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패자의 역사], 구본창, 채륜, 2008, (080928).

바람과 술 2008. 9. 28. 21:29

이 책을 읽기에 앞서 - 역사학이여, 박물관을 박차고 거리로 나오라!

 

제1부 승자가 왜곡한 역사적 진실들

 

백제의 의자왕은 삼천 궁녀를 둔 적이 없다

 

삼천 궁녀는 완전한 허구

: 삼천 궁녀의 존재가 허구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1. 백제 멸망 당시 수도인 사비성 인구는 5만 명에 불과했다. 2. 현재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당시 왕궁 터의 넓이를 따져 봐도 삼천 궁녀의 존재는 허구다. 3.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 어느 곳에도 의자왕의 삼천 궁녀에 대한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 의자왕과 삼천 궁녀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천 년이 지난 조선 중기 문인들의 시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삼천 궁녀의 존재가 대중에게 인식된 것은 일제시대 대중가요에 삼천 궁녀란 가사가 들어가면서였다.

너무나 억울한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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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의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복군주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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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의 결정적 이유

: 700년 제국 백제가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자왕의 통치 속에 부강했던 백제도 당과 신라의 연합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왜 의자왕은 당과 적대관계에 서게 되는 위험한 길을 선택하였는가? 1. 한강유역 재탈환은 의자왕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의지이자 숙원사업이었고, 이 지역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2. 의자왕은 당과 고구려 두 나라가 대등한 힘을 갖고 맞서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삼국통일! 당나라 주연, 신라 조연의 드라마!

 

당과 신라의 관계

: 삼국 중 국가 규모와 인구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신라에게는 장기적으로 스스로 힘을 길러 해결하러 들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외교 관계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고,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당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에 국운을 걸게 되었다. 신라는 당의 보호를 받기 위해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복식과 연호까지도 바꾸었다. 결국 신라는 당에게 철저한 사대정책을 취하고 있었고, 당과의 관계 단절은 곧 신라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정확히 인식해야 할 사실은 당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에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요구했었고, 신라가 그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쟁

: 역사는 나.당 연합군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신라는 당의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 역할만을 주로 했고, 실제로 신라가 참전해 전투를 한 것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주도했다고 보기 힘든 분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1. 신라가 고구려와 전쟁한 적이 없고, 백제와 벌인 전쟁도 황산벌 전투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나라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까? 2. 당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통치를 위해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신라는 그것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60년에 안동도독부를 설치했고, 이에 대해서도 신라는 당의 조치에 대해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었다. 신라 주도의 삼국통일이었다면 신라가 이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676년 신라가 당과 전쟁을 벌인 것도 당이 백제와 고구려 땅을 전부 차지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전쟁이 아니었다. 그 발단은 당이 마침내 신라 땅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를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은 넌센스

: 당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려 들었다. 결국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시작한 16년간의 전쟁으로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는 당이 차지한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자리 잡게 된 배경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역사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일본이 그대로 남겨둔 책이 바로 [삼국사기]다. 일본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라는 저서에서 '신라 삼국통일'로 정의 내린 것을 친일사학자들이 비판 없이 수용하였고 '신라 반도 통일론'으로 정착한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

: 일본인 역사가들이 신라 삼국통일론을 주장한 이면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만주를 평정한 발해 역사를 한국사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것이었다.

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삼국통일의 의의에 대한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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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그는 위대한 장군인가?

 

천관녀 일화를 통해 바라본 김유신 장군

: 어찌 보면 김유신은 어머니 말만 듣고 사랑을 저버린 '신라의 마마보이'가 아니었을까? 

고정관념을 깨야 참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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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신분해방을 외친 만적

 

사람이 아니었던 고려시대 노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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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는 무관했던 광종의 '노비안검법'

: 고려 초기인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노비안검법은 노비 해방이 아니라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환원하여 주는 제도였다. 광종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들의 신분을 원래대로 회복� 주는 노비안검법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그 결과 호족들의 사병을 감소시켰으며, 양인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국가수입이 늘어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강력한 군주였던 광종이 죽고 나자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의 지속적인 반발로 결국 폐지되고 만다.

