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효형출판, 2005, (090623).

바람과 술 2009. 6. 23. 13:35

지은이의 말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했다.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품은 닫혀 있으나 텍스트는 열려 있다.

 

해방을 위하여

 

트루먼 쇼 : 유목민처럼 떠나라 / 들뢰즈의 '유목민'

 

방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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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의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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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트루먼

: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들뢰즈는 인류가 선택한 두 종류의 길에 대해서 말했다. 첫째는 영토화.코드화의 갈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안정된 형식과 규범과 원칙들에 맞춰 적당히 통제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인류가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가장 보편적인 패턴이다. 물론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묶인 상태가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한다. 둘째는 탈주와 유목의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말뚝을 받아 금줄을 치고 기둥을 세워 벽을 만들기 위한 기하하적 조건이 아니다.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자유롭게 터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삶이란 모험이자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끝없는 해방 과정이다.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일체의 코드를 거부하는 유목민들의 미 모험과 도전의 충동은 확정된 코드에 길들여진 정착민들에게는 지극히 볼온하고 위험한 힘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 우리는 종종 깨달은 뒤에도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몸은 다양한 코드들에 종횡으로 거 깊숙이 묶이고 이렇게 하루 이틀 세월리 흘러가고 나면 저 '바깥'에 관한 모든 깨들음은 전설처럼, 신화처럼 의식 속에서 희미해져 버린다. 때로는 타성의 힘이 우리를 거세된 정착민으로 길들일 수 있다. 해방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의 삶은 진정 주체적 인간의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슈렉 :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 / 칸트의 '숭고함'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

: 포스트모더니즘은 1. 이미 우리 사회에 잘 작동되고 있는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강하게 반발한다. 2. 규격화된 표준을 의심한다. 3. 타자들의 목소리, 그들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한다. 4. 틀 안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제도, 모든 규칙들도 일단 그 바깥에 나서서 보면 어떤 의도가 스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대체로 선의의 것들이지만 가끔은 그것이 과연 누구에게 좋은 선의인지 의심스러운 것들도 있다.

 

슈렉과 피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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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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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미학

: 철학자 칸트는 대상을 미학적으로 판단하는 데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기준 이외에 숭고함이라는 범주를 끌어들임으로서 미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새 장을 열었다. 여기서 숭고라는 것은 얼핏 듣기와는 달리 고매하거나 거룩한 성질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쉽게 풀자면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성을 갖는 정서 상태를 말한다. 1. 이것은 오직 다양한 암시만이 가능할 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한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2. 숭고는 반드시 절망감, 불쾌감, 고통,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들을 통과해서 도달하게 되는 안도감, 쾌적함, 쾌감, 기쁨의 정서를 뜻한다.

 

패러디의 즐거움

: 한나 아렌트는 "귄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귄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라고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왜 끝없이 위반을 부추기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여기서 위반이란 틀 안에 머무르면서 단지 이런저런 규칙들을 일부러 깨트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반은 바깥에 나서는 것이고, 바깥에서 안의 것들과 맞서 자신을 자키는 것이다. 이해득실과 상관없이 멈출 줄 모르는 치열한 위반의 정열, 진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온갖 제도, 규칙, 코드들은 얼핏 보면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동선만을 추구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안에 머물러서 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보면 숨겨졌던 이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떤 것도 겉모양만큼 순수하지 않다. 그것들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음모들을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음모꾼들에게 이용당할 여지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 자체의 틀 바깥에 나서서 이 모든 규칙, 질서, 원리 등을 깡그리 부수고 묵살하고 위반하라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그 바깥이 있음을 깨우쳐줄는 것이며, 그 바깥으로 나서려는 의지와 안의 것들에 맞서려는 위반의 정열을 부추기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해방된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삶을 풍요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전략일지 모른다.

 

집으로 : 진정한 소통은 바깥에서 이뤄진다 /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

 

다른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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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바깥)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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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바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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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바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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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바깥-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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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바깥-할머니

: 바깥이 일깨워준 것은 우선 소통의 방식이었다.

 

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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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성찰

 

동사서독 : 사람의 속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 베르그송의 '심층자아'

 

그럴 리 없는 너

: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면 예외로 묶어두려 하며 예외로 묶어두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번에도 비정상의 병리 상태로 분류해 두려 한다. 이렇게 우리가 마지막까지 서로에 대해 내리는 평가의 일관성에 집착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판단중지'가 피차의 관계를 몹시 거북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 그럴 리 없는 너, 이해할 수 없는 너, 잠시 어떻게 된 너, 그 너야말로 세상 눈길 때문에 주문제작 상품처럼 만들어진 표층자아를 뚫고 언듯언듯 얼굴을 내미는 숨겨진 자아,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슬픈 위악

: 표층자아가 사회의 요구에 맞춰서 꾸며지고 만들어지고 위장된 자아라면 심층 자아는 그러한 요구에 맞출 수 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자아이다.

