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사랑 시네마], 씨네21, 김수용, 2005년, (070504).

바람과 술 2008. 6. 15. 06:49

책머리에

 

나는 지구의 작은 한 지점에서 평생을 두고 영화와 승부 없는 씨름을 하다가 이제 시간에 쫓겨 초조한 상태에 있다. 혹자들은 9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없다는 기세등등하게 말하곤 한다. 그것이 지난날 우리 영화를 지키면서 이름 없이 죽어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승리의 문턱에 선 오만이라도 좋다. 바라건대 한국영화를 올바르게만 끌고 가다오.

나는 지금도 메가폰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꿈에 시달리고 있다.

 

1. 영화에 첫발을 딛다

 

신상옥 감독과의 첫 만남 :

신인감독의 딱지를 떼다 :

검열 아래 코미디를 찍다 : 1960년은 영화 검열이 문교부에서 민단 단체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륜)로 이관된 해이다. 이것은 4.19혁명이 가져다준 선물이었으며 마침내 영화계에도 밀어닥친 민주화 바람의 신호탄이었다. 그래서 그해 제작된 98편의 한국영화는 거의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할 것이라 기대되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한국영화 발전의 청신호로 간주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관료들은 영륜에서 검열이 끝난 영화를 문교부가 재검열하게 했다. 이로써 민간 단체의 자율 영화 검열은 9개월 15일 만에 막을 내렸다.

홍콩에서 척 해외 로케이션 :

나의 트레이드마크, 베레모를 쓰게 된 사연 :

베드신 NO, 액션씬 OK! : 60년대 초에는 스턴트맨이 따로 없어 위험한 연기도 배우가 실제로 몸을 던져야 했다. 가령 바위 뒤에 숨은 적병을 저격하는 장면을 찍을 때, 바위 뒤에 숨었다가 튀어나오는 배우에게 실제 M1소총으로 실탄 사격을 했다. 당시 액션 영화의 일인자였던 정창화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한 손에 총을 거머쥐고 탕탕 쏘며 지휘를 했다. 60년대 배우들은 어떤 위험한 일도 본인이 직접 달려들었지만 러브신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2. 자신만의 빚깔을 탐색하며

 

본격 영화의 길에 들어서다 : 1962년 1월 5일 국회의사당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는 63년 1월 30일 공보부 장관으로부처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고 2월 9일자 서울 지방법원 1025의 1호로 법원 등기를 끝냈다. 세종로에 임시 회관을 마련하고 문화예술의 총본산을 자처하며 이해랑 회장이 취임했을 때만 해도 군사정권의 속셈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각 분야의 예술 활동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그 선두를 달리던 한국영화는 1년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어 63년에는 148편이나 되었다. 이는 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예고 하고 있었다.

일본영화의 표절 시비 논란 :

<혈맥>, 삼팔따라지들의 애환을 그리다 : 1960년대 초 '문예영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일본에서 전래된 듯한데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 뜻이 약간 변질되었다. 원래는 문학적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영화화되어 그것이 원작과 버금가는 수준으로 만들어진 것을 가리키는데, 한국에서는 예술성 짙은 영화쯤으로 간주되었다.

<아편전쟁> 촬영 때의 위기일발 :

고정관념을 넘어, 새로움을 찾아 :

 

3.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돌파하며

 

60년대의 한국영화 전성기를 끝장낸 검열 : 한국영화사를 논할 때 많은 이들이 1965년부터 70년까지를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본다. 우선 6년간 총 제작편수가 1,173편을 기록하면서 아시아 영화의 선두에 섰다. 한 해 평균 줄잡아 200편씩이나 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무엇이 그것을 쇠퇴시켰을까, 1.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는 서서히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충무로를 중심으로 집결한 영화인들은 정열적으로 많은 영화를 만들면서 다양한 작품세계를 모색했다. 그러나 공보부가 강력하게 영화법을 시행하면서 영화 발전을 가로막는 착오가 되풀이되었다. 그렇다면 영�법은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것인가. 전국의 극장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영화들은 수급 조절의 한계를 넘어 제작되자 제작사들 간의 경쟁이 야기되었고, 급기야 자율 경쟁에서 패배한 일부 영화인들이 정부의 힘을 업고 영화를 규제하고 나선 것이었다. 가령 증가하는 신흥 제작사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기존 영화사들은 터무니없는 촬영소와 촬영 기재, 녹음실, 전속 감독, 배우를 제작사 허가 조건으로 명문화시키도록 로비했다. 결국 67년에 정부는 12개 제작사로의 통폐합을 강행했다. 이때 영화법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S씨가 끝내 스스로 영화법을 위반해 제작 허가를 취소당한 사실이 있다. 1966년부터 국회와 관계 요로에 영화법을 폐지하라고 영화인협회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특히 이 시기의 영화 검열은 가장 악랄하고 가혹하게 한국 영화감독들의 창작의욕을 분쇄했다. '사상'과 '외설'은 공보부 검열관들의 단골 메뉴였으며 중앙정보부 직원의 동의 없이는 상영 허가가 나질 않았다. 1968년부터 영화 검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완성된 필름이 아닌 각본 심의가 논의되었고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운영했는데, 공보부에는 내규 제35호로 또 하나의 심의위원회가 설치되어 소위 이중각본심의시대가 시작된다.

