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글 -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이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제1대 태조 - 온 나라를 꽃 밭으로 가꾸려 한 왕
경복궁(궁궐 전체) : 군자의 덕이 길이 빛나도록 복을 비는 곳. 강녕전(임금이 평소 지내는 전각) : 한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항상 백성을 위해 할 일을 사색하는 곳. 연생전(동쪽에 있는 작은 전각)/경성전(서쪽에 있는 작은 전각) : 만물이 봄에 싹을 틔워 가을에 열매를 맺듯이 백성을 어질고 의롭게 다스리기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곳. 사정전(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 : 슬기로운 생각과 판단으로 정사를 보는 곳. 근정전(경복궁의 정전으로 국와의 즉위식과 공식 대례를 행하는 곳) : 아침에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사람을 찾아 등용하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는 곳. 융문루(동쪽에 있는 누각) : 문관 관료가 나라를 다스리는 곳. 융무루(서쪽에 있는 누각) : 무관이 국난을 안정시키는 곳. 정문(후에 광화문) : 국왕 이하 모든 문무 관리가 이 문을 드나들 때 항상 올바름을 생각하는 곳.
이성계가 새로운 수도로 한양을 결정한 조건 중 하나가 조운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곡을 실은 조운선이 충청도 바다에서 해난사고를 당해 수만 석의 조곡이 침수되고 수백 명의 수군이 익사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한양은 생필품의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태조는 조운을 수운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수운이란 각 지방에서 수납한 현물 조세를 배에 싣고 강과 내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하는 제도를 말한다.
[조선경국전]의 내용은 군주가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이 군주를 교체할 수 있다는 혁명론을 담고 있다. 군주가 정치를 잘못해 천명(민심)을 잃었다고 가정할 때, 새로운 통치자를 결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민심을 잃은 군주가 실덕을 자인하고 스스로 덕을 갖춘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 민심의 추대를 받은 새 군주가 덕을 잃은 군주를 폭력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조선경국전]은 백성의 귈기나 폭력으로 통치자를 교체하는 간접혁명론을 선호하고 있다. 응천순인이란 하늘과 사람을 동원동류(같은 원천 같은 무리)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즉, 군주가 통치를 잘못하면 백성은 군주를 원망하게 되고 그 원망이 하늘을 감응시켜 하늘이 홍수와 가뭄을 내려 군주의 악정을 벌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재해가 있으면 군주는 "하늘이 자신의 잘못된 정사를 질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근신하고 반성하여 올바른 정치로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선경국전]은 백성이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군주를 교체하는 폭력혁명보다 응천순인 이론을 이용하여 군주에게 선정을 촉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제2대 정종 - 왕위보다 격구를 좋아한 왕
제3대 태종 -몸과 마음이 강건한 왕
신문고는 처음에 의정부가 1401년(태종 1년)에 등문고라는 명칭으로 설치할 것을 건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설치된 등문고는 1402년(태종 2년) 1월 신문고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조건을 왕명으로 공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의 득실과 민생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과 백성의 걱정거리를 해소하는 방안을 의정부에 건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신문고를 치도록 하라. 신문고를 친 후 건의한 내용이 받아들일 만하면 받아들여 시행할 것이다. 비록 채택되지 않는 의견이라 하더라도 문책하지 않는다. 둘째, 억울한 일이 있는 자로서, 한양 거주자는 한성부에, 지방 거주자는 관할 수령 및 감사에게 민원을 내되, 지방 수령이 조치해주지 않을 경우 사헌부에 다시 민원을 내고, 사헌부에서 조치해주지 않을 경우 신문고를 치도록 하라. 그러면 즉시 조치해줄 것이다. 셋째, 신문고는 반드시 위와 같은 절차를 밟아서 쳐야 한다. 만일 절차를 밟지 않고 신문고를 치면 법에 따라 처벌받을 것이다. 넷째, 나라를 위태롭게 할 반역 정보를 알게 되거나, 종친과 훈구 대신(훈구 공신)을 모함하여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정보를 입수한 자는 즉시 달려와서 신문고를 치도록 하라. 그것이 사실이면 전답 200결과 노비 20명을 상으로 주고, 현직에 있는 사람은 그 직책에 3품을 올려주고 무직자의 경우는 6품 관직에 임명할 것이다. 공사천민일 경우 양민이 되게 하고아울러 7품 관직에 임명할 것이다. 또한 피의자의 집과 재물, 소유하고 있는 노비, 소와 말 같은 가축을 신고자에게 줄 것이다. 다만 무고한 자는 무고죄로 다슬릴 것이다. 신문고를 설치한 목적은 국가 전복과 국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제4대 세종 - 소리의 색깔까지 구분할 줄 아는 왕
