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오공훈, 그러나, 2016, (170418).

바람과 술 2017. 4. 18. 10:56

프롤로그 : 철학에 대한 지식 없이 철학하기

로산나 로산다, "우리는 의문을 품고 살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항상 불분명하며, 이제까지의 분석은 모두 허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좌파 사상은 단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었다. 항상 흔들리는 지반 위에 있었다. 


철학이 공통감각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논제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나누게 될 때 철학이 지닌 힘이 입증되는 것이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명확하게 경계를 짓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좌파 책벌레는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호감 가는 유형은 아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상은 분명 위대한 모험이다. 생각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움직인다. 생각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1장 혁명에 대해 말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왜,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자일까? 그런데 왜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까? 


안토니오 그람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자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자다. 어느 정도는, 자기도 모르게."


2장 혁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 


종종걸음으로 이상향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오늘날 누가 과연 이상을 품고 있는가?

쿠르트 투콜스키, " 누구나 이상향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이상향의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화지 않는다."


노르베르토 보비오. 실용주의적인 좌파가 다른 실용주의자와 구별되는 점은 바로 "모든 개인이 평등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불평등을 보다 평등하게 바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진한다는 것이다. 좌파에게 있어 "평등이라는 이상은 좌파가 항상 응시하고 미래에도 응시할 북극성이다."


3장 그람시 씨가 기꺼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면……

지배자는 어떻게 지배하며, 억압받는 자의 뇌와 심장은 어떻게 투쟁에 이를까

그람시는 통치 권력이 "강압과 동의의 결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므로 지배 질서를 새롭게 바꾸고 싶다면 이러한 기존의 믿음을 깨야 한다. 이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투쟁은 사상에 대한 헤게모니,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이해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란 "모든 철학적 견해의 대중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차지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한다.  


4장 누가 비판적 비판을 하는가?

아도르노 씨는 항상 기분이 나빴다. 계몽과 진보를 둘러싼 갑론을박.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지고 있는 미성숙에서 빠져 나가는 출구다. 여기서 미성숙이란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뜻한다. 이렇게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오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타인의 지도 없이 오성을 활용할 결심과 용기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면, 이러한 미성숙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과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너만의 고유한 오성을 활용할 용기를 내라!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계몽의 좌우명이다."


비판(Kritik)은 위기(Krise)와 어원이 같다. 위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환점이라는 뜻으로 썼다. 비판은 가식 없이 명료하게 이의를 드러낸다. 비판으로 인해 세상은 숨김없고 꾸밈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할 수 있다. 이는 비판이 기본적으로 낙관주의적인 느낌과 엮여 있으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비판은 역사적으로 계몽이라는 낙관적인 세계상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했다. 즉 계몽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지만 계몽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5장 나 자신으로부터의 반란, 그리고 성 혁명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씨는 소외되지 않는 인간을 원하지만, “도대체 인간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버틀러 씨가 과연 여성이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외는 좌파 이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이 개념은 불확실하고 수상쩍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거듭한다. 라헬 예기의 말대로 소외는 독특한 형태의 권력 상실이다. 즉 인간은 삶을 표류하고, 사건은 그냥 일어나고, 자신의 고유한 삶은 사회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독자적인 사건이 된다. 즉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삶의 상태를 각인시키는 능력에 의해 유지된다. 마르크스로부터 마르쿠제를 거쳐 라헬 예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유로운 나'는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자유에 대한 문제다. 자아실현에 대한 문제다.


현대의 동일성 비판이론은 진정한 나를 발달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나'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어느 누군가가 내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이 억압과 속박에 짓눌려 있고 타인의 견해라는 물결에 떠밀릴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단순한 출발점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공산주의와 개인주의는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니었다. 


