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리 헌법의 탄생], 이용록, 서해문집,2006, (080929).

바람과 술 2008. 9. 29. 02:25

책을 내면서

 

건국헌법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만큼이나 또한 불명예스러운 문서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적어도 1987년 소위 6월 민주화항쟁이 일정한 결실을 거두기 이전까지 우리 헌법은 뢰벤쉬타인이 말한 소위 '명목적 헌법', 혹은 '장식적 헌법'이란 오명으로 불려 왔다. 헌법은 하나의 장식일 뿐이고, 현실은 헌법과는 무관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다. 이 세상에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제도는 결국 역사적인 것이다. 모든 제도는 역사의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제헌사는 헌법 이해의 역사적 맥락을 풀어내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현행 헌법에는 제헌사로부터 출발해야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듯이 제헌사 역시 현재의 헌정에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는 상투적인 결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하여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헌법공동체로서 우리 정체성의 확인, 그 첫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나간 제헌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이유인 것이다.

 

1. 제헌을 향한 투쟁

 

혼동과 불안

 

헌법, 정치와 법의 경계에서

: 흔히 헌법을 정치와 법의 경계선에 있는 법이라 일컫는다. 주도적 정치세력이 갖는 힘은 물론 단순히 물리적 힘만은 아니다. 그것은 곧 정신(이념)의 힘이기도 하다. 물리적 힘을 가진 어떤 세력도 다소간에 하나의 정신을 표현하기 마련이며, 그 정신이 갖는 설득력에 의해 거꾸로 힘이 창출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법은 그 시대 주도세력을 통하여 표상되는 시대정신의 법적 표현이며, 그로부터 탄생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현실 규정력을 갖는 것이다.

해방, 준비 없이 닥쳐오다

: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반도

: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이 처음 국제적으로 공약된 것은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에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카이로선언의 '적절한 과정'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1945년 12월 소위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미국과 소련이 합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 결정의 핵심은, 1.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우선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3.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 아래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공동으로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행한 후에 완전한 독립국가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안 때문에 민족의 분열만 심화시킨 채, 결국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내부의 분열은 미.소의 대립이상으로 격렬하고 심각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분출되어 버린 것이다.

분열을 키운 신탁통치 정국

: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남한에서는 분단이 고착화될 것을 우려한 중간파와 좌우의 온건파가 중심이 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미군정의 강력한 주선과 후원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온건 좌파를 극좌파로부터 분리해 온건 우파와 합작을 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를 통하여 우파에 치우친 정당성의 취약한 기반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반공블럭을 강화할 계산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여 미군정의 중간파.온건파 양성정책은 의도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단독정부 수립, 분단을 확정 짓다

: 우파 역시 우파대로 독자적 노선을 걸어갔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소위 '정읍발언'을 계기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1947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미수공동위원회가 예상대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으로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의 단독선거 소식은 제헌을 향한 투쟁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등의 우파보수주의자들이 승리하였음을 의미했다. 어쨌든 이로써 해방의 감격 속에서 당연하리라 믿었던 통일 국가 수립의 꿈은 무산되고, 분단이 최종 확정되었다.

 

우파의 의지대로 해소된 헌법적 쟁점들

 

자유민주주의의 토대가 결정되다

: 남한에서 우파의 승리는 자체의 힘과 우파가 표방하는 이념의 설득력만으로 획득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미군정이라는 외부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우파적 비전의 승리가 공동체 내부의 투쟁과 파협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우파와 좌파를 갈랐던 첨예한 쟁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첫번째는 역시 정치체제의 문제였다. 새로 수립해야 할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의문이 없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내용이었다. 삼권분립제와 삼권귀일제의 대립은 사실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독재를 인정할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상매입.유상분배로 굳어진 농지개혁

: 정치체제의 문제보다 더 첨예한 대립을 이룬 것은 농지개혁의 문제였다. 역사가 꽤 오래된 고질적인 소작농업의 형태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는 반론이 있을 수 없었다. 나아가 소작 문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민주주의도 제대로 실행되기 어려웠다. 소위 시민층의 성장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농지개혁을 달성할 것인가였다. 좌파의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은 당연히 지주들이 대거 포함된 보수 우파의 불안을 자극했다. 우파는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들을 산업자본가로 변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선전하였다. 이를 위해 토지를 정부가 유상으로 매입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재원은 다시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함으로써 마련하려고 했다. 이런 폭발성이 큰 쟁점도 우파의 승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유상매입.유상분배의 방침으로 굳어졌다. 적어도 농지개혁의 문제가 더 이상 헌법 제정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식어 버린 과거청산의 문제

: 친일부역자의 처리 문제도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 문제도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쟁점으로서의 뜨거움이 식어 버렸다. 대립의 한 축인 좌파가 탈락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친일부역자를 청산해야 한다는 명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명분을 실행할 추동력이 상실된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이제 제헌 작업을 무산시킬 만큼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는 지뢰들은 제거되었다. 대신 새로운 이념이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남은 자들을 괴물 같은 힘으로 결속시킬 이념. 바로 반공이데올로기였다.

 

초헌법적 이념의 탄생, 반공

 

괴물이 되어 버린 반공이데올로기

: 남한에서 우파보수주의의 단정 노선이 승리한 것은 참으로 좌파와의 힘겨운 싸움의 결과였다. 이제 싸움은 남과 북 사이에서 정통성을 독점하려는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통성에 대한 부담은 당장 제헌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긍정적 영향도 컸다. 그러나 동시에 정통성을 둘러싼 체제 경쟁은 헌법에 용량을 초과하는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헌법의 가치를 초월하는 새로운 이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극단적 반공의식은 한국전쟁 이후의 산물이지만, 이미 제헌 단계에서부터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반공이 신성불가침의 초월적 이데올로기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자긍심의 상징이어야 할 헌법이 오랫동안 '장식헌법'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한국적 헌법 현실은 거의 대부분 여기서 연유했다.