 

무사 홍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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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깊은 곳

: 표층자아는 단순히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있는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 고정시켜 높거나 박제시켜 놓은 자아이다. 시선이나 욕망은 변하지만 박제된 자아는 변할 수 없다. 결국 필요에 따라 자아가 그때그때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자아들은 고정된 채, 상호 간에는 소통이 없이 독립적이기 때문에 분류하고 정리하고 배열하기 편하다. 그래서 쉽게 이름 짓고 개념화시키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관찰되고 분석되고 판단되는 표층자아의 존재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른 자아가 있으니 곧 심층자아이다. 심층자아는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변화되면서 지속되는 진실한 자아이다. 이 자아에서 모든 의지, 모든 기억, 모든 행동들은 상호 침투하면서 이어진다. 표층자아는 단순하다. 그러나 복잡한 욕망의 층위와 다양한 감성의 충동들을 끌어안는 이 심층자아는 결코 단순할 수 없다. 표층자아와 구분되는 심층자아의 결정적 차이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불온한 힘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어쨋든 진정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판단중지' 상태를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존 말코비티 되기 : 자기 존재를 긍정하라 / 칸트의 '순수자아'

 

잠자의 비극

: 몸은 변하는데 의식은 변할 수 없는 상황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크레이그와 존 말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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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소망

: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 자신을 보는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고, 또 이런 상황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바라보는 관점으로 물러서기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대상으로 머물지는 않는 자아가 있으니 곧 의식의 자기 정체성이다. 비판 철학자 칸트는 이것을 '순수자아'라고 말했고, 현상학작 후설은 '선험적 자아'라고 말했다.

 

자신으로 되기

: 무엇인지 되고자 할 때 오직 하나 가능한 길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자신이 되라'고 한 것은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게 아니다.

 

매트릭스 : 나는 선택한다, 이 길을! / 사르트르의 '실존의 인간'

 

가짜 야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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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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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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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자 네오

: 진짜 인간은 실존의 인간이다. 여기서 실존의 인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찰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맥락대로 '본질에 앞서는 인간'을 말한다. 본질에 앞서다니 무슨 뜻인가. 본질은 이미 확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숙명적은 성질을 말한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본질이 먼저 있고 존재가 그것에 맞춰서 만들어지는 것을 즉자존재라고 불렀다. 그들은 본질이 먼저이고 존재는 그 다음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있다. 본질보다 앞서는 이 존재는 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 자유의 존재, 선택의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존재라고 불렀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만들어간다. 존재가 먼저이고 본질은 그 다음의 문제다. 디러한 대자존재를 더 익숙한 표현으로 '주체성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의 제일 명제, 즉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의 뜻이다.

 

디 아더스 : 타자로 전락해 버린 나 / 푸코의 '에피스테메의 계보학'

 

이쪽과 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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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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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자와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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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식민화

: 타자성이 먼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타자성 앞에서 최초로 작동하는 코드는 '권력'이다. 타자의 출현만으로 동일자의 결속은 강화된다. 하지만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 결속의 힘 자체가 폭력이다. 타자 앞에 선 동일자의 전력은 결국 2가지 뿐이다. 타자의 차이를 동일화시키거나 아니면 무화시키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지식이, 후자를 위해서는 권력이 동원된다. 동일자의 궁극 목표는 마침내 타자를 남김 없이 자기 영토에 편입시켜 완전한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드러나 타자가 동일성의 영역에 편입된다고 곧 동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토 안의 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같은 영토 안에 남겨진 타자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식민'이라 부른다. 여기서 이 식민화 전략의 세부 사항을 잠깐 살펴보자. 푸코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을 질서지우는 권력적 지식체계를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한다.

 

역전-그레이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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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화해

 

굿 윌 헌팅 : 세상과 화해하는 법 / 파스칼의 '섬세의 정신'

 

판단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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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의 정신

: 파스칼은 기하학의 정신은 '왜?'라는 물음에 대해 '때문'이라고 답해주는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세상을 향한 원심력의 정신이다. 반면에 섬세의 정신은 무엇인가를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짚어내는 자신을 향한 구심력의 정신이다. 바깥을 보려면 육체의 눈이 필요하지만 안을 보려면 우리가 앞서 말했던 저 내면의 다른 눈, 즉 영혼의 눈이 필요하다. 파스칼도 말했듯이 이상적인 것은 한 인간이 날카로운 머리에 따뜻한 가슴, 즉 기하학적 눈과 섬세한 손을 동시에 갖는 일이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대체로 기하학의 정신에 의해 인도된다. 파스칼이 말한 섬세의 정신은 점점 무슨 전설이나 신화처럼 멀어져가고 있다. 보통의 사회 생활에서 섬세의 정신은 우리를 불편하고 거북하게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섬세의 정신은 영영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 어떤 경우에는 우리 삶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비극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윌 헌팅의 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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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배 한 척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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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로운 경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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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

