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키워드로 읽는 다짜고짜 세계사], 장지현, 미네르바, 2016, (220418)

바람과 술 2022. 4. 18. 09:58

들어가며…4

작물과 기호품

 

쌀·11

 

쌀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소비가 많은 곡식의 하나로 4,000년 전부터 아시아 지방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세계 인구의 2/3를 먹여 살리고 있다. 최초로 쌀을 재배한 사람들은 아시아인들뿐이 아니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배된 아시아 벼와 서아프리카니제르 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던 아프리카 벼의 두 종류로 나뉜다. 다만 아프리카 벼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재배된 것과 달리 아시아 벼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벼를 재배하는 두 가지 방법에는 직파법과 이앙법이 있다. 직파법은 다시 수경재배와 건경재배로 나눌 수 있는데, 수경재배는 물을 댄 논에 씨를 뿌리는 방법이고 건경재배는 마른 논에 씨를 뿌려 재배하는 방식이다. 이앙법은 미리 못자리를 만들어 벼의 모종을 키운 후 논에 옮겨 심어 재배하는 방식이다. 

 

옥수수·14

 

벼과에 속하는 옥수수는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한 남아메리카 북부의 안데스 산택 저지대나 멕시코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멕시코 남동부에 위치한 테우아칸 계곡에서는 5,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더 큰 옥수수 낱알이 발견되었다. 이는 당시 이미 옥수수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작물에 속하는 것으로 고온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식물이기 때문에 한 알에서 수백 배 가까이 수확할 수도 있다. 

 

감자·16

 

감자는 3,500년 전부터 페루 등지에서 재배되었다. 식량자원으로 인정받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감자의 원래 고향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원산지는 해발 3,000~4,000m의 안데스 고지로 특히 현재의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주변이 감자의 발상지이다. 이곳에 정착하여 잉카 문명을 구축한 사람들에게 감자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와 피사로 등이 활약하던 대항해 시대였다. 감자는 거친 땅에서도 대량으로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항해 시대 이후 지구상의 각지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인구 증가에 공헌했다. 

 

고추·22

 

남미에서 고추는 2,000년 전부터 재배되었다. 15세기 말, 원주민이 재배하고 있던 고추를 후추라 착각한 콜럼버스는 그것을 유럽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그 후 20년이나 지난 뒤에야 콜럼버스는 그것이 후추와 다른 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에도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통해 고추가 도입되었는데, 콜럼버스가 가지고 돌아간 남미산 고추는 동아시아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한다. 

 

담배·26

 

서기 5~7세기 남미 유카탄 반도 마양족의 신전 석벽의 '담배 피우는 신관'의 조각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흡연 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디오들은 담뱃잎에 불을 붙이고 여기서 내뿜는 연기에 온몸을 쏘였으며 이것은 인디오의 풍습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연기에 정령이 들어 있고 이 정령은 악령을 쫓아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믿었다. 원주민들은 담배 연기를 신성한 의식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많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 담배를 접한 일부 유럽 상인, 모험가, 선교사들 역시 담배를 약초로 사용했다. 

 

올리브·32

 

고대 동지중해의 레바논에는 그윽한 향기 때문에 향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사랑받던 레바논 삼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삼나무는 그 향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해충과 부식에도 강하고 내구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신전이나 왕궁의 건축자재로 쓰였다. 그래서 레바논을 탐내던 왕과 황제들은 한결같이 레바논 삼나무를 획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주변 국가들에게 이 삼나무 숲의 정복은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고 이것은 또한 잦은 출병의 원인이 되었다. 높이 40m, 둘레 10m나 되는 레바논 삼나무는 돛대를 만들기에도 적당했다. 레바논을 고향으로 삼은 페니키아인이 이 풍부한 레바논 삼나무를 지역의 항구인 비프로스, 시돈, 티루스에서 배에 가득 싣고 멀리 이집트와 로마로 가져가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숲이 아무리 울창하더라도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고갈되고 만다. 꽃가루 분석을 통해 살펴보면 길가메시 왕 시대 훨씬 이전부터 레바논 삼나무는 급속히 줄어들고 대신 올리브 나무가 증가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리스인들이 울창한 삼나무 숲이 파괴된 후 그것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올리브를 생각해낸 것이다. 

