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감정자본주의], 에바 일루즈, 김정아, 돌베개, 2010, (140311).

바람과 술 2014. 3. 11. 03:25

감사의 말 


여는 말


전통적으로 사회학자들은 모더니티를 자본주의의 도래,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발생, 또는 개인주의 이념의 윤리적 위력과 관련시켜서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사회학에서 모더니티에 대한 저명한 논의는, 잉여가치, 착취, 합리화, 탈주술화, 또는 노동분업 같은 익숙한 개념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한편으로, 모더니티를 감정들과 관련시켜 기술하거나 설명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전자는 장조라면, 후자는 단조였다). 우리가 모더니티에서 감정의 차원(비교적 쉽게 눈에 띄는 차원)을 발굴하게 되면, 근대적 자아됨 및 정체성의 구성요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할, 이러한 분할과 젠더 구분 간의 관계 등에 대한 권위 있는 분석들이 심각한 변화를 맞게 되리라는 것이다. 감정은 온전한 의미의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적인 에너지, 행동에 특별한 '기분' 또는 '색조'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감정이란 행동의 한 측면, 곧 '에너지가 실린'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인지, 정서, 판단, 욕구, 육체 등을 모두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감정은 사회 이전 문화 이전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 바로 그것이다. 감정이 행동에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어떻게 이러한 '에너지'를 보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감정이 언제나 자아의 감정이요, 자아와 타자들(문화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타자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심리 단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은 문화 단위이자 사회 단위이다. 곧 감정이 표현되는 장소는 구체적·즉각적 관계이된 항상 문화적·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관계이며, 이로써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됨의 문화 규정들을 구현하게 된다. 


1장 호모센티멘탈리스의 탄생 

프로이트와 클라크 강의 

프로이트는 문화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우선 프로이트는 그때까지 병리라는 규정되던 것을 정상의 범주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정상의 영역을 확장했다(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성적 발달이 동성애와 함께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어 프로이트는 정상성 그 자체를 문제로 만들었으며 이로써 정상성을 도달하기 힘든 목표로 설정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는 정상성을 각종 문화 자원들을 동원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예를 들어 이성애는 이제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그런 경계를 체계적으로 흐려놓은 인물이다. 요컨대 프로이트의 손으로 세워진 것은, 새로이 캐스팅된 병리적 인물들로 우글대는 새로운 종류의 정상성이요, 결말이 열려 있는 자아 프로젝트요, 막연하면서도 강력한 자아 목표이다. 


기업 마인드의 재구성


전통적으로 자본가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로 그려져온 반면, 새로운 경영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경영자는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고 예측 가능한 존재이자 새로운 표준화와 합리화의 규칙들을 제시하는 존재였다. 엔지니어들은 인간을 기계로 파악하고 기업을 비인격적 경영체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엔지니어들의 수사와 나란히 혹은 그에 뒤이어, 또 하나의 담론이 출현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심리학자들이 가장 먼저 주창했던 이 두분째 담론은 개인이라는 단위, 노사관계의 비합리적 차원, 그리고 노동자의 감정을 매우 중시햇다. 20세기 초부터 실험심리학자들은 경영자들로부터 사내 규율과 생산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엘튼 마요는 두 가지 점에서 경영이론에 혁명을 일으켰다. 첫째, 자아됨이라는 윤리의 언어를 심리학이라는 냉정한 학문의 용어로 개조했고, 둘째, 한창 기세등등하던 합리성이라는 엔지니어들의 수사를 '인간관계'라는 새로운 어휘로 대체했다. 마요가 보기에 갈등의 원인은 부족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헝클어진 감정, 인성 요인,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 같은 것이었다. 곧 마요의 연구 이후 가정과 직장 사이의 (담론적) 연속성이 확립되었으며, 정신분석학적 구상이 경제적 효율성의 언어의 핵심에 놓이게 되었다. 마요의 연구가 지닌 의의는 또 있다. 마요는 감정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통해서 관리자의 성격을 유화시켰다. 빅토리아 시대의 감정 문화는 남자와 여자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할했다. 이에 비해 20세기의 치료 문화는 감정생활을 직장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남녀의 경계와 공사의 경계를 약화시키고 교란시켰다. 

