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그 비밀의 언어], 장 크로드 카리에르, 조병준, 지호, 1997, (210913)

바람과 술 2021. 9. 13. 00:57

머리말

 

서구의 산업 사회가 만들어 낸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최신의 발명품이었던 이 영화는 연극, 보드빌(춤과 노래를 곁들인 가볍고 풍자적인 통속 희극), 뮤직 홀, 회화, 사진,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기술의 발달이 한데 어울어져 생겨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영화에는 일종의 그림자가 지배하는 영역, 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저장하는 창고가 반드시 존재한다.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그것을 교묘하게 영화 속에 넣을 수도 있다. 그리고 관객 가운데 누군가-어느 날 모든 것을 볼 능력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보는 것을 거부하는 단 한 사람의 관객-가 영화를 보면서 그것을 끄집어 낼 수도 있다. 아니면 관중이라고 알려진 저 예측 불가능한 집단적 존재들이 한꺼번에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1. 리얼리티에 대한 환상

 

그것을 좋아하건 말건 간에, 받아들이건 말건 간에,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역사에 대한 우리의 감각 자체가 이제는 주로 영화를 통해 흐르고 있다. 거기에서 달아날 길은 없다. 영화적 이미지들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마치 지나간 시대에 덧씌워진 가면처럼 우리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조금씩 그 이미지들은 이전의 공식적인 형태들을 대체한다. 위대한 전투의 파노라마,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들, 축하 행사의 장면들 저 고상한 거짓말의 긴 행렬 등 한때 역사에 대한 인식을 도와 주었던 그 오래된 공식적인 형태들이 영화적 이미지들로 대체된다. 그렇게 또 다른 거짓말이 이전의 거짓말을 대체하는 것이다. 

 

만장일치 찬성은 위험하다. 부뉴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만장일치 찬성은 작품이 타협적이고 흐리멍텅하며, 궁극적으로는 관습에 찌든 작품임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허겁지겁 인정을 받으려 애쓴다. 비평계의 인정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래야 다음 영화를, 나아가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에서 상상력은 훨씬 둔하고 수동적이다. 영화의 상상력은 테크닉에 의지하고 이를 신봉한다. 

 

2. 영화는 어떻게 말하는가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연결되어 이어지는 씬들로 분할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언어가 등장했다. 몽타주, 곧 편집이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한 씬이 다음 씬과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즉 편집을 통해 영화는 진정으로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편집이 제 역할을 다해 내면서 언뜻 보면 단순한 것 같은 이 테크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어휘와 문법을 만들어 냈다. 다른 어느 매체도 이런 발전 과정을 겪은 일은 없었다. 

 

영화는 단순한 시점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3. 시간의 유희들

 

우리가 오늘 영화를 만드는 것은 21세기의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는 15세기의 관객을 위해 연극을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역사의 순간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지금, 바로 여기. 내일, 그리고 다른 곳? 우리가 거기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4. 사라지는 시나리오

 

시나리오 자가는 어느 한 개인의 느낌을 다른 개인에게 옮기기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그는 오늘의 이야기꾼이며, 현대적 수단을 통해 고대의 전통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5. 영화, 그 비밀의 언어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책과 음악회, 오페라가 죽어 가고 있다는 징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음을, 지금처럼 대규모 회화 전시장에 수많은 관객이 몰려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연극이 활기차고 창조적으로 보였던 때도 없었다. 정작 위기에 처한 것은 바로 영화-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로 간주되는 영화-다. 아마 실수는 일종의 보편적인 수렴의 가능성, 곧 영화가 모든 언어를 하나의 결정적인 새로운 언어로 통합시키리라는 가능성을 믿었던 데서 비롯된 것일 게다. 마치 연방 국가에 합류하는 국민들이 하나의 국민으로 통하뵈듯이 말이다. 단일한 언어, 단 하나의 위대한 표현 형식에 대한 오래된 꿈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과도한 인구를 지닌 영토에 새로 끼여 든 이민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통합 대신에 오히려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지닌 보편적 대중성 때문에 그것이 지닌 한계뿐만이 아니라 차별적 속성도 함께 가려졌다. 영화는 전례없는 군중을 끌어 모았고 새로운 숭배의 형식을 창조해 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경기장에 뛰어든 또 하나의 매체에 불과했다. 영화 역시 다른 매체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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