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국밥], 한국음식문화포럼, 따비, 2019, (200601).

바람과 술 2020. 6. 1. 12:55

책을 내며

 

경조사를 위한 특별한 탕국, 몸국과 제주 육개장 - 양용진

 

주 밥상과 국

 

제주 사람들의 전통적인 밥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밥은 쌀이 귀한 탓에 보리를 주곡으로 삼아 메밀, 차조, 수수 등 잡곡을 섞거나 단일 잡곡으로 지어 먹었고, 거기에 감자, 고구마, 톳, 쑥, 모자반, 무, 파래 등 다양한 부재료를 첨가하여 곡식을 아낌과 동시에 단조로움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또한, 따뜻한 기후 덕분에 연중 신선한 채소를 '우영밭(제주식 텃밭)'에서 직접 길러 끼니마다 '생채소(특히 배추를 주로 활용)'를 올리고 자리젓이나 멜젓, 그리고 생된장을 곁들인다. 

 

제주의 밥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의 활용이다. 제주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국이 빠진 밥상은 차리지 않았다. 제주의 전통 음식에는 '찌개'가 존재하지 않는다. 

 

몸국과 제주 육개장의 특별함

 

이 두 가지 국을 끊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돼지의 모든 부분을 삶아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려 말 80여 년 이상을 원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았던 '탐라총관부' 시절 몽골로부터 전래된 메밀은 제주의 척박한 땅에서 그 어떤 곡식보다 잘 자라주었고, 주곡인 보리를 보조하는 곡물로 그 위상이 매우 높았다. 실제 전국 생산량의 40% 이상을 생산하는 최다 생산지는 제주이며 특히 전국 유통량의 70%가 제주산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주 사람들에게 '고기'하면 돼지고기를 말하는 것이고 '고기 국물'하면 돼지 육수를 말하는 것인데, 이 돼지 육수에는 반드시 메밀가루가 들어간다고 보면 틀림없다.

 

특별한 날에 먹는 몸국과 제주 육개장

 

돼지를 해체하고 삶는 것은 물론 대소사를 치르는 기간 내내 고기를 적당하게 분배하는 일까지 맡는 특별한 존재가 있는데, 다름 아닌 '도감 어르신'이다. 어느 마을이고 도감 어르신은 그 마을에서 비교적 활동적인 40~50대의 남성이 맡는데, 한번 도감을 맡으면 대부분 십여 년 이상을 맡게 되니, 마을에서는 헛기침깨나 날릴 수 있는 위치로 대접 받는다. 

 

제주에는 밀국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고기국수가 일반화된 것은, 제주 시내권의 경우 1920년대로 조사되었다. 

 

돼지 육수의 부활

제주 사람들에게는 혼분식 장려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정책이었다. 원래 쌀이 귀해 혼식도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혼분식 장려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한 거친 잡곡밥만 먹던 사람들에게 매그러운 국수를 많이 먹도록 장려하는 것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돼지 육수를 장만하지 못하고 멸치 육수에 국수를 말아 먹는 한반도의 일반적인 국수문화가 혼분식 장려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돼지국밥으로 읽는 부산 - 최원준

 

부산의 음식과 역사ㆍ사회ㆍ문화적 맥락

 

부산 돼지국밥, 부산 사람

 

부산 사람들에게 돼지국밥은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볼 수 있다. 첫째는 공유의 음식, 둘째는 통합의 음식, 셋째는 실용의 음식으로 규정되는 음식이다. 

 

돼지국밥과 더불어, 부산 음식이 갈 길

바다, 햇볕, 소금 그리고 손맛과 인심이 더한 맛, 남도의 간국 - 김준

 

간국을 아시나요?

 

간국은 말린 생선, 즉 건어에서 시작된다. 건어의 기록은 고려 후기 충령왕 7년(1281년) 완성된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간국은 생선을 염장해 말린 후 자작하게 끊여 국처럼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생선으로 간국을 만들 수 있다. 

 

팔도 간국 탐색

 

팔색조 대구 따로국밥, 그 뒤안길 - 이춘호

 

한국 육개장의 종착역, 대구 따로국밥

 

육개장의 출발은 '개장'이다. 어른들은 '개장국'이라 했다. 복날 품귀 현상에 개를 사용할 수 없어 쇠고기를 대신 사용하면 육개장, 닭고리를 사용하면 닭개장이 된다. 육개장은 일명 '대구탕'으로도 불렸다. 

 

국밥은 탕반의 연장선상에 있다. 탕반은 일명 '장국밥'으로두 불렸다. 그건 국에 밥을 만 형태다. 식은 밥을 가마솥 뜨거운 국물로 여러 번 토렴한 뒤 갖은 고명을 올려주는 형태다. 탕반에는 한국 해장국이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국일식당과 대구 따로국밥

 

탕반이 유독 대구에서만 '국 따로, 밥 따로'의 형태가 된 사연을 더듬어보자. 대구 따로국밥은 대구만의 독자적인 식문화의 산물이라고 보기 힘들다.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아래 장터국밥문화, 해장국문화, 탕반문화, 육개장문화가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한국 해장국문화와 육개장문화가 충돌해 만들어진 신개념 쇠고깃국이랄 수 있다. 

 

따로국밥의 핵심, 다끼파

 

따로국밥이 오늘까지 전국적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산파역을 한 것은 바로 대파, 그중에서도 달성군이 품고 있는 사문진나루터와 맞물린 화원유원지의 명물 '다끼파'였다. 

 

대구의 별별 쇠고기국밥

서울 음식 설렁탕의 기원과 발달 - 박정배

 

한양의 설렁탕

 

설렁탕은 한국의 고기문화에 대한 이해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귀한 쇠고기를 여러 사람이 나눠 먹기 가장 좋은 탕문화, 찬밥을 국에 말아 먹는 토렴문화, 뼈와 살과 내장 같은 소의 온갖 부위를 다 넣어 먹는 섞임의 음식문화가 설렁탕 한 그릇에 담겨 있다. 

 

설렁탕 전성시대

 

설렁탕의 구성

 

설렁탕 이전의 고깃국

 

설렁탕 선농단설

 

설렁탕 슐렝설

 

설렁탕의 다양한 기원설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몽골의 슐렝설이다. 공탕을 몽골어로 '슈루'라고 표기하고 '고기 삶은 물"이라고 해석해놓았다. 

 

강기운 선생은 설렁탕의 어원을 '술렝(뼈와 고기를 함께 삶은 물)'으로 추정하고, 술렝→설런→설렁의 과정을 거치고 거기에 '탕'을 덧붙인 이음첩어로 보고 있다. 

 

개성 기원설과 북한의 설렁탕 사정

 

맺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