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정립
25강 중도에 그만두다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전쟁을 치룹니다. 마초와 한수를 격파한 다음 손권을 토벌하고 장로를 공격했습니다. 이들 세 가지 일은 성패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모든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건안 16년(서기 211년) 조조는 서쪽의 마초와 한수를 정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2년 이상에 걸쳐 군대를 정돈하고 전투력을 쌓은 조조는 마땅히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서쪽 지역에 대한 정벌에 나섰을까요? 1. 손권과 유비의 연맹은 이미 완성돼 있어서 당분간 와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2. 마초와 한수가 중원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서 조만간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입니다. 3. 손권과 마초, 한수 등과 연합을 꾀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연합은 주유가 병사한 탓에 성사되지는 못 했습니다. 두 번째로 조조가 손권을 정벌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조조가 한수와 마초를 격파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등 뒤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관중은 이미 평정됐으므로 이제 다음은 손권을 정벌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조조는 손권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에 일종의 강온 전략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조조가 제시한 조건은 "안으로 자포(손권의 막료 장소)를 체포한 다음 밖으로 유비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조는 그렇게만 된다면 강동의 땅은 영원히 손권에게 속하고, 더불어 벼슬도 놓아진다고 그를 회유했습니다. 둘째 조건도 있었습니다. 장소를 죽이기 아까우면 유비만 죽여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당연이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건안 17년(서기 212년) 10월, 40만 명으로 알려진 대군을 이끌고 손권 정벌에 나섰습니다.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건안 18년(서기 213년) 4월 그는 업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세번째 일, 즉 장로를 공격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조조는 건안 20년(서기 215년) 3월, 군대를 이끌고 장로를 정벌했습니다. 놀란 장로는 투항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장위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정말 희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장로 집단은 단 한번의 전쟁으로 궤멸했습니다. 장로의 투항으로 한중이 그래도 조조의 영토가 됐습니다. 한중을 점령함으로써 바로 촉군에 대해 손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얼마 전 촉군을 얻고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유비는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전황 아래에서 조조가 승리의 기세를 몰아서 촉으로 진공하면 익주를 소탕하고 평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조가 철수하자 유비는 힘이 생겼습니다. 원래 유비는 매우 긴장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유비 진영은 이로 인해 한중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유비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중을 점령해야 비로소 천하의 형세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조조, 손권과 더불어 셋이 천하를 정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예컨대 조조는 롱(한중)을 얻었어도 촉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반면 유비는 롱(한중)을 얻지 못하면 촉을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명은 반드시 얻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막을 수 있으면 막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의 승패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정해졌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2년 동안 유비 쪽이 계속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건안 24년(서기 219년) 3월에는 조조가 직접 다시 한중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세는 이미 만회할 수 없이 기울었습니다. 이때부터 한중은 유씨의 것이 됐습니다. 유비는 이를 기반으로 그해 7월에 한중왕이라고 스스로 칭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조는 천하를 순순히 유비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병법에 밝았던 그는 방어선을 한중과 관중 사이 천혜의 요충지에 구축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역대 병법가들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땅으로 언제나 생각했던 진창이었습니다. 유비와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이 방어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26강 욕망은 끝이 없다
법정은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키고 한중을 평정한 다음 전진해 파와 촉을 점령하지 않고 외히려 '급히 북쪽으로 돌아간 것'은 틀림없이 '내부에 급박한 우환'이 있어서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손권이나 유비와는 다르게 조조만의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손권이 이끄는 동오 정권의 핵심 인물은 사실 기본적으로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유비의 상황은 비교적 복잡했습니다. 그가 익주를 얻은 다음 촉한 정권은 세 그룹의 인물들로 이뤄지게 됩니다. 한 그룹은 그가 형주에서부터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한 그룹은 유언이 사천으로 들어갈 때 데리고 간 사람들로 '동주 그룹'이라 칭하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 그룹은 현지 인물들로 '익주 그룹'으로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당연히 이 세 그룹 간에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 모순은 훗날 촉한 정권이 망하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촉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이런 모순이 없었습니다. 촉에 들어간 다음에도 유비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모순이 첨예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조가 처한 상황은 두 사람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유비나 손권처럼 스스로 자신의 정권을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정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애기입니다. 한 황실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조조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적벽대전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조조의 공은 이전에 비해 빛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야심은 오히려 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의 불만을 불어일으킨 것입니다. 이에 대한 조조의 입장은 대단히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기회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에게 이로운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동시에 권력을 쟁취, 장악하는 일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처럼 조조는 권력, 특히 중앙 정부의 최고 권력을 쟁취하고 장악하기 위해 장기간 동안 정치의 중심 공간을 떠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세 번에 걸친 출정을 언급한 앞 강의에서 조조가 출정에 소요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충분이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안 22년(서기 217년), 조조에 대한 정치적 대우는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조조가 한을 대신해 자립하여 황제로 등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는 일생을 마칠 때까지 단 일보도 내딛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왜 황제를 칭하지 않았을까요? 조조에게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해보겠습니다. 조조는 한을 대신해 자립하는 것이 "상서롭지 못하고 보은도 생각해야 하고 말을 바꾸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가 되겠습니다. 둘째 조조는 늘 자신이 대대로 한나라의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보답하려는 마음도 항상 있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 역시 명확합니다. 절대 한을 찬탈할 뜻이 없다고 줄곧 진지하게 맹세한 데에서 보듯 식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좀 복잡합니다. 유비와 손권은 졸곧 조조를 적이자, 참고할 필요가 있는 본보기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조조를 한의 반역자라고도 비난하면서 그가 조금 더 일찍 황제를 칭하기를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조조는 만약 자신이 황제를 칭하면 유비와 손권이 각각 그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조는 당시 황제는 아니었으나 당당히 '중앙'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유비와 손권은 그저 '지방'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황제를 칭하게 되면 유비와 손권은 '지방'이 아니라 '상대방'이 될 수 있었다는 애기입니다. 조조 입장에서 이것은 전혀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습니다. 그 대신 조조는 공에 봉해지고, 공국을 세우며, 왕을 칭하는 등 일련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중 제일 중요한 것은 위공에 봉해지면서 구석을 하사받고 사직을 세운 일이었습니다. 공에 봉해지는 것과 후에 봉해지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후에 봉해지면 일정한 토지와 식읍을 얻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저 명예와 체면을 얻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에 봉해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바로 사직과 종묘(宗廟)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사직은 바로 사신(社神)과 직신(稷神)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입니다. 토지와 오곡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바로 통치권을 가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중국 고대 국가의 통치자들은 반드시 사를 세워 토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직을 세워 곡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것들이 '사직'으로도 불렀습니다. 종묘는 역대의 조상에게 제시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중국 고대의 국가 원수(천자 혹은 제후, 황제 혹은 국왕)들은 모두 세습이 원칙이었습니다. 때문에 종뵤를 세우는 것은 공족을 비롯해 왕족과 황족의 통치 등이 모두 유래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사실을 뜻했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각각 궁전의 앞 좌우 양측에 세워졌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이것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의 원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에 봉하는 것은 그저 작위를 하사하는 것일 뿐이지만 공에 봉하는 것은 동시에 해당 공에 속한 나라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가 정당한 명분으로 위군에 독립된 공국을 건립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천동지할 하나의 대사건이었습니다. 조조가 위공에 책봉된 것과 나중에 다시 위왕으로 작위가 올라간 것 역시, 모두 동소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실제 조조는 일찍부터 그 같은 행보를 걸으려 한 듯 보입니다. 이에 앞서 그가 행한 세 가지 준비 작업을 살펴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토지를 넓혔습니다. 둘째, 각 주들도 합병했습니다. 셋째, 동시에 여론 조성을 진행했습니다.