혁명의 햇불을 치켜 든 노비 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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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혁명에 대한 평가

: 만적의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만적의 경우처럼 체제 자체에 도전한 적은 없었고, 그저 기득권층의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는 차원에 머물렀기 대문에 만적의 난은 아래에서 일어난 민중주도의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둘째, 엄격한 신분체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만적이 역사적 주목을 받지 못해 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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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을 단행했던 개혁군주 공민왕

 

공민왕의 귀국과 개혁의 시작

: 공민왕은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대외적으로 반원 노선, 대내적으로는 왕권강화 정책을 선언한다. 그래서 1352년에 변발과 몽골식 의복 등 몽골 풍속을 폐지하였고, 귀족들의 권력형 횡포로 인한 토지 독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시작한 공민왕의 초기 개혁은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의 간섭과, 몽골의 실권자 기황후의 친오빠였던 기철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 보수세력의 견제와 방해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원의 몰락 조짐과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시도

: 1356년, 명의 주원장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몽골의 몰락 조짐이 확실해지자 공민왕은 개혁을 위한 조치를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단행하였다. 공민왕은 몽골식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였고, 몽골이 고려를 내정 간섭하기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최대 개혁 저항세력이었던 기철을 중심으로 한 친원파 세력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공민왕에게 이용당한 신돈

: 공민왕은 개혁을 추진할 책임자로 신돈을 선택하였다. 그기 신돈을 선택한 이유는 개혁 대상인 귀족세력과 아무런 연고도 맺지 않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돈을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임명하여 불법으로 빼앗은 귀족들의 토지를 원래의 주인인 농민들에게 돌려주게 했고, 동시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농민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회복시키도록 했다. 신돈을 앞세워 보수 세력의 힘을 누르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상황이 변하자 신돈을 제거하기에 이르는데, 상황의 변화는 다음의 세 가지 였다. 1. 신돈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추종 세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자, 왕권을 위협하는 잠재 도전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공민왕은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2. 공민왕은 신돈의 개혁으로 귀족 세력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토지개혁 과정에서 신돈에게 증오를 품게 된 귀족 세력과 숭유억불 정책을 구상하여 신돈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신진사대부들로부터 굳이 신돈을 감싸고 돌 이유가 없어졌다. 3. 공민왕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 세력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무인 세력의 중용은 곧 신돈을 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개혁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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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눈에 비친 신돈은 미륵불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 신돈

: 신돈은 농민들과 노비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았으나, 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는 '요승'으로 비판받으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철저한 비주류였던 신돈

: 신돈은 경상남도 창령의 옥천사라는 절에서 사노인 어머니에게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신돈의 개혁 추진

: 공민왕에게서 개혁의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1. 기득권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2. 개혁 추진세력을 결집시키고 조직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민변정도감은 귀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토지를 감시하는 기구로 일정기한 내에 자진신고하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도 원래의 신분으로 원상복구 시켜주면서 토지 소유자의 죄를 묻지 않지만, 신고하지 않은 대토지 소유자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신돈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제거만으로는 개혁이 불온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세력을 양상하였다.

위에서 시작한 개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 신돈의 개혁은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개혁이 아니라 왕의 지지와 후원에 기댄 위에서 시작한 개혁이었기에 언제라도 왕이 기득권층과 타협을 보는 순간 모든 개혁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일반 백성들이 신돈을 열렬히 지지하자 공민왕은 신돈 역시도 언젠가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선 유일한 신하는 선비가 아니라 내시였다

 

일곱 명의 왕을 섬긴 내시 김처선

: 김처선은 모든 선비들이 연산군의 폭정에 숨죽이며 눈치만 살필 때 목숨을 걸고 직언했지만, 내시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당시에도 그렇고 그 후대로도 별다른 역사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 연산군의 악행을 말할 때마다 등장하는 월산대군 부인은 승자들이 철저히 왜곡하여 기록한 대표적인 사례다. 아래의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이것이 왜곡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월산대군 부인은 독실한 불자라는 이유로 유교를 떠받들었던 대신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숭유억불정책에서 제정해 놓은 '부녀자 사찰출입 금지' 법령이 월산대군 부인 때문에 무의미해질 상황이 된 것이다. 2. 인수대비는 생모가 없는 연산군의 보호를 자신의 큰며느리인 월산대군 부인에게 맡겼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연산군은 어린 시절 월산대군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또 자신의 세자를 맡아 기르도록 한 곳도 월산대군 부인의 집이었다. 연산군은 왕이 된 이후에 자신에게 친 어머니와 다름없던 월산대군 부인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며 효자노릇을 했다. 월산대군 부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에 오르며 출세했던 박원종은 자신이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을 주도한 것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죽은 누나를 팔아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정여립 난은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조작사건

