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2007년 8월 18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한국 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다민족 사회가 되었으니 인종 차별 행위를 막아달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인 백정이 조선 초기 전체 인구의 1/3 내지 1/4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목민족은 기록상 고려 때부터 연이어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중국인도 중국 대륙의 정치적 혼란기마다 대거 한반도로 유입되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에 조선으로 피난 와서 정착한 수십만 명의 유민이 그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대부터 있어 왔는데, 그 정도는 휠씬 더 심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그다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인으로 대변되는 해양세력도 일찍부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기록상 왜(倭)로 표현된 집단이 이미 1~2세기경 삼한의 남부, 즉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 주변의 여러 종족 및 민족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무슬림 세계의 사람들까지도 조선왕조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가령 조선 초기만 해도 정부의 공식 행사에는 매번 '회회인(回回人)'으로 표현된 무슬림 대표가 초대받아 참석했다. 그만큼 정부가 조선에 정착한 무슬림 사회의 영향력을 무시 못할 정도로 그 수가 상당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 등 한반도의 주변 여러 종족 및 민족만이 아니라, 멀리 무슬림 세계의 아랍인까지도 오늘날 한민족으로 지칭되는 구성원의 일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재 한국인의 관념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란 신화는 만들어진 역사 즉,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한반도 정착 과정은 순탄했을까? 기록상으로 보아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들은 문화의 다양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출신이 대륙민족이든 해양민족이든 간에 이방인들은 한반도의 구성원이라는 인식, 즉 정체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여러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이방인은 생활방식 등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았지만 그 구성원으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의 다양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왕조시대에서는 다른 인종.민족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포용하지 않는 야만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지금 한국인이면 누구나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외국인 주민의 피해 사례들을 자주 접한다. 이제 한국인은 이러한 유엔의 권고를 차지하더라도 역사상 극소수에 불과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들인 로마, 중국의 당, 몽골, 네덜란드, 대영제국, 미국 등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휸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기에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1.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온 진나라 유민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문헌 기록상 한반도에는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삼한(三韓)이란 정치집단이 존재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는 삼한의 기원을 토착세력의 성장이란 관점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학계 일각에서는 일찍이 삼한의 주력이 모두 북방계 이주민세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에 와서 마한의 경우에 토착세력인 반면에 진한과 변한의 기원은 북방계 이주민이라는 견해가 제출되기도 했다.
진.변한의 주도세력은 진의 유민
: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했다. 그 백성은 토착민이다."라는 [삼국지]한전(韓傳)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마한의 54국은 분명히 토착세력이 세운 나라들임이 분명하다. 반면 진한의 건국 주체는 마한과는 그 민족.종족적 기원이 다른 진(秦)의 유민이었는데, 이는 [후한서(後漢書)]한전의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의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렇게 진나라의 유민은 진의 폭정을 피해 중국에서 한반도 남부로 망명해 왔다. "진한은 처음에는 여섯 나라였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진한 12국의 건국 주체는 진의 유민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한의 12개국을 건국한 세력은 역사학계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북방의 유목민족이 아니라 진나라 유민 출신의 중국인인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왕을 세우지는 못하고 마한의 허락하에 마한인으로 왕을 옹립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나라 출신 이주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진한의 언어에서도 추정해볼 수 있다. 진한 사람들의 말이 진나라 사람들의 말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진한 12국의 구성원은 진나라 출신이주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한전은 마한 및 진한과는 달리 변진(弁辰), 즉 변한의 민족.종족적 기원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진한조 다음에 변한조에 편제(編制)되어 있는데, 변한조는 진.변한에 대한 기록 부분과 변한에 관한 기록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삼국지] 편찬자는 한전에서 진한 및 변한에 대해 진한조와 변한조로 나누되, 진한조에서는 진한에 대해서, 이어 변한조의 앞부분에서는 진한 및 변한에 관해서, 변한조의 뒷부분에서는 변한에 대해서 서술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 편찬자는 진한 및 변한의 민족.종족적 기원을 동일한 집단, 즉 진나라 출신 이주민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변한조에서 또 다시 변한의 민족.종족적 기원에 대해 굳이 서술할 필요가 없었다.
진.변한과 마한의 문화적 차이
: 변한과 진한은 의복과 주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언어 및 법속의 유사성으로 보아, 두 집단은 동일한 계통으로 간주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들 진한과 변한의 두 세력은 별다른 분쟁이 없이 서로 경계를 두지 않고 귀섞여 살았을 정도로 그 민족.종족적 친근성이 매우 깊었다는 것이다. 마한과 진.변한의 민족.종족적 기원이 다른 만큼 그들 사이에는 생활방식 등 문화적인 차별성이 있었다. 물론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 마한 사람들과의 문화 교류도 점차 이루어 갔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진한 및 변한 24개국의 구성원의 절대 다수는 진나라 유민 출신인 중국계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진한 12국은 경주 지역의 사로국에 의해 점차 통합됨에 따라 신라로 발전해 나갔다. 반면에 [삼국지]시대인 3세기까지 변한 12국은 각기 독립적인 국가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변한 12국은 한국측 자료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6국인데, 김해의 금관 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처참한 패배를 목격한 만주철도 연구원 출신의 에가미 나오미는 앞의 진왕 등과 관련하여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학설을 제기했는데, 유명한 '기마민족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기마민족설
: 에가미는 1948년에 열렸던 '일본민족과 국가의 기원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설]을 발표했다. 즉, 에가미는 일본의 천황가의 기원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천손이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을 성립시킨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가미는 부여와 고구려 계통에 가장 가까운 반수렵.반농업의 북방 기마민족의 한 세력이 말을 타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채 한반도로 내려와 마한 지역에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드르이 남하시기를 대략 3세기 중엽 이전으로 간주하고, 이 세력의 수장을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진왕으로 추정한다. 진왕은 진한 12국의 수장인데, 대대로 진한 사람이 아닌 마한 사람으로 진왕을 삼았다. 이들은 진왕의 주도하에 다시 남하를 계속하여 김해 지방에까지 진출해 변한(임나) 세력을 정복했다. 그 뒤 3세기 말에서부터 4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민족이동에 따른 격동기여서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흉노 등 5호족이 장성을 넘어 화북지방으로 침입하고,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하여 낙랑과 대방을 점령하는데 이에 자극받은 백제와 신라도 체제를 정비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한반도의 정세가 이렇게 바뀌자 불리함을 느낀 진왕의 기마민족은, 4세기 초에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인 북큐슈 츠쿠시 지방으로 이동하여 왜인세력을 정복하였다. 이런 경로를 거쳐 이들 기마민족은 변한과 북큐슈 지방을 망라하는 한.왜연합왕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그 중심지는 경남 김해의 임나였는데, 북큐슈에 진출한 세력이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4세기 말경 기나이 지방에 강대한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다. 