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과거에서 지금 '우리'를 찾다
가족과 혼인
상속과 양자
고려시대는 자녀균분상속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배분해준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가부장 질서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이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남녀간의 차별이 형성되고 딸보다는 아들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딸 자식은 출가외인으로 취급되고, 아들이 없으면 다른 집에서 양자를 들이게 되었다. 제사를 맏아들이 받들어야 하고 그 명분으로 맏아들의 상속권이 강화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는 후손이 없으면 양자를 세워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지만, '대부'의 높은 벼슬에 있는 양반들은 16세기까지도 양자를 들이기보다는 딸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양자를 들여 후사를 세우는 것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에 따라 16세기 후반에 유력한 양반 가문부터 양자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에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효도와 절개
부모를 위해서 손가락을 깨물고 다리살을 베는 상투성이 드러난다. 정조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가 되면 어떤 것이 효성스러운 행동인가 하는 패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효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 정해져버린 것 같고, 그만큼 효도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이라기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따르는 형태로 변질되어버렸다. 조선시대에 와서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하는 것이 효도보다 여인의 절개다. 그런데 효자·효녀와 달리 절개는 남성을 제쳐놓고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유니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법률 규정을 통해서 수절을 강요했는데, 이 규정은 뒤에 보듯이 성종의 지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패륜과 불륜
패륜이란 윤리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과거에 파륜이나 불륜이란 말도 썼지만, 지금 파륜이란 말은 사라지고 불륜이란 말은 뜻이 다소 달라졌다. 패륜은 부모에게 큰 죄를 지었을 때에 붙이고, 불륜은 보통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가리킨다. 파경이란 말이 지금은 거울이 깨지듯이 부부관계가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에 거울을 쪼개서 증표로 나워가져 만남을 기약하던 것을 의미하였다. 뜻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능지처참 또는 능지처사란 대역죄인을 처벌하는 최대의 형법이다. 능지란 사지와 몸을 자르는 극형이고 처참은 목을 베는 형벌로서, 이렇게 나누어진 여섯 부분을 각 지역에 보내서 경계를 삼게 했다. 이 형벌은 고려 말기에 도입되어 조선 말기까지 실행되었다.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조사보고서인 검안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총 572건의 살인에서 남편 살패가 154(26.9%), 술 마신 후 폭행치사 66건(11.5%), 빚이난 가난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64건(11.3%)으로 남편 살해가 단연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남편이 부인을 살해한 사건이 많았을 것이지만 그것은 쉬쉬 하고 덮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반대는 인륜에 크게 저촉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성씨와 근친혼
우리가 흔히 '성씨'라고 부르고 국어사전에서 성씨를 성의 높임말로 설명하고 있으나 원래는 성과 씨는 다른 것이다. 성은 생자가 붙어 있듯이 혈통을 의미한다. 반면에 씨는 우리의 본관처럼 살고 있는 지역을 바탕으로 붙은 것이다. 우리는 성과 씨의 구별이 없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때에 성씨의 구별이 사라졌고 그 뒤에 우리가 이 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을 하면 여성의 성이 바뀌지 않아 서양과 대조를 이룬다. 이를 두고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설명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여성이 성을 갖는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반대다. 전통시대에 여성은 성만 있었지 이름은 없었다. 그마저 성이 있었던 것은 바로 동성혼을 하지 않기 위해 형통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은 혼인 상대로만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혼인은 원래 사돈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혼은 혼인을 맺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혼인이건 결혼이건 모두 사돈을 맺는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은 남녀의 결합을 떠올리게 되지만, 전통시대에는 두 집안이 맺어지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형수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떠나버리면 그에 딸린 아이들과 재산이 함께 옮겨가게 되고, 그것은 그만큼 그 집안의 손실이 된다. 취수혼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행해진 고대적인 혼인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
조혼 풍습