 

왕위 세습을 부정한 학자,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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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의 발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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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사건의 파장

: 선조는 선왕의 유명을 받지 못하고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의 권위가 이전보다 아주 약했다.

정여립 사건의 조작 의혹

: 정여립 사건은 조선 최대의 정치조적 사건으로 그 파장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여러 정황을 따져보면 조작된 사건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점들이 너무 많다. 1.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물적 증거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2. 대동계는 반란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었다. 대동계는 관의 요청에 협조하던 공개된 조직이었다. 대동계가 반란을 위한 조직이었다면 어찌해서 정여립이 대동계라는 막강한 무장조직을 데리고싸움 한번 안 해보고 도망쳤겠는가? 3. 정여립이 죽도에서 역모 사건이 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서인이 보낸 민인백에게 살해된 것이다. 4. 정여립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도 전주인데 당시의 교통사정상 전라도와 황해도의 거리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전라도에서 꾸며지고 있는 역모를 황해도의 관리가 알아내고 고발까지 할 수 있었을까? 5. 정여립의 정적이었던 송강 정철은 정여립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고발이 있던 날, 아무도 정여립의 반란을 �지 않던 상황에서 정철은 정여립이 도망쳤다는 사실까지 알수 있었을까? 6. 당시 조선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동인 세력의 실세안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7.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명예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정여립에 대한 평가

: 정여립이 활동했던 당시의 조선은 내부적으로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하여 민중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있었고, 대외적으로 일본과 여진의 침략을 앞둔 총체적 위기의 시기였다. 정여립이 이런 상황에서 채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 세력과 기존의 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려하는 보수의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진보의 편에 섰던 인물이다. 당시의 정여립 사건은 오로지 명분과 신분질서에만 집착하는 당시 성리학의 흐름에서 탈피해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민중들을 돌보려는 개혁 세력의 대안모색과 노력들의 단번에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을 의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선조는 이승만에 버금가는 비열한 군주였다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의 나약함과 비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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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의병장을 죽이려 한 이유

: 조선은 지방의 수령이 입법, 사법, 행정권을 모두 가질 만큼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한 체제였다. 그래서 지역의 민심이 왕에게 등을 돌리기만 하면 곧바로 지방 반란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 사회구조였다.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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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전사설에 대한 의혹

: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순신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몇 가지 있다. 1. 적의 흉탄을 맞은 후 작전권을 조카인 완에게 이양하고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실전 경험이 없는 조카에게 명과의 연합군 작전권을 맡겼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2.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숫자가 소수인데 전사자 중에는 이순신을 비롯해 이영남, 이언량 등 임진왜란 해전의 전쟁 영웅들이 대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전세가 유리했고 승리한 전투에서 한꺼번에 전사한 것은 우연일까? 3. 이순신의 죽음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것은 그의 아들과 조카 이외에는 없었다.

 

광해군은 개혁군주로 재평가 받아야 한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오해들

: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의 죄목을 아래와 같이 단정하고 있다. 1.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것은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편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죄악으로 단죄한 것이다. 2.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 3.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영창대군을 죽인 것과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 1618년 명은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다급해진 명은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명령한다. 명의 명령에 대해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1년을 끌다 마지못해 1619년에 지원군을 파병하게 된다. 광해군이 이렇게 명의 파병 요구에 고의적으로 지연작전을 쓰며 응하지 않으려 한 데는 두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 당시 조선도 임진왜란 이후 전후복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인지라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2. 명의 편에 적극적으로 서게 될 경우 새로운 강자 후금의 침략을 받을 위험성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대대적인 궁궐 복구

