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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음식 문화], 맛시모 몬타나리, 주경철, 새물결, 2001, (220320)

바람과 술 2022. 3. 20. 22:14

총서 편집자 서문 ...5

 

한국어 판을 펴내며 ...7

 

서문 ...15

1장 공동의 언어를 위한 기초 ...19

 

.기근의 시대 ...19

 

비상사태란 몇 달이나 몇 년, 길어야 몇십 년 지속될 뿐이지 몇 세기 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 위기는 3세기에 시작되어 4~5세기에 악화되었으며, 이탈리아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6세기에 정점을 이루었다. 6세기는 가장 격렬한 갈등과 가장 심각한 기근 및 질병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비상사태'는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적응해야 했던 일상적인 사태였다. 아마도 이 세대의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삶과는 다른 종류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인구 감소가 곧 당시 사람들의 음식 섭취상태가 안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 지수들을 볼 때 오히려 인구 압력이 감소하는 시기에 개인들의 소비 수준이 대단히 안정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단계가 반드시 식량이 풍부한 시기도 아니었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동시에 식량도 풍부해지는 현상은 오늘날에 와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물론 비극적 사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5~6세기의 유럽인들을 두고 이들이 단지 초근목피에 의존했다든지, 혹은 심한 경우에는 식인도 마다하지 않았다고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점잖은 식탁과 식탁보를 사용하면서 정상적인 음식 소비를 했던 사람들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기 사람들은 언제 음식이 떨어질지 모르므로 가능한 한 음식의 원천을 다양화하려고 했다. 

 

고대에는 비경작지를 인간세계 내지 문명세계에 대한 일종의 반대개념으로 보고 이런 곳들을 생산 활동의 영역으로부터 아예 배제해버리려고 했다. 5세기와 6세기 사이에 새로운 생산·문화 모델이 확립되면서 이런 태도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야만인과 로마인 ...24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도 원상태 그대로의 자연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 비경작지는 그리스나 로마 지식인들의 가치 체제에서 거의 아무런 중요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문헌 자료들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들은 문명, 도시 그리고 도시를 향한(다시 말해서 도시의 시장과 소비자들을 위한) 농업 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문화에서 비경작지라는 개념이 부정적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농업 경작은 음식의 확보라는 면에서 다른 방법들을 압도하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경제와 문화의 기초였다(적어도 지배적인 모델들에서는 그렇다). 밀, 포도, 올리브는 농업 생산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이 세 가지는 고전 문명 그 자체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소위 '야만인' - 물론 이것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부르는 명칭일 뿐이지만 - 들의 생산 양식과 가치 체제는 완전히 달랐다. 켈트 족과 게르만 족은 수세기 동안 중부 유럽과 북부 유럽의 살림을 휘젖고 다니는 동안 처녀지와 비경작지를 이용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가냥과 어로, 야생 과일의 채취,  숲에서의 자유로운 방목(이중에는 돼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외에 말과 소도 포함된다) 등은 그들의 생활에서 중심적인 일이었다. 빵과 죽 대신 육류가 그들의 음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포도주는 로마 제국과의 경계 지방에만 알려져 있었고 그 대신 암말의 젖과 그것을 가공한 시큼한 액체, 야생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시드르, 혹은 숲의 일부를 경작지로 만들어 곡물을 재개하는 지역에서는 맥주를 마셨다. 

 

물론 이 구분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문제는 전적으로 어떤 음식들을 먹었느냐 아니냐 하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 사실 그 점에서 보면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 어떤 특정한 음식이 전체 음식 체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체제 속에서 그것들이 어떤 위치와 중요성을 차지하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당대인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집단과 자신을 구분하려고 할 때 그들 스스로 강조하는 차이점들이다. 호메로스가 인간을 '빵을 먹는 사람'으로 정의할 정도로 빵은 그 문명의 종합적인 상징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게르만 족 신화에서는 전쟁에서 죽은 영웅들이 저 세상의 천국에 가서 새림니르(saehrimnir)라는 커다란 돼지가 영원히 끊임없이 제공하는 고기를 먹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돼지는 생명의 기원이자 음식의 핵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만남에서 특히 결정적인 시점은 3세기 전반기였다. 새로운 사회 세력과 새로운 종족이 로마 제국의 변방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심지어는 심층적인 제도적 위기 때문에 황위 계승이 빠른 속도로 연이어 일어나는 와중에 '야만인' 출신의 인물들이 황제가 되는 일도 일어났다. 

