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사람은 누구나 그 무언가를 팔면서 살아간다
우리 재계사에서는 1945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8.15해방 이전을 선사시대로, 그 이후를 역사시대로 구분한다. 다시 말해 1945년 8.15해방 이전의 재계사는 '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 재계사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경계, 그러나 재계도 문법도 엄연히 존재했던, 5백 년 왕조의 몰락에 이은 가혹한 외세의 식민지배와 함께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밀려들어 온 근대화의 경이, 그리고 1945년 8.15해방 전후까지의 격동기를 숨 가쁘게 관통해야 했던, 근대치의 정점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 반세기 동안의 기록이다.
제1부 개항, 조선 상계 종로 육의전의 붕괴
백여 년 전 서울의 풍경
: 불과 백여 년 전만 하여도 서울은 지금과 사뭇 다른 도시였다. 그저 지금의 여의도 두 배 크기에 불과한 아주 작은 도읍이었다. 도성 안에서 가장 넓은 대로이기도 한 이 육조 거리는, 사시사철 언제나 깨끗하게 정비되고 단장된 유일한 도로이기도 하였다. 촌락은 그러한 대로 사이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촌락이 대략 20여 집 정도이면 무슨무슨 동(洞)으로 그보다 좀더 커서 40여 집 정도이면 무슨무슨 계(溪)로, 그보다도 더 커서 60여 집쯤 되면 무슨무슨 방(坊)이라 일컬었는데, 도성 안은 모두 49방 288계 775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더구나 도성 안의 주거 구역은 대부분 세습적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한성이 도읍으로 성장해옴에 따라 근교의 상업적 농업이 크게 번성한 풍경이었다. 한강변의 나루는 취급하는 물품도 제각기 차별화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얼음을 실은 상박이라면 서빙고 나루로, 한강을 건너 새로이 난 신작로를 따라 과천.금천.광주.수원 등지의 읍 쪽으로 가려 한다면 한강 나루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이며 어염을 실은 상박이라면 관료들의 녹봉을 지급하는 광흥창이 자리하고 있는 마포 나루나 서강 나루로, 서해에서 막 잡아 올린 퍼덕거리는 싱싱한 활어는 으레 양화 나루로 가야 했다. 그렇더라도 경강의 으뜸 나루는 뭐니 해도 마포 나루였다.
격증하는 도성 안 일본인들
: 한성에 외국인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때가 1880년(강화도 조약 이후, 하나부사요시모토 공사가 부임함) 4월이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도성 안에 주둔할 수 있게 된 것은 임오군란을 트집 잡아 강압적으로 체결한 제물포조역에 근거한 것이었다. 더욱이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도성 안에 한꺼번에 상주하게 됨에 따라 그들을 위한 물품을 조달한다는 구실로 자국 상인들까지 불러들이게 되었다. 조선 정부가 제물포조역에 따라 통상을 허락한 시장은 진고개 일대가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 경강의 맨 마지막 포구라 할 수 있는 양화 나루 일대로 한정하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은 허락된 지정 시장을 외면한 채 일본 공사관을 따라와 그 발치에 있는 진고개 일대, 그들 말대로 혼마치에 집단으로 터를 잡았다. 청나라와의 전쟁(1894년)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전쟁에 패하면서 청나라 상인들은 앞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일본 상인들은 청나라 상인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를 사분사분 재빠르게 채워나가며 도성 안 상권을 선점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또한 일본 상인들은 식민 지배 의욕도 꾸준히 펼쳐나갔다. 자신들의 이익 집단인 거류민회나 상업의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진고개 일대를 근거로 한 일본인 시가지도 점차 조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자신감마저 부쩍 붙은 일본 상인들은 같은 해 2월 경상의회를 조직했다. 그리곤 그러한 조직체를 발판 삼아 한성 상계에서 자신들의 세력 확장도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서가는 의욕과는 다르게 당시 한성에서 일본 상인들의 활약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우선 개항 초기에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 상인은 대개가 일확천금만을 꿈꾸고서 건너온 무지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상거래에서 불미스러운 속임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 결과 좀처럼 신의를 얻을 수 없었다.