이것이 일본의 두 번째 건국이며 그 주인공은 16대 천황 오우진이라고 에가미는 설명한다. 오우진 천황은 한.왜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오늘날의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서 신라를 제외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마민족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역사적 전거가 되었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한연합정권이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기마민족설은어쨌든 한반도 남부를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정복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가미는 진왕정권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 [삼국지]동이전의 "(변진의 여러 나라 중)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하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가미의 주장처럼 강력한 세력이 아니라 마한의 통제 아래 있는 미약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진왕정권은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유민이 세운 것임이 분명하다. 기마민족설의 또 다른 핵심 내용은 야마토 정권의 오우진천황이 한.왜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 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의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도 역시 현재 일본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라 그 근거를 상실하고 있다. 현재 일본 학계는 일본에 통일된 국가권력, 즉 야마토 정권의 수립 시기를 6세기 말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그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그가 사용하는 기마민족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살았던 유목인을 말하는데 한국이나 중국측 문헌에 따르면,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는 기마에 관련된 기록들은 국가의 군사조직을 의미하는 것이지, 유목민족 전부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2.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과 중국 이주민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문헌 기록상 중국인이 처음으로 한반도로 이주해 오는 현상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정 때부터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진시황이 죽은 후 진승의 반란을 계기로 중국 대륙에 큰 혼란이 일어난 진한 고체기에도 이어졌다.
위만, 준왕을 몰아내다
: 진승의 반란군은 진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유방과 항우로 대변되는 반란군은 기원전 206년에 진의 수도 함양을 함락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 와중에 엄청난 규모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그 일부가 앞의 [삼국지] 기록처럼 조선으로 망명해 왔다. 위만 역시 이 무렵 고조선에 망명하여 그 서쪽에 변경에서 세력을 키워 기원전 194년 무렵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위만의 조선은 그 손자 우거왕 때까지 이어져 오다가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흔히 이 기간 동안 존손했던 조선을 '위만조선'이라 부르며 3대에 걸쳐 8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한나라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통일 후 유방은 원활한 전국통치를 위해 휘하의 인물을 제후로 임명하였다. 이때 연왕에 임명된 노관은 유씨 성이 아니면서도 제후에 봉해진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유방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써 다른 성씨의 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자 노관은 흉노로 망명해 바렸다. 연왕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은 그 혼란을 틈타 연나라인 상당수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왔던 것이다. 위만은 자신보다 먼저 고조선에 정착했던 수만 명의 중국인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조선으로 망명해온 중국계 이주민을 모아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위만은 한나라와의 '외신(外臣)'이라는 형식적 예속관계를 맺어 주변세력의 한나라에 대한 침략을 방지하는 임무를 맡은 한편, 그 반대급부로 한의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공급받아 주변세력을 복속시켜 나갔다. 그 결과 위만조선은 건국한 지 20여 년도 지나지 않아 한나라의 위협적인 존재로 뚜렷이 부각될 정도로 국력이 급속히 성장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주도세력이 된 중국계 이주민들은 사실상 토착세력의 고유한 질서에 편입되어 갔다. 위만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해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세력기반이 취약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중국계 이주민 집단의 토착화
: 위만조선의 조정 내부에는 상(相)을 비롯한 관리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들의 관직명인 '상'앞에 '조선', '니계' 등 지명이 붙어있다. 이들은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옛 고조선의 토착세력이었다. 이 수장 계층이 중앙 정부의 최고직인 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토착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동시에 국왕 역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중국 이주민 집단은 중국식이 아닌 조선의 고유한 제도나 관행을 따라 통치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만집단이 의도했던 아니든 간에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위만의 출신지가 중요한 역사적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일제 관변역사학자들에 의해서였는데, 그 저의는 명백하다. 이들은 단군조선, 즉 고조선의 역사를 조작된 신활 치부해버리고 중국인의 식민정권인 위만조선, 이를 이은 한사군이 바로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규정해버렸다. 이처럼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듯이 한국은 애초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제 때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위만은 조선인인가, 중국인인가
: 해방 후 남한 역사학계에선 위만이 중국인이란 관변역사가들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였다.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견해는 오늘날 남한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고 있다. 북한 학계의 주장 역시 대동소이하다. 남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위만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위만조선도 당연히 한국사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정황 근거들만을 가지고 위만을 조선인으로 규정하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데 있다. 당시 연의 종족 구성이 다양했다고 해도 위만이 반드시 조선인이었다는 보장은 없다. 그는 중국인이었을 수도 있고,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의 상투 또한 진시황릉의 등신도용에서도 보이듯이 조선만의 고유한 풍속이 아니었다. 위만집단이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정권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조선 내에 세력 기반이 없어 조선이란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도 그만큼 세력기반이 취약했다는 데 대한 반증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위만이 국호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나 토착인을 중용하고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한 것은 그의 세력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위만은 조선계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계 이주민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3. 한반도 남부에 왜가 있었다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 왜가 가야 지역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제 있었던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는 무엇인가? 비문에 따르면 서기 400년에 광개토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 위하여 보낸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무려 5만 명이었다. 이는 이런 정도의 대병력을 보내야만 왜를 물리칠 수 있었음을 뜻(* 약간 다른 해석으로 당시 고구려가 북쪽의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한 전격전으로 전쟁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려고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왜의 병력이 이 책과는 달리 축소될 가능성이 존재한다)하는데, 당시 일본열도 내에는 이 정도의 병력을 움직일 만한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다시말해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왜가 일본열도 내의 세력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왜가 가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은 3세기 무렵의 한반도 상황을 알려주는 [삼국지] 한전(韓傳)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였다는 사실이다.
