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본 영화와 내셔널리즘],김려실,책세상,2005,(061102).

바람과 술 2008. 6. 15. 06:46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민족주의자는 독립운동가라는 뜻으로, 내셔널리스트는 국가주의자 내지 극우익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는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국가주의'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앤더슨의 주장대로 '민족=상상의 공동체'라고 도식화할 수 없는, 식민지로서 '민족'과 '국가'의 괴리를 경험한 한국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반면 일본은 야마토 민족이 천황주의 내셔널리즘을 구심점으로 소수 민족이던 오키나와의 류큐족과 훗카이도의 아이누족을 정복하여 수립한 근대 국민국가다. 대만을 식민지화한 일본은 이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화해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제는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한편 언어와 문화가 상이한 식민지의 이민족들을 제국 안에 포섭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허위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패전 이후 일본에 미군정이 시작되었을 때도 영화는 민주주의 계몽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군정이 끝나자마자 일본 국민을 전쟁과 원폭의 희생자로 그리는 영화들이 등장했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만큼 일본 영화 속의 전쟁도 미화되어갔다. 오늘날의 우익 영화들은 과거의 국책 영화보다 더욱 교묘해져서 오락의 외피로 위장하여 역사 왜곡에 가담하거나 자국의 문화를 본질주의적 입장에서 미화하는 문화내셔널리즘을 아양하고 있다.

 

제1장 무사도와 내셔널리즘

 

1. <주신구라>가 감동적인 이유

 

<주신구라>는 망군(亡君)의 복수를 위해 원수를 살해한 47명의 사무라이들이 막부(幕府)의 명령으로 전원(혹은 46명만) 할복자살한 1702년 아코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된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주신구라>는 2001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때 이 작품을 형용한 말은 '일본의 춘향전'이었다. 한편 일본에서 <춘향전>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주신구라'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수사법은 두 작품에 유사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향전>과 <주신구라>가 서로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되고 있는 것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작품이 가진 '국민문학'이라는 위치 때문이다. 유사성이 없는 두 작품을 한 자리에 소환하는 내셔널리즘적 상상력이 놀랍기도 하지만 국민문학이 국가 의식을 반영하여 다수의 국민 속으로 침투한 문학이라고 본다면 <주신구라>를 읽는 것은 일본과 일본인을 알기 위한 첩경이 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와 보편주의는 내셔널리즘과 인터내셔널리즘(internationalism)의 관계처럼 서로를 참조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영원히 대립하는 한 쌍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결정론에 빠지지 말고 특수와 보편 사이의 길을 요리조리 현명하게 헤쳐 나가며 이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이다.

 

2. 군국주의에 이용된 무사도

 

<주신구라>가 일본의 국민문학으로서 아직도 변함없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일본 고유의 도덕 사상이자 문화인 무삳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역사의 산물로서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무사도야말로 가장 곡해되고 문제시되어온 일본의 전통이다. 원래 유교에서 사(士)는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 인격체를 의미했지만 막부라는 무가 정권의 통치로 인해 군사 규율 문화가 발전한 일본에서는 이 단어가 무사 계급을 의미하는 용어 '무사(武士)'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봉건적인 계급 제도가 폐지된 메이지 이후에도 무사도는 국민국가 성립과 더불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하고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이용되어왔다.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부터 계속해서 외국과 전쟁을 해온 일본에서 무사도는 군국주의적 도덕률로 변용되었고, 무사도의 법도는 일본 군인의 행동 강령으로 관습화되었다. 군인 정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군인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에게도 깊이 침투된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근대 국가 일본에서 '군인'이라는 직업이 전문직으로 분리되지 못하고 국민개병제를 통해 전 국민의 의무가 된 사정과도 관계가 깊다. 2차 대전을 통해 징병이 극대화됨으로써 군국주의는 일본 국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할복은 흔히 일본에서는 무사도의 꽃으로 미화되었고 서양에서는 식인(食人)에 필적하는 야만적인 행위로 비방을 받곤 했다. 그러나 할복은 무사도의 법도에 의하면 자살 방법의 하나가 아니라 제도다.

