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문화사], 개마고원, 이효인, 2003, (070129).

바람과 술 2008. 6. 15. 06:47

1부. 쾌락

 

1. 가학의 쾌락

'쾌락'은 본능적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일컫지 않는다. '쾌락'이란 수치심을 잊기 위해, 집단 망상에 빠지면서 가학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남자들은 괴롭다. 남자들은 위로받아야 한다, 여자들이 이해하고 무엇인가를 해줘야 한다, 그것이 성적 서비스를 동반한 위로하면 더욱 좋겠다, 이런 갈망들이 유치한 유희로서 스크린에 펼쳐졌던 것이다. <별들의 고향>이 시대에 굴종한 남자들의 집단적 가학증세를 드러낸 것이라면, <겨울 여자>는 그 수치심으로 가득 찬 자존심이 뻔뻔스럽게도 위로받아야겠다고 나선 초라한 몰골의 반영이었다. 당대의 남자 관객들은 이화를 '숭배하면서 강간'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 감동한 한국 남자들 모두는 젖먹이 퇴행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저항하는 대신에 은밀하게 왜곡된 쾌락을 찾아 나섰다.

 

2. 전근대의 쾌락과 근대의 쾌락

거칠게 말하자면 '전근대적 가치'란 돈보다는 사람을 믿는 것이며, 과거부터 내려오는 도덕관과 생활윤리를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근대적 가치'란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면서 과학적 세계관과 이성적 판단, 경제적 합리 등을 우선하는 것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쾌락'은 '전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가 충돌하여 빚어내는 여러 감정들 중에서 특히 대리만족을 가리킨다.

 

이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는 멜로드라마를 위장한 일종의 여성 학대극이다. 유부남인 걸 말하지 않은 것이나 일방적인 이별, 미혼모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수모, 육아와 육아비용의 감당 등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이 여성 학대극에 대해 당시의 남성 관객들은 비록 소수의 남성들은 괜히 미안한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대리만족이나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의 온전한 작동에 만족했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여성 관객들은 이중을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혼외정사를 저진른 여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의 감정은 처참한 상황에 놓인 여자에 대한 동정심 혹은 연대감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여성 관객들은 삼중의 억압적인 구조 아래 살고 있었다. 여성들은 한국식 가부장제의 온존으로 인한 고통들을 모조리 껴안아야 했다. 즉 가사일과 아이교육까지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고, 남성들의 일탈에 대해서도 제대로 항의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또 이 시기는 근대화라는 구호로 압축된 '돈 중심의 가치관'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받던 시기였다. 마지막 억압은 생활문화 차원의 이데올로기가 주는 압박이었다.

 

3. 사회적 욕망과 성적 욕망의 분화

'성적'인 욕망은 성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욕망을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사회적' 욕망이란 사회 구성원간의 합리적 관계, 규율과 약속에 의해 추구될 수 있는 욕망이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성적'인 욕망과 '사회적' 욕망은 분화되지 않았다. 내밀한 개인의 성정 욕망이야 그럴 리 없었지만, 사회적 권력이나 집단적 관습에 의해 개인의 욕망이 충분히 통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근대적 사회에서 그것들은 (물론 각 나라마다 혹은 시기마다 다르겠지만) 공식적으로는 분화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혼재된 상태로 있다. 그러다가 탈근대적 사회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성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이 분화된다. 탈근대 사회라고 하여 모든 개개인들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이 분화된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논리 일부가 (혹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오독된 상태로) 한국에서는 탈정치, 탈주체 등의 논리로 통용되었다. 정말 비판받아야 할 보수주의적이며 훈고학적인 것보다는 진지한 사회적 주제 등이 엄숙주의로 비판받았고, 가벼움과 철없음이 철학적 태도인 것처럼 여겨졌다. 일간 신문을 비롯한 저널들은 문화면을 늘렸고 '문화가 상품'이라는 사실을 크게 �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처럼 엄살을 떨었다. 이 시기에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출현했고, 영화 감독은 물론이고 영화비평가조차 소설가보다도 더 인기 있는 직종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세상과 접속한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한국의 변화, 좌파 세력들의 몰락, 지식인들의 비일관성, 문화상품의 횡행, 대중적 공간의 확장 등에 대해 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정확하게 접속했다. 비록 이 영화는 성적 욕망이 사회적 욕망을 장악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두 욕망간의 쟁투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성적 욕망의 형식으로 대두된 욕망이 사실은 사회적 욕망을 재점검하는 가제일 수 있다는 발언이기도 했다.

