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주영하, 사계절, 2005, (090202).

바람과 술 2009. 2. 2. 01:41

들어가며 - 그림속에 음식이 있고, 음식 속에 역사가 있다

 

1. 그림으로 보는 서민의 음식 풍속

 

길가에 앉아 술 한잔 마시며, 사또를 생각하다 - 김홍도 <노방노파>

 

사람들의 입맛을 다스린 '앉은뱅이 술'

: 일반적으로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는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마주치는 각종 장면을 구성한 그림을 가리킨다.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이 백성들이 각양각색의 삶을 동일한 구도로 그렸다면, <행려풍속도병>은 도학(道學)의 시선에서 선비가 보는 세상살이의 모습을 담았다. 사실 조선 시대 관찰사나 부사.목사, 그리고 군수.군령.현령 등은 왕의 대리자로서 행정.사법.군사에 걸쳐서 전권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집거하는 읍치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안치해둔 객사(客舍)가 자리를 잡았다.

'상상된' 도회지의 이미지

: 오늘날 우리는 조선의 지방 제도를 군현제로 이해한다. 즉 읍치를 중심으로 하고 고을을 단위로 한 행정조직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 읍치는 비록 행정 관아가 있는 곳이지만, 조선의 몇 개 지역을 빼고 나면 대부분은 오로지 행정 관아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고을 전체의 정치경제를 운영하는 집단은 이른바 '반촌(班村)'이라고 불리는 부계혈연집단의 마을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 반촌도 서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민촌(民村)'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지방은 송도나 전주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도회지를 구성하지 못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읍면 소재지의 시가지는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겨우 일제 시대에 형성된 읍면 소재지의 시가지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지방을 조선 시대까지 소급 적용하려 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행정 관리에만 목표를 둔 읍치는 결코 지역경제를 집중시키는 상업적 기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런 탓에 일제 시대 소전총독부의 지방행정 개편을 통해서 오늘날 상업 중심지인 도회지가 비로소 형성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도 지방은 여전히 정치경제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 거점에 지나지 않았다. 즉 조선 시대 읍치제도가 지닌 상업적인 특성은 오늘날 여전히 지방을 서울에 예속된 빈 공간으로 만드는 먼 이유다.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엿판 들고 태평성대를 꿈꾸다 - 유숙 <대쾌도>

 

술과 엿의 유혹

: 요즘 사람들은 유약을 바른 오지그릇이 무척 오래된 것으로 알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실 오지그릇은 많은 땔감이 들고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생활용품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질그릇이 많이 쓰였다.

혼란한 시절, 태평성대를 꿈꾸다

: 오늘날 우리는 보통 단오라는 명절을 생각하면, 무조건 옛 사람들이 그날에 쑥잎을 넣은 수리치떡을 먹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그림을 하나의 기록물로 여긴다면 반드시 모든 지역에서 그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후기, 고구마는 없었다

: 고구마는 20세기 들어와서 일제가 진행한 근대적인 품종개량을 통해서 그 재배가 전국으로 퍼져갔다고 해야 옳다.

 

어부의 점심시간, 숭어찜과 막걸리 한잔 - 김득신 <강상회음>

 

김득신(1754~1822년, 정조 임금 때 주로 활동)은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의 3대 풍속화가이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가 기록화에 비견될 정도로 짜여진 구도 속에 그려졌다면, 김득신의 풍속화는 매우 자연스러운 해학이 배어 있다. 또한 신윤복이 양반들의 모습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그림에 담았다면, 김득신은 서민들의 삶을 많이 그렸다. 이런 면에서 김득신의 그림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빼어난 생선' 숭어

: 숭어는 한자로 수어(秀魚)라고도 불린다. 맛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진흙을 먹조 자라 비위(脾胃, 지라와 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특히 좋다. 이로 인해 약재로도 으뜸으로 쓰였기에 '빼어난 생선'이라 하였다. 아울러 숭어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생선으로 여겨져 경기도 지노귀굿에도 올랐다.

'살아 있는 생선은 맛있다'는 관념의 형성

: 조선 시대 향교 제사에서 생으로 된 제물을 많이 쓴 데서 유래했을지 모르는 날 생선 먹기 관습은 일제 시대 '사시미'가 소개되면서 더욱 굳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람들은 몇몇 경우를 빼고 나면 생선을 생으로 먹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전전긍긍 굿판을 벌이니 제물도 부족하다 - 신윤복 <무녀신무>

 

성리학에 의해 억압받은 조선 굿

: 굿상에 차려지는 제물은 각각의 신령이 지닌 신격의 높낮이와 성격에 맞추어 마련된다. 사람의 식성을 지닌 망자에게 올리는 상식상에는 밥과 함께 김치가 놓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신령에게는 밥 대신에 떡을 오른다. 특히 신령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떡이 차려진다. 조상제사에서는 밥이 으뜸에 드는 제물이라면, 굿에서는 떡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떡과 밥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굿은 무당이 각종 신령을 맞아하여 놀고 보내는 과정이 여러 차례로 나누어 이어진다. 보통 이를 두고 '거리'라고 하는데, 가령 감응청배, 제석거리, 별성거리, 대거리, 호구거리, 조상거리, 만신말명, 신장거리, 창부거리, 성조거리, 구릉, 뒷전과 같은 열두 거리가 있다.

