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5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로 오늘의 진보를 말하다
첫 번째 진보주의자 정도전 - "죽음이 있어도 영웅의 뜻은 남으리"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고려시대 정8품의 무관직) 우연의 딸이었는데, 우연은 김전이라는 중이 여종과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종의 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삼봉집>의 첫머리에 실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가계가 바르지 못하고 미천하다는 소문은 정도전의 출세 길에 암초로 작용한다.
악연의 시작, 정몽주를 만나다
: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일생이 기록돼 있는 행장이나 신도비, 묘비 등을 남겼다. 그러나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당대의 선비였던 정몽주, 이존오, 김구용, 윤소종, 박의중 등과 사귀었는데 특히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능했다. 정도전은 1362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첫 관직으로 총주사목에 부임됐다. 그가 벼슬자리에 오른 지 7년 만에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일어났다. 정도전은 원이 지고 명이 일어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통찰하면서 공민왕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은 정도전 뿐만 아니라 당시 신진 정객들로 떠오르던 신흥 사대부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1370년 정도전은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와 함께 했다. 1375년 정도전은 북원의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해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나주 거평 부곡에 유배됐다. 정도전의 유배 시절은 어떤 면에서 행복했던 듯하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1377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삼봉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여의주를 찾는 와룡
: 1383년은 정도전에게 운명적인 해였다. 9년간에 걸친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다. <태조실록> 7년8월자를 보면 이러한 글이 나온다. <(정도전이) 조선을 개국할 즈음에 가끔 취중에 중얼거리기를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했다. 무릇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끝내 대업을 이루어 진실로 으뜸의 공을 세웠다.> 정도전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성계의 오랜 참모였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동지애적인 친밀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384년 정도전은 전규부령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성균좨주 지제교, 남양부사를 거친 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했다. 1388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옛 따을 되찾기 위한 요동 정벌이 계획됐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네 가지 이유, 즉 사불가론을 펼쳤다. 1388년 6월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은 쿠테다였다. 그리고 무인이었던 이성계의 뒤에는 문신 정도전과 조준이 있었다. 그런데 우왕을 폐위하는 일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민수와 이색은 우왕의 아들 창을 세우자고 주장했고,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자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성계 일파가 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왕을 정도전 일파의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인물로 교체하려는 계획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에게 창왕의 즉위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정도전은 스승이었던 이색, 그리고 함께 학문을 닦았던 정몽주와 멀어졌다. 이색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도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사물을 바르게 다루어야 도리가 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악의 뿌리인 정도전의 목을 베소서
: 1389년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설장수, 서석린, 박위 등과 모의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런데 1391년 수구파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봉화로 유배됐으며 이후 나주로 옮겨지면서 공신녹번(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정도전은 보주(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됐다. 대사헌 강희백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유배된 정도전을 죽이라는 상소를 또 올렸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사 죽임을 당하고, 이 일로 인해 정도전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백성이 군주의 하늘인 나라
: 조정에 복귀한 정도전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사전의 혁파였다. 소작인들은 지주들에게 곡식을 바치는 것 외에도 일꾼의 품삯을 물거나 지주가 요구하는 물건을 사서 바쳐야 했다. 이러한 비용들이 생산량의 70~80%에 해당했다. 정도전은 사전에서 나오는 곡식들을 일정량만 제외하고는 모두 관가로 돌리게 했다. 정도전은 1392년 7월 7일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됐다. 새 왕조가 들어선 후 정도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국가 이념과 통치 제도의 정립이었다. 그리고 사전 혁파를 더욱 강화하여 국가 소유의 공전과 균전을 늘렸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은 한양 천도였다. 1393년 정도전은 한양 천도를 실행하면서 수도 경영을 주도했다. 이어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어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시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과 통치 제도를 정립한 저서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그리고 왕도 정치와 민본주의라는 철학을 담고 있었다.
요동 정벌의 꿈은 무르익고
: 정도전의 정치 역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396년 명 황제 주원장은 표전문제(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하여 황제에게 고하는 상주문)을 구실로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요구를 해 왔다. 당시 명은 조선에 대해 양면 정책을 썼는데, 이성계 정권에 끊임없는 전쟁 위협을 가함과 동시에 명을 지지하는 이방원 세력을 후원했다. 이후 정도전은 요동 정벌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군량이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1376년 6월 14일 조정에서 요동 정벌론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정도전은 왕자들을 각 도의 절제사로 삼아 군대를 관리하게 했다.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분을 앞세워 왕자들과 무장들이 갖고 있던 병권을 완전히 빼앗으려는 의도였다. 당시 이방원은 정도전이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고 마침 태조 이성계는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었다.
이방원, 정도전 일파를 기습하다
: 정도전과 그의 아들들을 죽인 이방원은 조준 등을 앞세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이성계를 돌보던 신하들이 이방원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듣지 않았다.
형제의 피를 부른 조선의 왕위 쟁탈전
: 그렇다면 정도전은 정말 왕자들을 없애려 했을까? 그가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한 것은 사실이었다. 정도전이 왕자들을 살육하려 했다면 군사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편하게 담소를 즐겼겠는가?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법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왕위를 방과(정종)에게 물려준 후 함경도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상왕으로 함흥에 있을 때 서울에서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1400년 마침내 정안군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었다.
조선사 깊이 읽기 01 - 정도전은 왜 혁명을 일으켰는가?
