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해적의 역사], 앵거스 컨스텀, 이종인, 가람기획, 2002, (081115).

바람과 술 2008. 11. 15. 17:14

머리말

 

들어가는 글

 

해적을 다른 소설들은 파묻은 보물, 인적이 드문 섬, 앵무새 등의 요소들을 들먹이지만, 이런 보조장치는 말단지엽에 불과할 뿐이다. 진짜 해적들의 삶에서 반복되는 것은 배신, 난파, 절망, 질병, 만행이다. 해적들의 삶은 늘 비열하고 잔인하며 단명했다. 해적행위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사회적 속박에 반항하고 싶은 감춰진 욕구 때문에 그 폭발적 힘을 얻고 있다. 영화와 소설에서 묘사된 낭만적 해적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떤 부러움이 깃들어 있다. 굶주린 해적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량한 상선을 마구 노략질한 사실이나, 모든 항구가 그들의 입항을 철저히 거부했던 사실은 그 낭만적 분위기를 해치므로 자세히 거론되지 않는다. 해적행위는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남중국해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해적이 되는가?

: 고대의 갤리 선, 범선 혹은 현대의 고속모터보트를 타고 활동하든 않든, 그들이 해적을 택한 수많은 이유는 똑같다. 해적이 되면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예상 수명이 짧아졌지만, 해적행위는 뱃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더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17세기에 뱃사람들은 상선, 전함 혹은 사략선에서 근무한 뒤 해적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20대였고, 뱃사람들과 해적의 평균 연령은 대략 27세였다. 동기를 부여하는 힘은 자유였다. 구속력을 지닌 사회구조 속에서 한몫 잡고 은퇴할 수 있는 기회는 하층계급의 뱃사람들을 유혹했다. 해적들은 나라, 계급, 인종이 다른 많은 남자들(과 몇몇 여자로)로 이루어졌다. 법원 기록은 해적들의 출신지가 얼마나 다양한지 보여준다. 1715년과 1725년 사이에 카리브 해에서 활동한 7백 명의 해적들은 거의 모두가 영어를 말할 줄 아는 대서양과 카리브 해 출신이었다(영국/미국/서인도제도/스코틀랜드/웨일스 등). 핵적 혹은 사략선 선원에는 아프리카 후예의 흑인도 포함되었는데 미국의 자유 흑인과 도망친 노예들이 합류하기도 했다.

 

사략선 선원(Privateer), 버커니어(Buccaneer), 해적

 

해적행위를 연구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해상 살인자를 묘사하는 용어의 범위이다. 진정한 의미의 해적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떤 배든 마구 공격했다. 바다에서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고 법을 어기는 행동을 마구 하는 것이다. 많은 해적들은 범죄를 감추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면서, 사략선 선원 혹은 버커니어라는 준합법적인 명칭 뒤에 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버커니어는 17세기 초에 히스파니올라-현대의 아이티와 도미니가 공화국-의 프랑스 벽지 주민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용어는 프랑스 말 부캉(boucan, 바비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이 고기를 굽는 방식에 근거한 용어이다. 초기의 많은 버커니어들은 스페인에서 도망친 사람들이고, 스페인 국민을 지독하게 증오했다. 원래의 버커니어들은 17세기 중반부터 지나가는 스페인 배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버커니어'는 나중에 남미 북해 연안에서 영국과 프랑스 골격대를 일컫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포트 로열과 토르투가에 기지를 두고 준합법적인 해적으로 활동했다.

사략선 선원, 프리부터, 코르세어

: 사략선 선원은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지닌 사람 혹은 배였다. '나포 면허장'이라고 부르는 이 계약은 정부가 면허장을 발급하는 대가로 수익금의 일부를 가져간다(일반적으로 배와 화물이 지닌 값의 1/5). 이 계약은 원래 '강제 나포 면허장'으로 불렸고, 군주와 정부가 직접 발급했다. 하지만 17세기 말엽부터 그것은 정부 담당관리들이 발급했으며, 나중에는 식민지 총독이 발급했다. 사실 사략선 선원은 면허를 받은 해적으로서 자국민은 공격하지 않았다. 사략선 행위는 해전의 개념을 유리하게 확장한 것이다. 큰 결점이라면, 전쟁이 끝났을 때 많은 사략선 선원들이 해적으로 둔갑한다는 점이었다. 프리부터(Freebooter)와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특히 프랑스 버커니어에게 붙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이 때때로 사용하는 작고 빠른 배, 플라이보트(Flibote, 쾌속선)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가 19세기에 되살아나, 밀수업자 혹은 봉쇄 돌파선을 가리키게 된다. 코르세어는 프랑스 어 라쿠르스(la course, 사략선 선원)에서 유래했지만, 지중해에서 활동한 사략선 선원과 해적에 적용된 용어였다. 이들의 주요 집단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바르바리 크르세어이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해적으로 여겼지만, 이 이슬람 코르세어는 자신들을 사략선 선원으로 생각했다. 해적에 대한 공통적인 용어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이들 용어 가운데 중요한 것은 '허세꾼(swashbuckler)'이다. 그것은 약탈자에 대한 16세기의 용어지만, 19세기의 소설가와 20세기의 대본 작가들이 이용했다.

 

대중문화에서의 해적

 

해적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대중적 이미지는 역사에서 짧은 기간, 이른바 '해적의 황금시대'에서 비롯된다. 그 시대는 기껏해야 1690년과 1730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하지만 해적의 진짜 전성기는 실제로 1714년과 1724년의 10년뿐이었다.

중앙무대

: 18세기 초부터 해적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찰스 존슨의 블랙비어드가 전형을 이룬 악마적 잔인성의 이미지와 손잡으며 깊이 뿌리 내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근절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해적의 황금시대 이후, 지난 3세기 동안 수많은 이정표가 해적의 기억을 대중문화 속에 간직시켰다. 19세기 초, 낭만적인 소설 작가들과 시인들은 해적에게서 적절한 주제를 가져왔다.

해적행위를 창조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이다. 1883년, 그는 <보물섬>을 출판하여 해적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04년, 또다른 스코트랜드 사람, J. M. 배리가 쓴 연극이 런던에서 공연되었다. 동화와 어린이들의 모험 이야기를 뒤섞은 <피터팬>은 그때부터 어린이들을 매혹시켜왔다. 해적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까지 어린이 책의 인기 있는 주제였다.

은막에 넘치는 해적들

: 역사적인 해적 인물을 묘사할 때면 후크 선장에게서 처음 발견되는 사악한 무능력자의 특징을 해적들에게 부여했다. 할리우드는 허구의 해적을 창조하지 못하고, 기존의 해적 인물을 엉성하게 재탕했을 뿐이었다. 초기의 해적 영화들은 라파엘 사바티니의 소설에 바탕을 두었다. 해적행위에 대한 통속적 인식의 맥락에서 이제 신화와 현실을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해적의 대중적 이미지를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제1장 고대세계의 해적

 

해적들은 고대의 이집트 시대 이전부터 지중해에서 배를 약탈했다. 해상무역은 지중해에서 처음으로 팽창했다. 상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바다에 나갈 때, 해적들은 배와 화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후 2천 년 동안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해적들의 위협도 그 뒤를 따랐다. 이집트,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가 지중해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할 수 없었던 시기에 해적 공동체는 바위투성이 해안을 따라 퍼져갔다. 로마가 팽창하여 지중해 전체를 호령할 때서야 비로소 고대세계의 해적행위는 근절되었다.

 

고대세계의 해적행위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해적들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역사상 최초의 해상무역은 지중해에 근거를 두었다. 따라서 해적들도 그때부터 활동했다. 암흑시대에 해상무역이 점차 감소하면서 해적행위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BC7세기에 아시리아 왕들은 원정대를 파견하여 인도, 중국, 근동과의 해상무역을 막은, 그 지역에 활동하는 해적들과 전투를 벌였다.

해벅을 억제한 로마 제국

: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명이 번영을 누리자 강력한 해군을 필요로 했다. 이집트의 신왕조 시대 이후 처음으로 해군 초계함과 원정대가 해적들에게 반격했다. 이러한 해군의 활동이 동부 지중해에서 해적행위를 상당히 감소시켰지만, BC2세기 들어 지중해 전체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 서부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벌이고, 동부에서는 마케도니아 도시국가들이 쇠퇴하는 바람에 해적 공동체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로마의 세력이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자 해적 공동체는 점차 궤멸되고, 그들의 영토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세운 뒤 지중해는 로마의 바다가 되고, 선박은 몇 세기 동안 해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서기 5세기 초,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서부 지중해를 혼란으로 몰아 넣었고, 해적행위는 급속히 퍼져갔다.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은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했지만, 아랍(혹은 이슬람)의 팽창은 동부 지중해의 안전을 위협했다. 비잔틴 제국은 강력한 해군의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그 지역이 안전지대로 되돌아간 적은 없어도 로마 전성기에 못지않은 안전을 누렸다. 해적들과 침략자들은 그후 5세기 동안 해상에 나서지 못했다.

