상품 등의 일을 처리하는 관청이다. 조선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높은 신분의 관리들이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실무를 맡아 처리하거나 관리의 시중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남의 나라 말을 익혀라, 통사(通事)


통사는 두 종류로, 중앙의 사역원에 소속된 통사와 지방관청에 소속된 향통사가 있었다. 사역원에 있는 통사들은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단을 따라가거나, 다른 나라 사신들의 통역을 맡아 처리했다. 이에 반해 향통사는 왜, 여진 등의 국경 근처에서 발생하는 일, 즉 무역이나 표류민 귀환, 정보수집 등의 일을 했다. 

 
법집행의 손과 발, 소유(所由)


소유는 사헌부의 조례(관아의 하급 일을 하는 사람)인데, 세간에서는 사유라고 잘못 말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후기에는 천하게 생가되었던 모양이다. 원래 소유는 중국 당나라에서 관청의 소금을 민간의 곡식과 바꾸는 일을 하는 관직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관청의 물건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가기 때문에 소유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사헌부는 관리의 잘못을 살피는 일, 유교 도덕과 법에 어긋나는 풍속을 바꾸는 일, 금지령이나 법령을 집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따라서 풍속이나 금지령 위반자 등을 단속할 손과 발이 필요했는데 소유가 맡은 일이 바로 이것이다.  

 
길 잡고 심부름하던 나라의 종, 구사(丘史)


구사란 일종의 수행원으로, 나라에 소속된 남자종이었다. 즉 공노비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친척인 종친,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고위 관리에게 구사를 나눠 주었다. 조선시대에 구사는 신분과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신분에 따라 나라에서 내려주는 구사의 수가 달랐다. 세종대에 정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대군은 10명, 정1품은 9명, 종1품은 8명, 정2품은 7명, 종2품은 6명, 정3품은 중 통정(당상관)은 5명, 통훈(당하관)은 4명, 종3품부터 종4품까지는 3명, 5품부터 9품까지는 2명, 양반의 자제로 관직 없는 자는 1명이었다. 혹 비나 눈이 올 경우에는 개인이 고용한 구사 2명을 더하고, 2품 이상으로 늙거나 병이 들어 교자(가마)를 타는 경우에는 역시 개인 구사 5명을, 5·6품의 대간은 1명을 더하도록 했다. 대간은 국왕의 눈과 귀에 해당하는 중요 직책이라 권위를 세우도록 해준 것이다. 


구사가 하는 일은 길을 인도할 때 "길 비켜라, 누구의 행차니라"라고 외치는 갈도 이외에 심부름, 공사일, 잡일 등 다양했다. 한마디로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일이 무척 힘들어서 일찍부터 4교대로 정했다. 어떤 관리는 사복(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호되게 일을 시켰다. 이들이 피곤한 이유는 또 있었다. 구사는 주인이 시키거나 잘못한 일을 대신 처벌 받아야 했다. 


구사는 양반들에게 큰 재산이 되어 갔다.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한 양반들은 그곳 관청의 공노비인 기생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왔다. 말하자면 이들은 나라의 재산이었기에 수령들은 공신에게 청탁하여 기생을 구사로 만든 다음 데려왔다. 물론 그 대가로 흔히 인정이라 부르는 특산품을 바쳤다.

 
말을 고치는 수의사, 마의(馬醫)


말을 치료하는 마의는 두 부류였다. 대개는 사복시 소속의 관리지만, 민간에서 돈을 받고 치료만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의가 되는 길은 병조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마의는 정5품직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대에는 건국 초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품계로는 정2품인 자헌대부까지 받은 경우도 있었다. 비록 명예직과 다를 바 없는 검교직이었지만, 양반 관리들에게 매우 못마땅한 일이었다. 성종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마의의 품계가 종9품의 하위직에서 출발하게 되어 있다. 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나 도교의 도사들처럼 잡스러운 관직에 속해 종6품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좀 나아져 정5품직으로 오르게 되지만, 양반들은 여전히 마의를 천하게 여겼다. 조선 후기에는 마의구료패장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군대에 소속된 마의가 등장했다. 군대에서는 기병 때문에 마의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마의를 군대 내에 체계적으로 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학과 계산을 위해 살다, 산원(算員)