개항으로 급조된 인천 제물포
: 개항장 제물포의 상권은 처음부터 일본 상인들이 대부분 독점하고 만 상태였다. 그러나 개항장 제물포에는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 상인들만이 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집단 거주지의 건물 모양새부터가 청나라나 일본과는 판이한, 멀리 서구에서 건너온 서양 상인들 또한 적지 않았다. 개항장 제물포의 주인은 처음부터 조선인이 아니었다.
5백 년 전통의 조선 상계 '종로 육의전'
: 조선왕조는 국초 이래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농업을 널리 장려한 반면에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그리하던 무본억말의 근간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15세기 후반에 들면서였다. 조선 건국 이래 삼항이 개항될 때까지 무려 5백여 년 동안이나 조선 상계는 전통적으로 도성 안 종루통(지금의 종로)의 육의전이 전부였다. 육의전이라 함은 도성 안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종루 네거리 일대에 자리한 여섯 시전을 일컬었다. 종루 육의전의 시전 풍경 또한 남달랐다. 웬만한 집 서너 채를 일렬로 잇대어 놓은 것처럼 모두가 하나같이 길쭉길쭉한 기와집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 쪽에 면해 있는 정면 앞칸이 상품 진열장과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는 쓰임새라면, 좁고 긴 통로를 따라 여러 작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뒤칸은 주로 상품을 쌓아두는 창고로 이용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전들이 종루통을 중심으로 자그마치 3천여 칸이나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종루 육의전은 엄청나게 컸다. 가히 '조선의 만물상'이라고 부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종로 육의전, 금난전권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 종루 육의전이 관설로 이루어진 만큼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시전 상인들은 반드시 일정한 국역(국가에서 백성에게 지우던 부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들이 부담해야 할 국역은 상세(상업세)와 공랑세를 내고 책판, 잡역 등을 맡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허가받았다. 조정에서는 종루 육의전으로부터 필요한 국역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자금을 대여해주기도하고 외부로부터 이들 상권을 보호하고자, 그들 이외 모든 상업 활동을 불법 행위로 여기고 금지한다는, 이른바 금난전권과 같은 별도의 특권을 시전 상인에게 부여했다. 그 결과 육의전은 국초 이래 굳건한 조직체를 형성해올 수 있었다. 여기서 금난전권이라 함은 난전을 막을 수 있도록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내어주어 금지케 한다는 특혜였다. 그 특혜란 다른 게 아니었다. 종루 육의전의 시전들이 난전을 막을 수 있도록 집단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무뢰배들을 고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굳건한 조직체를 형성했다 하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 신분제의 변동과 같은 누적된 요인으로 말미암아 철옹성으로 불리던 조선 상계도 점차 바람을 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가로부터 허락받은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 말고도 경강 상인들 같은 사상인이 증가하게 되었다. 결국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사상인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개항으로 붕괴된 종로 육의전의 최후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면서 '식유민천(食有民天)', 곧 백성의 기본적인 호구는 충족시켜야 한다는 유교적 이념에서 정조 연간(1791년)에는 일반 백성이면 누구라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 이른바 '통공정책'을 실시하고 나선다. 그렇다라도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들도 다 한성 바깥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조선 상계를 대표해 오던 종루 육의전을 끝내 붕괴시키고 만 직접적인 이유는 정작 다른 데 기인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1883년 인천 제물포의 개항은 종루 육의전의 붕괴를 더욱 빠르게 가속한 동력이 되었다. 그러던 개항장 제물포에 난데없이 나타난 '검은 괴물'의 출현은 또 다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화륜거 또는 철마라고도 불렸던 검은 괴물 기차의 출현은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근대화의 물결을 싣고서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턱밑까지 한달음에 들이닥치게 하였다.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노량진으로 개화 물품을 한달음에 속속 길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5백여 년 동안이나 조선 상계를 지켜오던 종루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그만 하루 아침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 '대창무역'
: 한일병합 직후인 1911년 <시사신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 50만 원(지금 돈 약 600억 원) 이상을 소유한 자산가는 모두 32명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왕족이거나 관료 출신의 한성 양반 계급과 지방의 토착 토호들이 대부분이었다.
