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조세현, 책세상, 2008, (220405)

바람과 술 2022. 4. 5. 20:10

001. 책을 쓰게 된 동기...(6)

 

002. 들어가는 말...(11)

 

20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세 사람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일본의 고토구 슈스이, 중국의 스푸, 한국의 신채호가 바로 그들이다. 재미있게도 고토쿠 슈스이는 1900년대에, 스푸는 1910년대에, 신채호는 1920년대에 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를 전후해 전성기를 누리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은 곧이어 새로운 경쟁자(볼셰비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은 한때 정치권력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연합이냐 중앙집권이냐의 문제를 놓고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갈라섰다. 반드시 이 논쟁 때문에 아나키즘 운동이 몰락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 논쟁을 전후해 그 운동이 급격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제1장. 일본 :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동운동...(19)

 

1.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 고토쿠 슈스이...(21)

 

일본이 자본주의가 채 발달하기도 전인 19세기 후반에 이미 서구의사회주의를 들여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현상은 메이지 정부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주도했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부가 산업화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 유학 지식인들이 늘면서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사회주의를 조금씩 수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정부의 승인 아래 사회주의를 경계의 대상으로 소개했다면, 중국에서는 개명 인사들이 반체제를 위한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동아시아 사회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섞여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필요와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과정을 보면,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과 허무당 활동을 활발하게 소개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허무당과 허무주의를 소개한 것은 동아시아의 아나키즘 수용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처음 접한 무렵에는 러시아에 풍미하던 테러리즘이나 허무주의를 아나키즘과 거의 갚은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민 속으로'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을 총칭한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에 러시아 허무당원의 테러 활동이 소개된 것은 19세기 말 사회주의가 처음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단순히 외국의 신기한 사정을 넘어 진지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허무주의와 허무당원이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와 같은 것이라는 인사을 준 대표적인 저작은 1902년 당시 도쿄대학 학생이던 게무야마 센타로가 펴낸 <근세무정부주의>다. 게무야마 센타로는 본디 아나키즘을 비판하기 위해서 <근세무정부주의>를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은 몰론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어쩌면 한국인들도 포함될지 모른다)이 아나키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무정부의라는 용어는 머지않아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 적지 않은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가 유통된 다음에는 아나키즘이 허무주의자의 암살이나 폭동과 동일시되면서 원래의 의미가 심하게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나 조직을 부정하는 혼란과 폭력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및 한국인 혁명가나 유학생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들은 단체와 잡지들을 만들어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고토쿠 슈스이의 운동노선과 걸음을 같이했다. 이것이 동아시아 아나키시트 연대의 시작이다. 

 

2.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사상 교류...(35)

 

1903년 아나키스트가 된 고토쿠 슈스이는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토쿠 슈스이는 특히 중국의 혁명가들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이미 재일 중국 유학생은 만여 명이 넘어섰고, 그들이 주로 거주하던 도쿄지역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었다. 많은 중국 유학생과 혁명가들은 1907년초부터 고토쿠 슈스이와 만나면서 그의 영향 아래 자연스레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07년 고토쿠 슈스이는 <평민신문>에 쓴 글에서 일본인 혁명가와 중국인 혁명가의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1907년 4월 일본, 중국, 인도, 필리핀, 베트남 등의 혁명가들은 도쿄에서 '아주화친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반제국주의를 목표로 모인 국제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청년 혁명가들이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이자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분열이 일어난다. 중국인 아니키스트들은 더욱 근본적인 사회혁명을 추구하기 위해 중국동맹회를 개조하려 했다.  

 

3. '대역 사건'과 고토쿠 슈스이의 죽음...(46)

 

1910년 5월 25일 직공 미야시타 다키치가 폭탄을 제고하다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대역 사건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형법 제73조 위반(대역죄)으로 모두 26명의 사회주의자를 기소해 특별재판소에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판결을 서두르기 위해 취조나 공판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소한 26명 가운데 24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 두 명도 중형에 처했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 가운데 12명은 다음날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사전 계획된 유화조치도 있었지만, 정부는 형이 언도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해 12명을 전격 처형함으로써 전 국민을 다시 한번 경악케 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옥중 생활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선각자로 각인시켰다. 대역 사건 후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해 모든 언론 집회의 자유를 빼앗았다. 적기 사건과 대역 사건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사회주의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탄압이 메이지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좌절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아나키즘은 내부의 체계를 다듬어가게 된다. 