산원은 호조에 속한 관리였다. 호조에는 비슷한 일을 하는 관리들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산학, 즉 수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옛 사람들은 수학과 관련계된 벼슬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종대에는 각 관청의 아전들이 돌아가면서 회계를 맡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산학박사는 양반집 아들을 임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회계를 주로 담당하는 중감 벼슬은 지원자 중에서 시험을 보아 임명한 후에, 항상 수학을 연습하도록 했다. 이들이 반드시 호조에만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다른 관청에도 파견되어 회계장부 작성하는 일을 했다. 재정관련 일은 육조 중에서 호조의 몫이다. 그중에서 회계는 수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학을 맡은 관직으로는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교수, 그리고 산학박사라는 이름을 바꾼 산사(종7품), 그 아래의 계사(종8품), 산학훈도(정9품으로 교수와 같은 역할), 회사(종9품) 등이 있었다. 이 사람들을 모두 산원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30명의 산원을 두었다가, 수요가 늘자 산원의 수를 60명으로 늘렸다. 이들이 호조 아래 각 부서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기피했어도 관직은 관직이라고, 산원들은 일반 서민들은 타지 못하는 말을 탈 수 있었다. 신분 사회에서 말을 탄다는 사실은 곧 남과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산원은 일반 관리들처럼 사모를 썼다. 이는 조선왕조가 산원이 기술직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와 같은 신분임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15세기 후반인 성종연간에 이르자 조선와조는 법과 제도가 완비되고 운영방식이 안정되었다. 그에 따라 상류층인 양반층이 확고해지고, 이는 자연스럽게 다른 계층과의 신분 격차로 나타났다. 특히 관리층 내부에서는 문무양반과 산원과 같은 사람들이 속한 잡직 사이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잡직 역시 임금이 임명한 관직이라는 데 조정 고위 관리의 고민이 있었다. 즉 호조의 중감은 관직의 품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호조의 당산관들이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와의 재가와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성종대를 즈음하여 이 사람들을 문부반에서 빼 버렸다. 신분 차별이 분명해진 것이다.


산학 쪽에 속한 관리들은 교수처럼 수학교육을 맡기도 했지만, 그 밖에 땅 크기와 수확량의 측정, 정부 물품의 관리, 물품을 받는 공납업무 등도 처리했다. 그중에는 땅 크기와 수확량을 측정하는 일은 세금의 액수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원래 이 일을 맡은 책임자는 위관이라고 한다. 땅을 측정하는 일은 양전이라고 부른다. 세금은 단순히 땅의 면적만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땅의 질과 생산량을 같이 고려해서 매겼다. 원래 조선정부는 20년마다 양전사업을 펼쳐 세금 매기는 일을 했는데, 한번 정해지면 잘 고쳐지지 않았다. 이때 땅의 측량에 동원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산원이었다. 산원은 정부가 구입하는 물건에 대한 검사도 맡았다. 이들은 회계를 맡은 탓에 주로 장부를 다루었다. 조선정부는 지방관이 새로 부임할 때 인수인계를 하도록 했다. 인수인계 내용 중의 하나인 해유장은 전임 관리가 자신이 보관하던 물품과 회계가 정확했음을 증명하는 장부다. 이것의 작성은 호조에서 먼저 이루어지는데 산원이 이 일을 맡았다. 해유장이 있어야 신임 관리도 임지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임 관리가 빨리 부임하고 싶어서, 산원과 짜고 해유장 없이 그냥 가는 경우도 있었다. 부임해야 녹봉을 받기 때문이었다. 