정도전과 정몽주에 대한 엇갈린 평가
: 기울어져 가는 나라 고려에서 태어나 조선 건국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던 정도전, 그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돼 생애를 마감한 권신(權臣)으로 평가됐다. 정도전은 영정조 대에 와서야 재평가될 수 있었다. 정조는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여 탐독했다. 대원군이 집권한 후에는 경복궁을 설계한 공을 인정하여 복권시켰다.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정몽주는 충신의 표상으로 뭇사람들에게 귀감이 된 반면에 건국의 초석을 놓았던 정도전은 모반을 꾀하다 죽은 역신(逆臣)이 됐다.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 하느니
: 정도전은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토지 분배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인구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공전제 및 1/10의 세 확립을 실현하려 했다. 또한 공업.상업.염업.광업 등을 국가 소유의 산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경세론은 광범위한 자작농 창출과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근거한 사대부 등용으로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됐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다.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정치 체제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였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이 있었다. 정도전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라도 교체해야 한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하지만 지식인은 반드시 문(文).사(史).철(哲)을 겸비해야 하고 그 지식인들 중에서 능력 위주로 관리가 등용돼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와 이율곡으로 이어진 민본 정치
: 역사학자 한영우는 <정도전의 정치 개혁 사상>에서 그의 민본 정신이 조광조와 이율곡으로 계승됐다고 주장했다. 오백년 조선왕조의 군사적 기반을 다진 사람이 이성계였다면 사상적 기반을 다진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두 번째 진보주의자 조광조 - "사약이 떨어졌으니 더 가져오게"
조광조는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라 했으며, 감찰 조원강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였던 조온은 개국 공신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찬성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 도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회천(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만났으며 그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익히게 된다. 김굉필은 사림파의 주죽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이 순천으로 유배되기 전까지 2년 동안 그의 도학주의적 실천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화를 잉태하고 있는 사람
: 열여덟에 첨사 한윤형의 딸과 결혼한 조광조는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소학>, <근사록> 등을 토대로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김종직의 학통을 잇는 사림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는 두 번의 사회 직후였던 탓에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렸다. 이 때문에 조광조가 성리학에 심취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10년 조광조는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됐고 이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1515년 6월 용문산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연명으로 그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리고 이조판서 안당이 적극적인 추천이 더해지면서 조광조는 조지서 사지에 임명됐다. 그해 가을 알성시에서는 증광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을 거쳤다. 다시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근거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역설했다. 이후 사간원의 정언에 임명되자 언관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끝내 허락받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 1518년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드디어 그 동안 형성된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그 첫 사업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해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 설치를 건의한다. 1518년 4월 10일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왕조 사상 최초로 현량과가 실시됐다. 그 때 천거된 120명 중 28명이 급제의 영광을 안았다. 현량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들은 기존의 관리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작용했다. 사림파의 정치 행보는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왕도 정치 실현 과정은 저돌덕이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사림파들은 토지 제도를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농민층의 몰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515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해 정전법을 주장하던 사림들은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자 균전법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균전법은 부유한 자들의 토지를 몰수해 가난한 자에게 분배하는 법안이었다. 결국 타협적인 토지 개혁안 두 가지가 중종의 윤허를 받게 됐다. 첫 번째는 50결로 토지 소유를 제안하는 한전제, 즉 토지 소유 상한제였다. 두 번째는 미경작지에 대한 경작을 권유하는 권농책이었다. 한전제가 결정됐지만 부자들에 대한 강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1519년 위훈 삭제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을 기점으로 훈구파 세력은 조광조 일파에 반격을 감행했다.
조광조를 없애야 나라가 편안하리니
: 태조의 건국과 태종의 계위,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 그리고 중종반정 등 정변들을 통해 수많은 공신들이 배출됐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과전과 공신전을 받았다. 그들이 받았던 막대한 공신전은 고려 말의 권문세독들이 가졌던 광대한 농장과 비슷했다. 그들의 토지는 모두 세습됐으며 특히 비옥한 삼남(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지역의 넓은 공전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 때문에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훈구파의 반격, 그리고 중종의 배신
: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 잃어버린 권력을 찾으려던 훈구파들은 마침내 비상수단을 가동했다. 위훈 삭제가 단행된 지 불과 나흘만이었다. 그들은 미리 준비했던 무기를 편전에 진열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시위하게 한 다음 중종을 독촉했다. 이에 중종은 밀지를 내려 신무문을 열게 했다. 그리고 심정과 남곤이 몰래 들어와 임금을 대면했다. 이른바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 조광조 일파를 체포한 홍경주, 남곤 등은 삼엄한 경계를 갖춘 후, 사태가 급해 일일이 국문할 수 없다는 핑계로 이들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자고 청했고 중종도 또한 동의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병조판서 이장곤이 즉결처분을 극력 반대했다. 훗날 이장곤 등은 조광조 일파의 처벌을 반대한 상소를 올린다. 국청이 끝난 후 금부도사는 조광조, 김식, 김정, 김구 등 4명에게는 사형을, 나머지 4명은 곤장 100대를 때리고 3,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낼 것을 청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조광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목은 <경국대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구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구천에 이르면 차등이 없으리니
: 그 후 현량과는 폐지됐고 소격서는 부활됐다. 위훈 삭제됐던 공신들은 다시 복훈돼 빼앗겼던 공신첩과 전답, 노비를 되찾았고 사림파를 두둔했던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됐다. 왕도 정치를 주장했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첫 번째 급격한 혁신 정치로 훈구파들의 분노를 산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도학 정치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조광조가 무고한 줄 알면서도 훈구파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고, 세 번째 이유는 소격서 폐지로 후궁들의 미움을 산 것이었다.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구했던 사림파들은 훈구 세력의 끈질긴 반격에 견디지 못해 끝내 물러났다. 이것이 역사 속에 기록된 기묘사화라는 사건이었다. 훈구파의 끈질긴 상소로 인해 1519년 12월 16일 조광조 등 4명은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먼 섬으로 옮기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잠시 후 대간이 죄를 더하도록 청하자 결국 유배지에서 사사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미래를 예견했던 갖바치의 충고
: 결국 조광조가 믿었던 중종이 추구했던 것은 지치 정치나 도학 정치가 아닌 강력한 왕권이었다.
조선사 깊이 읽기 02 -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조광조의 개혁
선비들의 정치 투쟁, 사화
: 사화의 중심에는 조선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림들이 있었다. 사림의 뿌리는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초야에 은둔했던 고려 충신의 후예들 중 일부가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훈구파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들은 훈구 공신들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어찌 낳기만 하고 실행하게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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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사표가 된 치열한 현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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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진보주의자 정여립 -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1589년 가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었다. 정여립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역모를 꾀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축옥사, 그 피비린내 나는 대사건의 서막
: 당시 동인들은 정여립이 서울로 붙잡혀 오면 그 특유의 달변으로 그 동안의 경위를 해명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인들 사이에서도 정여립이 마음은 부정할망정 반역까지 도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이의 신임으로 핵심 자리에 오르고
: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 그의 자는 인백 또는 대보라한다. 8대 조부인 정인이 김제에 정착한 후 계속 김제, 전주 일대에서 살았고 7대 조부 정승은 고려 때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6대 조부 정가종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정여립과 9촌 간이던 정언신의 고조부 정수홍은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 조정에 있으면서 대사간 등을 지냈다. 아버지 정희증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짜지는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희증은 과거에 급제한 후 익산현감을 지냈고, 1572년에는 첨정(종4품) 벼슬에 올랐으며, 같은 해 12월 6일에는 경상도 청도군수로 부임했다. 정희증의 둘재 아들로 태어난 정여립은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544년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정여립은 스물넷에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당대의 대학자 이이를 찾아갔다. 이이를 통해 성흔을 알게 된 정여립은 그들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익혔고 스승들의 총애를 받았다. 이이는 정여립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보고 요직에 천거했고 성흔과 박순 역시 그를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이이가 세상을 뜨자 그는 돌연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동인의 실력자인 이발과 친해졌다. 그는 선조 18년의 경연에서 박순, 이이, 성흔 등 서인의 영수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시 정여립의 정치적 입장 변화는 매우 심각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군사부일체가 강조되던 유교 사회에서 스승을 배신하는 행위는 인륜을 어기는 강상죄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이를 높이 평가하던 선조는 정여립을 당대의 형서라고 비난했다. 형서는 송나라 때의 유명한 학자 정이천의 제자로서 스승을 배신한 악한 인간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었다.
