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백화점], 하쓰다 토오루, 이태문, 논형, 2003, (200412).

바람과 술 2020. 4. 12. 14:22

기획의 말


한국어판 인사말


일본에서 백화점은 1905년에 오복점이었던 미쓰코시가 "미국에 가서 본 디파트먼트 스토아의 일부를 실현"한다는 백화점 선언을 한 것이 시작이다. 서구의 디파트먼트 스토아의 손님들 대부분이 부빈으로 가족 동반으로 찾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가족 단위로 찾는 것을 고려한 백화점이 만들어져간다. 가족끼리 찾기 쉽게끔 하기 위해, 일본의 백화점은 서구의 디파트먼트와는 달리 건물 안에 미술관과 극장을 만들고, 그리고 충실한 식당, 유원지와 같은 옥상정원까지 설치한다. 


백화점을 번역하면서


동양에서의 박람회와 백화점은 어느 의미에서 쌍둥이 같은 존재이다. 


1장 권공자의 성립

2장 번화가에 나타난 권공장

진열판매방식을 널리 대중화시키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점포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단적인 예로,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고서 실내로 들어가는 방법에서 신발을 신은 채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그와 같은 예로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권공장은 건물의 출입구 위치에 따라 점포의 매상에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아서, 입구와 출구를 매일 교환하는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메이지 후기에 권공장을 찾은 사람들은 권공장 매장에 배치된 진열품을 보면서 걸어다니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무렵에는 '권업장(권공장) 물건'이라고까지 불려, 권공장이 품질 나쁜 제품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권공장에서 팔리는 물품이 '권공장 물건'이라고 불리면서, 싼 물건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에 비해, 백화점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정착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3장 오복점에서 백화점으로

'Department Store'의 일본 번역어로 '백화점'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백화점이라는 번역어를 처음부터 정해서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요코가와 다미스케가 미쓰이 오복점의 의뢰를 받아 메이지 29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가 작성한, 디파트먼트 스토아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잡화진열판매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메이지 말기에슨 '소매대상점' 등으로 번역하는 일이 많았다. 쇼와 초기 무렵이 되어서도 백화점이라는 용어는 통일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소매대점포 백화상점, 백화점 등의 호칭도 있으며, 원어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 많았다"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화점이라는 용어가 차츰 일반화되어 갔던 것인데, 백화점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상점경영의 연구자이자, 도분칸에서 발행하고 있었던 <상업계>의 주간이기도 한 구와타디 사다이쓰였다고 한다.


일본 백화점은 오복점에서 발전해 그 형태를 갖춰 왔다. 그 후 전철계 회사가 역과 하나로 연결된 '터미널 백화점'도 선보이는데, 터미널 백화점의 출현은 다이쇼 시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4장 새로운 고객을 개척

메이지 이후 도시의 생활양식은 크게 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이 사는 장소와 일하는 장소가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직장과 주거의 분리가 진행되어 가면서 도시생활자 가운데 그 생활을 재빠르게 몸으로 체험해 나갔던 것은 봉급생활자가 주를 이룬 야마노테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후 비교적 높은 생활수준을 배경으로 일본의 가정생활을 선도해 나간다. 의자에 앉는 서양풍의 생활양식이라든가, 가스, 수도, 전기기구가 가정 안에 보급되어 가는데 그들은 큰 역할을 한다. 다이쇼 시대는 '문화냄비', '문화곤로', '문화목욕탕', '문화주택' 등 '문화'라는 말이 인기를 끌었던 시대다. 서양풍 생활양식이나 '문화'라는 말을 동경하여, 이들 흐름에 발빠르게 반응을 보인 것도 그들이었다. 


