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네켄에 담은 염원, 꼬레아노의 꿈], 한국이민사박물관, 2019, (200813).

바람과 술 2020. 8. 13. 00:52

1. 1905년 멕시코 이민

 

국제이민브로커 마이어스는 유카탄 에네켄 농장주협회 대리인 자격으로 중국과 일본인 이민자들을 모집하였으나, 멕시코 이민의 나쁜 평판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한인을 대상으로 하와이 이민을 알선하던 일본의 대륙식민회사와 연이 닿은 마이어스는 1904년 8월 한국에 들어와 대륙식민회사 서울지부와 함께 <대한일보>와 <황성신문>에 대대적인 이민(농부) 모집광고를 낸다.

 

<대한일보>의 모집광고에는 ‘외부도 승인하여 …’라고 하여 마치 정부가 멕시코 이민을 승인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며, 4년간의 계약기간동안 높은 보수와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다고 과장광고를 하였다. 광고에 현혹된 멕시코 이민자들은 노동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결국 1905년 봄, 마이어스는 일포드호를 대여하여 부산에서 400여 명이 탑승시키고 다시 인천에서 남은 이민자를 승선시켜 총 1,000여 명의 인원이 멕시코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불법이민의 이야기를 듣고 이민을 금지시켰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였다.

 

멕시코 이민자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편차가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아동 196명으로 기록한 인천주재 일본영사 가토 모토시로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1,033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2. 에네켄 농장으로

 

40여 일 간의 항해 긑에 멕시코 이민자들은 살리나크루즈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멕시코만 남부의 관문인 코아트사코알코스로 이동한 후, 배를 타고 유카탄 반도의 동북단 항구인 프로그레소에 옮겨졌다.

 

프로그레소항에서 한인들은 다시 최종 목적지인 유카탄주의 수도 메리다에 도착하였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의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상투를 잘라버렸고, 순식간에 20여개 농장으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다시 다른 농장으로 보내졌고, 벌목장이나 시멘트 광산으로 보내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농장주의 선택에 따라 함께 온 가족 간에 생이별이 발생하였다.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 아래 난생 처음 본 에네켄 농장의 노동은 매우 힘든 노역이었다.

 

<멕시코 이민 고용 계약서>

계약서

고용주는 멕시코의 유카탄 주로 오는 정직한 노동자를 환영한다는 것을 보증한다.

열심히 일하면 가족당 하루에 최저 3달러를 벌 수 있다. 노동자는 고용주가 정한대로 조건에 따라 밭일을 할 것을 다음의 노동자는 고용주와의 계약에 1905년 월 일 동의한다.

1. 고용주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한국에서 멕시코의 만사니요 또는 살리나 끄루스까지의 여비를 담당하는 것은 물론 착항지에서 취로지까지의 모든 여비 및 잡화를 일체 부담한다.

2. 고용주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에게 연중 지속적으로 적합한 노동을 준다는 것을 계약할 것.

3. 노동자가 질병에 걸릴 경우 고용주는 무료로 의료 및 치료를 급여할 것.

4. 고용주는 매주 노동자의 임금계산서에서 그 임금의 2/10을 맡아서 계약만기 때에 그 금액을 노동자에게 환급하고, 노동자는 약간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지불하고, 임의로 경지를 이탈하는 경우는 고용주가 몰수할 것.

5. 노동계약기한은 노동자가 경지에 도착한 날부터 계산하여 만 4년으로 한다. 단, 노동자가 만기 후 임의로 지속할 수 있다.

6. 고용주는 좌기의 구분에 의해 노동이금을 노동자에게 지불할 것.

- 에네켄 잎 벌취 : 처음 2천 잎에 72전, 추가로 매 1천 잎당 40전 지급.

- 밭의 벌초 및 청소 : 1메떼까(404㎡) 당 25전

- 에네켄 잎 절취 100주 자르는 데 35전, 단, 벤 줄기를 큰길가나 궤도로 운반하는 조건임

- 에네켄 묘목 자르기와 묘목 옮겨 심기 : 100주에 25전,

- 땔감용 베기 : 길이 2빠라(1빠라는 836m), 넓이 2빠라, 높이 1빠라에 50전.

- 덤불 모으기 : 1메떼까에 50전.

- 그 밖의 노동임금은 현지의 경지 비용의 관례에 따라 지불됨.

7. 노동자는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전기 각종의 노동 및 기타 경지에서 고용주가 요하는 농업에 종사할 것.

8. 고용주는 경지에서 노동자가 필요한 음료수․가옥․연료․채마밭을 무료로 제공할 것.