 

2. 제헌국회의 성립

 

제헌의 첫 삽, 5.10 총선거사 실시되다

 

폭동과 소유 속에 진행된 단독선거

: 선거 결과 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북제주군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당선자가 배출되었다. 무소속 85명, 독립촉성국민회 54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기타 정당 및 사회단체 18명이었다.

우파의 우위, 공식화되다

:

 

최초의 보통선거가 행해지다

 

단번에 자리잡은 보통선거

: 5.10 총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권위주의 정부조차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선거 앞에서 정당성의 불안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보통선거는 민주주의가 질식되어 가던 상황에서도 민주화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과연 보통선거를 도입하는 데 아무런 저항의 흐름도 없었던 것일까? 도대체 보통선거제는 어떻게 한국에서 단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군소정당에게는 불리한 소선거제

: 1948년의 [국회의원선거법]은 소선거구제와 다수대표제를 채택하엿다. 소선구제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대표제란 다수표를 획득한 자를 당선자로 하는 제도이다. 소수파에게도 의석을 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소수대표제나 비례대표제 등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소수대표제나 비례대표제는 소선거구제 아래서는 활용이 불가능한 제도이다. 소선거구제는 흔히 대정당들에게 유리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소선거구제의 대표적인 단점으로는 사표가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꼽힌다. 당선자가 아닌 다른 후보들에게 투표한 국민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선거제를 채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과연 제헌의원 선거에서 소선거구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입법의원선거법에서 제헌국회선거법으로

: 제헌국회선거법은 두 단계를 거쳐 제정되었다. 먼저 과도입법의원에서 선거법을 제정하고, 미국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을 확정했다. 과도입법위원의 선거법은 중간파와 우파 사이의 격렬한 대립 가운데에 미군정 당국의 중재에 의해 결정되었다. 처음부터 소선거구제와 다수대표제를 채택한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좌파를 배제하는 여과장치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도 모두 의식하고 있었다. 가장 심한 갈등을 초래한 것은 선거 연령을 정하는 문제였다. 우파세력이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을 높이고자 한 것은, 좌파가 젊은 층에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투표에서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군정 보고서도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이 대립은 일단 25세.30세안이 통과됨으로써 수적 우위를 앞세운 우파 민선의원들의 승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반발이 심했다. 군정 당국의 반대 의사도 확인되었다. 결국 선거권 23세, 피선거권 25세로 우파가 양보하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한편 우파들은 제한선거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 하나가 기표가 아닌 자서(自書) 방식의 투표를 주장한 것이다. 자서 방식은 사실상 문맹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좌파에 우호적이었던 농민, 노동자들을 겨냥한 조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서 방식이 무난히 통과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특별선거구를 도입한 것이다. 북한에 본적을 둔 남한 거주자들의 투표를 따로 집계하여 일부 의석을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특별 선거구에 할당된 의석수는 총 266석 중 36석으로 총 의석의 13.5%에 해당했다. 이것은 당시 월남인은 거의 예외 없이 강한 반공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별선거구는 우파의 안정적 다수의석 확보를 위해 고안된 대표적 장치로 보여 진다.

모순적이었던 미국의 대한정책, 민주주의의 싹을 심다

: 현저히 불공정한 선거법에 미군정 당국도 우려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입법의원선거법의 성격이 달라져 있었다. 군정 당국 역시 제2차 미수공동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입법의원선거법을 기초로 선거를 실시할 구상이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우파의 구상은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미국 본국 정부의 전략과 배치되었다. 그리고 유엔의 개입은 우파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선거법은 유엔한국임시위원회와 미국 당국의 견해 사이에서 타협된 결과로 나왔다. 제헌국회의 선거법은 입법의원선거법을 토대로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미군정 당국과 협의하여 수정하는 방식으로 확정되었다. 어쨌든 친일부역자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렇게 해서 거의 완전한 실질적 의미의 보통선거법이 마련되었다. 남한을 반공의 방파제로 삼는다는 절대명제 아래에서, 가능한 한 자유민주주의의 제도를 이식하려는 것이 미국의 대한정책이었던 것이다.

 

유엔의 승인과 정당성의 문제

 

왜곡된 대표성과 유엔의 승인

: 당시부터 이미 5.10 선거의 정당성을 비웃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논쟁은 툭하면 과열을 넘어 거의 사생결단식으로 진행되었다. 정통주의적 견해의 가장 큰 원군은 역시 유엔의 인정이었다. 보통선거로 치러진 5.10 총선거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새로 수립될 정부에 내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였다. 거기엔 유엔의 승인은 정당성의 외적 보증이었다. 그런데도 제헌국회가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국민의 대표성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헌국회가 일반 국회를 겸하다

: 구체적으로 국민의 여러 세력을 대표하는 헌법 제정회의가 헌법 제정의 임무를 담당한다. 이 헌법제정회의는 적어도 개념적으로 일반 국회와 구별되어야 한다. 국회는 헌법에 근거를 두고 헌법에 따라 활동하는 헌법상의 기관이고, 헌법제정회의는 바로 헌법을 창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헌법제정회의는 그런 의미에서 주권적 의회로서 한시적인 의회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5.10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는 정부 수립의 임무만이 아니라, 수립된 정부의 한 기관으로 활동할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헌법에 따른 일반 국회로서의 임무도 당연히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실 모든 제헌 작업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투영되기 마련이지만, 제헌국회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제헌국회가 일반 국회의 성격도 겸하여 가지게 됨으로써 백년대계의 관점에서 설계되어야 할 제헌 작업이 당파들의 당장의 이해득실 계산에 따라 방해받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3. 제헌국회 이전의 헌법안들, 그 기원과 역사

 

근대적 성문헌법전의 기원

 