 

갤리 선

 

역사상 최초의 해적들은 노 젓는 해적선을 이용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해양민족'과 BC10세기의 후기 크레타 해적들은 당대의 벽화에 보이듯이 일종의 갤리 선을 이용했다. 지중해 청동기 문화의 붕괴에 뒤이은 '암흑의 시대'에서 몇 가지 배가 나타나 항해했다. BC8세기부터 페니키아 배의 삽화는 갤리 선으로 알려진 전함의 형태인, 2단의 노를 갖춘 빠른 배를 보여준다. 전함은 BC6세기까지 더 전문화되었다. 해적은 결국 표적 배를 침몰시키기 전에 화물의 약탈을 원했으므로, 규모가 더 작은 해적 갤리 선은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해군보다 전문화되지 않았다. 이 해군의 전문화는 해군이 BC5세기에 3단 노의 갤리 선을 개발함에 따라 계속되었다. 3단 노의 갤리 선은 뛰어난 전함이지만, 대양에는 적합하지 않아 상선을 호위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규모가 작고 항해에 적합한 해적의 갤리 선에 유리했다.

갤리 선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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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민족

 

'해양민족'은 BC13세기 말과 12세기 초까지 이집트 제국을 침략한 사람들에게 붙인 집단적 이름이다. 이집트 인은 해양민족에서 특히 여섯 부족의 이름을 댔다. 그것은 샤르다나, 데니엔, 펠레셋, 세켈레슈, 웨세슈, 트제케르 부족이다. 해양민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로 해적은 아니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배를 타고 이주하는 공격적인 부족이었으므로, 크게 보아 해적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게 패배한 뒤 대부분의 해양부족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는 증거가 있다.

첫번째 해적 동맹

: 그들은 해상무역을 시작했지만, 동시에 해적행위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 해양민족은 페니키아에서 발전했다. 도르(현재의 이스라엘)에 정착한 트제케르는 최초의 기록된 해적 피난처를 만든다. BC10세기까지 해상무역은 해적행위로 바뀌어, 트레케르 경제의 주요 생업이 되었다. 그들이 선박과 해안도시를 습격하며, 이집트를 제외하고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쳤다는 무서운 침략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해양민족은 역사상 해적 최초의 동맹이다. 하지만 해양민족은 공략만 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정착했다.

 

그리스 세계의 해적행위

 

청동기 시대 말엽과 로마 공화국이 번영할 때 해적행위는 동부 지중해에 흔해빠진  일이었다. 어떤 지역은 해적의 은신처가 되어 선박을 공격하는 기지로 이용되었다. 수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나중에 해적행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영해에서 해적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해군을 창설했다. 크레타는 고대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로에 걸쳐 있는, 해적의 이상적인 은신처였다. 크레타는 약 8백 년동안 내내 해적의 기지였다. 크레타 도시들은 생포한 노예들과 밀수품의 번화한 시장을 제공했다. BC2세기에 로도스의 초계 함대가 동부 지중해에서 해적들을 제거하여 이 무법 천지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쪽으로 더 나아가면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이 해적의 외진 은신처를 제공했다. 림노스의 해적들은 아테네까지 습격했다. 그러자 아네테는 해군 원정대를 보내 BC6세기에 섬을 함락하고 해적을 궤멸시켰다. BC3세기 아이톨리아 해적들은 에게 해를 지배하고 연안 정착지에게서 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다. BC192년에 로마가 아이톨리아 동맹을 정복하자, 해적들은 다른 곳에서 기지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실리시아로 이동했다.

넘치는 해적기지

: 해적행위는 아드리아 해의 북동 해안을 따라 들끊었다. BC3세기 그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로마의 증대하는 무역량에 따라 그들은 선박을 약탈하기에 적합한 위치를 차지했다. 해적들은 심지어 코르푸, 산타 마우라, 케팔로니아에 전진기지를 배치했다. 수많은 해적들이 계속하여 활동하다가 AD9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다른 그리스 인들은 서부 지중해에 정착하고, 로마에게 진압될 때가지 해적활동을 벌였다. 에투루리아는 BC6세기와 5세기에 그리스의 선박을 자주 공격했지만, 이것은 진정한 해적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정책에 가까웠다. 진정한 해적기지는 시칠리아 북쪽 해안의 리파리섬, 발레아레스 섬, 리구리아 해안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지는 먼저 카르타고에게 정복당하고, 나중에 로마에게 점령당하여 서부 지중해에서 조직적인 해적행위는 끝났다.

 

실리시아 인     

 

실리시아는 고대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 은신처였다. 실리시아 인들은 역사상 최대의 해적집단을 형성하고, 소아시아, 현재의 터키에 해당하는 남부 해안에 자리잡았다. BC2세기 말과 1세기에 실리시아는 해적의 은신처였으며, 그들의 공격은 동부 지중해에 혼란을 초래했다. BC2세기 초,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셀레우키아 왕들은 실리시아 해안에 따른 초계를 중단했다. BC190년, 로마 군대가 셀레우키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결고, 아파메아 조약이 2년 후에 조인되었다. 그 조건 아래 서부의 소아시아(현재의 터키)는 로마의 보호령이 되고 셀레우키아 함대는 철수했다. 로마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소아시아의 세력은 폰투스의 세력으로 바뀌었는데, 그 왕들은 로마보다 실리시아 해적들과의 동맹을 선호했다. 그 결과, 해적 공동체는 번창하고, 수많은 살마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해적들의 경제행위가 그렇듯이, 그들은 우호적인 공동체에 의존하여 약탈한 화물과 노예를 시장에 공급했다. 숙련된 노예를 용이하게 공급하는 것이 보장되기만 하면 로마의 지방총독과 시민들은 '모르는 체'했다.

로마의 지배를 위협하다

: 2세기 말, 해적들은 로마의 국력에 집적 도전하여 무역을 방해가히 시작했다. 원로원은 해적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BC101년, 원로원은 최초의 반해적법을 통과시켜 로마의 소아시아 지역 항구에서 해적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자 실리시아 해적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중해 전역에 대한 약탈에 나섰다. BC86년에 해적함대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의 해상에서 로마 유일의 전투함대를 물리쳤다. 이때부터 해적들은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여 어떤 적이든 압도할 수 있었다. 해적들과의 동맹 덕분에 미트리다테스는 서부 지중해를 지배했다. 미트리다테스가 해상을 지배하는 한편, 로마 군대는 지상을 완전 장악했다. BC67년, 로마는 준비를 갖추었다. 폼페이우스 대장군이 선두에 나서서 실리시아를 압도적으로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실리시아 인들은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로마 공화국의 생존을 위협하며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해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폼페이우스 대장군

 

BC67년, 폼페이우스는 새로운 반해적법에 따라 집행권을 수여받았다. 이 집행권은 폼페이우스에게 6천 탈렌트를 배정하고, 전함 5백 척과 12만 명의 로마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하여, 80km 안에서 시민군을 징집하고 과세하는 권한을 주었다. 그의 임무는 지중해에서 해적행위를 뿌리채 뽑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게 준 권한은 엄청나서 군사적 독재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로마가 해적의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폼페이우스는 40일 이내에 지중해 전체를 철저히 소탕하고 한 줌의 해적들만 미해결로 놔두게 되었다.

자비로운 폼페이우스

: 폼페이우스는 관용을 베풀어, 대부분의 해적들을 실리사아의 내륙 혹은 그리스로 옮겨 살게 했다. 다른 해적들은 폼페이우스의 자비로운 조건을 따르고, 남아 있던 거점들은 항복했다. 반해적 작전이 3개월에 걸쳐 완결된 결과, 해적들은 지중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소탕되었다. 수많은 해적선과 함께 120군데의 기지와 요새가 파괴되었다. 유익한 부산물은 해적들의 약탈품이었다.

 

제2장 중세의 해적들

 

바이킹 해적들이 암흑시대의 유럽 바다를 쑥밭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비잔틴 제국의 서구 문명의 수호자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동부 지중해를 지키고 있었다. 비잔틴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그들은 봉건 유럽의 통치자들이 해적행위를 경제적 무기로 이용한 것같이 자신들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해적들을 불러모았다. 두 정책은 해상의 혼란을 초래했다. 한자 동맹이 북유럽에서 해적들과 싸웠지만, 지중해를 괴롭힌 해적행위를 종지부를 찍은 것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뿐이었다. 해적행위는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대륙을 휩쓴 종교적.국가적 투쟁에 점점 이용되었다.