: 광해군이 대대적으로 궁궐을 지은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1. 임진왜란 이후 전후복구사업의 일환이었다. 2. 왕권강황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인목대비 폐비사건

: 대동법을 통한 광해군의 개혁정치에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세지던 시점에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네 그 배후에 영창대군이 연루되자 광해군은 왕권 도전에 대한 불씨를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을 처형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인조반정의 실질적 원인

: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실제적인 원인은 광해군의 개혁정치로 상당 부분을 잃었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었다. 즉위 이후 왕권강하를 시도했던 광해군은 탄탄하게 다져진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성향의 북인들을 대거 기용하게 된다. 광해군이 시행한 개혁정치의 핵심은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의 취지는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땅을 가진 지주에게만 쌀로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있었다. 명에 대한 오랜 사대정책에서 벗어나려던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기득권층의 불만과 불안을 가중시켰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는 속국인 체제에서 기득권을 기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당연한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명의 오랜 지배 속에서 기득권자의 사대주의는 단순한 사상의 고루함이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상적 무기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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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노무현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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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북벌론, 왕권은 안정됐지만 백성들은 더 죽어났다

 

인조의 극단적인 반청 감정이 부른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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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 추진

: 효종은 왕위에 즉위하자 먼저 김자겸을 비롯한 조정의 친청파 대신들을 몰아내고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 무신들을 중용하여 군비확충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1562년에는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강화시켰고, 임금의 호위군인 금군을 기병화 시킴과 동시에 병력을 두 배로 늘려 강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수어청을 대폭 강화시켜 한성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대내적인 군의 증강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더욱이 청은 효종의 바람대로 쇠해 가는 게 아니라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더 강해져 갔다. 청의 정벌이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는데다가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면서 현상유지를 바라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북벌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북벌에 대한 평가

: 당시 효종과 조정의 북벌의 깃발을 치켜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효종은 청에 대한 그의 원한과 왕위계승 정통성을 북벌을 통해 일시에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조정이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전장이 끝난 후 정권유지 차원에서였다.

북벌이 실패한 이유

: 1. 청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의 정비로 국가의 지배체제를 더 확고히 하면서 동아시아 절대강국으로 자리 잡아갔다. 조선의 입장에서 청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엄청난 강국으로 자리 잡아갔으므로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2. 국가가 대대적인 군비확충을 할 만한 돈이 없었다. 3. 북벌로 인한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었다. 북벌 추진을 위해 효종은 무신들을 중용하고 우대했으며, 이로 인해 문신 중심인 조정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농민의 몰락으로 북벌을 위한 군사비 확보에 한계를 느낀 효종은 양반드에게도 북벌을 위한 부담금을 물리려 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 격렬한 대결 양상으로 발전했다.

 

조선후기의 불운한 혁명가, 홍경래

 

홍경래 혁명이 발생하게 된 배경

: 19세기 조선은 사회모순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었다. 1.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독재를 함에 따라 권력횡포와 착취가 극심했고, 이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조정에 대한 민심의 이탈이 광범위하게 생겨나고 있었다. 2.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나 세도 정치의 결과로 소외된 양반계층 즉, 신분은 양반이지만 먹고살지조차 힘든 양반들이 생겨나면서 이들이 체제 저항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3.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었지만 지역차별을 받고 있어서 지역민들의 불만이 컸었다. 4. 농업기술의 발달로 부농이 생겨났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농이 생겨났는데, 이들 중에 자신들이 축적한 부를 권력의 횡포로 빼앗아 가는 지배계층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갖는 이들이 생겨났다.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홍경래와 농민군

: 1811년 마침내 혁명의 햇불이 치켜들었다. 당시 그들이 3가지를 혁명의 공약으로 걸었다. 1.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임금으로 세우겠다. 2.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타도하겠다. 3.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을 철폐하겠다.