혜원이 굿을 삐닥하게 본 까닭

: 1970년대 초반까지도 한옥의 대청마루 한구석에 쌀을 담아둔 성주단지가 있는 집이 많았다. 성주단지를 별도로 두지 않는 경우에는 쌀을 한지나 무명천에 담아 대청마루의 기둥과 천장이 잇닿는 곳에 매달아두기도 했다. 매년 가을에 햅쌀을 수확하면 성주신령(집안을 지켜주는 주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고사를 지내고 그 속에 담긴 쌀을 바꾸었다. 쌀은 밥이면서 동시에 집안의 어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무당의 굿을 배척했지만 실제로는 개인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구복양재(求福禳災)를 위한 종교 행위로 여기기도 했다. 즉 성리학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해결해주지 못했고, 그것은 은밀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민간신앙을 통해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주지하듯이 성리학은 종교성보다는 철학적 성격이 더 강하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며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종교처럼 믿음의 체계를 갖추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닌 철학적 세계관은 미래에 대한 예언과 구복양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심리적인 해소 방법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러하니 성리학은 종교적이지 않았다.

 

조기잡이 풍성하니 어깨춤이 절로나네 - 김홍도 <조기잡이>

 

조선시대 서해안의 고기잡이

: 원해어업을 법으로 금지했던 조선 왕실이지만, 연안어업에는 무척 관심을 보였다. 특히 경기도 서해안 일대는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鹽所)가 남양.안산.수원.부평 등지의 도호부에 소속된 것만도 83곳이나 있을 정도였다. 이곳을 왕실의 친척들이 독점하여 소금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서해안의 어장은 배를 타고 나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살(어전漁箭)을 이용하는 방법을 많이 썼다. 조선 왕실에서는 어살을 설치하는 일을 관청에서 주관하도록 했고, 이것을 바닷가에 사는 어민들에게 넘겨서 어물을 낚도록 했다. 관청에서 그 설치에 관여했으므로 서해안의 어살은 잡히는 어획량에 따라 등급을 나누너 세금을 매겼다. 그래서 어살마다 어획량에 대한 대장을 만들어 이것을 호조.도.고을에 비치시켜놓고, 어민들로부터 '어전세(漁箭稅)'를 거두었다.   

어부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은 생선

: 정약전 선생은 [현산어보]에서 조기는 법성포 앞바다인 칠산 바다에서는 양력 4월 5~6일경인 한식 때 잡히고, 해주 앞바다에서는 양력 5월 21~22일경인 소만 때 잡힌다고 한다. 조기는 정확하게 때를 맞추는 모이는 생선이다. 그래서 옛말에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조구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을 하기도 했다.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린 까닭

: 풍(風)은 지배자의 윤리적 덕목이며, 속(俗)은 피지배자의 실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으로 '속'을 교화해야 한다는 풍속교화가 지배자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월령(月令)을 기록한 고문헌들이다. 가령 각종 세시기(歲時記)는 역법의 혼라을 방지하고,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즉 역(曆)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백성들의 일을 기준으로 하여 절기를 나눈 것이며, 월령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제때에 짓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질그릇을 짊어진 옹기장이 - 권용정 <등짐장수>

 

텔레비전 드라마의 착오

: 보통 장독의 뚜껑으로도 쓰이는 자배기는 부엌에서 음식물을 운반하거나 그릇을 씻을 때 쓰이기 때문에 손잡이가 붙어 있다. 소래기는 자배기에 비해 크기가 작아 이동이 쉬웠기 때문에 손잡이를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곡식을 씻거나 물을 퍼서 옮길 때 주로 사용했다. 우리가 보통 옹기라 부르는 것은 형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곧 배가 부르고 운두가 높은 것을 독이라 부른다. 독은 그 크기에 따라 바탱이, 중두리, 항아리로 나누기도 한다. 또 독의 뚜껑처럼 생긴 것도 있다. 보통 크기에 따라 자배기, 소래기, 푼주로 이름을 다르게 부른다. 또 흙으로 그릇 형태를 만들어 불에만 구운 것이 질그릇이며, 여기에 유약으로 잿물을 발라 말려 구운 것이 오지그릇이다. 잿물을 유약으로 발라 만드는 오지그릇이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인 때는 19세기 말 아니면 20세기 초반쯤으로 여겨진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점(독을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 독점에서 주인인 옹기장이(대장)는 그릇을 만들면서 전체 일을 관리했다. 옹기장이를 도와 그릇을 만드는 일은'건아꾼'이라 불리는 사람이 맡았다. 또 흙을 깨끗하게 만드는 생질꾼과 잡일을 하는 잡부도 있었다. 옹기장이가 독점을 설치하려면 찰흙과 나무를 확보하고, 작업장을 짓고, 가마를 만들어야 한다. 조선 후기의 독점들은 이동하면서 찰흙과 나무가 많은 곳에 가마를 만들었다.