 

4. 풍요.폭력.노스텔지어의 나른한 쾌락

1990년대 한국 영화의 욕망은 풍요.폭력.노스탤지어를 향한 것이었다. '풍요'를 보고 즐기는 쾌락은 풍요로움을 즐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정의나 민주적 삶을 배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었다. '폭력'을 보는 쾌락은 범법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잊고자 하는 영화적 장치였다. 깡패 영화들은 위법과 탈법으로 일관하는 인물들을 통해 쾌락을 주는 동시에 영화의 결말에 그들이 응징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노스탤지어를 통한 쾌락은,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향수'와 함께 간접적인 경험을 통한 자연, 원초적인 것, 순수 그 자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정적 몰입 등을 포함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피적인 쾌락의 하나였다.

 

남성 주인공들을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사회적 강압에 대응하는 남성 주인공들의방식이기도 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압박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국가가 국민들을 하나의 논리로 내몰았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형식적으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졌을 뿐 여전히 비민주적인 사회, 급속한 경제 발전과 생활환경의 변화, 과학기술 문명이 각 개인들에게 가하는 압력 등은 남성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또 다른 압박이었다. 이에 대해 영화 속의 남성 주인공들은 죽음 혹은 그것에 버금가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상실로 대응한다. 또 이 대응은 상대방 여성이 존재함으로써 그 비극성이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퇴행적 자아도취였고, 이른바 나르시시즘의 일종이었다. "나르시시즘은 스스로가 배제되었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심리적 기제이다. 나르시시즘을 사회적 분석의 차원으로 확장해보면 남성 나르시스트는 민족 국가에 불만족을 느끼는 자아-이상을 재현한다.

 

2부. 근대

 

1. 근대에 내몰린 남성들

한국의 근대에는 시기별로 네 가지의 충돌이 있었다. 첫번째 충돌은 일제 침략이 조선을 근대화시킨라고 보는 견해와 독립된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다소 모호한) 근대정신과의 충돌이었다. (일제 시대) 두번째 충돌은 서구적 문명화를 보는 견해와 기존의 유교적인 질서 위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견해의 충돌이었다. (5,6,70년대) 세번째 충돌은 근대 산업화 이주의 발전이 근대화라고 보는 견해와 민주주의적 정치사회 질성의 확립이 근대화라고 보는 견해의 충돌이었다. (7,80년대) 마지막으로 네번째 충돌은 고도의 산업화된 근대와 근대정신을 유지하려는 견해와 그것 전부를 회의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포스트모던한 견해와의 충돌이었다. (90년대 이후) '근대에 내몰린 남성들'은 두번째 충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이 네편의 영화는 당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리거나 혹은 그 현실을 극복하자고 제안한다. 영화 속 주인공 남자들은, <쌀>을 제외한다면, 비극적이거나 허약한 모습으로 결말을 장식한다. 이 영화를 만든 (남성) 감독들은 그런 비극적이거나 허약한 남성들을 그리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비판하는 동시에 무능하거나 시대착오적인 남성들을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과 조롱의 뒤 혹은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곳에는 자기 연민이 있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을 실컷 농락하면서도 그 농락의 원인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시대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묘사가 바로 그 '자기 연민'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감독 혹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그 시대를 피하고 싶었지만 피해 갈 수 없었고, 따라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탓하면서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2.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한국의 근대 역시 낡은 것과 새 것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낡은 것은 새 것을 결코 이기지 못했다. 낡은 것 속에도 분명한 미덕이 있었고, 새 것 속에도 분명히 악덕이 있었지만, '국가-독재-산업발전'이라는 동맹군은 새 것의 편이었다. 낡은 것이라면 그 미덕조차 무시되었다. 전근대적인 것은 모조리 극복과 배척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 영화는 근대적인 것을 찬양하거나 전근대적인 것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혼란과 혼돈을 거듭한다. 입장과 전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은 그 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감독은 한국의 근대적 현실에 대해 명확하게 일관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불안과 역거움' 등과 가깝다기보다는 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당대 한국 근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감독은 명확한 태도로 옛날이 좋았다는 식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어수선함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노골적인 풍자의 형식으로 한국의 근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명확한 입장도 전망도 없는, 단지 그 시대에 대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풍자만을 일삼았던 것이다.

