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누들], 크리스토프 나이트하르트, 박계수, 시공사, 2007, (080423).

바람과 술 2008. 6. 15. 06:23

머리말 - 4,000년에 걸쳐 이어진 세계화

 

고급 요리를 뜻하는 '오트퀴진(haute cuisine)'. 귀족의 요리사들은 '프랑스혁명' 이후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생겨난 파리의 음식점, 득 레스토랑에서 요리해야 했다. 그들은 최초의 음식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공한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귀족들만의 요리에 접근하게 했다. 글 쓰는 사람들은 대중잡지에 '신분에 맞는 올바른 음식'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는다. 즉 요리사는 요리를 하고, 잡지들은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각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에 소속되었는가 아닌가이다. 미식가들은 자신들의 음식미학을 비전문가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데에 이용한다. 과거에 맛있고 귀한 음식은 귤이나 석류처럼 먼 나라에서 온 음식과 상류층이 그것으로 민중들과의 경계를 분명히하려 했던 이국적인 향료들이었다.

 

국수문화의 여덟가지 현장

 

접시 위의 정체성 - 허무맹랑한 이탈리아 종교

 

많은 이탈리아 가족들은 오늘날까지 오라 프란초(ora pranzo), 즉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스파게티를 매일 프리모(primo, 첫 번째 코스)로 먹는다. 그러면서 프리모로 스파게티, 그러니까 파스타가 나오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며, 이탈리아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긴 국수와 밀가루 음식을 건조시키는 기술은 이탈리아는 중세가 되어서야 획득할 수 있었다. 심지어 토마토는 19세기에 와서야 국수 위에 얹혔다. 19세기 말, 외국에서는 특히 스위스에서는 파스타를 이탈리아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민속학자인 야코프타너가 말했듯이 "국가의 적대적 이미지와 음식의 정형화"는 갈등의 "감정적인 충전"에 불을 질렀다. 인류학자 캐럴 코니한의 말을 따른다면 이탈리아 식사는 일상의 축제이며, 자기애의 한 형태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기와 야채보다 탄수화물을 분리된 코스로 먼저 먹는 유럽에서 유일한 민족이다.

 

이제 직접 한번 해 보시오 - 시안의 수타면

 

간쑤성 사람들은 그곳이 '국수의 고향'이라 이야기한다. 물론 간쑤성 옆 동네, 자칭 '국수의 왕국'인 산시성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중국이들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산시성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간쑤성의 국수는 실크로드 국수이며, 위구르적이며, 카자흐스탄적이고, 몽골적이다. 기껏해야 일부만 중국적이다. 그에 비해 산시성 국수는 순수한 한나라의 국수"라고 말이다. 컴포트푸드(Comfot Food-먹으면 편안해지는 음식, 혹은 어릴 적 맛본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음식으로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

 

중앙아시아의 복합문화 - 두샨베의 라그만

 

카스피 해에서 고비 사막까지 그리고 중국 서부까지 음식, 특히 국수 요리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민속학자인 루이 뒤프레는 면류가 아프가니스탄 북부, 즉 두샨베 남쪽 산악지대에서 쉽게 상하지 않는 비상식량으로 유목민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뒤프레는 이와 같은 실용적인 비상식량은 장거리 무역 상인들에게 전파되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중앙아시아의 국수를 구분하려면 생산방식을 근거로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라그만은 원래 위구르의 음식이었다. 중국 서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뉘어 살고 있는 이슬람 민족만(가끔은 아시아의 쿠르드 족이라 불린다)이 제대로 된 라그만을 만들수 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위구르 국수를 만드는 사람은 란저우와 시안에서 국수 만드는 사람처럼 반죽을 늘인다. 물론 손으로 늘이는 게 아니라 두 개의 긴 나무 막대기 위에 놓고 팽팽하게 당겨서 늘인다. 그에 비해 타지키스탄 사람들은 반죽을 밀어서 얇게 만든 반죽판을 잘라 국수를 만든다. 그들은 이것을 우그로(ugro)라고 부른다. 작은 고깃덩어리와 함께 요리도니 것을 오시(oshi)우그로라한다. 오시우그로는 생명의 끈을 상징하며 끝과 시작을 의미한다. 타지키스탄 두샨베의 라그만과 오시우그로는 맵지 않지만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는 라그만을 매우 맵게 양념한다. 그리고 중앙아이사의 다른 요리에 비해 녹두, 양고기, 말고기, 양 기름을 많이 사용한다. 그 점만 제외하면 다른 것은 매우 비슷하다. 중앙아시아는 많은 문화와 종교(불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가 함께 공존한다. 특히 부카라에는 그들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먹었던 국수와 중국 북부가 고향인 국수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것은 근세의 음식 관광의 한 단면이 아니라 1,000년간 지속되어온 복합문화(multiculture)의 표현이다.