대한민국임시헌법에 빚진 건국헌법

: 이승만이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의 일이다. 프린스턴대학의 슬라이 박사에게 나중에 자기가 요청을 하면 헌법을 하나 기초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경험과 축적된 지식의 부족은 우리 건국헌법의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승만이 생각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헌법을 우리 손으로 기초하려는 미약하나마 꾸준히 이어진 앞선 노력들이었다. 그 노력은 멀리 대한민국임시헌법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상해임시정부의 10개조의 임시헌장을 대폭 보완하여, 전문과 8장 57개조로 구성한 헌법전이었다. 오늘날 보아도 근대헌법전으로서 갖출 것은 그런대로 갖춘 비교적 완비된 모습의 헌법이었다. 이 임시헌법은 당시 중화민국의 헌법문서들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라 한다. 임시정부 헌법은 이후로도 해방이 되기까지 네 차례나 더 개정되면서 근대적 성문헌법의 전통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임시정부의 헌법문서들은 실질적으로도 1948년 제헌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는 우선 대한민국임시 헌법이 제헌 과정에 미친 영향 3가지만 대표적으로 들어보도록 하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1. 1948년 건국헌법으로부터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제일 처음 제1조 제1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여기서 '민주공화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늘날 헌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습군주제를 부인한다는 의미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내각제와 삼균주의

: 2. 권력구조에 관한 경험의 축적이다. 즉 집행부의 중요한 결정을 최고 직위에 있는 한 사람의 결정에만 맡기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정파가 힘을 합하기 위해서는, 내각 형태의 집행부에 주요 정파가 고루 참여하여 책임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생생한 현장 경험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제헌의원들 역시 상당수가 그와 같은 관점에서 권력구조를 바라보는 전통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3. 삼균주의 이념에 영향을 말할 수 있다. 삼균주의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와 국가 사이의 완전한 균등을 궁극적 이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건국헌법의 태도는 삼균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고, 삼균주의의 영향이 가장 중요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건국헌법이 표방한 강한 균등주의적 이상은 삼균주의의 영향이 컸다.

 

해방 후 초기의 헌법문서들

 

해방 후 최초의 헌법안 작성을 시도하다

: 해방 직후부터 자기 나름의 헌법안을 준비해 놓으려는 각 정파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헌법안을 기초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945년 9월 7일 결성된 우파 연합 성격의 국민대회준비회였다. 국민대회준비회는 1946년 1월 10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한 국민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대신 1946년 2월 10일 비상국민회의로 모이게 되었다. 비상국민회의는 새로 각계 인사 22명을 헌법.선거법 수정위원으로 선정하였다. 헌법수정위원회는 미군정의 협조를 받아 각국의 헌법전을 수집하는 등, 향후 헌법 기초에 참고할 자료의 축적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 헌법안 작성에까지 나가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김병로와 이인 등이 법전기초위원회에 다시 참여하면서, 그 노력들은 법전기초위원회의 헌법요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헌법요강은 뒷날 제헌국회에서 헌법안 심의의 참고안으로 사용된 권승렬안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인권보다 국가 조직을 우선한 행정연구회안

: 최초로 완성된 형태의 헌법 초안이 마련된 것은 행정연구회라는 단체를 통해서였다. 행정연구회의 헌법안은 행정연구회의 헌법분과위원회가 1946년 1월 10일부터 같은 해 3월 1일까지에 걸쳐 작성한 초안이다. [한국헌법]이라고 이름붙인 이 헌법안은 독일의 바이마르헌법(1919년)과 중화민국헌법초안(1936년)을 주로 참고했다. 전체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유럽대륙식 사법체계에 머물렀다. 행정연구회안은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책상서랍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1948년 5.10 총선거가 실시된 후 제헌이 눈앞의 문제로 가시화도ㅚ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미군정에게 보류된 조선임시약헌

: 조선임시약헌은 과도입법위원에서 통과시킨 헌법문서이다.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이 남한민을 대표하도록 하기 위해 구성한 임시적인 대의기구였다. 조선임시약헌은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헌법안이 합쳐져 단일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는 서상일 등 주로 한민당 쪽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남조선과도약헌안이었고, 또 하나는 과도입법의원 내 임시헌법.임시선거법기초위원회에서 작성한 임시헌법안이었다. 임시헌법안은 주로 임시정부계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중심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내각책임제의 핵심적 부분인 의회해산권과 내각불신임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국민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생활균등권이나 문화후생의 균등권을 자유권보다 앞세운 것이 특징적이다. 과도입법의원이 야심차게 추진한 조선임시약헌은, 그러나 군정장관의 인준을 받지 못해 폐기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임시약헌은 법으로서의 효력을 갖기도 전에 사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누구도 조선임시약헌을 무시하고는 헌법을 기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헌법 기초의 주역 유진오와 그의 초안

 

건국헌법의 초안자 유진오

: 건국헌법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으로 현민 유진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법전기초위원회의 요청으로 초안을 작성하다

: 법전기초위원회는 1947년 6월 30일 기초법전의 기초를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었다. 법전기초위원회가 분과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한 때는 그해 10월이었다. 헌법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은 일제하 민족운동 변론가로 신망이 두터운 김병로 당시 사법부장이었다. 첫 회의에서 초안 작성의 임무가 유진오에게 맡겨졌다. 유진오가 실질적으로 헌법안의 작성에 착수한 것은 1947년말부터였다. 유진오는 법전기초위원회의 회의가 있기 이전부터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헌법이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헌법안 작성의 막바지 검토 단계에서는 실무 경험이 있던 윤길중, 황동준, 정윤환이 참여하여 도움을 주었다. 헌법안 작성은 1948년 5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당시는 5.10 총선거로 사회가 온통 어수선하던 때였다. 그 무렵 법전기초위원회에서도 유진오에게 빨리 헌법안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을 해 왔다. 이에 유진오는 그동안 준비한 초안을 마무리하여 제출하게 된다. 다만 법전기초위원회에 제출한 헌법안은 유진오가 완성한 원래의 초안과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전문을 빼고 제출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법부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법전기초위원회에 제출한 초안에는 정윤환 판사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법관의 정년 보장과 미국식의 사법심사제를 유보 의견으로 추가했다.

