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한양도성], 전우용, 서울연구원, 2017, (180214).

바람과 술 2018. 2. 14. 10:16

서문_ 한양도성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서울'은 본디 한 나라의 수도, 즉 '으뜸가는 도시'를 뜻하는 순우리말 일반명사였다. 이 단어가 대한민국의 수도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쓰이게 된 것은 1946년 8월 '서울시헌장'이 공포된 뒤였다. '수도'는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등 각 부면의 중추 기관과 시설들이 모여 있는 제한된 공간으로, 조선시대 이와 같은 뜻으로 쓰인 말로는 수선, 경조, 경도, 경사, 왕경, 도읍, 도성 등이 있다. 수도를 둘러싼 성곽이 도성이며, 이 성곽에 둘러싸인 공간 역시 도성이다. 도성은 수도의 담장으로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가시적 경계선이다.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데 시대에 '서울 구경'은 모든 이의 소망이었고,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행운이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도성은 일상의 경관을 지배하는 구조물이었을 뿐 아니라, 삶을 규율하는 장치였다. 종각의 종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면 도성민의 하루가 시작되었고, 종소리와 함께 성문이 닫히면 도성민의 집 밖 출입이 금지되었다. 


근대화의 열풍 앞에서 전 세계 모든 성곽 도시의 성벽들이 파괴를 면하지 못했다. 제국주의 침략 세력들은도로에 인접한 평지부의 성벽을 허물고 일부 성문을 철거했다. 다만 산지의 성벽은 굳이 허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온존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식민통치가 끝난 뒤에도,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역사관은 그대로 남았다.  


CHAPTER 1 역사를 품은 한양도성

도성이 서울이다

서라벌의 '서'와 금성의 '쇠'는 삼한의 성소였던 소도의 '소'와 같은 의미로서 현대의 '솟'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사 '솟다'와 명사 '솟대'에 잔영이 남아 있는 '솟'은 '하늘로 향하다', 즉 '신성하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서울'이란 '신성한 성' 또는 '신성한 벌'이라는 의미이며, 아사달은 서울(사달)에 버금가는 곳, 또는 두 번째 서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새 수도를 찾기 위한 움직임

한양도성 건설

한양도성 중건의 역사

한양도성 축성기법과 시설

한양도성 관리

CHAPTER 2 삶이 담긴 한양도성

성 안에 산다는 것 


서울에는 막다른 골목을 공유하는 마을 공동체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물길을 공유하는 마을이 더 많았다. 서울 주민들은 도로로 구획된 이(里)보다 작은 물길을 공유하는 마을 공동체를 의미하는 동에 더 친근감을 느꼈고, 그 단위로 생활했다. 동이란 물을 함께 사요하는 지역 공동체를 의미한다. 


도성문은 나라의 문

인경이 울리면 도성 안에서는 모든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인경이 울린 뒤에 도성 안에서 통행하다가 적발되면 일단 경수소(중요한 길목에 설치한 순라군 초소)에 구금했다가 해가 뜬 뒤 곤장을 때렸는데 곤장 대수는 발각된 시각에 따라 달랐다. 단, 여성의 통행은 허용되었다.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 죽어서 국비로 장례를 치르는 국장 때 대여(국상 때 쓰던 큰 상여)는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무을 통과했으며 일반 신하와 백성들의 상여는 소의문과 광화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다 


도성의 위상을 다시 세우다

도성과 삶


18~19세기 서울에는 '동부채 칠패어'라는 말이 있었는데, 동대문 안의 이현시장은 채소가 좋고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은 어물이 좋다는 뜻이었다. 


CHAPTER 3 훼손, 그리고 '복원'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훼손

흐르는 역사. 훼손되는 도성

완전하고 진정한 복원이 이루어졌는가


해방 후 최초의 한양도성 복원 사업은 전쟁 중 폭격으로 손상된 남대문을 수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 말, 박정희 대통령은 광희문을 이전·중건하는 김에 "서울성곽을 복원하여 조상들의 호국안보 정신을 본받는 교육 자료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서울시는 이듬해 1975년 4월, '서울성과복원사업추진본부'와 '서울성곽복원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성곽 복원 사업에 착수했다. 추진본부와 복원위원회는 애초 이 모양으로 성곽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몇 가지 이유로 진행되지 못했다. 첫째는 재원과 시간 부족 때문이다. 2년 만에 약 13억8,000만 원의 예산으로 10km의 성곽을 복원하기는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둘재, 석재 조달에 문제가 있었다. 1960~1970년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한양도성 인근에 있던 채석장들은 모두 택지로 바뀐 상태였다.    


CHAPTER 4 한양도성은 서울의 자산

서울을 역사도시로

현실적으로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기에는 한계와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첫째, 1975년부터 30여 년간 진행된 성곽 복원 사업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등재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문화유산 복원은 재질과 기술의 복원까지 포함해야 하는데 유네크소의 권과항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혜화문과 광화문을 증건할 때에는 원형 원위치 복원이라는 기본 전제조차 무시했다. 둘째, 버퍼 존(완충구역)을 설정하는 등 해당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곽 주변의 역사경관 보존에 역행하는 정책이 동시에 입안되고 추진되었다. 


한양도성 보전 관리 체계를 바꾸다

한양도성도감 구체적 업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그리고 완전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빙 자료를 확보하는 것. ○ 유산의 보존 관리를 위한 행정 시스템의 증거 자료를 준비하는 것. ○ 한양도성의 일상적 보수와 관리를 담당하고, 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 ○ 한양도성을 배려한 도시계획, 도시재생 드으이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타 부서와 협력하는 것. ○ 국내외를 대상으로 한양도성을 홍보하고, 한양도성에 관련된 스토리 자원을 수집하는 것.


한양도성, 제 모습을 찾아가다

기억으로 다시 쌓는 한양도성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