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신을 말하다], 나름북스, 2013, (140806).

바람과 술 2014. 8. 6. 13:24

펴내며 

‘유신 괴물’, 비켜가기와 대결하기 / 이만열


1972년 10월 17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느닷없이 '대통령 비상조치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약 2개월간의 현행 헌법의 일부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선포했다. 이 특별선언이 '유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일대 유신적 개혁'이라는 구절에 의해서다.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절대권력을 보장한 유신헌법이 공포되는 바로 그날, 북한에서 김일성을 초법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사회주의 헌법이 공포된 것이다.   

왜 대중은 그를 그리워하는가 ‘박정희 앓이’ 사성제 / 한길석 

■ 고제 : 모두가 박정희를 앓고 있다 

미신(?)에 홀린 대중


인지적 치료


왼쪽으로 가는 의사, 오른쪽으로 가는 환자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


키스와 침뱉기


이상한 고해성사


모의재판의 추억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 집제 : 빈곤의 공포가 우리를 앓게 한다 

범죄의 재구성


‘연가시’ 재난


필연적 삶의 요구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 

한마디로 한국인은 개발과 성장의 역사에서 정체성 및 실존을 확인했다. 그들에게 건설하고 개발하지 않는 사회란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실존적 자기 회의를 유발하는 사회다. 


■ 멸제 :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기 

zoe와 bios, 필연적 삶과 정치적 삶의경계 망각


정치적 삶의 의미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은 인간 해방을 위한 구호로서 울림도 있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 새겨진 문장 'Arbeit macht frei'이기도 했다. 


정치적 삶의 어려움 

■ 도제 : 무엇을 할 것인가 

기억의 전이


구제금융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우리는 빈곤의 재림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기억의 자기 교정


집단적 생계 공동체의 건설에서 민주적 공동체의 정착으로 

박정희의 리더십과 퍼스낼러티 정치 주역의 출현, 기원, 신화에 관한 시론 - ‘혁명공약’을 중심으로 / 이승원 

■ 들어가며 

■ 출현과 기원 

■ 신화가 되어가기 

군사혁명위원회가 자신들의 혁명공약과 함께 정치무대에 출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혁명공약 4가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반공주의', '한미동맹', '조국통일', '부패청산'이 그것이다. 여기서 앞의 세 가지는 한반도의 정세로부터 주어지는 군부의 존재 이유에서 찾을 수 있으며, 마지막 '부패청산'은 기존 정치인들과 확연히 분리된 그들의 진화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 박정희 퍼스낼러티의 정치적 영향력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 윤보선, 장면과 같은 기성(부패한) 정치인들이 박정희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의 필부들, 당시의 나머지 2천7백만 대중과도 너무도 달랐으며 이와 달리 그 필부들, 2천7백만의 대중은 박정의로부터 각자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는 박정희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친일경력을 투영할 것이고, 누구는 빈농의 경험, 누구는 좌익의 아픔, 누구는 한국전쟁의 공포, 누구는 전통과 권위적 윤리를 뛰어넘는 영롱한 사랑을 반성할 것이다. 모두에게 비난받고, 누구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공황적 정체성으로 박정희에게 접합된 '복합적 정체성들'은 분명 그의 정치의 불가능성으로서 충분한 조건이었지만, 오히려 현실은 그를 대중이 가장 사랑하고 가깝게 생각하는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으로 그렸을지 모른다. 


■ 한국 거대 보수 담론의 탄생 -시론 

■ 나가며 -시론적 결론 

유신체제의 자본축적 메커니즘 / 김창근 

1961년 4·19혁명의 성과를 쿠데타로 짓밟고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 문제에 시달렸고, 집권초기부터 경제성장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한다. 