 

소비에트의 만두 - 모스크바의 증기욕탕에서 먹는 펠메니

 

산두노프 반야(증기욕탕)는 제정 러시아 시절, 일종의 '육체숭배'를 행하던 성스러운 장소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안주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반야에는 대부분 펠메니가 있다. 다진 고기로 속을 채운 것으로 시베리아 라비올리라고 불리는 만두이다. '진짜 시베리아 펠메니'의 속은 소고기와 간 기름으로 만든다. 지역마다 특별한 펠메니가 있다. 예를 들어 우랄 펠메니는 간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혼합으로 속이 채워진다. 어떤 것은 생선, 버섯, 절인 양배추로 속을 만든다. 절인 과일이나 잼 같은 달콤한 속이 든 것을 러시아 사람들은 바레니키(vareniki)라 부른다. 펠메니는 대부분 스메타, 즉 신 크림 한 덩이로 장식한다. 펠메니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대중화되었다. 실제로 펠메니는 쉽게 상하지 않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조리가 빠르다. 즉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리였던 것이다. 러시아가 동양의 요리를 처음 접한 때는 13세기 초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핵심 지역을 정복했던 몽골을 통해서였다.

 

마르가레테에 대한 비방 - 우라흐의 마울타셰

 

마울타셰(maultasche:마울은 독일어로 입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고 타셰는 주머니라는 뜻인데, 독일어로 만두는 '반죽 주머니'라는 뜻의 타이크타셰Teigtasche이다). 전설에 의하면 마울브론 수도사들이 여기서 처음 이 만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설에 제기되고 있는 여공작 마르가레테와 마울타셰와의 관계도 역사적으로 여공작 마르가레테 역시 이 음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침에 대한 선입견 - 베트남의 포

 

베트남에서는 밖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모두들 아침으로 포(pho)라는 국수를 먹는다. 국수 요리는 오늘날 베트남 고유의 아침식사로 간주된다. 포는 쌀국수이다. 배고픈 시절에, 특히 전쟁이 한창이던 10년동안 쌀 수확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부는 국수를 만드는 데에 너무 많은 쌀을 소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세구 혹은 중국감자라고 불리며 긴 가지가 달린 둥근 덩이줄기인 마란타속으로 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란타속은 약간 팍팍하며, 전분 제조용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았지만 오랫동안 돼지 먹이로만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간의 마란타속을 넣은 포는 귀한 음식으로 간주된다. 아침식사 습관에 대한 동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문화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다.

 

어린이 음식, 컴포트 푸드 - 깡통에 든 스파게티

 

성장하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대신 복합적인 맛의 구성에 대한 감각은 성인보다 떨어진다. 그리고 오래 씹고 싶은 생각 역시 별로 없다. 알프스 마그로네는 베트남의 포처럼 문화 융합의 산물이다. 스위스는 식민지를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내륙의 고트하르트 철도 건설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이탈리아 노동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식문화, 즉 폴렌타(polenta)와 파스타를 가져왔다. 많은 문화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국수 요리가 있다. 지역적 취향에 맞춰지고, 고향의 양념이 첨가되면 그것들은 아이들과 신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아버지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모든 파드타이는 약간 맛이 다르다. 공통 사항은 면을 볶는 일이다. 파드타이(pad Thai)는 번역하면 '타이식으로 볶는다'라는 뜻이다. 태국에서도 국수는 식사가 아니다. 식사 때는 밥을 먹어야 한다. 아시아 한가운데에 있는 태국의 요리는 수백 년에 거쳐 모든 방향에서 영향을 받았다. 인도네시아에는 볶은 면의 변형인 바미고렝(bami goreng)이 있다. 이 요리법은 중국 이주민과의 접촉에서 생겼다. 거기서 녹두나 감자 전분으로 만든 '당면'의 변형도 생겨났다.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면을 판시트(pansit)라 부른다. 판시트에는 이웃 나라의 볶은 면보다 더 많은 야채가 들어간다. 한국에서는 이 요리를 '잡채'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야키소바라 부른다. 중국 남부 사람들과 화교들은 볶은 달걀면을 초우메인(chow mein)이라 하고, 쌀국수를 초우펜(chow fen)이라 부른다.