27강 몸 둘 곳이 없다
순욱은 조조에게 소하 내지 장량이었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조조를 공으로 봉하고 나라를 세우게 하는 제안을 주도하는 것은 확실히 동소가 그러는 것과는 격이 많이 다릅니다. 그의 신분도 그렇게 하기에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순욱은 반대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조조의 심기는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이때 그는 남쪽의 손권을 정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주저 없이 황제에게 바로 표를 올립니다. 순욱을 초현(지금의 안후이성 보저우시)에 파견해 군대를 독려하게 하도록 말입니다. 이는 사실 순욱을 상서령 직에서 파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엉뚱하게 종군을 하게 된 순욱은 수춘(지금의 안후이성 서우현)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쓰러집니다. 이어 바로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습니다. 향년 50세였습니다. 순욱은 사실 일찍부터 조조와 일정한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순욱은 종종 사람들로부터 조조의 '최고 모사'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순욱 이 사람을 단순히 '모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조조 휘하의 모사들 주에서 진짜 제갈량에 견줘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술직히 순욱 외에는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제갈량와 순욱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정치적 주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욱의 정치적 이상은 건안 원년(서기 196년) 조조가 천자를 맞을 준비를 할 때 집중적으로 구현됐습니다. 순욱의 이상은 분명했습니다. 난세의 영웅을 보좌해 천하를 평정하고, 한 황실을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조조가 바로 이런 영웅이었습니다. 조조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를 실망시켰습니다. 조조가 동소 등에게 건넨 은근한 암시와 암암리의 허락을 통해 공에 봉해지고 나라를 세우는 일을 계획하고 마련할 때 순욱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감각이 뛰어난 순욱은 바로 이 일의 심각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조조가 일단 나라를 세우면 천하는 절대로 다시 유씨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순욱에게는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최후의 선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28강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
조조의 정치적인 욕망은 끝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조조의 전략적 중점이 군사 분야에서 정치 분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그의 주 무대가 전쟁터에서 관료 사회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곳이 없는 조조는 계속 사람을 죽였습니다. 순욱이 죽은 다음 당시 조조에 대해 비판적인 일부 세력들은 대대적 음모를 모의해 그를 난처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조조는 선의의 반대와 악독한 공격을 '3개의 구분'이라는 방향을 통해 가려냈습니다. 첫째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과 "엇나가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견이 틀어지는 것"과 "음모를 획책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 개인"과 "한 집단"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공융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조에게 죄를 지은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공융은 조조의 정치 노선과 정치 강령까지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공융은 결코 이름 없는 간단한 무명소졸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에 마땅한 절차와 정당한 논리로 주위를 설득해야한 했습니다. 조조가 '불효하다'는 죄명으로 공융을 죽인 것은 매우 치밀한 꿍꿍이가 바탕에 있었습니다. 다시금 조조가 무서운 지략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결정이었습니다. 조조에 비하면 공융은 그저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조가 공융을 죽인 것은 반대파르 제거하는 것 이외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풍기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조조는 중요한 시기에 중차대한 일을 하는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독재를 원했습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매일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옹납하겠습니까?
29강 살인 사건의 진상
조조는 도대체 왜 최염을 죽였을까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조의 신경과민입니다. 둘째 가능성은 보복 살인입니다. 셋째 가능성은 후계자 안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30강 후계자 쟁탈전
후계자를 세우는 방법에는 역대로 네가지가 있었습니다. 우선 적자를 세우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이 장자를 세우는 방법입니다. 이어 현명한 아들을 세우는 거과 사랑하는 아들을 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위나라가 단명한 원인은 물론 조비가 너무나 자만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도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조비가 '한나라 찬탈'에 성공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구품중정제(모든 관직을 1품에서 9품까지 나눈 것으로 이후 동양권 관료제의 효시가 됐음)'의 실행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구품중정제'는 사대부가 관리 사회를 독점하는 제도였습니다. 조비는 이를 조선으로 내걸어 선비, 즉 사족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위나라는 애석하게도 바로 이 사대부의 손에 의해 멸망의 기로 내몰렸습니다. 유비의 촉한 정권은 이와 반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구품중정제는 위나라가 멸망한 원인과 촉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제공하는 중요한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31강 빈틈을 타고 들어오다
익주는 한중.광한. 파군.촉군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동한에서 제일 큰 두 주의 하나였습니다. 싸움의 결과는 유비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손권과 조조느 빈손을 털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유비가 세 명 중 제일 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가 점령한 형주 4군은 당시에도 제일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일 강한 자가 익주를 얻지 못하고, 가장 약자에게 그 땅을 내줬을까요. 첫째로 손권은 애초 그 땅을 취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유비가 순조롭게 익주를 손에 넣은 두 번째 이유는 유장이 무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유장은 관대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비교적 온화하고 유약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자신의 극히 좁은 땅을 지킬 생각만 했습니다. 익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장과 그의 부친 유언이 건립한 정권이었습니다. 이른바 외래 정권이었습니다. 당시 유언과 적지 않은 그의 친구들이 익주에 들어왔습니다. 유언은 이들을 바탕으로 장안과 남양 일대에서 사천으로 들어온 유민들까지 규합해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이른바 '동주병(東州兵)'으로 불린 군대였습니다. 이들 외에도 그룹이 있었습니다. 바로 현지의 사족들이었습니다. 이드은 자연스레 '토착 출신'의 '익주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문제는 이 두 그룹의 갈등이 매우 깊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비가 순조롭게 익주를 얻을 수 있었던 세 번째 원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처한 유비의 수완이 대단했다는 애기가 되겠습니다. 유비는 일찍부터 익주를 탈취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유비가 결과적으로 익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로는 조조의 판단착오를 들 수 있겠습니다. 유비가 촉을 손에 넣는 데에는 총 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조조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예컨대 견제하고 교란하는 일), 조조는 그보다는 쓸데없이 손권에게 무용을 뽐내고 위용을 과시하는 데에만 주력했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다음 손권은 바로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32강 밀월의 음모
손권은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손권과 유비의 동맹은 '밀월기'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음모 역시 충만한 '밀월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의 일 중 세가지 사건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손권의 여동생을 유비와 결혼하게 한 일과 주유가 아주 지목한 수를 쓴 일, 노숙이 형주를 빌려준 일입니다. 손권이 여동생을 결혼시킨 것이 과연 음모일까요? 노숙은 주유의 자리를 이어 정책을 조정했습니다. 노숙은 무엇보다 손권에게 강릉을 유비에게 양보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소위 '형주를 빌리다'라는 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유비는 결코 형주 전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 유비가 '빌리려는 것'은 오로지 남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부분, 즉, 강릉이었습니다. 둘째 '강릉을 빌리다'라는 것도 사실은 기본적으로 애기가 안 됩니다. 유기가 병사하고 난 후 유비는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형주목이 됐으며 이 계승 관계에 따르면 형주는 마땅히 유비의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강릉은 주유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비는 그저 돌려받기를 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형주를 빌리다'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로 동오 진영의 논리입니다. 이 논리는 전혀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전쟁기에는 '계승권'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가져가겠다거나 회수를 하겠다면 무력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순권에게 무력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당시 유비가 어떻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그저 모호하게 '형주의 관할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권은 이 말을 '형주를 빌려달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빌리다(借)'라는 글자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 한 글자에는 복선이 깔려 있었습니다. 끝내는 그것이 화근이 되어 손권과 유비의 동맹을 파열로 이끌었습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손권은 장기적으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줄' 수가 없었습니다. 유비 역시 '돌려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는 것'에 동의했을까요? 이유는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유리한 입지를 굳힌 것은 당연히 유비였습니다. 그는 나아가면 바로 공격이 가능하고, 물러나도 방어가 가능한 하나의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습니다. 손권도 이익이 있었습니다(그는 이익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손권-유비 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조는 쉽게 남하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후방을 돌아봐야 하는 걱정을 해결했습니다. 그는 이로써 국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땅을 빌려준다'는 명분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유비의 점령 구역까지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겨론적으로 말해 손권과 노숙이 '형주를 빌려준 것'은 그들이 보살의 마음을 가졌거나 유비를 좋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비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그저 유비가 아직까지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애석한 것은 누구나 손익 계산을 하지만 저마다 계산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저마다 계속 머리를 굴려가면서 계산했지만 결국 유비만이 벌었습니다. 이후 손권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막무가내로 나온 것입니다.