주세법과 옹기의 번성

: 19세기 중반 조선 사회에서 독점과 옹기장이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 하나는 천주교인들 중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신분의 익명성이 유지되는 옹기장이가 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때에 접어들면 유기점, 철점과 마찬가지로 독점 주에서도 큰 상인이 물주가 되어 옹기장이에게 임금을 주면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1910년 일제의 주세법 발효에 따라 면 소재지마다 들어선 양조장에는 세금을 매기기 위해 옹기 술독이 가득했다. 자연히 전업을 하는 '옹기 공장'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결국 이때 역사상 가장 많은 오지그릇이 생산되었다. 당연히 술독을 만드는 독점은 모두 면 소재지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옹기장이를 홀대했지만, 강화도 길상면 온수 마을처럼 근대적 독점이 들어선 동네를 '공장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힘든 김매기에 푸짐한 새참 먹어보자 - 김홍도 <수운엽출>

 

서민의 삶을 그림으로 그리는 데 능숙했던 김홍도도 40대에 접어들면서 선비의 품격을 지닌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강해졌다. 당연히 화원으로서의 직급도 높아가고 양반관료들과의 교류도 잦아지면서 생긴 변화일 것이다.   

두레를 엿볼 수 없는 김매기 풍경

: 벼농사 일에서 가장 힘이 드는 것이 논갈이와 김매기이다. 보통 두레패는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농민이 우도머리인 '좌상(座上)'을 맡고, 좌상 밑에는 그 아래 나이의 '영좌(領座)', 그리고 그 밑에는 총무에 해당되는 '소임(所任)'이 있었다. 소임 밑에는 그를 보좌하는 '조사(曹司)'를 두었는데, 보통 10대 후반의 남자가 맡았다. 두레 조직에는 김매기를 할 때 영좌는 먼저 그 순서를 정하고 아침에 그 집에서 북을 치도록 했다. 이것을 '사람몰이'라고 불렀다. 논을 많이 가진 집에서는 날이 새기도 전에 북을 쳐서 두레패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하여 늦게 끝나면, 날짜수로 따지는 일값 계산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푸짐한 새참과 막걸리 한잔으로 힘겨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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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와 일제 시대 농촌진흥운동

: 조선 후기에 두레를 조직했던 일이 민간에서 실제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은 갖지만, 그래도 그것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가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일이다. 1930년대 일제가 농촌에 대한 각종 사회단체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흡수하면서 두레와 같은 조선적인 생산조직 방식을 더욱 강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흔할때는 나그네도 대접하는 추수라 - 김홍도 <벼타작>

 

'반타작'을 못해도 타작은 즐겁다

: 1970년대까지도 보통 벼 타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벼 베게를 해야 했다. 양력 9월8일경에 백로때가 되면 벼가 핀다. 그로부터 40일 내에 있는 양력 9월 23일경의 추분과 10월 8일경의 한로 사이에 벼 베기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하는 일이 타작이다. 타작을 하기 위해서는 집 안이나 밖에 넓은 타작마당이 있어야 한다. 별도로 마당이 없으면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는 타작 마당을 이용했다. 타작 마당은 논흙을 파다가 마당에 고루 펴고 판판하게 다진 다음 물을 뿌리고 거적을 덮고 나서 밝아서 만든다.

쌀의 나라

: 한국 음식의 반찬은 쌀밥을 많이 먹기 위해 마련된 부식이다.

쌀밥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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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으로 보는 궁중의 음식 풍속

 

조선 시대, 궁중에서 우유를 짰다 - 조영석 <채유>

 

소젖 짜는 내의원 의관들

: 중인의 신분에 속했던 내의원의 의관들이지만, 잡과라는 과거 시험을 거쳐서 종9품에서 정3품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엄연한 중앙관료였다. 특히 업무상 의관들은 임금이나 높은 지위의 양반관료들을 자주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신뢰를 쌓아 신분을 높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중인 의관들이 200여 곳의 고을에 수령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영조가 즐겨 먹었던 타락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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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허상, 조선의 비극

; 서양 위주의 근대화가 비서양 사회에 몰아닥치면서 우유는 '보약등속'보다 몸에 더 좋은 '영양' 덩어리가 되었다. 서양의 영양은 동양의 양생(養生)과는 다른 맥락에 높여 있는 개념이다. 즉 양생은 몸과 마음 전체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신체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면, 영양은 특정한 요소가 각가 제 기능을 한다는 근대적 사유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 거만하게 일곱 잔 술을 받다 - 아극돈 <청연>

 

차일의 뒤에 있는 산봉우리는 북악산이니, 이를 북으로 하여 주빈 둘이 동서로 마주앉았다. 동벽의 의자가 상석이요, 서벽의 의자가 하석이다.

술 한잔 올리면서, 꽃 한 송이 바치네

: 중국의 사신이 조선의 새 임금 책봉을 위해 한양에 오면 연회를 여섯 차례 베푼다. 즉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하여 베푸는 환영의 뜻이 담긴 하마연(下馬宴),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 다음날에 베푸는 익일연, 익일연 다음에 조선의 임금이 대전에서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결정된 후에 베푸는 환송의 상마연(上馬宴), 그리고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연(餞宴)이 그것이다.