 

국수가 행복하게 해 주는가? - 연말에 먹는 일본의 소바

 

과거에 귀족들이 먹던, 간사이 지방의 국수는 우동이다. 오늘날 많은 소바 가게들이 우동과 소바를 함께 팔고 있다. 우마미는 쓰고 달고 짜고 신 것 다음의 다섯 번째 미각이다. 일본 화학자 기쿠네 이케다가 1908년 우마미를 발견했다. 글루타민산이 우마미 미뢰를 자극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인공조미료인 MSG 생산 방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뎀뿌라의 역사는 일본에 포르투갈 선교사가 서부를 방문했던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뎀뿌라는 가볍고 기름진 이베리아 반도의 음식과 유사한 일종의 퓨전음식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밀이 없으면 국수도 없다

 

문명의 싹 - 식물학과 풀의 역사

 

밀은 특히 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식이었다. 밀, 쌀, 옥수수가 대략 동일한 비율로 전 세계 에너지 공급원의 2/3를 차지한다. 얼마 전까지 많은 역사가들이 역사상 최초의 국수는 밀로 만들어졌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2005년 가을에 황허 강 상류에 위치한 라지아 마을에서 스파게티 비슷한 면의 일부를 발견한 후에는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4,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라지아의 국수는 밀이 아니라 기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작식물로 밀은 기장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다. 학명이 트리티쿰(Triticum)인 '밀'은 이른바 화본과 식물에 속한다. 기장, 옥수수, 쌀, 대나무, 사탕수수도 화본과 식물이다. 밀의 발생지는 서남아시아(근동)이다. 밀은 중동에서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이집트, 지중해로 퍼졌고, 발칸 반도를 통해 알프스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여러 학자들이 국수 기술은 사람들이 밀을 경작하기 시작한 곳에서 생겨났다고 추측한다. 오늘날 우리는 국수의 대부분을 밀로 만든다. 식물학에서는 트리티쿰이라는 종을 낟알 배열과 염색체 수에 따라 구분한다. 낟알의 배열에 따라 구분할 경우, 밀은 단 낟알 밀, 두 낟알 밀, 세 낟알 밀이 있다. 대부분 오늘날 경작되는 밀은 세 낟알 밀이다. 국수를 만드는 데 밀의 중요한 특성은 단백질 함유량이다. 연질 밀과 중질 밀이 빵에 적합한 반면,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질 밀이 필요하다. 오늘날 이탈리아 파스타는 법에 의해 트리티쿰 두룸, 즉 두룸으로만 생산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밀가루나 경질 밀가루를 반죽할 때 단백질, 즉 아교질이라고도 불리는 글루텐이 형성된다. 경질 밀들은 글루텐이 풍부한데 특히 두룸의 글루텐은 탄력성이 좋다. 이미 11세기 불교의 채식 요리는 글루텐을 분리시킬 줄 알았다. 절에서는 그 이후 고기 대신 이 단백질을 사용했다. 밀의 또 다른 분류방법은 파종시기를 따지는 것으로 여름 밀과 겨울 밀로 구분할 수 있다. 경작으로의 이행은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생활수준은 높아졌으며 사회 조직은 더욱 복잡해졌다. 국수의 역사는 수확 증가와 수확 기술의 혁명보다는 제분기의 발전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빌론에서는 이미 기원전 3,000년에 물레방아가 존재했다. 기원후 7세기에 페르시아에는 풍차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20세기까지 물에 떠 있는 방아가 존재했다. 강 속에 고정된 수차가 달린 뗏목이다. 1786년 런던에서는 처음으로 제분기의 동력으로 증기기관이 사용되었다. 물론 모터 제분기는 19세기에 들어서야 현실화되었다. 제분기의 발전 역시 밀가루 가격을 하락시켰다. 그럼으로써 빵과 국수는 계속 저렴해졌다.