제2부 5백년 '한성'에서 상업 중심의 근대도시 '경성'으로
변모해 가는 한성, 도심 속을 달리는 전차
: 1893년 4월 한성영사 스기무라후카시는 일본의 외무성에 1,300만 조선 민중을 동화시키려면 단지 정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면서 방인(일본인)을 이식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했다. 이어 그는 '조선 같이 유치한 상업계의 현상을 고려해 볼 때 고상한 무역사업을 통해 거래의 발달을 도모하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부분부터 침투해 들어가 근저를 견고히 하는 일이 상책일 듯하다'고 전제하면서 자국의 상인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그러고서 일본은 1905년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전통적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던 조선 상계의 어음 거래를 전면 금지해 한낱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한편, 말도 안되는 구화폐와 신화폐의 환전을 사보타주함으로써 가뜩이나 허약한 조선 상계의 목줄에 마지막 올가미마저 죄어 걸었다. 결국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상권은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한성의 모습도 크게 달라져 갔다.
강철 같은 별표고무신에서 '떳다, 보아라' 안창남까지
: 상인들의 눈에 제물포 개항장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개화 상품들은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코 인기 품목은 고무신이었다. 착용감이 좋고 오래 신을 수 있는데다, 겉모양도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나 신던 갖신이나 비단신과 다를 것이 없어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런 고무신도 처음 들어올 적부터 우리 입맛에 딱 들어맞았던 것은 아니다. 개항장 제물포를 통하여 들어온 일본 고무 단화는 '호모화'라 하여, 바닥창만 고무이고 그 나머지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구두 모양을 한 것이었다. 한데 이러한 구도 모양을 한 일제 고무 단화를 오늘날과 같은 고무신 모양으로 바꾸어 대박을 터뜨린 사람이 이병두였다. 그는 남자 고무신은 전통적인 짚신 모양을 본뜨고, 여자 고무신은 앞머리가 불록하게 솟아오른 코신을 본떳다. 우리 발에 알맞도록 폭은 과감히 넓히고 굽은 크게 낮추되 발등을 드러내서, 이른바 우리의 체질과 환경에 적합한 '조선식 고무신'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이처럼 조선식 고무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덩달아 고무신 공장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21년에 고작 2개에 불과하던 고무신 공장이 1933년에는 무려 72개로 늘어났다. 생산액도 1920년에는 고작 4,000원에 불과하던 것이 1935년에는 984만 5,000원으로 무려 거의 2,500배나 껑충 뛰었다. 고무 제품의 95% 이상이 고무신일 정도였다.
유행을 키운 활동사진. <몽 파리>
: 1920~30년대 신문 지면을 살펴보면 경성의 거리 풍경도 사뭇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새로운 시대로의 불길을 댕긴 것은 '유행'이었다. 유행의 형성에는 다른 무엇보다 활동사진의 역할이 컸다. 암상이라 불렀던 사진관이 조선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896년이었다. 비록 흑백사진이기는 하였으나, 영친왕 이은의 시종장을 지낸 김규진과 그의 양자 김영선에 의해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활동사진은 그보다 7년 뒤인 1903년 6월 즈음에 처음 선을 보였다. 당시 한성 거리의 전차 증설 공사를 맡은 한성전기회사가 동대문 근처에 있는 전차 차고 겸 발전소 부지에서 활동사진을, 그러니까 서구에서 들어온 토막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전차 증설 공사장의 근로자들을 독려하고자 상영하던 것이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일반인도 입장료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개방한 것이었다. 당시 활동사진전람소라야 순전히 노천극장이었다. 이처럼 노천극장으로 출발한 활동사진전람소는 밀려드는 관객의 성원에 힘입어 이내 관람시설을 갖춘 전문 영화관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데 이어, 1918년 무렵에는 황금관, 우미관, 단성사 등이 잇따라 개관했고, 1922년에는 조선극장까지 가세하면서 영화는 어느덧 명실상부하게 경성문화의 한 축을 담당케 되었다. 변사로 말미암아 경성 극장들은 일본인 입국자가 늘어나던 1910~1920년대엔 지역적으로 양분되기도 했다. 종로 쪽에서는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삼파전을 벌이는 한편, 남촌에서는 을지로 쪽의 황금관, 대정관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그들 극장이 관객을 따로 구분해서 받은 건 아니었다.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지면서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진 것이었다.