33강 흰 옷을 입고 강을 건너다
건안 20년(서기 217년) 노숙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이은 사람은 여몽이었습니다.
34강 맥성으로 패주하다
어짺거나 관우는 죽었습니다. 형주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비 진영에게 중대한 손실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도대체 유비 진영의 누가 이 참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을까요. 대략 세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첫째 관우가 양번전쟁을 반드시 일으켰어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비가 관우를 형주 도독 자리에 앉혔어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비 진영은 왜 고군분투한 관우를 지원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뒸는가 하는 것오 의문이 되겠습니다. 양번 진공은 관우가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관우에게 양번 진공의 권한을 주거나 뜻을 전하지 않았으면서도 굳이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볼 때 당시 유비의 태도는 방임 내지 묵인했거나 묵시적 동의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조금의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갈량은 전혀 책임이 없습니다. 제강량의 계획은 분명했습니다. 우선 만약 천하의 형세에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두 갈래 길로 나눠 출병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우는 제갈량이 구상한 전략적 계획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전략적 안배를 깨뜨려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주를 잃음으로써 '두 갈래 길로 나눠 출병한 다음 북상하여 조조를 궤명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이 영원히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관우의 행동은 그저 욕망은 한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번전쟁은 관우가 일으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우가 양번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한 번 승리로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양번전쟁을 일으킨 시기가 잘못됐을 뿐이 아니라 준비 역시 부족했다는 결론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은 하나같이 관우를 형주 도독으로 파견한 것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관우는 중요한 순간에 한 몫해내는 능력과 그것을 인정받을 만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비의 사업 초기 단계에서 보여준 것이거나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주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달랐습니다. 근본적으로 정치, 군사 두 분야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중책을 맡기에는 부적합했습니다. 솔직히 유비의 사업은 너무 빨리 발전했습니다. 충분한 사상적 준비와 조직적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비는 일단 자신의 익주를 점령하면 형주에 전대미문의 압력이 쏟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비 진영은 고군분투하는 위기의 관우를 구원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뒀을까요? 누구도 관우가 산이 무너지듯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관우가 맥성으로 패주하고 유비 진영이 형주를 잃은 것은 조조와 손권이 연합해 공동의 적을 제어한 결과입니다. 유비 진영에서는 관우가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갈량은 책임이 없었으나 유비느 ㄴ의사결정권자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35강 효정전쟁의 한
서기 220년 음력 1월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조비가 드디어 황제를 칭한 것입니다. 연호는 황초(黃初)로 바꾸었습니다. 유비 역시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 4월 그 역시 황제를 칭했습니다. 연호는 장무(章武)로 정했습니다. 이릉전쟁 또는 효정전쟁은 유비가 일으켰습니다. 유비는 왜 실패했을까요? 첫째는 손권의 유비무환 때문입니다. 둘째는 유비가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육손의 냉정한 지휘입니다. 손권은 정치와 군가 두 방면에서 충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가 정치적으로 준비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그적으로 조위 정권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정치적 준비에만 힘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군사적 준비 역시 함께 해나갔습니다. 유비가 오나라 정벌에 나선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관우와 유비는 그 정이 친형제 같이 두터웠고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사이입니다.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당시가 약육강식 시대였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약자인 유비로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로 생각해야 했습니다. 조위는 너무 강했으므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오뿐이었던 것입니다. 세째 원인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형주를 탈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형주는 유비의 생명줄이었습니다. 효정전쟁 과정에서 유비가 보여준 행보나 감정은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경솔'입니다. 효정전쟁은 유비에게 막대한 타격이었습니다. 유비는 전쟁에서 패한 다음 머지않아 병에 걸려 거동을 못하게 됩니다. 이어 장무 3년(서기 224년) 2월 유비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을 깨닫고 제갈량을 영안(원명 어복, 현의 행정 중심지는 백제성)으로 불러들여 후사를 논의했습니다.
36강 영안에서 후사를 부탁하다
촉한 장무 2년(기원 222년) 윤 6월 유비는 효정에서 패하고 영안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유비는 병에 걸려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사'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탁고 후인 장무 3년 4월 24일(기원 223년 6월 10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비의 탁고는 삼국의 역사에서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유비 진영과 촉한 정권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가 이를 기준으로 둘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지도자가 유비였습니다. 후기는 제갈량이 기둥이었습니다. 이처럼 시기를 나누게 되는 것은 영안탁고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영안탁고'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역사적인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만약 그 아이가 장래성이 없다면 선생이 스스로 취해도 무방합니다'라는 글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그 아이가 그릇이 못 되면 선생이 스스로 처리 방법을 골라 취할 수 있다"의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유비의 다른 아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황제로 옹립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비가 제갈량에게 준 것은 폐위의 권한이었습니다. 그가 자립해 군주가 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갈량에게 폐위의 권한을 줬다는 사실은 매우 파격적인 것입니다. 그만큼 제갈량을 속속들이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과연 어땠을까요? 확실히 '일세의 보기 드문 것'이기는 했습니다. 진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적벽대전 전까지였습니다. 나중에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적벽대전(기원 208년)부터 영안탁고(기원 223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우리는 제갈량의 그림자를 많이 볼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유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 데리고 간 모사는 방통이었습니다. 한중에 진공할 때 법정이 방통을 대신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의 역할은 소하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알듯 제강량은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유비는 자신의 이상을 잊었으나(원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갈량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난처했던 것은 이런 미묘한 변화를 둘 중 누구도 먼저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통일로
37강 아주 특별한 군주와 신하
장무 3년 4월 24일(서기 223년 6월 10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촉한 정권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게 됐습니다. 이 시대는 한마디로 '제갈량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갈량에게 이 상황은 기회와 도전이 병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문제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정치느 바로 관계입니다. 이때 제갈량이 처리해야 할 관계는 적어도 네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군신 관계를 비롯해 동료 관계, 맹우 관계 및 적대 관계였습니다. 우선 제갈량을 무향후에 봉했습니다. 흑자는 제갈량을 무향후에 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낭야군 무향현이 당시 촉나라 땅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작위에 봉하는 것은 '요령(遙領, 직명만 받고 직접 가서 취임하지 않는 것을 일컬음)'으로 불리는 일종의 관례였습니다. 이 봉은 두 가지 의미를 가졌습니다. 봉을 받은 사람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의미가 우선 있습니다. 봉하는 사람이 천하의 주인(황제)이라는 사실도 의미했습니다. 촉한 정권에는 하나의 의미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정통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선은 제갈량에게 승상불르 열어주어 정무를 관장하게도 했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본인 직속의 관리를 두는 것 외에 상대적으로 독립된 업무 기구와 관료 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유선은 제갈량에게 익주목까지 제수했습니다. 촉한 승상은 중앙 정부의 핵심 고관이었습니다. 