성인이 일어나 우리를 구할 것이니
: 분노한 정여립은 선조의 밑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낙향했다. 그 사이 조정에 있던 이발 등이 정여립을 추천하여 요직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선조는 정여립을 오만방자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여립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대동계를 만들었다. 대동계는 사농공상과 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조직이었다. 정여립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러한 말을 하곤 했다. "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요, 순, 우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이 아니가? 비록 왕촉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는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일 뿐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나이겠는가'라고 했는데 그는 성인 중에서도 화(和)한 자가 아닌가?" 그의 정치사상은 이렇게 풀이된다. 첫째, 정여립은 왕위 세습을 부인했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 사상을 부인했다. 셋째, 그는 국가가 천하의 공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주인이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번 보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으니
: 정여립에 대한 평판은 당파를 넘어설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중 1587년에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는 정해왜변이 일어났다. 당시 전주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은 정여립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는데 정여립은 주저하지 않고 대동계를 동원했다. 이 때 정여립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훗날 역모를 준비한 것을 증명하는 근거가 됐다.
정여립의 도주를 미리 알았던 정철
: 정여립은 대동계를 중심으로 혁명을 준비했으니 거사년은 1589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서는 기축옥사를 서인 측의 모사로 규정하면서 이이, 정철 등과 가까운 사이였던 송익필 형제의 모략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어떤 것이 진실이었든 간에 기축옥사의 결과는 참혹했다. 지금까지는 정여립의 역모 의지가 분명했을지라도 기축옥사 자체는 정철과 송익필에 의해 확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000명의 선비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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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깊이 읽기 03 - 오래된 미래 대동의 세상
호남에 인재가 나려면 400년이 지나야
: 기축옥사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당시 조선 인구가 500여 만 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네 번의 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만약 기축옥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 정여립은 조선왕조의 근본이념인 불사이군의 절의론을 부정하면서 혁명을 꿈꿨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기축옥사가 아니었더라면 3년 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오래된 민중의 꿈, 대동세상
: 정여립의 선구적인 대동사상과 천하공물론 역시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후 허균의 호민론으로 계승됐고 다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민족 사상의 한 굽이,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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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진보주의자 황진이 - "내 시체를 저자거리에 던져 두어라"
그대는 과연 천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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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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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파멸시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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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연못에서 맺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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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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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운 계약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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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사랑을 찾아 산천을 방랑하다
: 그녀는 모든 생을 걸어 볼 사람이 없었기에 누구도 붙들지 못하고 산하를 방랑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사 깊이 읽기 04 - 통념과 편견을 깨고 자신의 삶을 살다 간 여성
출생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들
: <어우야담>에는 그녀가 태어난 때가 '가정'초라고 실려 있다. '가정'이란 명나라 세종 대의 연호로서 1522년부터 1566년까지를 가리킨다. 황진이이 출생에 대해서는 황진사의 서녀였다고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한다. 그녀가 기생이었다는 사실 또한 맹인의 딸이었을 가능성을 더해 준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볼 때 황진이의 아버지는 신분이 높은 집안의 양반이고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맹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망과 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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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들 사이로 사진의 길울 금 그어 갔던 여인
: 황진이는 유달리 자연을 사랑했고 남자를 사랑했으며 문학을 사랑했다. 그녀는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많이 남겼는데 다른 조선 여성들의 작품과는 차이가 많다. 진솔하면서도 감정이 풍부한 그녀의 시는 순응적이고 체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지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갈파했던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황진이였던 것이다.
다섯 번째 진보주의자 허균 -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허균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지금의 강릉시)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사천 해수욕장이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작은 산이 바로 교산이다. 교산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구불구불 기어가는 듯한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균은 선조 2년 경상감사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를 단보라 했으며 호는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허균의 집안은 대대로 문벌로 이름이 높았는데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두 형 역시 뛰어난 수재로 중진 역할을 했다. 허엽은 서경적의 제자로서 주기파에 속하는 학자였다. 허균의 형제 5남매 중 위로 큰누이와 큰형 허성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둘째형 허봉과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은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이들 간의 우애는 한 어머니에서 난 형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허균은 큰형 허성을 아버지처럼 어려워하고 공경했다.
서얼에게서 시와 세상을 배우다
: 허균은 유성룡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는 한편 서얼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게 된다. 이달은 허봉의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허엽과도 남다른 교분이 있었다. 원주 손곡리에서 살던 그는 허균의 전 생애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린 허균 역시 불합리한 사회 구조 때문에 스승이 뛰어난 재능과 큰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가슴 아파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천재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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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히 성인을 따르지는 않으리라
: 왜란이 지정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큰형 허성은 대사간이 되어 고관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허균은 광해군의 스승이 됐고 이어서 병조좌랑에 임명했다. 허균은 군자를 자처하며 점잔을 빼던 당시 유생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허균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진 일을 일기에 남길 정도로 자신에게 솔직했다. 이러한 솔직함가 대담성은 체면을 중시하던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삼척부사로 있을 때 염주를 목에 걸고 불단을 만들어 놓고는 아침저녁으로 예를 올렸다. 사헌부에서는 다시 상소를 올려 허균이 부처를 섬긴다고 규탄하며 파면하기를 청했다. 허균은 불자 이상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그는 유교가 정치와 인륜에 필요한 것이라면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맹목적으로 불교를 배척했던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허균을 파면시키라는 상소가 연이어 들어오자 선조도 그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기생에게 인간에 대한 에의를 표하다
: 허균은 여색과 불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1608년 허균은 다시 공주목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공주목사로서의 재임 기간 또한 길지 않았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가까이 사귄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당하게 된 것이다. 부안으로 내려간 허균은 기생 이매창, 그리고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과 어울리며 세월을 보냈다.