청나라 사신 접대에 쓰인 중국 음식 

: 궁중의 연회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악과 노래, 그리고 술잔 혹은 찻잔이 연회의 과정을 격식대로 치르게 하는 마디였다.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대접하다

: 조선 왕실의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는 중국의 격식에 따라 젓가락만 마련했고, 그것도 유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상아로 만든 것을 상에 올렸다. 청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유기 젓가락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젓가락에 비해서 너무 무거웠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차린 정조의 마음 - 김득신 외 <봉수당진찬도> 

 

정조는 조선 시대 어느 임금보다도 '궁궐 밖 나들이(행행 行幸)'를 자주 했다. 재위 24년 동안 66회의 행행을 했으니, 일년에 평균 3회를 한 셈이다. 그 중에서도 화성의 남쪽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1735~1762)의 무덤 현륭원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했다. 특히 재위 19년째인 1795년의 현륭원 참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경의왕후 1735~1815)의 회갑과 아버지의 구갑(舊甲)까지 경축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재위 20년을 정리하는 큰 뜻이 담긴 행사였다.

화성행궁 봉수당의 회갑잔치 풍경

: 음식에도 모두 각종 꽃 모양을 낸 상화를 꽂았다. 심지어 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개인 상에도 상화가 한 송이씩 꽂혀 있다. 상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고려 이후 연회에서 빠지지 않는 장식품이 되었다. 특히 사람의 지위에 따라 꽂히는 상화의 종류와 개수가 달랐으니, 연회의 화려한 장식품이면서 동시에 등급을 규정짓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정조의 이벤트가 역사에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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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신, '승가기'를 동래 부사에게 바치다 - 작가미상 <동래부사접왜사도>

 

동래 부사, 일본 사신을 연회로 맞이하다

: 보통 동래 부사는 왜사들이 오면 제10폭의 그림처럼 배를 내린 기념으로 하선연(下船宴)을 베푼다. 그후 왜사들은 그들의 영주가 동래 부사에게 바치는 서신을 봉정(奉呈)하는데, 이것을 다례의(茶禮儀)라고 한다. 왜사가 업무를 마무리하고 동래를 떠날 때, 동래 부사는 다시 상선연(上船宴)을 베풀러준다. 하선연.상선연과 같은 연회를 합쳐서 연향의(宴享儀)라고 하는데, 이 연회는 그림의 견물 현판에도 씌어 있듯이 '연대청(宴大廳)'이란 건물에서 행해진다. 술은 아홉 차례 서로 돌린다. 통인이 동래 부사에게 술을 올리면 동래 부사가 마시고, 그 잔을 왜사 정관에게 보낸다. 그러면 다시 통인이 왜사 정관에게 술을 올린다. 정관이 마시고 그 잔을 동래 부사에게 보내어 서로 잔을 돌려가며 마신다. 그러나 동래 부사는 두 번 돌리고 정관은 한 번 돌려 모두 석 잔을 마신다. 도선주(배의 선장) 역시 이와 같이 하고 압물과 시봉도 차례로 행한다. 그러나 이때는 통인에게서 받은 잔을 들고 각자 마실 뿐이다. 이와 같이 두 번 돌고 부산 첨사도 또한 이와 같이 한 후에 왜사가 동래 부사와 부산 첨가, 그리고 훈도와 별차의 앞으로 각각 마련해온 음식인 상찬을 올린다. 술 마시기를 수차례 행한 후 동래 부사가 은근한 뜻으로 다시 한 잔을 권하고 난 후 파한다.

조선 후기 왜관과 김해에 형성된 '재팬 타운'

: 왜관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 고관과 역관에게 대접한 일본 음식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승가기'였다. 사실 '승가기'란 음식은 '스키야키'를 음차한 것이다. 이 외에도 일본의 우동과 소오멘, 미칸, 그리고 아메다마라고 불리는 사탕까지도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더욱이 김해의 돈 많은 아전들은 일본 부채인 소우센을 사용했고, 일본 산 종이와 벼루를 집에 갖추고, 처마에는 일본 산 유리 풍경을 달았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도박이 유행을 했고, 부인들도 일본 양산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니, 19세기 초반 왜관과 김해에는 왜속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실 17세기에 들어와서 부산의 왜관을 통해서 조선과 일본은 매우 활발한 무역을 펼치기 시작했다. 중국 산 견직물과 생사, 그리고 인삼은 왜관의 왜상들이 가장 좋아했던 물품이었다. 조선 상인은 이것을 파는 대신 일본에서 은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 거래하는 물품이 바뀐다. 왜인 상인들은 소가죽.목면.콩.명태.인삼과 함께 각종 약재를 왜관에서 사갔다. 그 대신에 조선 상인들은 왜인들로부터 각종 유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구리를 가져오도록 했다. 날이 갈수록 왜관을 통해서 거래되는 무역량이 늘어났다. 결국 18세기 말부터 왜관과 그 근처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관리.역관.아전들에게 일본 물품은 황금알을 낳은 거위와 같았다.