2부 궁궐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 

'붉은 구름' 즉 홍운은 왕이 살고 있는 궁궐의 다른 말이다. 원래 신선들이 머무는 곳을 나타내던 말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궁궐 건물에 붉은 칠을 했고, 높은 신분의 사람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국왕의 앞길을 인도하다, 중금(中禁)


중금은 궁궐에서 일한다. 소속은 병조이며, 15세 이하로 뽑아 궁궐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축에 속한다. 중금의 임무는 사극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국왕 전하 납시오"하고 임금의 행차를 알이는 일이 기본이다. 그래서 용모가 단정하고 목소리가 맑은 사람을 뽑았다. 이들은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순서가 빨리 돌아왔다. 속칭 인기 직종이었다. 정원은 시기에 따라 약간씩 변동이 있었는데, 조선 초기엔 모두 24명이 근무했다. 이들은 매년마다 1명씩 8품직으로 옮겨 간다. 문제는 16살이 되면 근무하지 않고 논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중금은 세조 때 없어졌다. 그런데 성종 때 중금을 다시 부활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금을 새로 만들었으니 필요한 인원, 옷차림, 하는 일 등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정원은 이전보다 늘려 40명으로 정하고, 근무는 4교대로 나눠서 하는 것으로 했다. 옷차림은 자주색 관, 금색 고리, 5가지 색깔의 띠등에 겉옷 역시 자주색으로 했다. 중금을 그만둔 뒤에는 주로 국왕을 지키는 내금위로 옮겨 갔다. 처음 내금위는 사족의 아들로 30명이 정원이었다. 이들에 대한 대우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내금위는 그 숫자가 500명으로 불었고, 중금이 옮겨간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중금으로 근무했다고 모두가 다른 벼슬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자 이들 중 일무는 무장한 상태로 국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 모양이다. 명려을 전하는 승전중금은 화살 3개를 맞혀야 뽑힐 수 있었다. 금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전체 중금이 그런 것은 아니고, 금군에 소속된 사람들이 해당된다. 중금을 어린 나이에 뽑은 것은 아마 목소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인간 삶의 기본, 음식을 다룬 숙수(熟手)


궁궐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을 선부 또는 숙수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요리사다. 원래 선부란 중국 고대 주나라의 궁궐요리사인데, 말 그대로 남자가 맡았다. 반면에 '음식을 익히는 손'이라는 뜻을 가진 숙수는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맡았던 요리사였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선부도 숙수라고 불렀다. 궁중에서 음식을 맡은 곳은 사옹원이었다. 선부 역시 이곳에 속해 있었다. 사옹원에 소속된 요리사들은 잡직에 해당하는 재부(종6품), 선부(종7품), 조부(종8품), 임부(정9품), 팽부(종9품) 등의 벼슬을 받았다. 이들 모두가 수라간(수라는 원래 몽골말로 '끊이는 맛'을 뜻한다), 즉 요즘의 주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수라는 맡았다는 뜻에서 이들을 반감. 즉 밥하는 것을 감독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들 아래에는 각 분야별로 일을 하는 종들이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쳐 어려운 말로 '각색장'이라고 불렀다. 각각의 전문 분야가 따로 있었는데, 물을 끊이는 탕수색, 고기를 굽는 자색, 밥짓는 반공, 술을 빚는 주색, 차는 내는 차색, 떡 만드는 병공, 음식을 찌는 증색, 상을 차리는 상배색 등으로 다양했다. 식사 외에도 요리사가 필요한 경우가 또 있었다. 가장 중요한 잔치와 제사, 그리고 사신 접대였다. 이런 경우에는 외부에서 숙수인 요리사들을 더 불러야 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사치라고 보았다. 국왕조차도 특별한 음식에 탐을 내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기생인지 의사인지 모를 의녀(醫女)