 

.강한 자와 육식 ...34

 

이 융합 과정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은 간단히 말해서 힘 그 자체이다. 게르만 족이 점진적으로, 또 지방마다 약간씩 다르게 새로운 유럽의 지배계급이 되어가고 또 이들이 정치적·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결과 게르만 문화와 이들의 심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게르만 족은 비경작지와 야생 상태의 자연에 대해 그리스-로마의 전통과 대조적인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 그런 것들은 더이상 귀찮은 존재라든가 혹은 인간의 생산 활동에 대한 한계가 아니라 사용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변화를 가장 잘 예시하는 것으로는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역(영국, 독일,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에서 7~8세기부터 숲을 추상적인 면적 단위로 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몇 마리의 돼지를 키울 수 있는가 - 도톨리, 너도밤나무 열매 같은 것으로 돼지를 얼마나 살찌울 수 있는가 - 로 나타내는 관행을 들 수 있다. 그 점에서 밭(밀 생산량으로 측정된다), 포도밭(포도주 생산량으로 측정된다), 초지(건초 생산량으로 측정된다) 등에 적용되는 생산 개념들과 유사하다. 

 

음식 가운데 고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은 특히 지배 계급에게서 강조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기는 권력의 상징이며, 또 기력·육체적 에너지, 전쟁을 수행할 능력 등을 만들어내는 도구였다. 그와 반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겸손의 표시거나 지배층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리는 표시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단지 소수의 권력자들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이제 '문명'의 상징으로서 빵의 위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독교적 신념 속에서 빵은 포도주와 기름과 함께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상징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의 빵, 신의 포도주 ...39

 

4~5세기의 기독교 작가들은 빵과 포도주와 기름에 대해 대단히 강렬한 상징성을 부여했다. 특히 빵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성찬과 금식 ...47

 

음식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 역시 크게 변화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음식은 기쁜 마음으로 즐기되 탐욕스러워서는 안되며, 풍성하게 제공하되 허세를 부려서는 안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 문화와 켈트 문화에서는 '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엄청난 폭식과 폭음의 태도야말로 동료들에 비해 '동물적인'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계 내에서도 지중해 지역과 대륙 지역, '로마 지역'과 '게르만 지역' 사이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조적인 식습관을 찾아볼 수 있다.  

 

.토지와 숲 ...55

 

이 시대는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에 의존할 수 있었던 때이다. 빵·죽·야채와 함께 고기·물고기·치즈·계란 등이 식탁을 우아하게 장식했다.  음식상의 다양성을 더욱 촉진하게 된 계기로는 교회의 지시도 한몫 했는데, 그 이유는 한 주 중의 어느 요일, 혹은 일년 중 어느 시기에는 육식 내지 모든 동물성 식품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길고 짧은 여러 금식 기간들을 계산해보면 일년에 150일 이상이 되었다. 육식 중심의 문화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이 현상은 식탁에 다양한 음식들이 오르게 만들었다. 그 결과 때때로 고기 대신 물고기나 치즈(혹은 야채들)를 먹고 동물성 지방 대신 식물성 기름을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기도서 달력은 식사 관습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유럽의 여러 지역들간에 상당한 정도의 통일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공동의 문화 속에서도 화해할 수 없는 분열이 유지되었으며 작지 않은 사회적 차이를 불거졌다. 중북부 유럽에서, 특히 상층 계급에서(속인들이든 교회 인사들이든) 빵·포도주·기름 등이 교회 의식용만이 아니라 일반 소비품으로도 '유행'했던 반면, 하층 계급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식생활에 고착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는 종교 의식의 중요한 요소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최근에야 게르만 족의 권력과 문화의 지배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상층 계급이 사낭에 대한 열정과 엄청난 육류 소비 쪽으로 생활 양식과 음식 습관을 조정하려는 경향이 컸던 반면, 하층 계급은 전통적인 모델에 집착했다. 

