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토머스 네이글, 조영기, 궁리, 2014, (140611).

바람과 술 2014. 6. 11. 14:20

1. 서문 


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아주 흔한 개념들에 대해 질문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철학의 개별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라 믿는다.


2.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를 아는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마음 내부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그 믿음은 우리의 경험, 생각, 느낌과 감각인상(sense impression)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정 증거에 의존하여 시각 경험이 어떻게 야기되었는지 설명하려면, 외부 세계에 대해 말해주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먼저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정확하게 우리가 질문하던 바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상에 호소하여 우리의 인상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어떤 결론도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는 어쨌든 우리의 마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증거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경험의 주체인 당신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물리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회의주의적 가정에서 우리의 마음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를 유아론(solipsism)이라 부른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유일한 근거라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 밖에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외부 세계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가 지금 당신에게 보이는 것과 전적으로 다를 수도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우리는 그 차이를 알 길이 없다). 이와 같은 입장을 외부세계에 대한 회의주의라고 부른다. 회의론자들은 다음 두 가지로 답할 것이다. 첫째, 외부 원인이 존재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원인들에 대해 우리 경험의 내용과 구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우리는 이 원인들 중 어떤 것도 직접 관찰한 적이 없다. 둘째,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의 근거는 무엇인가? 일상적이고 비철학적인 맥락에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과정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외부의 것들로 야기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마음 밖의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마음속 내적 과정이 외부의 것들에 야기된다는 것을 참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리는 단지 우리의 마음 안을 들여다본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원리가 세계에 적용된다면 우리가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관념은 바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다(이 견해는 종종 검증주의 verificationalism 라고 불린다). 가끔씩 우리의 관찰은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틀린 관찰들이 다른 관찰들에 의해 수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관찰할 수 없는 한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는 여기에서 바로 (물론 회의주의자 자신을 제외하고는) 물리적 세계 혹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관찰할 누구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뿐인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아론도 무의미하다. 유아론은 우리가 가진 인상들 가운데 외부 세계에 대한 인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인상들 가운데 어느 것도 외부 세계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면, 인상들은 더 이상 단순히 인상이 아닌 실재에 대한 지각들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 안에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심각하게 믿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철학적 논변으로 제거될 성질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한다고 단지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믿는다. ⒜ 그러한 우리의 믿음들은 전적으로 거짓일 수 있다. ⒝ 우리는 ⒜가 참일 가능성을 배제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이 남아 있다. ①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유의미하게 가능한가? 또는 당신의 마음 밖에 세계가 존재하더라도 그 세계가 당신이 믿는 바와 전적으로 다를 수도 있는가? ② 만일 ①에서 말한 일들이 가능하다면, 그 일들이 실제로 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③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 밖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의 존재를 계속해서 믿는 것은 올바른가?    


3. 타인의 마음 

우리 자신 외의 타인의 본성, 나아가 타인 마음의 존재, 또는 타인의 경험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것을 통해서도 타인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느낌에 직접 접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실제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은 당신 자신의 경험뿐이다. 가정이 설정하는 상황은 당신이 과거에서도 그 가정을 증명할 어떠한 증거도 가질 수 없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타인 마음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회의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마음, 행동, 인체의 구조, 물리적 환경이 서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경우는 당신 자신뿐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경험 자체를 직접 관찰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경험이 부재한다는 것 역시 관찰할 방법이 없다. 그 결과 경험과 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관관계가 부재한다는 사실 또한 관찰할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결국 다음 질문으로 귀착된다. 당신 자신의 마음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 당신이 이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의식 현상에 대해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당신이 가정하고 있는 것보다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 활동이 훨씬 적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당신을 제외하고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훨씬 많은 의식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의식이 없다고 가정했던 사물들도 사실은 의식을 가졌을 수 있다.)


4. 마음과 몸의 관계


이 세계에는 아주 다른 두 가지의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물리적 실재에 속하는 것들로서, 많은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적 실재에 속하는 것들로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경험하는 것들이다. 