메이지 36년(1903년) 일본풍의 색채가 짙었던 창고형 건물에서 메이지 44년에 화양절충의 의장으로 개장했으며, 다이쇼 6년에는 다시 서양풍 건물로 바꾼 사실, 즉 이처럼 단기간에 건축양식을 크게 바꿔 르네상스 양식으로 결국 정착된 점은 흥이롭다. 모퉁이 부분에 세워진 탑도 더욱 높아지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르네상스 양식이 사람들에게 백화점의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건축양식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5장 유람장이 된 백화점

6장 가정생활의 연출

7장 신중간층과 도시문화

쇼와 4년(1929) 4월 15일 한큐백화점이 우메다역에 개업한다. 그때까지 오복점을 모체로 해서 발전해 나갔던 백화점과는 달리, 전철회사를 모체로 한 한신급행전철이 직영하는 백화점인데, 터미널 백화점으로 세계 최초의 것이다. 


백화점이 좀더 본격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일상의 필수품 판매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 12년(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해서이다.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의 백화점들은, 점포가 소실되는 등 타격을 입는다. 철골철근 콘크리트조의 건물로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미쓰코시도 화재를 입어, 건물을 수리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맞이한다. 각 백화점은 제각기 가설 마켓을 세워 급한 불을 끄는 한편, 본격적으로 건물 선설을 진행한다. 


알 데코 양식이란 원래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 장시공업 미술 국제박람회(알 데코 박람회)에서 성공을 이룬 새로운 양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후 이러한 종형의 양식을 가리키게 된다. 알 데코의 조형은 건축, 의복, 가구, 장신구 등 폭넓은 분야에까지 퍼져 갔으며, 마치 광물의 결정을 생각하게 하는 기하학성, 대칭성, 직선조형, 유선형, 지그재그의 선, 반사하는 빛의 이미지 등이 특징이다. 박람회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업과 장식, 그리고 상품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 조형의 답을 찾아낸 것이 알 데코였다고도 하겠다. 알 데코 양식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건축에 미친 영향면에서는 미국 쪽이 더 컸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걸쳐서 뉴욕에는 수많은 고층 빌딩이 세워져 마천루가 형성되어 갔는데, 그 마천루를 장식한 것이 알 데코 양식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일본의 백화점에도 알 데코 양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대량생산이 가져다 준 풍요롭고 밝고 경쾌하게 빛나는 미래, 그것은 비록 하나의 건물이라는 제한된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대중에게 끊임없이 꿈을 선물하였다. 백화점은 그러한 전당으로서 도시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다. 쇼와 초기에 백화점은 대중들 입장에서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서도 들어갈 수 있는 꿈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필요한 물품을 사러 백화점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백화점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발견하고, 꿈과 더불어 그것을 구입했던 것이다. 


8장 권공장과 백화점 시대


백화점의 이와 같은 공공적 성격은 도시의 중심 지구를 달리는 대량 수송기관인 지하철과 연계되어 한 단계 더 편리해짐으로써 도시생활에 깊이 뿌리내린다. 지하철에 백화점을 연계하는 것을 먼저 제안한 쪽은 백화점 측이었다. 백화점이 적극적으로 제안한 직접적인 이유는 대중을 상대하기 시작하였던 당시의 백화점들이 지하철이 좀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는데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백화점의 공공적인 성격을 더욱 굳혀 가는 효과도 있었다. 


좌식판매방식으로부터 진열판매방식으로의 변화와 가격표를 붙여 판매하는 상점은 그 이전처럼 특정한 단골손님만을 상대하던 것으로부터 불특정의 손님을 상대로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기


문고판을 위한 저자 후기


해설 : <백화점>과 백화점 연구의 현재


지식인들의 발언을 자기들의 기업 이미지에 슬기롭게 접목시켜 나간다. 바야흐로 '유행'은 단지 백화점의 상업적인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쓰보이 마사고로의 인류학적 유행조사이든, 다카시마 헤이자부로의 심리학적 유행론이든 아카데믹한 담론 속에 자리매김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유행'이나 '취미'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담론이 백화점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 되어갈 가능성도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