선조와 임해군의 원수를 갚으소서
: 선조는 조선왕조 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 군주였다. 이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로 하여금 재위 기간 내내 파행적인 정치 행적을 보이게 했다.
끝내 역적의 이름을 벗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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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깊이 읽기 05 -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천재
만약 허균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 허균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명멸했던 수많은 천재들 중에서도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인물로 꼽힌다. 그의 이름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알려졌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명 사신 주지번과의 만남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소설, <홍길동전>
: 무식하고 천하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의식이 없는 민주으 향민, 수탈당하면서 왜 압박을 받아야 하는지 고뇌하는 민중을 원민, 시대의 소명을 스스로 깨달아 올바른 사회를 지향하는 혁명가를 호민이라 했는데, 허균은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갈 자는 바로 호민이라고 말했다.
천의 얼굴 허균, 그는 누구였는가?
: 허균은 좋은 문벌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세상과 타협하려 했다면 얼만든지 부귀영화를 누닐 수 있었을 것이다. 허균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은 삶을 파란으로 몰고 가 급기야 비극적 종말을 고하도록 만들었다.
여섯 번째 진보주의자 이중환 - "사대부가 없는 곳에서 살고자 한다"
이익은 이중환의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였는데 이 덕분에 이중환은 일찍부터 실사구시의 학풍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택리지>를 완성하고서 서문을 부탁했던 사람도 이익이었으며 이익은 <택리지>의 내용을 교열하고 오류를 교정해 주기도 했다. 이중환은 1690년 12월 숙중 대에 태어나서 1756년 1월 영조 대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여주, 자는 휘조이고 호는 청담이라 했다. 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지낸 이진휴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을 지낸 목림일의 딸이었는데 두 집안 모두 남인 계열의 명문거족이었다.
권력 투쟁에 휩쓸린 신진 관료
: 이중환은 그의 나이 스물넷이 되던 171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경종이 즉위하던 당시에는 왕위를 이어 받는 임금이 선왕에게 절을 올리지 않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진언을 했다. 이 말을 들은 경종이 곧바로 일어나 의례대로 네 번 절을 올렸고, 이 일로 인해 이중환은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1720년에는 성균관 전적을 지냈고 1723년에는 병조좌랑과 병조정랑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가 탄탄래도의 인생 항로를 달리고 있던 이 때, 노론 측에서 왕세제(훗날 영조)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소론이 노론을 숙청하는 신임사화로 이어졌다. 노론 측은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했다. 소론 측은 노론의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했고, 결국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조정을 장악한 소론 과격파들은 노론 인사들에 대한 축출 작업을 단행했다. 1722년 3월 묵호룡의 고변 사건이 일어났다. 노론 측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 왔다는 것이었다. 목호룡이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거나 추종자들이었다. 목호룡의 고변 사건은 8개월 동안 국문을 거침 노론 측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남인들의 비극이 시작됐다. 목호룡의 고변이 무고로 밝혀진 것이다. 이로 인해 이중환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옥사에 휩싸이게 된다. 이중환이 목호룡을 만났던 것은 감천찰방으로 있을 때였는데, 평소 이중환은 목호룡과 어울리며 명당자리를 보러 가곤 했다. 결국 이중환은 붙잡혀 들어가 심문을 받게 됐다. 하지만 그해 9월 2일 대사면령이 내려지면서 풀려났다.
유배와 방랑의 세월 속으로 내쳐지다
: 종결된 것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경종이 의문사하고 영조가 임금에 오르게 되면서부터였다. 이에 따라 이중환은 다시 조사를 받게 됐다. 결국 이중환은 10차례가 넘는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1726년 영조는 그를 외딴 섬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다음 해 10월 소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서 이중환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 해 12월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됐다. 훗날 영조는 이 사건의 관련자 수십 명을 사면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 때의 명부에서도 이중환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이중환은 마흔셋까지 유배 중이었던 듯하다. 이로 인해 이중환은 서른일곱부터 예순 일곱까지 유배와 방랑으로 점철된 생을 살게 됐다.
절망을 딛고 나간 민중들의 세상
: 유배에서 풀려난 이중환은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지역의 교통, 지리, 문화, 인물, 특산물 등을 정리하여 <택리지>를 저술했다.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실제로 답사한 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쓰게 된 문제의식은 '혼란한 사회에서 어디에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쓰여진 지리지이기 때문에 단순한 항목 나열의 책들이나 서양의 지리서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특히 <택리지>에서는 자연 지리를 체계가 아닌 우리 전래의 지리 개념인 산경표에 근거한 대간 체계로 그리고 있다. 이중환은 조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억눌리면서도 줄기차게 살아온 민중들의 삶을 목격하게 됐다.
모든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 당쟁의 피해자인 이중환은 당대 사대부들의 처신과 폐단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인심이 좋은 곳을 찾아 헤매기보다 차라리 사대부들이 살지 않는 곳을 택하여 사는 것이 낫다." 이중환이 지목한 곳은 지형이 험하지 않으면서도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기후가 따뜻하여 농사짓기가 편하며, 사람들이 자급자족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 외에도 사람이 살만한 조건으로서 첫째로 계거(溪居), 즉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둔 시냇가로 보았고 두 번째로 강거(江居), 즉 강가로 보았다. 사람이 살만하지 않은 곳으로서 해거(海居), 즉 바닷가 근처로 보았는데 바닷가에는 풍토병 등 여러 가지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닷가 근처가 사람들이 살 만한 곳으로 변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중환이 방랑 속에서 찾고자 했던 곳은 사대부들의 안일과 권세가 충만한 황금의 땅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이었다. 온 나라를 떠돌아다닌 이중환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강경포구 근처인 황산의 팔쾌정이었다. 그곳에서 이중환은 약 2년간에 걸쳐 <택리지>를 지었다.