 
새로운 감정양식 

심리학의 언어는 기업형 자아의 담론을 구성함에 있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번째 이유는 심리학의 언어가 자본주의적 직장의 변화상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심리학의 언어가 새로운 형태의 경쟁과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경영자들과 회사 사주들이 보기에 심리학의 언어는 자기 쪽 이해관계에 특히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리학이 이윤을 늘리고, 노동 소요를 막고, 경영자-노동자 관계를 비대결적 방식으로 조직하고, 계급투쟁에 감정과 인성이라는 무해한 언어를 적용함으로써 계급투쟁 자체를 무력화할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노동자 쪽에서도 심리학의 언어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비교적 민주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기업에서 심리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을 새로운 노동통제 방식, 곧 교묘하고 따라서 더 강력한 통제방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심리학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 이유는, 그것이 권력 관계였던 노동자-경영자 관계를 민주화하고,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인성이 사회적·경영적 성공의 열쇠라는 새로운 믿음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기업정신으로서의 소통윤리 

소통이 기업형 자아를 정의하는 핵심적 특징이 되어온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첫째로 사회관계의 민주화에 따라 규범의 구조가 바뀌었다. 곧 기업 조직들은 위계적 구조가 심화되었는데, 사회관계들은 민주화가 심화되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경향을 화해시킬 절차상의 규칙들을 수립할 필요가 생겼다. 둘째로 직업 능력, 직업 수행을 내면의 자아, 진실한 자아의 산물이자 반영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인정'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경제 환경이 점점 복잡해졌고,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이로 인해 기술은 빠르게 낙후되어갔다. 그러다 보니 성공의 기준 자체가 변화와 모순에 처했고,자아는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직장의 불확실성과 긴장을 조절할 책임은 모두 자아에게 돌아갔다. 경제 영역은 감정이 결여된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로 가득한 영역이 되었다. 감정 자본주의는 여러 감정 문화들을 재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 


근대적 가족의 장미와 가시 : 심리학자들이 결혼에 개입하다


치료언어는 처음 만들어질 당시부터 가족 내러티브였다. 곧 치료언어는 자아를 아동기에 그리고 일차적 가족관계에 종속시키는 내러티브, 자아와 정체성의 내러티브였다. 또한 치료언어는 가족-특히 중간계급 가족-의 변화상과 연동하는 언어였다. 베버에 따르면 합리화란 계산 테크닉의 심화발전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감정 조절, 가치와 목표의 명료화, 계산 테크닉의 사용, 감정의 탈맥락화 및 객관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수반되는 것이 바로 친밀한 결속의 지식화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화는 좀더 광범위한 도덕적 목표를 지향한다. 나의 욕구와 감정과 목표를 냉정한 언어적 소통 앞에 제출함으로써 평등과 공정한 교환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지성화의 목표이다.  

 
결론


소통 모델이란 감정을 내면생활의 영역에서 추출하고 이렇게 추출된 감정을 자아됨과 사회성의 핵심으로 삼는 설명틀 겸 방법론이자 윤리적 동력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 남녀 모두 감정적으로 양성화되는 경향이 커졌다. 요컨대 생산 영역이 정서를 사회성 모델의 중심에 놓았다면, 친밀한 관계는 점차 정치적·경제적 협상·교환 모델을 그 중심에 놓게 되었다. 노동관계와 결혼관계에 널리 퍼지게 된 소통 모델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필요를 포함·수행하고 있다. 노동 영역과 친밀한 관계의 영역에 널리 퍼져 있는 '소통' 모델은 매우 양가적이다. 곧 소통 모델은 한편으로는 타인과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론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적 대인관계의 영역과 양립할 수 없는 권리의 언어, 경제적 생산성의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 감정이란 본디 상황적이고 지표적이다. 감정은 특정 대상에 대한 암묵적·구체저 문화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그 대상을 평가하고 상대할 때 지름길을 가게 함으로써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반면에 가치합리성, 인지적·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통약' 과정은 (소통 모델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관계에서 특수성을 제거함으로써 관계를 일종의 사물로 바꾸는 인지양식을 구성한다. 관계가 사물이 된다는 것은 공정성, 평등/등가, 욕구충족 같은 기준으로 평가됨으로써 상품의 운명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사회관계에서 감정적 얿힘을 유보해야 한다. 소통한다는 것은, 구체적·개별적 관계 속에 처해 있는 내 입장에서 빠져나온다는 뜻잉, 나의 자율성 또는 나의 이해력을 주장하며 추상적 화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뜻이다. 결국 소통하기란 감정적 결속을 유보하는 일종의 괄호 치기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면, "인정이란 자기상실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인정 받는다는 것은 상대방 속에서 나를 잃는다는 것, 나 자신이나 나 자신이 아닌 어떤 타자 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에 의해서 전유된다는 것이다."  