 

중세의 해적들

 

비잔틴 제국은 천 년에 걸쳐 동부 지중해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암흑시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호의적이었지만, 제국의 국경이 줄어들고 군사력이 감소됨에 따라 비잔틴 정책은 해상을 지키기 위해 해적들을 불러모았다. 오스만 제국의 번영은 이 해적 공동체의 영향력이 13세기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스만투르크는 해적행위를 종교와 영토 팽창의 유익한 확장수단으로 생각했다. 코르세어들은 적의 해상무역과 해안선을 약탈했지만, 오스만 영토와 무역을 보호했다.

사략선 행위의 출현

: 기독교라는 기치 아래 뭉친 중세 유럽은 자신들의 영토를 둘러싼 무어 인, 투르크, 이교도들과 일으킨 종교전쟁뿐만 아니라, 토지와 직위에 관련된 내분에 줄곧 휩싸였다. 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해상무역에 피해를 가져왔다. 13세기 초부터 피해를 입은 선원들에게 '나포'면허장을 발급하면서부터 유럽의 군주들은 사략선 행위의 기본원칙을 정립하게 되었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계속된 전쟁은 국가의 해적행위를 증가시켰다. 이 해상의 약탈잘들은 16세기의 해적선으로 발전하여 전쟁, 종교, 국가 이익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무자비한 약탈에 나섰다.

 

중세 유럽의 배

 

중세 초에 북유럽의 표준적인 무역선은 크로느(knorr)였다. 이 배는 8세기부터 유럽의 바다를 지배한 바이킹 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해상무역이 13세기에 북유럽에서 확대되자 이 배들은 능률을 높이기 위해 거듭 개조되었다. 13세기 중반까지 북유럽의 선박 설계자들은 코그(cog)라고 불린 크노르를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북유럽의 바다를 순식간에 지배하는 선박이 되었다. 1300년대 중반에 코그의 규모가 커지고, 이물과 고물의 상부구조(혹은 '선루')는 진정 한앞 갑판과 뒷갑판으로 발전하여 좋은 전투승강장을 제공했다. 이 선박들은 항해에 적합하여 한자 동맹이 널리 무역선으로 사용했고, 그 당시 모든 전함과 해적선의 바탕이 되었다. 무역선과 전함의 차이는 다만 선원의 규모와 전투 승강장의 확장된 규모일 뿐이다.

라운드십, 갤리엇, 캐러벨, 캐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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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해적

 

비잔틴 해군의 붕괴는 재난을 가져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제국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뱃사람을 군인으로 모집했다. 12세기 말부터 베네치아와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의 갈등은 이들 뱃사람들의 체포로 이어졌다. 이것이 그후 10년 동안 비잔틴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해적행위로 되돌아갔다.

해적에서 로도스의 군주로

: 비잔틴 제국이 붕괴되면서 13세기 말에 해적의 진정한 전성기가 찾아왔다. 1260년대 초, 미카엘 3세 황제는 이탈리아의 봉건영주들이 점령했던 그리스의 대부분과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다. 비잔틴 황제는 해적들을 정치적 도구로 삼았다. 황제는 해적 두목들을 고용하여 비잔틴 해군을 재건하고, 이들 코르세어가 에게 해에서 이탈리아 선박을 공격하도록 장려했다. 황제를 섬기던 해적, 조반이 데 로 카보는 해군사령관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278년에 로도스의 군주가 된다. 로도스와 오스만 제국의 점증하는 해군력은 14세기에 그 지역의 무법 상태를 억제했다. 비잔틴 해군은 콘스탄티노플 주위의 바다를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투르크의 전함들은 에게 해와 동부 지중해를 지배하여 중세 이탈리아 해적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유럽의 해적들

 

야만족의 침략에 뒤이어 유럽은 암흑시대로 알려진 시기에 빠져들었다. 침입자들은 해상무역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8세기 말의 바이킹은 어떤 무역의 재기든 공격하여 꺾어버렸다. 10세기와 11세기에 봉건체제가 도입되었지만, 스칸디나비아의 무역상들은 요새화된 기지들을 세우고, 그 기지들은 12세기까지 점점 항구로 발전했다. 해상무역의 증대는 동시에 해적행위를 불러왔다. 1200년대에 이르러 국가와 도시의 주체 세력은 좀더 선별적으로 공격하게 되었고, 유럽의 봉건영주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해적행위를 이용하려고 했다. 도시들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봉건영주에게 수입을 가져다주게 되자, 해적행위는 정치적.민족적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241년 발트 해의 독일 도시, 뤼베크와 함부르크는 연합하여 한자동맹을 맺었다. 그것은 해상무역을 관리하고 해적행위를 억제하는 상인조합이다. 다른 자유도시(즉, 비봉건적인 도시)들이 참가하여 1300년대까지 19개의 항구가 이 무역단체에 가입했다. 한자 동맹은 큰 세력이 되고 북유럽 해에서 해적과 싸우는 데 앞장섰다.

위협받는 영국 해협과 발트 해

: 14세기 말과 15세기 초까지 지속된 유럽의 전쟁은 해적행위를 부추겨 급증하게 했다. 영국 해협에서 들끊는 해적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끊임없는 전쟁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손실을 입은 선주들에게 군주가 발급한 '나포'의 권리는 이런 형태의 국가적 습격을 장려했고, 그것은 결국 해적선에서 적선을 약탈하게 하는 '나포 면허장'으로 발전했다. 영국이 프랑스와 평화를 이루고 질서를 회복하자 15세기 말에 확산된 해적행위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해적들의 공격은 16세기까지 북유럽 해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제3장 바르바리 해적

 

15세기 말부터 150년 이상 하나의 해적 공동체가 지중해를 괴롭혔다. 고도로 조직된 이 코르세어 공동체는 바르바리 해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들이 기지로 사용된 일련의 북아프리카 항구들을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그들은 해적행위와 오스만 제국의 해군 복무를 겸했다. 또한 16세기 내내 그들은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 가혹한 종교전쟁의 최전선에 섰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규모가 적은 쾌속 갤리 선을 이용하여 유럽 선박과 해안 마을을 습격했고, 그들의 기지는 노예와 약탈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되어 붐볐다.

 

바르바리 해적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일련의 도시국가들은 15세기부터 바르바리 해적들이라고 알려진 코르세어 집단에게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들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섬기며 해적행위와 이슬람 군주를 위한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해안의 수많은 소도시를 포함하여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등의 도시들은 남부 지중해 해안에 뻗어 있다. 이 해안도시들은 사하라 사막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자원이든 바다에서 찾아야 했으므로, 지방 영주들은 항구를 해적의 은신처로 만들기 위해 15세기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코르세어를 장려했다. 16세기에는 해적 내부에서 지방 영주를 임명하는 경우가 흔했으며, 바르바리 해안 일대에서는 해적행위를 정치와 경제의 일부분으로 삼았다. 바르바리 국가들의 정책은 해적들의 공격 표적을 비이슬람 선박으로 제한했고, 때로는 기독교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의 조약에 따라 공격 표적을 변경하기도 했다.

수지 맞는 무역 기회

: 투르크 군대는 바르바리 해안의 도시국가들을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여기고, 지방 영주를 도와서 항구들을 지켜주었다. 코르세어들이 오스만 해군의 복무를 겸해 해적행위를 벌이는 경우가 흔했다. 16세기 말, 지중해는 일종이 교착상태에 들어섰다. 발칸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의 갈등은 이어졌지만, 바르바리 해안을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여겨져 안전을 더이상 위협받지 않았다. 바르바리 해안의 항구들은 계속하여 코르세어들에게 후원자 역할을 했지만, 해적들의 전성기는 17세기 중반에 끝났다. 19세기 초까지 지나가는 배를 여전히 공격했지만,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의 지배에 있어서 더이상 기독교 세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실 많은 코르세어들은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지만 해적이 되기 위해 이슬람 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지방 영주인 타이페 라이세를 위한 일을 했지만, 선장(혹은 라이스Rais)마다 자신의 배를 소유하고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

 

갤리 선

 

전형적인 갤리 선에는 20~30개의 노 혹은 긴 노가 실려 서너 사람에서 여섯 사람까지 노를 젓는다. 이 인간 엔진들은 바다에서 천천히 항해하다가 순식간에 전속력을 낼 수 있었다. 미풍이 부는 지중해에서 이것은 당연히 범선보다 유리한 이점을 갤리 선에게 안겨주었다. 범선이 중무장할 수 있고 더 높은 구조를 갖고 있어 공격에 대해 성채 역할을 하지만, 항해 속도가 느리고 기동성은 떨어졌다.

지중해 갤리 선의 변형

: 무장을 잘 갖춘 코르세어들은 바르바리 해적선을 타고 있다가 적선의 배후로 다가가자마자 갑판으로 뛰어들곤 했다. 선호하는 전술은 앞 갑판에 떼지어 몰려들어 적을 압도하면서 백병전을 펼치는 것이다. 갤리 선 이용이 17세기에 내내 감소했지만, 노 젓는 여러 가지의 코르세어 선박은 19세기 초까지 바르바리 해안을 따라 계속 이용되었다.