 

.빵의 색깔 ...60

 

명백히 사회적 의미를 띠고 있는 두 종류의 빵 사이의 차이는 우선 그 색깔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밀빵은 하얗고 호밀을 비롯한 잡곡빵은 까맣다. 흰빵은 상류층의 전유물이며 단연코 사치품이었다. 빵의 종류와 소비자의 지위 사이의 관계는 복잡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빵의 종류와 소비자의 지위 사이의 관계는 복잡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문제일 수도 있고, 참회의 도덕적 욕구 또는 겸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육류 소비 면에서도 역시 사회적 구분이 있었다. 특히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자연의 이용 ...64

2장 전환점 ...71

 

.강요된 선택 ...71

 

일상적인 생계 유지에 대단히 중요한 비경작 공간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 압력이 커짐에 따라 숲의 감소가 불가피했다. 숲의 점진적인 침식(혹은 몇몇 경우에는 숲의 파괴)이 농업 팽창의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숲 자체가 더욱더 인공적으로 이용되었다. 농업 팽창의 시작은(11세기가 대표적이지만 부족한 정도로나마 9세기에도 있었고 또 16세기, 18세기에도 일어날 것이다) 영양상의 곤경이 증대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영양상의 곤경은 기존의 생산 체제를 갖고는 완화할 수가 없었다. 


.힘과 특권 ...78

 

이 시점부터 유럽 경제는 갈수록 더 곡물 경작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이런 발전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음식 체제에 기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 질서 역시 변화해야 했다. 비록 숲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지리적 요소로 남아 있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그 뒤로도 수세기 동안 그러했으며 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그러하다. 당시에 일어났던 일은 차라리 숲의 이용권에 대한 제한이라 할 수 있다. 인구 증가와 비경작 공간의 축소로 인하여 삼림 자원에 대한 경쟁이 증대됨에 따라 사회적 긴장이 격화되었고, 권력에 따라 여러 특권들이 규정되었다. 숲의 이용은 강한 권력을 가진 계층에게만 독점되었고 힘없는 계층 사람들은 배제되었다. 물론 그 엄격성과 배타성의 정도는 다양한 차이를 보였지만 말이다.   

 

삼림 자원을 둘러싼 첫번째 분쟁은 8~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미 일부 수도원들이 시골 공동체로부터 삼림 자원을 빼앗음으로써 지방 주민들에게 어떻게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보았다. 10~11세기 동안 특히 세속 지배자들의 주장이 거세졌다. 이 시기야말로 지방 영주들이 사람과 토지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행정과 사법 영역만이 아니라 생산 영역의 활동까지 통제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영주층은 토지 소유주로서의 사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공적인 징세와 관련해서도 과거보다 더 많은 요구를 했다. 바로 이와 같은 혼라스러운 풍토에서 귀족층이 비경작지의 사용권을 빼앗았다. 모든 곳에서 '영주직영지'가 늘었다. 이곳에서는 농민 계급의 사냥이 금지되었으며, 사냥 그 체자가 특권의 하나가 되었다. 농민들이 이런 침탈 과정에 대해 가능한 경우마다 시비를 거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실은 9세기 이후 재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끝없이 많은 고소, 법정 다툼, 굴욕의 기록들이 이어진다. 흔치는 않으나 농민들이 영주들과 협상 끝에 일정한 정도의 상호 존중을 이끌어내면서 성공적으로 그들의 권리를 수호해낸 적이 없지는 않다.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소서 ...84
.도시의 숨통 ...90
.많이 먹고 잘먹던 시기 ...95
.식도락과 기근 ...100

3장 각자의 몫 ...113
.기근의 복귀 ...113
.육식의 유럽 ...117
.육류의 금식 ...127
.질의 문제 ...133
.전시용 식탁 ...146
.가난한 사람들이 누리는 풍요 ...150

4장 유럽과 세계 ...155
.바다너머의 멋진 세계 ...155
.새로운 주인공 ...158
.빵과 고기 ...165
.부르주아의 잔혹성 ...171
.두개의 유럽 ...174
.미각의 변화 ...185
.과거의 자극제와 새로운 자극해 ...192

5장 기근의 세기 ...205
.역사는 반복되는가 ...205
.옥수수의 힘겨운 성공 ...210
.감자, 농학과 정치학 사이 ...215
.마카로니 먹는 사람들 ...221
.음식과 인구 ...227
.고기의 해약 ...232

6장 혁명 ...239
.역전된 경향 ...239
.고기의 설욕 ...241
.전세계의 도시화 ...245
.사계절 음식 ...249
.즐거움, 건강함, 아름다움 ...256

주 ...267
참고문헌 ...287
옮긴이 후기 ...299
찾아보기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