어떤 사람들이 의녀가 될 수 있었을까? 이들의 신분은 한마디로 여자종이었다. 사회에서 하류 인생인 셈이다. 각 관청에는 허드렛 일을 하는 공노비가 있었다. 의녀는 이들 중에서 나이가 10~15세 정도 되는 총명한 아이가 뽑았다. 의녀가 필요한 곳은 당연히 의료기관이었다. 제생원과 함께 세조대에 만들어진 혜민서가 바로 그런 곳이다. 제생원은 혜민서와 합쳐지기 때문에 세조때 이후부터는 혜민서가 의녀를 맡았을 것이다. 의녀는 서울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방에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충청, 경상, 전라도의 여자종 중에서 2명씩을 뽑아서, 제생원에 올려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국가가 의료라는 사회복지를 책임진다는 생각이 제생원 같은 기관과 의녀를 만들어냈다. 고려시대까지는 의료의 상당 부분을 승려들이 맡았다. 그런데 의녀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일단 교육은 한문을 익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배우는 것에서 끝나면 좋으려만 얼마나 익혔는지는 시험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것도 매달 보았으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매달 잘하는 세 사람은 보고해서 녹봉을 주었다. 반면에 책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일이 3번 반복 되면 혜민국의 다모가 되었다. 다모는 식사나 차를 만들고 허드렛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를 해서 3번의 보통 점수를 얻으면 다시 의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1478년(성종 9년)에 의녀에 대한 자세한 공부 권장법이 마련되었다. 이를 살펴 보면 우선 예문관과 명망 있는 문신 두 사람이 교수를 겸하게 했다. 그리고 의녀를 3등급으로 나누었다. 첫번째는 내의라고 하여 두 사람이 되었다. 이들이 치료를 맡았고, 두 번째는 내의 아래로 간병의 20명을 배치했다. 요즘의 간호사격으로 여겨진다. 내의들이 매달 녹봉을 받는 반면 간병의들은 매달 책을 이해한 점수에 따라 네 명에게만 녹봉이 주어졌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인턴과 같은 초학의, 즉 처음 배우는 사람들로 병자를 돌보는 일은 하지 않고 공부만 시켰다. 혜민서 책임자는 매달 상순에 공부한 책을 시험 보고, 중순에 진맥 진단서 읽기, 하순에 침 꽂는 혈을 찾는 것을 시험했다. 연말에는 종합시험도 보았다. 만일 계속해서 시험을 제대로 못 보면, 3년째에는 원래 했던 여자종의 일로 돌려보내졌다. 그리고 나이가 40세가 되어서도 한 부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역시 복귀해야 했다. 


의녀가 궁궐에서 일했기에 의학기술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외에도 의녀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또 의녀는 사건수사에도 동원되었다. 의녀는 호화혼수품을 단속했다. 의녀들은 양반집 수색에도 동원되었다.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의녀가 국왕이 내리는 사약을 들고 간 경우도 있었다. 


의녀는 조선 시대 최고의 전문기술자였지만, 이들의 신분이 여자종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의녀들의 복장은 궁궐의 무수리나 침선비(바느질을 맡은 종), 각 관청의 기녀들과 똑같았다. 이 여성들은 밑머리를 땋아 머리 위에 얹고, 그 위에 가리마를 덮어서 신분을 구별했다. 다만 궁궐에서 일하는 의녀는 가리마에 비단을 쓸 수 있어서, 검은 포를 사용하는 다른 부류와 차이가 있었다. 이들이 기생들과 비슷한 복장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관청의 잔치에 의녀들도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기생들과 똑같이 말이다. 

 
시간을 제대로 알려라, 금루관(禁漏官)