 

<피아노>를 빛낸 두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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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노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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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소유

: 에리히 프롬은 두 종류의 인간을 구분한다. 하나는 존재지향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지향의 인간이다. 존재지향의 사람들은 단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움, 기쁨,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어던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것이라야 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프롬은 소유지향적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사랑을 위하여

: 이 영화에서 작가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라는 메타포로써 사랑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시도한다. 첫째, 사랑은 존재의 관계다. 둘째, 사랑은 감응이다. 셋째, 사랑은 궁극적 선택이다.

 

쉬핑 뉴스 : 두려울수록 정면을 보라 / 공자의 '망집 끊기'

 

아들과 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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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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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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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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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투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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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집)은 사라지고

: 공자는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길은 망집을 끊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공자가 지적하는 네 가지 망집은 우(愚, 어리석은 뜻), 필(必, 꽉 붙잡혀 떨어지지 못하는 자세), 고(固, 꽉 막힌 태도), 아(我, 자기 자신에만 몰입해 있는 자세) 등이다. 어떻게 망집을 끊을 것인가?

 

디오니소스 찬가

 

중경삼림 : 망각은 행복의 조건 / 니체의 '망각'

 

현재를 보라

: 교부철학의 완성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세 가지 시간지평은 오로지 문법 안에만 존재한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맣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비켜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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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인(夢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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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힘

: 니체는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 한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망각(vergessenheit)'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 진리조차도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를 회상하는 것은 삶에 해롭기 때문이다." 대신에 니체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높이 찬양한다. 어린아이들은 망각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삶에서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행복이나 가장 큰 행복에서나, 행복으로 하여 행복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것은 망각이다. 좀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비역사적으로 감각하는 능력이다. 일체의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러 설 수 없는 사람, 승리의 여신처럼 어지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현재의 삶의 지평 위에 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인간들이 자신만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나비 : 과거도 미래도 삶의 시간이 아니오 / 니체의 '초인 사상'

 

망각의 강 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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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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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기억'

: 플라톤 철학은 기억의 철학이다. 그것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추억에 매여 있는 거대한 이야기다. 그서은 이데아의 추억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운다거나 알게 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으로 이데아계에 머물 때 이미 완전하게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교육, 체험, 독서 등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플라톤 인식론에서 유명한 '상기설'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교육 목표는 이데아계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저 완전한 지식을 되찾는 데 있다.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대화법이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를 공격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모욕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비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그런 질문을 통해서 망각했던 기억들을 스스로 회상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들이었다.

 

니체의 '망각'

: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의 상기설은 완전한 사기이다. 이데아 자체가 날조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불멸하는 영혼도, 회상해 내야 할 전생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지금, 여기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싀 삶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이런 사기극에 말려둘지 말아야 한다.

 

유키의 선택

: 우리의 삶은 때로 진저리치며 잊고 싶은 기억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까지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뷰티풀 마인드 : 정신분열을 이겨낸 초인적인 노력 / 프로이트의 '초자아'

 

천재성과 망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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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내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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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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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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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영웅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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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전략 - 싸우기

 

와호장룡 :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 장자의 '무위'

 

소를 잡는 것과 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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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검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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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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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와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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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삶을 위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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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선생 : 잘 놀고 잘 쉬고 잘 자라 /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지하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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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기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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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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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자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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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전거 : 부숴질 수는 있으나 패배할 수는 없는 자 / 하이데거의 '존재'

 

존재는 모든 놀라움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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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소년들 그리고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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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웨이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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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와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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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 역사는 만들어진 서사 / 니체의 '비판적 역사'

 

함무라비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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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능력을 잃은 레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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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역사

:

 

레너드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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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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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 복수로 원혼을 달랠 수는 없다 / 들뢰즈의 '기계 되기'

 

금자씨의 복수극

:

 

모나드와 노마드

: 들뢰즈와 카타리는 네트워크 안에서 에너지, 기, 힘 등의 흐름이 이어지거나 끊어지는 방식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기계라 부른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공장의 조립공정에 연결된 기계만이 아니라 사람, 동물, 식물, 사물, 제도, 문화, 역사는 물론 심지어 신까지도 기계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네트워크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은 이런저런 맥락에 플러그에 꽂혀 이런저런 흐름들을 이어내거나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구비된 신체 기관 또한 마찬가지다. 그 각각 역시 역할 맥락에 따라, 에너지 흐름의 단속에 따라 달라지는 기계들이라는 말이다.