강력했던 왜의 위상과 그 쇠퇴
: 한반도 내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던 것이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왜의 인구는 당시 백제의 인구인 400만 명 정도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당시는 한반도 남부의 왜인세력이 국면 면에서 백제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왜인은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여 그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광개토대왕비문이 조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삼국사기]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왜의 계속된 침략이었다. 왜의 침략 때문에 나라의 운명이 불분명해지는 상황에까지 처하자. 실성왕은 왜에 자신의 아우를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우호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역시 왜에 인질을 보냈는데, 태자 전지는 아신왕이 죽자 그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전지왕인데 당시 백제가 태자를 인질로 보내서 우호를 도모해야 할 정도로 왜는 막강한 세력이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있는 왜의 침략 기사가 사실이라고 해서 당시 일본열도 내의 세력이 고대 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사실로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비문의 왜가 일본열도의 왜 세력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왜는 가야지역에서 5만 명의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한 지 4년 후인 404년에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한반도의 왜인세력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두 차례의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어 크게 위축되었다. 비록 크게 약화되었지만 왜인세력은 여전히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내 한반도의 왜는 가락국의 역사서인 '본기(本記)'를 인용한 [삼국사기] 금관성파사석탑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금관가야에 복속되고 말았다.
가야의 한반도 왜 통치기관 '임나일본부'
: 452년에 한반도 남부의 왜를 진압한 가야는 이제 그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한일 역사학계의 최대 쟁점인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기록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임나(가야)왕의 지시에 따라 일본부가 신라에 구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년(481년)조의 기록은 이 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예 신라 구원군을 왜병이 아닌 가야병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측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왜를 가야의 예속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미마나'로 읽는데 좁은 의미로는 김해, 넓은 의미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임나'가 김해의 금관국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넓은 의미로 가야 지역의 나라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일본부 관련 기록에서도 왜가 가야의 여러 나라에 대하여 조세 및 역역(力役)의 징수나 군사동원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제한 사실 등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즉, 관청이나 기관인 '부'의 실체를 나타내는 정치.군사적 지배에 관련되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흠명기 기록 모두는 532년 신라에 멸망당한 금관국 등 남부 임나의 부흥문제 등을 둘러싸고 가야 제국의 왕들과 보조를 맞추는 외교활동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관되게 가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일본부'는 6세기 중엽에 실제로 사용했던 명칭도 아니다. '일본'이나 '부'는 7세기 말 이후에나 쓰였다. 따라서 일본부는 왜가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에 가필 수정된 것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554년) 12월조에 보이는 백제가 왜에 보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부'란 왜의 사신 내지는 그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실제 흠명기에 보이는 일본부의 구체적인 활동을 보면 그들은 야마토정권의 명령이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에 따르고 있다. 심지어 왜왕의 사신조차도 일본부와는 임나 부흥문제에 관한 정책을 직접 논의하지 않고 그들을 따돌렸다. 일본부가 임나의 부흥 문제에 적극적으록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금관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자연 한반도 남부의 왜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면 일본부는 어째서 왜왕으로부터 떨어져 가야 제국의 왕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까? 일본부 소속 인물의 출신지와 가야 지역에서의 장기체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는 임나지역에 거주했던 현지 왜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임나의 일본부가 야마토 정부의 현지기관이었다면 당연히 야마토 정부와 공동으로 전략과 전술을 같이했을 텐데 오히려 이들은 야마토 정부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취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왜왕은 일본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그 관계도 아주 소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부가 백제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일본부는 왜왕이나 백제왕이 아닌 가야 제곡의 왕들과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임나(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 내지 그 집단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기껏해야 가야 지역에 잔존했던 왜인집단의 대변기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구체적인 활동도 모두 임나의 부흥 및 가야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외교활동뿐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왜인은 한때 가야 지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를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한반도 남부의 왜도 광개토왕에게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아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한반도의 왜는 452년,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국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결과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일 것이다.
4. 국제도시 경주에 뿌리내린 아랍인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지만, 신라는 당시 아랍인과 직접 교류했으며 그것도 아주 활발했다. 아랍인들이 신라에 정착해 살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한국측 자료에는 없지만 아랍권에는 남아 있다.