 

바르바로서 형제

 

틀렘센에서 덫에 빠지다

:        

 

무라트 라이스

 

무라트 라이스, '바다의 선장'

:

 

울루지 알리

 

존경받는 사령관

:

 

몰타의 기사

 

지중해의 모든 코르세어들이 바르바리 해안에 기지를 둔 이슬람 신자들만이 아니었다. 몰타의 기독교 기사단은 기독교 코르세어로 활동했고, 섬의 요새를 지나가는 이슬람 선박을 괴롭혔다.

십자가 행진을 하는 코르세어들

: 기사단은 17세기에 준합법적인 코르세어의 활동을 계속했지만, 그들의 세력은 쇠퇴했다.

 

제4장 스페인 대해와 바다의 유랑자들

 

1550년대 중반부터 30년 동안 스페인의 신세계는 스페인 선박과 해안 개척자들이 일련의 파괴적인 공격을 당하는 표적이 되었다. 프랑스가 먼저 이 해적행위를 저질렀고, 나중에 영국이 뒤따랐다. 이곳에서 종교와 국가의 경쟁은 탐욕과 뒤얽혔다. 스페인 대해의 부는 전설적이다. 영국 여왕의 이름으로 카리브 해를 약탈하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바다 유랑자(Sea Rovers)들은 그 지역을 점차 유린해갔다. 이 영국 선장들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존 호킨스 경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는데, 본국에서는 국가적 영웅이지만 스페인에게는 해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 대해

 

1492년, 바하마 군도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스페인을 식민지 확장의 길에 나서게 했다. 1494년 6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교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외교관들과 함께 신세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토를 둘로 나누었다. 16세가 말에 카리브 해는 불규칙적으로 뻗은 초호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스페인 대해로 알려졌다. 스페인은 그곳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내내 착취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까지 스페인이 카리브해를 독접 지배하다가, 그후 유럽의 다른 강대국이 서인도제도에 많은 발판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스페인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우면서 유럽의 초기 개척지를 줄기차게 공격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17세기 중반까지 카리브 해에서 식민지 세력을 넓혀 공격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 영토는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는 해적선단에게 후원자 역할을 했다.

스페인 대해의 형성

: '스페인 대해'라는 용어는 원래 카리브 해의 일부분, 남미의 북쪽 해안에만 적용되었다. 16세기 말까지 스페인 대해는 카리브 해의 모든 스페인 영토와 섬들, 심지어 멕시코 만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스페인 대해의 요새화된 수많은 항구 주위에 바탕을 두고, 항구들은 스페인 보물선 함대가 안전하게 닻을 내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무역을 독점할 수 없게 된 스페인의 신세계는 17세기와 18세기 들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해적 최대의 전리품

: 약 2백 년 동안 스페인의 갈레온 선은 대서양을 항해하며 유럽의 상품과 개척자들을 스페인에서 남미로 실어나르고, 신세계의 보물을 가득 싣고 되돌아왔다. 16세기의 해적들은 스페인의 이 보물선을 중요한 표적, 즉 최대의 전리품으로 삼았다. 16세기의 스페인 제국의 영토는 유럽과 신세계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서, 왕은 이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신세계의 은을 필요로 했다. 보물선단이 없었다면 스페인은 아마도 파산했을 것이다.

플로타의 연중 운용

: 스페인 대해의 선단이 1530년부터 1735년까지 해마다 세비야를 향해 출발했다. 스페인 대해에 들어오면 선단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티에라 피르메 선단은 포르토벨로로 항해하여, 페루의 풍부한 광산에서 은을 가져와 파나마 지협으로 보내고 항구의 창고에 쌓았가. 갈레온 선은 다음에 카르타헤나로 항해하여, 에콰도르의 금, 콜롬비아의 에머랄드, 베네수엘라의 진주를 가져왔다. 신 스페인 선단은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로 가서, 멕시코 은과 마닐라 갈레온 선단은 태평양을 건너 실어온 상품(주로 동양의 실크, 도자기, 향신료)을 가져왔다. 온두라스 소선단은 현대 온두라스이 트루히요를 찾아가 중미의 남색 염료와 향신료를 실었다. 세 선단은 모두 쿠바의 아바나에 집결한 후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귀국 준비를 했다. 스페인 대해를 침입하는 두 가지 목적은 스페인 제국을 혼란시키고 전리품을 얻는 것이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스페인의 그런 수송 체계는 쇠퇴했다. 선단의 규모는 끊임없이 줄어들어 17세기 말에는 그 숫자가 10척 이하였다. 1740년에 이르러 보물선단의 체계는 끊어지다시피 했고, 독자적인 전함이 귀중품을 스페인에 실어날랐다. 그렇게 하여 일찍이 세계의 부러움을 사며 대담한 해적들의 최대 표적이 되었던 상업조직은 사라졌다.

 

바다의 유랑자

 

스페인은 신세계의 영토와, 자신들의 생산한 부를 빈틈없이 보호하며, 영국과 프랑스 같은 침입자를 물리치려고 애썼다. 이들 국가는 엄청난 스페인 해외 제국의 부를 보면서 용기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는 스페인 대해 주변에 개척지를 만들고, 스페인 배와 해안 정착지를 공격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훗날, 이 식민지들이 파괴되자 프랑스 사람들은 해적이 되어 스페인 제국을 습격했다. 프랑스와 나중에 네덜란드가 스페인 대해를 약탈했지만,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곳을 떠맡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 군주가 해적행위를 묵인하다

: 영국 원정대는 1570년대와 그후 20년 동안 간헐적으로 카리브 해 모험에 나섰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해적들의 활동을 비밀리에 묵인하고, 1577년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 해적행위를 은밀하게 재정지원 했다. 1588년, 바다의 유랑자들은 스페인 무적함대와 벌인 해전에서 활약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해적행위와 사략선 선원의 한계가 애매모호해졌다. 해적들은 종교적.국가적 이유 때문에 싸웠지만, 동시에 스페인 신세계로부터 약탈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빼앗으려는 탐욕도 아주 강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략선

 

유선형과 효율성으로 무장하다

: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보상 없는 대량 파괴

:

 

존 호킨스 경

 

일련의 혼란

:

 

위그노 해적

 

프랑스 국왕은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정한 스페인의 신세계 지배를 거부한 채, 스페인 배와 신시계의 정착지에 대한 공격을 재가했다.

모험 좋아하는 신사, 무모한 병사, 불만 품은 상인

: 1550년말까지 프랑스 사략선 선원들은 카리브 해를 거침없이 휩쓸고 다닐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 군주는 스페인 대해의 항구에 대한 방어를 강화해야만 했다. 그후 프랑스 해적의 습격은 본국에서 종교전쟁의 확산 때문에 뜸해졌지만, 1560년대까지 위그노는 계속해서 스페인 대해를 공격했다. 스페인 국왕은 프랑스 해적들을 없애기 위해 페드로 데 메넨데스를 보냈다. 1565년, 그의 소부대는 포트 캐롤라인을 함락하여, 포로로 잡은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로써 신세계에서 프랑스 해적이 조직적인 저항은 붕괴되었고, 스페인 대해의 무역을 혼란시키는 일은 영국의 바다 유랑자에게 맡겨졌다.

 

페드로 데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신세계 제국을 보호하는 일에 점차 점점 더 관심을 기울였다. 1562년 4월 데 메넨데스는 연합 보물함대의 총사령관(제독)으로서 스페인을 떠나 카리브 해로 항해했다. 그의 훈령은 따끔한 경고를 담았다.

몰래 접근하여 프랑스 인들을 몰살시키다

:

 

제5장 버커니어

 

프랑스의 무법자들은 17세기 초 몇십 년 동안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짐승 사냥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들은 스페인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1620년대에 이르자 카누와 소형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스페인 배들을 습격했다. 그후 그들은 숫자가 몇천 명으로 불어나면서, 토르투카의 기지에서, 나중에 자메이카, 포트 로얄의 기지에서 스페인 대해를 횡행하며 유린했다. 이 습격자들은 원래 프랑스의 사냥꾼을 부르는 말, 버커니어(buccneers)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빌려왔다. 그들 가운데 낀 헨리 모건 경 같은 사람들은 스페인 공격에서 이익도 올리는 동시에 영국의 국력도 강화시켰다. 버커니어들은 약 50년 동안 스페인 대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버커니어

 