반면 익주목은 지방 관리였습니다. 전자는 중앙 행정권, 후자는 지방 행정권을 보유했습니다. 이 두 직무의 권한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승상은 '목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도상으로 볼 때 두 개가 다른 자리라는 사실은 확실해집니다. 종합적인 결론은 유선은 제갈량을 우선 무향후에 봉했습니다. 제갈량에게 존귀한 자리를 부여한 것입니다. 승상부를 열어줘 정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독립적인 승상권을 준 것입니다. 익주목 역시 재수했습니다. 목민의 권한까지 허락한 것입니다. 촉나라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것을 제갈량에게 넘겨줬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제갈량은 높이 않았지 사실상 대권을 독점했습니다. 유선은 공명이 사망한 다음 승상 제도를 아예 폐지해버렸습니다. 부친의 일생일대의 열망이었던 중원 북벌 계획도 중지시켜 버렸습니다. 유선은 왜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을까요? 이 역시 세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유선이 거의 연금 상태와 같은 처지에 높여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갈량에게 항상 훈계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거론해야 하겠습니다. 친정을 하기 어려웠다는 현실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의 임무는 오직 유선을 보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선에게 정치 권력을 돌려주려고 노력한 제갈량의 모습을 그 어디에서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 번째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갈량은 왜 군주에게 정치 권력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유선의 자질이 모자라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네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소인배를 가까이 하고 신임했습니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스타일이라는 것도 그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배은망덕했다는 것 역시 거론해야겠습니다. 다구나 그는 패기까지 없었습니다. 유선은 겁약했을지는 몰라도 결코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기개가 없었다뿐이지 식견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략 짐작해보면 그는 어수룩한 척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선은 최소한 평범한 사람이었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제갈량은 왜 대권을 독점하고 유선에게 정치 권력을 되돌려주려 하지 않았을까요? 추측하건대 제가량이 그렇게 한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선 '군주는 이름뿐이고 권력은 승상에게 있다는 한나라 초기의 풍토'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권한을 주기는 하지만 책임은 없었습니다. 승상은 책임은 있었으나 주군의 권력이 없었습니다. 만약 황제가 자신이 스스로 권한을 부여하고 직접 행정을 한다고 해봅시다. 국가에 일이 생길 경우 책임질 사람이 없게 됩니다.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정무를 책임질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맡은 바 책임이 무거운 데다 갈 길까지 멀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는 제갈량의 현실이 잘 말해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대다 위기가 도처에 숨어 있었다"는 현실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38강 물과 기름의 관계
이엄과 공명은 "함께 유조를 받았'으며 한 명은 문관, 한 명은 무관이었습니다. 또 한 명은 정, 한 명은 부였습니다. 이것은 유비 마음속에서는 이엄이 곧 주유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이엄은 주유의 역할을 했을까요? 못했습니다. 단언하건대 이엄은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잘 보좌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유비가 탁고한 지 8년 후에 파직당했습니다. 이엄이 파직당한 것은 촉한 정권에서는 의심할 여지없는 대단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왜 이엄을 제거하려고 했을까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 관점은 이엄이 권력과 이익을 다투다 제갈량에 의해 제거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자 관점은 제갈량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이엄은 차츰차츰 승진의 길을 걸어았으나 제갈량과 비교하면 곳곳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우선 제갈량은 조정에 있었으나 이엄은 밖에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군주 옆에 가까이 있으면서 조정을 총괄했습니다. 그러나 이엄은 여기에 한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후주를 보좌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관료 사회와도 소원해져 능력을 발휘할 기회 역시 잃었습니다. 자연히 대외 전쟁이나 정벌에 나서는 것에서도 소외됐습니다. 현재 두 가지 뚜렷이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제갈량과 이엄 간의 투쟁의 본질은 간단합니다. 이엄이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광폭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제갈량은 대국을 고려해서 거듭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그 투쟁의 자취는 공격과 인애 및 양보, 재차 공격, 이어 다시 인내와 양보, 그러고는 이엄의 자멸로 끝을 맺습니다. 제갈량은 이엄 간의 투쟁의 본질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야 성이 차는 제갈량이 동료를 억압한 것입니다. 이에 이엄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파게 일어나 도링 입각해 항쟁했습니다. 그 투쟁의 자취는 전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억압과 항쟁, 재억압과 재항쟁, 이엄의 피비린내 나는 여지없는 참패로 끝이 납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정으로 이엄을 부'로 해서 탁고한 것은 내부 우환을 제거하고 정권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비는 촉한 정권이 안고 있는 남모를 최대의 근심과 곧 닥칠지 모르는 재난이 조위나 손오와의 관계에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촉한 정권 내부에 있다고 봤습니다. 유비가 세운 촉한 정권이 세 개의 정치 세력을 이루어져 잇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세력은 '본토 세력'으로 원래 낙양에서 관리를 하던 익주 관료와 익주에서 관직은 받은 호족을 포함합니다(통칭 '익주 그룹'). 다음 세력은 유장에게 몸을 의탁한 사람들을 포함합니다(통칭 '동주그룹). 마지막 세력은 '유비의 핵심 츤근들'로 유비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예컨대 관우와 장비)과 나중에 유비에게 의탁한 인물(예컨대 마초)들을 포함합니다('형주 그룹'). 이 세 그룹은 촉에 도착한 순서에 따라 복잡한 주객 및 신구의 모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더욱 상황이 나빠진 것은 유비가 효정전쟁에서 대패한 이후였습니다. 원래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익주.동주 그룹의 주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유비는 이런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라를 위해 자신과 걱정을 같이 할 사람은 오로지 제갈량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면 왜 굳이 이엄에게 보좌를 하라고 했을까요? 다른 두 세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신구 쌍방의 소통을 원할하게 하는 역할에는 그야말로 적격이었습니다. 동주 그룹에 속하면서도 형주 그룹에 가까운 이엄이 유비가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로써 확연해집니다. 유비의 결정은 신구 관계를 처리하는 기본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비의 탁고는 인사 안배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남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훗날 제갈량이 다른 고명대신을 파면할 수 있도록 한 정치적인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유비의 안배를 보는 그저 하나의 유력한 시각일 뿐입니다. 다른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비의 '제왕적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영안에 도착한 시기와 "이엄과 제갈량이 함께 유조를 받았다"는 말을 고려하면 제갈량이 진짜 유선을 대신해 자리를 차고앉으려 한다면 이엄이 영안에서 출병하여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해도 좋다는 암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엄이 감히 제갈량과 세력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정치적 야심의 원천이었습니다. 이엄은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의 불르 세울 것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파주자사를 맡겠다고 요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비의 바람이 그저 형주.동주.익주 등 세 그룹의 신구 세력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마음을 합쳐 서로 돕는 것에 있었다고 여전히 믿고 싶을 따름입니다. 지금 보면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유비가 자신의 듯을 이러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갈량이 이엄을 파직시킨 것은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 표면적 원인과 근본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근본적 원인은 익주.동주.형주 세 세력 간 정치 구도에서 빚어진 촉한 정권 내부의 모순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순을 해결해야만 법에 따라 촉을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으니까요. 사실 법에 따라 촉을 다스리는 것은 제갈량이 신구의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기도 했습니다.
39강 비통한 심정으로 팔을 자르다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것은 법과 기율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으나 더 큰 이유는 백성과 대중의 분노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것은 그저 법과 기율만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원인이 관련돼 있습니다. 제갈량이 "눈물을 뿌리면서 마속을 참"한 직접적 원인은 마속이 가정을 잃은 실수에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촉한 정권의 내부 투쟁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다 제갈량이 솔선수범하여 공재.공정.공평의 원칙하에 법대로 나라를 다스린 탓에 그의 생전에 촉한은 전체적으로 태평했습니다.