 

4.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의 재생 - 오스기 사카에...(52)

 

대역 사건과 같은 당국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1912년 10월 오스기 사카에라 아라하타 간손이 <근대사상>을 발행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다시 기지재를 켠다. 이 잡지는 오스기 사카에를 중심으로 하는 다이쇼시대 일본 아나키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잡지는 1914녀 9월 폐간당했는데, 오스기 사카에는 1014년 10월에 다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평민신문>을 창간한다. 그러나 당국의 탄압은 여전해 1915년 3월 이 신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당시 <평민신문> 종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개인적 사색의 성취가 있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남의 판단에서 빌려온 것이라면, 그 사람은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의 사상적 노예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운동은 흔히 일종의 종교적 광신을 수반하는 동시에 이런 노예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19년 8월 오스기 사카에는 동지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창간했다. 이 잡지의 한 논설에서 그는 노동운동이 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단순한 생물학적 또는 금전적 요구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간 해방이란 근본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동아시아 사회에 볼셰비즘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1920년대를 전후해 나라마다 공산당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오스기 사카에는 극동사회주의자회의에 참석해달라는 한인 동지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향한다. 중국, 조선, 일본, 러시아 등 여러 나라 대표가 모인 이 회의는 동아시아에 공산주의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코민테른이 주최한 모임이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 일본 지부를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다만 정보 교환을 위해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귀국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2021년 12월에도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렸다. 이때 참석한 일본 대표들을 보면 공산주의자보다 아나키스트가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노동운동 단체의 대표였던 그들은 대회에 출석하는 것보다는 러시아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이런 일련의 접촉을 통해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의 현실에 크게 실망했으며, 볼셰비키 정권의 통치 아래 노동자와 농민의자유가 희생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국내에서 일본 볼셰비키와 연합하는 것을 단념한 오스기 사카에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관심을 쏟았다. 때마침 1923년 2월 베를린에서 열리는 산·티미에 인터내셔널 50주년 기념 집회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이 도착한다. 그는 곧장 파리로 가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아나키스들과 접촉했으며, 5월 1일 파리 교외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해 일본의 노동운동에 관한 연설을 한다. 오스기 사카에는 이 여행에서 유럽의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시금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아나키즘 원리와 근본적으로 상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바로 이때 군과 경찰 그리고 자경단에 의해 6천 명에 달하는 한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오스기 사카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어느 날 아내와 어린 조카와 함께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졌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청년 아나키스트들은 복수를 위해 테러를 감행한다. 이런 테러 활동의 시작은 그 후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이 전개된 양상과 관련해 미묘한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제2장. 중국 : 군주제와 군별정부에 대한 저항 그리고 신문화운동...(59)

 

1.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61)

 

20세기 초 청 왕조가 국내에 설립한 신식 학당이나 해외로 파견한 유학생 사회에서 혁명가들이 출현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편 해외 유학생은 주로 재일 유학생 사회를 가리키는데, 이는 이들이 해외 유학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대문이다.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은 일찍부터 동향회와 같은 여러 모임을 만들고, 그 중 일부는 조그만 서클을 만들어 반청혁명의 여론을 전파했다. 당시 중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직면한 절박한 문제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고 중국 사회를 정체시킨 전체주의 봉건 문화를 혁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1 과제는 군주제개혁 또는 타도였다. 이를 위해 여러가지 서구의 신사조를 수용했는데, 아나키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03년 청 왕조는 상하이 지역 신문 <소보>를 반청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폐간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혁명운동을 처음으로 고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혁명파들은 더 이상 청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을 느끼고 체제 전복을 위해 암살과 폭동과 같은 비상 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변법운동의 좌절, 나아가 서양 열강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청 왕조의 모습은 청말 지식인들의 분노와 좌절을 자아냈고, 의화단 운동이 실패하자 그 절망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따라서 개혁파든 혁명파든 상관없이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에서 러시아처럼 허무당원이 출현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허무주의와 중국의 허무주의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혁명적 허무주의자는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과는 달리 청 왕조의 전복이라는 정치혁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으로 러시아의 허무주의를 받아들여 정치혁명가임을 자신했으나 여전히 본디 아나키즘의 사회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울러 중국의 혁명적 허무주의자들이 고려하지 못한 개인의 도덕 문제를 훗날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왔다. 중국인에게 아나키즘의 수용인 이론적으로 볼 때 혁명 이론의 전진을 의미했다. 종족주의에 기초해 만주족 정권인 청 왕조를 타도하는 정치혁명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해 전제왕조라는 군주제를 전복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나아간 것이다. 