자율성, 자아실현, 창의성에 대한 생각을 실제 삶에서 완전히 뿌리 뽑는 데 성공을 거둔 적은 결코 없다. 첫 번째, 그러한 생각은 뿌리 뽑을 수 없는 근본적인 열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러한 생각에 대한 부정은 본능적으로 어떤 반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새로운 세대의 이론은 자신이 거둔 성공을 반란, 즉 당 공산주의로 변질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변종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변질되기 이전의 마르크스주의를 복원해 단일화·평준화하려 한다. 모든 것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적인 대립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세대의 이론은 소수의 저항과 반대 정신, 성 역할에 대한 여성의 반란 등을 훨씬 많이 내세운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확신이 좌파 지식의 기본 요소가 된다. 우선, 상황이 인간을 만든다는, 더욱이 인간의 내면까지, 인간의 정체성까지, 인간이 스스로 하는 생각까지, 아주 은밀한 욕망까지 만든다는 확신이다. 둘째, 이러한 인간은 꾸미지 않은 순수한 자아를 발달시키려 한다는 확신, 그리고 이러한 자아는 오로지 강압적인 힘과 권력에 저항할 때만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6장 인간은 식민화된 물건이 됐다

억압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완전히 하찮은 존재가 된 사람들은 절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스피박 씨는 발견한다. 만약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하찮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식민지라는 조건 아래에서 식민화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점령국의 문화를 필사적으로 모방하는 것, 그러니까 흉내다. 비굴한 자세로 염치없이 친해지려고 노골적으로 애쓰는 행위다. 두 번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행동, 즉 정체성 정책이다. 흑인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지켜나가거나 무슬림 문화를 엄격하게 구분·분리하는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식민주즤의 억압을 극복하려면 단순히 정치적·경제적 변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필요하다. 파농에 따르면 그것은 본격적인 정신 혁명이다. 

7장 말은 곧 투쟁이다

푸코 씨는 권력을 탐구하다가 담론을 발견했다. 또는 그 반대이거나!

피지배층이 질서를 수긍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지배 질서는 안정되고 지속된다. "지배 권력은 사람들 내면으로 이주해 들어온다."(아도르노)


푸코에게 담론은 단순히 천박한 수다라든지 세련된 토론이 아니다. 담론은 규율마다 차별을 두는 특유의 의사소통 형태다(그렇다면 이는 정치적 담론이나 교육학에서의 담론과 관련되어 있을까). 또한 담론은 담론이 행해질 당시의 구체적인 형태와 장소에 좌우된다(TV 스튜디오, 전공 출판사, <뉴욕 타임스> 같은 일간지 논설 면이나 전문가가 모인 학술회의에서 드러나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나 담론은 항상 질서에 귀를 기울인다. 질서는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질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하면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 담론은 현대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끝없이 발생한다. 담론이 제한과 속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담론의 질서는 다수의 자극과 규칙을 통해 구조화된다. 그 결과 특정한 태도가 -그람시가 주창한 것과 굉장히 비슷한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따라서 특정한 발화자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행위다. 말하기는 곧 투쟁이다. 그래서 담론은 권력 효과를 만들어낸다. 담론 내부의 어떤 지점에서 권력이 행사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담론의 질서는 스스로 형상화된다'라는 주장은 정당하다. 전통적인 좌파가 믿었던 인간이란 억압적인 사회 제도의 타파를 통해 해방되어야 할 존재다. 하지만 푸코는 인간은 항상 스스로 권력에 굴복하는 결과를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오히려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우리를 만들어내고 우리 자신이 된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 푸코의 가장 유명한 말이다.푸코는 이 말 뒤에 중요한 결론을 추가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항은 권력 바깥에 놓인 적인 한 번도 없다."  


8장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어라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구좌파를 해체하고 이론을 재조립했는가

자아는 항상 기호 체계 안에서 행동할 뿐 기호 체계를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개인이 아니라 체계가 생각한다. 새로운 주체는 체계 그 자체다. 우리가 언어를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처리한다.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기호의 기능이지 인간의 기능이 아니다. 계몽과 모더니즘이 생각하는 주체는 완전히 파괴됐다. 첫째, 미성숙은 우리를 마음대로 다루는 기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둘째, 미성숙에서 빠져나가는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몽하려는 시도 자체 또한 분명 언어를 통해 처리되기 때문이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부에 노출된 영향력의 총합만 있을 뿐이다. 넷째,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더 이상 미성숙이 존재한다고 절대로 규정할 수도 없다. 


에필로그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