홍경래 혁명의 역사적 재평가

: 홍경래 혁명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식민지사관의 영향으로 당쟁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즉 '평안도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홍경래가 벌인 반란'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홍경래가 일으킨 사건은 농민과 상인, 그리고 일부 양반계층까지 다양한 계층의 참여가 있었고, 체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민란이 아니라 혁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을 주장해 사형 당한 조봉

 

진정한 중도파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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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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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파의 비극

: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궤멸을 계기로 통일론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없어졌고, 중도를 표방하는 혁신정당의 싹이 잘려나가면서 우리 정치사는 오로지 흑백논리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조봉암의 죽음은 또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중도파의 비극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라 하겠다.

 

제2부 지배계층이 기만한 역사적 사실들

 

조선의 신문고, 일반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신문고가 생겨난 배경

: 조선은 중앙집권국가지만 현실적으로 교통의 한계와 전통적인 지방자치의 관습 때문에 지방의 수령은 사법, 입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가진 사실상의 소군주였다.

신문고, 일반 백성에겐 '그림의 떡'

: 일반 백성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한 '금부민고소'라는 악법을 만든 이도 태종이지만(실제 이 법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세종 2년에 만들어졌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신문고를 만든 사람도 태종이었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제도를 모두 태종이 만든 것이다. 1. 금부민고소라는 법을 만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지방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방수령에게 권한을 상당 부분 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는 이들이 중앙정부에 지속적으로 충성하도록 할 확실한 당근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권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바로 금부민고소였던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왕권강화를 위한 통치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2. 신문고를 만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백성들의 억울함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해결해 준다는 취지로 신문고를 만들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 일종의 전시행정에 불과했다.

 

누가 조광조를 개혁가라 하는가?

 

힘 있는 신하 박원종, 힘 없는 왕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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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조광조의 동상이몽

: 1510년 반저의 주도자로서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박원종이 죽고 난 후 반정 공신 내부의 알력이 표면화되면서 이들의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515년, 마침내 중종은 신진사림파들을 대거 등용시켰고, 이것은 사림파를 친위 세력으로 성장시켜 반정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왕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중종의 절대적인 지원 속에 조광조는 1517년, 훈구 세력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소위 조광조식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 전국적인 향약을 실시했다. 향약의 목표는 모든 백성을 유교적 도덕으로 교화시킨으로써 도덕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2. 현량과를 도입했다. 조광조는 학문과 인품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천거해 관리로 등용시킬 것을 주장했다. 중종은 훈구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대로 천거를 통해 관리를 등요하는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이때 사림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조광조는 2가지 오버하게 된다. 1. 유교사상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임금인 중종에게까지도 철저한 유교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중종으로 하여금 조광조의 경직된 도덕에 염증을 느끼게 하였고, 이로 인해 중종과 조광조 사이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간 것이었다. 2. 반정 공신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 한 것인데, 애초부터 훈구세력과 사림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의 입지를 강화시키려 했던 중종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전의 훈구 세력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위협할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로 인해 중종은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과 결별하고, 훈구 세력과 손을 잡아 1521년 기묘사회를 통해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하게 된다. 결국 왕권강화가 목표였던 중종과 유교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했던 조광조의 동상이몽이 4년 만에 깨져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광조는 유교 사상의 또 다른 전도사였을 뿐!

: 중종의 강력한 후원 속에 이루어진 조광조식 개혁은 엄밀히 말하면 개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재무장 운동의 차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광조의 개혁은 체제의 모순에 대한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1. 향약은 유교적 도덕이 백성들 생활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을 뿐, 훈구 세력에게 땅을 빼앗기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는 것과는 전혀 무관했다. 2. 현량과는 사림을 중앙정치로 끌어들이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조광조는 개혁가라기보다는 유교 사상의 전도사일 뿐이었다.

 

이율곡은 실제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까?

 

시무육조와 비변오책

: 유성룡은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1583년 이전에 이미 '비변오책'이라 하여 이육곡의 10만 양병설과 취지가 동일한 주장을 하였었다.

