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케네스 벤디너,남경태,예담,2007,(080316).

바람과 술 2008. 6. 15. 06:22

서문

 

음식과 예술

 

의학

 

고대의 의학적 관점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통용되었다. 갈레노스(고대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의사이자 해부학자)와 고대 학자들이 창안하고 중세와 근대의 의사들이 추종한 의학 사상에 따르면, 각 개인이 지닌 고유한 체질은 공기(따뜻하고 습한 성질), 흙(차고 건조한 성질), 불(뜨겁고 건조한 성질), 물(차고 습한 성질)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재료들도 따뜻함과 차가움, 건조함과 습함이 조합된 성질을 지닌다(보통 서식지가 물, 불, 흙, 공기 중 어느 것에 가까운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식품의 기능이란 먹는 사람이 체질상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예방해 주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요리사들은 여러 가지 식품들을 정성 들여서 썰고 으깼는데, 그 이유는 대립된 성질을 지닌 음식물을 섞어 먹어야 건간에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 성질이 네 가지인 탓에 조합이 매우 복잡했으며, 음식을 조리할 때도 각 식품의 건조함이나 차가움 같은 성질을 고려해야 했다. 섭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식품의 균형이었다. 비록 지금은 비과학적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러한 옛날 과학의 견해는 많은 예술 작품에 내재해 있다.

 

성서

 

종교는 의학보다 음식 회화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서에 나오는 몇몇 특징적인 식사 장면은 서양의 음식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인간의 타락이 먹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음식의 섭취가 금지된 지식의 획득을 은유한다는 사실은 서구 문화에서 음식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음식은 현세의 불가피한 죽음과 죄악의 유혹적인 본성을 나타낸다. 미술 작품 속의 음식들은 성서적인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의 상징이 아닌 음식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이교의 매력을 나타낸다.

 

음식의 비하

 

종교와 의학에서는 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회화에서는 그 지위가 사뭇 초라했다. 16세기 이래로 예술 이론가와 학자들은 정물화,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을 다룬 정물화를 예술적 위계의 맨 아래에 놓았다. 희극적인 음식 회화는 주로 예쁜 음식 그림의 지배적인 전통에 반대하고 나선 포스트모던 화가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음식이 예술의 주제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술사가에게 음식은 의식적인 규칙과 품위 있는 사상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런 데서 화가의 진정한 충동과 관심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과일과 먹는 행위

 

1400년경 이후 음식 회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무엇보다도 과일을 그린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그림은 거의 드물다. 또 다른 사실은 194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무수한 주류 광고에서처럼 실제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먹는 행위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엄숙하지 않은 풍자적 분위기의 판화(제임스 길레이)에서는 음식을 먹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판화는 원래 거칠고 무례한 매체인 반해 회화는 그런 조야한 주제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일이 미술의 주제로 주목받은 것은 아마 보기에 좋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적어도 18세기 이후부터는 과일을 식탁이나 주방에만 두지 않고 장식품 삼아 그릇에 담아놓거나 가구 위에 놓는 습관이 널리 유행했다. 과일이 미술의 주제로 떠오른 것은 먹는 행위를 묘사하기를 꺼리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먹어야 할 필요성을 감춰주기 때문이다. 과일이 압도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실제로 먹는 행위의 묘사를 꺼린 탓에 음식 회화는 죽음이나 죄악을 상징할 때조차 식욕을 자극한다. 

 

물신숭배 

 

음식 회화, 특히 정물화는 쾌락을 보다 심원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은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신숭배란 살아 있는 주체가 죽은 대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물신숭배를 인지된 환상으로 간주했다. 음식 그림에 지속적인 쾌락의 감각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물신숭배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물신숭배는 통제의 수단이다. 음식은 쾌락을 의미한다.