돈 놓고 돈 먹기, 불 붙은 금융업
: 전당포는 구한말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로소 성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외래 자본, 그 가운데서도 일본 자본이 유입되면서 그 수효가 급격히 증가했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전당포 영업도 보다 발 빠르게 진화해 나갔다. 무전 대금, 다시 말해 무언가 전당을 잡히지 않고도 돈을 빌려준다는 신문 광고가 곧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전당포 업소도 급격히 증가하여 1927년 9월 말에는 조선인 799명, 일본인 606명, 외국인 1명 등 총 1,406명이 전당포업에 종사하고 있을 만큼 그 수가 크게 증가했다. 전체 인구가 30만 명이 채 되지 않은 경성 거리에 '돈을 빌려 준다'라는 전당포 간판이 곳곳에 나붙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당포 영업이 활개를 치게 된 데에는 일제의 의해 왜곡된 조선의 경제구조 탓이 무엇보다 컸다.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근대 건축물
: 5백 년 유규를 자랑하던 한성, 아니 경성을 크게 변모시켜 놓은 풍경은 뭐니 해도 거리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우뚝우뚝 세워지는 낯선 근대 건축물, 곧 '삘딩(빌딩)'이었다. 1906년에 이미 탁지부(지금의 재정경제부)에 건축소를 설치한 데 이어, 이듬해 4월부터 마포의 연와제조소에서 벽돌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08년에 독일 호프만식 벽돌을 생산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기계식 대량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경성의 모습이 크게 변화된 주된 원인은 일제가 경성을 대륙 침략의 중간 거점으로 이용할 속셈이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5백 년 도읍의 상징성을 말살시키려고 건춘물을 강제 철거시키거나, 도시 구조를 변화시키는 등의 행위로 말미암아 서울의 모습을 크게 망가뜨려 놓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주요 관청의 소재가 경성부(지금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반경 1km 이내에 모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이런 관청 배치 계획은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정부가 시도했던 '일본교 중심 10리 사방의 양식화'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아울러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폭도로부터의 방어와 효율화'를 기도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제는 1912년 경복궁 부지 안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설하기로 하고, 1916년에 착공하여 1925년 12월 신청사를 준공하였다. 건물을 지어 올리는데 필요한 화강암은 예부터 도성을 지켜준다고 믿은 '현무(북한산)', 청룡(낙산), 주작(남산), 백호(인왕산)' 가운데 동쪽의 방위산인 낙산(동숭동 대학로 뒷산)의 절반가량을 무너뜨려 조달했다. 또한 총독부를 건축하면서 당시 경복궁 안의 전각과 대문, 중문, 당 등 아름답고 다양한 궁중 건축물들을 무수히 해체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얼핏 보면 일본 도쿄에 자리한 국립박물관 안의 표경관과 매우 유사하게 닮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던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립 당시에는 난간에서 기총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실제로 각 층의 양쪽 끄트머리 방에는 1개 부대가 주둔하면서 경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제3부 경성의 젊은 상인들, 종로 거리로 돌아오다
나라가 망하자 잡화상점 차린 왕족
: 일본 상인들이 남촌의 진고개 일대, 곧 혼마치에서 상업에 하나 같이 성공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유리였다. 그들의 상점은 유리로 만든 투명한 진열장으로 되어 있어 더욱 많은 손님들을 불러 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개화경 장사로 종로 상권에 다시금 진출하다
: 김재덕은 1900년대 초반 지금의 종로 보신각 맞은편(옛 화신백화점 자리)에 유창상회를 열었다. 대모테 안경을 쓰고 젬병 모자를 눌러쓴 모던보이를 위해 가장 먼저 금은세공과 함께 안경 전문점을 낸 것이다.