신부의 수입은 시댁 것이냐 :

<저 하늘에도 슬픔이>, 흥행 기록을 세우다 :

갯마을의 자연 속에 운명을 녹이다 :

신인배우 고은아의 연기를 지도하며 :

일본법을 그대로 베낀 영화법을 반대하며 : 62년 영화법 시행 이전에 영화업자의 수는 65명이었지만, 66년부터 공보부 등록시설기준에 합격한 19개사로 영화사가 정비되었다. 그래서 영화사 등록을 못한 사람들은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고 회사 명의를 빌려 쓰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했기 때문에, 영화업계의 난맥상을 정리할 목적으로 시행된 영화법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헤로인 남정임을 픽업하다 :

 

4. 참신한 영상 언어를 찾아서

 

현역 장교 시절 나의 데뷔작 <공처가> :

대숲을 불태우며 <산불>을 찍다 :

<안개>, 새로운 영상 미학의 시도 :

새마을 시절 반공영화 <고발>을 찍으며 : 1967년 한국영화 제작과 외국영화 수입을 일원화해서 잡음과 혼돈의 충무로에 새 질서를 요구하던 정부가 표면에 나서면서 정책영화, 반공영화제작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정책영화는 소위 새마을 영화로 변신해서 그 후 한동안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멀리하는 데 일조한다. 반공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검열 때 중정 요원이 정식으로 참가해서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였고, 각 제작사에 반공영화 제작을 의무처럼 강요했다. 그리고 12개 제작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흥행성 없는 국책 영화를 만들면서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를 기다리게 되었다. 보조는 끝내 외화 수입 쿼더로 변해 막대한 부를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과 포탄 속에서의 촬영 : 지금은 필요한 지점에 폭발물을 매설해 놓고 극적 효과를 계산하며 촬영하지만, 그때는 실제로 사격 훈련 있는 날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산비탈에 대포알이 날아로는 것을 기다리다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과 하늘을 덮는 흙먼지 속에서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목숨을 걸고 촬영을 감행했다.

한국에서 여덟번째 <춘향>을 찍으며 :

<엄마없는 하늘아래>의 감독 이원세와의 인연 :

영화 제목이 관객을 모독한다고? : 공보처에서 개봉을 일주일 앞둔 <병신과 머저리>의 영화 제목이 관객을 모독하고 있으니 즉각 변경하지 않으며 검열필증을 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5. 영화를 위해 일본, 홍콩, 미국으로

 

위장 합작 범람으로 저질 영화 밀려오다 :

검은 옷의 여인과 신성일 :

타지에서 배운 김치, 깍두기 :

긴바지는 반바지로, 반바지는 핫팬츠로 :

<미완성>을 미완한 채 할리우드를 거닐다 :

영상 속엔 의식이 흐른다 :

전업 감독은 김수용 혼자 :

달빛 아래에서 나체 달리기 :

파리로 떠난 윤정희와 <극락조>를 찍으며 :

요절한 이만희 감독을 생각하며 :

 

6. 검열 속에 꽃핀 영화들

 

아랍 남자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

촬영기사 정일성과의 만남 :

<야행>, 53군데를 가위질당하다 : <야행>은 감독의 계산된 53군데의 연결 고리가 검열의 가위 세례를 받았고 엉뚱하게 편집된 곳은 53의 배가 되는 106장면이나 된다. 이 파괴된 159개의 몽타주는 감독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위의 사기술 때문에 파생된 후유증이었다.

친대통령 영화와 반대통령 영화 :

청와대에서의 영화 검열 소동 :

여류 화가 나혜석을 찾아 1930년대 파리로 :

윤병헌을 윤양하로, 강만홍을 강석우로 :

눈과 함께, 석탄 가루와 함께 :

영화 <물보라>와 배우 금보라 :

 

7. 미래의 영화를 향하여

 

국토를 세로 질러 단풍을 좇으며 :

중광을 만나 <허튼소리>를 찍다 : 관객은 감독보다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전에 말썽 생길 곳을 제거하는 게 영화 검열

최초의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 :

40년 세월을 넘어온 향기, <침향> : 혹자는 스크린쿼터라는 과보호에서 벗어나라고 힐난한다. 하지만 우리 영화가 소재의 제한, 가혹한 검열, 영화법의 시행착오는 있었어도 보호받았던 기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 기업이 한국영화를 살릴 수 있다는 전망은 사라졌다. 그들이 만들어 겨우 관객을 모았다는 지금의 필림 몇 편이 일본 것을 모방했다는 말은 과연 근거 없는 말일까. 영화는 상품이기 전에 그 나라 문화가 용해된 총체적인 예술품이다. 나는 그런 신념으로 또 다음 이야기를 찾아 나설 것이다.

 

발문_말해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영화 감독의 초상 - 김영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