20세기 조선에서의 일본 음식

: 1927년부터 진고개 일대에 등장한 일본의 백화점에는 식당가가 생겨서 한국 음식이나 서양 음식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당 음식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식당가에서는 1원 50전 짜리 서양정식과 각종 원두커피가 유명했고, 조지야 백화점 식당가에서는 메밀국수가 인기를 모았다. 또 1927년 우미관 옆에 생긴 일본식 오뎅집과 우동집은 영화만큼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1940년 일본식 라면을 판매하는 집이 진고개 골목 안에 포장마차로 등장하기까지 진고개 일대는 온통 일본 음식점으로 진을 쳤다.

 

식탁 위의 서양 음식이 말하는 것 - 안중식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

  

커틀릿과 괴임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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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담되 '우리'를 잃지 않다

: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의 세칙에 따르면 양주 항목에 위스키.진.럼.적포도주.백포도주 등을 일본에서 조선에 수출할 때 무관세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서구의 술이 일본을 통해서 이미 조선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선인 관리들이 좋아했던 술은 위스키와 진이었다. 하지만 포도주는 쓴맛이 있어 싫어했다. 조선 시대 때는 각 관서별로 서열에 따른 지정 좌석이 정해져 있었다. 즉 최상위자는 주벽이라 하여 북쪽에 않아 남향하고 차상위자는 동벽, 차하위자가 서벽에 자리를 잡았으며, 최하위자는 남상이라 하여 남쪽에 앉았다. 자리의 배치는 정치적 위계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녀의 구별, 가장과 구성원 사이의 구별, 그리고 주인과 손님의 구별 등이 식탁의 좌석 배치에서 푷현된다. 즉 음식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식탁은 다른 한편에서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3. 그림으로 보는 관리의 음식 풍속

 

금주형, 그래도 마셔야 했던 관리들 - 신윤복 <주사거배>

 

혜원의 풍속화는 김홍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 신한평이 김홍도의 화원 선배였고 두 사람의 활동 시기도 비슷하니, 단원과 혜원은 서로 교통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혜원은 단원과 달리 남녀간의 정취가 듬뿍 담긴 풍속화를 잘 그렸다. 특히 낭만적인 분위기를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세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채색을 즐겨 썼다. 

관리들이 드나들던 술집 풍경

: 주모가 입은 치마는 '주릿대치마'다. 이는 치마를 여미고 그 오른쪽 자락을 앞으로 돌려 가슴에 닿을 듯이 치켜올려 입어 자연히 속곳이 드러나 보이도록 한 것으로, 기생들이 야하게 보이려는 의도로 즐겨 입었다. 1757년에는 영조가 백관에게 금주를 명할 때 내린 말을 기록한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이란 책까지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술 중독의 해로움을 들어 금주를 권하고, 치료법까지 소개하면서 당쟁의 폐해가 술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은근한 경계의 글이 들어 있다. 특히 한문에 한글로 토를 붙인 것과 한글로 된 것이 있어 실제적인 효과를 노리고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혜원의 그림에 담긴 풍자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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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절에 퇴직 관리에게 국화주를 대접하다 - 김홍도 <기로세련계도> 

 

'기로(耆老)'라 하면 일반적으로 노인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으로 기는 70세를, 노는 80세를 가리킨다. 곧 이 그림은 '기로'의 나이에 든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세련계(世聯계)'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70세의 노인들 모임인 기영회와 80세 노인들 모임인 구로회를 합쳐 연회를 베푼 데서 연유한다. 연회장의 중심에슨 붉은 옻칠을 한 발이 높은 사각 화상이 높였다. 조선 시대 왕실이나 관청의 연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화상이다. 보통 봄에는 매화, 여름과 가을에는 백일홍 모양의 지화를 만들어 화병에 꽂아둔다. 이 두 꽃은 모두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연회상 차림에서 핵심적인 상징이 된다.

조선 시대의 웨이터

: 고려 시대만 해도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쪼그리고 앉는 풍습이 널리 퍼지면서 고급스러운 연회에도 바닥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발이 낮은 소반이 유행했고 모양에 따라 원반.책상반.공고상.개다리소반.호족반.단각반 등 그 종류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상을 나를 때는 반드시 상의 다리를 잡아야 했다. 그만큼 윗사람이 잡수실 음식에 손이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추석보다 중양절이 더 풍요로웠던 시대

: 조선 후기에는 추석이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다. 그래서 추석보다 휠씬 많은 햇곡식과 햇과일을 얻을 수 있었던 중양절이 추석만큼 중요했다.