스페인에 증로를 품은 사람들이 1620년대에 히스파니올라와 쿠바를 오가는 스페인의 연안 선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페인에 의해 쫓겨난 프랑스 개척민들이었다. 초기 버커니어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 난폭한 개척자들이었다. 1640년대에 사냥꾼보다는 오히려 뱃사람으로 바뀐 버커니어들은 거친 셔츠에 모직 반바지를 입고 모자를 썼다. 초기 버커니어들의 전술은 단순했다. 그들은 소형 돛단배 혹은 노 젓는 보트(쾌속 평저선 혹은 함재정)를 타고 스페인 배의 고물에 기어올랐다. 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총 한번 발사하지 않고 항복하는 경우가 흔했다. 1655년, 영국이 자메이카에서 스페인을 몰아냈을 때 많은 버커니어들이 포트 로열에 옮겨왔다. '해안의 형제들'로 알려진 자메이카의 버커니어들은 주로 영국인이었고, 자메이카의 총독들은 스페인에 대한 공격을 잇달아 부추겼다. 1660년대까지 버커니어들은 스페인 도시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를 전후하여 버커니어들의 행동은 절정에 달해,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배와 도시르 약탈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숙련된 용사

: 버커니어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 1650년대 이후 해안도시를 공격할 수 있었다. 공격할 때면 그들은 신속하고 강력한 특공대 스타일의 전술을 좋아했다. 버커니어들은 원래 벽지 출신의 사냥꾼들이었으므로 총과 칼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무법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버커니어들은 행동규범을 발전시켰다. 초기 시절부터 버커니어들은 함께 싸우면서 생활하는 한 쌍의 남녀로 움직였다. 이러한 행동은 포트 로열까지 이어져, 아내들이 함께 협력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당시의 기준에 비추어도 무척 잔인한 행동을 저질렀다. 그들에게 공포는 일종의 무기였고, 잔인한 기록은 적으로 하여금 저항을 단념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1670년의 마드리드 조약에 뒤이은 스페인과 영국이 평화를 이룩하자 영국은 버커니어들에게 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슬루프 형 범선

 

버커니어 시대(1640~90년)와 뒤이은 해적의 황금시대(1690~1725년)에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해적들은 정규 화물선을 특별한 수요에 따라 처리했다. 배를 나포하면, 팔거나 부수든지, 혹은 해적선으로 개조했다. 다른 배에 비해 그들이 더 좋아하는 종류의 배가 있었다. 이상적인 배는 더 강한 적을 붙잡거나, 유사시 재빨리 달아날 수 있을 만큼 빨라야 했으므로 소형의 가벼운 배를 선호했다. 이 같은 배는 슬루프 형 범선, 쌍돛 범선, 스쿠너 선이었으며, 어떤 해적들은 잘 무장된 대형의 배를 선호하기도 했다.

슬루프 형 범선

:

스쿠너 선

:

쌍돛 범선

:

 

헨리 모건 경

 

포르토벨로를 점령하여 몸값을 요구하다

:

스페인 대해의 재앙

:

모건, 처벌을 면하다

:

 

장 '롤로네'

 

잇따른 유혈에의 욕망

:

 

크리스토퍼 밍스 경

 

혼란 덕분에 구출되어 훈장을 받다

:

 

바를톨로메오 엘 포르투게스와 로크 브라질리아노

 

포로를 돼지 통구이처럼 굽다

:

 

미셜 드 그라몽

 

드 그라프와 함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다

:

 

카르타헤나의 약탈

 

전리품의 두번째 몫

:

 

토르투가와 포트 로열

 

토르투가는 히스파니올라(현대의 아이티)의 북서쪽 해안에 떨어져 있고 거북껍질 형태를 하고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프랑스 이름인 'Isle de la Tortue'는 거북섬을 뜻한다). 섬은 먼저 프랑스 사냥꾼의 피난처로 쓰였다. 스페인 군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1620년대까지 작은 개척지를 세웠다. 1620년대에 프랑스 사냥꾼들은 수입을 늘리기 위해 해적행위를 시작하여, 지나가는 스페인 배를 공격했다. 스페인은 1630년대에 섬을 징벌하기 위해 내내 공격했지만, 끝내 초기의 버커니어들을 몰아내지 못했다.

포트 로열 - 신세계의 소돔

: 1655년, 자메이카를 점령한 영국은 자연적으로 방어 가능한 항구를 남부 해안에서 발견했다. 반도가 수심이 깊은 만에 둘러싸여 있어, 영국은 요새화된 항구를 급히 세우고 포트 로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트 로열은 스페인 대해를 습격하기 좋은 위치였고, 훔친 물건을 손쉽게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을 제공했다. 버커니어 행위는 166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1692년 6월, 엄청난 지진이 이 도시를 덮쳤다. 대부분의 선창이 있는 북쪽은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고, 해일이 도시에 밀려왔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재난에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재난을 보고 '사악하고 반역적인 포트 로열'에 내린 신의 천벌로 생각했다.

 

제6장 해적의 황금시대

 

항해 역사를 살펴보면 해적들은 17세기 말에 폭발하듯 쏟아져나왔다. 역설적으로 '해적의 황금시대'로 불린 그 시대는 1690년부터 1730년까지 40년 동안 이어졌다. 최악의 피해를 입은 곳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이었지만, 해적들은 더 멀리, 특히 서아프리카 해안과 인도양까지 진출했다. 그 시대는 당시에도 전설적인 유명한 해적들을 많이 배출했다. 블랙비어드와 바르톨로뮤 로버츠 같은 해적의 명성은 이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놓았다. 해적의 급증은 환경 탓이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났고 항구에는 직업을 잃은 선원들이 들끊었으며, 정식 고용은 드물었다. 법원과 해군의 압력이 서서히 해적 붐을 억제했고, 1730년에 이르자 해적의 시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산발적인 해적행위가 출현하기는 했지만, 40년간의 해적의 황금시대는 대중문화와 낭만적인 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해적의 공격을 받아서 희생자가 된 사람들에게 '황금'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해적의 황금시대

 

'해적의 황금시대'로 알려진 이 시대는 아무리 후하게 계산하더라도 40년(1690~1730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해적행위는 카리브 해와 아메리카 대서양 해안에서 엄청나게 급증했다. 약탈 대상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상선이나, 서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로 노예를 실어나르고 다시 술과 설탕을 선적하여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배들이었다. 해적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는 1714년부터 1722년까지 8년뿐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황금기는 '황금의 10년'이라고 부를 수초자 없다. 자발적인 해적행위가 엄청나게 급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카리브 해에서 버커니어 시대의 종말은 버커니어 출신의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찾도록 강요했다.

실업이 해적행위를 부추키다

: 둘째, 영국이 한쪽이 네덜란드와 또 한쪽에 프랑스와 일으킨 새 전쟁은 사략선을 계약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셋째, 1714년에 이룬 평화는 아메리카 항해 공동체를 몰락시켰다. 아메리카 식민지와 카리브 해의 정치적 상황은 해적을 도와주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 강한 정부가 없었으므로 해적들은 대서양 해안을 사냥터로 삼았다. 적어도 10년 동안 대부분의 식민지 총독은 해적들이 팔려고 항구에 가져오는 밀수품을 환영했다. 하지만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대규모로 증가하는 해상무역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총독들은 영해의 해적행위를 단속했다. 1730년까지 사나운 해적이 활동하던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해적기를 휘날리다

 

17세기 카리브 해에서 버커니어들은 모국의 국기 아래 싸웠다. 버커니어 기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목적은 분명했다. 무시무시한 공포 이미지를 불러일으켜 희생자들은 위협하는 것이다. 검은색에 바탕을 둔 해적 혹은 버커니어 기의 경고의 붉은 깃발에서 직접 유래하여 졸리 루즈라는 집단적인 이름 아래 분류되었다. 붉은 기 혹은 검은 기를 휘날린다는 생각은 적을 위협하여 즉각 항복을 받아내고, 목숨을 건 싸움을 되도록 피하여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깃발의 목적은 잔혹하다는 평판을 전하여, 희생자로 하여금 순순히 항복하게 하는 것이었다.

외국 기로 속인다

: 해적들은 분명히 사략선이라는 외관을 보여주기 위해 국기를 올렸다. 샤략선은 자국의 적선만 공격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말과 18세기에 때때로 평화를 유지하여 모든 사략선 권한이 무효화되었을 때, 그런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적들은 규칙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기라면 뭐든지 달았다.

해적기의 상징

: 해적기의 요체는 희생자를 위협하여 싸우지 않고 항복을 얻어내는 것이다. 특별한 도안은 해적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은 누구와 맞서는지 곧 알게 된다. 18세기 초, 공통적인 그림의 배후에 숨은 상징은 묘비에서 따온 표시, 비유적인 그림, 교회 조각, 심지어 상인의 기호 등 널리 알려지고 쉽게 인식되는 것이었다.

해적기의 일부 수정

: 알여진 바에 의하면, 1700년부터 붉거나 검은 해적기의 바탕에 추가된 표장들은 점점 해적선임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고, 해적선장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다른 상징이 사용되었다. 최초의 상징은 죽음을 나타내는 해골이었다(또한 그것은 본 사람들은 죽이겠다는 위협이었다). 해골은 흔히 또다른 죽음의 상징인 교차된 뼈 혹은 교차된 검과 함께 사용되었다. 두 개의 상징은 17세기와 18세기 묘석의 대중적인 그림이다.

