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며 - 잊을 수 없는 것들
개화의 동반자
나는 조선과 함께 쓰러졌다 - 개화기 주한 미국인의 표상 호러스 알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는 수백명에 이른다. 그들 가운데는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고 이타적인 삶을 산 이도 있지만, 제국주의의 선봉장으로 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양의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동양의 미신을 타파하고, 아울러 조선을 전근대적인 미몽에서 일깨우리라는 극단적인 사명감에 불탔다.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알렌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 의료 기관으로 세워진 광혜원에서 알렌은 순수하게 의료에 관한 관리 업무를 제공했다.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자 했던 미국 선교사 가운데 알렌이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혜원은 개원 12일 만에 명칭을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제중원이 문을 열자마자 거지부터 궁중의 높은 양반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수많은 환자가 몰려들었다. 알렌은 그들을 성심껏 치료하면서 거둔 성과를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로 정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1년 동안 무려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265명의 입원 화나 가운데 130여 명이 외과 수술을 받았다. 가장 흔한 질병은 말라이아로 전체 환자의 10%를 차지했고, 그 다음은 매독이었다. 소화불량이나 나병이 뒤를 이었다. 알렌을 중심으로 한 제중원의 조선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당시에는 금지되었던 선교 활동을 의료 선교, 교육 선교란 명목으로 시행할 계기를 만들었다.
알렌은 1891년부터 수시로 대리 공사를 맡았고, 1897년 7월에는 매킨리 정부 변리공사 겸 총영사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한국 내 미국의 이권 창출에 몰두했다. 1895년 왕실 비호 아래 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광산업자 모스에 넘겨주었고, 1896년에 경인철도 부설권, 1897년에는 전차선로 부설권까지 따냈다. 모스는 운산금과 채굴권을 헌트에게 3만 달러에 팔아버렸다. 미국은 운산금광에서 40여 년 동안 순금 80여 톤을 채굴했는데, 당시 시세로 15000만 달러, 현재 시세로 332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더 읽는 글 : 조선 광산 개발 소동
오직 백성만 위하는 병원을 - 우리나라 근대 의학의 초석을 다진 올리버 에비슨
아라비안나이트는 꿈이 아니었다 - 조선 개화의 전 부문을 주도한 파울 묄렌도르프
중립주의야말로 생존의 열쇠 - 조선의 평화를 꿈꾼 미국인 고문 월리엄 샌즈
더 읽는 글 : 이재수의 난을 무혈 진압하다
조선 사람의 미래는 영어에 있다 - 한국 최초의 영어 교사 토머스 핼리팩스
더 읽는 글 : 한국과 일본 국가를 모두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
구한말을 기록하다
한국은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 이 땅의 참모습을 예찬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서울은 암상 당하고 짓밟혔다 - 비운의 궁녀 리진을 추억한 아폴리트 프랑댕
더 읽는 글 : 프라으의 한국 알림이인가, 자객인가?
점점 드러나는, 진실은 저 너머에 - 을미사변의 자초지종을 남긴 카를 베베르
더 읽는 글 : 청·일 전쟁의 도화선 된 고종의 동학 탄압
여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세계에 알린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
일제의 야욕에 함께 맞선 벚들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신의 소명이다 -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
최초, 항일 의병을 인터뷰하다 -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프레더릭 매켄지
더 읽는 글 : 러시아, 영국의 경쟁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아리랑을 사랑했던 제3의 밀사 호머 헐버트
신은 평화를 무적의 수호신으로 삼는다 - 삼일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 프랭크 스코필드
1960년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스코필드는 그해 4월 28일자 영자신문 <코리언리퍼블릭>의 기고문에서 '추악한 족속들에 대한 정의와 용기, 자유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이번 일은 용기과 도덕적 부내의 장대한 발휘였으며 3·1운동의 영웅적 정신의 재현'이라고 극찬했다. 그와 함께 혁명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경계해야 할 4가지를 적시했다. 첫째, 악의 파괴는 정의의 확립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새로 자라나는 선의 싹을 보호해야 한다. 둘째, 전체 국민의 이익을 개인적 혹은 정치적 이익보다 앞에, 그것도 월등하게 앞에 놓아야 한다. 셋째,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모든 권위가 갑자기 약해져있는 현재의 상태로부터 건전하고도 유능한 정부가 생길 때까지의 매우 어려운 시기 동안을 우리들은 인내와 관용, 신뢰로써 지내야 하며 비평은 건설적이어야 한다. 국민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던 악은 하루나 한 해 만에 근절시킬 수 없으며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넷째, 과거에 정부의 악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사람들에 대해서 복수하는 일과, 그러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책략가들, 제국을 벼랑으로 내몰다
엘도라도, 조선의 문을 열어라 - 도굴꾼과 문화학자의 두 얼굴 에른스트 오페르트
"고대 한반도는 일본의 속국이었다" - 극동의 미국화를 꿈꾼 오리엔탈리즘의 첨병 월리엄 그리피스
더 읽는 글 : <은자의 나라 한국>의 친일과 제국주의 비판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필연이다 - 일제의 앞잡이로 한국에 취직했던 더럼 스티븐스
스티븐스는 결국 3월 23일 아침 장인환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목숨을 잃었다. 3월 27일 전명운은 병상에서 살인미수 혐의로, 장인환은 계획에 의한 일급 살인 혐의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된다. 교민 사회는 두 사람의 무죄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호소하는 한편, 변호사 비용 마련 등을 위해 경비 모금에 나섰다. 후원금은 약 7300달러를 넘어서 유능한 미국 변호사 세 사람을 선임할 수 있었다. 통역은 남가주대학에 유학 중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당시 공립협회에서는 하버드 출신의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으나,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법을 위한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3차에 걸친 예심 끝에 전명운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지만, 장인환은 '애국적인 발광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로 이듬해 1월 열린 인도 공판에서 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장인환은 그로부터 10년만인 1919년 가출옥으로 석방됐으며, 1924년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의거 이후 무죄 석방된 전명운은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을 피해 이름을 '맥 필즈'로 바꾸고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여 안중근 등과 교류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0년 결혼하여 1남2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사망하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한인 국방군 편성 계획을 미 육군사령부에 제출하는 등 항일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후 1947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94년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인환은 1919년 가석방된 후 1927년 귀국해 고향에서 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했으나 일제의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홀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75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두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영유한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원흉,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그의 특사 월리엄 태프트
더 읽는 글 : 안하무인 제국의 공주, 앨리스 루스벨트
근세 이후 서양 열강 한국 방문 약사 한국을 찾아온 서양인, 하멜에서 헐버트까지
한국 서방 종교사의 성지, 양화진 -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들, 양화진에서 안식을 얻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곽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홍기원, 살림, 2010, (101227). (0) | 2010.12.28 |
|---|---|
| [우리가 몰랐던 조선], 장학근, 플랫닛미디어, 2010, (101213). (0) | 2010.12.14 |
| [한국진보정당 운동사], 조현연, 후마니타스, 2009, (101129). (0) | 2010.11.29 |
| [말 타고 종 부리고 03],송기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09,(101030). (0) | 2010.10.31 |
| [장가가고 시집가고 02],송기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09,(101027). (0) | 2010.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