 
5. 단어의 의미 

정의를 통한 의미 부여가 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국 정의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의미를 갖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 의미의 이해가 힘든 까닭은, 의미는 어디에서도 그 위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의미는 단어 안에도, 마음 안에도 없다. 그리고 의미는 단어와 마음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사이에서 배회하는 분리된 개념이나 관념 안에도 놓여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계속 언어를 사용하며, 언어는 광범위한 시간과 공간에 걸친 복잡한 사유를 할 수 있게끔 한다. 언어가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은 물론 중요하다. 언어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언어라는 기존의 체계에 접속한다. 


6. 자유의지 

결정론은 우리가 우주의 모든 법칙들을 알며, 그 법칙들을 이용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복잡한 상황들을 알 수 없으며, 둘째, 상황들에 대해 무엇을 알아내어 예측하려는 행위 자체가 상황을 다시 변화시키는데, 상황이 변화하면 예측한 결과 역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측 가능성의 여부가 핵심이 아니다. 결정론이 일어나는 모든 일에 들어맞지 않더라도(말하자면 어떤 일들은 이전에 있던 원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그냥 일어나더라도), 적어도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전에 미리 결정되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문제다. 행위가 미리 결정되었다면, 그것은 불가피하다. 즉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서 다르게 행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겠는가? 또한 만일 우리가 그를 비난하지 않거나 처벌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할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처벌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행동을 교정하려는 것이다. 선택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당신은 그 이상을 믿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행위를 당신이 행하여 결정했다고 믿는다. 행위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일어난 것도 아니다. 당신이 그 행위를 했고, 당신은 반대되는 행위를 할 수도 있었다. 우리의 선택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지 않은 행위를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드 가지 중 어느 것이라도 선택할 수 있지만, 내가 그 선택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의 통제를 벗어난 원인들에 의해 선택이 결정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선택은 내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 선택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그 선택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결정론이 참인지 거짓인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는 놀랄 만한 결론을 함축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 역시 가능하다. 이 견해는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완전히 반대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려면 행위가 결정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주장하는 바는, 어떤 행위가 당신이 한 행위가 되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어떤 원인이 산출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위가 어떤 것에 의해서는 결정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 당신이 행한 것이라기보다는 예기치 않게 일어난 무엇이기 때문이다. 만일 나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나의 선택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선택을 결정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런 결론을 피하려면, 당신은 ⒜ 행위한 것과 다르게 행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이것이 사실이려면 당신과 세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7.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이 단지 우리에게만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한다.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단일한 기준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사람들의 근본적 동기가 서로 다르며,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행동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기준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다를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첫째, 동일한 일은 모두에게 똑같이 정당하거나 부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당한 바는 행하고 부당한 바는 피해야 할 이유가 있지는 않다. 이 답변은 도덕의 보편성을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도덕이 갖는 강제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 모든 사람은 정당한 바를 행하고 부당한 바를 피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동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유들은 우리의 동기들이 정당화지 않을 때 동기를 바꾸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동기에 의존하지 않는 보편적 이유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셋째, 도덕은 보편적이지 않다. 한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이때 행위의 이유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신경 쓰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한 가지 점에서 도덕은 분명히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다. 당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적 기준들을 이처럼 비판할 때에 당신은 그 사회의 대부분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 즉 실제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 이 기준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기준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한, 우리 대부분이 이해하는 관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원하는 것을 한다. 그러나 하기를 원하는 이유와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도덕적 논변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공평성을 추구하는 능력에 호소한다. 불행히도 그 공평성을 향한 동기는 깊이 묻혀 있어 어떤 경우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여하튼 그 공평성의 동기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이기적 동기들 그리고 반드시 이기적이지만은 않은 다른 개인적 동기들과 경쟁한다. 도덕을 정당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 하나의 동기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동기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8. 정의 

불평등에 개입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은 무엇인가? 문제는 부당해 보이는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인들 중에 부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9. 죽음 

10. 삶의 의미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