 

에드워드 티치 : 블랙비어드

 

블랙비어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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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코' 잭 래캄과 여성 해적들

 

센세이션을 일으킨 리드와 보니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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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뮤 로버츠

 

사격 방향으로 도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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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벨러미

 

가공할 만한지만 무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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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베인

 

'캘리코' 잭에 의해 추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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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드 보넷

 

성공의 새로운 기회

:

 

하웰 데이비스

 

운이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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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무기

 

해적들은 보통 싸우지 않고 으름장만 놓으면서 희생자를 사로잡는 것을 선호했다.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면 학살이 자행되었다. 위험을 판단하는 것은 해적선장이 맡은 몫이었다. 해적선이 희생자와 싸워야 한다면, 그들은 사냥감 배에 뛰어드는 백병전을 선호했다. 그러면 포격으로 피해를 주는 기회가 줄어든다. 백병적에서는 개인 무기를 휴대했는데, 주로 머스킷 총, 나팔총, 피스톨 등이었다.

효과적인 무장

: 포격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전쟁이 흔했으므로, 모든 배는 무장을 했고 대부분의 선원들은 무기를 능숙히 다루었다. 해전에서 이기면서도 약탈 대상의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려면 어떤 탄약을 언제 적재할지 휜히 꿰고 있어야 했다. 무기를 아껴 사용했던 해적들은 포격을 삼갔다.

 

우즈 로저스

 

총독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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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프로비던스

 

1776년, 해적 헨리 제닝스는 바하마의 중심에 위치한 뉴 프로비던스 섬의 주요 개척자인 나소의 정박지로 항해하다가 해적의 완벽한 은신처를 발견했다. 뉴 프로비던스에는 17세기 말까지 원주민이 없었다. 포트 로열이 버커니어들에게 폐쇄되자 뒤이어 얼마 안되는 버커니어들이 1680년대에 뉴 프로비던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스페인 원정대가 1684년 그들의 정착지를 소탕했다. 1714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종말은 많은 사략선 선원들이 해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러자 뉴 프로비던스는 그들에게 천혜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곳은 주요한 무역항로에 가까웠고, 알맞은 바람은 이 사냥터로의 항해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로저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다

: 1717년까지 5백 명이 넘는 해적들이 섬을 기지로 이용하였으며, 1717년 말에서 1718년 초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해적 인물사전이라 할 만했다. 무역업자들과 상인들은 해적들과 함께 다녔다. 섬의 경제는 해적들과의거래를 통해 번영했다. 마침내 이 해적소골에 대한 소식은 런던 당국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국 정부는 해적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그 권위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공권력이 확립되고, 해적 피난처로서 뉴 프로비던스의 시대는 끝났다.

 

제7장 인도양의 해적들

 

17세기 후반, 유럽과 아메리카의 해적들은 온난한 인도양에 들어가 더할 나위 없는 사냥터를 발견했다. 인도와 아랍의 선박들은 대양의 북쪽 해안을 따라 약탈 대상인 재화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인도양의 해상에서 가장 풍부한 약탈품을 찾아내게 되는데, 이것들 중에서도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이 최고의 돈벌이가 될 만했다. 그 무역선은 동방의 부를 유럽의 시장으로 실어날랐다. 인도양을 건너는 배를 약탈했던 해적들에는 헨리 에버러, 윌리엄 키드, 토머스 튜와 같은 악명 높은 인물들도 있었다. 이 해적사회에는 세상에는 덜 알려졌지만 휠씬 성공적인 인도 출신의 앙그리아 해적 가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30년 동안 인도양은 해적활동의 온상이었으며, 불멸의 해적 전설을 낳았다.

 

인도양의 해적들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해에서 돌아왔다. 그뒤부터 인도와 유럽의 새로운 할로가 아프리카 해안을 경유하여 열렸다. 그 결과, 유럽인은 16세기에 자신들의 세력권을 인도양까지 넓혔다. 16세기와 17세기 초, 포르투갈은 이 항로를 지배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와 영국 상선들도 정규 항해에 나섰다. 무역회사들이 번창하여 17세기 말까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설립되고, 경쟁국인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식민지를 통해 극동무역을 조종했다. 버커니어들이 카리브 해에서 활동을 멈추게 되자, 수많은 해적들은 약탈하기 위해 다른 곳을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곳은 노예무역이 전성기에 달한 아프리카의 서해안이었다. 1690년까지 노예해안의 포르투갈 독점이 강제로 개방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노예선들이 밀어닥쳤다. 해적들의 위협은 해군의 초계화, 노예무역 기지의 요새화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해적이 나타날 수 있는 바다

: 인도양에서는 해적행위는 낯선 현상이 아니었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중무장 전함과 전투 갤리 선으로 북부 인도양을 초계하는 한편, 아랍 항구는 자체 해군을 유지했다. 이런 대책을 세워도 그칠 줄 모르는 해적행위를 억누르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해적들이 출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헨리 에버리와 토머스 튜와 같은 해적들은 선박들을 약탈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약 20년 동안 유럽의 해적들은 인도양을 주름잡았다. 마다가스카르 섬은 이상적인 해적기지가 되었다. 월리엄 키드나 에드워드 잉글랜드와 같은 해적들이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을 공격하자, 이는 곧 런던에서 항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어 해상호위를 도입하고 해군초계를 강화시켰다. 1720년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해적의 위협은 지나갔지만, 휠씬 더 억누르기 힘든 해적이 다시 나타났다. 18세기 전반에 인도 서해안의 해적들은 현지 선박들과 동인도회사의 배를 공격해도 처벌받지 않았는데, 견고한 요새와 숙련된 해적 선단 덕분에 보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이들의 근거지를 대규모로 소탕한 뒤에야 비로소 해적행위의 재앙은 인도양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토머스 튜

 

진짜 이야기

:

 

월리엄 키드

 

일련의 실패

:            

 

헨리 에버러

 

인도 보물선단을 약탈하다

:

 

에드워드 잉글랜드

 

힘들게 얻은 승리가 쓰라린 고통으로 바뀌다

:  

 

칸호지 앙그리아

 

앙그리아 해적단의 계속되는 성공

: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의 동해안에서 402km 떨어진 이 커다란 섬은 해적들이 인도양의 부유한 선박들을 공격하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이 섬은 해적의 황금시대(1690~1730년) 내내 해적기지 역할을 했다. 섬의 내륙이 광대하고 비밀 정박지가 많아서, 바다의 무법자들에게 불가침의 장소로 여겨졌다. 해적들은 부족간의 전쟁에 참여하고 노예 약탈을 했다. 이것은 소총을 가진 이 유럽인들에게 부수적인 수입원이 되었다. 마다가스카르는 또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서 첫번째 만나는 피난 정박지여서, 인도로 향하는 배들에게 인기 있는 급수지였다. 1680년대 카리브 해역에서 버커니어 시대가 끝나면서, 인도양으로 진출한 전 버커니어들이 마다가스카르 북부 기지들을 이용하여 인도양 선박들을 약탈했다. 1690년대까지 마다가스카르에 몰려드는 해적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미송의 해적 천국

: 1705년까지 마다가스카르 해적들의 공격이 빈번해지자, 영국 의회는 이 위협을 줄일 방안을 의논해싸. 호송제도가 마련되고, 전함들로 구성된 함대들이 주요 해적 피난처 부근을 순찰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해적활동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엽기적인 해적의 처형법

 

황금시대 초기에 아메리카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 해 섬들의 몇몇 식민지 총독들은 노획물을 시장에 가져다 주는 해적들을 유욕한 수입원으로 간주했었다. 이들 식민지 지도자들의 마음이 바뀐 것은 1714년에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던 전쟁이 종식되면서 따라온 경제 붐 때문이었다. 대서양의 양쪽에서 반해적행위 입법과 해상 안전 요구가 증가하면서 해적활동은 엄중하게 단속되었다.

엽기적인 해적 처형법

: 공해와 위험 해안지역에서의 해군 순찰과는 별도로 호위제도가 해적의 위협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물리적 해군력과 크게 강화된 반해적행위 정책으로, 1731년까지 극동을 제외한 세게의 대양들에서 대부분의 해적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해적행위를 근절하는 데 기여한 주요 요인은 이런 활동의 심리적 효과 덕분이었다.

 

해적의 재판과 처형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 붙잡힌 해적들은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유죄가 입증되면 거의 예외 없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17세기 말 동안에는 해적선장들과 주모자들만이 처형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해적의 황금시대 동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경고한다는 차원에서 선원 전체를 처형하는 일도 빈번했다.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재판은 해사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처형의 사례들

:

 

제8장 사략선 시대

 

수세기 동안 사략선원들은 유일하게 합법적인 해적들이었다. 여기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헨리 모건 경이 포함된다. 사략선 해적활동은 대성양과 카리브 해가 유럽 세력들 간의 거의 상시 전쟁 상태였던 18세기 동안 널리 퍼졌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식민지 선원들은 영국 선박을 약탈하여 막대한 금전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1812년 전쟁은 이런 사략선 활동에 부채질을 했고, 전용 선박들을 이용한 아메리카 인들만이 유일하게 성공했다. 사략선원들에게 선박을 공격하는 합법적 권리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필요했으며, 평화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선박 공격을 그만두기를 거부했던 사략선원들의 다음 행로는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해적의 길이었다.