 

2. '중국식'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67)

 

1907년은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상징적인 해이다. 그해 6월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강습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어 <천의>라는 아나키즘 잡지를 펴냈고,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세계사'라는 단체가 <신세기>란 아나키즘 잡지를 발간해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출발을 알렸기 때문이다. 천의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류스페이였다면, 신세기파의 이론적 지도자는 리스쩡이다.

 

<천의>는 기본적으로 여성잡지였으므로, 그 내용은 상당 부분 아나르코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었다. 여성해방론에 관한 기사는 주로 류스페이의 아내인 허찐이 기고했다. 류스페에가 일본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아나키즘을 재해석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그는 <천의>에서 국수주의와 아나키즘을 결합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고대 중국 학술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응용해 독자적으로 아나키즘 이론을 풀이한 것이다. 그리고 류스페이가 갑자기 양강 총독인 뚜안팡에게 투항함으로써 결국 천의파는 몰락하고 만다. 왜 류스페이가 아나키즘을 버리고 '변절'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더 넓게 식가에서 본다면, 서양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말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류스페이가 국수를 권장하던 뚜안팡에게 투항했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듯싶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아나키즘이란 처음부터 국학의 부흥이라는 목표 아래 제한적인 의의를 지니는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류스페이 사상의 특징은 국학과 혁명이 결합한 것으로, 전통적 평균 사상과 근대적 평등 사상을 한데 섞은 절대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의 아나키즘을 '중국식 아나키즘'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전통주의적 해석법은 신세기파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중국식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비주류를 형성해 그 후에도 꾸준히 나타난다. 사실 류스페이와 신채오의 아나키즘에는 비슷한 점이 많고 따라서 두 사람의 아나키즘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천의파와 함께 중국 아나키즘이 또다른 출발점인 신세기파는 리스쩡의 주도로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되었다. 1907년 무렵은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였으며, 르클뤼와 그라브가 해석한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신세기파가 탄생한다. 파리의 아나키스트들은 공화주의 혁명은 정치혁명이고 아나키즘 혁명은 사회혁명이라고 구분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보았다. 배황혁명이 배만혁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와 사회혁명이 공화혁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결국 쑨원의 삼민주의를 비판하는 데로 나아갔다. 하지만 신세기파의 중국동맹회 비판은 어디까지나 동지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류스페이의 천의파가 중국동맹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리스쩡의 아나키즘은 원론적인 아나키즘에 비해 아주 점진적인 실천방법을 내세웠다. 곧바로 아나키즘 혁명을 추구하지 않은 그의 온건한 태도는 혁명 수단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테러와 폭동 또는 총파업과 같은 행동주의를 취하기도 하지만, 아나키즘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혁명을 더 선호했다. "아나키즘 혁명은 교육으로 혁명을 이루는 것"이란 신세기파의 구호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세기차는 종종 아나키즘 사회를 전통 용어를 써서 대동사회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대동사회란 전통적인 의미의 대동사회와는 전혀 다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를 의미했다. 사실 그들은 근대 중곡에서 과학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집단으로도 유명하다. 동아시아 사회가 진화론을 수용한 것은 한마디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천은 불변한다"는 중국의 고대철학과는 거꾸로 "만물은 변화한다"고 주장한 서양의 진화론은 중국인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는다. <신세기>가 선전한 아나키즘 사상, 즉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은 중국 아나키즘을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근대 중국의 아나키스트 운동 이론은 신세기파에서 기원해 그 범위를 크게 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중국 아나키스트의 초상 - 스푸...(80)