 

5,500년 전에 크레타 섬이 올리브나무가 존재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 과정을 거쳐 증명되었다. 또한 5,000년 전에 샘족이 올리브나무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기원전 13세기부터 올리브나무를 재배했다. 그러나 오늘날 올리브는 지중해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올리브나무 재배의 원류는 지중해 동부 인근에서 찾을 수 있다. 

 

아편·36

 

목화·41

 

생물학자들은 목화의 원산지를 두 군데로 분류한다. 바로 투르케스탄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 지역과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 지역이다. 기원전 제3천 년기부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인들인 인도에서 목화를 수입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들이 이 목화를 어디에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발굴된 고분에서는 주로 아마천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고 면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5세기 무렵으로 여타 직물에 비해 늦은 편이다. 한편 중세 시대 유럽에서 사용되던 면은 주로 인도에서 수입되었다. 다만 에스파탸의 경우 아랍인들이 들여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자급자족했다. 한편 남아메리카의 주요 목화 생산국은 멕시코와 페루였다. 이들 국가는 콜럼버스와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땅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 기원전 5세기에서 10세기경부터 목화를 재배했다. 중국에서 송나리 시대 때, 우리나라는 목익점에 의해 14세기 중반, 일본에는 16세기, 유럽에는 15~16세기가 되어야 목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이집트나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던 목면이 근대로 접어든 다음에야 식민지 정책과 함께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에서는 13세기, 이탈리아 14세기, 영국 17세기, 봄베이 19세기 무렵에 각가 면 방직공업이 출현했다.  

 

카카오·44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부터 중앙아메리카, 마야, 아즈텍 문명 등은 카카오 열매를 식량, 음료, 화폐 등 다양한 용도로 응용했다. 카카오 원두가 귀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그 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코코아버터 때문인데 그것은 양질의 식물성 지방으로 인간의 체온에 쉽게 용해되고 소화도 잘된다. 그런가 하면 코코라 분은 식품으로뿐 아니라 화장품이나 약품으로도 사용된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카카오 원두를 즙으로 만들어 마셔왔다. 이러한 풍습이 마야인, 아즈텍인들에게도 전해지면서 그들 역시 카카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7세기경 유카탄 반도에서는 귀족의 독점하에 카카오를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서 재배했다. 농민에게 카카오 원두로 세금을 내게 했던 아즈텍 왕국 시대에는 화폐로도 이용되었다. 콩 4알은 호박 하나, 10알은 생선 한 마리나 토끼 한 마리, 100알은 노예 한 사람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계피·48

 

계피의 원사지인 인도 남부, 실론 섬, 말레이시아 등지이다. 고대인들은 계피를 음식에 넣기보다 향으로 이용했다. 폼에이우스가 죽자 네로 황제는 계피를 태웠다고도 전해진다. 아랍인들과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도입된 계피는 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다. 

 

커피·50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의 적도, 지방과 다른 대륙의 적도 지방에서 여러 종류의 야생 커피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15세기 무렵 커피나무는 에티오피라 고지대에서 남아라비아로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종교행사 중에 즐겨 마시던 커피는 그 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보급되어 사랑받고 있다. 