40강 내부 분쟁의 먹구름
위연이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부린 것은 자신의 견해에 따른 것으로 그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북벌을 계속해야겠다는 의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습니다. 둘재로는 양의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위연이 모반을 획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이유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저 양의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됐습니다. 양의에게도 그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하고 말이죠. 왜 자신의 '지나간 곳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 버렸을까요? 양의를 사지로 몰아넣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당시 그의 마음속에서는 두 번째 이유가 휠씬 더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복종하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양의를 죽이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혹독한 비판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모반이라는 누명을 씌워 생사람을 잡은 것은 정말 위연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삼족을 몰살시킨 것은 더욱 부당한 처벌이었습니다. 위연과 양의에게는 확실히 결점이 있었습니다. 잘못도 적지 않았고,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위연은 용맹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유비와 제갈량은 모두 이들을 지극하게 아꼈습니다. 따라서 양의와 위연이 충돌할 때마다 제갈량이 골치를 앓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제갈량이 최선을 다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비위가 원한하게 중재에 나섰음에도 둘은 '집안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두 생명을 잃는 이른바 양패구상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고 말았습니다. 더욱 억울한 것은 둘이 약속이나 한 듯 죽은 다음에도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1강 공격은 최선의 수비
42강 국면을 되돌릴 힘이 없다
촉한은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멸망했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역사학자들을 곤혼스럽게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조위나 손오와 비교할 때 촉한이 정치를 제일 잘했다는 평가를 지금도 듣고 있으니까요. 결론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 유선이 우선 우둔했습니다. 둘째, 황호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사실도 거론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진지가 정치를 엉망으로 했습니다. 넷째로 초주가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끈 것 역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유선이 투항할 때 촉나라의 호는 28만이었습니다. 또 인구가 94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는 10만 2천 명에 관리는 4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평균 9명의 백성이 1명의 사병을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7호당 관리 1명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촉나라 백성은 그 부담을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43강 풍운의 만남
손권이 손책을 계승했을 때 이 세 파벌은 그저 세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첫째 정치 세력은 '회사(淮泗) 부대의 그룹'이었습니다. 약칭 '회사의 군'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그룹은 손견과 손책의 옛 부하들을 포함합니다. 좀 더 명백하게 말하면 손견과 손책 부자를 따라 남북을 넘나들며 싸우던 사람들입니다(정보/황개/장흠/주태/진무/주유 등). 다음 정치 세력은 '손님으로 떠돌면서 기거하는 인사들'이었습니다. 약칭 '북방의 유랑 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원래 북방의 사인들이었으나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장소/제갈근/보즐/장굉/엄준/시의 등). 마지막 정치 세력은 '강동의 세가대족'이었습니다. 약칭 '강동 사족'으로 불러도 괜찮겠습니다. 이중 제일 영향력이 있는 세력들이 우/위/고/육의 이른바 '4대 가문'이었습니다(우번/위등/고옹/육손 등). 손권이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동에 뿌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나아가 강동 사족의 지지 역시 쟁취해야 했습니다. 정 그들의 지지를 쟁취하기 어렵다면 다른 세력의 지지라고 이끌어내야 했습니다. 추천 인사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 노숙이었습니다. 노숙은 주유가 추천했습니다. 이 일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노숙은 당시 쉽게 얻기 어려웠던 '초일류 인재'였습니다. 훌륭한 정치가, 군사 전략가, 외교관의 자질을 한 몸에 갖췄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동오 진영에 대한 그의 공헌 역시 상당했습니다. 노숙은 '강서 사람'이지 '강동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회사의 장군들'과 같았습니다. 주유를 주축으로 하는 정치 세력과 기본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숙은 남하해서 주유에게 의탁한 만큼' 손님으로 떠돌면서 기거하는 인사들' 그룹에도 속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장소의 세력과도 공통 언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술의 임명을 거절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강동 사족'과 서로 일치했으니까요. 그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숙은 세 정치 세력 모두와 연결고기를 찾을 수 있는 이른바 '3중 신분'의 인물이었습니다. 세 정치 세력과 연결 고리가 있는 그가 손권을 위해 출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노숙이 손권을 위해 출사한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에서 다시 여몽에게 눈길을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존재의 의미가 대단하니까요. 여몽은 주유.노숙.육손과 함께 손오의 '4대 영장'의 한 명으로 노숙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나중에 육손을 추천해 자신을 승계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강동 사족'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매형인 등당을 따라 남쪽으로 도하해 정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남쪽으로 도하한 평민'이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손책에 의해 발탁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호원이었습니다. 여몽이 다시 한번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은 것은 장소의 추천이 계기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그는 좋게 봐줄 경우 '회사의 장군들'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여몽은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몽이 이렇게 된 것은 손권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상당한 의미가 있는 대목입니다. '회사의 장군들'을 비롯해 '북방의 유랑 인사들'과 '강동 사족', 이 세 정치 세력은 노숙과 모두 관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여몽은 모두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바로 '강동화'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44강 동남을 공략하다
위.촉.오의 '세 거두'중에서 손권이 비교적 특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조와 유비의 사업은 자신 스스로가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국토 역시 스스로 싸워 쟁취했습니다. 이에 반해 손권은 계승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승자 중에서 손권은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손권은 미성년자 때 바로 부친과 형이 남겨준 사업의 토대를 물려받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어떨 줄 몰라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그의 곁에는 장소와 주유라는 두 명의 걸출한 선대의 옛 신하와 노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어 노숙.여몽.육손.고옹 등이 서로 경쟁하듯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손권 역시 매사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위.촉.오 세 나라의 '세 거두' 중에서 손권은 가장 나중에 칭체를 했습니다. 손권은 황제를 칭할 생각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건안 25년(서기 220년) 10월 조비가 칭제를 한 다음 황초로 연호를 바꿨습니다. 반년 후인 위 문제 황초 2년(서기 221년) 4월에 유비가 칭제를 했습니다. 손권의 선택은 유비가 칭제한 지 4개월 후(황초 2년 8월)에 내려졌습니다. 손권은 조비가 책봉한 오왕 칭호까지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칭제의 기회를 포기한 첫 번째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가 두 번째 기회를 포기한 것은 황무 2년(서기 223년) 4월이었습니다. 황무 2년 4월 손권의 군신은 그가 황제로 즉위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거절했습니다. 솔직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유비, 조조 등과 반목한 탓에 오나라 내부에 안정감이 더욱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손권이 직면한 최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 뛰어난 영웅들이 경쟁적으로 손권의 곁으로 몰려들었는가 하는 답은 그가 '구천의 뛰어남'에 비견되는 '영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권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권은 노숙의 제안을 받은 그때로부터 22년 후 결국 칭제를 단행했습니다. 황제가 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한 말은 마음속에는 없는 소리였습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한마디 말은 바로 '일의 형세를 이해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45강 하늘 같은 정 바다 같은 한