2장 고통, 감정 장, 감정 아비투스 

1859년에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기계발(Self-Help)>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광범위한 인기를 누렸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무명시절을 거쳐 부와 명예를 거머쥔 남자들의 생애를 소개한 책이었다(자기계발은 남자의 전유물이었으며, 성공 내러티브나 자립 내러티브에는 여자들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혹은 없었다). 이 책은 엄청나게 많이 팔렸는데, 그만큼 개인의 책임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마일즈가 생각하기에 자기계발의 힘이란 자수성가의 힘이었다. 요컨대 자기계발의 이상은 굳건한 민주주의의 함축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적 고통이 전반적으로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정신치유가 엄청나게 수지맞는 장사이자 번창하는 산업이 된 것이다. 


자아실현 내러티브


치료학이 자기계발 내러티브의 새 버전으로 거듭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의 개입이 있었다. 첫째는 심리학 이론에 내부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곧 심리학이 프로이트의 결정론에서 점차 이탈하면서, 자기발전을 바라보는 좀더 낙관적이고 비제약적인 관점을 제공했다. 둘째로 이러한 심리학 내러티브, 곧 자아가 스스로 변신하고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음을 인정하느 내러티브를 널리 유포시킨 것은 바로 1939년 포켓북스로부터 시작된 '문고판 혁명'이었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값싼 책을 손쉽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문고판 혁명 덕에 대중 심리학이 겨냥하고 포섭할 수 있는 중간계급 및 중하계급 성원들이 점점 늘어났다. 셋째로 심리학자들의 권위가 점점 높아지다 보니 개인주의적·심리학적 자아 개념에 대한 반론이 될 만한 정치 이데올로기들이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세력을 잃었다. 넷째, 인간의 발전에 대한 심리학적 관점들이 문화적인 자아 개념들을 관통·변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관점들이 자유주의적 관점-자기계발이 하나의 권리라는 관점-과 공명했기 때문이다. 치료학 에토스는 한때 모종의 지식 체계였지만, 시자에서 유포됨에 따라 이제 레이먼드 월리엄스가 말하는 이른바 '감정 구조'가 되었다. 감정 구조라는 개념은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을 지칭하고 있다. 우선 '감정'은 모종의 무정형의 경험을 가리킨다. '구조'개념은 감정의 차원에 모종의 구조가 있음을 암시한다(곧 구조는 우연적이 아니라 체계적이다). 실제로 치료학적 자기계발 문화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적 경험에서 무형적인 측면에 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 및 타자에 대한 인식, 자서전 장르, 대인관계를 조직하는 고도로 내면화된 문화 도식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치료 내러티브는 특화된 시장을 창출한다. 둘째, 치료 내러티브는 감정-이 경우에는 죄의식-을 공적 대상, 곧 발현의 대상, 토론의 대상, 논쟁의 대상으로 만드다. 주체는 '사적' 감정들을 구성·발현함으로써 공적 영역에 참여한다. 셋째, 내가 내 인생의 이야기를 치료 내러티브로 다시쓰기 하는 원동력은 바로 이야기의 목표이다. 치료 내러티브가 광범위한 문화적 반향을 불러일으켜온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① 치료 내러티브는 모순되는 감정들(예를 들면,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사랑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자기주장이 부족하거나)을 검토·해명한다. ② 치료 내러티브는 종교 내러티브의 문화틀, 곧 과거지향적인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시간 틀을 사용한다. ③ 치료 내러티브는 나를 내 정신적 행복의 책임자로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윤리적 실책의 개념을 모두 제거한다. ④ 치료 내러티브는 그 자체가 일종의 수행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갓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곧 치료 내러티브가 경험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경험이 경험으로 재구성된다. ⑤ 치료 담론은 모방 가능하고, 친척, 자녀의 자녀, 배우자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면에서 전염성이 있는 문화구조라고 할 수 있다. ⑥ 치료학적 전기물은 경제적 투자를 전혀 혹은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상품이라 할 만하다. ⑦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하자면, 치료 내러티브가 출현한 배경에는 각종 권리 개념들이 지배하는 문화가 개인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고, 개인들과 집단들이 점점 '인정'-내 고통에 대한 각종 제도들의 승인 및 배상-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심리학이 아이러니하게 적잖은 고통을 창출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첫째로 심리학의 주요 사명이 건강과 자아실현이라는 막연한 이상에 의지해 갖가지 종류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치료학이라는 설득 담론이 사실상 개인적 고통의 기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감정 장, 감정 아비투스