금루관은 시간을 알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요즘 같은 시계가 없던 시절에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다양한 시계가 있었지만 가장 일반적인 시계는 해시계였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에 해시계인 앙구일부가 만들어졌다. 앙부일구는 계절별로 달라지는 해의 높이에 맞춘 과학적인 시계다. 세종은 누구나 시간을 알기 쉽도록 종로 혜정교 다리 위에 앙구일부를 설치하게 했다. 물시계는 바로 금루였다. 금루는 궁궐 안에 있었기에 이렇게 불렀다. 이 금루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바로 금루관이다. 원래 시간을 재는 일은 하늘의 해, 달, 별 등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서운관에 속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금루방을 따로 운영하였다.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물론 서운관은 천문과 시간만을 맡아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외에 풍수지리에 관한 일도 이곳에서 처리했다. 천문기상 분야에서 금루 담당을 독립시킨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425년(세종 7년) 정부는 천문의 비밀을 금루관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이를 분리했다. 그리고 천문 담당관들은 시험을 통해 사람을 뽑지 않고 자신들끼리 은밀히 천문기술을 전하게 했다. 그러다가 예조의 건의로 다시 금루와 천문 분야를 합치게 됐다. 시간을 알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정부는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매일 밤 10시경에 종을 28번 쳐 통행금지의 시작을 알리는 인정을 울리고, 새벽 4시경 오경삼점에 종을 33번 치는 파루를 울려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렸다. 이 통행금지는 하루의 생활리듬이기도 했다. 인정이 울리면 잠이 들고, 파루에 일어나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적이나 반란을 방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시간을 알리는 일은 단순히 생활에만 관련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틀리면 천문관측에도 이상이 생긴다. 천문의 일을 비밀로 하려 했던 것은 하늘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당시엔 하늘의 뜻이 해, 달, 별의 운행에 반영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기록하고 예측하기 위해 시간 기록은 필수였다. 그런만큼 시간이 틀리면 전제 자체가 아예 틀리는 셈이다. 1434년(세종 16년) 자격루가 탄생했다. 자격루가 놓인 곳은 보루각이란 건물이었는데, 서운관 생도가 번갈아가면서 지켜보도록 했다. 자격루가 생기자 금루관의 일이 한결 편해졌다. 누각에 물을 보충하고, 제대로 물이 흘러나오는지 지켜보다가 제시간에 시간을 알려주려도 뛰어가는 일이 줄어든 때문이다. 그런데 일이 줄어들자 금루 분야의 관직을 줄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천문 30명에 관직자 5명, 풍수학 10명에 1명, 금루 쪽 40명에 4명으로 정했다. 말하자면 금루에 경우 40명 중에서 번갈아가면서 4명이 관직을 맡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일이 적다고 관직자 중 한 명을 풍수학으로 옮겨버렸다. 그만큼 금루 분야는 비중이 적이지고 있었다. 시간을 알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데 특권을 준 대신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다. 실수하면 그만한 처벌이 따랐던 것이다.   

3부 나랏일에 공을 세워야 


호랑이를 잡아라, 착호갑사(捉虎甲士)


호랑이 전문 사냥꾼이 있었다. 이들이 착호갑사다. 착호갑사는 갑사라는 중앙의 직업군인의 한 종류였다. 중앙의 착호갑사는 무조건 뽑는 것이 아니고, 자원해서 먼저 호랑이와 표범을 잡게 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창이나 활을 쏘아 호랑이를 맞추었는지, 잡은 숫자는 얼마인지를 기록하였다. 병조는 이 보고서를 보고 인원을 보충해야 할 경우에 성적순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능력에 따른 채용이었다. 결국에는 무과의 5가지 시험 중에서 한 가지에 합격한 사람이나 먼저 화살이나 창질을 하여 호랑이 2마리를 잡은 사람을 뽑도록 법으로 정했다. 5가지 시험은 ① 180보에서 화살 하나 이상 적중 ② 말 타고 쏘아 2발 이상 적중 ③ 말타고 창 던져 하나 이상 적중 ④ 달리기 ⑤ 양손에 50근씩 들보 100보 가기이다. 지방의 착호갑사는 중앙과 좀 다르게 뽑았다. 아무래도 호랑이 사냥은 힘도 들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보니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절도사가 군인과 향리, 역리, 노비 중에서 자원자를 우선 받았고, 없을 경우에는 힘과 체격이 좋은 사람을 골랐다. 