10만 양병설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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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들의 개인문집에만 언급된 10만 양병설

: 이율곡이 선조에게 '시무6조'를 통해 10만 양병설을 건의했다면 내용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고려할 때 [선조실록]에 언급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 사서는 김장생의 [율곡전서]와 송시열의 [율곡연보]이다.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원본인 [선조실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고, 오로지 서인들의 개인문집에만 언급되고 있다는 점, 후에 나온 [선조수정실록]은 서인들의 개인문집을 토대로 서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조작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쟁의 승리자인 서인들만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 권력투재으이 대리전이었다

 

정경유착이 만들어낸 스타, 장희빈

: 역관은 신분상으로는 중인계급이었지만, 아주 손쉽게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위치였고, 또 세도를 누리는 특수계층이었다. 일본과 중국에 사신단이 파견될 때마다 대표인 정사와 부사가 있기는 하였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외국어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당시의 역관들은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 나라 정부의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정보를 주고받는 실무외교관의 성격을 띠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연스럽게 외교의 주요업무를 장악하게 되었다. 더구나 무역에 관한 모든 것은 이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관들은 무역, 그 중에서도 청과 일본간의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에서 역관의 딸인 장희빈이 왕비까지 오르는 파격에 가까운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조선후기에 무역을 통해 결제적으로 급성장해 양반과 더불어 사회주도 세력의 한축으로 자리 잡은 중인계층이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해 사회중심 세력의 한 축을 이룬 이들 중인계급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정치권과 손잡으려 하게 되고, 서인에게 밀려난 남인들은 정치적 영향력과 자본을 함께 거머쥔 역관들과의 연합으로 권력의 재탈환을 시도하려 한다. 이리하여 정경유착이 생겨나고, 그러한 정경유착에 의해 '왕비 만들기' 작전의 주인공으로 선발된 이가 바로 장희빈인 것이다.

장희빈 대 인현왕후, 권력투쟁의 대리전

: 궁녀가 되어 왕의 승은을 입었으나 장희빈은 탄탄대로를 걷지 못 했다. 장희빈이 남인들의 작전에 의해 입궐한 것을 알아챈 서인들의 견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장희빈은 궁녀인 시점에서부터 이미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궁녀에 대한 상소문이 올라간 것은 장희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원자 균(경종)을 세자로 책봉하자 서인이 이에 반발하고 서인의 대표격인 송시열은 숙종에게 이에 대한 비판의 상소를 올린다.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100명 이상을 처벌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숙종 16년에 있었던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재탈환하게 되며, 기사환국의 완결편은 인현왕후의 폐출과 장희빈의 왕비 책봉이었던 것이다. 남인이 집권한 지 4년이 지날 무렵, 서인들의 재집권을 위해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벌이게 된다. 남인의 힘이 너무 커졌다고 생각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빈으로 강등시킨다. 이리하여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의 재집권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역관과 상인들인 중인계층이라는 것이다. 결국 경제력을 갖춘 중인계층과 정치력을 갖춘 양반들의 결합 즉 정경유착에 의해 힘을 갖게 된 양 세력이 각각 장희빈과 인현왕후라는 두 상징적인 여인을 통해 권력투쟁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숙종이 진정 사랑한 것은 왕권이었을 뿐

: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하고 그런 흐름 속에 남인을 중용한 것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1. 조선의 역관 특히 청을 상대하는 중국어 역관은 여러 면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숙종은 명문역관의 딸인 장희빈을 통해 역관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던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2. 신하들의 힘이 강했던 시기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당쟁을 적극 활용했다. 숙종이 사랑했던 것은 장희빈이 아니라 바로 왕권이었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죽고 나서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자 숙종은 조정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조선의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중전을 저주했다 하여 후궁에게 사약을 내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세자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은 당시의 정서상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는데 조성대신드르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것은 자신의 사후에 장희빈이 살아 있으면 남인들과 결탁해 서인을 몰아내고 왕권을 위협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조선의 암행어사제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암행어사제도의 탄생 배경

: 조선왕조가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1. 전국 8도와 부, 목, 군, 현 등 334개 구역으로 파견된 지방 관리들에 대한 감독과 감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완책이었다. 2. 세종 때에 제정된 악법인 '금부민고소' 즉 역모사건이나 살인과 관련된 사건 이외에는 백성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한 법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암행어사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한 채 부분적이고 부정기적인 부정척결에 그쳤던 암행어사 제도로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암행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극심했던 당쟁의 역기능과 중앙정부에 만연된 부정부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암행어서 제도는 부정부패의 해결에 있어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변해갔고, 심지어는 정적 제거를 위해 악용되는 폐단까지 생겨났다.