 

신해혁명은 청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청 왕조의 몰락은 곧 신세기파가 말한 배황혁명의 성공과 공화정부의 등장을 의미했고, 결국 사회혁명의 과제가 남게 되었다. 그런데 옛 신세기파의 구성원들은 곧바로 공화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투쟁에 들어가지 않고 "민국을 건설하면서 아나키즘 사회를 추구한다"는 점진적인 길을 선택하고 쑨원의 국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이른바 분관주의의 태도를 취했다. 대신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도덕운동과 교육운동을 추진했다. 그들이 이처럼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열중할 무렵 <신세기>의 사상을 중국 본토에 보급하고 직접 실천에 옮긴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스푸이다. 

 

스푸의 본래 이름은 류사오빈이다. 배만 혁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만주족을 타도하고 광복을 생각한다는 뜻을 담아 류쓰푸라고 개명했다가 성을 없애고 또 개명해 스푸라 불렀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후 가족주의와 중족주의와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성씨를 폐지하는 것은 중국 아나키스트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는데, 민족국가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고 철두철미한 아나키스트가 되려는 의미를 나타내는 행동인 듯하다.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전복되자 한동안 낙관적인 정서가 지배했다. 아나키스트들 역시 잠시나마 새롭게 건립된 공화정부를 신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폭력행위를 자제하고 개인 도덕의 수양을 통해 새로운 사회도덕을 창출하려 애썼다. 

 

스푸의 민성파는 비록 소수였으나 매우 결속력이 강한 조직으로, 위안스카이 독재 아래서 거의 유일하게 생존한 혁명파 집단이다. 위안스카이 정부의 탄압 때문에 쑨원의 국민당과 장캉후의 사회당이 해산한 후에도 스푸의 민성사는 여전히 살아남아 교육운동(주로 에스페란토어 전파 활동)과 노동운동 분야에서 일정하게 사회주의 운동세력을 유지했다. 스푸가 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희생적이며 정열적인 실천 활동 그 자체에 있었고, 그 강한 이미지는 5·4운동 시기에 청년 아나키스트들의 모범이 되었다. 

 

4. 스푸의 학생들과 신문화운동...(92)

 

스푸의 죽음을 전후해 중국 사회는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대외적으로는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청말 이래 중국 지식인들이 믿고 있던 사회진화론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났다. 당시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총체적인 사회 문화의 변혁이 없는 한 결코 민주국가의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상 개혁이 아니라 사회윤리적 토대의 근본적인 혁신이라는 데 공감했다. 더욱이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옛 권위와 투쟁하는 것은 더 이상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 경험에 기반한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신문화운동 시기 중국 아나키스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피하고 주로 도덕이나 교육 문제와 같은 문화운동에 전력했다는 것이다.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기존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급진성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의 아나키스트 운동과 일치하지만, 전통문화와 관련해 나타나는 강렬한 문화주의 의식은 주묵할 만하다. 소위 전통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태도는 어설프게나마 전통과 아나키즘을 지속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천의파)나 그와 반대로 극단적인 단절을 주장하는 배타심리(심세기파)로 표출된다. 

 

제3장. 한국 :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99)

 

1. 민족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101)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출발하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을 전후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급진주의 사조를 받아들였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아나키즘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사회진화론이 한때 실력양성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근대화운동을 이끌어지만,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다음에는 이 이론이 일제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요소가 있다고 자각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 사회주의에 주목한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국내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즈음 일본이나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즈음 일본이나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이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벌이는 활동이 더 활발했다.   

 

2. 신채호는 아나키스트인가...(108)

 

신채호는(1880~1936)가 일제시대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 시기를 조금 달리하기는 하지만 한 인물에게 도잇에 구현되었다는 것은 한국 아나키즘을 이해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다. 신채호가 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게 된 것도 사대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수주의는 지배계층의 통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고, 종족주의로 빠져 자민족 우월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었다. 1920년대 이전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에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립 관계로 인식하며,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대항해 민족주의자의 저항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의 민족주의는 훗날 아나키즘에 쉽게 다가가도록 만든 한 가지 계기가 된 듯하다. 신채호가 '자강'에서 '혁명'으로 전화한 과정은 '민족'에서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과 어우러진 것이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몇 가지 문제는 논란거리다. 그 중에서도 ① 왜 아나키즘을 수용했는가라는 사상적 배경에 대한 문제, ②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신봉했는가라는 시점의 문제, ③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평가의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다.  