 

유진오.행정연구회의 공동안

 

유진오와 행정연구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다

: 유진오와 행정연구회 회원들이 공동으로 헌법안 작성에 착수한 것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행정연구회가 일제시대 고위관리들로 구성된 단체였다는 사실이다. 친일관리들이 작성한 헌법안을 제국국회에서 심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나마 친일색이 엷고 학교에 있었던 유진오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었다. 한편 유진오는 행정연구회의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구상을 제헌국회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공동작업은 최하영의 처가집에서 총선 직후인 5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 최종 공동안이 완성된 것은 제헌국회가 개원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정확히 5월 31일 새벽 2시경에 이르러서였다. 얼마나 급박하고 치열한 작업이었던가! 사실 큰 틀에서 보면 원래 유진오안이나 행정연구회안이아 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안 모두 기본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책택하고 있었으며, 강한 통제경제의 원칙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나 표현에 있어서나 압도적으로 유진오안의 흔적을 반영하고 있었다.

유진오가 주도한 공동안

: 지금까지 아무도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으나, 법률 문체를 변화시킨 혁신적 발상만으로도 유진오가 법 문화에 기여한 공적은 충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유진오안이 거의 대부분 공동안에 반영되었다. 공동안을 작성할 때에는 이미 행정연구회 소속의 사람들도 유진오안의 많은 부분에 혼쾌히 동의할 정도로 유진오와 생각이 일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립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편별 순서와 위헌법률심사세에 관한 것이었다.

유진오안과 행정연구회안의 각축

: 행정연구회안은 바이마르헌법을 본 따 기본권에 관한 장을 국가 조직에 관한 장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었다. 국민의 권리보다는 국가의 재건에 제헌의 현실적 의미가 있다고 본 결과였다. 실제 우리의 헌정사는 제헌 후로도 오랫동안 국가의 권력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어차피 건국헌법에는 장밋빛 이상에 불과할지라도 들어가 있어야 할 내용들이 많았다. 조문 나열 순서도 그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편별 순서에 관한 논란은 유진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기본권 조항들을 권력구조 앞에 두는 것으로 정리된 것이다. 헌법의 인권 옹호 기능을 강조한 것이 주효했다. 반면 공동안의 위헌법률심사제는 행정연구회 즉 인사들의 주장이 반영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히 1947년 5월부터 법조계 인사 다섯 명이 미군정 당국의 주선으로 약 4개월에 걸쳐 미국 사법시찰을 다녀온 뒤로 사법심사제는 완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결국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되는 때에는 대법원이 그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사법심사제와 함께 법조계의 최대 관심사는 법관의 정년보장제 역시 행정연구회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공동안에서 눈여겨 볼 것은 신체의 자유를 절차적으로 보장하는 규정이 강화된 것이다.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절차적 보장이라는 개념은 원래 영미법계에서 발전해 온 것이고, 우리에게 영향을 준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소위 대륙법계에 속하는 국가에서는 생소한 제도였다. 종합해 보면 공동안은 대부분 유진오안의 구상에 의거하고 있으나, 사법제도나 절차에 관계된 부분에서는 행정연구회 인사들의 영향을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인 정치인들이 게임에 참여하고 난 후에나 결정될 일이었다.

 

또 하나의 초안, 권승렬안

 

권승렬은 누구인가

: 공동안만큼은 아니지만, 헌법제정에 일정한 영향을 준 또 다른 초안으로 권승렬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권승렬안은 오랫동안 법전편찬위원회안이라는 이름으로 통요되어 왔다. 그 명칭은 법전기초위원회와의 모종의 관계를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에는 법전기초위원회의 이름으로 출발한 것이 어느 단계에서 권승렬 등 일부 법조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반(半)-사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적 정통성과 법조계.미군정의 이해관계를 결합하다

: 권승렬안은 유진오가 법전기초위원회에 제출한 안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만큼 양자 사이에는 내용과 표현이 세세한 데 이르기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권승렬안이 유진오안을 수정한 부분에서 크게 3가지 정도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역사적 정통성의 문제를 보다 깊이 고려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권승렬안은 부칙에서 친일파 등에 대해 소급 처벌이 가능하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권승렬안은 대한민국임시헌법로부터 조선임시약헌에 이르는 일련의 헌법 전통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 2. 사법제도에 있어서는 역시 법조계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법조계 초미의 관심사였던 사법심사제를 채택한 것은 물론 법관 임기제 조항을 삭제했다. 3. 미국의 관심사에 예민했다는 점이다. 적산에 관한 규정이나 대외무역을 국가가 퉁제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한 것이 그 예들이다. 어쨌든 이제 공동안과 권승렬안, 유럭한 두 헌법안이 역사적 무대에 등장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캐스팅은 완전히 제헌의원들의 몫이었다.

 

4. 헌법기초위원회의 구성

 

제헌의 절차를 마련하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절차적 공정성

: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최초로 선출된 의원들만으로 구성된 국회가 개원되었다. 제헌국회는 향후 대한민국의 모든 법적 기초를 스스로 창출해가야 했다. 모든 법은 그 효력을 최종적으로는 헌법으로부터 빌려 온다. 그러나 처음 헌법을 제정하는 단계에서는 헌법 이전에 헌법 제정을 위한 일정한 절차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헌법을 제정하는 기관은 먼저 절차를 합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헌법 제정 의사규칙이 빠지다

: 1948년의 제헌국회는 제헌과 제헌 절차의 이 논리적 순환고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처음에는 순조롭게 출발했다. 국회가 개원되기 전 5월 22일 오후 2시 독촉국민회의 회의실에 국회의원 당선자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비공식적으로 국회 개원 준비회의를 연 것이다. 그리고 5월 27일 다시 제2차 준비회의가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앞의 준비위원들이 마련한안건과 보고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회임시 준칙을 통과시켰다. 이 임시준칙안에는 헌법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회 구상도 담겨 있었다. 철저히 독촉국민회의 신익희 측과 한민당 측의 사전 준비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된 흐름에 첫 반기가 일어나는 데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쨌든 임시준칙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이것으로 이제 제헌 작업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을 기초하고, 본회의에서 심의.확정하는 두 간계로 나뉘어 진행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헌 절차의 가장 초보적인 것이 결정된 것에 불과했다. 본회의에서의 의사규칙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문제였다. 그러나 헌법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과반수라는 일반 정족수에 따라 처리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었다. 현형 헌법도 국회가 헌법개정안을 의결하는 데는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헌법이 갖는 통합적 중요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일반 법률보다 개정절차를 어렵게 한 한법을 우리는 경성헌법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성문헌법 국가는 경성헌법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진통 속에 출범한 헌법기초위원회