아랍인의 신라 정착을 알려주는 기록
: 이슬람제국의 전성기에 활약한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는 신라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여행견문록이자 역사서인 [황금초원과 보석광]에 이라크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은 일단 신라에 들어오면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정착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아랍측 자료들은 신라에 아랍인들이 정착해 살았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경주시 외동면 쾌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쾌릉의 무인석은 신라인과 전혀 다른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이 신라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유물이다. 우람한 체격에 오똑하고 큰 코, 곱슬머리에 크게 부릅뜬 눈, 튀어나온 광대뼈, 귀 밑부터 흘러내린 길고 숱 많은 곱슬수염, 머리에 쓴 아랍식 터빈의 얼굴 모습은 아랍인의 형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형상을 하고 있는 인물을 직접 보지 않고는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하기 어려운 관계로, 아랍인들이 신라의 경주에 정착해 살았음을 방증해주는 것이다. 이 무인석이 무덤의 호석으로까지 등장하는 것도 이들이 경주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처용이 나타난 곳이 개운포라는 점은 남북국시대 신라의 국제교역로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개운포, 즉 울산은 당시 사실상 광역화한 경주의 배후도시로서, 신라의 최대 국제무역항이었다. 또한 개운포는 아랍 상인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던 당나라 양주로 가는 바닷길의 신라측 출발지였다. 산업화가 진전되기 전인 1962년 경주시 인구는 7만 6,000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보다 천년도 휠씬 전인 통일신라 때의 경주인구가 100만여 명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제무역의 주역 신라방과 장보고
: 사실 통일신라 때의 경주는 마치 오늘날의 대도시처럼 광역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시 경주의 인구가 100만여 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당시 경주의 인구가 100만여 명이나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중국 등 주변 나라들만이 아니라 아랍세계와의 활발한 국제교역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신라의 국제무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단적인 사례가 신라방의 존재이다. 8세기 무렵부터 신라인들은 동아시아 3국간의 교역뿐만이 아니라 동서해상무역에도 포섭되어 있었다. 당시 아랍인들은 바로 국제무역의 주역이었으며 신라인들도 이처럼 아랍인들이 주도한 동서교역에 참여했던 것이다. 신라인의 이 같은 국제무역 활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중국의 동.남쪽 연안과 대운하 변에 산재하고 있던 신라방의 존재였다. 국제 교역망에 편입된 경주는 인구 100만에 달하는 국제도시로 변모했으며 앞의 아랍 측 문헌에 나오는, 신라에 정착한 아랍인들도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이주 아랍인은 대체로 경주, 혹은 경주의 배후도시인 개운포에 정착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가 국제무역의 주요 국가로 부상하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바로 장보고이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 교역을 독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 사회는 물론이고 황해의 해상세력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던 것이다. 이런 장보고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신라는 신라.중국.일본 3국간의 무역만이 아니라 아랍세계와의 중계무역도 독점하여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이 온전히 행정도시인 것과 달리 경주는 행정의 중심이면서 오늘날의 광역도시처럼 인구와 부가 집중된 소비향략적인 국제무역도시였기 대문에 인구가 휠씬 더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용은 울산의 호족인가, 무슬림인가
: 현재 학계 일각에서는 처용가의 작자 처용의 출신을 둘러싸고 논쟁 중에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 처용은 용의 아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용의 아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시 울산 지방에 있었던 ㄴ호족의 아들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며, 아랍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처용을 지방 호족의 자체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 근거는 [삼국유사]에는 처용설화뿐만 아니라 많은 용이 등장한다는 데서 찾는다. 이와 같은 용은 대개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국왕을 비롯한 중앙 귀족세력이며, 다른 하나는 중앙권력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도 있는 지방 호족세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관직 수여를 신라인이란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논리가 빈약하다. 경주 괘릉의 아랍인 형상의 무인석은 그가 관직을 수여받지 않았으며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괘릉 좌우에 세운 문신상과 무인상은 생전에 고인을 모셨던 관리들이 사후에도 보필하기를 바라는 내세사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처용은 국제도시 경주의 배후도시인 울산에 정착했던 아랍인으로서 어떤 특별한 재능 때문에 현강왕에게 발탁되어 벼슬했던 인물임이 확실하다 할 것이다.
5. 한반도의 여진인
말갈의 후예인 여진(女眞)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씌어 진 시기는 903년 무렵이다. 이때는 바로 발해의 국력이 쇠약해진 반면, 거란이 강해진 시기였다.
한반도 북부는 여진의 터
: 고려 건국 이후 여진인은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고려로 지속적으로 이주해 왔다. 여진의 이러한 이주 현상은 기록상 921년(태조 4년)에 처음 보인다. 여진인의 이주 행렬은 1107년(예종 2년)을 기점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진의 여러 부족이 1114년부터 완안부에 의해 점차 통합되기 때문이다. 완안부는 송화강의 자류인 아르치카강 기슭에 살던 여진의 한 부족이다.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 때에 복속시킨 여진인이 기병의 숫자만 해도 1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아주 많았는데, 유금필 등이 936년(태조 19년)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인 일리천 전투 때에 흑수 등 여러 여진부족의 기병 9,50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여진인의 자발적인 귀화는 문종 때에 와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태조 왕건의 복속정책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한반도 내에는 고려 건국 이전부터 여진인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예컨대 남북국시대의 신라에도 여진인이 정착해 있었다.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 중 한 부대가 말갈인으로 구성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도 여진인이 상당수 정착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발해 멸망 직전 한반도의 북부 지역은 무주공산이었는데, 이곳은 주로 여진인의 터전이 되었다. 태조 왕건의 평양 개척 이후 고려의 서북 방면으로의 진출은 남방의 후백제와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가 고려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그 주도권을 차지한 928년(태조 11년)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재개할 수 있었다. 그려의 판도가 청천강까지 이른 이후 서북면 경영의 주요 전략은 북진을 기도하기보다는 이 지역의 개척과 거란의 침략대비에 주력했다. 태조 왕건의 이러한 북진정책의 결과, 여진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할 정도로 수만 명에 달하는 여진인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발해 유민 속의 여진인들
: 고려로 귀화한 발해 유민 가운데는 여진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대체로 고구려 유민과 여진의 전신인 말갈인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사]에 따르면 925년(태조 8년) 발해의 장군 신덕 일행의 투항이 발해 유민 가운데 최초로 고려에 귀환한 사례였다. 그 이후의 귀화인들은 발해의 멸망과 함께 거란의 지배를 피해서 고려에 온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귀화 일행은 바로 발해의 태자 대광현 일행이다. 그 인원이 무려 수만 명에 달했는데, 이처럼 925년부터 시작하여 938년까지 10년 이상 이어진 이주 행렬에 참여한 발해 유민의 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일찍이 조선 후기의 학자 유득공은 여러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가 바로 그의 저서 [발해고]에 실려 있는데, 그 인원이 무려 10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대체로 고구려의 유민과 여진의 전신인 말갈인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고려로 이주한 발해 유민 가운데에는 여진인도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이다. 특히 여진의 귀화 규모는 문종(1046~1083년)때에 와서 대규모화한다.