 

홍차·55

 

유럽에 제일 먼저 차를 전한 사람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 당시의 차는 그들이 17세기 초기에 선박을 이용해 일본 구슈에서 실어온 일본 차였다. 1637년 1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록에는 '차가 사람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모든 배는 일본 차 외에 중국의 찻주전자도 수배해오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말하는 차는 홍차가 아닌 녹차였다. 1702년 동인도회사가 차를 주문한 구매 기록에는 녹차가 전체 수입량으 5/6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1740년 이후부터 홍차의 수입이 녹차를 웃돌기 시작한다. 사치스러운 기호품으로 인식되었던 차가 영국의 시민들에게 정착된 것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란 기계를 사용한 대량생산 체계의 개시를 말한다.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하루에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술이 더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값싸고 독한 술을 알코올중독이나 일의 능률 저하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와인·60

 

신석시 시대부터 인류는 이미 포도나무 재배를 시작했다. 아리아인들, 샘족, 페니키아인들, 이집트인들, 그리스인, 로마인들은 포도주 양조술을 일찍부터 터득했으며 특히 4,500~4,700년 전의 이집트 제4왕조 시대에 그려진 그림에도 포도 수확과 포도주 양조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에서 와인은 포도 열매가 완전히 짓이겨진 뒤 다시 와인으로 태어난다는 점에서 '불사'를 뜻하는 술이 되었다. 그리스의 최대 축제인 디오니소스 축제는 여성도 일상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였다. 이와 반대로 로마에는 원래 와인을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포도 재배가 전해진 로마가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을 적극 권장하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포도 재배가 확산되었다. 로마에서 와인이 처음 문헌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21년이다 초기 로마에서는 여성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강력하게 다뤘다. 여성이 와인을 마실 수 없었던 까닭은 와인의 붉은 빛이 피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자녀를 낳은 어머니인 여성이 와인이라는 이질적인 피를 마시는 것은 부정행위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392년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에서는 와인이 예수의 거룩한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미사에 이용되었다. 이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와인을 나눠주며 "이것은 내 피다"라고 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의 지배가 끝난 뒤에도 와인은 기독교의 종교의식과 결부되어 수도원을 중심으로 양조가 계속되었다.  

 

소금·65

 

로마가 서구 문명사회의 중심으로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소금이었다고 한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로마 근교 티베르 강 하구에 건설된 염전에서 소금이 만들어졌다. 당시 내륙에서 불에 구워 만든 소금은 운송비가 포함돼 매우 고가였는데, 강가에서 만들어 하천을 통해 로마로 운반된 천일염은 품질이 좋고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로마 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유명한 소금길은 기원전 4세기부터 대륙 곳곳으로 연결되었다. 로마 전매사업인 소금 수출이 늘어나면서 로마는 급속히 부강해졌으며, 인구 2백만 명이 이르는 당시로써 가장 큰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소금 무역으로 부강해진 로마는 대제국으로 통일되고 번영했으나, 1세기경 지중해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바닷가 염전을 상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후에는 흑해에서 소금을 수입하게 됨으로써 중요한 부의 원천을 상실한 로마는 경제력이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6~7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작은 어촌이었던 베네치아가 풍족한 항구 도시로 발전한 것도 역시 소금 덕분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지역적인 특수 환경으로 오늘날 천일염 기술을 개발한 베네치아는 양질의 소금을 생산하여, 당시 비잔틴(로마 제국) 등 유럽에 소금을 수출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진 예리고는 소금을 십게 구할 수 있는 사해 근처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또한 가장 먼저 해상 무역을 했던 페니키아의 원동력도 소금이었다고 하니, 도시 및 국가의 성립과 발전은 소금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설탕·71

 

기원전 5세기경 다리우스 대왕이 꿀벌의 도움 없이 꿀을 생산하는 인도산 갈대를 발견했다. 근동 지방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리우스와 알렉산더 덕분이었다. 기원전 4세기경 인도 원정길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에서는 벌의 도움 없이도 갈대 줄기에서 꿀을 만든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에 파견된 인도 대사가 황제 네로에게 올린 선물 중에 '인도소금', 즉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 덩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야생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인도 북부 지방으로 이미 그곳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사탕수수를 재배해왔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에서도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었다. 그 후 아랍인들에 의해 지중해 동쪽 연안에 유입된 사탕수수는 시칠리아 섬, 711년경에는 에스파냐 마디라섬과 카나리아 군도 등지로 널리 전파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북아메리카 대륙과 17세기에는 레위니옹 섬 등지로 전해졌다. 설탕이 세계적인 상품으로 정착해나가는 과정은 아프리카인 노예무역의 확대와 노예제에 기초한 설탕 플랜테이션이 확대되어 가는 궤적이자 동시에 설탕이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도 일용품으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이었다.          