 

3. 근대, 1980년대 풍경의 오독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풍경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1980년대에 한국은 더러움 용광로 속처럼 뜨거웠고, 그 더러움을 정제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하지만 얼음으로는 그 용광로를 식힐 수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의 사회적 모순을 표현하려고 했던 영화들은 그 순수한 열정과 분노 그리고 차가운 이성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헛발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하려는 대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문제를 제기하며 현실을 직접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또다시 군부 세력이 집권한 대통령 선거 결과에 좌절한 나머지 수상한 신념을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실패담은 감독 개개인의 실패담이 아니라 시대가 부여한 질곡이었다.

 

결론. 장선우는 <우묵배미의 사랑>을 통해 1980년대라는 끔직한 터널을 무기력하게 통과한 자신을 변명한 것이었다. 이 역시 <그들도 우리처럼>처럼 빗나간 과녁을 향한 화살이었지만, 그것은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보였던 것처럼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민중지향적인 인텔리의 자기 연민이라는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언급한 이장호.배창호.박광수.장선우 등의 한계는 개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강박에 의한 한계였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똑바로 보기는 쉽지 않다. 특히 1980년대처럼 급격한 변화와 엄청난 혼란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대의 풍경을 오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4. 근대와 탈근대의 착종

세상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계몽.투쟁.기획한다. 1980년대 사회성 영화들이 그러했다. 그것은 근대정신이었고, 모더니티(Modernity 근대성)의 반영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세상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적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계몽.투쟁.기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세상은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했다.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 탈근대성)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한국의 포스트모던한 영화들은 전적으로 포스트모던하게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모던한 시선으로 포스트모던한 세상을 비판적으로 그리거나, 포스트모던한 시각으로 포스트모던한 세상을 암울하게 그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거짓말>로 슬프게 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의는 끝나고 말았다. 이후 한국 영화의 포스트모던한 시선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경쾌하고 경박하게 아무런 생각없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국의 근대와 탈근대는 시작되지 않았고, 끝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한국 영화도 그랬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모더니트에 대한 인식은 물론이고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인식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돈과 재미만이 목표였다. 가끔식 흘러나오는 매서운 사회 비판은 뒤따라 벌어지는 폭소 코미디에 묻혀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원본과 복사본에 대한 구별도 없고, 중심과 주변에 대한 구분도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한 경멸만큼이나 자기 시장에 대한 자긍심도 엿보인다. 그러지 않고는 '돈과 재미'만을 목표로 한 이런 파격적인 영화가 등장할 수가 없다기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모더니티가 굴절되거나 낡은 만큼 한국의 포스트모더니티도 굴절되고 낡아버렸다. 여기에는 아무런 인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식이 없다는 것은 근대의 억압 속에서 그 근대정신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비지상주의에 매혹된 개인의 정서 상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현재를 파악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 상태와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21세기의 문턱에서 <거짓말>은 슬픈 포스트모더니즘을 끝장냈고, <주유소 습격사건>은 기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들어섰다. 절묘한 임무 교대이자 세대 교체였다.