귀화 여진인에게 자치를 허용하다
: 고려 정부는 대광현으로 하여금 그의 무리와 함께 한 지역을 관할하게 한 것처럼 이주한 여진인에게도 사실상 자치를 허용했다. 귀화 여진인 가운데 남부 지방의 거주를 허용한 특별한 소수 집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사상 요충지인 양계 지역에 배치했다. 이는 귀화 여진인에게 군사적 측면에서의 기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예 여진인의 부족 자체가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서여진에서도 고려의 군현으로 편임되기를 바라는 부족들이 있었다. 이처럼 여진인이 대규모로 이주해온 까닭은 바로 여러 차례의 거란 침략을 물리치는 등 고려의 국력신장에 있다. 이들 귀화 여진인은 사실상 부족 및 부락 단위로 자치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숙종(1095~1105년) 때에 와서 완안부가 주변의 여진부족들을 통일하고 지금의 간도지방을 차지한 후 남하를 계속하여 거란전 지역까지 세력을 미치면서 여진인의 역이주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거란전 세력의 영역은 두만강 유역에서부터 고려의 동북 지역 부근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고려 동북의 천리장성 안팎의 여진부족들도 동요하게 되었다. 그러자 숙종은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을 별도로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했다. 윤관은 1107년(예종 2년) 별무반을 거느리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함주를 비롯한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했다. 그러나 여진의 거듭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고려는 다시는 침략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의 조건을 받아들여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이로써 동북 지방의 여진인 상당수는 고려의 구성원이 더 이상 아니었다. 이어 원은 지금의 영흥인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했다. 이 지역의 여진세력 역시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동녕부는 1290년(충렬왕 16년)에 다시 찾았으며 1356년(공민왕 5년)에는 쌍성총관부마저 수복함으로써 이 일대의 여진세력 역시 또 다시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이런 고려의 유산을 기반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음에 따라 한반도의 여진인도 사실상 조선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반도의 여진인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사실상 조선의 구성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한반도 밖의 여진인이 이주해 온 사례는 무수히 있지만 많아야 한 번에 수십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한반도의 여진인 일부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사는 경우만이 아니라, 아예 도망간 사례도 많았지만 그 역시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인과 달리, 한반도의 여진인은 대부분 농업생활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ㄱ리고 이들 여진인도 대체로 자치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대조영은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 지금까지도 발해사 연구는 주로 발해의 건국 과정, 그것도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 문제에 집중되어왔다. 이것이 바로 발해의 정체성, 즉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조영 집단은 본래 속말(粟末)말갈 지역에 살다가 그 본거지를 떠나 고구려 영역 내에 옮겨와 살았다. 말갈 7부의 하나인 속말부는 현 지린시를 중심으로 한 쑹화강 유역에 있었다. 쑹화강 유역에서는 부여 멸망 후 물길이 부여를 대신하여 그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이 북제 시기인 563년부터 말갈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말갈 7부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6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다시 진출하면서 속말말갈이 분산되었다. 이 와중에 일부는 고구려에 저항하다가 중국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고구려 영내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때 대조영의 조상 집단도 고구려로 옮겨왔던 것이다. 대조영의 조상이 고구려로 들어와 정착한 곳은 요동의 태자하 유역으로 보인다. 이들은 귀화한 후 주로 군사적인 역할을 하였다. 말갈에 관련된 기록들이 거의 다 군사적 행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조영 자신도 고구려의 장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로의 동화과정이 진전되어 순수 말갈족 상태에서 벗어났다. 결국 대조영은 말갈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고구려로 귀화아여 상당한 정도로 고구려화가 진전되었다는 것이다.
6. 고려의 거란인 사회
고려가 최초로 북방의 유목민족인 거란과 관계를 맺은 방식은 외교가 아닌 전쟁이었다. 고려와 거란은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거란인이 고려로 유입되었다.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히다
: 거란인이 고려로 이주해온 사실은 현종 7년, 즉 1016년부터 [고려사]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은 고려와 거란간의 전쟁 중이었다. 이 와중에 거란군으로 전쟁에 참전했거나 국경지대에 살았던 거란인들이 고려로 탈출하는 사례가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쟁 기간 중에 고려인 및 거란인은 상호 거란군과 고려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거나 자발적으로 상대국으로 도망가는 경우가 번번하게 일어났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들 이주 거란인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행렬은 30호에 불과하다. 과연 이주 거란인의 규모가 이처럼 소규모의 행렬에 불과할까? 서긍은 그의 저서 [고려조경]에서 1123년(인종 1년)에 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견문한 정보를 토대로 거란군의 포로가 수만 명임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993년 이후 25년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전쟁 와중에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거란군만 해도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다.
수초를 따라 옮겨다니다
: 거란인의 후예인 양소척은 농업 중심의 고려사회에 이주한 후에도 토지에 정착하거나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본래의 생활방식 대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영위하던 유목민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렇게 고려에 와서 살던 거란인의 후예인 양수척은 사냥, 기예 등의 직업에 종사하였다. 양수척 가운데 기예에 종사하던 일부인 창우(倡優)가 먼저 재인(才人)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그 뒤 양수척이 화척(禾尺)으로 개칭되었다. 이들은 주로 사냥, 소 및 말의 도축, 유기 및 가죽제품 제조 등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들이 바로 조선시대 백정(白丁)의 전신이다. 이주 거란인의 직업은 유목, 사냥, 유기의 제조와 판매, 창우 등이었다. 여기에 도축업도 그들의 주된 직업있었다. 한마디로 이주 거란인들은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유목, 사냥, 유기의 제조와 판매, 창우 들의 직업에 종사하는 등 그들 본래의 유목민적 생활방식을 유지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거란인은 엄연한 고려의 구성원
: 이주 거란인은 호적이 없으니 국가에 대한 부역도 지지 않았지만 그들도 역시 고려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실제 이주 거란인 가운데 일부는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기술이 뛰어난 자들은 개경에 머물며 여러 가지 기구와 복식의 제조에 종사했다. 이주 거란인은 본래 기술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어 고려의 기술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들도 많앗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군인, 특히 기병으로 복무한 자들도 있었다. 이주 거란인은 기술직 및 군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목민족 특유의 유랑생활을 영휘했기 때문에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인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관계로 부역의 부담에 벗어나 있었으나 고려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주 거란인은 식생활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등 문화의 다양화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사실상 인종(1122~1146년)때까지 일부 왕족이나 귀족 등 일부 계층만이 육식을 할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축 기술 역시 형편이 없었는데, 거란인들이 이주해온 후에는 이들이 도축을 주도함으로써 육식 문화도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일부 계층만이 육식문화를 향휴했지만 고려 후기에 와서는 각 참의 모든 곳에서 손님 접대에 소고기를 이용할 정도로 육식이 일반화되었다.