9. 고용주는 노동자의 자녀가 12세에 달할 때 전기의 임금으로 이 노동에 종사시킬 것.

 

3. 묵서가의 참상

 

멕시코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힘든 노동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시엔다 속에서 한인들은 채무노예의 성격이 강하였다. 노동자에 대한 태형권과 재판권도 농장주가 가지고 있고, 채무 노동자들을 교환하거나 매매하는 일도 쉽게 이루어졌다. 채무를 유지시키기 위해 식량을 사먹을 수 없는 정도의 저임금과 생필품의 고가 판매, 외상 강요가 이어졌다. 거기에 농장주와 언어장벽과 문화차이로 충돌은 계속되었다. 일부는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였고, 일부는 붙잡혀 가죽채찍으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0명이 자살했고, 이민 초기에 22명이 사망했다.

 

탈출에 성공한 몇몇과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 등에 의해 멕시코의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참상이 알려지며 이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멕시코의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라 명령을 내렸지만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편 미주 한인사회에도 멕시코 한인의 상황이 전해졌다. 국민회의 방화중․황사용이 견묵위원으로 파견되었다. 멕시코 동포를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하와이로의 이주계획이 세워졌고 후원금이 모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입국거절로 끝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 하였다.

 

4. 멕시코의 한인회

 

1909년, 고난에 찬 4년간의 노동계약 기간이 마침내 끝났다. 그러나 자유로운 신분이 된 한인들은 대부분 생계가 막연한 처지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막대한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이듬해 국권을 상실한 고향땅은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정권을 차지한 세력은 자국의 노동자․농민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외국인 노동자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의 도움으로 1909년 5월 9일 북미주 지방총회 소속 메리다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시기를 달리하여 멕시코 각지로 흩어진 한인들은 각각 프론테라․오학기나(와하께나)․묵경(멕시코시티)․산타페․코아트사코알코스 등에 정착하여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이들 지방회에서는 지방회 창립기념일, 3․1운동 기념일 등을 맞아 행사를 치러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법률적 지원과 병자를 위한 모금과 치료 등 동포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 나갔다.

 

그 가운데 가장 힘을 기울인 부분은 교육이었다. 우선 광무군 출신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메리다에 승무학교를 세워 군사교육을 시켰다. 또한 일신학교․해동학교 등 여러 학교를 만들어 한글을 가르치는 등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5. 큐바로

 

1898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쿠바는 미국의 자본 아래 사탕수수 농업을 비롯하여 광산, 철도 등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들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외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 시작하였고, 1900년대 초 쿠바이주자의 숫자는 1백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쿠바의 설탕산업은 크게 발달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국과 멕시코의 한인 몇몇이 1910년대에 쿠바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멕시코에서 이주해 온 이해영은 1920년 8월 쿠바 마나티의 사탕수수 농장과 계약을 맺고, 멕시코 각지에서 288명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1921년 3월 타마올리파스호를 타고 유카탄 반도를 떠나 쿠바의 마나티항을 향해 떠났다. 이동 중에 한 명이 사망하였고, 인솔자 3인을 포함한 290명의 한인이 쿠바에 도착하였다.

 

6. 다시 에네켄

 

멕시코의 한인들이 도착할 때 쯤,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은 급격히 불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인 고용을 약속하였던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마나티 설탕 회사는 한인 고용을 거부하였다. 멕시코에서의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이주한 한인들을 또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일부는 멕시코로 돌아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주변의 공장과 농장에 낮은 급료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 가운데 마탄사스 지방에 대형 에네켄 농장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몇 차례로 나누어 250여 명의 한인들이 고용되었다. 이들은 마탄사스 남동부에 위치한 엘 볼로 농장에 거주지를 마련하였고, 에네켄 세척시설이 있던 창고 건물은 쿠바한인들의 정착지를 되었다.

 

7. 쿠바의 한인회

멕시코 한인들이 쿠바에 이주한 직후, 아바나 주재 일본영사관은 한인들을 일본의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부한 한인들은 멕시코에서 미주 국민회 지부를 운영한 경험을 살려 도착 2주 만에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의 설립을 의결하였다.

 

1921년 첫 도착지인 마탄사스와 마나티에 지방회가 처음 설립하였고, 1922년(혹은 23년)에는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던 카르데나스에도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1937년에도 수도 아바나에도 한인들의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멕시코에서와 마찬가지로 쿠바에서도 한인들은 교육에 많은 힘을 들여 홍민학교,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등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또한 1932년에는 청년학원을 설립, 한국사 강연회와 독서회․토론회 등을 통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반도학교 애국가 - 유진태 작>

1.