고려시대가 되면 흥미로운 통계자료가 나와 있다. 귀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남성의 경우 13세에서 32세 사이에 혼인했고, 여성의 경우 11세에서 25세 사이에 혼인했다. 결혼 평균연령은 남자가 1100년대까지 25.5세, 1200년대에는 19.8세, 1300년대에는 18세가 되고, 여자는 각각 20.4세, 15.1세, 13.9세가 되었다. 남녀 모두 후기로 갈수록 평균연령이 낮아진다. 그만큼 가임기간이 늘어나고 자녀출산율도 높아졌을 것이다. 고려 말에 나타난 조혼 현상은 원나라에 처녀 공출을 피해 일찍 혼인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이것만이 원인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의 통계자료를 보면 원나라 지배기 이전부터 이미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혼인연령을 높이려는 조치를 취한다. 성인으로 추앙받던 주자의 가르침에 맞추려 하였기 때문이다. 조혼은 하층민보다 상류층에서 성행했다. 조혼 형태로 하층민에게는 민며느리제가 많았고 상층민에게는 데릴사위제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혼은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으니, 1921~30년 사이에 당시의 법정연령인 남녀 각각 15세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남자 7.1%, 여자 6.2%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조혼 현사이 조선시대에 나타나게 된 것은 아들을 일찍 결혼시켜 집안 후계자를 빨리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또한 며느리를 빨리 들여서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혼인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혼인에 든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사랑과 인연
처와 첩
성리학의 규범이 자리잡으면서 처는 오직 한 명만 허용하였다. 태종 13년에 중혼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다처제가 재산 상속 등의 분쟁을 자주 야기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중국의 고전인 [예기]에 따르면, 배우자 명칭이 천자는 후(后), 제후는 부인(夫人), 상급관료인 대부는 유인(孺人), 하급관료인 사는 부인(婦人), 서민은 처(妻)였다. 천자는 배우자로서 후, 부인, 세부(世婦), 빈(嬪), 처, 첩을 둘 수 있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1후, 3부인, 9빈, 27세부, 81어처(御妻)를 두었고 첩은 숫자가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아래 공후(公侯)는 부인, 세부, 처, 첩을 둘 수 있었다. 처를 들일 때에는 혼인의 여섯 가지 절차인 납채, 문명, 납길, 납폐, 청기, 친영을 거치게 된다. 첩에는 양첩과 천첩이 있었다. 양인 신분의 첩은 양첩이요 천인 신분의 첩은 천첩이었다. 처에서 낳은 아들은 적자라 하고, 첩에서 낳은 자식은 서얼이라 하는데, 양첩의 자식은 서, 천첩의 자식은 얼이라 하였다.
동성애와 남녀추니
먹고 입고 자고
흰옷과 치마저고리
과거시험을 치른 뒤에 낮제가 답안지를 변방에 보내서 옷감으로 사용하게 하는 관례도 생겼다. 시험지는 원래 응시자가 지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가 귀하다 보니 낙방지를 돌려주지 않고 관청 용품으로 사용하였고 군사들의 옷감으로도 이용하였다. 종이는 군사의 옷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여러 겹을 겹치기도 하고, 누비기도 하고, 소금물에 담그기도 해서 종이갑옷도 만들었다.
깃턹 꽂은 사람들
끼니와 상물리기
과식과 쇠고기
유목민에게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살아 있을 때에나 죽었을 때에 각종 재료를 제공해주는 소, 양, 염소와 같은 되새김 동물이 적격이다. 따라서 유적지에서 돼지 사육과 관련된 증거가 발굴되면, 그 주인공들은 농경정착민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과음과 금주령
우리나라 술은 크게 탁주, 청주, 소주의 세 가지로 나뉜다. 탁주는 농사짓는 농민들이 주로 마셔서 농주라고 하거나 막 걸러서 마신다고 해서 막걸리, 흰색이라 해서 백주라고 하였다. 청주는 맑게 걸러낸 술로서 약주라고도 불렀다. 흔히 정종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청주와 우리 청주는 만드는 방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증류주인 소주는 포도주와 함게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전래된 술이다.
기근과 식인
'국물도 없다'는 말은 줄을 섰다가 국물과도 같은 죽마저 얻어먹지 못했던 사람들이 섭섭해 하던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죽을 배분하기에 이르러서는 서로 먹으려 아수라장이요 아귀다툼이 되기 십상이었다. '엉망진창'은 엉망이 된 진장 또는 징창이란 말에서 나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따뜻한 아랫목
온돌이 보편화하기 전에는 나무 판자를 깐 마루방에서 생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7세게에 들어서면서 사대부 노비나 궁궐 궁녀의 거처까지도 온돌을 사용할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땔나무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온돌의 사용은 사치라는 것으로 여겨져 숫자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온돌 숫자가 급격히 늘면서 나무와 낙엽을 마구잡이로 긁어들여 민둥산이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온돌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민둥산이 증가했고, 그에 따라 토사가 밀려와 개천을 메우는 문제가 발생했다.
처마와 뒷간
칸이란 기둥 4개로 만들어진 공간인데, 기둥 사이는 여섯 자로서 1.818m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칸을 면적으로 환산하면 3.3평방미터, 즉 1평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단위인 '평'과 우리의 전통적 단위인 '칸'의 면적은 동일했다.
질병과 돌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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