 

햄버거·75

 

19세기 초반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 소개한 양념된 간 쇠고기 요리가 1826년 뉴욕의 델모니코스 레스토랑에 '햄버거 스테이크'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이런 햄버거 스테이크가 언제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여러 의견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설은 찰리나그란에 관한 것이다. 1885년 위스콘신 주의 세이무어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햄버가를 판 사람은 15세기의 찰리나그린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미트볼을 먹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미트볼을 납작하게 만들어 빵에 끼워 팔았다. 이후 그는 햄버거 찰리로 불리며 매년 박람회에서 햄버거를 팔았다. 세이무어 시는 2007년 위에 사실에 근거해 세이무어시가 햄버거의 본고장임을 내세우며 햄버거 명예의 전당을 짓고 매년 8월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햄버거의 유래에 관한 두 번째 설은 오하이오 주 아크론의 프랭크와 찰스 멘체스 형제는 돼지고기 페티로 만든 샌드위치를 만들어 미국 중서부에서 열리는 여러 박람회에서 판매했다. 이들은 1885년 뉴욕주의 햄버그에서 열린 박람회 참가 도중 재료가 떨어지자 쇠고기를 이용해 패티를 만들어 빵 사이에 넣어 팔았다. 적당한 이름을 고민하다가 지역 이름을 따서 햄버거라 불렀다. 그래서 뉴욕 주의 햄버그 시는 그곳이 햄버거의 본고장임을 내세워 1985년에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모든 유래설이 빵 사이에 패티를 넣어 판 것과 달리 1891년 오클라호마에서 오스카 웨버 빌비는 처음으로 번 사이에 패티를 넣은 햄버거를 팔았다. 빌비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손수 제작한 그릴에 쇠고기를 패티를 구워 부인 패니가 만든 번에 끼웠고 루트비어를 곁들여 이웃과 나누었다. 그 후로도 그는 매년 독립기념일마다 햄버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했고 오클라호마 주 역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오클라호마가 진정한 햄버거 본고장임을 어필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의 각 지역에서는 각각 고기를 갈거나 다져서 만든 패티를 빵 사이에 끼워 팔았다는 원조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후추·79

 

페르시아를 통해 지중해로 전해진 후추는 기원전 4세기경에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희귀한 의약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후추가 양념으로써 기능하게 된 것은 로마인들에 의해서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후추 무역의 번영을 이룬 사기는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하에 놓인 후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의 유행으로 많은 인구가 감소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오히려 향상되고 육식 문화도 더 넓게 퍼져나갔다. 그에 따라 14세기 말부터는 고기의 노린내를 없애고 방부제로 사용하기도 적합한 후추의 수요가 더욱 증가했다. 

 

빵·83

 

장미·88

 

바나나·92

 

바나나는 흔히 키가 크기 때문에 나무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파초과에 속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풀의 종류이다. 보통 과일에는 씨가 있지만 바나나에는 씨가 없거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씨가 없는 대표적인 과일인 바나나는 번식 능력 없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과일이 됐다. 바나나의 재배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8000년~기원전 3000년경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먹을 수 있었고, 그 후 기원전 2000년~기원전 500년까지 인도와 동아프리카로 전해져 이집트 등에도 교역품으로 반입되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바나나를 소비하는 나라의 하나이지만 미국에서는 바나나가 재배되지 않는다.    