 

3부. 강박

 

1. 강점된 기억의 강박

<자유만세>는 친일 감독이 만든 해방투쟁 영화다. 감독 최인규에게 일제는 (사회적) 리비도 (성 충동이나 성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해방이 되자 최인규는 그 리비도 대상을 바�다. 이젠 해방된 조국이 리비도 대상이 된 것이다. 관객들 또한 그러했다. 관객들 역시 과거 일제에 협력/굴종했다. 모두가 강박 노이로제를 지녔던 것이다. 그 강박 노이로제 상태를 벗어나기(저항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만세>에 환호했다. 모두가 해방투쟁을 했다는 집단 착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역시 강박 노이로제 환자였던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을 휘하로 끌어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반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다가 6.25전쟁이라는 절묘한 계기를 맞이하자. 이승만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세워 '친일 노이로제'를 땅 속에 묻어버렸다. <자유만세>는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정신병력을 감출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나온 <자유만세>는 순간적인 집단적 환호를 거친 후 쉽사리 잊혀졌다. 이후 이 여화는 그 역사적 모순이나 집단적 심리적 병상 등은 잊혀진 채 '해방 직후의 명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름'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의 대표작' 등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집단적 역사 망각 증세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이승만 반공주의와 박정희 친미우파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의 작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 관계자들이 그 망각증세를 불러일으키는 데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2. 전쟁 강박의 전개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빨간 마후라>를 비롯하여 1970년대 말까지 제작된 6.25전쟁에 관한 영화들은 전쟁에 관한 강박 노이로제를 '승리의 스펙터클'과 '인간애의 표출'이라는 코드를 통해 풀어갔다. 여기에서 강박 노이로제란 전쟁에 총을 들고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동적으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도 느끼는 죄책감 혹은 자기 연민의 감정을 말한다. 그것은 강박 노이로제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투구를 정의와 인간애의 전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강박 노이로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1990년까지 그 강박 노이로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또 아슬아슬하게 시대적 동향을 담으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영화들에 의해 서서히 극복의 그래프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등은 그 강박 노이로제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보다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익살스러운 코미디, 그리고 스펙터클과 영화적 장치를 통해 우회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쟁에 관해, 그 전쟁이 안겨준 강박 노이로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영화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한국 영화가 전쟁에 대해 '반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한국 영화는 전쟁과 분단이 안겨준 강박 노이로제를 극복하는데 50년이라는 시간을 썼다. 하지만 그것조차 진정한 반성을 통한 극복이 아니었다.

 

3. 전쟁 휴유증, 악몽의 나르시즘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상대가 누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전쟁의 필요성을 하등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쟁이란 악마의 저주일 뿐이다. 전쟁 덕분에 팔자를 고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쟁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공포를 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공포의 그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퍼트린 박테리아와 인플루엔자들이 스멀스멀 사람들의 몸과 마음속으로 기어든다. 육체적인 휴유증은 물론이고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강박 노이로제에 의해 광폭해지면서 사람들은 미쳐가는 것이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그것을 어눌한 태도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역시 전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1980년 광주'를 담고 있는 <박하사탕>은 그 광란의 모습을 다루는 한편 사람들을 위로한다. 굿처럼 영화 또한 그런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처절한 나머지 자긴변명과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더 절실해 보인다.

 

이 가학성은 무질서한 시대의 부정에 무기력했던 아버지 세대, 즉 감독 세대의 자기변명인 동시에 그런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동년배들을 위한 자기연민의 비가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은 나르시시즘과 가깝다. 하지만 그 나르시시즘은 당사자들에게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다. 변명이더라도 그것은 정말 억울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자기 연민이라도 개인적 감정에 매몰된 것만은 아니다. 이 자기연민은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을 향한 슬프고도 따뜻한 연민이다.