■ 유신체제와 박정희식 중화학 공업화 정책의 등장 

1960년대 경공업 수출 촉진 정책의 위기


경제적 유신 선포로써 8·3조치 

■ 유신체제하의 중화학 공업화의 성격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 계획


중화학공업 육성 지원 정책과 중화학 공업화의 성과


중화학 공업화의 문제점과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의 경제위기 

■ 박정희식 중화학 공업화와 한국 자본주의의 현재 

새마을운동과 동원체제 농민 동원의 사회적 기반 / 김영미 

■ 들어가며 

■ 정의와 범주 - 복수의 ‘새마을운동’들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먼저 두 가지의 연관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 과연 무엇을 새마을운동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둘째, 1970년대 농촌사회의 변화를 모두 정부 정책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복수의 새마을운동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관제농민운동이었다. 많은 농민의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성공'이다. 새마을운동은 정부의 창안물이기도 하지만 이미 농촌사회에 존재한 것이기도 하다.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각인된 '무기력한 농민'과 '전능한 정부'라는 새마을운동의 이분법저기 구도는 위대한 정부의 역할을 만들어내기 위해 생격난 하나의 신화였다. 정부의 새마을운동에서 농민은 잘사는 것을 선택하는 완전한 자율적 주체가 아니며 국가의 목적에 위배될 때 그 자율이 제한되는 반자율적 주체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농민은 국가의 의도대로 움직였을까? 그러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이렇게 보면 새마을운동에 나타나는 농촌 마을의 변화란 정부의 지도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지도에 반발하고 농민이 자율적으로 행동한 저항의 결과이기도 하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1970년대 농촌사회변화는 정부 정책의 효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정부가 마련한 새마을운동이라는 '판'은 농촌을 근대화하고 지지기반을 마련하려는 정부의 욕망이 관철되는 곳이기도 했지만, 잘 살려는 농민의 욕망이 분출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 발견된 ‘새 마을’, 창안된 ‘새마을운동’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준비된 기획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새마을운동의 중층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정부도 예상치 못한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확인함으로써 대대적인 국가시책으로 정립 및 확대 발전되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마을 간 불균형 개발전략, 혹은 선택적인 차별 지원전략을 생각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사업'이 '운동'으로 전환된 것은 주체의 대전환이며 이 전환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나왔다. 박정희는 실제로 부락민들의 자생적인 운동,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마을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본 것이다. 1970년 10월부터 정부는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에 시멘트 335부대씩을 지원하여 전 리·동에서 일제히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게 했다. 재고 시멘트를 새마을가꾸기 사업에 투입한 것은 1970년 여름 우발적으로 결정되었다. 마을당 배포된 시멘트 양이 가구당 4부대로 적지 않았지만 단지 시멘트만 배포되었을 뿐이다. 주민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다. 시멘트가 새마을 운동을 유발했다는 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파악이다. 1차년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내무부의 평가는 대단히 흥미롭다. 성공한 마을의 원인을 캐보니 그곳에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준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이런 농민의 열광적인 호응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그 방안 역시 그들 농민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었다. 농촌 마을의 자생적 성공사례의 국가적인 동원과 전유의 과정이 집행되었다. 새마을 성공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국가의 새마을운동과 '접속'라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이것은 지역 사회의 자발적인 노력이 국가적으로 동원되고 전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지역 사회에 자생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농촌운동가들은 국가의 호명을 받게 되었으며 새마을의 '기수'로 불리게 되었다. 


■ 전후 마을공동체의 변화와 ‘새 농민’들 

1960년대 전후한 시점부터 마을공동체를 주도하는 새 농부들은 구학문을 배우거나 천자문 정도나 겨우 읽던 부모와 달리 마을 내에서 처음으로 근대 교육을 받은 근대화 1세대였다. 또한, 1950년대 징집제도가 시행되면서 학교를 졸업한 이후 군대를 경험한 징병 처 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은 마을을 떠나 외지를 경험함으로서 도시성을 체험했다. 이들 중 도회지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고향마을에서 가업을 잇기로 결정한 이들이 바로 새 농부들이었다. 


■ 국가와 마을 엘리트 

새마을운동은 개별화된 농민이 아니라 응집력이 강한 마을공동체를 통해 농민을 움직이는 사업이었다. 


■ 나오며


마을 공유재산문제는 새마을운동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분야이다. 대부분 마을에서 마을회관의 건립은 보편적으로 시도되었으며 이 건물은 이후 새마을등기를 통해 공유재산으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일제시기 면제의 시행과 함께 해체되었던 동리의 공유재산을 재조성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지가 상승과 함께 공유재산의 가치가 증식되었으며 수도권 일대에서는 그 액수가 상당한 수준에 달한다. 이 공유재산은 오늘날 농촌 마을공동체의 중요한 물적 토대로 가능하고 있다.  

유신헌법의 불법성 / 오동석 

■ 헌법은 어떤 법인가? 

헌법은 어떤 법인가. 첫째, 헌법은 국가권력을 구성하고 조직하며 통제함으로써 정당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을 구별하는 폭력판별법이다. 둘째, 헌법은 권력의 집행기준이자 그 한계를 정한 인민권(인권 또는 기본권)의 법이다. 셋째, 헌법은 기존의 헌법질서를 끊임없이 여과하여 새로 써나가는 과거 청산법이다. 넷째, 권력자를 단죄하는 특별형법이다. 


■ 유신헌법의 불법성을 단죄할 수 있는가? 