7. 몽골인의 후예, 달단
달단은 본래 만주 흥안령 서쪽 기슭이나 음산산맥 부근에 살던 몽골족의 한 부족인 타타르를 가리켰는데, 몽골 고원 속은 몽골인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달단
:몽골인의 후예인 달단은 조선 초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도 우유를 짜는 등 고유한 생활방식인 유목에 종사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도축으로 직업을 삼은 몽골인의 후예인 달단만 해도 여전히 수백 호가 존재하고 있었다. 1269년(고종 46년) 고려 정부에서는 30년 동안 지속된 장기전에 따른 국력 손실로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자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로써 고려와 몽골간의 인적 교류도 늘어났다. 이 와중에 수많은 몽골인이 고려오 오게 되었다. 1271년(원종 12년) 원은 황주, 봉주(봉산), 금주(김해)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약 6천 명의 군인에다가 수많은 군속 및 관속 그리고 그 가족들이 와서 있었다. 원종 때 둔전 경작을 위해 고려의 서북 지역에 와서 그대로 정착한 몽골인 가운데 일부는 조선 초기까지 잔존한 채 고유한 생활방식인 목축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북 지역에 정착한 몽골인 다수는 고려에 온 목적이 둔전 경작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농민이 되었을 것이다. 쌍성총관부는 1356년(공민왕 5년)에 회복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원의 지배를 받았다. 이 쌍성총관부의 관할 지역에는 대체로 고려인과 여진인이 뒤섞여 살았다. 여기에다 다루가치가 파견되는 등 원의 실질적으로 지배한 까닭에 몽골인도 유입되었다. 이들 몽골인 가운데 일부는 조선 건국에도 그래도 머물렀다. 제주에는 사실상 토착화된 몽골인이 있었다. 탐라는 몽골군이 고려군과 연합하여 1273년(원종 14년)에 항몽세력인 삼별초를 토벌한 이후 직할령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탐라는 1294년(충렬왕 20년)에 고려로 환속되어 그 다음 해에 지명을 제주로 고쳤다.
제주도의 목호
: 원은 탐라를 목마장으로 삼았다. 탐라가 원의 목마장이 된 계기는 1276년에 이곳에 본국의 말을 가져와 기르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우마 등은 몽골인 '하지'에 의해 사육되었다. 이들은 목호(牧胡)로 불리어졌는데, 목호는 본국에서 선발되어 제주에 왔거나, 이미 제주에 와 있던 몽골군 가운데서 차출되었을 것이다. 이들 이외에도 원의 순제가 피난할 궁전을 짓기 위해 목수 등 많은 기술자 등도 제주에 보내졌다. 제주는 원의 주요 유배지였다. 때문에 황족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곳으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명이 원을 몰아내고 원의 잔존세력을 평정하던 시기에도 원의 황실 가족 상당수가 제주로 유배당했다. 이렇게 제주에는 군인, 목호 등 다양한 집단의 몽골인이 이미 원종때부터 파견되어 왔다. 이들 몽골인 가운데 공민왕 때에 와서는 자신들만이 모여 사는 부락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아예 정착했던 자들도 상당수였다. 공민왕 23년 7월조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 정부가 몽골인을 토벌하기 위해 무려 2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정도로 제주에 거주한 몽골인들이 매우 많았음을 뜻한다.
달단의 백정화
: 고려와 원의 강화 이후 충렬왕을 비롯해 다섯 왕이 계속하여 몽골의 공주들을 맞이했다. 원의 공주들은 결혼한 이후 고려로 올 때마다 거창한 일행을 데리고 왔는데, 공주의 시중을 드는 이들을 몽골어 겁령구(怯怜口)라고 불렀으며, 겁령구 가운데 상당수는 고려에서 자리잡고 살았다. 달단 등으로 이루어진 백정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자기들끼리 혼인하고 집단을 이루어 유랑생활을 하며 기예, 사냥, 도축, 유기 및 가죽제품의 제조와 판매업에 종사했다.
8. 조선의 무슬림 집단
회회인이라 불린 무슬림은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고유 의복을 착용하는 등 그들 풍속대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대조회와 같은 국가 행사 때에 무슬림들은 그들의 종교인 미슬람교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무슬림 이주의 역사
: 조선 초기만 해도 대조회와 같은 국가 행사에는 문무백관을 비롯하여 일본인, 여진인 및 무슬림의 대표도 참석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조선 사회는 무슬림 세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조선에도 무슬림 사회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역사상 한반도와 무슬림 세꼐와의 교류는 신라 때부터 있어 왔다. 고려는 다른 대륙에 자리 잡은 나라와의 교류와 무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벽란도는 개경과 각 지방, 나아가 외국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국제무역항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숙박시설이 있었다. 벽란정이란 일종의 귀빈 접대시설도 있었다. 이 벽란도를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멀리 무슬림 국가들과도 교류하였다. [고려사] 정종 6년(1040년) 11월 1백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무슬림 상단과 교역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231년 몽골이 처음 고려를 침략한 후 30여 년간 지속된 여.몽전쟁은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맺음에 따라 끝났다. 고려로 온 몽골인들이 아주 많았는데, 이 가운데는 소수였겠지만 서역인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서역 출신 무슬림 가운데 개성을 비롯한 주요 지방에 생활 터전을 마련해 거주하고 있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조선 건국 후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정착했던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조선의 무슬림 사회의 주요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무슬림 세계와의 교류 전통은 조선 초기까지도 대체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조선이 초기에 중국, 일본, 여진, 다음으로 많이 교류한 나라가 바로 현재의 오키나와인 유구국이다. 유구는 19세기 말 일본의 멸망하여 지금도 존재하지 않지만, 14~15세기까지도 활발한 해외활동으로 남방무역을 주도한 나라였다.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 조선과 유구의 교역형태는 기본적으로 사행(使行)무역이었다. 즉 유구 사신단이 진상품을 바치면, 조선 측이 답례품을 주는 형식으로 교역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구는 해외 무역으로 생계를 삼았기 때문에 본래의 목적이 경제적 교역이었던 만큼 관무역에 부수된 형태의 사무역을 추구하였다. 당시 유구는 조선에 토산물과 안남, 섬라(지금의 태국) 등 남방 산물을 중계 무역한 대신에 섬유와 문방구류 등 조선의 특산물을 교역해 갔다. 조선 왕조 초기만 해도 조선은 유구, 나아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류를 했을 뿐 아니라 이들 나라를 매개로 멀리 무슬림세계와도 교류하였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유구 혹은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온 무슬림을 포함한 이주 무슬림의 규모는 정보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수 없으나, [태종실록] 태종 16년 5월 20일자의 기옥으로 보아 국가 재정을 우려할 정도로 이주 무슬림 가운데 정부에서 월급을 받은 인물들만 해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이주인과 일본인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조선에 귀화한 무슬림은 대조회, 망궐례 등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 때마다 초청받아 참석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였다. 이런 사실은 그만큼 이들 집단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이주 무슬림은 고유 의복을 착용하는 등 그들 풍속대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대조회와 같은 국가 행사 때에는 무슬림은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교 의식을 거행한 것처럼, 그들의 신앙을 유지한 채 살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 정부가 이주 무슬림 등 다른 민족들의 생활방식 등을 그래도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아니라 배타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데에 있다. 조선왕조는 문화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은 폐쇄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9. 북방 유목인 백정이 되다
조선시대에 와서 아주 특수한 집단이 나타났는데, 백정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기끼리 혼인하고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어 유랑생활을 하며 기예, 사냥, 도축, 유기 및 가죽제품의 제조와 판매업에 종사했다.