 

그림의 의뢰인과 배치

 

15세기의 음식 그림들은 주로 종교에 종속되었으며, 교회의 의뢰를 받아 제단에 전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더 세속적이고 독립적으로 발전한 탓에 어디에 전시되고 누가 소장했는지 우리로서는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다. 16세기와 17세기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예술 사상가들은 수집가들에게 저택의 방마다 특별한 주제의 그림을 걸라고 권했다. 그에 따라 음식 그림은 당연히 주방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관습이 늘 이론과 부합하지는 않는 법이다. 16세기 가정의 그림이 상징적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실내장식의 일환이었다고 간주한다 해도, 음식회화와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실내 풍경을 살짝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음식회화를 누가 소장했고 어디에 걸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20세기에 음식 그림을 전시하는 습관을 파악하기 위해 부잣깁 가정의 실내를 담은 사진을 찾아냈다. 식당에는 대개 음식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명 화가들의 진품인 값비싼 음식 그림을 소유한 집주인들은 대개 그 그림을 거실에 걸어두었다. 아마도 음식이라는 주제보다는 화가의 명성과 그림 값이 전시 장소를 결정하는 데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제1장 시장 풍경

 

시장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이다. 따라서 시장 그림에는 돈과 물건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겨나고 사회적 교환 행위가 표현된다. 1470년경에 '만나의 대가'라고 불리는 익명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작품인데, 이 그림은 히브리인들이 사막에서 신의 선민들에게 내려준 만나라는 양식을 받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성서에는 만나가 깟씨처럼 작고 희며 꿀로 만든 과자 맛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나의 대가'가 그린 그림에서는 달콤한 느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 그림은 반유대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이 화가는 혐오스럽고 부정직한 장면을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다.

 

시장그림

 

'만나의 대가'가 그린 작품은 또한 18세기 이전까지 식생활에 만연해 있던 궁립한 분위기를 반영하는데, 이런 측면은 시장 그림의 심리적 기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람들은 물자 수송, 교역, 날씨, 전쟁 등의 불안 요인으로 인해 언제라도 식량 공급이 차단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걱정하면서 생존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다가 축제일이 되면 탐식에 빠져들었다. 다음번 식사가 이번만큼 풍성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 교역이 늘고 물자 수송이 원활해지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해지자 비로소 불안의 분위기가 점차 사라졌다. 이렇게 식량 공급이 안정되자 식생활이나 음식에 대한 인식도 전반적으로 달라졌다. 18세기 상류층 사람들은 과거의 대규모 잔치를 촌스러운 폭식의 관습으로 여겼다. 세련된 고급 요리는 불안감이 식욕을 지배하지 않게 된 시대에 탄생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8세기 후반에는 고급 식당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영어의 '맛(taste)'이라는 명사가 심미적인 취향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도 17세기 종반의 일이다. 하지만 전통의 힘은 강했다. 식량 공급원이 안전해지고 더 이상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8~20세기의 시장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그 이전 시대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즉 식량 공급이 영원히 지속되는 날을 여전히 꿈꾸는 것이다. 공업화가 진척되고, 식품 생산 기술이 향상되고, 수송 수단이 발달함으로써 19세기 노동 계급도 육류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적인 금지는 서양의 식생활과 그것을 표현한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서양인들의 식단에 육류가 자주 등장하게 된 19세기 이전까지 육류는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임식이었기에 고기를 먹지 말라는 교회의 명령은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수사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순절의 율법에 따르면 고기뿐 아니라 짐승에게서 나온 식품 전부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달걀, 버터, 우유, 치즈, 베이컨, 돼지기름 등 빈민의 식단에 맛을 가미해 주던 식품도 모두 금지되었다. 그러나 빈민들은 싱싱한 생선보다는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으며 육류 섭취 금지 기간을 견뎠다. 따라서 빵과 생선이 그려진 17세기 회화 작품을 볼 때는, 그 작품이 육류를 먹지 말고 고통을 견디며 정화하라는 종교적 명령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음식 정물화

 

서양미술에 등장하는 음식은 크게 2가지 변천 과정을 거친다. 하나는 세속의 농부가 일약 회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물화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 화가들도 음식 정물화를 그렸다. 고전 문헌에 나온 정물화에 관한 대목은 틀림없이 16세기 정물화의 발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는 유럽 전역에서 고전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르첸과 그의 제자들은 시장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여러 점 그렸는데, 거기서도 종교적 주제는 마치 부록처럼 작게 묘사되어 있다. 예술사가들은 이런 현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했다. 세속적인 요소가 종교적 주제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그림의 취지는 천박한 물질주의로 인해 정신적인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도덕적으로 비난할 만한 오점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세속적 이해관계가 증대되고, 그에 따라 종교에 대한 전통적 관심이 줄어들었음을 말해 준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르첸이 자신의 종교화에서 꼴사나운 우상숭배를 하찮게 다룬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주제를 담은 작품이 세속화를 향한 비판적인 태도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에서 성적 의미를 찾는다.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대비된다. 과연 어떤 해석이 옳을까? 둘 다 음식을 세속화와 물질주의의 힘, 세속적인 감각으로 간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종교적 주제는 세속적 문화와 대비를 이룬다. 그 구분이 도덕적 맹목성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세속화가 증대한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아르첸에게 음식의 재료는 육감적 매력, 관능적 기쁨, 세속적인 존재가 지닌 음탕한 육체를 상징한다.