헌법재판이 가능한가?


헌법이 불법일 수 있는가? 

■ 유신헌법은 ‘불법적 헌법’인가? 

선행의 헌정질서 파괴행위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실행


헌법적 불법의 완성


유신헌법의 내용적 불법성 

■ 유신헌법의 헌법적 불법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헌법제ㆍ개정인가? 헌법파괴인가?


유신헌법의 효력은 어찌 되는가?


유신헌법에 대한 위헌 판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유신헌법의 반면교사 : 어떻게 헌법을 개정할 것인가? 

박정희 정권과 국책으로서의 성의 도구화 - 1970년대 기생관광의 식민지적 기원 / 이준식 

■ 머리말

 
■ 박정희 정권기 집권층의 식민지체험 

황국신민화 교육과 국가주의의 내면화


만주와 성매매 여성 ‘위안부’ 

■ 박정희 정권과 요정정치 

두 얼굴의 박정희 정권


박정희 정권과 요정 

박정희 정권과 요정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1964년 6·3학생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있던 김재규는 현역군인인데도 고급요정 선운각의 소유자였다. 1972년 문을 연 최대 규모의 요정 삼청각은 항간에 이후락의 소유로 알려져 있었다. 권력층이 워낙 요정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어서 국가의 주요 외교회담이 요정에서 열리는 웃지 못할 일도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1965년 2월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이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합의를 이룬 곳은 청운각이라는 요정이었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부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 수상이 7·4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은 오진암이라는 요정이었고 같은 해 삼청각에서는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사를 요정에서 가졌다는 것 자체가 당시 집권층이 어느 정도 요정에 젖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국책으로서의 기생관광정책과 성의 도구화 

기생관광정책의 배경


이승만 정권기만 해도 1956년에야 관광 담당 부서인 교통부 관광과가 신설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이렇다 할 관광정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1961년 8월 '외국인관광객 유치'를 내걸고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한데 이어 1962년4월에는 국제관광공사법을 제정하는 등 관광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962년 6월에는 정부투자기관으로 국제관광공사를 설치하고 1963년 3월에는 관광사업진흥법에 따라 대한관광협회(1964년 한국관광협회로 변경)를 설립하는 한편 1963년에는 교통부 관광과와 항공과를 각각 관광국과 항공국으로 격상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관광정책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관광사업진흥법에 관광의 주요한 목적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 외화를 획득하는 것으로 나와 있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미 관광산업이 외화획득의 좋은 수단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달랐다. 외국인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목표만 세워놓았지 정작 관광객을 유치할 여건은 갖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외화획득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주한미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달러를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새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술과 여자'를 팔아 수입을 올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윤방법'을 만들어놓고도 특정지역 안에서의 성매매나 특수관광호텔에서의 외국이상태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윤방법'의 적용을 보류한 것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13개 호텔과 345개의 유흥장소를 지정하고 종업원에게 야간통행증을 발급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기생파티가 단순한 민간부문에서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관광상품은 아니지만 정부 차원에서 외국인에 대한 로비 수단으로 기생파티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 가우데 1970년대 말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요정의 기생파티를 관광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산업의 외화가득률이 58%인 데 비해 관광산업은 92%였다. 외화를 별로 들아지 않고도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분야가 관광산업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정부기관과 언론을 통해 이제 산업으로서 관광이 국가 주요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관광산업에 주목하게 된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닉슨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의 철수다. 주한미군 철수는 이전까지 달러의 주요 획득선이던 기지촌 성매매의 위축을 초래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은 1970년 국회에서 "미군주둔으로 얻는 외화는 연간 1억 6천말 달러이며 3만 명이 감군될 경우 외환수입은 약 8천만 달러가 줄어들 것"이라고 발언했다. 1969년 무역으로 얻은 달러가 약 7억 달러였으니 박정희 정권은 주한미군의 철수에 따른 외화수입 격감에 심각한 위기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안으로 찾은 것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였다.  