감정 장이란, 사회생활의 한 영역, 곧 국가, 학계, 각종 문화산업, 국가와 대학이 인가한 전문가 집단, 대규모 의약 및 대중문화 시장 등이 이러저리 교차함으로써 창출되는 모종의 작용·담론 영역을 가리키며, 그 나름의 규칙과 대상과 경계를 갖고 있다. 심리학의 여러 학파들이 서로 경쟁하고, 정신의학과 심리학 또한 경쟁관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쟁자들 사이에는 궁극적인 합의점이 존재한다. 감정생활을 관리와 조절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는 점과, 감정생활을 점점 확장되고 있는 건강의 이상에 따라서 규제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감정 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병리의 영역을 구축·확대하는 것과 감정건강의 영역을 상품화하는 것이 하나ㅣ고, 이른바 감정능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능력에 대한 접근권을 규제하는 것이 또 하나다. 문화능력과 마찬가지로, 감정능력은 직업상의 출세 또는 사회자본 같은 사회적 편익으로 번역 가능하다. 미국 맥락에서 볼 때, 감정능력이 가장 형식화되어 있는 곳은 직장, 특히 직장 내 인성검사이다(인성검사는 미국 회사에서 사원 채용 제도로 정착되어 있다). 인성검사와 감정의 관계는 학력검사와 문화자본의 관계와 같다. 감정지능(EI)이란, "사회 지능의 한 유형으로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점검하고, 감정 간의 차이를 식별하며, 이렇게 얻어진 정보를 활용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이다." 감정지능에 속하는 능력은 자기인식, 감정관리, 동기부여, 감정이입, 관계조율이라는 다섯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감정지능 개념을 토대로,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대규모로 변화시켜놓은 사회와 문화의 새로운 특징들을 가늠할 수 있었고, 이로써 사람들을 등급화할 새로운 방식들을 고안할 수 있었다. 감정지능은 자아수행을 경제적 수행의 핵심으로 하는 경제에서 요구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심리학자들의 강도 높은 전문화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감정 생활을 정의하고 규제할 자격을 독점해왔으며, 이로써 감정생활을 장악하고 관리하고 계량하기 위한 새로운 척도를 세워왔다. 감정지능이란 아비투스의 한 형태로서, 감정지능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자본이다. 문화자본이 신분 기호의 핵심이라면 감정약식은 네트워크 마련(강한 네트워크와 약한 네트워크가 모두 포함된다)과 사회자본 축적(곧 사회학 용어로, 개인적인 관계나 승진이나 재산증식 같은 자본의 형태로 전환되는 방식들을 가리킨다)의 핵심이다. 

 
심리학의 화용론


리처드 세넷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표류하는 성향을 띠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인생사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의 문제이다." 치료학 모델이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각종 집단들과 제도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일 뿐)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아를 구성하는 문화 도식들을 동원함으로써 후기 모더니티의 사회관계들의 무질서한 구조에 질서를 부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결론


행동의 감정 장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정체성이 공적으로 노출되는 것, 공적으로 서사화되는 것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감정이 사회등급화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행복(사회적·역사적으로 행복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을 획득하는 능력)에 새로운 위계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3장 로맨틱한 웹 

육체가 없어지는 덕분에 감정들은 좀더 진정한 자아에서 발원하게 되고 역시 좀더 진정한 대상, 곧 상대방의 탈육체적 진짜 자아로 흘러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이 옳다면 감정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별한 문제가 발생한다. 감정 일반, 특히 로멘틱한 사랑은 육체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듯 감정이 육체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때, 인터넷이 육체를 없앤다면(인터넷이 육체에 대해서 괄호 치기를 실행한다면), 인터넷이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좀더 정확히 말해서, 테크놀로지는 신체와 감정을 어떻게 재절합(rearticulation)하는가?