 

푸줏간

 

피테르 아르첸은 서양 미술에서 시장 그림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지만, 다른 접근 방식도 거론되고 있다. 똑같은 요소를 가지고도 사뭇 다른 성격과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렘브란트 반 레인의 <도살된 황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렘브란트의 애처로운 푸줏간 정물화는 일종의 십자가 처형을 보는 듯,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박혀 죽은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 위풍당당한 인간 형상의 사체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올리게 한다 해도, 이 그림이 물질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성육화, 즉 신이 인간이 된 것은 물질성이나 세속화와도 관련이 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죽음이 렘브란트 작품의 실제적 주제라고 해도 신을 죽은 짐승으로 표현한 것은 대단히 통렬한 느낌을 준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꾸는 물신숭배적 변환은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행한 역할에 대한 심원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냥 평범한 음식 재료이든 예수 자신이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그림에서 음식은 물질적 존재의 재현이아 다름없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요리책에는 육류, 특히 붉은색의 육류가 남성적인 용기와 힘에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

 

사냥그림

 

아르첸과 카라치의 그림에 나오는 매달린 고기와 음식 더미는 시장 그림의 원천을 나타낸다. 사냥이라는 주제와 시장이라는 주제의 차이는 사회 계급에 있었다. 사냥은 기사, 귀족, 사회 상류층의 특권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서라 사냥에서 잡은 것과 같은 종류의 짐승이라 해도 서민들의 세계에 속했다. 시장 그림은 귀족들만의 누린 즐거움이 대중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시장 그림은 사냥 그림에서 나왔지만 그것을 대체하지는 못한 터라 두 종류의 풍속화는 수세기 동안 공존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학서들은 건강한 식욕을 중요시했다.

 

푸짐한 음식

 

16세기 시장 그림들은 분주하고 풍요로운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저기 양동이와 바구니, 통 들이 보이고 공간마다 음식 더미가 쌓여 있다. 후대의 시장 회화에서도 이와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혼란스러움은 음식 회화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래도 18~19세기의 시장 그림들은 다소 정돈된 분위기이다. 이처럼 시장은 기아의 반대를 표현하며 안정감을 준다. 풍요는 그 종류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시장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세기에 걸쳐 시장에서 풍부함의 의미가 이어져온 것은 일종의 치료 효과를 지닌다. 그것은 곧 돈만 내면 사회가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해 주리라는 믿음이다. 팝아트 예술가들의 상업주의는 과거의 시장 장면과 닮은 데가 있다. 시장 그림의 근저에는 교환의 토대가 숨어 있다. 즉 노동이나 부가 쾌락이나 생존과 거래되는 것이다. 또한 시장 그림은 건강함을 보여준다. 썩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또 그런 그림은 감각적인 매력을 통해 자기 상품의 장점을 홍보하는 현대의 광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돈을 주고 생존과 건강을 사는 것이다. 식사를 위한 전용 공간은 17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출현했지만, 시장 그림은 아마도 음식을 먹는 방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우선 건강을 위해 식욕을 자극하려는 것이었겠지만, 그와 더불어 경제 활동의 장점을 권장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음식의 성적 의미

 

음식을 성애, 식사를 성행위와 비유하는 것은 무척 오랜 전통인데 특히 음식 그림에서 그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과일과 짐승의 살점, 배, 파이, 견과, 무화과, 버찌, 오이의 모양, 그리고 식탁 위의 그릇과 식기는 어느 언어에서나 성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음식에서 성적 의미를 찾아낸 사람은 프로이트나 언어학자들만이 아니다. 신화에서도 성이 음식이나 이야기 줄거리와 연관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인물을 제외하고 음식만을 그린 그림도 성적인 취향을 담을 수 있다. 시장 그림 말고도 음식 그림에서 음경처럼 보이는 생선과 소시지, 질처럼 보이는 젤리와 파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음식 분야에는 언어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성적인 농담이 가득하다.