손권이 성공하게 된 좀 더 확실한 이유는 세 가지가 되겠습니다. 가장 먼저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을 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것도 이유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잘 부릴 줄 알았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지도자들인 조조.손권.유비.제갈량 등은 모두 용인술에 뛰어났습니다. 아마도 톱은 단연 조조가 될 것 같습니다. 손권이 사람을 부리는 수준은 딱 조조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어떻게 동오에 인재를 꿀어 모으는 그런 응집력이 있었을까요? 원인은 당연히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손권의 뛰어난 용인술이 아무래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그는 다른 나라 인재의 능력조차도 높이 샀습니다. 다구나 모사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손권 용인술의 특징은 '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국시대의 지도자(비록 군주는 아니나 실제적으로 핵심 지도자였던 제갈량을 포함합니다)들의 용인술 특징은 다음의 열두 자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바로 '조이지(操以智), 권이정(權以情), 비이의(備以義), 량이법(亮利法)'입니다. 해석하면 조조는 지혜, 손권은 정, 유비는 의리, 제갈량은 법으로 사람을 섰다는 애기가 됩니다. 특히 제갈량은 법에다 공개.공정.공평이라는 덕목까지 더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의 정부가 가장 정부다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조의 정부는 약간 살롱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유비의 정부는 무슨 비밀결사 같았습니다. 손권은 가족 집단과 비슷했습니다. "사람을 일단 쓰면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불후의 진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용인술의 기본 원칙이기도 합니다. 손권의 용인술은 정말 장점이 많았습니다. 그는 조조처럼 격식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재능만 있으면 등용했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쓰는 조건으로 다른 것은 일절 보지 않았습니다. 가문과 신분을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원한 관계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완벽은 더욱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조조와 비슷한 점은 또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장점들이 모두 젊은 시절과 정권의 전반기에 빛을 발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해 만년이나 후반기에는 좋았다고 말하기가 힘들다는 애기입니다. 이는 굳이 만년의 그와 군신 간의 관계를 보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혈육의 정을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했습니다(손권이 손패를 살해),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손휴가 손량을 살해), 조카가 숙부를 살해했습니다(손호가 손분을 살해), 종친이 황족을 죽였습니다(손준이 손화를 살해), 이것을 어찌 '혈육의 정'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손권 집권 후기 오나라 조정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손권이 이상하게도 까닭 없이 주위의 신료들을 시기하기 시작하더니, 모두들 놀라고 겁이 나 벌벌 떨었습니다. 손권이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변한 것은 사찰 정치, 즉 정보 정치를 실시한 이후였습니다. 가화 연간(서기 232년~237년)은 손권의 나이 51세가 이후의 시기였습니다. 사실 만년의 손권은 어쩐 일인지 대단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의심 역시 아주 심하게 많았습니다. 게다가 변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손권의 스탕일이 변한 근본적 원인은 군주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주제는 일종의 가부장제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스타일의 군주들은 유사 히래로 하나같이 유아독존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얼굴을 바로 바꾸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더구나 손권은 원래 성격이 잔인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가족의 은혜' 운운과 '과분한 살육'은 동전의 양면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46강 따뜻한 인생, 차가운 최후
손권이 칭제할 때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이 승상 자리가 장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손소를 승상에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손소가 사망했습니다. 이번에도 주위에서는 하나같이 장소를 승상으로 추천했습니다. 손권은 다시 동의하지 않고 고옹을 임명했습니다. 장소를 승상으로 임명하는 것은 장소에게 세력을 키우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고, 승상의 세력이 강해지게 된다는 사실도 의미했습니다. 장소는 손책이 탁고한 고명대신이었으니까요. 손책은 탁고를 하면서 손권이 주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선생이 스스로 취하라는 말도 장소에게 했습니다. 장소는 사실상 손권을 관리, 감독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탁고의 위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손권은 왜 또 승상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재 원인은 바로 손오 정권은 반드시 '강동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원인은 손권이 원래 막중한 책임을 지면서 많은 일을 하는 승상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옹의 자리를 이어 승상에 오른 사람은 바로 62세의 '상대장군' 육손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의미는 한눈에 휜히 알 수 있습니다. '강동화'가 되겠습니다. 고옹과 육손은 주지하다시피 모두 강동 사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육손이 승상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돼 손권에게 죽음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비극의 직접적 원인은 이름바 '남로 당쟁'이었습니다. 남(南)은 남궁으로 태자 손화를 가리켰습니다. 노는 노왕으로 손패를 일컬었습니다. 손화는 손권이 좋아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손권이 넷째 아들 손패도 좋아해 그를 노왕에 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정의 관리와 황제의 인척들은 결국 두 파로 나눠졌습니다. 해결이 쉽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양비론에 기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적오 13년(서기 250년) 8월 손화를 폐위시키고 손패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한바탕의 대학살도 일어났습니다. 육손 역시 이 일과 간련되 사건을 빌미로 희생됐습니다. 태자를 적극 옹호한 탓에 죽음을 강요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손 사후에 '태자당'의 '넘버 2'였던 제갈각은 대장군으로 진급하고 육손이 맡았던 형주의 주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노왕당'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보즐은 육손을 대신해 승상을 맡게 됐습니다.
47강 거슬러 올라가다
'남로 당쟁' 사건을 정리된 사람 중에 강동 출신이 아닌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주 분명해집니다. 손권은 결코 태자와 노왕에 대한 태도만 가지고 이들을 처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권이 선을 그은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사람('회사의 장군'들이나 '북방의 유랑 인사들')은 태자를 책봉하는 일에 개입해도 괜찮으나 너희들 강동 사족만큼은 안 된다는 애기였습니다. 손권은 왜 육손을 정리하려고 했을까요? 첫째, 육손은 강동 사족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세력이 제일 컸습니다. 둘째로 육손이 무창에 진주해 방어에 나섰을 때부터 명성과 인망이 자자했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이유는 손권이 자신의 후계자가 육손을 제대로 부리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육손이 손책의 사위였다는 사실입니다. 손권은 손책 자녀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내친 김에 육손에 이어 다른 사람도 정리했을까요? 그랬습니다. 장온의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장온은 강동의 명사였습니다 오군 '4대 가문' 중 하나인 장가 출신이었습니다. 출신 성분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자질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는 임용되자마자 단번에 만만치 않은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의 승진도 눈부셨습니다. 그런데 장온은 촉나라에서 돌아온 다음 상황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결국 손권은 구실을 찾아 그를 하옥시켰습니다. 나중에는 벌로 고향에 보내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결국 6년 후에는 병사하고 맙니다. 명사의 표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가문이 깨끗해야 했습니다. 명문 출신이면 가장 좋습니다. 둘째, 뛰어난 재능 역시 넘쳐흘러야 했습니다. 여기에 사서를 중분히 읽고 뛰어난 학식이나 경륜을 지니고 있으면 더욱 좋았습니다. 셋째, 아웃사이더에다가 관리를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명사를 명사로 부르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이 유명한 탓이었습니다. 유명해지는 이유는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면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의견을 발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한말의 명사를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으니까요, 이에 따르면 첫째 유형은 '명성은 추구하나 관직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유형은 '언행이 굳세고 강하면서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증오'하는 부류입니다. 셋째 부류는 '풍조에 영합'하는 사람들입니다. '유행파'로 이들은 당국과의 협력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이들 중에서 첫째 유형의 명사들은 당국에 협력하지는 않으나 번거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둘째 유형은 당국으로서느 골치가 아픕니다.
48강 방법을 달라도 결과는 같다
조조.손권.유비.제갈량 등은 왜 모두 사족이나 명사와 모순 관계에 놓여 있었을까요? 또 왜 충돌을 했을까요? 사족은 대대로 관리를 한 가문을 말합니다. 한나라 때 정규 경로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꼭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첫째, 반드시 사인이어야 했습니다. 둘째, 경학에도 통달해야 했습니다. 셋째, 효렴으로 추천받는 것 역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세 가지의 표준을 갖춘 사람은 정말 많이 않았습니다. 만약 한 가문이 이처럼 글을 읽는 것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직업으로 했다면 그드은 '사족'으로 불렸습니다. 또 대대로 글을 읽어 관리가 됐다면 그들은 '세족'으로 불렸숩니다. 이처럼 이른바 사족은 대대로 글을 읽고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민 계급에서 분화돼 나온 특수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의 특수성은 족점, 둘째, 여론 장악, 셋째, 호강(豪强, 지방의 힘 있는 세력, 호족의 개념으로 보면 됨)으로의 변신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족은 어떻게 벼슬길을 독점할 수 있었을까요? 관리를 많이 배출한 가문에서 대대로 관리, 그것도 고관이 나온다는 사실 말입니다. 한 사람이 관리를 하게 되면 추천권이 있다는 사실 역시 벼슬길이 사족에 의해 독접됐던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추천 대상이었을까요? 두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같은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 계급이 비교적 낮은 글 읽는 사람들 역시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관리를 할 기회가 적은 이들은 일단 추천의 은혜를 입으면 이에 감사하고 보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추천한 사람과 정치적으로 주종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른바 '비혈연 관계의 가족 구성원'은 이런 형태를 의미했습니다. 한 사람의 관직이 크면 클수록 추천권은 그에 따라 커졌습니다. 만약 대대로 관리를 하게 되면 이른바 '문생고리(門生故吏, 명문가의 빈객가 명문가의 추천에 의해 관직에 들어선 관리)가 천하에 퍼지'는 현상이 한 가문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신분이든 모두 사족과 관계가 밀접했습니다. 다시 말해 해체적으로 명사는 사족을 의지했습니다. 또 사족은 명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명사는 발표하는 시국에 관한 의견을 '청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의'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습니다. 