 

사과·95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즐겨 이용되었고 17세기에 미국에 전파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의 광무 10년(1906년)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치하고 각국에서 각종 과수의 걔량품종을 도입할 때 사과도 함께 도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중요한 몇 가지 사과 이야기가 있는데 첫 번째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의 사과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이다. 세 번째는 빌헬름 사과로 독일의 극작가 실러의 작품 <윌리엄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네 번째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하게 한 사과다. 다섯 번째는 예술계를 대표하는 폴 세잔의 사과다. 그 밖에도 한 입 베어 먹힌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애플사의 사과는 항금비율로 유명하다.  

 

튤립·100

 

튤립의 원산지인 근동 지방, 즉 지중해 남부,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 이란 등이다. 그러나 어떤 품종은 유럽 남부,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 온대지방, 멀리는 일본 등을 원산지로 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7세기 초, 전 유럽을 강타했던 튤립 열품이다. 튤립 파동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튤립 버블은 남해 거품 사건과 미시시피 계획과 함께 근대 유럽의 삼대 버블로 꼽힌다.  

실용에서 태어난 문화


토기·105

 

토기를 이용해 재료를 물에 삶거나 끊일 수 있게 되면서 농업도 더불러 더 번성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토기의 발명은 인류의 조리 문화, 식 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토기의 발명으로 인해 인류 식생활의 수준은 매우 높아질 수 있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시베리아 아무르 강 유역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약 1만 3천년 전의 항아리형 토기다. 이것은 어유(정어리 등에서 얻은 기름)를 저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벽화·108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벽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환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벽화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표현에의 욕구에 의해 생성된 산물로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중요한 정보를 전달, 교환할 수 잇었다.  

 

시간과 달력·111

 

옛날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는 것이 천체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흥미 있는 기록' 또는 '회계 장부'라는 뜻의 '칼렌다리움(calendarium)'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월·일은 각가 독립된 3개의 주기인데, 이것들을 결합시키는 방법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방안으로 각 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을 만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태음력이 가장 일찍 알려졌으며, 이어 태음태양력·태양력의 순으로 쓰인 듯하다.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달의 삭망 주기가 사계의 순환 주기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태음력이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화폐·116

 

화폐라는 개념은 인간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만들어낸 물건은 아니었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세련되게 발달하면서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던 조개화폐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자·121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모두 구두로 전승되었다. 문자가 발명되고 나서 6,000년 후인 19세기가 되어서도 세계에는 문자를 갖지 못한 지역이 있었고, 현존하는 3,000개의 언어 중에서도 문자를 갖는 언어는 100여 개에 불과하다. 문자의 발생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구전적인 사회에서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서로 대면해야 하기 때문에 문화를 전화는 시간과 공간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된 오늘날은 몇 세대에 걸쳐 계승된 문화가 교육을 통해 전승된다. 

 

문자를 이용해 표현하는 수식어와 수식 방법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의 사고와 사상에 큰 변혁이 일어났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여러 가지 사항이 기록됨으로써 어느  시대나 선인들의 지혜를 토대로 사고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화 발전에 가속화가 일어났다. 둘째, 기록 내용을 통해 자시 자신에 대한 회고가 가능해져 더욱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셋째, 공개된 기록을 토대로 논의나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용이 심화되어 지혜가 확대되었고 정보 창고인 도서관이 생겨났다. 넷째, 문자로 쓰여진 경전은 신앙의 바탕이 되어 자연신의 지역적 신앙이 경전에 의해 거대 종교집단으로 성장했다. 다섯째, 문자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학습할 여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더욱 향상되었고 그 결과 신분제가 성립되고 정보의 편중이 시작되었다. 