기생관광과 한국정부의 역할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초부터 '관광입국'의 구호를 외치면서 관광산업이 국가의 주요 전략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관광진흥방식이란 수출산업과 마찬가지로 관광객 수나 외화획득 목표를 미리 정한 뒤 관계업체에 할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관광업체에 각종 특혜를 부여하는 당근정책이 사용됐다. 수출산업에 준하는 금융지원, 세제상 혜택, 전기요금 인하, 외화사용 승인 폭 확대 등 각종 특혜를 부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근은 후술하듯 기생관광을 공인해 줌으로써 업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정권은 채찍 정책도 구사했다. 할당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영업정지나 허가취소의 벌칙을 부가한 것이다. 1973년 여성단체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벌이자 중앙정보부는 대표자인 이우정에게 '유신과업 수행을 가로막은 반정부행위'라 경고하고 '반대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이와 별도로 문공부 국장이 여성단체 대표들과 만나 반대운동을 중지하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는 중앙정보부를 포함한 범정부차원에서 기생관광정책이 시행되고 있엇음을 반증한다. 1972년 8월 교통부는 오는 9월 초부터 기생파티 요정을 지정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결국, 등록된 성매매 여성과 등록되지 않은 성매매 여성을 구분하고 등록된 성매매를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기생관광은 이제 국가가 외화획득의 방법으로 공인하는 매매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등록증명서는 사실상 정부가 발행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기생관광 자체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는 사실이다. 등록업무는 한국관광협회 요정과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등록제는 법령에 기초를 두지 않은 행정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등록제를 법제화라는 작업이 뒤따랐다. 1973년 초에 이루어진 관광사업진흥법과 시행규칙의 개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1973년 초의 법령 개정은 이보다 앞서 시행되던 등록제를 법제화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생관광의 실태


기생관광의 결과 박정희 정권의 기대대로 일본남성 관광객은 폭증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는 1971년 9만 6,000명에서 1972년 21만 7,000명으로 다시 1973년에는 43만 6,000명으로 급증했다. 기생관광이 절정을 이루던 1973년에 관광산업은 '호텔객실이 없어 쩔쩔매는 경기'를 맞았다. 그렇다면 기생관광의 이름으로 국가가 공인한 성매매 여성의 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신문보도에 따르면 1972년 10월 1,200여 명이었다. 1973년 7월에는 등록된 여성이 1,500명, 등록되지 않은 여성이 8,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1973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관광협회 요정과에서 발행한 관광요원(접객원)증 발부 수가 2,400명"이며 "요정에서 직접 발행한 것, 기타를 합치면 4만 명"이라는 서울시청 자료도 있다. 심지어 일본의 한 주간지는 콜걸조직의 사창까지 합하면 20만 명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이되면 "전국의 관광유흥음식점으로 기생파티를 벌일 자격이 있는 업소는 서울에 14곳, 부산 5곳, 경북 4곳, 제주 2곳 등 25곳이 있고 이런 곳에 소속되어 있는 여자들은 5,000여 명에 달"하는 상황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기생이 자신의 몸을 팔아 얻는 수입 가운데 80% 정도를 요정, 호텔, 여행사 등에 착취당하는 구조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오로지 외화만 많이 벌어들일 수 있다면 성노동마저 착취당하는 여성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기생관광과 국가주의 

박정희 자신도 국민 대다수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을 밀어붙이려면 나름의 명분과 논리가 있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국가주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기생관광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자신들이 내면화한 국가주의를 더욱 강화해 일본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기생이야말로 애국자라는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특히 성의 도구화 대상이 된 관광기생의 애국심을 고취시켜려고 노력했다. 1973년 관광사업진흥법과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관광기생의 교육을 의무화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제 요정의 관광기생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주의 교육의 결과일까? 외국언론의 취재에 응한 관광기생들은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와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인 상대의 성매매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 맺음말 

유신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중 통제 / 배성인 

■ 들어가며 

■ 유신체제의 탄생과 지배이데올로기 

총력안보 이데올로기


유신체제의 성립은 불균등 산업화에 의한 자본축적과 배분의 갈등이 정치적 동원과 통제 사이의 모순과 일체화될 때 나타났다. 즉 현존지배체제로는 ① 부의 배분, 복지수준을 해소할 여유와 ② 새로운 계층·계급의 형성에 따른 정치적 활성화와 참여를 의회체제의 파기 없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광범위한 민중연합의 활성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배권력 내부의 수직적·관료적 통치제제의 한계를 지배양식 내에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농촌중심공동체 붕괴가 가속화되는 1965년 이후에는 이전에 유효했던 국가-관료적 후견주의의 통제가 더 이상 지배집단의 정치적 통제양식으로는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죽음과 삶을 관장하는 국가의 위력을 현시하면서 이른바 국민총화를 통한 국가 통합을 기도한 것이다. 


국가민족주의


지역주의 이데올로기


《말죽거리 잔혹사》 ? 반공·성장 이데올로기 

■ 다양한 방식의 획일적인 대중통제 

국가권력기구와 대중통제


긴급조치와 대중통제


학교를 통한 이데올로기 교육과 통제


일상생활과 문화를 통한 통제 

■ 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