 

플러그 꽂기

:

 

복수-기계

: 배치를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또 숱한 작은 배치들이 성긴 틈들을 채우고 있으니 들뢰지와 가타리는 이것을 계열이라 불렀다. 같은 물건이라도 계열에 따라 의미나 기능이 달라진다.

 

화해-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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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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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전략 - 춤추기

 

쉘 위 댄스? :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 니체의 '춤'

 

딸의 디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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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동하는 육체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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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위대한 춤꾼들-조르바와 조너선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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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 어머니를 만나고픈 접신의 춤 / 하이데거의 '있음'과 '있는 것'

 

어떤 것이 있다는 놀라움

: 하이데거가 평생을 바쳐 사색한 주제는 '있음'이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어떤 것이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는 먼저 '있는 것(Seiende)'과 '있음(Sein)'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사람도 있고, 새도 있고, 나무도, 집도, 차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있는 것들은 '있음'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있음'과 '있는 것'의 차이는 세상의 모든 차이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확실한 차이라고 주장한다. '있음'은 모든 '있는 것'들보다 우선하는 토대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음'은 반드시 '있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춤추는 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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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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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접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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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마음만이 '있음'에 이른다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있는 것'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있는 것'을 그런 식으로 있게 해주는 '있음'이 근원적 것이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하는 말이지만 '있는 것'은 '있음'과 다르며, 달라도 본질적으로 다르고 엄청나게 다르다. 그 '있음'으로 다가가는 데는 비범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취향 : 다름을 인정하면 조화를 얻는다 / 공자의 '화이부동'

 

다르기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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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라의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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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을 인정 않는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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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은 조화의 조건

: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고 말한다. 화이부동이란 타자와 차이를 갖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타인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조화를 이루려는 삶의 태도다. 공자는 이것을 군자의 법도로 제시한 이유는,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는 자이고, 명령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가 아님을 부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반면 소인배는 무조건 같아지려 하는 자이다. 그들은 삶을 그저 타인과 닮고자 하는 허망한 욕구로 허덕허덕 보낸다. 당연히 소인배들은 취향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은 모든 이와 모든 것에서 '같아야 한다', 여기에 어떤 양보도, 관용도 끼어들 틈이 없다. 당연히 '조화는 깨어지고',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조화의 묘가 문제다. 조화를 위해서는 먼저 큰 그림을 머리에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안에서의 차이, 다름은 아름다운 조화의 모티브로 기능한다. 조화는 이 '다름을 당당히 지키면서', 빚어내는 '다채로운 무뉘들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내가 모두와 모든 것과 완전하게 같아져버린 동이의 상태에서 조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조화를 위해서는 차이, 어긋남, 비켜섬, 불일치, 요컨대 다름이 필요한 것이다.

 

언어, 예술, 아름다움

 

흐르는 강물처럼 : 예술은 왼손에서 탄생한다 / 파이어아벤트의 '코드에의 도전'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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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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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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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리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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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 : 시인은 의식의 성장으로 태어난다 / 헤겔의 '의식의 변증법'

 

영화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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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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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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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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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 인생의 과정을 향유하라 / 피타고라스의 '목적-과정 인간'

 

피타고라스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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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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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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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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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헨젤 그리고 율리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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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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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포레스터 :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다 / 프로이트의 '아버지'

 

자말과 포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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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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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혹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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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혹은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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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생의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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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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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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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담론

 

여인의 향기 : 의미는 삶 속에서 결정된다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찰리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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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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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언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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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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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는 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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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고수는 영원한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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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 사랑은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 / 볼테르의 '차선 세계

 

사랑은 마술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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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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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유리 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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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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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와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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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과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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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행동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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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사랑의 세 가지 정의 / 중세 철학과 오스틴

 

어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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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세 가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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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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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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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론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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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과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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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한 짧은 부연

: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공동체에서 화용론적 주체를 상정하는데, 화용론이란 언어를 발화하는 주체와 그가 놓인 맥락을 의미 결정의 새로운 요소로 끌어들이는 것에 관련된 논의이다. 요컨대 화용론은 의미를 추론하는 데 발화의 양식과 맥락의 특성을 과감히 끌어들인다. 이런 입장을 밀고 나가면 모든 담론의 의미 결정은 결국 상호주관성에 떠넘겨지게 된다. 물론 합의가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화용론적 주체가 선택하는 정의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의미상태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절대주의이다. 즉 문제는 하나의 정의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정의이기를 고집할 때 생겨난다.

 

좋은 걸 어떡해 : 사랑은 중간에서 만나는 것 /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사랑'

 

미셸, 프랑수아와 재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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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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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랑을 위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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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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