백정의 내력과 양인화
: 재인, 화척은 고려시대의 양수척에서 분화되었는데, 바로 재인과 화척이 1440년(세종 5년) 10월에 백정으로 개칭되었다. 달단도 그 직업이 화척과 유사해서 백정화되었다. 물론 백정층 모두가 이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거골장이라 불리던 전래의 도축업자들이 전국에 걸쳐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골장이란 명칭이 16세기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도축이라는 업종의 유사성으로 백정층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토지로부터 유리된 많은 유랑민들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백정층에 유입되기도 했다. 백정은 조선시대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상당히 많았다. 백정의 인구수는 한 고을에 사는 평민과 비교하여 1/3 내지 1/4에 해당할 정도로 대단히 많았다. 백정은 주로 도축업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단지 도축업에만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유기(柳器) 제조업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가죽신 등의 피혁 제조업에 종사하던 집단이다. 그밖에도 악기 연주나 노래 그리고 간단한 재주로써 연명하면서 유랑하던 집단이 있었고 형조나 감옥에 소속되어 사형 집행을 맡았던 회자수도 있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백정 가운데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여러 업종 가운데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이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족했다. 이렇게 백정층은 도축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일반인들은 이들이 종사한 업종들을 천하게 여겨 하지 않앟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백정이 사회적으로 차별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그 결과 국가 재정기반의 확충을 위하여 과감한 양인 확대 정책을 추진하였다.
범죄의 온상인 된 백정
: 조선 초기의 양인에는 그 주축인 상민만이 아니라 위로는 문무 관료부터 아래로는 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포괄되어 있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같은 양인이더라도, 양반과 신량역천인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적 차별이 존재하였다. 신량역천인은 법률상 양인 신분이지만 천한 역을 지고 있어서 천인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그간 천시 받아왔던 재인, 화척이 조선 왕조의 양인화 정책만으로 갑자기 평민과 동등하게 대우박을 수는 없었다. 백정은 고려시대만 해도 일반 백성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백정은 조선 초에 접어들면서 평민, 양민, 백성 등으로 불리어졌다. 그 대신에 백정은 주로 도축업에 종사하던 계층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이제 백정은 평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재인, 화척만을 지칭하는 말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1년 2월 16자의 기록에서 알수 있듯이 백정의 오랜 생활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농사를 짖게 하여 재정 기반을 확충하고자 했던 정부의 이해관계만을 철저하게 반영한 것이 바로 백정의 비극의 시작이다. 이렇게 도살 행위는 물론이고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지 않고 유랑하는 것조차도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처벌하게 했다. 조선왕조는 이처럼 개국과 동시에 법적으로 백정을 농민화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생활방식을 전면 부정해버렸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한 조치였다. 결국 백정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유랑하면서 도축, 기예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던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한 채 범법자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정은 정부의 연이은 도살 금지조치로 생존 수단을 잃자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서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가족 가격의 상승은 도축행위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자 정부는 도축행위 금지조치와 함께, 단속 역시 강화함에 따라 백정 가운데 범죄자들은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정이 모든 범죄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백정은 성종 때에 와서는 아예 도적과 강도 그 자체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백정들은 도적을 색출하는 일만 생기면 도적으로 지목되기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되엇다. 사실 백정이 범죄의 온상이 된 것은 그들의 오랜 생활방식인 유랑조차도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처벌한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백정이 그들의 거주지를 벗어날 땐 반드시 일종의 여행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백정의 사회적 멸시의 대상
: 조선 건국 이후 백정을 토지에 안착시켜 양민화, 즉 농민으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취해진 그들의 오랜 생활방식에 대한 정부의 금지와 단속 조치는 범죄의 온상이 될 정도로 백정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반면에 그 성과는 아주 미미했다. 사회적으로 백정은 더욱 심한 멸시를 받았다. 이런 차별행위는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그 결과 백정은 양인의 거주지인 촌락의 외진 곳에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다. 복장에서도 그들은 차별을 받았다. 백정은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혼례와 상례, 제례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다. 묘지도 일반인과 따로 잡아야 했다. 물론 사당도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정이란 용어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거나 악독하고 천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임꺽정은 의적인가
:
10. 조선의 백성이 된 일본인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1592년(선조 25년)에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 전쟁은 7년간 지속되었다. 이 와중에 많은 일본군이 포로로 잡히거나 항복해 왔다. 일본 역시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일본군의 투항을 받아들이다
: 조선은 일본군의 항복 자체를 불신한 나머지 투항자의 유치는 고사하고 그들을 모두 살해할 것을 명군 측에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러다가 조선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투항자 살해라는 극단적인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종래의 포로 정책을 바꾸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기술까지도 적극 활용하려는 등 회유정책으로 전환했다. 나아가 이런 포로 회유정책을 통해 일본군의 항복을 유도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렇게 조선 정부가 항복 유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까닭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다.