아시아 한반도 우리나라 / 옥야가 삼천리 화려강산 / 산 좋고 물 맑은 우리네 집 / 죽어도 진실로 못 잊겠네 / 력사가 오래된 단군 후에 / 조국에 비우를 잊지 말세 / 무궁화 그대로 피었지만 / 왜놈이 알게에 못 살겠네

2.

해외에 대한인 국민회는 / 만중이 일치로 맹세하고 /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여 / 조국의 독립을 찾아려고 / 북미주 하와이 해삼위에 / 틈틈이 모여서 단결일세 / 노예의 기반을 벗으려면 / 광복할 사업을 쉬지 마세

3.

장부가 세상에 천함이여 / 뜻없이 살다가 죽을소냐 / 귀하고 귀하다 일신 생명 / 내 나라 위하여 내어 놓고 / 백번을 꺽여도 굴치 말며 /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고 / 원대한 묵적을 이룰 적에 / 동포의 참상에 잔치리라

4.

아무렴 우리가 그렇지 / 맘속에 품었던 좋은 칼과 / 이천 만 민족의 끓는 피는 / 대포와 군함도 깨치리라 / 태극기 펄펄 날리면서 / 대한국 만만세를 부를 적에 / 백두산 배달목 한반도는 / 반기면 즐거워 춤추리라

(후렴)

우리의 평생 소원은 우리의 평생 소원은 주국의 독립을 찾아서 자유로 살기 원하네

 

8. 안창호 선생의 방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의 어려움을 듣고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하여 멕시코로 왔다. 1917년 10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즈의 동포를 만난 후 1918년 1월 프로그레소에 방문하는 등 5월 29일까지 약 7개월 동안 멕시코 각지를 순행하며 멕시코에 머물렀다.

 

멕시코에서 안창호는 첫 번째로 멕시코 한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멕시코 지역 국민회를 하나로 총괄할 지방 총사무소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자립을 위하여 교육과 산업을 통하여 실력 양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안창호의 활동은 민족적 긍지와 단결력을 높여 이후 멕시코․쿠바 독립운동의 활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에서 안창호 연설>

1. 국민회 묵국연합 지방 총사무소를 메리다 지방에 두어 재묵동포의 행동을 일치할 것

2. 재묵동포의 국민교육의 의무를 재묵동포가 평균을 담당할 것

3. 재목동포는 자본을 던저 상업과 농업을 확장할 것

 

9. 멕시코 한인의 독립운동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미주 한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자 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 등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메리다 지방회에서는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한편 3․1운동이 발발하자 멕시코의 한인들도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프론테라 지방회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각처로 보냈으며, 묵경 지방회와 탐피코에서는 공화국 건설과 임시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다. 또한 멕시코의 부인들도 대한부인회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더불어 메리다 지방회에서는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한 소득세를 거두기도 하여, 1919년 동안 약 1,000달러에 이르는 모금을 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위한 다양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본인이 아닌 ‘자유한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이루어졌다. 멕시코 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자 이를 축하하는 시위행렬을 거행하고, 멕시코 독립 기념식에서는 한인 청년 16명이 태극기와 멕시코 국기를 들고 기념행렬에 참석하여 현지의 환영을 받았다.

 

10. 쿠바 한인의 독립운동

 

쿠바의 한인들은 1921년 지방회의 설립과 함께 한인들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역할을 시작하였다. 1923년부터는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하여 ‘친구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각지에 학교를 설치하여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민족운동을 함께 하였다.

 

임천택의 『쿠바이민사』에 따르면, 마탄사스 국민회는 1937년부터 해방을 맞는 1945년까지 독립금의 명목으로 불과 30여명의 회원이 1,500달러에 가가운 성금을 보냈다. 이러한 노력은 <신한민보>와 『백범일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멕시코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쿠바는 미국 편에 서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한일병탄 이후 국적이 모호하였던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거나 첩자로 의심받기에 이른다. 투바의 3개 지방회는 1942년 12월 9일 쿠바의 ‘선전’ 기념 1주년 행사에 참가하는 등 쿠바 정부를 상대로 일본과 적대적 관계임을 인식시켰다.

 

1943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 국민회 옹호, 재큐동포의 안녕보장, 한국독립 선전, 독립 후원금 모집 등을 목표로 하는 재큐한족단을 출범시켰다. 재큐한족단은 1943년 쿠바 정부수립 41주년 기념식과 미국독립기념일 행사 등에 참석하여 외교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11. 꼬레아노

 

에네켄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매월 의연금, 의무금, 인구세, 외교비, 광복군비 등 다양한 명목으로 독립자금을 후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