경성의 자동차 왕, 민규식에서 방의석까지
: '쇠당나귀'라고 불렀던 자동차가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용으로 영국제와 프랑스제 자동차 한 대씩을 들여왔다. 그러면서 1919년경에는 경성 시가지를 누비는 자동차가 50대 안팎으로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2년에는 부산, 마산, 진주로 연결되는 경남 해안선 신작로에 버스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최초로 택시 영업을 한 사람은 1917년 민규식이다. 하지만 택시는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요금이 너무 비싸 서민들은 감히 엄두조차 못 냈다. 그런데도 택시 드라이브는 '시내 요정 가튼 헤서 권태감을 늦기는' 일부 부유층에세는 신바람나는 색다른 취미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의 3대 재벌 김성수.민영휘.최창학
: 당시 재계 순위를 보노라면 그 결정하는 방식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을 하야 땀을 흘린 갑으로 치부를 한' 재산 형성 과정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조선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고스란히 예금을 해두고 있어 당장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고려되었다.
은행장 박영철, 민대식, 김연수의 하루
: 은행은 장안의 부호들이 가장 선망하는 산업이었다. 그래서 내놓으라하는 경성의 부호들이 너도나도 은행업에 뛰어들길 원했으며, 따라서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산의 규모 또한 꽤 큰 편이었다. 경성에서 제법 규모를 갖춘 민족 자본 은행이라야 박영철 소유의 조선상업은행, 민대식 소유의 동일은행, 그리고 김연수 소유의 해동은행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이 세 은행장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장안의 화제였다.
조선극장과 단성사의 흥행전, 명월관과 식도원의 요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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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지하 금고와 조선총독부 월급 3백만 원
: 조선에서 월급을 가장 많이 지급하는 곳은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이며,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하고 있는 순수 월급 총액은 매달 333만원(지금 돈 3,996억 원), 한 해에 약 4,000만 원(지금 돈 4조 8,0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라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액수를 조선총독부 산하 직원 약 4만, 6,000여 명이 탔다고 한다. 한 사람당 한 달 평균 72원(지금 돈 864만 원), 일 년이면 915원(지금 돈 1억 98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현대 '쌀라드맨'의 수입과 경성의 자동차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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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사장 월급 5백 원, 4만 원 저축하는 기생
: 적어도 당대 신문사 사장이라고 한다면 경성 바닥에선 조선총독 한 사람을 빼놓고서는 어느 자리도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할 만큼 명실 공히 최고의 급료를 받는 자리였다. 실제로 매일신보 사장의 월급이 500원, 부사장 월급이 수당과 사택료까지 합쳐 350원 정도였다. 지금 돈으로 6,000만원에 4,200만 원 수준의 월급이니 보면 가히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한데 이런 신문사 사장의 월급보다도 무려 수십 배나 되는 거액을 저축하는 이가 있다 하여 경성 바닥이 발칵 뒤집혔다. 어디 요릿집인지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기생 8명이서 매달 125만원(지금 돈 1,500만 원)씩 꼭꼬 정기적금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5,000원(지금 돈 6억 원)짜리 은행 정기적금을 들고 있다는데, 이들 가운데는 벌써 5,000원에 거의 육박한 이도 있고 아직은 시작 단계에 있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이들 8명 말고도 경성의 화류계에서 돈 많이 모은 기생들이 꽤 된다는 소문이다.