 

3.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123)

 

제4장. 아나·볼 논쟁과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135)

 

1. 동아시아의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137)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 정부가 들어서자 동아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사회에 볼셰비키가 등장한 것은 아나키스트를 위협하는 강력한 도전자가 출현했음을 의미했다. 그들의 등장은 곧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낳았는데,이러한 분열은 특히 노동운동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이전까지 아나키스트 계열 노동조합과 마르크시스트 계열 노동조합은 이론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단결을 유지하면서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조직과 운영방식을 놓고 충돌이 일어난다. 결국 아나키스트 계열의 노동조합도 독자적인 전국 조직을 구축해나가면서 아나·볼 논쟁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긴인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만들어질 무렵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 사이에 아나·볼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의 아나·볼 논쟁은 일본과는 달리 노동운동 분야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먼저 나타났다는 점이 이채롭다. 중국공산당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당을 건설하려는 일부 마르크시스트와 아나키스트 사이에 먼저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한인의 경우는 1920년 초에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거의 동시에 수용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대립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가리켜 혁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산독재를 획책하는 또 하나의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동아시아 3국의 아나·볼 논쟁은 사회환경에 따라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주요 쟁점은 비슷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문제 : 아나키스트는 국가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인류사회에서 죄악의 근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점에서는 부르주아 국가든 프롤레타리아 국가든 자유를 억압하는 강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둘째, 개인의 자유와 당의 규율 문제 :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주의는 아나키즘의 좋은 친구"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하고 공산주의의 집체주의를 포함한 모든 권위에 반대했다. 셋째, 생산과 분배 문제 : 아나키스트는 경제조직에서 생산자의 자주관리 원칙에 따라 이들 생산자들이 조합이나 공장이 생산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경제체제에 반대한다. 아나·볼 논쟁은 이런 이론적인 경쟁 이면에 "누가 더 효율적으로 사회 변혁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실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나·볼 논쟁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제시했던 주요한 관점들이 지금도 유효한 부분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마르크시스트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중앙집권적 혁명정당 건립을 주장한데 반해 아나키스트는 자유연합과 분권적인 조직원리를 제시했다. 둘째, 사실상 일부 엘리트 집단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승인했던 마르크시스트에 대해, 아나키스트는 이런 시도는 결국 변질되며 모든 변혁운동은 반드시 그 운동 주체가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마르크시스트는 경제결정론과 역사유물론을 선봉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은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넷째, 마르크시스트들은 계급투쟁이 민족 문제, 여성 문제 같은 사회의 여러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믿은 것과 달리, 아나키스트는 가족·종교·국가 등 모든 권위가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이므로 이들에 맞선 '전방위'의 투쟁을 강조했다.   

 

2.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146)

 

003. 맺는말...(153)

 

서양 아나키즘의 최고 목표는 개인이 절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아나키스트들은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유를 추구했으며,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권위와 권력에 맞서 싸웠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도 서양의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자기 나라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보다는 사회 문제에 좀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려 한 권력의 대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천황제였다. 따라서 천황제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천황 개인에 대한 테러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자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연대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중국에서 혁명가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처음 직면한 정치권력은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였다. 따라서 이들은 군주제를 타도하는, 이른바 배황혁명을 사회혁명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1911년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황제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내실을 갖추기도 전에 곧바로 군벌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절망한 아니키스트들은 중국 사회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정치혁명을 넘어서 문화혁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여기서는 도덕운동이나 교육운동을 사회혁명의 주요한 방벙으로 채택했다.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주권조차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운동의 시작 단계부터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과제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정치 지향의 색채로 비교적 농후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활동했기 때문에 그 지역 아나키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가 이론을 중시했다면,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실천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운동보다는 주로 테러와 파괴 같은 폭력수단에 의존해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 고양과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흐름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민중연대를 주장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004. 주...(157)

 

005. 더 읽어야 할 자료들...(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