 

4부. 여자

 

1. 한국 영화의 부인들

여성/남성이라는 말은 사회적 존재로서 집단적으로 구분되는 성적 구별에 해당한다. 반면 여자/남자라는 말은 개인으로서 개별적으로 구분되는 성적 구별에 해당한다. 한국 영화,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성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1980년대 영화들은 거의가 '부인'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부인이란 금기의 규칙 속에서 욕망을 불태우는 '여자'들일뿐 성 이데올로기의 금기조항을 비판하거나 반성적으로 되묻는 '여성'들이 아니다.

 

1970년대나 1990년대 중반 이후이 영화들과는 달리 1980년대의 '부인들' 영화는 이런 여러 가지로 복합된 조건들 속에서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 영화들은 80년대의 '또 하나의 장르 영화'로서 미미하나마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고, 1990년대 에로 비디오 열풍의 토대가 되었다.

 

2. 김기영 감독의 여.여.여

김기영 감독은 애포부터 사회나 사회적 성 문제의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 대부분은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생략하고 있으며, 단지 근대화 과정의 빈부격차라든가 남성과 여성의 세력 관계나 사회문화적 �태 등을 단편적으로 담아낼 뿐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한국 남성들의 이중적인 여성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화 과정 속에서 어지럽게 벌어졌던 '난장판 같은 남녀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김기영은 단순히 '비참한 현실을 봉합'만 한 것이 아니라, '하녀들'을 실컷 욕보이다가 우리들의 세상을 '욕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정권이 뒤바뀔 수도 있는 치정 사건이었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을 묻을 수 있는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력이란 바로, 근대화 과정 속에서 빈부 격차가 커지고 시선은 자꾸만 서구로 향하고 있는데도 불고하고 정작 남녀 관계의 현실은 변함없이 작동시킬 수 있는 정신적 불구, 합리성의 결핍, 강약부동의 폭력적인 힘이었다. 김기영 감족이 숱하게 그려낸 '여자'들은 바로 그런 '저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이었다. 김기영 감독 또한 그런 '저력'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여자들을 영화 속에서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물론 분열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말이다.

 

3. 여자 영화와 여성 영화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운동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많은 인텔리 운동가들이 현장과 조직으로부터 이탈했다. 정치적.사회적 관심은 문화적 관심으로 대체되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 또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런 현상과 너무나 어울리게 90년대 초반에는 여성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다양하게 나왔다. 각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플롯의 종속적인 변수에 불과했던 영자는 플롯을 끌어가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영화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자취를 감춘다. 그 대신 김기덕이라는 '새로운 여자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등장했고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주목은 너무나 지루한 애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한국 영화계의 지형도와 연관된 것이었다.

 

이 시기 한국 영화들은 게임의 가상공간 같은 곳에서 재미있고 웃기는 일들을 벌였거나, 사회적 성과 섹스에 대해 허투루 다�거나, 근엄한 표정으로 사회와 삶을 애기하지만 너무 공허한 발언만 반복했다. 그 지겨운 지형도의 틈새를 비집고 김기덕 영화는 솟아올랐다. 작위적으로 구성된 육감적 영상을 통해, 또 위악과 과장을 통해 어떤 극단을 보여준 것이다.

 

4. 영자와 엽기적인 그녀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영자는 흔한 이름이었다. 그것은 근대화에 부응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부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작명력의 한계이기도 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속의 영자는 당시 이농현상과 연관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소구된 영화였다. 그로부터 십 몇 년이 지난 후 개그우먼 이영자는 '영자'를 당당하게 상품화하면서 인기를 누리다가 낙마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영자가 등장했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가 영자의 뒤를 이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나타난 '그녀'는 다른 영자였다. '그녀'의 역할은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거나 사회적 위계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욕구의 대리 실현자였다.

 

이런 점은 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몸을 가꾸지 않은 사람은 지적으로도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제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꾸거나 투쟁해야 할 대상이다. 이는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서구 근대 철학의 기조가 극단적으로 반영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몸에 관한 포스트모던한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즉, 이제 사람들은 '몸을 유희하는 것'인 셈이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지만 더 크게는 소비를 추동하는 자본주의 시장과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