<사의 찬미>, 40만 장 팔려나가는 레코드업계
: 근대 가요는 유성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조선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비록 '배가 고파서 쓰러질' 망정 너도나도 유성기를 사들여놓고서, 저녁이면 일본 젊은 연인의노래 <기미고히시(그대 사랑해)>를 온 가족이 따라 부르는 것이 당시 경성의 또 다른 풍경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다시 서양음악까지 들어와 이내 대중화되면서, 겨성의 거리에는 공공연하게 '딴스(댄스)'까지 크게 유행했다. 이쯤 되자 음반 산업도 덩달아 성장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에서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 한 해 동안 팔리는 레코드 장수가 무려 120만 장에 이른다.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레코드 한 해 판매 120만 장 가운데 1/3인 약 40만 장가량은 다름 아닌 조선의 소리판이었다. 이것을 시장 판매가로 환산해 보면, 음반 한 장에 평균 1원씩만 쳐도 어림잡아 40만 원(지금 돈 480억 원)대의 음반 판매 시장이 건재했다는 이야기다.
최초의 토기-영화 <춘향전> 첫 날 흥행 1,580원
: 경성촬영소가 제작한 <춘향전>은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데, 입장료가 각기 일등석 1원(지금 돈 12만 원)과 이등석 70전(지금 돈 8만 4,000원)으로 비교적 비쌌음에도, 개봉 첫날 흥행 수입이 1,580원(지금 돈 1억 8,960만 원)에 달했다.
60만 원 던져 호텔 짓는 여사장 김옥교
: 1935년대 중반 무렵 60만 원(지금 돈 720억 원)이라면 결코 만만한 자금 투자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시작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다. 한데 이러한 호텔 건설을 선언하고 나선 이는 장안의 어떤 유력한 기업가도, 재벌도 아니다. 이제 갓 서른두셋에 불과한 젊은 여사장, 김옥교였다.
'종로삘딩'과 '한청삘딩'의 양보 없는 빌딩 쟁탈전
: 1930년대 경성은 때아닌 건축 붐으로 요란스러웠다. 그러면서 경성 북촌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종로 네거리와 광화문통에 난데없는 빌딩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두 빌딩 세력은 공교롭게도 종로 네거리에서 서로 빤히 마주 보고 있는 양보합명회사의 '종로삘딩'과 한청사의 '한청삘딩'이었다. 이 밖에도 1930년대 중반에 이르게 되면 고층 빌딩을 짓겠다고 나선 이가 그들 말고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사마저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꿈의 노다지, 1억 원의 운산광산
: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불어 닥친 금광 열풍은 한반도 전역을 번쩍이는 황금빛으로 들뜨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어처구니없는 일시적 유행으로 가볍게 인식하고 있던 지식인들까지 금광이 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자 슬그머니 열풍에 편승했다. 이 때문에 당시 신문과 잡지에도 '금광계 관련란'이 따로 만들어졌다.
금광왕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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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지 꿈 이룬 간호사 출신의 금광 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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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광산 광부들, 습격 폭파사건 현장
: 1930년대 황금 열품은 이처럼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친 벼락부자들을 숱하게 등장시켰다. 대공황의 무려감 속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호황을 구가했던, 그리하여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경성 상계에도 일정 부분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 또한 사실이다.