호랑이 사냥은 단지 맹수를 없애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조선초기에는 기우제에 호랑이 머리를 사용했다. 또한 호랑이 가죽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타위'라는 방식이었다. 타위란 말 그대로 나팔, 북, 징 등으로 소리를 내어 짐승을 포위해 잡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호랑이 잡는 법은 함정과 궁노였다. 함정은 말 그대로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설치하는 방법인데, 좀 잔인하지만 미끼로 개를 이용했다. 호랑이 한 마리는 상으로 면포 3필이나 근무점수 20점 내지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작은 호랑이나 표범은 그보다 적게 포상했다. 이것은 관가에서 설치한 포획틀의 경우이고, 개인이 설치한 것은 3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거나 차등해서 상을 주었다. 그렇다보니 호랑이가 많은 곳에는 포상을 노리는 민간 사냥꾼들이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또 조선정부도 민간이 함정을 설치하는 것을 권장했다. 이런 전문 사냥꾼은 일반 백성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나라에서 그 효과를 인정받았다. 점차 국가의 착호갑사보다는 전문 사냥꾼의 시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사냥이 계속되면서 문제가 대두되었다. 호랑이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던 것이다. 특히 개간으로 인해 농토가 늘어갈수록 호랑이의 숫자는 줄어만 갔다. 그에 따라 호랑이 가죽의 가격이 점점 치솟핬고, 15세기 말에 면포 30여 필 했던 호랑이 가죽의 가격은 80여 필이 되었고, 16세기 중엽에는 400여 필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착호갑사는 거의 필요 없어지고 전문 사냥꾼만이 남게 되는 시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뛴다, 간첩(間諜)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간첩의 종류는 모두 5가지다. '인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이 그것이다. 첫째, 인간은 적의 주민을 활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내간은 적의 관리를 매수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반간은 적의 간첩 등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네 번째 사간은 우리 첩자에게 거짓정보를 주어 적에게 이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생간은 적을 정탐한 후에 살아 돌아와 적정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간첩보다 척후활동 쪽에 비중을 두었다. 정부 역시 간첩의 중요성에 동감하지만, 사람을 가리지 않으면 반대로 군사기밀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간첩은 결코 군주의 보배가 아니었던 것이다.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간첩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외국과의 관계를 최소화하는 것이 조선이란 나라가 걸어가려 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바쳐라, 목자(牧子)


목자는 말 그대로 말이나 소를 키우는 사람이다. 요즘 말로 목동과 같으나 나라의 말을 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목자라고 특별한 사람을 뽑은 것은 아니다. 대개는 양민 내지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들이 이 일을 맡았다. 문제는 목자가 되면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원래는 목자도 다른 일들처럼 16세에 일을 맡았다가 60세가 되면 면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고, 한번 목자로 정해지면 대물림이 되었다. 게다가 자손까지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태종대에 강화도 목장에서는 40여 가구나 도망을 갔다. 그래서 목자들을 감독하는 감목관을 두었다. 그러나 관리대상인 목자들의 명단이 없엇따. 따로 역이 없는 백성 중에 목자가 된 사람만 '목마군'이라고 하여 명단을 만든 다음 호적처럼 3년에 한번씩 고치도록 했다. 원래 말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국방에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말은 국방 등에 꼭 필요했기에 조선정부는 말 기르기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국에 말목장을 두었다. 조선후기에는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 123곳 목장이 있었다. 그중에서 폐쇄된 곳이 73곳이고, 말을 기르는 곳이 50곳이었다. 물론 대표적인 목장은 제주도였다. 제주도가 목장이 된 것은 고려 후기 때였다. 몽골족이 세운 원이 제주도를 직접 다스리면서 그곳에 목장이 들어선 것이다. 실학자 이익은 대완의 말종자를 제주에서길렀다고 했다. 좋았던 이 종자가 점점 작아지고 힘도 약해진 이유를 그는 풍토와 기후에서 찾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초기 명의 요구에 따라 좋은 말을 많이 보낸데다 말종자 개량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정부는 명에 바쳐야 하는 말의 숫자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다. 원래 조선정부는 포상으로 말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말을 받을 수 있는 증명서, 즉 마첩을 준다. 마첩은 사복시의 첨정(종4품)이 만들어 주었다. 마첩을 주고 안 주고는 순전히 첨정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운좋게 마첩을 받았다 해도 관청에서 내주는 말은 시원치 않아 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필요로 했다. 말이 곧 양반 신분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간의 수요까지 몰리면서 자연히 말 값이 뛰어오르게 되었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다, 염간(鹽干)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염간인데, 정부가 소금을 바치도록 정한 사람들이다. 염간은 임진왜란 이후 기록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소금은 점차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과 관계된 상품이 되었을 것이다. 