 

상업주의

 

식품의 판매와 구매를 둘러싼 각종 제도와 유통망은 19세기에 대단히 복잡하게 발달했다. 이 시기에는 식품의 광고도 널리 행해졌는데, 도시들은 포스터와 게시판의 홍수에 휩싸였다. 상업화의 물결은 결국 음식 회화에까지 미쳤다. 팝아트는 비록 소비자주의와 자본주의를 비방하지만, 팝아트 계열의 음식 그림이 밝고 천지스러운 시각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때로 그런 그림은 섹시해 보이기도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그려진 무수히 많은 음식 정물화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공급자의 상품을 광고하는 데 이용되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음식의 계급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고가의 향신료 식품은 계급 차이의 주요한 지표였다. 18~19세기의 대중에게 설탕과 담배는 마취제 같은 역할을 했다. 약용 설탕이 어디에나 보급되면서 하층민들의 식탁도 크게 달라졌다. 시장이라는 주제는 경제, 즉 돈과 물건의 교역, 사람들의 상업적 연계를 다룬다. 1800년 무렵 유럽 서민들에게 익숙한 음식이었던 포리지는 도시와 시골 대부분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고 감자와 단 것, 커피와 차로 대체되었다.

 

음식과 민족주의

 

팝아트와 옛날의 일부 성적 풍자화를 제외하면 시장 그림에서 희극적인 요소란 거의 없다.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음식 그림에서는 유머가 쉽게 배어 나오기는 하지만, 음식 회화 전문가는 비천한 주제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분야에 전념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음식은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신분도 드러낸다. 음식 회화가 민족주의의 주제를 분명한 방식으로 수용하려 하지 않는 것은 음식이 주로 은밀한 사생활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급한 정물화와 음식 회화는 흔히 고결한 상상력을 손상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2장 식사 준비

 

미술에서 식사 준비 장면은 자뭇 엄숙한 느낌을 담고 있다. 모아둔 재료를 가지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진지한 일이며, 자연세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주방 풍경

 

미식가의 안복은 18세기에 와서야 생겨나 그 뒤로 널리 퍼졌다. 19세기에는 주방의 분위기가 이처럼 한층 가벼워지고 식사 준비는 유쾌한 일이 되었다. 이렇듯 분위기가 쇄신된 것은 19세기에 식품의 공급이 원활재지고 요리를 섬세한 기예로 인식하게 된 이유가 크다. 주방이라는 곳은 대체로 사실주의적 공간이다. 따라서 식사를 준비하는 과저으이 배후에서 드러나는 야만적이고 창조적인 면모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19세기 이전까지 주방은 흔히 음침하고 고된 곳으로 표현되었다. 음식 회화에 나오는 주방 장면은 흔히 현실 세계란 소멸하게 마련이라는 전통적인 경고를 담고 있다. 산 것이 죽은 것으로 바뀌는 것이 곧 음식 준비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죽음은 식사 준비 과정에서의 일이 아니라 음식 재료가 주방에 오기 전의 일이다. 어둡고 눅눅한 분위기의 주방 그림은 19세기부터 달라졌는데, 이때부터 요리는 일종의 예술로 간주되었고 힘보다는 감성이 음식 준비를 지배하게 되었다. 

 

주방 정물화

 

과거의 주방 풍경은 인물이 없어도 을씨년스러웠다. 16~18세기 초반에 그려진 음침한 분위기의 음식 준비 장면에는 대개 인물이 등장한다. 마치 인간이 주방이나 창고에 있으면 고통과 걱정, 죽음의 문이 열리기라도 하는 듯하다. 18세기의 주방은 주로 하층민들의 공간이었지만, 아무리 계급과 차별이 있는 사회였다 해도 사회적 신분이 괴로운 분위기를 상쇄시켜 준 것은 아니다. 18세기의 어두운 주방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해방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재료를 우아한 식사로 변환시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찰한 결과이기도 하다.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선뜻 바꾸는 자세를 취하곤 했는데, 주방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주제를 담은 그림에서도 그 시대의 엄청난 변환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음식과 사회의식

 

이따금 주방 정물화에서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거친 식품이 나오는 것은 대개 계급적 정체성 때문이다. 사회의식은 특히 그림의 배경이나 식사 장면가 관련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그림에도 반영되어 있다.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17세기의 음식 회화를 받아들이되 사회 계급을 낮추어 작품에 예리함을 더했다. 그들은 흔히 사회의 하층민을 주제로 삼았으며, 관념론과 인위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뚱뚱한 주방과 야윈 주방