 

종이·125

 

책·127

 

비단·131

 

우리가 흔히 비단으로 알고 있는 실크의 기원은 고대 중국이다. 전설에 따르면 실크는 기원전 3500년 전 중국의 황후 누조가 발명했다고 한다. 너무나 귀한 것이라 처음에 비단은 중국의 왕실에서만 쓰였고,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특별한 하산품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중국 사회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실코로드 로드 불리는 길을 통해 전 세계까지 그 위상을 떨치게 되었다. 비단은 일찌감치 중국의 주요한 무역품이었는데, 기원전 1070년경의 이집트 미라에서도 비단이 발견되었을 정도다. 중국의 비단은 인도 뿐만 아니라 근동을 넘어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까지 수출되었고, 수익 면에서나 인기 면에서나 단연 최고의 교역품으로 손에 꼽혔다. 

 

한편 실크로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은 바로 흉노였다. 중국 북방과 서역에 걸쳐 광대한 국가를 건설한 흉노가 바로 실크로드를 지배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부강을 누릴 수 있었다. 흉노는 한편으로는 중국과 교역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파미르 서쪽의 복속한 서역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와 페르가나와 파르티아를 왕래하는 대상무역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획득했다.  

 

신발·138

 

화장·143

 

문신·146

 

40,00년 전부터 신석기인들은 자기 부족과 동물 떼를 알아보기 위해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문신을 '새기다'라는 동사가 1769년 불어사전에 등록되었다. 탐험가 제임스 쿡이 폴리네시아 지역을 탐사하여 그곳에서 차용해 온 단어이다. '문신술'이라는 단어 역시 같은 경로를 거쳐 전해진 낱말로 1778년 사전에 등재된다. 18세기와 19세기에 문신을 새긴 아메리카 인디언들, 폴리네시아 인들, 그리고 유럽의 문신을 새긴 사람들은 서커스 판과 장터 등지에서 대중의 호기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세계의 항구 도시에는 어디나 문신 새기는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백인 선원들은 문신을 통해 그들의 상상의 날개를 펼쳤으며 어떤 문신을 한 편의 문학작품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할 정도로 독창성이 돋보였다. 한편 1891년에는 미국에서 전기문신기가 최초로 특허 출원되었다. 

 

불·150

 

성냥을 발명한 것은 1827년 영국의 약제사 워커가 염소산칼륨, 황화안티몬, 전분, 아라비아 고무를 두약으로 하는 마찰성냥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 성냥은 유럽 각지에서 제조, 판매되었는데 불이 잘 켜지지 않는다는 큰 단점이 있어서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1831년 프랑스의 소리아가 노란 인을 두약으로 하는 성냥을 만든 후 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덴마트의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쓰여진 것은 1848년으로 소녀가 사용했던 성냥이 아마도 이 황린 성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린 자체의 독성이 강하고 발화성이 높아서 1912년부터 제조가 중지되었다. 1845년 오스트리아의 슈로테에 의해 처음으로 붉은인으로 만든 성냥이 등장했다. 적린은 황린보다 독성이 낮았지만 가격이 바쌌기 때문에 발화점이 높다는, 즉 자연발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에는 순수한 적린을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순수한 적린은 1851년 영국 올브라이트가 생산에 성공하여 같은 해 영국의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였다. 1855년 스웨덴의 룬스스트롬, 독일의 뵈트거 등이 적린을 상요한 작은 상자에 축약을 바르고 두약을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원리의 안전성냥을 개발했다.  

 

지도·15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샘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하버드대학 고고학 탐사팀이 바빌로니아 북쪽에서 320킬로미터 떨어진 가수르라는 마을을 발굴하던 중에 출토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의 지도가 이라크 북부 지방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테라코타판인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 70mm, 세로 90mm이며 제작 연도는 450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인장·158

 

인장은 소유권을 밝히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성정하고 지배층이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면서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명백한 표식을 나타낼 필요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인장은 약 6,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인 사회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점차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계약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정당한 거래임을 나타내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이로써 소유권 확인과 이동이 인장에 의해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장은 통치자의 위엄과 권력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법률이나 행정문서에 왕과 관료의 인장을 찍기 시작했다. 인장은 부와 권력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지배계층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향수·161