인터넷과 로맨스를 

온라인데이트 

존재론적 자기소개


규격화와 반복 


인터넷은 사랑의 전통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준다. 첫째, 로맨틱한 사랑은 즉흥성의 이데올로기에 의존해온 반면, 인터넷은 파트너 선별 방식을 합리화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전통적으로 로맨틱한 사랑은 성적인 끌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성적인 끌림은 두 사람의 육체가 동일한 공간에서 마주칠 때 유발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에 인터넷의 토대는 육체를 벗어난 텍스트 상호작용이며, 결과적으로 인터넷에서는 합리적 검색이 육체적 끌림에 선행한다(전자는 후자에 비해서 시간적으로도 앞서고 접근방식으로서도 우세하다). 셋째, 로맨틱한 사랑은 사심 없음을 전제한다. 반면에 인터넷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구조화된 시장 내부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매기는 '가치'를 중시하며, 이로써 로맨틱한 상호작용의 도구화를 심화한다. 넷째, 사랑은 비이성적이다. 반면에 인터넷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인지적 이해가 내 감정에 선행한다(전자는 후자에 비해서 시간적으로도 앞서고 중요성에서도 앞선다). 마지막으로, 로맨틱한 사랑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가정되는 때가 많다. 반면에 인터넷의 취지라고 하면, 풍요경제·교환성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곧 인터넷데이트는 풍요경제 위에 기초하는 대량소비의 원칙들-끝없는 선택, 효율성, 합리화, 목표설정, 규격화0을 로맨틱한 만남의 영역에 도입했다. 우리는 로맨틱한 감수성의 주요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전통적인 비판론, 특히 문화연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비판론은 이른바 '순수성에 대한 갈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문화를 그토록 중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문화를 아름다움, 도덕성, 정치의 이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발견해야 하는)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순수한 비판론은 문화를 정치 영역 안에 포섭하는데, 그러다 보니 순수한 비판론이 결국 하는 일은 문화가 어떻게 해방의 수단이 되거나 억압의 수단이 되는지, 문화가 어떻게 '쓰레기'를 만들어내거나 '보물'을 만들어내는지 그 방법들을 열거하는 일이 되어왔다. 순수한 비판론의 두번째 약점은 총체적 시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순수한 비판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영역(문화)이 다른 사회 영역(경제·정치·국내)을 반영하는 동시에 구성하고 있다는 가정과 모든 영역들이 좀더 근본적인 구조적 사회 논리에 따라서 기능적·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곧 문화란 모든 사회 영역들의 관점에서 분석돼야 한다는 가정과 문화와 사회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같다는 가정이 비판이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 영역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속성이 없다. 곧 여러 사회 영역들이 반드시 서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좀더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영역(이를테면 경제)에서 퇴행적인 것이 또 다른 영역(이를테면 문화)에서 진보적인 것일 수도 있고, 후자에서 퇴행적인 것이 전자에서 진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문화분석을 정치 영역 안에 포섭하는 순수한 비판론의 세번째 문제는 문화와 정치의 언어 사용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문화를 정치로 포섭하려 할 때 발생하는 마지막 문제는 비평가가 신의 자리와도 같은 머나먼 자리로 쫓겨나게 된다는 데 있다. 문화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이러한 비평적 거리는 점점 더 근거를 잃고 있다. 비판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는 신적인 순수성을 버리고 평범한 작용주체들의 구체적 문화 실천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모색할 때이다. 그러다 보면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비평가는 고도로 상품화된 전장을 비판하면서도 비평가 자신도 (선택이든 필연이든) 전장 안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런 만큼 순수성은 더욱 훼손돼야 한다. 오늘날의 비판론 가운데 자본주의 제도들 및 기구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판론을 포기하고 온갖 사회 영역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시장 세력 못지않은 교묘한 해석 전략들을 계발해야 한다.  


판타지와 실망


로맨틱한 상상력은 육체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른바 감지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반면, 인터넷 상상력은 지각의 실존적 배경을 제거하는 인지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결론 :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행보 

정신분석학이 탄생했던 배경에는 자아가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고 사적 영역이 감정으로 침윤되는 현상이 있었다. 그러나 심리학이라는 설득 담론은 생산성 언어 및 자아 상품화와 결탁함으로써 (가정, 회사, 격려집단, TV 토크쇼, 인터넷 등 온갖 사회 거점에서) 감정적 자아를 공적 텍스트 및 공적 수행으로 만들었다. 자아 합리화 및 자아 상품화가 자아의 해방과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해도, 우리는 절대로 이 두 가지를 섞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권력을 쾌락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옮긴이 후기 

저자가 감정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 모순을 은폐하는 중간계급의 이데올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 모순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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