훈민정음은 창제된 이후 크게 네 방향으로 이용되었다. 첫째, 한자로 기록된 중요 서적을 국문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이용되도록 했다. 둘째는 행정실무를 맡은 서리들에게 훈민정음을 익히게 하여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국가 시책을 이해시킬 수 있게 했다. 셋째는 문학 창작 활동에 이용되도록 했다. 훈민정음의 또 다른 공헌은 한자의 발음을 우리 현실에 맞게 바로잡은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세종의 비밀작품이다. 그래서 군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던 사관들마저 그의 은밀한 연구를 눈치 채지 못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단 한 줄도 없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자모 28자를 창제한 후 비밀연구기관인 언문청을 설치하고 소수의 연구워을 발탁하여 음운을 연구하게 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언문청이 폐지되자. 그곳에 소속되었던 연구원들이 집현전으로 전근되었다. 집현전은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기관이며, 언문청은 세종의 밀명에 의해 설치되고 한글의 기본이 된 음운을 연구한 기관이다.
제5대 문종 - 주체성 있는 강한 나라를 꿈꾼 왕
제6대 단종 - 승천하지 못한 용
제7대 세조 - 가야금 타는 왕
제8대 예종 -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끄트로 20세에 요절한 왕
제9대 성종 - 독서를 가장 많이 한 왕
조선시대에 와서 처와 첩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많은 사람 앞에서 혼례를 올렸다면 처이고, 혼례를 치르지 않고 동거했으면 첩이다. 둘째, 본처가 있는데 다시 여자를 얻었다면 그 여자가 첩이다.
제10대 연산군 - 110여 편의 자작시를 남긴 왕
옛날 임금들은 내복약을 되도록 먹지 않았다. 임금과 병증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 궁중의가 처방한 약을 먼저 먹여 차도가 있으면 그제야 약을 복용했다.
연산군 2년(1496년) 성절사가 사탕, 채단, 주독을 푸는 빈랑과 괘양, 그리고 달콤한 시럽인 감리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사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제11대 중종 - 철저한 유교주의자
조선은 자급자족의 농업국이었다. 조선 초기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궁궐에 논과 밭을 만들어 국왕이 그곳에 씨를 뿌리고 기르는 모범을 백성에게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궁인들도 궁궐 빈터에 채소를 가꾸었다. 임금의 농법 장려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궁인들이 가꾸는 채소는 궁궐 소유가 아니라 궁인 개인 소유였다. 그래서 궁인들은 저마다 빈터만 나면 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고 거름을 뿌렸다. 거름이란 사람의 분뇨밖에 없었다. 궁인들은 채소만 먹을 수 없어 육식을 위해 궁궈레 양을 방목하기도 했다. 양의 수가 점차 늘어나자, 양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다가 궁궐 방 안까지 들어가 똥을 싸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급기야 분뇨 냄새로 임금의 문묘 참배가 연기되기도 했다.
제12대 인종 -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보위에 있었던 왕
제13대 명종 - 귀 여린 왕
제조두에 사는 박손이 동료 1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물도 내리기 전에 갑자기 폭풍이 불어닥치자, 풍랑은 그들을 멀고 먼 바다로 몰고 갔다. 그들이 파도에 떠밀려 도착한 곳은 유구국이라는 섬나라였다. 당시 조선은 유구국과 교린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구국은 종종 사신과 함께 토산품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은 유구국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은 유구구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온 박손 일행의 유구국 이야기는 조선의 교린정책 수립에 큰 도움을 주었고, 유구국 사람들이 박손 일행을 배에 태워 남중국 복건성으로 보냈을 때 그곳이 농사철이었다. 일행이 복건성 들판을 지나고 있을 때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이 본 것은 조선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수차였다. 박손은 귀국하자마자 그 수차를 그림으로 그려 목수에게 그것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여 농가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수차가 완성되었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력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을 장려했다. 당시 세쌍둥이 이상 출산할 경우 조정이 쌀과 콩 10섬을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창고가 빈 조정이 세쌍둥이를 낳은 백성에게 쌀과 콩 10섬을 지급할 수 없었다. 호조에서 다산한 두 여인에게 쌀 한 가마를 내려 다산을 위로하자고 건의했다. 보고를 받은 어린 왕 명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례대로 싸롸 콩을 지불한다고 해서 국고가 당장 완전히 바닥이 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조선시대에 쌀 10섬이면 다랑논(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되어 있는 좁고 긴 논) 열 마지기를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쌀을 아이를 많이 낳은 사람에게 지급한 것은 노동 인구의 확보라는 정부정책의 일환으로 정부가 백성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다. 정부가 백성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린 왕 명종의 단호함에서 배워야 한다.