당당한 조선의 구성원이 된 왜인들
: 총검 및 화약 제조, 검술 등 군사기술을 입수 등을 위해 특별 부대가 창설 되었다. 조선 정부는 무기 제조, 검술 교습 등 군사적 목적으로 활요한 경우는 이 같은 기술, 총검 및 염초 제조의 기술을 지닌 자나 검술에 능한 자의 경우 서울로 압송하여 그들로 하여금 검술 교습, 염초 및 총검 제조 등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술이나 재주가 없는 투항자의 경우네는 전국의 각 고을에 배치했다. 물론 각 군영에 배치되어 전투에 직접 참가한 투항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일본군 투항자들은 군인, 무기 제조 및 검술 교습, 농업 등 여러 분야에 종사하여 조선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사실 이주 일본인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상당수 존재했다.
귀화 일본인은 이등 국민
: 지속적인 귀화 행렬의 결과로 형성된 일본인 사회가 꽤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도 이주 일본인들이 제대로 정착했는지 여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주 일본인 역시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백성, 즉 구성원이란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은 기껏해야 이들 이주 일본인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주 일본인에 대한 차별 대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실록] 선조 34년 1월 13일조의 기록처럼, 일본인 출신 관료들은 조선인 출신 관료와 달리, 녹봉을 받지 못한 채 매달 급료만 지급받는 등 차별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 조선 정부는 이주 일본인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도 주저 없이 자행하곤 했다. 이들 귀화 일본인은 대체로 독자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사실상 자치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11. 요동사람들 조선에 피난 오다
청 태조인 누루하치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명나라 정부는 후금을 정벌하기로 결의하는 동시에,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 세계는 또 다시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많은 피난민이 생겨났다. 전쟁 초기에 발생한 피난민의 다수는 요동 지방에 거주한 중국인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으로 피난해 왔던 것이다.
"피난민이 기읍과 관동에 두루 차"
: 후금이 요동 지방을 침략한 지 불과 6년 만인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이미 중국인 피난민이 서북 국경지방을 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각 고을에까지 유입되었다. 중국인 피난 행렬은 많은 경우에는 무려 1만 명 단위로 이루어졌다. 후금의 요동 침략과 함께 본격화된 중국 피난민은 1622년(광해군 14년)에 와서는 대거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들어왔다. 이는 이미 서북 지역의 피난민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대규모의 중국 피난민이 정착해 있던 고을은 철산과 사포 등 일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중국인이 조선으로 망명한 까닭
: 1626년(인조 4년)에 와서는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조선으로 피난해 왔다. 이렇게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조선으로 망명해 온 까닭은 명나라 정부의 방조에 비롯된 측면이 크다. 모문룡의 10만 명의 조.명연합군이 1619년(광해군 11년)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되는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패배한 이후 남은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피신했다. 모문룡은 잔여 무리를 이끌고 평안도 철산 앞의 가도에 동강진을 설치하여 주둔하면서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무기 등을 공급 받아 후금의 후방에서 견제작전을 폈다. 사실상 모문룡은 요동 회복을 꾀하였는데, 후금의 배후 지역을 습격하는 등 내부를 교란시켰다. 이와 동시에 요동의 중국인을 적극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후금의 요서 진출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당시 조선으로 망명해온 중국인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 난민들이었다. 여기에다 모문룡의 적극적인 유치작전 때문에 중국인의 조선으로의 이주 행렬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망명자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이러한 중국 망명인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후금은 망명자가 생길 때마다 그 송환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 같은 요구를 무시한 채 계속 받아들여 서북의 변경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조선 정부는 망명자를 후금이 아닌 명나라로 송환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렇게 조선 정부가 망명자들을 명나라로 송환하려는 까닭은 후금과의 마찰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수십만 명에 달하는 망명자를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중국 망명자들에 대한 명의 식량 지원마저 더 이상 없게 되자 당시 재정 형편상 이들을 부양할 수 없어 분란을 야기할 가능성도 커 이들을 명으로 송환시키려고 했다. 실제 이들 망명자는 자주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분란을 일으켰다. 인조 때에는 이러한 송환문제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문제는 후금이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을 일으킨 잉 가운데 하나였다. 본래 후금의 1차적인 목적은 중국 대룍의 장악에 있었고 조선도 항전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합의의 주요 사항 중 하나가 망명자 송환문제였다. 이 문제를 포함한 합의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청은 1636년(인조 14년)에 또 다시 대군을 동원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강화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중국 망명자의 송환에 합의했다. 물론 청나라는 이러한 합의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 도선 정부도 망명자들을 송환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실제 조선 정부는 일부 망명자를 송환했는데 그 규모는 소수에 그쳤다. 결국 전쟁 당시 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도 있었겠지만, 조선으로 망명해온 중국인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명나라 허락이 없이는 중국인의 망명을 허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인이 조선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던 경우는 오직 조선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정착한 사람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와중에 이런 현상이 있었다. 명군 가운데 도망하거나 낙오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 낙오병 가운데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그대로 머문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도망하거나 낙오한 자 등의 본국 쇄환도 추진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지 무려 8년(1601년, 선조 39년)이 지난 후까지도 이들에 대한 본국 송환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본국 송환 조치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일본과의 전쟁 와중에 발생한 도망하거나 낙오한 자들에 대한 송환 조치가 그다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그대로 정착해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명군 이외에도 이들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에 온 상인을 비롯한 여러 집단도 조선에 유입되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발생한 귀화 중국인은 인조 때에 와서 정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본국 송환을 포기할 정도로 조선의 백성, 즉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또한 명.청 교체기에 조선으로 유입된 중국 망명인 가운데 상당수도 이들과 유사한 과정을 걸쳐 조선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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