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감사의 글
1.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동
이집트 갤리온
고대 이집트인들은 최초의 해상세력 투사, 최초의 해상 봉쇄 그리고 최초의 해전이라는 기록을 세울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군함 건조기술이 집약된 갤리온이 있었다.
청동기 시대와 만곡도
수메르인의 사륜전차
최초로 바퀴를 만들어낸 수메르인은 이 바퀴를 이용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바퀴 네 개짜리 전투용 마차를 만들어냈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수메르인의 사륜전차는 최초라는 점 외에는 별로 뛰어난 점이 없는 신무기였다. 수레에 가까운 형상의 이 전차는 내구성이 취약했고 장거리 주행은 거의 불가능 불가능했다. 바퀴는 살이 없는 원판 형태로 투박하고 무거웠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심하게 더렁거리거나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기동은 오직 평지에서만 가능했고 모든 바퀴들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향 전환도 쉽지 않았다.
아카드 사르곤 대왕과 이륜전차
아카드인의 전차는 2마리의 말이 끄는 1대의 전차 위에 1명의 궁수, 1명의 마무, 1명의 창병이 탑승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궁수는 장거리에서 적을 상대하고 도끼, 창, 단검, 몽둥이 등 각종 접근 무기로 무장한 창병은 전차가 적진을 돌파하거나 퇴각하는 적을 뒤쫓을 때 활약했다. 이렇게 3명이 한 조를 이루는 방식의 전차는 이후 지중해 동부, 인도, 중국 등 세계 주요 문명국 전차의 원형이 되었다.
■ 더 읽을 거리 | 기억의 저편으로 잊힌 아카드인
사계의 왕 나람신과 복합궁
활은 고곡학적 증거들을 통해 최소 B.C. 14000년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이 사냥도구가 아닌 전쟁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B.C. 12000년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 B.C. 8000년 전기 신석기 시대 사이로 추정되며 이때 최초의 단궁이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단궁은 활대 전체의 길이가 100cm 이하이고 무게는 0.5~0.8kg으로 대부분 1kg을 넘지 않는 작은 활을 지칭하며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규격화, 대량생산된 것이 특징이다. 아카드인이 만들어낸 또 다른 신무기인 복합궁은 나무와 동물의 힘줄 뼈 등 여러 가지 재질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서 더 멀리까지 화상을 쏘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활이다. 물론 활 자체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 시위를 당기는 데도 더 큰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복합궁은 능숙하게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한 훈련과 시간이 필요했다.
투트모세 3세와 이집트 전차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투트모세 3세는 전차와 보병을 각각 별도의 전력으로 운용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전력으로서 전차와 보병이 조화를 이루는 전차+보병 합동전술을 확립 발전시켰다. 이집트는 B.C. 1600년경 힉소스인이 침입해 오기 전까지 동시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처럼 발달된 무기체계를 갖지 못했다. 이후 말과 전차를 비롯한 복합궁, 개량된 전투용 도끼, 발달된 요새 축조술 등 힉소스의 전쟁 기술을 받아들인 이집트인들은 이후 힉소스인을 몰아내고 신왕국(B.C. 1560~1085년)을 건설했다. 특히 힉소스 침공 당시 전차부대의 위력을 직접 체험했던 이집트인들은 상비군의 주력을 전차부대로 구성할 정도로 강력한 전차전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전차와 보병의 합동전술이 확립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에 이르러 절정이 이른다. 이후 전차와 복합궁이 전장의 왕자가 된 형태의 전투방식은 B.C. 15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신기술로 무장한 아리아인이 인도 정복을 시작하면서 인도에 전파되고 B.C. 1200년경에는 중국의 은나라에 전파되어 은나라와 주나라가 주변 부족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파라오의 검 코피시
최초의 금속갑옷 스케일 아머
■ 더 읽을 거리 | 착용하는 방패, 갑옷
아시리아의 기병
전차의 기동이 직선적이고 평면적이었다면 기병의 기동은 입체적이었고, 전차는 높은 운용 비용에 비해 운용지역에 제한이 있었지만 기병은 그렇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장창 사리사
아시리아의 공성망치
파라오 권력의 상징 철퇴
아시리아 군대의 슬링
히타이트 군대의 창
최강의 생물병기 전투 코끼리
B.C. 217년 팔레스타인 남부 가자 근처 라피아에서 셀레우코스(B.C. 300~64)의 인도코끼리들과 프톨레마이오스(B.C.305~30)의 아프리카코끼리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코끼리들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머릿수에서 우위를 점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도코끼리들이 승리했다. 아프리카코끼리와 인도코끼리가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셀레우코스의 지배자들이 재발리 인도 귀족들과 밀약을 맺고 인도코끼리와 조련사들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이에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배자들도 에티오피아에서 잡아온 아프리카코끼리들을 사육해 맞대응했다.