한사람이 만약 처으이에 의해 뜨게 되면 몸값이 거의 백 배 이상 나가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청의에 의해 비판을 당하면 그야말로 피냄새가 코를 찌르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사족이 관권을 장악하면서 국가 전체의 벼슬길을 틀어쥐었습니다. 언로도 장악해 여론을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 두 가지 조건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호족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사족은 하나의 매우 특수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족(황제의 친척)이 아니었습니다. 서족(보통 평민)도 아니었습니다. 평민 계급에 속했으나 평민보다 고귀했습니다. 관직을 세습할 수는 없었지만 벼슬길을 독점할 수는 있었습니다. 사족의 정치적 이상은 무었이었을까요? 당연히 자신들의 계급이 장악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정권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상은 바로 조조를 비롯해 손권.유비.제갈량의 입장과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삼국의 군주는 모두 사족 줄신이 아니었습니다. 사족을 통치 계급으로 용인할 생각은 더군다나 없었습니다. 조위의 건국은 쉽지 않았습니다. 조조의 천하가 사실은 무력으로 쟁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합버성은 엉뚱하게도 '선양(禪讓)'에 기인합니다. 조조가 자신의 정권을 세울 생각을 한 것은 대략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마도 관도대전 이후와 적벽대전 이전, 그 사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건안 13년(서기 208년) 6월 조조는 드디어 이미 오래전에 폐지한 승상 제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어 스스로 승상이 됐습니다. 그가 정권 창출에 나선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의 이상은 다름 아닌, '비사족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조는 당연히 사족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사들로부터의 풍자도 당할 만큼 당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이 사족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명사들 대부분의 사족과 의기투합해 대응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응 방법은 선택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조조가 직면한 어려움은 바로 자신의 자본이었습니다. 조조의 자본은 무엇이었습니까? '천자를 모시고 불복종하는 신하를 호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본에 의지해 비로소 토지를 얻었습니다. 동한 왕조의 이 '오래된 집'의 틀은 어떤 모양이었습니까? 세 개의 기둥과 하나의 지붕이었습니다. 기둥은 외척.환관.사족이었습니다. 지붕은 한나라 천자였습니다. 그러나 세 개의 기둥 중 두 개는 이미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머지 하나(사족)도 쓰러진다면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조조의 난제이자 사족의 난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사람을 어렵게 했습니다. 우선 조조가 실시한 통치 노선이 왜 '법치 한족(서족)의 노선'이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의 진영에 왜 유독 사족 출신이나 사족을 따르는 명사들이 다른 출신의 사람들보다 많았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사족과 명사들 역시 대단히 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허도로 간다고 해도 조조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조조와 사족, 명사들은 서로 이용하면서도 서로 경계하는 묘한 관계에 처하게 됐습니다. 조조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은 반드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조의 의심이 전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의 진영에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각종 부류의 명사들이 대단히 많았으니까요. 첫째,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부류는 큰 지붕은 인정하면서도 인테리어 기술자를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지붕과 인테리어 기술자를 모두 인정하는 부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당신이나 나나 모두 인테리어 공사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부류였습니다. 건안 25년(서기 220년) 정월 조조가 낙양에서 사망했습니다. 조비가 바로 자리를 이어 위왕이 됐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군은 자신이 제정한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 '구품관입법'은 까놓고 말해 사족으로 하여금 관권을 독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족 내부의 명성과 인망의 높고 낮은, 문벌의 상하 및 세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관위와 관직을 분배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비가 진군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얼마 후 조비는 중원 사족의 추대에 힘입어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위는 어쨌거나 '비사족'의 '법가 한족 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품관인법을 도입함으로써 정권의 실질적 주체가 사족지주계급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비의 위나라는 이미 조조의 위나라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 가문을 축으로 하는 사족이 비사족 조위를 뒤엎은 것은 이 때문에 사족 정권이 다시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오와 촉한은 사실 기본적으로 건국의 자격조차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손권의 부친와 형은 무력에 의지해 근거지를 강탈했습니다. 유비는 이보다 더 불쌍했습니다. 손권과 유비는 또한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두 방면의 경험을 제공해준 것에 대해서도 조조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손권과 유비는 조조와 다소 다른 건국 노선과 전략적 방침을 채택했습니다. 손권은 '강동화', 즉 '본토화'였습니다. 손권은 자신을 포함한 외부 세력에만 의존해서 건국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동오는 아마도 영원히 흔들리는 정권이 됐을 것입니다. 손권으로서는 '강동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결연히 일부 정치 권력과 군사 권력을 각각 고용과 육손에게 준 것도 바로 그래서 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동 사족은 손오 정권과 한데 묶이게 됐습니다. 하나의 이익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처럼 일체의 책략은 모두 양날의 칼인 경우가 대부분이빈다. 비록 처음에는 손오 정권의 기초를 단단히 다녔으나 나중에는 손오 정권의 성질을 확 바꿔버리게 된 것입니다. 손권이 임종시에 지정한 고명대신은 대장군 제갈각과 회계태수 등윤이었습니다. 모두 '북방의 유랑 인사들'의 후예였습니다. 한마디로 손권은 죽을 때까지도 진정으로 강동 사족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오나라는 내부가 가장 불안정한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강동 사족은 북바으이 사족과 겨룰 만한 수준에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손오는 진나라에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촉한 정권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비록 황종.종실.좌장군.예주목 드으이 직함은 있었으나 그것들은 하나같이 '공수표'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비가 뜻밖의 성공을 거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 자신의 노력을 들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그가 운이 좋았다고 하겠습니다. 운이 좋은 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제갈량과 방통, 법정 등의 보좌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유비의 집안 사람인 유표와 유장이 그들의 무능함 때문에 결괒거으로 유비에게 근거지를 뺏긴 것도 거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촉한 정권은 이렇게 건립됐으나 유비는 여전했습니다. 정권의 성격에 대해 별로 계획을 가지지 않았다는 애기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비는 똑똑했습니다. 그는 계속 조조를 지켜봤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반대로 했습니다. 사족의 처리 문제도 그랬습니다 사족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가능한 피했다는 애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삼국 중에서 왜 촉한이 가장 먼저 망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갈량의 정치 이념과 치국 이념이 법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족계급의 이상이나 이념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촉한이 '비사족 정권'인 데다 '외래 정권'이었다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토지 귀족(익주 사족)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애기가 되겠습니다. 한마디로 익주 사족은 사실상 토착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배재됐습니다. 익주 사족의 이런 상황은 당연히 촉한 정권의 전체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순에 따른 충돌 역시 종종 발생했습니다. 익주 사족이 지향하는 것은 오로지 집단과 개인적 이익일 뿐이었습니다. 셋째, 제갈량이 자신의 정치 이상이 갖는 호소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한 황실의 부흥'은 이미 지나간 구호였던 것입니다. 사족지주계급의 입장에서는 '구품관입법'을 실시하는 조위가 동한보다 휠씬 좋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위.촉.오 등이 본질적으로 모두 '비사족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과 사족계급은 모두 모순 관계에 처했습니다. 투쟁의 결과는 당연히 서로 달랐습니다. 조위는 사족을 방치했습니다. 손오는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촉한은 사족과의 충돌을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한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나 멸망이라는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다음 들어선 진나라가 철저한 사족지주계급 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장강은 여전히 동으로 흐른다
