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혁명의 문화사], 이후, 1999, (220227)

바람과 술 2022. 2. 27. 16:56

001. 펴내면서

 

002. 강혁/프랑스 혁명과 모더니티 : 르두, 르꿰, 그리고 사드

 

르두의 건축 기획 속에는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삶의 방식을 재단하고, 쾌락과 욕망까지도 관리하는 근대 사회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건축 공간의 재구성을 통한 합리적 세계의 건설, 질서 있는 사회의 창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행될수록 인간을 더욱 얽매고, 자유를 제한하며, 보다 생산과 효율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이율배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그의 환상 속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유토피아적인 몽상과 이상적 도시계획이란 것이, 생산을 위한 공간의 합리화, 노동의 조직화, 그리고 공간의 질서를 통한 지배 권력의 상징화에 다름아니기도 합니다. 

 

사드의 건축과 공간에 대한 관심은 감옥, 수용소, 병원에 대한 전문가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혁명 후 공직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수용소 공간을 연구하고, 그 개선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사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지하실, 쾌락의 집, 밀실 같은 밀폐되고 격리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한 밀실의 공간은 절대 자유의 공간이고, 또한 자유롭다는 것을 고독한 것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절대 고독의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은 결국 가두는 공간인데 갇힌 공간에서도 혼자 소리를 질러도 되고 벌거벗어도 됩니다. 거기서는 비정상도 정상이 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갇혔다는 것이 거꾸로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는 모순, 이것이 바로 근대적인 삶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감금이 곧 자유라는 이율배반 또는 모순이 사드의 텍스트에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근대성의 한 단면입니다. 

 

사드의 삶이 가능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에서입니다. 그것은 합리화된 생산의 공간, 질서의 공간의 반대편에 있는 공간입니다. 그 두 공간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분리만큼 근대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003. 서동진/파리 꼬뮌 : 두 명의 꼬뮈나르, 맑스와 랭보

 

맑스주의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파리 꼬뮌이란 축제, 혹은 파리 꼬뮌의 축제를 혁명의 스타일이라 불렀습니다. 그 말은 파리 꼬뮌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혁명의 내용이 아니라 혁명의 스타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점에서 파리 꼬뮌은 바로 혁명의 스타일이란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가치를 지닙니다. 

 

박정희 열풍을 선도한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그들은 단지 박정희라는 보나파르트가 보여주었던 사회의 일반적 의지를 대변하는 강력한 정부와 영웅을 필요로 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내용의 직접적 재현을 원할 따름이며, 따라서 그들은 사회를 초월한 혹은 사회에 군림하는 정치, 그러니까 정치 자체의 부재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파시즘을 두고, "그것은 아무런 사회적 내용을 갖지 않는 순수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애기했던 것을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004. 곽영진/러시아 혁명 1 : 레닌과 에이젠슈테인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 대응>

  1905년 1915년(1차 세계대전 후) 1917년 4월(4월 테제)
연립정부 형태 연정론 연정 거부론
(사실상의 독주론)
볼세비키 독주론
통치 체제 민주 독재 민주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 성격 부르주아 혁명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회주의혁명)
국가 유형 민주공화국 민주공화국 소비에트 공화국

 

에이젠슈테인, "두 개의 주어진 요소들의 충돌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그래서 몽타쥬는 갈등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이 갈등인 것처럼." 에이젠슈테인에게서 더욱 주목되는 개념은 이러한 몽타쥬 자체보다는 몽타쥬의 효과, 곧 인력(관객의 끌어당김)에 있었습니다. 주로 극단적 클로즈 업과 극단적 롱 쇼트의 결합을 주특징으로 하는 이 '끌어당김의 몽타쥬'는, 영화 안에서 잔복된 영상과 전복된 관객의 충돌과 통일을 이뤄보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매체적, 대중적으로 구션해보자는 것이다. 강렬하고 고무된 감정으로 끌어올리는 '파토스의 구성'과 사고 방식의 변증법적 변화를 일깨우는 '지적 몽타쥬'로써 관객의 정서적, 지적 효과를 '비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선동·선전 영화의 목표이자 이상이기도 하다. 

 

005. 이득재/러시아 혁명 2 : 트로츠키와 마야코프스키

 

006. 유중하/중국 혁명 : 루쉰과 마오

 

007. 이성욱/6월 항쟁과 민중 문화 운동

 

008. 이창근/멕시코 혁명과 사빠띠스따

 

사빠띠스따의 '야! 바스따!'라는 개념을 해리 클리버라는 자율주의 맑스주의자는 "하나의 '아니오', 무수한 '예'(One No. Many Yeses)"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One No'는 신자유주의 체제이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일 것이며, 'Many Yeses'는 무수한 인류가 꿈꾸는 다양한 존재와 삶의 방식, 그리고 저항 방식의 다양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투표의 과정은) 어떤 찬반에 대한 동의여부만을 묻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적 축제이면서, 학습과 훈련을 쌓는 조직화의 과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009. 강내희/보론 : 21세기의 혁명-'문화 사회'라는 프로젝트

 

전체를 통제하는 '중앙'이나 '상부'는 없습니다. 전체 움직임에 일정한 방향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후적인 현상입니다. 

 

010. 레이몬드 윌리엄즈 글, 이재원 옮김 - 부록 : '문화'와'혁명'개념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