조선사 깊이 읽기 06 -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맨 30년의 세월
다른 책들을 다 덮어 버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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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는 그 이치가 있으니
: 이중환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복지(福地), 덕지(德地), 길지(吉地), 피병지(避病地), 피세지(避世地), 경승지(景勝地) 등으로 구분했다. 현대 지리학에서 지리는 "인간의 서식 공간을 구성하는 지표의 지역적 성격을 밝히는 학문"으로 규정되고 있다. 지리학 geography이라는 용어는 고래 그리스어 geoearth(땅)와 graphedescription(기술)의 복합어로서 '지표상의 모든 사상을 기술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양권에서는 '땅에 세상의 모든 이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세속적인 것으로 충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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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씨 고결한 사람이 많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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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한 땅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
: 이중환은 <택리지>의 발문에서 "이 책은 살 만한 곳들을 가리려 했으나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 뜻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은 이 땅을 그렇게 돌아다녔으나 진실로 살 만한 땅은 찾지 못했으며 결국 살 만한 땅은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일곱 번째 진보주의자 박지원 - "그대가 사마천의 마음을 아는가?"
박지원은 반남 박씨로 자는 미중, 또는 중미라 했고 호는 연암 또는 연상이라 했다. 아버지는 박사유이고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박필�이며 어머니는 이창원의 딸이다. 박지원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 박사유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박지원은 할아버지 박필균의 슬하에서 자라게 됐다. 관직에 있을 때부터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박필균은 박지원을 불운한 자손이라 생각하여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지원은 열다섯이 될 때까지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 열여섯에 박지원의 처숙이었던 이군문이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신릉군전>을 뽑아들고 구절을 떼어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박지원은 이군문을 통해 학문을 닦을 수 았는 길에 들어섰다.
부패한 시대에 과거를 포기하다
: 박지원은 거취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1771년에서야 비로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곤궁한 세월 속에서 다다른 법고창신의 경지
: 박지원은 그 후 서울 전의감동에 은거하며 사상과 문학 공부에 심취했다. 박지원의 현실 생활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여러 사람들과 사귀면서 새로운 학문인 '북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제비 바위 아래 둘 데 없는 몸을 의탁하고
: 우리 형님 얼굴을 누굴 닮았는가? 아버지 생각날 때면 형님을 보았지. 이제 형님이 생각나면 누구를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보네.
[열하일기], 기왓장과 똥거름의 미학
: 1780년 박지원에게 삼종형인 박명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때 박명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하여 진하사 겸 사은사로 뽑혀서 북경으로 가게 됐는데 박지원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실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그 문물과 여러 가지 풍광을 접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박지원은 중국 여행 중에 써두었던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1783년에 일단 탈고를 하고서 이를 [열하일기]라고 불렀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평생을 두고 추구했던 현실 개혁에 대한 포부를 펼친 저작이었다. 박지원에게 벼슬길이 열인 것은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1786년이었다. [열하일기]를 읽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정조였으나 박지원이 그토록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죄를 씻어내면 벼슬을 아끼지 않으리라
: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백성들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 냈다.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던 그 무렵,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인해 크나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른바 문체반정의 회오리에 휘말라게 된 것이다. 또한 문체를 타락시킨다는 명분하에 청나라 패관소설과 잡서의 수입을 금지했다. 하지만 청나라로부터 책 수입을 금지한 조치의 이면에는 당시 성행하던 천주교가 더 이상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문사들의 문체에 대한 정조의 개입은 18세기에 이르러 모처럼 활발하게 움직였던 문예 운동을 위축시키고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무렵 박지원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정조의 명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이 책을 본 정조는 좋은 경륜문자(經綸文字)를 얻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0년 8월에 양양부사로 승진했지만 상관인 강원도 관찰사와 불화가 일어나 결국 다음 해 박지원은 병을 핑계대고 벼슬 자리를 사임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한 시대를 소신껏 살았던 바지원은 1805년 음력 10월 20일 서울 북촌에 있던 재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절망의 현실에 전략적 글쓰기로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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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불화했던 성인, 박지원
: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우의정이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던 것은 시대와 불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사 깊이 읽기 07 - 다가올 시대를 예비한 파격의 저자, [열하일기]
압록에서 열하까지 그 뜨거운 60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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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희어서야 장성 밖을 나가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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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위대함, 맹목을 뒤집는 유머
: 남만주를 통과할 무렵, 박지원은 말 위에서 잠시 졸다가 낙타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은 "앞으로는 무엇이든 처음 보는 것이 있으면 잠을 자건 밥을 먹건 반드시 내게 와서 일러 주게"라고 말한 후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물신 시대를 예견한 자유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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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에서 북학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 [열하일기]는 단순히 조선 실학자 박지원의 기행문이 아니다. 18세기 청과 조선의 사상과 역사가 집약된 인류의 귀중한 유산이다. [열하일기]를 통해 집대성된 북학파의 사상은 박제가 대에 꽃 피었고 이후 박규수, 오경석, 박영효에 이르러 개화의 이념으로 발전했다.
여덟 번째 진보주의자 정약용 - "나의 책들을 햇불로 태워도 좋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말년을 보냈던 장소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한자로는 양수두(兩水頭)라고 쓴다. 정약용은 영조 대였던 1762년 정재원과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였고 자는 미용이라 했다. 호로는 다산과 여유당이 가장 유명한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천재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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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시대에 열정을 불태운 '젊은 그들'
: 1776년 15세가 된 정약용은 그 해 2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정약용은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간환 등을 통해 이익의 책들을 접하게 됐다. 1776년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경학자였던 녹암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의 강학회에 참여했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권일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등 대부분이 남인 계열의 학자들이었다. 1783년에 드이더 과거에 급제한 그는 곧이어 생원이 되어 태학에 들어갔다. 1785년 정약용은 고향에서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뱃길에서 광암 이벽으로부터 처음 천주교에 대해 듣고 책도 얻어 보았다. 1785년 이른 봄, 이벽의 주재하에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 김범우의 집에서 수십 명이 모여 설법 집회를 열었다 그련데 그때 형조에서 현장을 덮쳤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그 형들인 정약전과 정약종, 그리고 이승훈과 권일신 등 초기 천주교의 핵심 멤버들이 붙잡히게 되는데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라고 부른다.
또 한명의 천재, 정조와의 만남
: 을사박해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정약용의 집안은 무사했다. 1789년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공사의 규제(規制)를 만들어 올렸다. 한강 주교를 설계한 정약용은 그 때부터 정조의 신임을 받게 됐다.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진주목사 재임 중 병사했지만 정약용은 왕명을 받들어 화성성재를 지어 올린 후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했다. 암행어사를 마치고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에 오른 정약용은 화성 축조 공사를 시행하면서 거중기를 발명했다. 화성은 1796년에 준공됐는데 거중기 등을 이용하여 4만냥의 국고가 절약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출세가도를 달리던 정약용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1795년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신자로 몰려 7월 종6품의 홍금정 도찰방으로 좌천당하게 된 것이다. 1799년 정약용은 다시 내직으로 불려 들어가 형조 참의에 제수됐으나 반대파의 공세로 3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벼슬이 됐다.