 

헌법 제정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

: 순조롭게 진행되는 국회는 임시준칙에 따라 임시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면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선거 결과에 어떤 의도된 흐름이 감지된 것이다. 그에 대한 첫 반기는 이튿날 헌법기초위원을 추천할 열 명의 전형위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논쟁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팽팽하게 맞섰다.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재투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압도적인 표 차로 도별 선출방식이 결정되었다. 도별로 호선된 열 명의 전형위원들은 다음날 6월 2일 30명의 헌법기초위원들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초위원들이 국회에서 확정하는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논쟁의 격렬함에 비해 다음날 이루어진 표결에서 전형위원들이 추천한 30인 그대로 기초위원으로 확정된 것은 의외였다. 정부수립이 시급하다는 논리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준비된 각본

: 어찌된 일인지 국회는 일을 무리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해 8월 15일까지는 정부 수립을 완료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곧바로 3일 오후 첫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먼저 기초위원장에 한민당의 서상일, 부위원장에 독촉국민회의 이윤영을 선출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각계 인사 열 명을 헌법기초위원회의 전문의원으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헌법기초위원회의 조직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셈이 되었다. 기최위원이 확정되자마자 바로 그날에 전문위원들의 선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막후에서 상당한 준비와 조정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달리 대안이 없었던 무소속계 의원들도 어 이상은 드러내 놓고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공동안을 심의의 기초안으로 채택하다

: 첫 돌발변수는 4일 헌법기초위원회가 심의안을 확정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법조계 몫으로 전문위원에 발탁된 권승렬이 공동안과는 별도로 또 다른 헌법안을 전문위원회에 제출한 것이다. 바로 [권승렬 안]이었다. 결국 전문위원회는 결정을 기초위원들에게 맡기기도 하고, 두 안 모두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한민당의 주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기초위원들에게 두 초안의 등장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주로 무소속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권승렬안의 지지세가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대체토론과 심의안을 확정하는 데만 헌법기초위원회는 사흘이라는 귀한 시간을 흘러보내고 말았다. 결국 최종적인 결정은 표결에 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13 대 11, 두 표 차로 공동안이 가까스로 심의의 주축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권승렬안도 참고안으로 채택되었다. 권승렬안의 내용도 실은 무소속계 의원들의 헌법 구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틈새를 비집고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이 6월 중순부터 새로이 초안 작업을 진행하여 헌법기초위원회 활동 종반경에 완성한, 대통령직선제, 양원제, 내각책임제, 통제경제체제, 법관선거제, 배심제 등을 주요 골자로 한 매우 혁신적인 안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너무 늦게 완성된 데다가, 헌법기초위원회 막바지에 격랑에 휩쓸려 빛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 사라지고 말았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조문별 토의는 7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이 기초위원들은 오전에는 국회 본회의에 참여하고, 오후시간을 이용해 헌법안 심의에 박차를 가했다. 이 중요한 헌법기초위원회의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사실이다. 헌법보다 한참 후에 제정된 민법의 경우도 기초회의록이 없다니 여기저기 한숨소리다.

 

5. 헌법 제정의 쟁점들

 

인권과 치안의 충돌

 

한민당계, 치안을 강조하며 인권을 위축시키다

: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인신보호에 관한 조항을 심의할 단계에 이르자 드디어 인권과 치안의 대립 문제는 심각한 쟁점으로 등장하였다. 헌법기초위원회가 공동안의 인신보호에 관한 절차규정들을 채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초위원들의 고정관념부터 넘어서야 했다. 많은 기초위원들이 그런 절차규정들은 형사소송법에나 규정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회의적인 분위기는 그런 대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사 실무상의 문제로부터 제기되는 반대의견들은 쉽게 묵살할 수 없었다. 사전영장제도의 예외 규정이 비판자들의 첫 번째 과녁이 되었다. 원안인 공동안에는 현행범인 경우에만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도 체포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권승렬안에서는 현행범일 때만이 아니라,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도 사후 영장 청구로 대체할 수 있도록 예외 사유를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공격은 공동안에 있는 영장제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사제에 대한 내우외환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 사태의 경우에는 법률로써 그 적용을 정지할 수 잇다는 규정을 추가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마지막 공격은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에 모아졌다. 공동안의 이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고 것이었다.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항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논거였다.

고문 금지 규정이 삭제되다

: 첫번째 문제는 사후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예외 사유를 확대하는 쪽으로 쉽게 결론이 났고, 고문과 잔혹한 형벌의 금지 규정을 삭제하자는 수정안도 표결 결과 11 대 10의 한 표 파로 가결되고 말았다. 고문이 비록 음습한 그늘에서이간 하지만, 그 나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뿌리 깊게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통양에서였기 때문이다.

 

정세론에 밀린 민주적 권력구조론

 

권력구조 논의를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다

: 6월 10일 목요일 오후 세간의 이목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 집중되고 있었다. 권려국조에 대한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서 어떤 통치체제를 구축하느냐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그것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구조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각축하는 정치세력들 사이에 권력의 배분 방식을 정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쟁점은 세 가지였다. 1. 정부형태를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지, 대통령제를 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고 2. 국회의 구성과 관련하여 영원제를 채택할 것인지, 단원제를 채택할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3. 대통령의 선출을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할 것인지, 국회의 간접 선거 방식으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마지막 쟁점이었다.

