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혹과 혼돈의 시대], 소도, 2003, (200414).

바람과 술 2020. 4. 14. 01:03

서문


산업의 추이에 뿌리를 둔 진화론적인 역사기술은 50년대 영화들의 고유한 특정성과 맥락, 그리고 역사성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 4·19와 5·16을 기점으로 구분되는 50년대와 60년대의 영화산업의 성장측면을 제외하고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변화와 굴절의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1950년대는 미성숙의 전사적 시기가 아니라 자율성과 모순 그리고 다양한 재현전략이 산재하던 매혹과 혼돈의 경합공간이다. 연속성 대신 단절과 차이로 50년대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1. 전후 한국의 영화담론에서 '리얼리즘'의 의미에 관하여

한국 영화담론사에서 1950년대가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이전 시기, 즉 일제하와 해방직후의 시기를 지배하던 비평담론과 선명한 '이념적' 단절의 선을 그으면서 새로운 담론을 출발시켰고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담론이 이후 냉전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재현의 형식보다는 재현된 '현실'의 내용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리얼리즘을 사유하는 양상은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이후의 한국영화 담론사 전체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1950년대의 '새로운' 리얼리즘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출현한 시기는 1950년대 중후반이다. 


일차적으로 지식인 논객들을 네오리얼리즘에 이끌리게 했던 요인은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그 용어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논객들이 네오리얼리즘을 참조하면서 취했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태도는 그들이 네오리얼리즘의 시각양식보다는 '현실직시의 정신'과 '인간성' 회복에의 기여라는 측면만을 강조한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당시의 지식인 평론가들이 네오리얼리즘적 스타일이야말로 (빈곤한 여건 속에 있기는 하되 저항적이어야 하는) 한국영화의 대안적 스타일이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으리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평론가들이 명시적으로는 '휴머니즘'적 주제를 강조하는 가운데 테크놀로지나 영화언어의 중요성은 애써 외면하거나 비하한다는 데 대해 합의하고 있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정치성을 탈색시킨 정신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의 지식인들이 리얼리즘의 깃발을 놓지 않았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리얼리즘이 적어도 '현실 직시'를 의미하는 한, 리얼리즘 영화는 현실의 위기상황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도피하기 위한 오락적 위안의 도구가 아닐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시대의 계몽적 엘리트이던 지식인 평론가들의 관점에서는 통속적인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가 구분되는 것이어야만 했고, 그런 의미에서 리얼리즘만이 영화를 고급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중기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영일 선생이 이강천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원래 계획했던 엔딩은 철수가 죽자 애란이 철수를 시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글에서 이강천 감독 자신은 "끝 장면은 무한히 트인 백사장에서 고립상태의 그들과 대조시켜 평화의 마을에서 아늑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표현해보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엔딩이 관철되었다면 아마도 <피아골>은 이른바 '열린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결말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기를 배경으로 넣게 되자 마지막 장면은 애란이 남한체제로 투항하리라는 의미로 확실하게 한정되고 말았다.  


2. <돈>, 로컬리즘과 1950년대의 농촌경제

여기에는 반드시 재고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찬양과 경도를 통해 상업적, 통속적 영화들에 대한 거부와 폄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후 한국의 리얼리즘논의가 태생적으로 예술적인 영화, 특히 유럽의 고급예술에 대한 엘리트적 선망과 맞닿아 있었다. 


3. 미국영화에 대한 약가적 태도

1950년부터 3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가치관, 세계관, 인간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계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전쟁이 진행되던 중, 가장 활발한 영화만들기 활동이 전개된 곳은 군대였다. 특히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전쟁기록영화들은 새로운 영화인들을 배출시킨 영화인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5년 5월 2일 동아일보 사회면을 장식한 기사 중에 하나는 미국의 "깽영화"(모감보?)를 본 고등학생들이 영화의 내용대로 강도행각을 벌이고 체포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4. 1950년대 공산주의자의 재현과 냉전의식

5. 1950년대 사극영화와 과거재현의 의미

1955~59년까지의 사극영화들은 일견했을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극영화의 내용이 이전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다양하고 풍부해졌다는 점이다. 이전 시기의 사극영화들이 판소리계 서사를 원안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과는 달리, 1950년대의 사극영화들은 판소리는 물론 그 외의 다양한 원천들로부터 온 새로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는 이 시기의 전체 한국영화들 가운데서 사극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는 약 40여 편의 사극 영화가 제작되었다. 비록 그것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1950년대의 영화제작 편수가 60년대에 비해 매우 적었던 것을 감한할 때, 이 시기 영화사에서 사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1950년대 사극영화의 특성을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남년의 운명적인 사랑을 중심에 놓고 있다. 역사적 환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국적인 정서에 호소한다. 전통적 가치들을 재확인한다. 스펙터클로서 기능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성국극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 시기 사극영화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만약 주인공이 죽는다든가 비극적 파국을 맞게 되면 극단 측은 관중의 빗발치는 항의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1930년대의 역사소설, 창극에서부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극영화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 존재했다고 보는,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장된 시각은 근대 한국사회에서 '과거' 혹은 '역사'를 재현하는 대중적인 서사물들이 지속력 있는 전형적 재현방식을 구축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 따르면 1950년대는 역사소설과 창극이 구축해온 과거재현의 방식이 영화로 확장되었던, 혹은 영화가 기존의 전통을 흡수해서 이를 영화적인 것으로 갱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또한 1950년대는 과거를 재현하는 대중적 서사의 중심매체가 영화로 이동해온 시기이기도 했다.   


6. 1950년대 후반 '문예'로서 시나리오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