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일 우익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창비, 2020, (210617)

바람과 술 2021. 6. 17. 01:03

머리말│다시 한일관계의 쟁점이 된 근대사 : 일본은 왜 역사반성을 하지 못하는가 / 이영채

1부 일본의 경제보복 뒤에 숨겨진 과거사 문제

 

1. 일본의 ‘피해자’ 의식 : 전후 협정

 

그 와중에 2018년 10월에는 강제징용 재판에 대한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1965년 조약을 지키지 않는, 합의를 하고도 언제나 파기를 하며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국가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한편 자신들에게 곤란한 사실은 뒤로 숨기고 있습니다. 1945년 이전에 아시아에서 일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 사죄르 하고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으로 사죄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일절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여론 작업을 통해 일본은 더 이상 역사 문제로 한국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역사 피로감'의 논리를 완성했습니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그리고 한반도 식민지화 등을 겪으며 한반도가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냉전 시대에는 한국이 반공 국가였기 때문에 극우세력도 안심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한국이 민주화하며 군사정권이 퇴조한 후, 일본 극우보수세력은 한반도의 변화에 긴장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남북통일 또는 핵동결과 북미 국교 정상화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일 것입니다. 

 

2. 한국인은 모르는 일본인의 마음, 야스쿠니

 

야스쿠니 신사는 근대 천황제와 동시에 생겨났고, 이로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야스쿠니를 폐지하라는 말은 천황제를 폐지하라는 말이고, 나아가 근대국가 일본을 해체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야스쿠니 폐지라는 주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야스쿠니의 역사가 150년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야스쿠니 신사라 하면 국가를 위해 죽은 병사들을 기리는 곳이라고 오해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국가가 아닌 천황을 위해서 죽은 이들만이 합사될 있었습니다. 천황을 배신한 인물이라면 누구도 야스쿠니에 합사될 수 없었지요. 그것도 오직 185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천황을 위해 죽은 자들만이 합사되었습니다. 그 수가 약 246만 6,000명이며, 이들은 하나의 영혼으로서 신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에 합사되면 유가족에게 원호금이라는 돈이 나옵니다. 군인으로서 죽을 것을 장려하는 제도라 전후에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맨 먼저 폐지한 제도입니다. 그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독립국이 되자마자 일본은 원호금을 먼저 부활시켰지요. 야스쿠니에 합사된 아들을 둔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합니다. " 내 자식은 죽어서도 효자다. 내 자식이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신이 되더니 나에게 지금도 계속 돈을 보내오고 있다." 즉 원호금이라는 물질적인 혜택을 통해 일본인들을 야스쿠니 사관에 동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사되어 있는 조선인들은 이런 원호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야스쿠니 합사가 취소되면 유가족들은 지금까지 받았던 원호금을 다 돌려줘야 합니다. 일본에서 야스쿠니의 합사 취소 소송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원호금으로 야스쿠니의 질서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야스쿠니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야스쿠니는 완벽한 군국주의 시설이었습니다. 야스쿠니 경내에는 유슈칸이라는 일종의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유슈칸은 일본 우익의 보물창고로도 불립니다. 

 

3.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징병 : 인식의 차이

2부 닮아가는 한국 우익과 일본 우익

 

4. 일본 우익의 뿌리를 찾아서

 

메이지유신은 사무라이 계급이 벌인 사건입니다. 한국의 개화파와 다르게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유신과 함께 스스로 사무라이의 특권을 없애버렸지요. 그들이 토지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ㅇ비니다. 

 

5. 한국 우익과 친일 문제

 

일진회 문제가 간단치는 않습니다. 우선 일진회의 간부진 상당수가 불과 10년 전에는 동학이나 독립협회의 열성활동가들이었습니다. 21세기 현재의 토착왜구들에 비해서 이때의 일진회에는 나름의 논리와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개화가 절대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친일을 안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절망적인 무질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 질서든, 대한제국이든 일본이든 질서를 잡아준다면 기꺼이 협조하고 충성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요. 대한제국의 통치기능이 바닥에 떨어졌던 그 시절, 일부 사람들이 자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일본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만한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진회가 활개를 칠 때쯤에는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나라가 이미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요. 

 

6. 반격의 『반일 종족주의』

3부 오늘의 한일관계, 어떻게 풀어갈까

 

7. 재일조선인 문제를 보면 한일관계가 보인다

 

1945년 기준 해외에 이주한 이들은 대략 400만 명입니다. 3,000만 중 400만, 약 14%이지요. 14%는 전 세계 이민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수치입니다. 

 

일본은 왜 그렇게 서둘러서 조선인과 대만인의 국적을 박탈했을까요? 그 이면에는 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1952년 주권을 회복한 후 전쟁에 동원되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주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은 대부분 보상금 대상자였지요. 그래서 일본 정부가 부랴부랴 국적을 박탈한 것입니다. 전쟁에 마음대로 데려다 쓰고는 그 뒤에는 국적을 빼앗고 전혀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8.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시민사회와의 협력

 

9. 평화의 시대, 촛불혁명의 동력으로 풀어가야 할 한일관계

맺음말│한국과 일본, 극우를 넘어 시민의 연대로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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