 

양반 의병운동은 진정한 애국운동이라 볼 수 없다

 

구한말 양반 유생의 의병운동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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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유생 의병운동의 근본적 한계

: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양반 유생들의 의병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체제유지였다. 1905년의 2차 의병운동 시기에 다수의 평민 의병장이 생겨나는 것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2차 의병운동의 시기에는 신돌석 장군을 비롯한 많은 평민 의병장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의병운동이 백성들 사이에 공감을 얻어내고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평민의 권리의 식이 그만큼 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양반 유생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보장되던 조선에 일본이 와서 이런저런 간섭을 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체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염려한 것이지 근본적으로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더 이상 우리의 민족대표가 아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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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도으이 숨은 희생자, 조선인 고등계 형사 신철

: 거사의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던 2월 말에 천도교 소속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되던 독립선언서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에게 발각된다. 그러자 천도교 지도층이고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이 신철을 만났다. 최린은 민족을 위해 며칠만 눈감아 달라고 호소하는데 신철은 고심 끝에 최린의 호소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거사일 전에 현장에서 피해 있기 위해 일부러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주로 갔던 신철은 3.1 운동이 끝나갈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거사계획에 대한 사전정보를 얻고서도 고의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은닉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경성 헌병대에 투옥되었고 며칠 뒤 신철은 투옥된 곳에서 자살했다.

3.1 운동의 전개 과정

: 천도교는 최린, 기독교 이승훈, 불교는 한용운이 중심이 되었으며 안타깝게도 당시 가장 큰 조직을 갖고 있던 유림은 3.1 운동의 지도부가 모두 평민인 탓에 불참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무책임과 비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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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의 변절과 똥통을 뒤엎은 만해 한용운

: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간 33인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은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세웠다.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내 나라를 내가 찾겠다고 한 것이므로 변호해 줄 사람도 없고, 변호 받을 사람도 없다. 2. 사식을 받지 말 것.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 한 것이 아니니 밖에서 넣어주는 음식을 먹지 마라. 3.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33인 대다수가 일본 경찰의 요구대로 일종의 반성문 성격인 해명서를 쓰고 풀려났다. 끝까지 남은 이는 만해 한용운 한 사람뿐이었으며 감옥에서 석방된 33인 중 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을 비롯하여 최린, 정춘수, 박희도 등은 친일파로 변절했다.

3.1 운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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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실패한 내부원인

: 3.1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양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1. 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킬 운동의 구심점. 즉 지도부가 없었다. 2. 준비되지 않은 즉흥적인 운동이었다. 3. 국제사회의 호의와 지원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비현실적인 발상으로 시작된 운동이었다.

3.1 운동이 실패한 외부원인

: 1.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국제정세가 우리의 독립에 유리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2. 일본은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강국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왜 기만적일 수밖에 없었을까?

 

최초의 국산품 애용운동

: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취지를 간단히 표현하면 국산품 애용이다. 1920년대 조선인 기업들이 만든 상품은 일본 상품에 비해 질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민족기업들의 육성을 위해 우리 상품을 쓰자고 한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다. 이 때의 기본 실행요강은 이러했다. 1.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성은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 치마를 입는다. 2. 설탕, 소금, 과일, 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우리 것을 사서 쓴다. 3. 일상용품은 가급적 우리 토산품을 사용한다.

조선물산장려운동과 민조개량주의

: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 있던 민족 진영 내부의 일부 인사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인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일본의 통치체제에 일단 순응하면서 힘을 길러 독립을 준비하자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으며, 물산장려운동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운동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실패한 진짜 이유

: 애국심에 호소한 국산품 애용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조선의 기업가들은 그야말로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조선 최대의 갑부 대열에 올라선 김성수와 그의 일가들은 1943년 조선군 사령부에 전투기 한 대 값으로 10만 엔을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기 1백대 헌납 운동을 실시해 85만 엔을 모급하여 일본군에 헌납하였다. 엄밀히 평가하면 민족기업의 육성이 아니라 친일기업들의 육성이었던 것이다. 물산장려운동은 애국을 빌미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상 가격보다 2배나 더 비싼 조선산 물건을 억지로 사도록 강요한 운동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은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점차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다.