 

102세 노모 경수연에 남자 궁중조리사가 나선 이유 - 작가 미상 <조찬소>

 

백세 부인이 살아 계시니 나라의 경사로다

: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2년(선조 35년) 가을, 승정원에서는 예조참의 이거에게 99세나 된 노모 채씨가 있다고 선조에게 알렸다. 7년간 계속된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노모가 살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선조는 나라에 좋은 징조라고 여겨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3년 4월에는 오로지 그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거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이미 사망한 이거의 아버지에게도 이조참판을 추증하여 채씨 부인을 정부인으로 칭하도록 했다. 결국 이거는 1603년 9월 노모의 100세 생신날에 벼슬이 높은 관리들을 수십 명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어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605년 4월 이종(훗날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의 제의로 나이가 70세 이상 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재상 13명이 참여하여 봉로계를 만들었다. 이들은 '우리들은 각자 노모를 모시고 있느니, 백세부인(이거의 어머니 채씨 부인을 가리킴)을 모시고 함께 헌수(獻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경수연을 4월 9일 개최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조는 전국에 특명을 내려 잔치에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돕게 했다.

조선 왕실의 남자 요리사들

: 조선 시대 궁중 음식의 장만은 이조에 속했던 사옹원의 잡직 남자들이 맡았다. 공식적으로 양반이 맡는 관리책임자와 노노 출신들이 맡는 잡직이 있었다. 이들 잡직이 오늘날 말로 하자면 조리사에 해당된다. 대체로 재부 1인, 선부 1인, 조부 2인, 임부 2인, 팽부 7인으로 구성되었다. 재부는 종6품으로 주로 대전과 왕비전의 수라간을 책임진 주방장이었다. 선부는 문소전(경복궁 내의 조선 시대 묘진)과 대전 다인청의 주방장의 주방장으로 종7품에 들었다. 조부는 종8품으로 왕비전 다인청의 주방장 일을 맡았다. 임부는 세작우과 빈궁의 주방장으로 정9품이었다. 팽부는 궁궐 내의 공관에서 주방장을 맡았던 조리사로 종9품에 들었다. 이들을 통들어서 반감(飯監)이라 불렀다. 실제로 이들은 대를 이어서 궁중에서 조리사 일을 해온 노비 출신이지만, 책임을 주기 위해 벼슬을 내렸다. 주방장들이 벼슬아치라면, 이들 밑에서 일을 하는 구실아치로 별사옹(육고기 담당, 원래 고려 시대 별사옹은 '한파오치'라고 불렸다. 파오치는 몽골어로 고기를 썰거나 조리를 담당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것이 태종 때 궁중의 잡역을 맡은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면서 별사옹으로 되었다), 병공(떡.과자 담당), 적색(전.구이 담당), 반공(밥.죽 당담), 주색(술.음료 담당)이 있어다. 전근대 사람들은 남자는 공식적인 일을, 여자는 비공식적인 일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궁중의 공식적인 직책은 대부분 남자들 차지였다. 궁중에서 여자들은 단지 왕을 보조하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적어도 수나라 이전까지는 여자들이 맡은 상궁 제도도 없었다. 그러나 임금의 일상적인 음식은 실제로 주방상궁이 도맡아서 했고, 모든 관리책임은 기술을 알지 못하는 양반들이 차지하였다.

 

돌 맞은 홍이상 책과 붓을 쥐어들다 - 김홍도 <돌잔치>

 

동상에 놓인 음식과 물건의 뜻

: 담배는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에 서양인들이 발을 내딛으면서 세계 각지로 퍼졌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서양인들은 이것이 정신을 맑게 하고 육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로부터 100녀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1618년 이후인 17세기 초에 가서야 담배가 한반도에 들어온다. 돌상에서는 음식물이 가장 중앙에 놓였다. 보통 백설기, 수수팥떡, 쌀, 국수가 돌상의 대표적인 음식물이다. 보통 백설기는 그 색이 희기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인생이 깨끗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돌상에 올랐다. 수수팥쩍은 수수(고량)와 붉은팥으로 만들었는데, 그 붉은색이 귀신을 물리친다고 여겨져 돌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떡 역시 아이의 인생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돌잡이를 할 때 아이의 손이 떡에 먼저 가면 어른들은 질색을 했다. 떡을 잡으면 미련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쌀은 돈을 대신할 정도로 귀한 곡물이었고, 쌀은 곧 재산을 상징했다. 그래서 만약 아이가 쌀을 집게 되면 부자가 될 것으로 여겼다. 국수는 그 긴 가락이 장수를 의미하기 때문에 돌잔치는 물론이고 혼례와 회갑잔치 때도 단골로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상관없이 책.붓.벼루.먹.흰 실타래.대추 등이 앞의 음식물과 함께 오르지만, 활고 장도는 남자아이 돌상에 바늘, 가위, 인두 따위는 여자아이의 돌상에 올랐다. 남자아이가 활과 장도를 잡으면 무관이 되리라 예측하고, 여자아이가 바늘이나 가위를 만저 잡으면 바느질 솜씨가 좋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돌 반지 풍속

: 돌 반지나 돌 팔찌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풍속이다. 이 풍속이 생긱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20세기 초반 조선에 살았던 중국인들이다. 그들은 물건보다는 돈을, 돈보다는 금이나 은을 더 좋아했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금은붙이로 반지나 필찌 심지어 재복과 관련된 신상을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이들의 풍속을 지켜본 한국인들이 돌잔치 때 반지를 선물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전통'처럼 풍속으로 굳어졌다. 적어도 1950년대 이전까지 돌이 되면 친척이나 이웃에서 옷감이나 쌀을 돌 선물로 내어놓았다. 그러면 주인집에서는 백설기를 함지막에 담아 되돌려 보냈다. 또한 돌잡이는 우리만의 풍속이 아니라, 중국의 한족들도 아이에게 돌잡이를 시킨다.