희대의 마녀 사냥, 신유사옥
: 1801년 정순대비 김씨가 드디어 천주교 탄압을 목적으로 사학금령을 선포했다. 300여 명의 죄 없는 목숨이 희생됐던 신유사옥이 이어난 것이다. 신유사옥의 여파는 계속 이어졌다. 그 해 가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제천에 숨어 있던 천주교도 황사영이 중국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된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조선 왕이 천주교 박해를 중지할 수 있도록 선교사들이 청 황제에게 청원을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그 해 10월 유배지에서 압송돼 서울의 감옥에 다시 갇혔다. 두 번째 죽음의 위기를 비껴 간 정약용에게 강진으로 이배시키라는 명이 떨어졌고 11월 5일 또다시 유배길을 떠나게 됐다.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어 두 형제는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남해의 끝자락에서 학문에 몰도하고
: 나주 광나루를 건너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은 동문 밖 노파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오두막집을 사의재라고 이름 지은 그는 그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머물렀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주역 공부에 전념했다. 그 다음해 가을에는 애제자가 된 이청의 집에서 머물렀다. 정약용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 생활이 8년째로 접어들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으로 온 후 정약용은 비로소 마음 놓고 사색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또한 유배 초기에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해남 연동리의 외가에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도움은 윤선도에서 윤두서 대에 이르는 동안에 쌓였던 외가의 책을 가져다 볼 수 있던 것이었다.
민초들과 함께 했던 질곡의 세월 18년
: 강진에서 보낸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은 정약용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그 인고의 세월 동안 그는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들을 민족의 유산으로 갖게 됐다.
겨울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사방을 두려워하노라
: 1818년 9월 18일 이태순의 간곡한 진정으로 드리어 유배가 풀린 정약용은 고향인 마재로 돌아갔다.
조선사 깊이 읽기 08 - 유배지에서 피어난 애민의 마음
학문은 자신을 다스리는 데서 시작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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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무후했던 광범위한 저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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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이므로 조선 시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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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아웃사이더의 삶과 후대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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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진보주의자 최제우 - "맑은 물 한 그릇을 갖다다오"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용담정의 옛터에서 최제우는 후천개벽의 깨달음을 얻었다. 최제우는 1824년 경주 현곡리에서 최옥과 청주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도언이며 호는 수운 또는 수운재라 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장사꾼이 되다
: 최제우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마저 그의 나이 열입곱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최제우는 열아홉이 되던 해 밀양 박씨를 부인으로 맞아 결혼했는데 결혼한 후에도 형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자 가산은 쇠락하고 글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최제우는 다시 무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도 여의치 않아 2년 만에 그만두었다. 최제우는 무명이나 약재 등 값이 나가는 물품을 취급하는 장사치가 됐다. 그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보따리 장사를 택했던 이유는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큰 고민에 빠진 최제우는 1854년 봄 스스로 해답을 찾기로 결심한다. 최제우는 나라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처자를 데리고 울산으로 갔다.
간절한 기도 끝에 얻은 깨달음
: 최제우는 자신이 창시한 도의 이름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서학에 비견하여 동학이라 지었다. 도를 깨우친 최제우는 동학을 널리 퍼려 했지만 이내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이에 최제우는 울분에 찬 마음을 안고 남원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 때 양형숙, 양국삼, 이경구, 양득삼 등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남접의 시작이었다.
어진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 최제우는 제자들의 청에 의해 다시 포교를 시작했다. 그 때 가장 뛰어난 활동을 보인 사람이 최시형이었다. 최제우가 최시형에게 포교를 허락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전에는 최제우만이 동학의 가르침을 펼 수 있었지만 그 때부터 누구나 동학을 포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관가에서 불순한 세력으로 주목하던 최제우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최시형을 통해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경주 관아에서 그 해 9월 29일 최제우를 체포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최제우는 최시형의 도움을 받아 홍해읍으로 갔다. 그곳에서 교인들을 교화하고 지도하기 위해 동학의 단위 조직인 접을 만들었는데 그 때가 1863년 2월이었다.
꿈으로 다가온 순교의 전조
: 그 무렵 동학에 대한 조정의 탄압을 염려한 최제우는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했다. 1863년 7~8월 부터 경상도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동학 배척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2월 10일 최제우가 나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2월 11일 최제우와 이내겸은 손발에 형구가 채워진 채 서울로 압송됐다. 마침 당시 임금이던 철종이 승하하였다. 복잡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던 조정에서는 최제우의 일까지 다룰 수가 없게 되자 경상감영으로 압송하여 조사하여, 의정부에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지시한다.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조선사 깊이 읽기 09 - 사람이 한울인 평등의 세상
생명 존중 사상으로 승화된 동학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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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님이 사람들 속에서 꽃 피는 후천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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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우리 곁에 다녀간 예수
: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은 이필제라는 직업적 혁명가를 만나서 영해 민란을 주도했고 수십 년 동안의 도피 생활을 이어가며 동학을 재건했다. 그리고 동학은 1894년에 조선을 뒤흔들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산실이 됐다.
열 번째 진보주의자 김개남 - "새로운 남조선을 열어 젖히리라"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김개남은 1853년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개남의 본명은 영주였고, 자는 기선이라 했으며, 동학에 입문하여 활동을 벌이던 당시에는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기범이라 했다. 이후 남조선을 연다, 즉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개남(開南)으로 고쳤다.
운명적으로 만난 두 영웅, 전봉준과 김개남
: 스무 살 무렵까지 학문에 전념하던 김개남은 20대 후반 전봉준을 만나게 된다. 30세 이후 김개남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김개남이 동학에 입문한 시기는 1880년대 말에서 1890년 사이로 추정된다. 특히 그는 1892년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교도들이 탐관오리 축출과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을 때 많은 사람을 동원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는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을 내건 집회가 열렸는데 이때 김개남은 태인포라는 포명을 받음과 동시에 대접주에 임명됐다.
민중의 적, 조병갑의 목을 베어라
: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뿐만이 아니었다. 균전사 김창석과 전운사 조필영까지 가세하여 도적질을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보세를 감면해 달라고 진정했지만 붙잡혀 곤욕을 치를 뿐이었다. 1893년 11월 초순 농민군 지도자들은 죽산 마을에서 봉기의 당위성을 말하는 격문과 사발통문을 작성했다. 사발통문에 적힌 행동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민중을 수탈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민중들의 봉기가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병갑을 파면시키고 전교를 내렸다.