 

19세기 이전에도 화가들은 빈곤을 음식의 관점에서 묘사했다. 이를테면 16세기와 17세기 북유럽 미술에서는 '뚱뚱한 주방과 야윈 주방'이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뚱뚱한 주방'에는 힘 있는 사람들과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반면 '야윈 주방'의 마른 사람들은 양파 몇 조각 말고는 먹을 게 없다. 이 주제는 대개 판화와 드로잉에서 즐겨 다루었을 뿐 진지하고 근엄한 회화에서는 보기 드물다. 비록 세상의 불평등을 지적하는 주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재미있고 괴상한 대비를 한층 부각시킨다. 19세기 후반의 음식 그림이 제기한 사회 문제는 해결을 요구한다. 16세기와 17세기의 풍요와 빈곤의 그림은 사회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화가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상태임을 보여주고자 했을 따름이다. 음식은 당장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견지에서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 아주 명쾌한 수단이 된다. 음식이나 식기와 사회 계급의 연관성을 파악하려면, 그림에 묘사된 장면이 음식을 소비하고 진열하고 취급하기에 자연스러운 공간인 가정을 무대로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모더니즘

 

모더니즘은 현대 세계의 특징인 일탈, 소외, 무의미, 배경과 무관한 개성은 회화에서 다루는 음식 재료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거부한다. 그것은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와 우주의 전반적인 이해에 관한 문제이다. 화가가 음식에 관한 해방된 관점을 지니면 사회 비판이 어려워진다. 그런 종류의 예술은 사회의 정상적인 맥락을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0년대의 팝아트 예술가들은 미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음식의 '순전히 장식적이고', '심미적인' 묘사를 포기해다. 

 

제3장 식사 시간

 

식사는 음식의 순환에서 핵심을 해당하므로 음식 그림에서도 당연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식사 그림에 나오는 음식은 주로 일반 식당, 빵집, 선술집에서 만들어졌다. 가정집에는 대개 화덕이 없어 음식을 조리하기가 어려운 탓에 큰 도시에는 음식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다.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 특히 도시 주민들은 주방과 조리 시설을 설치하느라 돈 들이고 땀 흘리는 대신 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었다. 

 

귀족의 식사 

 

귀족 집안의 가정용 기도서는 말자하면 오늘날의 롤스로이스 자동차처럼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포크는 18세기 이전까지 식사 도구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4세기 비잔티움에서는 주방 외부의 식탁에서 식사할 때 포크를 사용했다고 한다. 18세기 이전까지 포크의 주된 기능은 주둥이가 좁은 단지에서 시럽에 절인 과일을 꺼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포크는 식사 도구가 아니라 오늘날의 깡통 따개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수프나 죽 상태의 음식이라도 숟가락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요리가 나올 때는 대개 빵과 같은 적셔 먹을 수 있는 임식이 함께 제공되었기 때문에 먹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손과 나이프만 사용해 음식을 먹을 때의 주위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어서 냅킨이 필요했고 손을 자주 씻어야 했다. 커다란 식탁에서는 식사 도중에 여러 자리에서 냅킨이나 수건을 손님에게 나누어 주었고,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부어주기도 했다. 다만 손을 무릎에 올려놓거나 턱 아래에 두면 안 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의 귀족들은 자신의 위세를 내세우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어떤 음식을 어떤 배경에서 누구와 함께 먹는지를 알면 식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17세기 귀족의 식사에는 중세 귀족 요리의 특징이었던 향신료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16세기 이탈리아 부유층의 주방은 이른바 고대 로마인들의 습관에서 큰 영향을 받아 한결 소박해지고 향신료의 사용도 줄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이 새롭고 부드러운 요리는 곧 프랑스로 전해졌는데, 카트린 데 메디시스(메디치)와 마리 데 메디시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사냥개는 귀족 가정의 상징물로 간주되었는데, 사냥이 귀족의 특권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유로운 식탁과 사라진 상석

 

18세기의 권력자들이 남들이나 자연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감에 차 있어 굳이 서열과 권위를 드러내 보일 필요가 없었다. 19세기에도 식탁에 앉아서 하는 식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의 한 궁저에서 뷔페 형식의 식사가 생겨났다는 것은 새로운 감성이 출현했음을 말해 준다. 즉 귀족의 특성과 명확한 서열이 해체되고, 과거처럼 사회를 질서정연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분은 쟁취의 대상이며, 사회 내에서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다. 20세기에는 귀족이나 왕족의 사회적 비중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의 식사 그림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세기의 사회적 진보로 인해 혈통으로 얻은 권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 

 

무너진 격식

 

식후 흡연은 19세기에 성행한 습관인데, 여기에는 풍부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흡연은 남자만의 기호였고,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여자는 품위가 떨어진다는 평판을 받아야 했다.