워 피크
2. 고대 그리스
2. 고대 그리스
최초의 표준 군함 펜티콘터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인은 최초의 표준 군함 펜티콘터를 대량으로 건조해 에게 해를 제패하고 군함의 역사에 일획을 그었다. 미케네인들이 건조한 펜테콘터는 군함 자체의 성능은 평범했지만 설계, 자재, 건조방법 등을 통일함으로써 빠르고 쉽게 대량으로 건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스의 방패 호플론
■ 더 읽을 거리 | 영화 〈300〉, 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
살라미스 해전과 트라이림
디미트리오스의 헬레폴리스
장갑보병을 몰락시킨 아이톨리아의 투창병 펠타스트
디오니시우스의 노포 가스트라페테스
디오니시우스 1세의 투석기
3. 로마 시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른 제국들과 달리 로마제국의 병사들은 말 그대로 '걸어서' 전 유럽을 정복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로마의 군사력은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는 보병부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빈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의미이다.
로마의 검 글라디우스
■ 더 읽을 거리 | 로마 검투사의 역사
로마 기병의 검 스파타
■ 더 읽을 거리 | 로마군단과 기병의 역할
로마군의 기병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B.C. 218년에서 201년까지 벌어진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휘하의 누미디아인 기마 창병들이었다. B.C. 14년부터 101년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B.C.157~86)에 의해 단행된 일련의 군사개혁은 로마군단의 모습을 근간에서부터 변화시켰다. 군단 기병대가 폐지된 대신 모든 기병과 경보병은 동맹국의 병사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외적으로 로마군단을 더 강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로마의 군사적 전통을 와해시키고 군기와 효율성을 파괴했다. 결국 로마 청년들의 병역기피와 인력난은 더 많은 이방인들의 로마군 입대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로마군단 전체의 질적 저하와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로마는 보조군 제도를 통해 기병 전력과 보병 전력을 보충했는데 특히 보조군 기병대는 순수한 기병으로만 구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보조군 제도는 로마화 정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국경 속주나 국경 밖의 토착민들이 이 보조군에 입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를 배우고 로마식 사고바익에 동화되었다. 기병들이 제대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얻을 때 이들은 이미 철저한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보조군은 언제나 정예 로마군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로마의 오단노선 퀸퀴어림
로마 해군의 상징 코르부스
1회용 투창 필룸
■ 더 읽을 거리 | 자기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은 비운의 장수, 곽회
현대 바리케이드의 원형 셀브스 & 시프스
현대 지뢰의 원형 릴리아 & 스티물리
릴리아가 현대적 개념의 대전차 지뢰 혹은 일반 지뢰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면 시티물리는 병사의 특정 신체부위를 공격해 무력화시키는 대인지뢰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군이 사용한 릴리아와 스티물리는 현대적 개념의 지뢰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최초의 거점방어 무기이며 B.C. 1세기에 20세기 초반의 참호전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더 읽을 거리 | 『갈리아 전쟁기』
다목적 전투함 렘보스
로마 해군의 다목적 전투함 리버니안
로마의 방패 스큐툼
그리스의 불
비잔틴 해군의 상징 드로몬
고트족 중장기병과 등자
등자란 사람이 말 위에 올라타거나 말을 타고 다닐 때 말의 등에 얹어 놓는 안장에 매달아 발을 걸칠 수 있게 만든 승마기구다. 그 원리나 구조는 단순하지만 등자의 등장은 과거 특별한 기술과 남다른 감각을 요했던 승마를 보다 쉽고 대중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기병이 말을 탈 때 두 발을 디딜 수 있어 더 안정된 자세로 활을 쏘고 칼이나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치면 같은 조건에서도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고 더 무거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상태에서도 안장 위에서 몸을 지탱하거나 적과 격돌할 때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등자의 존재가 중장기병의 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등자는 B.C. 4세기경 동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며 현재까지는 중국에서 발굴된 금속 등자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 고트족 중장기병이 거둔 보병에 대한 첫 승리는 중세 기사의 전형이 된 중장기병의 탄생과 중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중장기병은 14세기 영국의 궁수와 스위스의 창병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전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기병의 시대로 불리는 전성기를 열었다.
전투용 도끼
투척도끼 프랑시스카
베르툼
다트게임의 원형이 사실은 중세 유럽의 다트라는 작은 투창이었고 그 투창의 기원이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한 투창 베르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한 베르툼은 뛰어난 성능과 역사를 뛰어넘어 두 번이나 표준 무기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잊힌 비운의 무기다.