혁명의 서막이 오르고
: 조정의 발표를 믿은 동학농민군은 일단 해산을 결정하고 각자 흩어졌다. 그러나 800여 명의 역졸을 데리고 온 안핵사 이용태는 농민들을 역적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 때 최시형을 비롯한 북접은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남접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옥문을 열고 무기를 접수한 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8,000여 명의 농민군들은 백산에서 조직을 재정비했다.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을 임명한 동학농민군은 호남창의 대장소를 설치한 후 4대 강령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과 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섬멸하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돌아가 귀문귀족들을 궤멸하라. 동학농민군이 백산에서 봉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 사실을 곧바로 조정에 보고하고 감영군과 보부상패로 이루어진 연합 부대를 고부로 출동시켰다. 4월 6일, 황토현에서 운명을 건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의 대승으로 남쪽으로 기수를 돌린 농민군은 황룡상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정읍, 금구, 삼천을 거쳐 4월 27일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쓰라린 다짐 속에 남원으로 물러나고
: 그런데 이 때부터 김개남과 전봉준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김개남과 달리 전봉준은 농민군이 전투에 지쳐 있고 곧 농사철이 시작된다는 점, 그리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전주에 머물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농민군은 서울 진공을 미루고, 5월 7일 조정에서 제시한 27개 폐정 개혁안을 수용하게 된다. 이후 호남 지방은 농민군의 손 안에 놓이게 됐다. 전라도 내 53개 군현에서 농민군이 주체가 된 집강소 민정이 실시됐다.
김개남, 전봉준을 의심하다
: 이후 계속되는 활동에서 김개남은 급진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 전봉준은 여러 가지 현실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수용하는 현실적인 입장을 취했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 때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협정을 맺고 집강소 통치를 공고히 하는 전략을 썼다. 그 때 일본은 한일공수동맹을 맺어 조선의 군사력을 장악했다. 원평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전봉준은 9월12일 삼례에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집결시켰다.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모인 농민군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북접과 남접 사이의 갈등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청주성 전투의 뼈아픈 패배
: 김개남의 청주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청주의 관군이 공주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개남아, 개남아, 짚둥아리가 웬 말이냐
: 청주에서 패한 김개남 부대는 이후 진잠과 연산을 거쳐 남하했다. 김개남 부대는 11월 16일 진안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고 18일에는 고산에서 접전을 벌였다. 원평 전투에서 크게 진 후 마지막 싸움터 태인에서 패배한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한 뒤 입암산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김개남은 어느 지점에서 군사를 해산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김개남이 붙잡힌 다음 날 전봉준 역시 부하 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붙잡히고 만다. 전봉준과 김개남이 붙잡힌 지점은 8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재기를 위해 만남을 준비하던 중이었던 듯하다.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후 아직 농민군이 곳곳에 숨어 있어 중도에 탈출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12월 3일 전주 서교장에서 김개남을 즉결 처형시켰다. 이도재가 김개남을 전격적으로 즉결 처형한 이유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거센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무장한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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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깊이 읽기 10 - 농민이 주인 되는 새 국가 건설의 꿈
동학, 역사의 기억상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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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전쟁의 최정예 군대, 김개남포
: 김개남 부대가 가장 철저하게 반봉건 추쟁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1. 김개남의 성격과 사상에서 비롯된 혁명에 대한 열정이다. 김개남은 평소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애독하는 등 실학사상을 체화한 인물이었다. 2. 김개남을 둘러싼 접주들이 무당, 화전민, 산포수, 범법자, 떠돌이 중, 도붓장수, 백정, 고리장이 등 천민 출신들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3. 김개남 부대가 거점으로 삼았던 남원의 사회 경제적 저력이 김개남포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양반 세력과 기층 계급 간에 활발한 변동이 있었던 지역, 즉 새로운 역사적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마련된 도시였다.
남조선에서 김단야까지
: 김개남은 개혁주의자였던 전봉준이나 손화중과는 달리 조선이라는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국가를 열고자 했다. 동학의 지도자들 중 확실하게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사람은 김개남뿐이었다. 김개남 휘하였던 영호 대접주 김인배 부대는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다. 김인배 역시 광양에서 처형되고 말았지만 나머지 세력은 농민혁명이 끝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결국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 전쟁의 주역이 됐다. 진주형평사(일제 강점기에 백정 등 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평등 사회 운동을 펼쳤던 단체)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그들은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민중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00년 후에 세워진 김개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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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진보주의자 김옥균 - "내 뜻은 양반을 없애는 데 있나이다"
김옥균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인공으로서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혁명을 일으켰으나, 성공한지 3일 만에 막을 내리면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1851년 공주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옥균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백온, 호는 고균 또는 고우라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훈장이었다. 김옥균은 일곱 살 때 재당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돼 서울로 가게 됐는데, 그것의 그의 운명에서 첫 번째 갈림길이었다. 서울 북촌에서 성장한 김옥균은 그의 나이 11세 때 강릉부사가 된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내려갔다. 16세까지 그곳 송담서원에서 공부했는데, 송담서우너은 율곡 이이를 모신 곳으로서 김옥균 역시 이이의 학풍으로부터 영햐을 받았다.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인 청년들
: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웠다. 1872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한 김옥균은 성균관 전적에 임명됐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전임됐고 이후 홍문관 교리가 됐다. 김옥균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오른 것은 집안이 명문이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의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무르익은 조선 개혁의 꿈
: 김옥균은 유대치로부터 승려 이동인을 소개받았다. 김옥균은 그들을 통해 조선이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됐다. 김옥균과 '젊은 그들'은 서구 문명을 소개한 책들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했고 실학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됐다.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 우두머리격이 된 김옥균은 정치 결사체를 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79년 그는 이동인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는 한편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그들은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하면서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 나가려는 정치 세력 즉, 개화파를 이루었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온건 개화파는 부구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행하기는 하지만 민씨 정권과 타협하며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하자는 쪽이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사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민씨 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881년에는 김옥균 자신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시찰에 나섰다.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계층의 청년들을 모집해 일본의 군사 사관학교와 게이오 의숙 등에 유학하게 했다. 하지만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민씨 정권의 태도와 점차 노골화되던 청과 일본의 조선 침략 움직임은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 노력을 벽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그래가 하늘의 뜻을 아는가?