단원제가 채택되다

: 1. 안건에서 올라온 것은 심의 원안대로 양원제를 채택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양원제 주장은 당시 이론적으로 강력한 뒷받침을 얻고 있었다. 양원제 초안을 제출한 전문위원들이 양원제 주장을 거들고 나선 것은 물론이다. 한민당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기초위원들은 의회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내심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양원제를 정면 반박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이들은 정세론을 가지고 양원제의 주된 논거인 민주주의론을 우회하고자 했다. 표결 결과는 12 대 1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단원제가 결정되었다. 대시넹 권승렬안에 따라 공동안에는 존재하지 않던 법률안거부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되었다. 의회의 경솔을 상원의 설치 대신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을 가지고 견제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간접 선거제, 압도적으로 가결되다

: 대통령의 선출 방법과 관련해서는 주로 무소속계 의원들의 주장이 강경했다. 이들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선거론자들의 주장은 기초위원들의 지지를 크게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직접선거론이 공감을 얻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데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루라도 빨리 정부 수립을 마쳐야 한다는 데는 대체적으로 국회의원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표결에서는 9 대 18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직선제안이 부결되고, 원안의 간접선거로 결론이 났다.

내각책임제, 한민당의 승리

: 가장 격론이 예상되었던 정부형태의 문제가 아무런 이의 없이 내각책임제 쪽으로 간단히 결론이 난 것은 의외 중의 의외였다. 단지 명칭을 '내각'에서 '국무원'으로 고친 것이 전부였다. 하기야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주장하기 전에는 우리 헌법 전통에서 대통령제가 진지하게 고려된 것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돌연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주장함으로써 제헌의 최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이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강조한 것은 정부의 안정이었다. 적어도 대통령의 임기 동안은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하며, 의회가 내각불신임권을 사용하여 정부를 변경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고집에는 보다 현실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이 당시 거의 유일무이한 대통령 후보였다. 그러나 내각책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국가의 형식상 원수에 불과해 지고, 실권은 내각을 총괄하는 수상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런 사태를 이승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선민의식을 만족시키기에 대통령제는 당시 너무 생소했고, 내각제의 전통과 명분은 너무 강했다. 게다가 한민당의 내각책임제를 추진할 현실적인 이유도 갖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감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한민당이 실권을 장악하는 길은 내각책임제하에서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익희 역시 국무총리 자리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반면 과도입법의원 시기 지배적이었던(오랫동안 헌법 전통의 중심을 차지해 온) 내각중심제적 사고는 중간파의 탈락과 함께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궁지에 몰린 것은 소수의 이승만 측근 의원들이었다. 결국 정부형태는 공동안보다 내각불신임의 요건을 조금 더 엄격하게 수정하는 선에서 내각책임제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권력구조에 관한 중요한 세 가지 쟁점은 일단 모두 한민당의 의도대로 결정된 셈이 되었다.

 

사법 독립과 사법 민주화의 딜레마

 

사법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 사법부의 조직과 작용을 관통하는 제일 큰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사법부 독립의 원칙일 것이다. 사법제도에 관한 헌법 구상은 공식적인 국회 논의보다는 그 이면에서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목을 끈 두 쟁점은 위헌법률심사제와 법관의 임기제였다. 돌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조헌영 의원이 헌법위원회제 채택을 주장하고 나섰다. 법관 10년 임기제 주장도 나왔다. 대부분의 의원들도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법조계 인사 대부분이 일제 총독부의 판검사로 활동하면서 호위호식한 인물들이었다. 법조계의 경직된 보수성과 쓸데없는 권위주의는 이미 일반에게도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특히 사법심사제에 대해서는 국회의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만일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법원이 심사해서 무효화 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사법부가 국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유진오 원래 구상에 따르면, 헌법위원회는 대통령을 위원장으로하고, 상하 양원 의장, 대법원장, 그리고 상원의 승인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3인의 위원으로 구성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률 위헌 여부가 문제될 때마다 삼부의 수장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은 국가 운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발상이었다. 더구다나 그것은 입법권에 대하여 국회 위에 또 하나의 기관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회의 이런 권위 하락을 국회위원들이 용납할 리가 없었다.

위헌법률심사제, 정치적으로 절충하다

: 마침내 해답은 국회의 자기 심사와 사법 심가와의 절충에서 찾아졌다. 즉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되, 위원은 국회의원과 대법관이 각각 반수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헌법률심사의 사법적 성격과 정치적 성격을 절충한 것이자, 사법부 우월주의와 국회 우월주의를 절충한 것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여기에 국회의 우월을 보장하는 조항을 하나 추가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되돌아보면 헌법위원회는 위헌법률을 제지하는 데 거의 무용지물이었고, 법관 임기제는 오랜 기간 독재자의 사법부 통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통제경제 원칙을 선언한 헌법

 

사회주의를 방불케 한 공동안 제86조

: 권력구조에 대한 내용이 결정된 후 한동안 평탄하게 진행되던 심의는 경제 조항들을 심의하는 단계에서 다시 한번 뚜렷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었다. 경제원칙을 규정한 공동안 제86조가 논란의 시발이 되었다. 헌법기초자들의 경제적 민주주의 이념을 잘 표현한 이 조항은 놀랍게도 사회주의를 방불케 할 정도의 사실상의 통제경제를 원칙으로 당당히 선언하고 있다.

통제경제를 강화할 것인가? 완화할 것인가?

: 당연히 통제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한민당계 의원들이 주동이 되어 비판에 나섰다. 통제경제를 완화하려는 특의 시도가 완전히 무위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적산을 국유로 규정한 공동안의 조항은 삭제의 운명을 맞았다. 다만 그 수정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적산의 관리권이 미군에 속해 있는 상태에서 미국과의 협의 없이 헌법에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일본의 전후 배상에 적산을 포함시킬지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임을 고려한 것이었다. 바이마르헌법에서 모방한 국민경제회의에 관한 규정도 대다수 의원들의 반대로 삭제되었다. 국회의 권한을 침해할 수도 있는 조항이 쉽게 통과될 리는 없었다.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헌법

 

일제시대 법질서가 이어지다

: 제헌국회는 이미 말한 대로 과거와 철저히 단절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결단의 토대 위에서 출범하였다. 공동안이나 권승렬안은 모두 헌법에 저촉하지 않는 한 기존의 법은 그대로 효력을 유지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이 규정은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도 별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그 결과 미군정시대에 제정된 법은 물론, 일제시대 적용되었던 일본의 법들도 대다수가 건국 이후에까지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규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는 일제시대 법질서 속에서 형성된 기득권이 새 국가에서도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제헌자들은 새로운 법체계가 수립될 때까지 법의 공백상태에서 벌어질 혼란을 더 우려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을 위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위헌의 빌미를 제공하다