 
조운선을 운행하다, 조졸(漕卒)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곡식들은 강변에 있는 창고로 모인다. 지금의 세금이다. 이 세금을 운반하는 일이 조운이다. 물론 조운선은 평소에 다른 화물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세를 운반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조졸은 이 일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다. 배를 타는 일은 당시의 선박 조건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조졸이 힘들고 천시받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성종대 즈음이면 사람들은 조졸이라는 이름조차도 천하게 생각했다. 해군인 수군과 달리 조운선만을 타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조졸이라는 이름을 수군으로 바꾸고, 전라도 법성포 등에 교대로 근무하도록 했다. 

 
4부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서럽고 서러워라, 비구니(比丘尼)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광대


고려시대에는 광대라는 말이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을 뜻했는데, 특히 후반기에는 광대가 궁궐에 자주 등장했다. 

 
눈이 멀었으니 미래가 보인다, 점쟁이


인간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의 70%는 눈을 통해 얻는다고 한다. 조선시대 맹인들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하나는 점을 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기 연주였다. 이들은 왜 점을 쳤을까? 맹인은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감각이 발달해서 점을 잘 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외에 맹인들이 하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일이었다. 이른바 맹인 기우제다. 맹인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은 명통사였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에 입각한 나라였다. 16세기 중종대부터는 무당, 맹인이 아닌 정부가 직접 종묘나 사직, 산천의 신들에게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다 효종대에 이르러서는 맹인 기우제가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다. 맹인들의 사회적 역할이 그만큼 줄어든 셈이었다. 

 
놀고 먹는다, 유수(遊手)와 걸인


한양은 국왕이 사는 곳이고, 이곳은 왕도가 처음 시작하는 장소다. 유교이념인 왕도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다. 따라서 백성들이 굶어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걸인을 구제해야 할 이유다. 세종대뿐만 아니라 걸인들은 한양에서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일찍부터 노는 사람들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논다는 의미로 유수라고도 하고, 한가하다는 뜻의 한민이라고도 했다. 원래 한민은 백성들을 9가지 직업으로 나눈 것 중에 하나였다. 이들은 떳떳한 직업이 없으며,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품삯을 받고 일을 한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고, 주로 길흉사 등의 온갖 잡일을 맡아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왕조 초반기에 유수는 불교 승려들이었다. 이와 함께 화척(훗날의 백정)이나 재인(광대)들이 유수의 무리로 지목되었다. 무엇보다 조정의 불만은 이들이 세금과 부역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다른 유수들은 바로 장사꾼이었다. 유수들은 각 지역의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자료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은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 승려들은 공사에 동원된 후에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승려자격증인 도첩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일찍부터 사찰이나 탑 등과 같은 건축물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죽음을 다루는 직업, 오작인(?作人)과 망나니


오작인들은 시체를 살펴보는 일을 했다.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쓴다. 만약 사망 원인이 분명치 않으면 검시를 한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했다. 의문의 죽음에는 검시가 필요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려내고 사망 원인을 찾는 것이 첫 번째였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두 번의 검시를 했다. 만약 의심이 나면 검시를 4차까지도 했다. 검시를 맡은 관부는 형조다. 형조 관원이 법률을 맡은 율관, 의사인 의관, 그리고 한성부 서리와 오작인을 데리고 검시를 한다. 살인의 경우는 먼저 진술서부터 받는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보통 회자수 즉 사람을 끊는 기술자라고 불렸다. 끔찍한 일이다. 원래 회자수는 군대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뜻한다. 군법은 일반 형법보다 엄한 탓에 사형이 많았다. 이를 집행할 사람이 필요했고, 회자수는 정식으로 군대에 배치되었다.

 
소를 잡아서 먹고 살다, 거골장(去骨匠)


거골장은 뼈를 발라내는 기술자라는 뜻이다. 그 대상은 소나 말이다. 우리에게는 '백정'이란 말이 더 익숙하다. 조선사회에서 철저하게 천대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백정들이 이런 천시를 받지는 않았다. 이들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재인(광대)이나 화척이 그들이었다. 더 멀리는 양수척이 그들의 원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