이언적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4세 어린왕에게 성심론을 거론하며 '군주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가르쳤다. 임금이 지녀야 할 성심론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임금이 어진 사람을 예우하되 겉으로 공경하고 마음속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성심이 아닙니다. 둘째 명령은 명백하게 내리면서 마음속에서 좋아함과 싫어함이 다르면 그것은 성심이 아닙니다. 셋째, 사대부를 접견할 때는 학문을 논하면서 궁중을 혼자 있을 때는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심이라 할 수 없습니다. 넷째, 남이 있을 때 효도와 우애의 행동을 하고 집에 혼자 있을 때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심이 아닙니다.
제14대 선조 - 서손에게 왕의 길이 열리다
제15대 광해군 - 곡절 많은 삶을 산 불운한 왕
제16대 인조 -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한 왕
제17대 효종 - 놀지 않는 왕
효종이 즉위한 지 2개월로 접어들었을 때 대마도주가 경상도 관찰사에게 사람을 보냈다. 조선 토종 동물 아훕 종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왜인의 말에 의하면 일본 막부가 국립 수목원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진귀한 새와 짐승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매, 개, 비둘기, 메추리, 앵무새, 고슴도치, 원앙, 굴속에 사는 제비, 산담비 등을 구해가면 일본 사람들이 매우 신기해할 것이라는 것이 일본 사신의 말이었다. 보고서를 받은 효종 임금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일본이 원하는 것을 구래 보내라고 지시했다.
제18대 현종 - 왕이 예론에 병들다
제19대 숙종 - 당쟁을 왕권강화에 이용한 왕
제20대 경종 - 당쟁에 휘둘린 병약한 왕
제21대 영조 -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대찬 왕
제22대 정조 - 자주 자립의 나라를 지향한 왕
제23대 순조 - 경로잔치를 자주 마련한 왕
제24대 헌종 - 내우외환의 한가운데에 있던 왕
제25대 철종 - 이름뿐인 왕
전정은 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세 징수 정책을 말한다. 토지세 징수 정책은 15세기에 책정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질이 기름지고 척박한 정도에 따라, 또 농사의 풍흉에 따라 해마가 과세액이 달라지는 이 방법은 조선 후기부터 전세가 정액화되었다. 18세기 중렵, 속대전의 제정과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에 대해 매년 1결당 논은 쌀 4두, 밭은 콩 4두를 징수하게 되었다. 토지 1결당 전세 4두는 대단히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보용이었고 실제로는 43종류의 부가세가 붙었다. 부가세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자인 지주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토지를 빌려 농사를짓는 전호(소작인)가 물고 있었다. 전세에 대한 부가세의 증가로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는 실정에서 궁궐 소유의 궁방전, 왕실묘지 관리전, 지방관아 운영전 등 면세전은 계속 증가했다. 군정은 군적에 따라 번상볍을 뽑고 보포를 정급해주는 병무행정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번상병들이 보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 받는 관례가 생겨나 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실제로 군포를 부과하여 거두는 수취제도로 변질되었다. 농민이 부담할 군여가는 포 1필이었는데, 이것은 쌀 6두에 해당했다. 가난한 농민이 1년에 쌀 6두를 부담하기란 쉽지 않았다. 환정이란 춘궁기에 정부가 비축미를 이자 없이 대출하고 가을에 거어들이는 행정을 말한다.
제26대 고종 - 개화를 열망했으나 백성을 설득하지 못한 왕
제27대 순종 - 망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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