 

네덜란드 정물화

 

 

그림과 관객

 

 

 

 

코스의 순서

 

수프에서 시작해 생선, 육류, 샐러드, 디저트, 과일과 치즈, 커피와 브랜디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식사 코스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통용된 것이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코스마다 한두 가지 요리가 있었고, 식사는 각 음식이 하나씩 나오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런 식의 식사 방법은 러시아식이라고 불렸다. 수세기 동안 상류층의 일반적인 식사 양식은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늘어놓고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식이라고 불렸다. 식사의 각 '코스'는 여러가지 요리를 포함하는 프랑스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인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과일 그림은 20세기의 서양 회화에서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물론 과일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있다. 시간에서도 과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 지식에 따르면, 과일은 '찬' 음식으로서 인간 체질에 균형을 흩뜨릴 위험이 있는 식품이다. 그러나 의학 문헌들은 과일이 식욕을 자극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언급한다.

 

레스토랑

 

레스토랑은 바스티유가 함락되기 20여 년 전에 이미 탄생했으므로 귀족들이 고용하던 요리사들이 새 일자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실 '레스토랑'이라는 말 자체도 원래는 장소가 아니라 음식을 뜻했다. 즉 레스토랑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음식, 고기를 끊이고 삶아서 만든 고깃국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병자에게 건강회복을 위한 고깃국을 공급하는 장소를 레스토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레스토랑에는 정치적 의미도 있었다. 구체제의 병약한 손님들은 자신의 감흥에 젖어 레스토랑을 귀족에 대한 충성과 연관지었다. 따라서 공포정치 시대에 사람들이 형제애에 바탕을 둔 거리 잔치를 벌이며 혁명적 열정을 표출할 때, 은밀하고 조용하며 사적 성격이 강한 레스토랑은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라고 간주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부는 레스토랑의 정치적 성격을 제거하고, 오로지 음식의 맛을 중시하는 식당으로 재편했다. 레스토랑의 개념에 따르면,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라도 원하는 식사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전의 식당과 다른 점이다. 우리는 새로운 레스토랑이 등장함으로써 개인별 서비스와 음식 선택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1760년대의 레스토랑이 그 이전의 식당과 확연히 다른 점은 요리의 맛이었다. 18세기 후반의 식당은 온갖 기술, 기예, 사치, 세련미 등 사회 각계각층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각축장이었다. 레스토랑은 그전까지 상류층만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을 제공했다.

 

여관, 주점, 카페

 

중세 길드는 음식 상인들을 별도의 집단으로 묶고, 조리된 음식을 파는 상인과 날음식을 파는 상인, 마실 것을 파는 상인과 먹을 것을 파는 상인, 노점상과 상점, 절인 돼지고기를 파는 상인과 기타 고기를 파는 상인 등등을 구분했다. 이렇게 상인들이 난립하는 현상은 케케묵은 각종 규제가 불필요해진 19세기에도 여전했다. 이런 중세의 구별은 현대의 레스토랑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구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고독과 소외의 공간

 

회화에서 고독과 실존적 고뇌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주요한 방법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레스토랑은 흔히 구애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18세기 레스토랑은 유혹하기 위한 방이 마련되어, 연인들의 간통과 밀회는 물론 매춘부까지 단골로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레스토랑의 사교적 기능은 쉽게 성적 의미와 연결되었다. 에스테스의 식사하는 사람, 뭉크의 고독한 주정뱅이, 반 고흐의 아를의 레스토랑, 호퍼의 두 작품은 압도적인 대다수의 음식 회화와 달리 불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역설적인' 음식 그림들에서 음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 화가들이 손님 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가득 쌓아놓았다면 그 효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끌어낼 수 있다. 음식을 이용해 절망삼을 표현하려면 음식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풍

 