 

기장과 밀 - 중국의 농업

 

중국은 경작을 늦게 시작했다. 실크로드를 거쳐 경작식물인 밀과 보리가 중국에 도착했다. 초기 중국 자료에 보면 밀과 보리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밀은 소맥, 즉 '작은 낟알'이고, 부리는 '큰 낟알'이며 호밀은 '제비 낟알'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기장을 주식으로 삼았다. 쌀이 아니라 기장이 중국의 음식을 지배했다. 농경에 대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인 근거는 중국 문명의 요람인 황허 강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시기는 기원전 6,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허 강 근처 석기시대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은 기원전 3,000년경에 중국에 이미 밀 문화가 존재했음을 가르쳐 준다. 당시 귀했던 밀이 사치품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국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남아 있는 한나라 말경에 밀은 국가권력의 지지를 받으며 기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이후 밀이 중국 사람들에게 보관하기 편한 작물로 인정받으며 광범위하게 이용되면서 기장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었다. 밀뿐 아니라 제분 기술과 국수 제조 기술 역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왔을 것이다. 맷돌은 중국의 신석시시대의 유산인 배리강(裵李崗)문화의 증거이다. 기원전 7,000~5,000년 전의 그들은 이미 도자기를 만들고 돼지를 키웠으며 기장을 먹었다. 늦어도 춘추전국시대(기원전 475~221) 이후부터 중국에는 회전 방아가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건조한 공기가 흐르는 관인 환풍기를 사용했다. 1,000년 후, 당나라 시대에는 강과 운하에 물로 작동되는 거대한 물레방아를 건설했다. 중국에서 국수 만드는 사람과 국수가게는 당나라 이후부터 존재했다.

 

고기와 밀 - 자연과 문화

 

유럽 사람들이 다른 곡물을 경작했음에도 밀은 고대 이래로 빵을 만드는 최고의 곡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밀은 다른 곡물들에 비해 값이 가장 비쌌을 정도로 중요한 곡물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보리빵을 먹는 것을 벌로 여겼다. 밀이 생기고 나서야 인간은 빵을 만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빵도 만들고 국수도 만들었던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들은 둥글넓적한 빵과 국수를 명학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밀가루 빵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는 경작문화이다. 그들은 야생에 대한 특별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가공 식품만을 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야만인, 즉 리메스(라인과 도나우 사이에 있는 로마 시대의 국경) 북쪽의 켈트 족, 갈리아 족, 개르만 족은 완전히 달랐다. 유럽의 사고에서 이런 이분법(고기를 먹는 북부 야만인과 밀을 먹는 문명화된 남쪽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수백 년의 암흑기가 지나는 동안 문명은 수도원에서만 살아남았고, 곡물학과 관련된 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적'과 '야만적'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자리를 이제는 수도원과 귀족이 차지한다. 중세 초기(잉여의 시대였다. 숲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찼고 인구는 적었다)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규모 곡물 재배가 다시 시작되었고 빵도 생산되었다. 고기, 생선, 치즈, 야채와 곡물을 결합시킨 풍성한 혼합 음식이 생겨났다. 잉여의 시대는 카를 황제의 재위 시절에 끝이 났다. 이념적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증가하는 인구는 숲을 개간하고 점점 더 많은 곡식을 경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의 식량난(750~1100년에 29번의 커다란 식량난이 있었다)을 막지 못했다. 육식주의자와 곡물을 먹는 사람들의 양극성에 도시와 시골의 대립이 더해진다. 그 대립은 도시가 부유해질수록 심해져서 근세까지 이어진다. 르네상스 말경에 유럽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진다. 그로 인해 음식의 상징적 의미 역시 바뀌었다. 당시는 아무도 음식의 질과 삶의 질의 연관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밀은 권력이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는 서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일찍부터 밀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중세 말에는 밀의 장거리 무역, 특히 발트 해를 건너가는 무역이 생겨났다. 한자동맹에 속한 도시들인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리가는 곡물 수출항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밀 무역은 도시의 시민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도회적인 분위기가 생겨났고 문화와 학무닝 꽃을 피웠다. 이런 도회적인 문명은 밀에 의해 가능했다. 18세기에는 북아메리카 이주민이,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밀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는 국제적인 밀 무역이 세계 각지로 이어졌다.