 

사략선 시대

 

사략선 활동은 본래 그 사략선 소속의 정부가 합법화한 해적행위였다. 정부는 최소한의 관여를 하며 사략선에게 적국의 선박들을 공격하도록 허용했다. 정부 당국은 사략선 선장에게 적국의 선박들을 약탈하도록 사략 면허장을 발급해주고, 수익은 선주, 선원, 정부가 분배했다. '사략선'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 처음 쓰였지만, 공식 인가를 받은 해적들은 그전부터 수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사략선 활동은 유럽 수역뿐 아니라 아메리카 수역에서도 수행되었고,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 해 지역은 특히 수지맞는 사냥터로 입증되었다. 1740년대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략선 활동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적이 동맹으로 바뀌다

: 1775년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미국은 사략선 활동을 영국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영국해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했지만, 이 강력한 해군함대들을 피할 수 있었던 작은 사략선들은 영국 상선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812년 전쟁에서 사략선 정책의 가치가 증명되었다. 미국 선주들이 국가 후원의 해적행위에 적합한 '슈퍼 사략선'들을 출항시켰던 것이다. 미국 사략선들은 대서양에서 영국 선박의 사냥을 계속했다. 또 유럽 수역과 태평양, 그리고 인도양까지 공격의 범위를 넓히며 영국 상업의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820년대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 물결이 일면서 멕시코와 남미의 반란 정부들은 사략 면허장을 수백 장 발급하여, 사략선들로 하여금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영국과 미국 사이에 평화가 선언되면서 카리브 해 지역은 실업한 사략선원들로 넘쳐났다. 1820년대 동안 영국과 미국해군은 바다를 이잡듯이 뒤져 이들 사략선원에서 해적으로 돌아선 자들을 소탕했다. 그리하여 아메리카 수역에서 수세기 동안 계속된 해적행위, 버커니어 활동, 사략선 활동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프랑스 사략선

 

18세기 대부분 동안, 영국해군은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에 맞서 일련의 대규모 함대 전투들을 벌였고, 그때마다 승리했다. 영국해군의 이런 놀라운 성과에 맞서, 적국들은 어쩔 수 없이 함대 전투보다는 상선들을 공격하여 영국에 손해를 입히는 데 주력했다. 영국과의 빈번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사략선 활동은 프랑스가 선호하는 해결책이 되었다.

영국 수역에서의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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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략선

 

1755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와 개별 식민지들은 사략선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비록 8년간의 전쟁 동안 대륙 해군은 제국실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바다에서 수많은 미국 사략선들이 영국 상선 3천 척 이상을 공략했다. 선박 손실은 영국이 계속해서 싸울 의지를 잃게 만든 원인이었고, 1781년 요크타운에서 육군의 패배로 이어졌다.

전문화된 선박의 승리

: 1814년 미국 항구들에는 500척 이상의 사략선들이 있었다. 이 해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영국은 미국에게 주의를 돌렸다. 봉쇄선이 설정되면서 그해 말에 미국의 해상 상업은 정체상태에 빠졌고, 사략선 활동도 사실상 멈추었다. 사략선 활동을 못하게 되자 대서양 쪽 선주들은 전쟁의 종결을 요구했고, 마침내 1815년에 평화가 선포되었다.

 

존 폴 존스

 

만신창이가 된 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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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마지막 해적

 

나폴레옹 전쟁과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 말기에 미국 수역은 사략선원들로 넘쳐났다. 이 야만적인 뱃사람들은 공해상에서 직업적으로 약탈을 했고, 그들 중 수백 명이 해적이 되었다. 1815년부터 10년간 새로운 해적들이 카리브 해를 누비며 선박들을 약탈했다. 이 노략질은 마침내 해적에 대한 공동전선을 편 영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해군작전으로 종식되었다. 1820년대 말에 마지막 해적의 시대가 끝났다. 공해상에서의 몇몇 산발적인 야만적 강탈 사례들을 제외하면, 대서양 수역은 해적행위로부터 휠씬 안전해졌다. 

 

마지막 해적들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과 1812년 전쟁이 끝나면서 사략선원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 중 많ㅇ느 선원들이 해적으로 전환하여, 쿠바와 푸레르토리코 같은 곳의 외딴 항구들에서 활동했다. 스페인과 신세계 식민지들 간의 오래 계속죈 전쟁은 그들이 해적행위를 하도록 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1826년까지 멕시코, 페루, 칠레가 독립했고, 이들 신생 국가들은 모두 사략선원들을 고용하여, 국가를 대신하여 스페인과 싸우게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대양은 다시 항해하기에 안전한 곳이 되었다.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그리고 미국의 신흥산업)으로 유발된 원재료 수요의 증대로, 선주들은 화물에 대한 엄청난 수요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그 결과 카리브 해와 미국 항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배들로 북적거렸다.

강도들의 소규모 약탈

: 새로운 해적들 대부분은 삼류 약탈자들로, 노획할 것도 거의 없는 배들을 공격하는 데 만족했다. 이 당시 미국의 중상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미국 선박이 목표가 되었다. 1815년과 1820년 사이에 미국 선박 수백 척이 공격받고 약탈당하면서 해상 보험비가 폭등했다. 1820년부터 미국해군과 영국해군의 노력으로 카리브 해안에서의 해적행위는 근절되었다. 악명 높은 해적들이 소수 남아 있긴 했지만, 1820년대 말까지 만연했단 해적행위의 위협은 크게 줄었다.

 

장 라피트

 

밀고자에서 희생자를 거쳐 동맹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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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페드로 기베르트

 

불 속에서의 탈출

:

 

베니토 데 소토

 

운명의 조우

:

 

바러태리아, 캘버스턴, 쿠바

 

전시의 합법적 약탈 기회들이 없어지면서 마지막 해적의 물결이 카리브 해를 휩쓸었고, 이 지역의 정치적 불안을 틈타 해적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많은 해적들은 자신들의 노획물을 팔 수 있을 만한 시장이 필요했다. 이것은 보통 대도시를 뜻했으며, 노예경제를 지탱해줄 지역들이면 더 좋았다. 해적 피난처는 또한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지만, 이는 시장과 가까울수록 좋다는 시장원리와 양립할 수 없는 요소이기도 했다. 1820년부터 해적활동의 중심이 쿠바 북쪽 해안으로 이동했다. 스페인 식민지 관리들은 해적들의 공격을 눈감아주었고, 수입원이 되는 해적행위를 적극적으로 고무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쿠바의 해적행위 위협에 지속적인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해군함대로 해안을 순찰하고, 해적행위를 눈감아주는 관리들을 엄중 단속하도록 스페인 당국에 외교적 압력을 넣었다. 영국과 미국의 순찰활동이 강화되면서 해적들은 바다에 등을 돌리고 육상 강도가 되어 쿠바의 농장들을 공격했다. 이 약탈자들은 스페인 육군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많은 강도들이 붙잡혀 처형당했다.

 

데이비드 포터

 

1815~20년 동안은 카리브 해에서 해적의 마지막 부흥기로, 대서양 연안, 멕시코 만, 카리브 해의 선박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국 선박의 손실이 증가하면서 선주들과 미국 시민들은 대책을 요구했다. 1821년 먼로 대통령은 반해적 함대를 조직하여, 데이비드 제독에게 지휘를 맡겼다.

모스키도 함대를 지휘하다

: 이 미국 함대는 얕은 홀수선의 작은 선박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모스키토 함대(소함대)'로 알려져 있다. '모스키토 함대'란 말은 미국 수병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름 몇 달 동안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며 황열과 말라리아가 발생하여, 이 섬의 해군병원 병동마다 열병 환자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포터의 함대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쿠바, 플로리다 섬들의 유명한 해적 피난처들을 소탕했다. 수백 명의 해적들이 체포되었고, 해상무역의 안전이 다시 확보되었다. 1825년까지 미국과 카리브 해역에서 해적행위는 사실상 말끔히 사라졌다.

 

제10장 극동의 해적행위

 

남중국해에서의 해적행위는 세계 역사상 유일한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해적행위와 정치가 결합하여 제국 왕조들의 흥망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한 해적제국을 만들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좀더 남쪽의 동남아시아 수역에서의 해적행위는 부족 성격을 띠고 수행되었는데, 각 문화권들은 서로 싸웠을 뿐 아니라, 지나가는 동서양의 상선들을 약탈했다. 때때로 중국 황제는 해적행위를 잘 막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때가 되면 기발한 정책을 채택하여 해상의 무법상태를 제압하곤 했다. 극동에서의 해적행위는 결국 유럽 세력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증기선과 현대적 무기를 내세워 해적 정크선단들을 궤멸시켰다.