 

3. 무사도와 국책 영화

 

일본 영화에서 시대극과 현대극의 경계는 메이지 유신이다. 시대극의 시대 배경은 메이지 유신 이전의 봉건 시대, 그중에서도 에도 막부 시대에 한정되어 있다. 초기 일본 영화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었던 시대극 소재는 사무라이들의 검술 액션이었기 때문에 한때 시대극은 '찬바라 영화('찬바라'는 칼날이 부딪칠 때의 의성어 '찬찬'과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흩뿌려질 때의 의성어 '바라바라'가 합성된 말)'라 폄하되기도 했다. 대중이 좋아한 것은 '다치마와리'라 불린 격투 장면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시대극은 무사도를 통해 군국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08년부터 패전할 때까지 일본에서는 6,000여 편의 시대극이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제작된 영화의 반 정도가 시대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패전 뒤 이런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일본을 점령한 GHQ(연합총사령부)는 CIE(민간정보교육부)를 만들어 일본의 연극영화 산업을 관리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재의 1.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것 2. 복수에 관한 것 3. 국가주의적인 것 4. 애국주의 내지는 배타적인 것 5. 역사상 사실을 왜곡하는 것 6. 인종적 또는 종교적 차별을 시인하는 것 7. 봉건적 충성심 또는 생명 경시를 바람직한 일이나 명예로운 일로 다룬 것 8.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자살을 시인한 것 9. 여성에 대한 압제 또는 여성의 타락을 다루거나 그것을 시인한 것 10. 잔인무도한 폭력을 구사한 것 11.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 12. 아동 착취를 시인한 것 13. 포츠담 선언 또는 연합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반하는 것으로 열세 개 항목의 영화를 금지하는 데, 주신구라는 거의 모든 항목에 해당한다. 따라서 영화화되다시피 했던 <주신구라>는 GHQ의 점령기 동안 한 편도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점령이 끝난 1952년에는 그동안의 금지에 복수라도 하듯 무려 네 편이 한꺼번에 제작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반년 뒤인 1938년 4월 1일 일본 정부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국가가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운영하기 위해 '국가 총동원법'을 공표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나치의 영화법을 참고로 하여 영화의 무기화라 할 수 있는 '영화법'을 공포, 시행해 일본 영화를 국가의 철저한 관리하에 두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시대극은 국가주의의 메타포를 보일 수 있는 무사도를 그린 영화, 일본의 국민적 영웅에 대한 영화, 재즈나 댄스 같은 '타락한 적의 문화'에 반하여 일본의 전통과 예술을 아름답게 그란 예도물 정도로 소재가 제한되었다. 따라서 영화계가 임전(臨戰) 체제로 들어간 1938년부터 패전할 때까지 시대극 감독들은 오락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국책 영화답게 만들기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전후 영화의 무사도 비판

 

무사도는 전후 일본 영화에서 비로소 일본적 인습과 반휴머니즘의 원흉으로 고발된다(이마이 다다시 감독의 <무사도 잔혹 이야기>,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 등).

 

제2장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1.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일본의 정신>

 

서양 영화 속에 무사도가 어떻게 표상되었는지를 보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로 니토베 이나조가 있다. 그는 1899년 영어로 <무사도, 일본의 정신>을 써서 무사도를 서구에 널리 알린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일본에도 서양 못지않게 훌륭한 도덕률이 있음을 서양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서양인들의 시선에 신경 써 쓴 책이다. 평생 기독교인이었던 니토베는 자신이 서양의 예술, 철학, 윤리의 근원인 기독교에 필적할 무언가를 일본의 전통에서 발견해냈다는 사실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일본 중세문학 전문가인 사에키 신이치가 쓴 <전장의 정신사>(일본방송출판사 2003년)에 따르면 니토베의 <무사도, 일본의 정신>은 무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가 쓴 이단적인 책이다. 그럼에도 <무사도, 일본의 정신>이 서양에서 큰 인기를 얻어 일본에 역수입되자, 창조된 전통이 일본 사상의 원류로 오인되기 시작했다.