 

혼인한지 60년, 경사로다 회근연 - 작가 미상 <회혼례첩>

 

'회근연'이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여는 잔치를 가리킨다. 즉 '회(回)'는 60년이 다시 돌아옴을 의미하며, '근'은 술잔을 뜻한다. 특히 '근'에는 애초에 혼인을 할 때 행한 근배례를 다시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회근례의 순서는 마치 다시 혼인을 하듯이 그 과정을 그대로 옮겨 시행한다. 다만 부부의 근배례가 있은 후, 자손과 하객이 마치 회갑연을 열듯이 노부부에게 술잔을 올리는 순서가 더 있을 뿐이다. 즉 혼레연과 회갑연이 결합된 것이 회근연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해로에 술잔을 올리다

: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큰상 차림은 양반들도 혼례.회갑.회근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만 겨우 받을 수 있는 상이었다. 회근연의 가장 핵심은 자손과 하객이 노부부에게 술잔을 권하는 의례로 표현된다. 보통 친척들과 하객들은 술과 함께 시를 바치는 경우도 많다.

집안의 화목과 평안의 상징이었던 회근례

: 회갑상은 다른 말로 '산 제사 받기'라 한다. 살아 계신 부모님께 마치 제사상을 올리듯이 괴임떡과 각종 음식을 올리고 술을 바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의 회근연에서는 제사상처럼 괴임음식이 즐비하게 놓이지 않았다. 이는 횐근례가 회갑례와 달리 혼인을 기념하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 후기에 오면 높은 관직에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이 회근례를 맞이했다고 알려지면, 왕이 궤장(보료와 지팡이)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솣불 쇠고기에 한잔 술, '야연'의 희열 - 작가 미상 <야연>

 

권세가들의 난로회 풍경

: 조선시대 남바위는 양반과 서인, 그리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겨울에 사용했던 방한용 귀.목 가리개의 일종으로 민간에서는 '풍뎅이'로 불렀다. 모양은 정수리가 뚫려 있고 이마에서부터 귀와 볼을 가릴 수 있으며, 목 뒤까지도 덮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바위는 귀를 가린다고 하여 이암, 목을 가린다 하여 휘항 혹은 호항, 바람을 막는다고 하여 풍차 등으로 불리었다. 양반 부인들이 사용하는 것은 별도로 조바위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남바위의 재료로 동물의 털을 사용하는 사치 풍조가 계층에 관계없이 만연하여 이에 대한 금지조치가 자주 행해졌다. 특히 1472년(성종 3년)에 발령된 '금치사절목'에서는 서인의 남자와 여자는 남바위나 조바위를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소 도살 금지령으로도 막을 수 없다

: 쇠고기는 유교식 제사에서 으뜸에 드는 제물이다. 조선 시대 왕실의 제사에서 그 규모의 크기에 따라 태뢰(太牢)에는 소, 양, 돼지가 육고기의 제물로 사용되었으며, 태뢰보다 작은 규모의 소뢰에서는 소가 빠지고 양(염소로 대체)과 돼지만 사용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모내기를 통해 논농사를 짓는 방식이 삼남지방에 퍼져나가자, 소는 더욱 중요한 노동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763년, 1854년, 1910년 등 말과 소를 잡지 못하도록 하는 도살금지령이 수시로 왕실에서 내려졌다. 결국 특별한 왕실제사를 제외하고는 소를 제물로 사용하는 일이 금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소 도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양반들은 수령과 미리 짜거나 권세를 이용하여 집의 제사에 육적을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예사롭게 소를 잡았다.

 

4. 근대적 시선으로 그린 그림 속의 '조선 음식'

 

국수틀에 사람이 올라간 사연 - 김준근 <국수 누르는 모양> 

 

조선 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잔치음식으로 여겨졌다. 지금이야 국수라고 하면 밀가루 국수를 연상하지만 사실 국수의 주재료로 널리 쓰인 건 메밀이었다.

줄을 잡고 널판지에 걸터 앉다

: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산'이란 사람을 중국인으로 여겼던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기산'이 한국 치초의 유럽문학작품 번역서인[텬로력뎡(天路歷程)]의 삽화를 그렸던 화가 김준근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제물포.동래.원산 등지에서 화가로 활동한 김준근의 구체적인 인생 역정에 대한 내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특히 그의 그림 스타일은 영.정조 시대의 신윤복이나 김홍도와는 사뭇 다르다. 화면의 전개가 중앙에서 밖으로 퍼지는 서양의 일러스트 기법을 쓰고 있다. 김준근은 당시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요구한 가장 '조선적'인 장면을 그들의 구미에 맞도록 그려주었던 화가였던 것 같다. 그래서 서양인들로부터 그러한 기법을 배우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런 덕분에 그의 명성은 국내보다 오히려 서양인들 사이에서 자자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국수의 대명사는 메밀국수였다