 

향수의 정의를 살펴보면  라틴어 퍼뭄에서 나온 말이 퍼(Per : chrough)와 퓨뭄(Funun : smoke)에서 나온 합성어이다. 신을 숭배하던 시대에 인간의 신의 재단에 나아갈 때 신체를 청결히 하고 향내를 풍기는 나뭇가지를 태웠다는 향수의 기원이 명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5,000년 전 인류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 향수는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화장품의 한 종류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의식 또는 종교적 의식 등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의 향수는 조합된 향료를 에틸알코올로 20~25% 희석해 사용하는 방향 제품을 모두 일컫는다. 나뭇가지를 태워 냄새를 피우고 4~5천 년 전 신의 제단에 나아갈 때 잎의 즙을 짜서 몸에 발랐다는 것이 향수의 기원이다. 인류가 향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문명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향수가 나온 시기는 1370년경으로서, 지금의 '오드투알레트' 퐁의 향수인 '헝가리 워크'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헝가리의 황비인 엘리자베스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증류향수이며, 최초의 알코올 향수이다. 향수가 산업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피혁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무두질 기술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죽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를 없애기 위한 향료와 향수가 필수품이었다. 

 

단두대·167

 

망원경·169

 

시계·173

 

오늘날 휴대하기 편하고 패션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손목시계는 누가 제일 먼저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1899년 10월 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 영국 국군장교가 회중시계를 손목에 밴드로 묶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접한 스위스의 오메가사가 1902년에 손목시계를 제작하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항공술의 선구자인 브라질의 알레르토 산토스 두몬트와 그의 친구 이야기로 알베르토는 비행기 조종간을 놓지 않고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때 그의 친구이자 왕실 전속 보석세공사이며 보석세공의 일인자였다 루이 카르티에가 그를 위해 1906년 최초의 손목시계를 제작해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목시계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1915년 이후의 일이다. 스위스 태생이 쟝 샤뉴이는 1918년 프랑스 안시에 정착해 보석가게를 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작은 체인이 달린 회중시계를 치는 것을 보고 손목시계 제작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제품은 대량생산되어 매우 싼 가격에 보급되었다.     

 

피임약·178

 

숟가락 젓가락·180

 

유화·183

 

향불·187

 

향은 고대 인도나 이집트 같은 더운 지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인도의 경우 초기에는 습한 인도의 기후에서 종교행사 시 종교행사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한편 벌레를 쫓고 악취를 지우기 위한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향은 사전적으로는 크게 향목과 연향으로 나뉜다. 향목은 향나무를 잘게 깎아 쓰는 것으로, 옛날에는 자주 썼으나 지금은 별로 쓰지 않는다. 연향은 우리가 흔히 보는 긴 향이 대표적으로, 재료 분말을 뭉쳐 일정한 형태로 만든 것이다.

 

분향의 종교적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사용되는 기능은 매우 다양하였다. 분향의 원래적이고 자연적인 기능은 첫째는 방향 효과에 있다. 둘째는 향은 특히 매장과 구마식에서 영들을 멀리 쫓아내는 구마적 의미로 이방종교에서 드러난다. 셋째는 기도의 상징이다. 넷째는 확산의 상징으로 향기로운 냄새처럼 퍼지는 실재를 언급한다. 다섯째는 존귀함의 상징이다. 여섯째는 희생제사의 감각할 수 있는 표지인데, 신약의 제사의 전주로서 '분향'은 '깨끗한 봉언'과 함께 언급된다. 일곱째는 씻음과 정화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도자·194

 

 

맥주·197

 

배·204

 

카메라·209

 

블루진·212

 

아스피린·215

 

