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화장술의 역사], 도미니크 파케, 지현, 1998, (220302)

바람과 술 2022. 3. 2. 12:46

001. 화장술의 역사 Une histoire de la beaute

 

002. 고대의 아름다움

 

악마의 영향. 아름다움이란 그 기원에서부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팔레스타인 부족들의 전설에 따르면, 천사 아자젤은 엘신(이 신은 가나안의 주신이다)의 장수일 뿐 아니라, 신을 거역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다. 아자젤은 속죄의 날에 의식을 통해 죄를 짊어진 염소를 받아들이는 사막의 악마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 속죄의 염소는 여호와에게 봉헌된 제물이 받아들여지도록 모든 저주를 혼자서 짊어지고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자젤에게 보낸다'는 것은 '악마에게 보낸다'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상의 여인들에게 아자젤이 전달한 것은 악마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자젤이 가르쳐준 미용술은 천사와 짐승을 가르는 선 이에 위태롭게 놓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치장에 대한 관심은, 여러 금속들, 전쟁술과 함께 장차 신이 육신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 내릴 재앙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첫 재앙은 아자젤이 인간에게 화장술을 전달한 후에 일어난다. 마치 짚은 화장을 한 여인들의 부패한 얼굴을 씻어내리는 듯 퍼붓는 '하늘'의 비로 대홍수가 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미용술은 그다지 천대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여 B.C. 300년부터 미용술은 성직자 계층에게 고용한 영역이었다. 성직자 계층은 원료들과 그 혼합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고 그것들을 의식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사용했다. 몸단장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의례적 행위로 자리잡았는데, 이는 신전에 근접한 계층과 비교적 이미를 전혀 띠지 않는 제한된 세속적 단장밖에는 할 수 없는 평민 계층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었다. 

 

이지브가 화려한 치장으로 빛을 발했던 반면, 호메로스시대(B.C. 12세기~8세기)의 그리스인은 미용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앟았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은 몸단장이나 인위적 장식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균형에서 비롯되는 조화였다. 체육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화하고 조화로온 아프로디테와 파멸을 초래하는, 기만적인 판도라가 관장했다. 따라서 화장하는 여인은 판도라처럼 조화로운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반하는 일종의 후브리스(hubris, 정상을 벗어난 태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리스가 아테네 민주정치가 초기(B.C. 6세기)부터 여성 혐오 풍조가 규방에 영향을 미치던 남성 우위의 사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여성 혐오주의의 맹렬함은 사도 바올로의 서한들과 교부들의 강론에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어는 장식(보석, 의상, 머리 모양)을 다루는 법, 위생학, 의학적인 보호 수단 등을 지칭하는 '코스메티케 테크네'와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화장술을 지칭하는 '코모티케 테크네'를 일찍부터 구분하였다. 그리스의 몰락(서기 2세기~5세기)이 확연해질수록 보다 많은 하층 계급의 여인들이 화장을 하고 과감히 울타리를 벗어났다. 민주정 시대였다면 울긋불긋한 얼굴을 '외부인들'에게 보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에는 건강 유지를 위한 무해한 미용술인 '아르스오르나트릭스(그리스의 코스메티케에 해당)'와 유독 물질들이 이용되기도 하고 '아르스 푸카드릭스(그리스의 코모티케에 해당)'가 있었다. 

 

003. 중세의 어린 아가씨

 

이브의 잘못은 시종일관 여성들을 억압하는 명분이 되어 그들의 육체와 얼굴을 금욕주의의 틀에 가두었지만 여성의 창의성은 금욕주의의 방향을 바꾸었다. 기독교는 정숙과 검소를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는데 이를 굳건히 뒷받침한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서한들과 선지자 이사야의 규탄이었다. 신 앞에 죄인인 인간들은 천상의 덕으로 자신을 꾸몄고, 교부들(3세기~5세기)의 저주 때문에 목욕과 화장에 대한 애착은-이교문화의 퇴색과 흐름을 함께하여-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빈번한 야만족의 침입은 태평스럽게 몸단장을 하며 자신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쏟을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버렸다.

 

미용에 대한 관심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가 비난하는 불경스러운 언동에 포함된다는 주장이었다. 교회는 중세 사람들의 더없이 일상적인 겉치레마저 교화하려 애썼다. 14세기, 너그러운 성품의 자크 드 라 마르슈는 남편감을 찾는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과 보기 흉한 결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들에게 화장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악마와의 공모를 의미하는 고질적인 향연, 음탕함, 화장 등을 근절하려 애썼다. 게다가 조물주는 인간을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했으므로 겉치레는 신의 작품을 손상하는 일이었다. 

