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머무르다

연산군묘

바람과 술 2013. 5. 22. 12:18

연산군묘(사적 제 362호) :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왕비의 묘역


연산군(1476~1506년)은 성종(1457~1494)과 윤기무의 딸 폐비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기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실록에 실려 있는 시가 130여 편이나 될 정도로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즉취 조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었고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의 동정이나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으며,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호적식년을 개정하여 백성의 불편을 해소하기도 하였고 비융사를 설치하여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모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즉위 초기에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없애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하여 크나큰 옥사와 많은 선비를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으며,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여 회료를 회릉이라 고친 뒤 성종 능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거듭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했다. 거창군부인 신씨(연산군 부인) 사이에서 2남1녀, 후궁 소생으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다. 연산군묘는 그간 비공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연산군묘 둘러보기


연산군묘소와 역사를 같이한 은행나무 -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800~1,000년이 되었으며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묘 재실 - 재실은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묘를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묘의 조성 과정


능, 원, 묘의 차이는 - 왕족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을 하는데 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말하며,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묘라고 하였다. 연산군 및 광해군 묘소의 경우 한때는 왕이었으나 폐위되어 군을 격하되었기에 능이 아닌 묘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연산군묘 조성 과정

 1494~1506년  연산군 즉위 기간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
 1506년 11월  강화 교동 부근당에서 서거, 초기 장지는 강화도 교동 부근당 주위
 1513년  군부인 신씨의 상언으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
 1524년  연산군 딸(휘순공주), 사위(부마 능양위 구문경) 묘소 조성
 1537년  군부인 신씨의 묘소 조성

※ 의정궁주 조씨 묘소는 1454년 조성되었음.


묘의 상설 : 대군의 예우에 따름 - 곡장, 상석 2, 장명등 2기, 향로석 1,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 표석 2기, 재실.


연산군의 눈물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 가난한 양반집안의 딸인 윤씨는 집안이 궁핍해지자 궁에 들어가 빼어난 미모로 1473년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 공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1482년 사약을 받았다.


어린 왕자들의 요절 - 연산군은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와 혜 숙의 윤씨 등 후궁, 숙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출생하였으나 어린나이로 요절한 왕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년)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궁주묘를 조성하였고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위 쪽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묘 관람정보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30 / 동절기(11월~2월) 09:00~17:30

관람소요시간 - 약 30분

정기휴일 -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 무료


찾아가기


주소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02-3494-0370)


- 연산군묘와 영화 <왕의 남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재미가 있다. 연산군묘는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었는데, 공개된 이유가 영화 <왕의 남자>의 인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동안 비공개였던 연산군묘는 영화 <왕의 남자>의 인기로 인한 관심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연산군묘의 정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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