진의 존속 기간은 왜 짧았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진나라 때에 바로 통치 계급과 국가 형태가 교체됐기 때문입니다. 진 이전까지의 통치 계급은 바로 영주계급이었습니다. 진 이후는 누구였을까요? 지주계급이었습니다. 진 이전의 국가 형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방국(제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진 이후부터는 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제후국은 봉건제, 제국은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봉건제의 요지는 '봉토건국'이었습니다만 군현제의 특징은 '중앙집권'이었습니다. 군현제와 봉건제를 구별하는 요인은 또 있습니다. 예컨대 봉건시대(방국시대)에는 천자르 비롯해 제후와 대부가 모두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군현시대(제국시대)에는 황제만 세습이 가능하고 군수와 현령은 세급할 수 없었습니다. 방국제는 봉건제, 귀족제와 삼위일체를 이뤘습니다. 이에 반해 제국제는 군현제, 관료제와 삼위일체를 이뤘습니다. 제국 제도는 본질적으로 비귀족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 계급 내부에서도 '신분 교체'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족지주가 정권을 장가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족지주가 대체하고, 더 나중에는 사족지주가 통치 계급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족지주는 지주계급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그륻이 국가 정권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해애 했습니다. 서족지주계급이 시험을 통과해 국가정권에 참여하는 제도가 바로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서족지주계급이 하루아침에 귀족지주계급을 대체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일정한 과도기가 필요했습니다. 통치 계급이 귀족으로부터 서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족지주계급이었습니다. 사족과 귀족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귀족은 혈연 관계에 의해 귀족이 됩니다. 이에 반해 사족은 학문을 닦아 관리가 돼야만 사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족과 서족의 차이점은 또 무엇일까요? 서족은 관리가 되기 위해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 사족이 관리가 되려면 가정의 사회적 신분이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족은 통치 계급이 귀족으로 서족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과도기적 역할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관리들의 집 대문 밖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가문의 공훈이란 경력을 기재하는 용도였죠. 이중 공훈을 표방하는 기둥은 '벌(閥)'이라 하고 왼쪽에 세웠습니다. 경력을 표시하는 기둥은 '열(閱)'이라 하고 오른쪽에 세웠습니다. 군벌은 일반적으로 독립적 무장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의 호족을 가리킵니다. 군벌은 한마디로 동한 왕조가 제멋대로 내버려둔 호토(지방의 세력가)가 나중에 발전한 토착 무장 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군벌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즉 중앙 정부가 완전히 무너지거나 유명무실한 껍데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등급이나 명망으로는 군사력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문벌이 군벌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문벌이 군벌을 만난 것은 한마디로 과거 합격자가 길거리에서 병졸을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족계급의 정권 탈취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인물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조였습니다. 아무려나 조조느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군벌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지 않은 군벌이었습니다. 당시 조조 말고도 군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할거한 곳에서만 '황제'로 군림하겠단느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조조는 천하 통일을 꿈꿨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조조가 통일 후의 국가에 대해 새로운 체제를 꿈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조의 이상은 다름 아닌 '비사족정권'을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조의 행동 역시 사족계급의 심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그 반대의 결과가 연주 전쟁과 관도대전 등 두 번의 전투였습니다. 연주전쟁은 권문세가들이 조조를 불의에 습격해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관도대전은 두 개 계급과 두 개 노선 사이의 대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조는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역사의 흐름은 완전 뒤죽박죽이 돼버렸습니다. 유비와 손원은 모두 사족이 아니고 군벌이었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대파한 것은 한족이 사족을 무찌른 것이 되고 손권과 유비가 조조에게 대항한 것은 남방과 북방이 대항이 되는 것입니다. '남방'은 장강 일선의 세 주, 즉 익주.형주. 양주를 가리킵니다. 이 세 주는 당시 '낙후한 지역'에 속했습니다. '낙후한 지역'인 남방은 조정과 거물들의 힘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라고 해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실력이 약한 작은 군벌들이 이 세 주를 하나씩 장악하고 할거하게 됐습니다. 제후로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유언, 유표과 손책 등의 인물이었습니다. 적벽대전을 계기로 삼국정립의 국면이 기본적으로 형성됐으니까요. 남방과 북방의 대치 역시 이뤄졌습니다. 이릉전쟁은 한나라 말기의 삼국역사에서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게 가장 중요한 세 전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국 남부의 두 세력이 동서로 갈라져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국면이 형성됐으니까요. 그 이전까지 손권과 유비 진영은 사이가 괜찮았습니다. 서로 싸움도 했으나 필요에 따라 연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분위기는 점점 경색됩니다. 위.촉.오가 삼국정립의 국면을 이미 형성한 이상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삼켜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세 세력 중 어느 하나가 좀 더 커지거나 강해지는 기미가 보일 경우 다른 두 세력이 바로 나서서 제어할 것이라는 사실 역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국이 정립한 시기에 세력이 약한 두 나라는 확실히 평화 곤존 내지는 우호적 연맹 관계를 맺어야 세력이 강한 나라를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조위는 촉한과 손오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손오와 축한 역시 조위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은 삼국정립 국면이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져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한왕조 부흥'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도 아마 인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잔혹'한 현실을 가장 먼저 분명하게 까밝힌 사람은 다름 아닌 노숙이었습니다. 노숙과 제갈량의 입장은 어떻게 달랐을까요? 노숙은 손권을 보좌해 '패업'을 이룬 다음 '제업'을 이루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반면 제갈량은 유비를 보좌해 먼저 '패업'을 이룬 다음 '한실을 부흥 하는 것'이 이상이었습니다. 각자 주군을 보좌해 번저 '패업'을 이룬다는 첫 목표는 일치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목표는 달랐습니다. 따라서 노숙과 제갈량은 친구는 될 수 있었습니다. 손권과 유비의 사이가 틀어진 원인은 당연히 두 나라의 이익이 서로 충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권과 유비가 서로 제 갈 길을 간 진짜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손권은 원소처럼 화려한 권문세가 배경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또 유비처럼 황족의 종실이라는 고귀한 신분 역시 가지지 못 했습니다. 출신 성분으로만 말하면 조조와 약간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조조처럼 '중앙 정부에서 관리를 한 경력'이나 경험이 없었습니다. 또 이른바 '천자를 받들어 불복종하는 신하를 호령'한 경력도 없었습니다. 손권은 그저 토로장군이라는 직위와 별로 안정죄지 못한 할거 정권(강동 정권)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군벌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현실을 중시했습니다. 유비의 상황은 또 다릅니다. 출신을 보면 그는 조조나 손권보다는 휠씬 월등했습닏. 유비는 황족 출신이었습니다. 게다가 명사인 노식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군벌들이 이전투구할 때 대체로 다른 군벌들은 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망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군벌들이 유비를 가볍게 보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비가 사족계급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원소가 죽은 다음 조조를 반대하는 사족과 명사들이 희망을 걸 사람은 유비뿐이었습니다. 원소가 실패한 원인은 문벌이 군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실패한 원인은 남방이 북방에 대항한 것이 이유였습니다. 유비가 실패한 원인은 '변두리의 패왕'밖에는 될 수 없는데도 더 큰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제갈량의 촉한이 조조의 방침을 더 잘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조와 제갈량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치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완전히 상반된느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실의 정통성에 대한 의미 없는 논쟁을 그만둔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갈량도 조조와 마찬가지로 매우 현실적이고도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갈량도 조조처럼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여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이 취했던 각종 조치들을 살펴보면 사족들의 비위를 맞추겠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갈량이 실시한 각종 제도는 '조조가 참여하지 않는 조조의 노선' 내지는 '조조를 반대하느 조조 노선'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갈량은 조조의 노선을 조조보다 더 오래 견지했습니다. 조조는 이상은 가지고 있었으나 청사진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이 면에서는 조조와 완전히 구별됩니다. 제갈량은 이상도 마음속에 청사진도 그려져 잇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조의 '치국'은 어딘가 모르게 '법'보다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을 풍겼으나 제갈량은 달랐습니다. 진짜 완벽하게 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 공평성을 기했습니다. 조조의 정부는 부패를 근절하지 못했으나 제갈량의 정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정부보다 휠씬 더 청렴했습니다. 조조의 경우 사족과 명사들에게 에워싸여 그들에게 신세응 지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득불 그들에게 다소 양보할 수밖에 없는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촉한은 익주라는 지방에 위치해 있어서 명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똑같은 일이라 해도 조위에게는 큰 평지풍파가 일어나지만 촉한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조에게는 긍정적인 장점도 많았습니다. 그가 새 질서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그렇습니다. 조조가 수립하고자 한 이 새 질서는 계급적 차원에서 보면 '서족'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이념에서 보면 법가의 사상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에 의하면 제국에 가장 적합한 통치 계급은 서족지주계급입니다. 반면 제국에 가장 적합한 통치 이념은 법가 사상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제갈량 본인의 장점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 이런 전형적 인물이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역자 후기 - 삼국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무릇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펴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나누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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