 

회교도의 화장 풍습, 안티몬, 향유 등을 동방에서 가져온 십자군들을 통해 여자들 사이에서 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중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젊음, 청춘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그토록 닮으려 애썼던 '어린 아가씨'라는 모범은 타고난 자연스런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상 그 목표는 털을 뽑고 변화를 꾀하는 오랜 준비과정의  대가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미의 규범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면, 여성 혐오 풍조는 그 규범에 따른 미의 원형을 찬양해 결과적으로 화장품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미화기능을 부정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004. 바로크풍의 아름다움

 

1453년에 비잔틴이 몰락하고 고대 수사본들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면서 로마 제국의 화장품 조제법과 미용법이 유럽에 전해졌다. 되찾은 지식들 덕분에 얼굴과 육체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는데, 그중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피타고라스의 조화에 관한 법칙과 아름다움, 정의, 진실에 관한 플라톤 학파의 이상주의였다. 중세에 아름다움의 원형이었던 어린 아가끼는 사라지고 포동포동하고 성숙한 여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5세기에 인쇄술이 발명되자 처방전과 조제법의 전파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런 가운데 미용에 관한 조언을 하는 대표적인 두 부류가 형성되었다. 살레르노의 의학에서 비롯된 조제법들의 전문가이자 식이요법론자인 '의사'와 기적적인 미용 크림들을 비밀리에 발명하고 선택된 소수에게 젊음의 묘약들과 마술적인 처방을 전하는 '귀부인'이 그들이었다. 아름다움에 관한 저술을 주도했던 이 두 부류는 두 종류의담론-화장술에 관한 의학적이고 위생학적 한계를 규명하는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담론과 주술을 이용해 영원한 아름다움을 약속하는, 규방에서 형성된 비결인 '속임수'로 이루어진 마술적 담론-을 이끌어갔다. 

 

르네상스 시대의 육체는 건축물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다. 해체되어 재건된 육체는 이상적인 규범에 따라 건축되었지만 그 규범은 결코 일정하지 않았다. 

 

1750년경, 자연과 육체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백과전서파와 극작자들의 영향으로 과도한 치장은 점차 사라져갔다. 서서히 우위를 점한 것은 얼굴과 육체로 표현하는 감정, 자연을 바라볼 때면 피어 오르는 보편적인 감정들과 마줄할 때면 넘쳐흐르는 감동, 즉 인상이었다.  

 

005. 자연에서 반자연으로

 

디드로와 루소를 계승한 감상주의와 독일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새로운 경향은 아름다움에 대한 접근법과 사고방식을 쇄신하였다. 육체적, 심리적 고유성을 지닌 개인을 주장한 초기 자유주의도 이 새로운 경향을 뒷받침했다. 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이 이상적인 규범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났다. 각자의 얼굴은 유일한 것, 비밀스런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눈길에도 뻔히 보이는 자아의 투명성은 위험스러울 수도 있었다. 자유주의적 중산 계층은 자신들의 격정과 몸짓을 제어하려 애썼다. 지난 세기의 과격함과는 거리가 먼 덕성 있는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19세기 초,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은 청결과 위생학적 관심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이는 날로 뚜렸해졌다. 주택들에 샤워실 또는 목욕실이 갖추어지면서 목욕하는 횟수도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목욕은 일상적인 행위가 아니었고 드문드문 행해지는 육체에 대한 '배려'였다. 새로운 미용품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의학계는 화장 전과정에 대한 총제적 지식을 확정하려 애썼다. 의학계는 맑은 물, 세정용 비누, 특히 화장용 비누를 장려하였고 신체를 보살피는 일에 다시금 기독교적 미덕을 결부시켰다. 

 

006. 현대 미인을 위한 건강한 몸

 

화학자 베르틀로의 유기합성학 발견, 내분비물과 호르몬의 생화학적 규명, 의학 지식의 확산에 힘입어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화장품과 의약품의 제조가 활발해졌다. 게다가 1906년부터 시작한 의학적 통제와 1913년에 시행한 백연 같은 유독물질 사용금지 조치는 백화점에서 저가에 판매되는 화장품의 대량생산을 합법화하였다. 그 뒤를 이어 믿을 만한 정보를 담은 광고들이 관련 정기간행물에 실리기 시작했다. 신체에 관련된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 서서히 이루어졌다. 휴양, 해수욕, 온천치료의 대중화, 영국에서 유행하던 야외 스포츠의 도입(조정, 테니스), 유행과 미용에 관련된 기사뿐 아니라 내밀한 위생문제까지 다루던 여성을 위한 정기간행물의 보급은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변화시켰다. 근육은 더 이상 육체노동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적이고 활력적이며 건강한 인체의 주요 부분이었다.    

 

육군병원에서 탄생하여 1919년 레이몽 파소 박사가 프랑스로 도입한 성형의술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주금 제거, 눈가 잔주름 제거, 비뚤어진 입 교정, 이마, 늘어진 목살, 눈꺼풀을 팽팽히 고르기, 유방·목부·발목 성형 등 여성들이 꿈꾸어오던 것들이 의료실에서 몇 분이면 가능하게 되었다. 최초의 미용 클리닉은 1895년 파리에서 문을 열었지만 본격적인 유행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미국으로부터였다.   

 

007. 기록과 증언

 

008. 참고문헌

 

009. 그림목록

 

010. 찾아보기

 

011. 사진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