: 드디어 김광준 의원이 말을 열었다.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조항을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소급입법이 불가피했다. 원래 소급입법이란 민주국가에서는 정상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행위이다. 국민의 자유와 법적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김광준 의원의 제안에 감히 토를 달 사람들은 없었다. 아무 이의 없이 처벌의 근거 조항을 삽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안을 결정하는 데에는 다시 사회안정론이 대두되었다. 세 가지 중요한 점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1. 처벌의 대상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한 것이다. 2. 소급입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로, 즉 제헌국회로 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우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제헌국회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문제를 결판 짓자는 의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음 국회에서 중간파 등이 대거 진출하여 다시 문제가 거론되는 것에 미리 쐐기를 박아 놓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정된 내용은 처벌의 대상을 '반역행위'에서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로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따라야 할 의미 규정이 하나 누락되었다. 그것은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처벌을 위해 특별조사기구와 특별재판소의 설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친일파 처벌의 근거조항 삽입은 마지못해 억지로 한 부실 흔적이 완연했다. 그 결과 후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시행되었을 때에 특별조사부와 특별검사부, 그리고 특별재판소 설치가 위헌이라는 반발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대한민국과 그 영토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 우리가 사용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어떻게 정해지게 되었을까? 사실 국호 문제는 국회 헌법안 심의 과정에서 생각 이상으로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문제였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는 이유는 다양했다.

정통성 대결을 의식한 영토 조항

: 제헌 과정에서 별로 쟁점이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큰 문제가 디고 말 중요했던 문제들도 있었다. 영토 조항도 그 하나였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공동안을 약간 수정하여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는 규정을 확정했다. 원래 헌법에 영토 조항이 삽입되는 경우는 주로 연방국가인 경우이다. 그런데도 단일국가인 우리 헌법에 영토 조항이 들어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장차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아예 영토 조항을 두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헌법기초위원회는 굳이 영토 조항을 고집했고, 이것이 나중 본회의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의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선언의 의미였다. 다시 말해 북한정부는 진압되어야 할 반란단체라는 의미를 담은 규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화해가 진척되면서 이 조항의 현실성이 많이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이승만에 휘둘려 정부형태가 변경되다

 

이승만의 협박

: 마지막 단계에서 헌법기초위원회는 또 한번 예상하지 못한 회오리에 휩쓸리게 된다. 너무 쉽게 끝난 정부형태의 문제 때문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것은 이승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6월 15일 이승만은 다시 한번 헌법기초위원회에 나타나서 대통령제로 정부형태를 변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헌법기초위원회로서도 이미 결정된 사항을 그렇게 쉽게 변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승만이 생각해 낸 방법은 국회에 전원위원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전원위원회란 국회의원 전원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였다. 전원위원회가 본회의와 다른 점은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은 비공개 회의라면 자신이 국회의원들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표결 결관는 상정일 연기만이 가결되었을 뿐, 전원위원회 개최는 130대12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헌법 원칙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비공개 전원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모양새 좋게 일을 처리하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자 다급해진 이승만은 드디어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 그날 오후 제3독회 최종회의가 예정되어 있는 헌법기초위원회에 나타나 노골적인 협박을 가한 것이다. 정부 수립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결론이 나왔다. 차선책으로 일단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그대로 내놓고 본회의에서 대통령제로 수정을 가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대통령제인가 내각책임제인가

: 헌법기초위원회가 확정한 헌법안은 완전한 대통령제 헌법안은 아니었다. 원래의 내각책임제 헌법안에서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만을 겨우 수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 헌법안에는 내각책임제적 요소도 다수 살아남아있었다. 이렇듯 헌법기초위원회에는 대통령제적 요소와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요소를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정부형태를 해석하는 틀이 달라질 소지가 충분하였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6. 헌법 탄생의 산통, 국회본회의에서의 20일

 

분출하는 열기,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제약

 

말의 홍수, 민주주의의 장관을 연출하다

: 1948년 6월 23일, 드디어 헌법안이 제17차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국회 본회의는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한 안을 단순히 추인하는 회의가 아니었다. 헌법기초위원회안의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검토해 나가는 방식으로 심의가 진행된 것이다.

묵살된 반대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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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거진 절차문제

 

문제제기된 의결정족수

: 제헌국회는 7월 1일 제22차 회의부터 제2독회 조문별 심의에 들어갔다. 해결된 듯 보였던, 아니 진작 해결되었어야 할 절차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이다.

활발한 토론, 그러나 수정은 적었다

: 문제가 심각성을 띠어가자 이승만 의장이 나섰다. 그리고는 아주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연설로 회의장을 완전히 찬물로 끼얹는 데 성공했다. 절차 문제의 석연찮은 종결에도 불구하고 제2독회의 열기는 한동안 수그러들 줄 몰랐다. 적어도 제2독회 중반 반강제적으로 토론이 질식당하기 전까지 그랬다. 그러나 토론이 활발했든 그렇지 않았든 본회의에서 실제 수정이 이루어진 사항은 극히 적었다. 수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행정부의 권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의 수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경제적 균등과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의 수정이었다.

 

이익균점권 조항, 화석으로 태어나다

 

폭발력을 발하다

: 해방 후 우리 산업계에는 좌파 노동운동가를 중심으로 공장자주관리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노동자들의 이런 정서가 우익 노동단체인 대한노총을 통해 국회에 전달된 것이 바로 근로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의 문제였다. 그러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의 문제가 정부형태의 문제처럼 집요하게 쟁점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2독회에 들어 정식으로 수정안이 제출되자, 그간 잠복해 있던 폭발력이 ㅇ감없이 발휘되게 되었다.