: 조선 사람들은 밀가루를 포함하여 가루로 만드는 모든 것을 국수라고 여겼다. 밀가루에 참 진(眞) 자를 붙인 이유는 곡물 가루 중에서 이것이 가장 좋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메밀가루는 '진말'에 대응하여 '목말(木末)'이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은 한자어 '면'을 밀가루로 만든 병(떡).만두(진빵).교자(만두).면조(국수) 드을 모두 충칭할 때 사용한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 들여온 식품산업 제분업은 신기한 사업이었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식량 증산을 위해 밀을 우량 품종으로 심도록 권유한 데서 유래한다. 주로 북한 지역에서 많이 생산한 밀은 가루로 가공되어 일반인에게도 공급되었다. 그러나 밥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 사람들은 밀가루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1930년대 말이 되면서 전쟁에 몰두하는 일제는 혼식을 장려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면미(麵米)라는 것도 만들어 보급하였다.

 

시집 온 새색시 '큰상'을 받다 - 김준근 <신부연석>

 

"시집 온다고 고생했다'

: 보통 신부 집에서 혼례를 마친 신랑 신부는 3일이 지난 후 신랑 집으로 간다. 신부는 시가에 오자마자 신랑의 친척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현구고례를 한다. 우선 신부 집에서 장만해온 음식들을 간단하게 차려놓고 시부모부터 시조부모, 백숙부모, 고모 내외에게 절을 올린다. 이때 차려진 음식을 폐백이라 부른다. 원래 폐백이란 딸을 시집보내 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신랑 집이 신부 집에 제공하는 선물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폐백이란 말이 쓰였다. 현구고례가 끝나면 신부는 시가로부터 '큰상'을 받는다. '큰상'에는 시집온다고 고생했다는 치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좌불안석 '신고식' 치르는 신부

: 현구고례(見舅姑禮)란 글자에서 구는 외숙부, 고는 고모를 뜻한다. 일가친척 중에서 비록 같은 집에 살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외숙부와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고모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신부에게 친척 관계를 확인시키기 위해 이러한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사실은 신부가 시댁에 와서 시부모를 비롯하여 신랑의 일가친적에게 인사를 올리는 절차이다.

달라진 '큰상'의 의미

: 17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의 신부들은 혼인을 하고 나서 곧바로 시가로 신행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혼인을 한 후에 그대로 신부의 집에 머물면서 아이까지 낳았다. 오히려 신랑이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당연히 친정부모의 유산 상속에서도 딸들이 빠지지 않았다. 이러하니 친정부모의 제사도 딸과 아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가족 꾸리기의 신조로 삼았던 19세기 조선의 신랑들은 더 이상 장가를 가지 않았다.

 

콩으로 두부 짜 잔치 준비 하여 보세 - 김준근 <두부 짜는 모양> 

     
두부 짜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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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의 근대적 변모

: 두부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서한의 회남왕 유안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문헌에서 두부에 대한 기록은 명나라 이후 문헌에서만 등장할 뿐, 실제로 유안은 두부를 먹어보지도 못했다. 중국인들이 북방의 유목민족과 본격적인 교류를 하기 시작한 때는 남북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북방 유목민족이 말이나 양의 젖으로 '유부'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본 중국인들이, 기왕에 먹고 있던 두유에 간수나 신맛이 나는 산수를 넣으면 두부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두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두부는 송나라에 들어와서야 겨우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졌다. 우리에게 두부 제조 기술이 전해진 것도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다. 두부를 본격적으로 공장에서 만들기 시작한 때는 대략 1900년대를 들어와서인 것 같다. 조선 두부는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계식으로 바뀐 일본식 두부로 변화하게 된다. 비록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자 일제가 두부 장사마저도 허가제로 하도록 강요하지만, 그래도 공장 두부와 집두부는 나란히 허용되었다.

 

새해 첫날 나라 잃은 사람들이 마신 '도소주' - 안중식 <탐원도소회지도>

 

안중식(1861~1919)은 오원 장승업으로부터 사사받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누각에 모인 사람들

: 1896년쯤 탑(원각사 10층 석탑)들이 산재했던 이곳을 근대적인 공원으로 조성한 후 백탑의 영문 표기인 'Pagtab' 혹은 'Pagoda'를 따서 파고다공원이라 불렀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후 이곳에 정자.화단.연못.산책로.전등.온실 등의 공원시설과 함께 벚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근대적 공원으로 개발했다.

도소주에 담긴 우울한 역사

: 도소(屠蘇)란 무엇인가? 곧 새해 첫날에 마시는 술을 가리킨다. 사실 도소주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약재의 일종이라 전해질 뿐이다. 중국 후한의 전설적인 한의사인 화타가 만들었다고도 하고, 당나라 사람 손사막이 처음 만들었다고도 한다. 반드시 약재로 도소주를 만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정월 초하룻날에 마시는 술을 도소주라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도소주는 한 해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마시는 술로, 기복과 벽사의 의미가 강한 음료다.

 

나오며 - '조선'의 표상과 실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