 

유럽의 국수문화

 

나폴리의 파스타 세카 - 바로크의 패스트푸드

 

국수는 대도시의 산물이다. 바로크 시대의 나폴리에서 국수는 마카로니로 성장하여 그 당시의 '패스트푸드'가 되었다. 국수는 물론 고대의 뉴욕이라 할 수 있는 화산 근처 대도시인 나폴리의 많은 주민들처럼 다른 문화에서 유입되었다. 나폴리 국수의 짧은 역사에는 다른 무엇보다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대변하는 이 도시의 긴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전 이탈리아뿐 아니라 나중에 세계 전체를 나폴리 파스타가 정복했다. 나폴리는 근세까지 이탈리아인만의 도시가 아닌 여러 민족이 모여 살던 세계적인 도시였다. 로마 사람들에게 나폴리는 지중해 동쪽으로 가는 문 역할을 했다. '만지아마체로니(mangiamaccheroni)', 즉 마카로니 먹는 사람들은 18세기 나폴리 사람들이 얻은 별명이다. 그 전에 사람들은 나폴리 사람들을 '만지아포글리아(mangiafoglia)', 즉 야채를 먹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중세에는 파스타의 생산뿐 아니라 수송과 판매 역시 대부분 여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파스타 생산이 기계화되었을 때 공장 노동은 남자들의 일이 되었다. 파스타 공장의 남성 노동자들은 이후 국수를 만드는 여자들, 특히 수녀원에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수녀들은 세금도 없고 싼 임금으로 일하는 경쟁 상대였기 때문이다. 나폴리의 사회적 구조를 보면 대도시였다. 시민계층, 즉 중산층은 나폴리에서 아주 천천히 발전했다. 건조 국수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전히 가격이 비쌌다. 생산지인 시칠리아에서도 비쌌다. 파스타는 빵 값의 세 배를 지불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국수는 사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의 주식은 빵과 양배추였다. 고기는 16세기가 되자 다시 보편화되었다. 파스타는 나폴리와 전 이탈리아에서 획득한 칼로리 공급원이로서의 핵심적인 지위를 17세기 이후에 획득했다. 인구는 늘어나고 잘못된 통치로 도시의 육류 공급은 1630년 이후 천천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곡식이 고기의 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거의 동일한 시기에 최초의 반죽기계와 국수기계가 등장했다. 그것이 파스타 생산을 활발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인 마카로니가 당시 귀한 곡식이었던 밀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시골의 많은 농부들이 기껏해야 휴일에 먹을 수 있었을 것을 대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먹는다. 그것은 도시가 시골보다 얼마나 부유했는가를 보여 주는 징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도시가 당시에 이미 시골을 착취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폴리에서 마카로니는 18세기 이후에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탈리아 통일운동 이후로 캄파냐에 백색 공장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1891년 토레아눈치아타에는 파스타 공장이 100개가 넘었으며, 그나냐노에는 66개가 있었다. 파스타 산업의 다른 중심지는 지역적으로 자라는 두룸 밀이 가공되었던 아풀리아와 시칠리아, 리구리아이다. 나폴리의 국수 생산을 지칭하는 '백색 기술'에는 기후는 수력보다 더 중요했다. 뜨거운 햇빛이 비치는 낮과 차갑고 건조한 밤이 지속적으로 반족될 때 가장 좋은 국수가 생산된다. 감자나 옥수수, 페퍼로니아 고추처럼 스페인 사람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전한 토마토는 나폴리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며 토마토를 기껏해야 샐러드에 넣는 재료로 사용했다. 그것을 맨 처음 소스로 추천했던 사람은 미식가인 안토니오 라티니였다. 18세기에 토마토를 보관하기 시작한 것은 나폴리 사람들이었다. 마카로니와 토마토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서로를 발견했다.

 

반죽봉과 압축프레스 - 포스키아보에서 완성되다 

 

파스타 공장의 현대화는 반죽봉으로 시작되었다. 파스타 반죽이 빵 반죽보다 더 끈적끈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17세기 초에 반죽봉을 파스타 반죽에 맞게 수정했다. 하지만 대규모 공장들은 이미 19세기에 반죽봉에서 반죽기계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파스타를 만드는 사람들도 반죽기계를 근육 대신 수력으로, 아니면 말이하던 것을 증기기관으로 대치했다. 20세기 초반에 최초의 전기모터가 등장했다. 다음 단계로 유압장치가 직접적인 동력 전달을 대신했다. 그래서 파스타 수공업, 즉 '백색 기술'은 파스타 공장으로, 즉 '백색 산업'이 되었다. 발전의 마지막 단계로서 혼합하고 반죽하고 누르는 다양한 기계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파스타의 생산 방식은 400년이 지나면서 많이 바뀌었다. 순수한 수작업에서 대량생산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소스와는 반대이다. 마르티노의 시대에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 먹었던 그 소스는, 우리가 현재 먹는 파스타소스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파스타, 교황, 귀족 - 제노바의 페스토