소풍을 뜻하는 영어 단어 '피크닉(picnic)'은 옥외에서 식탁을 놓고 식사하는 것과 땅바닥에서-혹은 깔개나 풀밭 위에서-식사하는 것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야외에서 식탁을 높고 식사하는 그림은 식사 장소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던 18세기 이전까지는 정상적인 개념의 식사를 나타낸다. 18세기에 부유층 집 안에 식당이 설치되기 전에는 어디든지 어떤 식탁이라도 있으면 식사가 가능했다. 옥외에서의 식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따뜻한 계절을 맞아 즐겁게 음식을 먹는다는 정도의 의미였다. 야외에서 식탁 없이 식사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것은 가난의 상징일 수도 있고 사회적 품위와 특권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식사하는 사람은 식탁을 이용하는 경우보다 한층 강렬하게 풍경과 일체가 될 수밖에 없다. 진짜 소풍이라고 할 수 있는 땅바닥 식사는 사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소풍은 자연을 인공화하는 궁극적인 꿈을 나타낸다. 

 

커피, 차, 초콜릿

 

커피, 차, 초콜릿은 17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이 세 가지 음료는 처음에 유럽에서 신통한 약처럼 간주되었으며, 부유층만이 즐길 수 있었다. 회귀하다기보다는 세금이 워낙 많이 붙고 운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값이 치솟은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커피, 차, 초콜릿은 주류를 대신한다. 커피와 기상 시간의 결합은 현대 미국인들의 커피와 하루의 첫 식사를 얼마나 밀접한 것으로 여기는지 말해 준다.

 

결혼 축하

 

미술에서 가장 자주 보는 축하의 식사는 결혼식 피로연이다. 수백 년 동안 오렌지, 특히 그 꽃은 결혼 피로연의 상징이었다. 레몬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물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880년대의 사회주의는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지방 화가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간

 

음식 그림 역시 시간을 이용한다. 음식 그림만이 아니라 식사 장면을 담은 그림도 대개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러나 음식 회화에서 또 다른 개념의 시간이 있다. 하루 중의 시간, 즉 배고픈 때와 배부른 때가 표현되는 것이다. 

 

가난, 자선, 기도, 아이들

 

기도하는 그림은 특히 신교 화가들과 그들의 고개들에게 '최후의 만찬'과 비슷한 잘 알려진 종교적 주제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빵과 포도주로 신을 맞이한다는 관념 대신 신교에서는 일요할 양식을 통해 신의 도움과 자비와 선을 배우는 것이다.

 

제4장 음식의 장식과 상징

 

음식 그림에서 상징과 장식을 사용하기란 쉽지 않다. 음식은 직접적인 물질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음식은 물질적 욕망을 나타내고자 할 경우에 좋은 주제가 된다. 장식은 지적인 의미를 버리고 아름다움과 시각적 힘을 취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또 상징은 사물이나 장면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해와 연관된 관념을 표현함으로써 지적인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에 해당한다. 전자가 형식주의라면 후자는 상징주의다. 상징주의와 장식은 둘다 음식의 평범한 본성에 어긋난다. 

 

종교적 상징

 

 

세속적 상징

 

 

모호한 상징

 

 

관능적 상징

 

20세기의 음식 회화 중에서는, 프로이트를 좇아 자유연상이나 꿈의 자동 기술과 해석으로써 무의식을 탐구하고자 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서 강렬한 성적 자극을 기대할 수 있다. 음식 그림의 쾌할한 분위기는 진지한 성적 탐구에 필요한 심리적 무게를 깍아내린다.

 

성적 암시가 없는 상징

 

 

장식적 음식

 

장식적 음식은 더욱 단순하다. 음식은 장식 무늬로 보이며, 주요 주제와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주목할 것은 장식적 음식은 거의 언제나 과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과일이 지닌 아름다움도 그런 심미주의 즉 일상적인 주제보다 순전히 예술적인 것에 집착하는 풍조를 조장하는 데 큰 몫을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컬러사진은 요리에 관한 책이나 잡지의 세계와 음식 그림의 역사를 크게 바뀌놓았다. 음식 회화의 물신숭배적 성격, 인간의 생존의 표현을 관장하고, 자연을 재구성하고,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잇는 힘을 강조했다. 그 관념은 16세기의 이상, 즉 인간의 힘과 위엄을 낙관적으로 찬양한 르네상스의 이념과 통한다. 음식 회화는 종교로부터 점점 벗어나는 르네상스 정신과 그 시대의 확신에 찬 인간중심주의를 구현했다. 또한 음식 회화는 르네상스 정신을 예술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