 

독립협회의 회장은 매국노 이완용이었다

 

독립문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

: 독립협회는 1898년 8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하자 그를 조선독립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극찬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독립문이 새겨진 은쟁반을 선물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동시에 조선을 독립시켜 준 일본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징표로 쓰이기도 한 것이다.

너무나 엽기적인 독립협회 인사들

: 독립협회의 계몽활동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교화시켜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식이었으며, 독립협회가 말하는 민권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었다.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개혁의 지지기반이 될 백성들을 철저히 도외시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진정한 개혁론자들이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독립협회 주도층의 사상적 한계

: 독립협회의 주도층이 갖고 있던 사상적 기반은 적자생존과 우승열패를 절대시하는 사회진화론, 즉 약자는 도태되기 쉽고 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이 당연한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에 대한 온당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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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우리 현대사를 일그러뜨린 주범

 

국사교과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친일 청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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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해 맞이한 8.15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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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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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무자비한 방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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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찌 청산과 한국의 친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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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서도 친일파들이 설쳐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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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피밭에서 피어난 박정희의 경제개발 신화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전쟁터

: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무려 1천500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쏟아 부었고, 5만 명의 전사자와 70만 명의 사회 부적응자 등 막대한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베트남에 무려 39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폭탄의 양은 제2차 세계대전에 투하한 폭탄의 총량이 300만 톤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렇게 막대한 투자와 희생을 치르고도 북베트남에 패배한 것이다. 미국은 1966년에 한국의 베트남 찬전에 대한 대가를 주한 미대사인 브라운이 작성한 '브라운 각서'를 통해 확실하게 약속한다.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32만 명이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 5천 명은 전사, 5만 명은 고엽제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베트남 참전으로 인해 2만 5천 명의 근로자가 베트남에 취업하였고, 전쟁특수로 10억 불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이것으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미국으로부터 17억 불의 군사, 경제 원조를 무상으로 받아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 1966년 3월에 미국 대사인 브라운이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대가로 우리 정부에 약속한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원조 1.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를 지급한다. 2. 한국군 참전에 따른 모든 경비를 부담한다. 3. 베트남 찬전 한국군의 전투 수당을 지급한다. 경제원조 1.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제공한다 2.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보장한다 3.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지원한다.

반외세로 점철된 베트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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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중들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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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의 베트남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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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최대의 정치조작 사건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 인민혁명당 사건은 1차와 2차로 나누어진다. 1964년 봄, 한.일정상회담에 반대하는 국민들이 늘어났고, 결국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반대시위가 펼쳐졌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그 해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한.일정상회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힘으로 억누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다.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반국가 단체인 인민혁명당이 국가전복을 꾀하려 했다'는 요지의 엄청난 사건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에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고문으로 조작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관련 검사 3명이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한다. 날조된 조작 사건이라는 여론에 밀려 결국 일부 관련자만 가벼운 형량에 처한 뒤 마무리되어 중앙정보부의 사건조작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10년 뒤, 1974년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과 재야의 대규모 시위를 봉쇄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이 조치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용공조작 사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우선 당시 학생들이 주도한 반유신투쟁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어 사형선고를 내리고 그럴듯한 배후세력을 만들어내고, 또 이들 중 일부는 사형시켜도 사회적으로 관심이 적을 무명인사 그룹으로 엮었는데 이것이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 근거

: 1. 관련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을 통해 얻어낸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고, 어떤 물증이나 단서도 제시하 못했다. 2. 이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들 대부분이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관련 언론 보도를 보고서도 피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이다. 3. 대법원의 사형확정 판결이 난 후 바로 다음 날 형을 집행했다는 점이다. 사형 판결이 난 후 24시간 이내에 형을 집행한 경우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이 유일한 경우였다. 4. 형이 집행된 후 가족들의 동의도 없이 일부 시신을 화장해 버렸다.

억울한 죽음, 뉘우칠 줄 모르는 가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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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맺으며 - 세뇌당한 역사의식에서 탈피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