 

17세기부터 파스타는 하나의 요리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작은 덩어리나 실 모양으로 만든 반죽을 물이나 수프, 우유에 넣어 삶은 뒤, 죽이나 수프에 집어넣었으며, 사실 그것들과 합쳐져서 하나의 요리로 인정받았다. 파스타라는 단어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의사였던 파두아의 미셀 사보나롤라의 글에 등장했다. 그는 파스타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위장에 너무 오래 머무르고, 그로 인해 속이 부글거려 방귀가 자주 나오게 된다고 경고했다. 당시에는 방귀와 결석 때문에 국수를 조심했지만 오늘날은 탄수화물 때문이다. 전통 요리법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베르미첼리, 피델리, 마카로니, 탈리아리니, 롱게티, 판카르델레, 포르멘티네보다 속을 넣은 국수인 라비올리, 토르텔리니, 아뇰리니, 카펠레티를 자주 먹었다. 상류층은 항상 약간 복잡한 것을 좋아했다. 라자냐, 즉 국수를 속과 번갈아 가며 쌓아올린 것은 고대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르네상스의 미식가들은 많은 양의 설탕과 계피를 가지고 양념을 했다. 반면 중세에는 부자들만이 그들의 요리에 다양한 양념을 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양념으로 과시하는 행위를 제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신 값이 매우 비쌌던 설탕을 음식에 넣음으로써 자신을 뽐냈다.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기를 건조한 파스타는 이탈리아 도시에서 중세 후기 이후로 소시민들의 일상적인 음식에 속했을 것라고 한다. 그에 대한 증거는 물론 없다. 이 학자들은 연대기들이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건조 국수가 아주 일반적이었을 거라고 설명한다. 틀림없이 평민들은 고위층처럼 파스타에 그렇게 양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강한 양념은 신분의 표현이었다. 파리는 지중해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 중요한 파스타 도시였다. 의사이며 학자로, 그리고 볼테르의 친구로 디드로의 백과사전 기술에 도움을 주었던 폴자크 말루앵은 1767년 왕립아카데미에서의 발표에서 파리를 나폴리, 제노바, 마르세유와 거의 동급의 파스타 생산지로 거론했다. 말루앵의 발표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국수 만드는 것을 제과업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으며 국수 만드는 사람을 빵과 함께 국수도 만드는 제과업자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그는 빵을 또 하나의 면류로 취급했다. 제노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눈부신 여인'이라는 뜻의 '라 수페르바'라 부른다. 파스타를 제노바에서 마르세유까지 운송하는 선박의 선원들은 선적된 마카로니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15세기부터 건조 파스타는 구운 과자와 함께 지중해의 무역선에서 선원들의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밀라노, 피렌체, 파두아, 베네치아, 볼로냐의 빵집들은 이미 중세 중기에 생 파스타를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귀족 가문의 요리사들은 그것을 직접 만들었다. 빵 굽는 사람들이 국수 만드는 사람으로 전문화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라자냐리라고 불렀으며, 1311년에 피렌체에서 길드인 '아로테 데 쿠오치 에 라자냐리'를 설립할 정도로 숫자가 늘어났다. 16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기록에 남아 있는, 제노바에서 국수를 만드는 사람들을 일컫는 피델라리(이곳에서 이런 명칭으로 불렀다)는 단체로서만 도시당국과 담판을 지었다. 그들은 짧고 가는 수프 베르미첼리로 제노바의 별미가 되었던 국수인 페데이, 피델리, 피델리니의 이름을 따서 자칭 피델라리라고 했다. 그 단어는 아라비아의 'fidaw'에서 유래했으며, 아라비아의 무어인이 지배하던 안달루시아에서 제노바로 건너온 것이다.