비잔틴 제국의 중장기병 카타프락토스
게르만족을 비롯한 수많은 이민족의 로마군 입대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로마군 전통의 상실과 단절을 의미했지만 반대로 새로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고트, 헤룰리, 롬바르드 등에서 차출한 중장창기병 뿐만 아니라 과거 야만족이라 불렸던 훈족의 궁기병도 로마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카타프락토스는 화력·기동성·훈련 측면에서 당대 최강의 기병으로 거듭났고 중장보병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비잔틴 제국의 중장기병 카타프락토스는 당대 최강으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으며 중세 봉건사회의 중심이 되는 군주와 기사의 원형을 제시했다.
4. 중세 유럽
바이킹 장선
■ 더 읽을 거리 | 바이킹 침공
■ 더 읽을 거리 | 유명한 바이킹 장선
색슨족 고유의 단검 색스
바이킹 검
바이킹 검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진짜 이유는 서양 중세 암흑기에 단접방식으로 만들어진 가장 대표적인 검이기 때문이다. 잔접이란 서로 다른 2개의 금속재료를 융용점 부근까지 가열하여 가압접합하는 가공법으로 중세 시대에 북유럽에서 유행한 철제무기 제작법이다. 단접은 똑같은 작업을 최소 수백 회에서 최고 수천 회 반복해야 하는 단순하면서도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장인의 실력에 따라서 완성된 무기의 성능도 큰 차이를 보였다. 망치로 두드려 만들었기 때문에 해머단접이라고도 하며 이 기법으로 완성된 무기는 표면이 마치 대리석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쿼터스태프
유럽에서 전쟁무기의 양극화 현상은 상당 기간 오래 지속되었다. 일례로 로마군단의 무장과 갑옷은 장군에서 말단 병사까지 거의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 지휘관과 말단 병사의 무장과 갑옷이 그들의 신분 격차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국왕의 친위대나 일부 정규군의 무장은 더욱 강력해진 반면 대다수의 정규군이나 일반 농민들로 구성된 예비군의 무장은 오히려 더 빈약해졌다.
절대 왕권의 상징 커타나
샤를마뉴의 중장기병
석궁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최초의 신사 협정은 990년 중세 교회가 남부 프랑스에서 처음 시행한 '신의 휴전협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의 휴전협정에 석궁(크로스보우)의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사실상 최초의 살상무기 사용금지 규정이라 할 수 있다.
■ 더 읽을 거리 | 제네바 협약
■ 더 읽을 거리 | 최초의 신사협정 - 신의 휴전협정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최초의 신사협정은 중세 교회가 제도권 내에서 시행한 신의 휴전협정으로 모든 신사협정은 이 협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신사협정은 십자군전쟁을 통해 빛을 발했으며 십자군과 회교도들은 휴전규범에 따라 토요일 정오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했다. 휴전 기간은 훗날 수요일 밤부터 월요일 새벽까지로 연장되었다. 신의 휴전협정은 중세 교회가 사사로운 약탈 전쟁을 통제하고 금지하기 위해 새롭게 시도한 정책이다. 신의 휴전협정은 중세 교회가 사사로운 약탈 전쟁을 통제하고 금지하기 위해 새롭게 시도한 정책이다 사투(사적인 전투) 금지령은 불필요한 분쟁과 약탈을 사전에 예방함으로써 비무장 계층, 즉 여자와 농부, 성직자와 순례자를 보호하고 봉건사회의 기반인 농업사회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은 프라으 중동부 부르고뉴 클뤼니 지방 한 수도원의 명령에 따라 990년 남부 프랑스에서 처음 발령되었고, 1027년에는 주말에는 전쟁을 금지시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후 1042년에는 정복왕 월리엄에 의해 노르망디 지역까지 휴전협정이 도입되었고 이후 유럽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지령은 점점 더 정교한 규정으로 다듬어졌고 결국 중세 유럽의 교회가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12세기의 왕이나 귀족들은 파문당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한 해의 3/4은 전투를 삼가야만 했다.
롱 보우
미늘창 할베르트
타넨베르크 건
최초의 대포 포드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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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반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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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선전문학 작품 『롤랑의 노래』
전투용 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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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범선 카락
리볼데퀸
5. 아시아
5. 아시아
훈족의 활
페르시아의 검 샴쉬르
라지푸트족의 소선 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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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 전사의 상징 쿠크리
노
연노
화창
돌화창
■ 더 읽을 거리 | 철의 장막 vs 죽의 장막
화전
다발화전
화총
신화비아
화룡출수
맹화유궤
진천뢰
6. 오세아니아·북미
6. 오세아니아·북미
부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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