초기의 아스피린은 가루 형태로 25g씩 병에 담겨 약국에서만 판매되었다. 그러나 곧 많은 회사들이 아스피린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바이엘은 아스피린을 복제품과 차별화하기 위해 1914년부터 약품을 정제 형태로 개발했다. 이렇게 해서 아스피린은 정제 형태로 생산된 최초의 의약품 중 하나가 되었다. 정제된 아스피린은 외부가 단단하면서도 물에는 쉽게 용해되고, 가루약이 매번 무게를 달아서 복용을 해야 하는 것과 달리 그 양을 표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스피린의 통증 완화 효능은 입증되었지만 이 약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체에 작용하여 효과를 내는지는 펠릭스 호프만 박사가 1897년 개발한 이후 70여 년 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스피린은 효능을 인정받아 상용화가 먼저 되고, 효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에 대해 서는 상용화된 지 수십 년 후에야 밝혀지게 된 '독특한' 의약품인 셈이다. 

자원과 기술

 

금·221

 

철·226

 

석탄·230

 

석탄은 그리스 시대부터 불에 타는 돌로 알려져 있었으나 석탄은 연소할 때 심한 냄새와 연기를 내뿜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용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10세기경부터 영국인들은 본격적으로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지만 연기와 냄새로 인해 영국에서는 13세기에 석탄 사용을 금지하는 법까지 내렸을 정도이다. 그런 영국이 다시 석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언제,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1558년 영국에서는 수목벌채를 제한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원래 섬 전체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삼림지대가 16세기가 되어 16% 이하로 감소되면서 국가 방위에 필요한 선박 제조마저 불가능한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연료로 목재 대산 다시 석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목재가 부족하게 된 것은 나무를 건축 재료와 선박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삼림지대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양들을 위한 목장을 조성한 것과 제철, 제염업의 연료로도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석탄을 다시 연료로 사용하게 된 이후로 런던에서는 석탄을 판매하는 장사가 직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1666년 9월, 런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의 집들이 타버리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도시를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집이 건축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석유·233

 

고무·235

 

다이아몬드·240

 

유리·248

 

마차·251

 

바퀴·255

 

수차와 풍차·260

 

속기술·264

 

우리나라의 속기는 박여일이 하와이에서 1909년 조선 속기법을 창안, <신안일보>에 발표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 1968년에는 국회에 속기사양성소가 설립되었고, 1969년 '의회속기법식연구위원회'가 연구하여 창안 발표한 <의회법식>을 국회속기양성소에서 교육하기 시작했다. 1993녀에는 1970년대 후반경에 국내에 도입된 속기기계와 컴퓨터를 연결한 속기가 국내에서도 개발되었다. 한국의 속기는 수필속기, 타자속기 및 컴퓨터속기로 구분된다. 창안자에 따라 수필속기의 경우에는 20~30가지, 타자속기의 경우에는 1가지가 있으며, 컴퓨터속기의 경우는 4~5가지가 있다. 

 

인쇄술·268

 

화약·273

 

총기·277

 

대포·282

 

열기구·287

 

자전거·290

 

전신과 전화·295

 

컴퓨터·301

 

인공위성·306

 

원자폭탄·311

인간과 함께 한 동물들

 

개·317

 

돼지·319

 

신석기 시대 이후 인류는 다양한 동물을 가축화시켜 동물로부터 고기와 젖, 가죽, 털, 연료 등을 얻거나, 운송 수단 또는 농사일에 이용하기도 했다. 젖이나 털 등을 얻거나, 운송 수단이나 농사일에 사용하지 않으면서 오직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 돼지다. 돼지가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시기는 동남아시아의 경우 약 4천8백 년 전이고, 유럽의 경우 약 3천5백 년 전이다.   

 

말·323

 

소·326

 

양·330

 

닭·332

 

지구상에서 닭을 볼 수 없는 장소는 바티칸 시국과 남극 대륙 두 군데 뿐이다. 바티칸에는 닭장이 없기 때문이고, 남극에서는 펭귄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반입을 금지해서다. 

 

낙타·336

 

토끼·340

 

코끼리·342

 

용·346

 

쥐·351

 

대구·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