동척으로 넘어가고 만 노다지 꿈의 에필로그
: 1930년대 막바지에 접어들게 되면 금광에 관한 세간의 관심사도, 신문 잡지의 금광계 관련 소식도 시나브로 종적을 감추고야 만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자본이 취약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찍이 조선에서 광대한 토지를 갈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운영 자금에 목말라 하는 영세한 조선 광주들에게 달콤한 도배를 들게 하여 금광마저 강탈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막바지에 접어들게 되면 노다지의 꿈마저 잃어버린, 깊도고 깊은 지옥같은 땅굴에서 두더지보다고 못한 '막장 인생'의 서러운 시름과 처절한 절규만이 날로 늘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1천만 원대 정어리 어업에 몰려든 부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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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종로 화신백화점 vs 혼마치 미쓰코시백화점
24살 청년, 지물업 사장으로 입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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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은 흥정을 벌일 때 그 면모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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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 조선 최대 백화점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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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백화점 인수 비결은 '미인계'
: '상점의 왕' 백화점을 갖고 싶다는 꿈은 크든 작든 간에 종로 거리에 상점을 가진 상인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그러한 생각을 할만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백화점 형태의 상점 경영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하여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일본 상인들의 막대한 자본력에 도저히 맞설 수가 없는데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상품을 직접 들여올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이 얼토당토 않는 일수판매 제도를 구축해 놓아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의 도매점에서만 상품을 사다 파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박흥식, 미쓰코시.조지야.히라다.미나카이에 도전하다
: 상점이 가장 많이 밀접한 지역은 혼마치 거리 1정목과 2정목이었다. 1936년 당시 상점 수는 487개(혼마치 1정목에서 4정목까지의 합계)였다. 그 가운데 92%인 449개 점포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그 지역은 완전히 일본화 된 상점가였다. 이처럼 남촌의 혼마치를 '일본인 거리'라고 한다면, 종로 1가에서 3가까지는 '조선인 거리'였다. 종로 1가에서 3가에는 총 542개 점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93%인 502개 점포가 조선인 소유였다. 이들 상점은 1926년에서 1933년까지 약 10년 간에 걸쳐 전체 상점의 80%가 개업했는데, 특히 1931년 이후 5년 동안에 64%인 347개 점포가 집중적으로 개점했다. 이런 상점의 개점은 만주국의 뒤늦은 건국으로 조선 경제의 호황과도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1932년 화신백화점이 개점하면서 고객 점유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북촌의 종로 거리는 경성 제2의 상점가로서 남촌의 혼마치에 대항할 수 있는 거점 확보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또한 종로 거리에선 추운 겨율을 제외하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곧잘 야시장이 빈번하게 열려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장소가 되기도 했다. 남촌 혼마치와 북촌 종로 거리의 상가는 본질적으로 서로 양문되어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경쟁 관계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관계에 불을 붙인 것은 두 지역 상권 간 집객력의 차이였다. 4대 백화점의 자본금도 엄청났다. 1935년 당시 화신백화점의 자본금이 겨우 100만 원(지금 돈 1,200억 원) 수준인데 반해, 도쿄에 본점을 둔 선두주자 미쓰코시가 3,000만 원(지금 돈 3조 6,000억 원)으로 무려 서른 배에 달했다. 물론 나머지 조지야, 히라다, 미나카이 역시 화신백화점보다 휠씬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다.
대화재에 휩싸인 화신백화점의 화려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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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상계의 자존심, 종로 네거리의 상가 풍경
: 미쓰코시백화점이 12만 6,000명, 화신백화점이 11만 7,000명, 조지야백화점이 9만 5,000명, 그리고 미나카이와 히라다백화점이 그 뒤를 잇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경성 인구가 40여 만 명 남짓인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백화점을 찾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서열은 그 뒤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이렇다 할 큰 변동 없이 그래도 이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제5부 8.15광복, 명멸하는 상계의 새 판도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 1945년 8월 15일부터 23일까지 일본인 경찰에 대한 폭행 건수는 조선 전체에서 고작 66건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치는 조선인 경찰에 대한 폭행 건수 111건에 비해 약 60% 수준이었다. 민간 일본인에 대한 폭행 사건도 같은 기간 80건으로, 민간 조선인에 대한 60건보다 기껏 20건이 많았을 따름이다. 1876년 고작 54명이었던 재선 일본인이 1945년에는 71만 2천 5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여기에다 만주에서 쫓겨온 숫자까지 합치면 8.15광복 직후 재선 일본인은 어림잡아 1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이 가운데 이듬해 말까지 89만 6천 명이 돌아갔다. 나머지 1961년까지 귀국한 숫자는 2만 3천여명이었다.
'동척.의 85개 계열 기업, 폐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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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 박흥식 '반민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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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복구, 다시 찾아온 황금빛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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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상계의 새로운 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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