이례적인 비공개 투표

: 수정안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공개적인 결정을 피하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본회의에 들어와 단일 안건으로 이미 가장 많은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결은 이례적으로 비공개 투표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최종 문안이 확정되기까지는 또 한 차례의 논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이란 유례가 없는 규정이 건국헌법에 삽입되게 되었다. 이익균점권은 건국헌법에 이질적 요소였다. 이를 실행할 강한 의지가 없었다. 실제 제헌 이후 근로자의 이익 분배를 위한 법률의 제정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외형적 타협으로 마무리된 정부형태 문제

 

제왕적 대통령제의 예감

: 본회의의 최대 관심사는 헌법기초위원회가 막판에 뒤집은 정부형태였다. 대통령제란 영웅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 나아가 전제를 보장하는 제도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대통령제론자들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내각책임론자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의견은 완전 소수로 몰려 있었다. 대신 헌법기초위원회안에 살아남은 국무회의 제도를 활용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할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쟁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국무원이 대통령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것이 전제되어야 했다. 이제 대통령제론자들과의 대결은 자연스럽게 국무원의 구성 방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문제와 함께 제2독회에 이르러서도 가장 큰 쟁점을 형성했다.

동상이몽의 타협

: 이승만은 권력구조를 심의하는 동안 국회 부의장들에게 맡겼던 사회를 직접 맡아 진행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헌법안 심의를 조속히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되지 않을 문제로 토론을 끄는 사람은 정부 수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겠다"라는 식의 협박성 발언에 많은 수정안들은 자진 철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승만 자신은 양원제 문제나 대통령거부권의 문제 등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의견을 표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듯 국회는 권력구조에 관한 한 이승만의 의도에 맞추어 외형적 타협을 이루기에만 급급했다. 이승만과 강력한 대통령제론자들은 국무총리 임명에 국회의 승인을 얻는 것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양보였다. 조급함과 편법은 부실을 낳기 마련이다. 정부형태에 관한 종잡을 수 없는 규정들이 그랬다. 이미 초대 국무총리를 임명하는 단계에서 내각제적 해석과 대통령제적 해석 사이에는 화해가 불가능한 간격이 생기고 말았다. 헌법 제정 후 채 1년도 안 된 사이에 정부형태에 대한 개헌 움직임이 일게 된 것도 이렇듯 제헌 과정의 파행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회의에서 수정된 몇 가지들

 

기본권은 외국인에게도 적용되는가

: 본회의에서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삽입하고 국무총리 임명 방식을 수정한 것 말고도 제7조 제2항에 외국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규정을 신설했다. 제안자인 진헌식은 외국인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밖으로 좋지 못한 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과장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국은 이 논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회의 심의 과정의 부산물로 탄생한 규정은, 그러나 현행 헌법에까지 유지되고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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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혼인과 가족을 보호해야

: 일반 의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혼인과 가족에 관한 조항이 신설되는 데는 기독교계 의원들의 활약이 컸다.

지엽에 치우친 대통령의 비상권한 제한

: 원래 대통령은 독자적인 입법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민주주의 헌법의 대원칙이다. 또한 대통령이 어떤 처분을 내리는 경우에도 반드시 법에 근거해야 한다. 바로 법치주의의 요구 때문이다. 헌법기초위원회안도 "전시 또는 비상사태" 때에는 대통령에게 긴급명령권과 긴급재정처분권을 부여하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남용 방지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긴급명령권과 긴급재정처분권을 발동할 수 있는 '비상사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자는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그리하여 긴급명령권 및 긴급재정처분권은 "내우, 외환,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 때에 발동할 수 있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제헌국회는 또 다른 대통령의 비상권한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통과시켰다. 바로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이었다. 계엄은 병력으로 써 국가비상사태에 대처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긴급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헌법은 계엄 발동에 대한 사전.사후의 어떤 제한 규정도 마련하지 않았다. 건국헌법 자체가 비상시의 위기헌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작 발생을 원천 봉쇄하다

: 경제 관련 조항 주에서는 세 조항이 수정되었다. 1. 자원이 국유화 대상에 '수산자원'을 포함시킨 것이다. 반면 산림도 국유화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수정안은 논란 끝에 부결되었다. 2. 역시 농지개혁에 관한 조항이었다. 예외를 이용해 다시 소작이 발생할 여지를 원천 봉쇄하자는 의견이었다. 3. 마지막으로 수정된 내용은 "운수, 통신, 수도, 전기, 가스, 금융, 보험 기타 공공성을 가진 기업"으로 되어 있는 국영 또는 공영의 대상 기업에 '수리(水利)'회사를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강화된 국회의 예산의결권

: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고전적인 수단으로는 입법권과 함께 국회의 예산의결권을 들 수 있다. 수정안은 두 조항에 걸쳐 제출되었다. 하나는 정부가 "매년 국회의 정기회 개최 초에" 예산안을 제출하도록 시기를 명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계연도가 개시되기까지 예산안이 의결 되지 못했을 경우 국회가 1개월 단위로 가예산을 의결하여 정부가 그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두 조항 모두 아무런 이의 없이 쉽게 통과되었다.

 

헌법, 마침내 태어나다

 

헌법안이 국회에서 최종 통과괸 것은 1948년 7월 12일이었다. 국회를 통과한 헌법은 7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성대한 공포식을 가졌다. 공포된 헌법은 부칙에 의해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되었다. 이어 7월 20일에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이 국회에서 이루어졌다.

 

글을 마치며

 

제헌 작업이 뒤틀리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선명하게 드러난 증상이 정세론이었다. 제헌 과정에서 정세론은 크게 두 방향에서 작용했다. 하나는 시간의 제약이었다. 다른 하나는 헌법 내용에 끼친 영향이다. 정세론이 헌법 내용에 미친 영향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권력구조의 결정에 미친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원칙을 벗어나 헌법이 제정되었다는 집단적 자의식, 그것이 문제였다. 정세론의 두 측면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의 이면에 불과했다. 정세론은 궁극적으로 헌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인식에 맞닿아 잇는 현상이었다. 우리 헌법의 제정은 입헌주의의 불안한, 아니 매우 결함 많은 출발이기는 하였지만, 학실히 출발은 출발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