 

극동의 해적행위

 

남중국해 수역의 해적들에 관한 기록은 589년 수나라가 건국되기 전부터 있었다. 수나라 건국 후 1368년에 명나라가 세워질 때까지 수세기 동안 중앙 정부가 세워졌다 무너졌다 했다. 왕권으로도 광대한 중국 제국의 연안 수역을 통제할 수 없었던 때가 많았다. 13세기와 14세기 동안 해상무역이 번창하면서 중국 상인들이 인도양까지 활동무대를 넓혔지만, 명 통치자들은 15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중국 수역의 통제권을 해적들로부터 되찾았다. 이 통제 방법은 지방통치자들에게 해적행위를 진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으로 하여금 도둑을 잡게 하는 편리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 유럽의 해양 여행자들이 극동에 도착하여, 중국, 일본, 필리핀과 유럽 간의 통상로를 열었다. 16세기에 일본 해적이 위험이 줄어들자 중국의 해적 제국은 남중국해 경계 해안까지 퍼져나갔으며, 동남아시아에서는 부족 해적행위가 만연했다.

제위 계승, 재기, 종말

: 중국의 혼란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해적 제국들이 지배자들은 대규모 해적행위를 이끌었다. 18세기 초에 청나라가 강력해지면서 중국 수역에서 해적행위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8세기 한 세기 동안에 해적행위는 베트남으로 확대되었다. 이 나라의 정치적 격변들은 바다의 약탈자들에게는 매력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18세기 말에 남중국해에 해적행위가 다시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베트남 타이손 왕조의 안전한 비호 아래에서, 나중에는 정을의 해적 왕조의 형태로 성행했다. 극동에서는 결국 유럽 식민 세력들이 만연한 해적행위를 종식시켰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자존심이 꺽인 후에 유럽 인들이 이 지역 해상 교역로를 유지할 책임을 떠맡았다. 1천 년 역사를 가진 해적행위가 유럽 테크놀로지에 의해 끝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극동의 위해하고 강력한 해적 제국들의 시대가 마침내 종언을 고했다.

 

정크 선

 

중국의 정크 선은 극동의 보편적인 해상 선박이었다. 수세기 동안 정크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해상교통의 주역이었으며, 명나라 시대 중국 상선들은 이 배를 타고 멀리 일본이나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17세기 공선 이외의 일체의 해상교통을 엄금하는 중국의 해금정책으로 중국 수역에서 해상 활동은 크게 제한받았다. 정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활동해 온 배이다.

가족 사업으로서의 해적행위

: 대부분의 해적 정크 선은 나포한 무역 정크 선을 개조한 것이었다. 적어도 1807년 아니면 아마도 그 이전에, 중국 해적 정크 선들은 거의 가족사업으로 운영되었다. 비록 19세기 유럽 인들이 정크를 '원시적인 배'로 묘사했지만, 정크 선의 돛 모양은 바람을 잘 받았고, 무엇보다 남중국해 수역에 잘 맞았다.

 

정성공(국성야 : 콕싱가)

 

해적행위를 하며 복수를 염원하다

:

 

정 을

 

배우자와 연인

:                 

 

삽응차이

 

불의의 일격을 당하다

:

 

인도네시아 열도

 

동남아시아의 섬들은 해적들의 이상적인 피난처였다. 이 지역의 부족 해적단들은 유럽 식민 세력들의 선박과 다른 지역 부족들의 배를 약탈했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유럽 인들이 지배했던 조계지들을 빼면 이 지역 대부분은 작은 부족들로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집단들의 자주 바뀌는 제휴관계와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이 열도와 그 바닷길을 지배할 세력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주로 네덜란드의 무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유럽 인들이 증가하면서 이 직역의 불안정한 분열 구도가 변했다.

인도네시아 해적들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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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오늘날의 해적

 

오늘날의 해적

 

1820년대 카리브에서 그리고 1860년대 극동에서 해적들이 소탕되었지만, 그래도 해적행위는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의 사례를 뒤돌아볼 때, 세계 어디에서든 해적행위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체제의 붕괴였다. 그 결과로 무법행위를 할 토대가 조성되는 것이다. 19세기 초반의 페르시아 만, 19세기 말의 발칸 반도, 20세기 초의 극동의 바다들에서 해적행위가 그랬다.

유엔의 허점을 뚫고 항해하라

: 국제해양고동체의 대응은 국제법 때문에 장애를 받고 있다. 유엔은 해적행위를 "공해상에서 민간 선박의 승무원이나 여객의 의해 사적 목표를 위해 저질러지는 불법적 폭행이나 억류행위 또는 약탈행위"로 규정짓는다. 피해자들은 설사 공격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격이 사적 목적이었고 공해상에서 저질러졌음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현지 정부들이 자신들의 수역에서 해적행위를 강력히 근절한 의지가 없는 한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의 해적소굴

 

아프리카의 위험수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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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외모

 

'해적들의 황금시대'에 활약하던 해적의 현대적 이�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모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용적인 해적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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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규약

 

해적의 이미지는 무법자의 그것이지만, 그들은 흔히 스스로 행동 규약을 부과하곤 했다. 이것은 어떤 사회적 동기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해적 강령들이 언급되었지만, 다음의 예는 바르톨로뮤 로버츠의 해적선원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남아 있는 극소수의 해적 규약 중 하나이다. 1. 모든 승무원은 현안에 대해 동등한 표결권을 가진다. 어느 때든 노획한 식료품과 주류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공동선을 위해 절약하기로 결정한 경우를 빼고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2. 모든 승무원은 차례로 전리품 목록에서 공평하게 요구할 수 있다. 자신의 적당한 몫 이외에도 옷가지를 한 벌 더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동료의 보석이나 돈을 1달러 어치라도 사취하면 무인도에 내버려질 수 있다. 동료의 것을 훔치면 코와 귀를 자르고, 고생스러운 해변에 내버림을 당할 것이다. 3. 주사위놀이든 카드 놀이든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해서는 안된다. 4. 촛불은 밤 8시에 끈다. 이후에 술을 마시고 싶다면 불을 켜지 않고 갑판에 앉아 마셔야 한다. 5. 모든 선원은 전투에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늘 각자의 장비, 단검, 권총을 정비해야 한다. 6. 소년이나 여자를 배에 데려와서는 안된다. 여성을 유혹하여 배에 데려온 것이 발각되면 그는 죽음에 처해지다. 7.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탈주하는 자는 처형하거나 무인도에 버린다. 8. 배 안에서 서로 때려서는 안되며, 언쟁이 있을 경우 육지에 내려 칼이나 권총으로 결정하는데, 방법은 이렇다. 결투자들은 등을 지고 돌아서 있다가 조타수의 명령에 따라 즉시 돌아서서 발사한다. 첫번째 발사에서 양편이 모두 빗맞추게 되면 칼을 잡고 싸우며, 그럴 경우 먼저 피를 낸 자를 승자로 선언한다. 9. 저축금을 각자 1,000파운드 채울 때까지 현재의 삶의 방식을 계속해야 하고, 그 이전에 이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근무 중에 불구가 된 사람은 모두 공동 기금에서 800은화를 받고, 부상자들은 부상 정도에 따라 배분받는다. 10. 선장과 조타수는 전리품 배당몫의 2배, 포수장과 갑판장은 1.5배, 다른 간부선원은 1.25배, 일반 신사들은 1배 받는다. 11. 악사들은 안식일에만 쉴 수 있다. 로버츠 해적 규약의 눈에 띄는 점 한 가지는 부상당한 선원들을 돕는 금전적 부조이다. 해군에서 부상당한 수병들은 해변에 버려져 구걸하다가 굶어죽었던 반면, 해적들은 동료들을 돌보았다. 해적 규약들은 그 시대에서 혁명적인 사회강령이었다.

 

해적행위의 유산

 

찰스 존슨이 1724년 [해적의 역사]를 출간한 이래 해적행위는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왔다. 오늘날 해적행위는 그것과 연상되는 낭만주의로 우리 문화와 갚이 얽혀 있다. 해적은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 도시인들과 반대되는 자유로운 행동을 대표하는 정서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해적행위는 현대사회의 구속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주의적 낭만적 표현이다.

해적행위 - 오늘날 화젯거리가 된 이유

: 해적행위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또다른 가공의 초상인 서부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을 털어놓고 말하자면, 해적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근거 없는 휘황한 아우라뿐이다. 그런 아우라에 픽션과 상상이 가미되면서 해적의 이미지는 역사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낭만적인 이미지로 되살아났다. 그런 이미지에 굳이 정면 도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해적행위의 낭만적 유산의 이면을 엿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신화와 현실의 차이를 제시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