 

2. 국욕 영화의 이중성

 

'나비부인'과 할복은 서양인이 일본에 대해 품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의 근원이다. 태평양전쟁 전에 수입된 일본 영화의 필름을 짜집기해 만든 미국의 흑색선전 영화들은 미국이 맞서 싸운 적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타자-적'의 이미지를 양산했다. 이런 종류의 선전 영화들은 일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미군을 교육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실재하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논리에 따라 해석된 일본이었다. 일본을 왜곡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비판하면서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같은 과오를 되풀이한 일본이 비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란 피부를 가진 명예 백인? 반내셔널리즘과 휴머니즘에 입각하지 않은 일본인들의 국욕 영화 비판은 일본의 가치를 서양인들에게 애써 증명하려는 그들의 열등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3. 합작 영화의 흥행 전략

 

일본 영화의 국제화를 위해 민족별로 서양의 감독을 불러와서는 그들 취향의 합작 영화를 만들어 서구 관객에게 일본 영화의 존재를 알린 후 본격적으로 일본 영화를 수출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긴 전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4. 파란 눈의 사무라이 증후군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백인이 되고자 하는 식민지 흑인의 콤플렉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흑인의 몸부림을 고통스럽게 기술한 파농은 "우리는 과거 우리의 통치자, 과거 우리의 선교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검둥이를 숭상하는 사람이나 검둥이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기실 우리에겐 매한가지로 역겹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동양 문화에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백인들은 같은 아시아인라도 서로 다른 동양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까? 서양은 우수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논리를 가진 고전적인 오리엔탈리스트들과 달리 파란 눈의 사무라이 증후군에 걸린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인간 소외, 과열 경쟁, 진부함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 미화된다.

 

제3장 대동아공영권과 영화

 

1. 만주국과 협화 영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독인일들이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아직도 만주국이 세계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이상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날조라기보다는 착란이다. 점령지와 식민지를 확대할 때마다 영화 공작도 더불어 펼친 일제는 만주국 수립 후 만주국 영화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만주국 내의 이민족, 특히 만주족을 대상으로 선전 작업을 하기 위해 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를 설립했다. 그러나 만주의 실상을 무시한 만영 오락 영화는 일본인을 제외한 현지인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수출을 통해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2. 내선일체 영화

 

지배 초창기부터 조선인을 동원하여 선전 영화를 제작해온 조선 총독부는 1940년 1월 '조선 영화령'을 공포하여 일본어로 된 내선일체 영화 이외의 영화 제작을 금지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조선 군보도부와 조선 총독부의 전면적 지원 아래 조선인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내선일체 선전 영화이다. 내선일체란 문자 그대로라면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 실상은 내선일체 영화에서조차 반어적으로 드러나듯, 조선과 일본의 상호 동화가 아니라 조선인에게만 요구된 차별 원리였다. 아울러 한국 영화사에서 1945년을 기준으로 멈추어버린 친일 영화에 대한 논의는 광복 영화와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기굴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남방에서의 영화 공작

 

동남아시아는 일제가 점령하기 전부터 미국과 영국 등 서양의 식민지 종주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과 함께 수립된 일제의 대동아공영원 전략이 파고든 것은 바로 동남아시아인의 독립 열망이었다. 일제는 '대동아공연권론'을 서구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아시아 해방 이념으로 선전하면서 영미와의 전쟁에 동남아시아 각국의 독립군을 이용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의 독립 원조란 또 다른 식민지 지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정책을 수반하여 일본 내에서는 만주국 수립 후 활발했던 대륙 진출 붐이 한풀 꺽이고 남방 진출 붐이 일어났다. 일제의 선전 영화도 이 경향을 추수하며 동남아시아에서 협화 영화나 내선일체 영화와는 성격이 또 다른 대동아공연권 영화를 만들었다.