 

파스타슈타의 세계 패권 - 파르마의 발리라

 

아시아의 국수문화

 

도시에서 대중화된 일본의 국수 - 에도 시대의 소바

 

국수는 아시아에서도 대도시의 산물이다. 에도의 남자들은 간식 가판대에서 음식을 먹곤 했다. 당시 가판대들은 오늘날의 '스시'와 '뎀뿌라'들을 제공했다. 오늘날 일본의 고급 음식에 속하는 이 두 요리는 에도 시대의 패스트푸드이자 손으로 먹는 음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쌀은 20세기 들어 일본 사람들의 주식이 되었다. 일본에서 메밀은 쌀과 밀보다 더 오래전부터 경작되었다. 메밀은 선사시대 이후 일본 산골 주민들의 양식이 되었다. 일본어로 국수뿐 아니라 메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소바는 에도 시대 이후 그 소비자가 된 뜨내기 일꾼과 비슷했다. 소바는 중국에서 전래된 간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간장 콩을 거르는 기술은 중국에서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뀌는 시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에도 시대에 소바가 간이음식점에도 도시민들의 주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밀의 가격 때문이었다. 에도 시대의 최고급 소바 기술자는 다섯 가지 색깔의 소바인 고시키소바를 만든다. 붉은색은 대하의 등딱지에서, 초록색은 녹차에서, 노란색은 달걀 노른자에서, 검은색은 미역을 갈아 얻었다. 오늘날에는 고시키소바를 보기 어렵다. 소바는 일본 사람들에게 현재까지도 남성의 국수로 간주된다. 거칠며 전형적인 에도 타입이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온 소바가 거칠고, '하고타에' 해야 하는, 즉 남성적이어야 하는 반면 오사카의 우동은 부드러워야 한다. 즉 여성적이다.

 

실크로드, 밀의 도로 - 국수와 젓가락의 전파

 

국수의 탄생지를 꼽자면 아마 메소포타미아, 즉 시리아나 이라크, 아니면 아프가니스탄 북부일 것이다. 우리는 실크로드를 낙타, 노새,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저절로 생긴 길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크로드는 동과 서를 연결시켜 주는 길이며 또 하나의 공간이다. 밀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중국, 한국, 일본까지, 그리고 서쪽의 유럽까지 퍼졌다는 설은 오늘날 하나의 이론으로 발아들여진다. 국수 기술이 밀을 �아갔다는 명제는 거의 증명되지 않고 있다. 반대이론은 국수가 여러 장소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국수는 과거에 도시, 사원, 귀족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여행 중에도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하거나 건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건조를 위해서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실크로드에 존재하는 다양한 국수의 밀접한 연관성을 암시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실크로드 음식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까지 매우 비슷하다.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인 젓가락 발굴품은 근동에서 나왔는데, 스키타이 이주자들의 주거지 잔해가 있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다. 스키타이 족은 중앙아시아 북서쪽에 살던 민족이다. 그들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었는지 아니면 그것으로 요리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실크로드는 밀의 도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수의 도로이며, 젓가락의 도로인 것이다.

 

산시성의 다양한 국수들 - 고양이귀국수와 이쑤시개국수

 

요리에 대한 기억들 - 베이징 닭과 함께 나오는 바오즈

 

중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이미 항상'은 서양에서보다 좀더 긴 시간을 의미한다. 국수는 미식가의 음식과 패스트푸드가 서로 접근하고 있는 아주 소수의 음식에 속한다.

 

라면 문화 - 새로운 일본을 위한 새로운 국수

 

1872년 새해에 일본 황제는 스테이크를 먹음으로써 국수를 포함하는 일본 음식문화의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고기 요리가 일본 음식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했다. 육식으로의 전환은 물론 아무 저항 없이 순조롭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금지령이 폐지된 후 50년이 지나도록 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1930년대에 1인당 평균 고기 소비량은 2Kg이 조금 넘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미국군에 의해 점령당한 이후에야 비로소 고기가 모든 일본 사람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갑자기 도시의 많은 일본인들이 미국 사람들처럼 먹기를 원했다. 그리고 약간은 미국 사람처럼 되기를 원했다. 1945년 이후로 새로이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지방에서 도시로, 특히 도쿄로 몰려왔다. 그들은 부엌도 없고 시간도 없었으나 라면에 대한 갈증은 있었다.

 

맺음말 : 국수문화를 넘어서 - 광저우의 딤섬 

 

우리는 식사할 때 음식을 항상 선택해야만 한다. 근대 이전에는 음식을 선택하는 일이 드물었다. 딤섬이라는 개념은 '마음에 점을 찍는 약간의 먹을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