: 어느덧 커다란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은 정치적 압박을 가했고 평화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던 개화파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거사를 일으키자면 민씨 정권을 비호하는 청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개화파는 이 문제들을 일본을 이용해 해결하고자 했다. 김옥균 일파는 경우궁으로 고종 내외를 옮긴 후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사 50여 명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이서 새로운 정부의 조직과 구성원이 발표됐다. 새 정부는 형식적으로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급진 개화파가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권력 집단이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의 마음까지 움직인 개화파는 12월 5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김옥균의 주도하에 밤을 새워 가며 회의를 열어 혁신 정강을 제정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토지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간악한 관리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할 것. 4.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간악한 관리와 탐관오리 중 죄상이 뚜렷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 도에서 정부에 상환해야 하는 쌀을 영구히 면제할 것 등.
역사의 시계를 되돌린 위안스카이의 밀서
: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민비가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경기감사 심상훈이 입궐하여 고종의 안부를 묻으며 고종과 잠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역사를 바꾸는 분수령이 된다. 심상훈은 서울에 와 있던 위안스카이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청나라 군사가 왕궁을 호위하겠다는 것이었다. 심상훈이 궁궐에서 나간 오후 3시부터 위안스카이가 거느린 1500여 명에 이르는 청군이 개화파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제 개화파들은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됐다. 결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어떻게 이 종자를 남겨두겠는가?
: 4월 18일에는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조선에서 군사를 청수시키고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텐진 조약을 체결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끝난 여파는 처참했다.
조선으로부터 온 암살자들
: 혁명에 실패한 개화파들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였던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는 김옥균과 그 일행들 때문에 조선 정부와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그들을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조선의 수구당 정부에서는 김옥균 등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김옥균 처리 문제가 조일 양국 간의 뜨거운 감자로 되자 일본 정부는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라와섬으로 보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자가 저 사람이다
: 오가사라와섬에 이어 훗카이도에 연금됐던 김옥균이 도쿄로 돌아온 것은 1891년이 되어서였다. 그 무렵 조선 정부에서는 다시 김옥균을 암살할 자객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조선에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양화진에서 사지가 찢기고 목이 베인 채 전시됐다. 하지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 머리를 몰래 훔쳐 도쿄로 가져가 묻었고, 한쪽 팔은 반역의 기상이 서렸다는 포항 호미곳에 던져졌다.
어두운 시대를 갈랐던 비운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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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깊이 읽기 11 - 조선 유일의 정치 혁명, 갑신정변
개혁당을 이해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
: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게 된 이유는 대개 이렇게 분석되고 있다. 1.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점거와 공격을 들수 있다. 2. 일본 측의 배신과 일본군의 병력을 빌리는 데 의존했던 개화당의 실수이다. 3. 개화 정채을 지지할 시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아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4. 혁명 수행 과정에서 드러난 기술적인 미숙함으로서 민비와 청나라 측의 접촉에 대한 감시 소홀 등을 들 수 있다. 갑신정변은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구습을 한꺼번에 타파하는 혁명적 개혁이었다.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부끄럽다
: 갑신정변이 높게 평가받을 이유는 1. 한민족이 새로운 개혁을 단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체계적이고 열정적으로 봉선체제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시도였기 때문이다. 2.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위상을 정립한 사건이었다. 갑신정변이 지향했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 근대적 문화와 자주적 국방 등은 이후 모든 개화 운동과 민족 운동들이 추구한 바였다. 3. 갑신정변은 반침략 독립운동에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냈다. 갑신정변은 당시 중국의 조선 속국화 정책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4. 갑신정변은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이후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 비판하면서 이루어졌다.
명예혁명과 갑신정변, 성공과 실패의 차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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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진보주의자 강일순 - "여성이 개벽의 주인이 되리니"
1908년 1월 정읍 입암면 대흥리의 한 집에서는 30대 후반의 남자 강일순과 고판례라는 여자가 '천지굿'을 열었다. 강일순은 이 굿을 통해 당시 사회의 밑바닥 민중이었고, 비천한 신분의 천민이었으며, 보쌈해서 업어가도 상관없을 무당이자 과부에게 종교 지도자의 법통을 넘기고자 했다. 이것으로 강일순은 여성이 주인이 되는 후천 개벽을 엄숙히 선언했다. 그리고 그 날 고판례는 모든 여성의 우두머리하는 뜻을 담은 '수부(首婦)'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다.
가난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던 젊은 날
: 강일순의 본관은 전주였고 자는 사옥, 호는 증산이라 했다. 그는 1871년 11월 1일 정읍의 가난한 선비 강흥주와 권양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선조들이 이조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의 후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지방으로 가서 머슴살이와 나무꾼 생활로 연명하던 강일순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김제의 정씨 집안 처녀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한 후에도 가난은 그치지 않았다. 강일순은 서당의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유.불.선과 점복, 풍수도참에 관련 된 책들을 탐독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인으로 알려졌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동학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을 거으로 추측된다.
혁명 실패 이후 꺼져가는 생명들을 보라
: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강일순은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집 안에 칩거한 강일순은 동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 억압과 질곡 속에서 민중들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897년 스물일곱이 되던 해 강일순은 드디어 집을 떠났다. 조선팔도를 3년 동안 돌아다닌 그는 전국 각처의 이름난 도인들을 만나 공부를 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동학 개벽 이후 민주의 재건, 즉 죽음으로부터 민중의 생명을 살리는 '살림'에 두게 된다.
49일 간의 기도 끝에 깨달음을 얻고
: 강일순은 모악산의 대원사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도를 닦기 시작한 것은 1901년 서른한 살 때의 일이었다. 강일순은 나이 36세가 되던 1907년 5월, 훗날 보천교를 이끌게 되는 차경석과 만남을 갖게 된다.
일상 속에서 실천했던 영적인 삶
: 강일순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 혁명 이후의 혼란상과 함께 민간에 여러 가지 풍설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못난 뭇사람들이 곧 상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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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중의 밥이 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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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깊이 읽기 12 - 민족 전통을 새롭게 체계화한 증산 사상
후천 시대는 상놈의 운수라
: 동학의 후천 개벽 사상이 서양의 생명 파괴적인 강점에 대한 저항을 견지한 것이라면, 강일순의 증산 사상은 상생적인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보천교의 비극과 난립하는 교파들
: 강일순의 죽음 뒤에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70~80개에 이르는 교파를 만들었다.
화엄적 후천 개벽을 꿈꾼 실천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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