 

4. 우익 아이돌과 네오도조 영화

 

오늘날의 일본에서 '네오내셔널리즘'이 젊은이들의 문화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자기들은 '아저씨 냄새 나는' 우익과는 다른 '쿨'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내셔널리즘의 상품화다. 일본의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거품 경제가 무너진 1990년대 이후 일본 우익의 가장 큰 이슈는 대동아공영권론의 복권이었다. 그 전만 해도 제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자들의 흰소리로 들리던 우익의 주장이 일반인에게 먹혀들기 시작한 것은 대동아공영권이 일본 경제의 장기간 침체를 해결하는 수단이자 글로벌리즘에 대한 저항 방식으로 선전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새로운 대동아공영권주의가 바로 '네오도조'다. '네오도조'의 정체성은 일본을 정화하는 내셔널리스트 집단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이 아시아 민중의 해방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본 제국주의의 허상이었던 것처럼 네오도조 역시 반글로벌리즘이나 애국이라는 미사여구를 앞세워 마이너리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제4장 쇼와 여배우들의 역할 분담

 

'오야마'(여성의 출연이 금지된 가부키에서 여자 역을 대신하는 남자 배우)의 전통이 있는 일본에서 여배우가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1919년이다. 여성이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여자배우가 되었다는 점은 기회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영화계에서 톱스타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삶과는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다.

 

1. 다나카 기누요 - 서민적 현모양처

 

다나카가 연기한 어머니는 완고한 퇴역 군인인 남편의 기분을 맞춰주고 울보에다 허약한 장남을 어르고 달래서 가정의 화목을 지키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다. 미군 점령기의 일본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되어 영화에서도 키스 신이 일반화되고 카바레 댄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대중은 다나카의 변신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2. 하라 세츠코 - 영원한 성처녀

 

'영원한 성처녀'란 하라 세츠코에게 언론이 붙인 별명이다. 하라 세츠코는 당시 일본의  여느 여배우보다 큰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를 지닌 미인으로, 이런 외모 덕분인지 멜로드라마의 가련한 여주인공보다는 품위를 갖춘 이지적인 여성을 주로 연기했다. 또 시대극보다는 주로 현대극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제작된 국책 영화에서 그녀의 모던한 이미지는 제거되고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는 일본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만 남게 된다.

 

3. 리 코우란 - 여자의 변신은 무죄?

 

전시에 다나카 기누요와 하라 세츠코가 각각 군국의 어머니, 총후의 누이를 표상했다면 리 코우란은 늘 식민지의 여인을 연기했다. 성적 매력이 제거된 어머니와 누이에 비해 이 이국의 여인은 '대동아공영권의 드티리히'라고 할 만한 섹스심벌로 일세를 풍미했다.

 

제5장 전후 영화의 모호한 내셔널리즘

 

1. 협력, 위장, 포기의 동등한 대가

 

일본 영화인들에게 국책 영화에 대한 협력은 양심상의 문제였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전후 일본 영화계에 나타나는 전쟁 책임의 모호성이 발생한다. 전시 국책 영화에 대한 일본 영화인들의 대응은 크게 협력, 위장, 포기의 세 가지로 나뉜다.

 

2. 전쟁의 기억, 추억, 그리고 망각

 

젊은 세대들이 네오내셔널리즘에 휩쓸리는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못 가르친 어른들의 책임이다.

 

3. 일본미와 영화제용 영화

 

일본 영화가 침체되기 시작한 것은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며서 영화 관객 수가 급격히 감소한 1960년대 후반부터다. 지금 일본에는 흥행영화, 해외에서 상을 받는 영화 그리고 젊은 감독들의 독립 영화가 있다. 실제로 일본 언론이 흥분한 것은 영화제용 영화 때문이다.

 

4. 일본 영화에 대한 오해들

 

서로에게 한없이 가까운 타자이기 때문에 한일 관계는 필연적으로 인터/내셔널리즘 속에서 부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은 과거와 달리 적어도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관계는 확보하고 있다. 그러니 과거로 퇴보하지 말고 현명하게 대처해나가자. 우리는 다르다. 그렇지만 대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